홍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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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우
洪鍾宇
大韓帝國 의 敎理

身上情報

홍종우 (洪鍾宇, 1850年 [1] 11月 17日 ~ 1913年 )는 朝鮮 의 文臣이며 大韓帝國 의 勤王主義派 政治人이다. 朝鮮 最初의 프랑스 留學生이다. 1894年 中國 상하이 에서 急進 開化派의 巨頭인 김옥균 을 狙擊하여 暗殺했다.

그 뒤 過去에 及第하여 出仕하였으며, 皇國協會 의 會員으로 開化派 獨立協會 의 活動을 彈壓하였으며, 李承晩 을 逮捕하여 裁判하기도 했다. 皇國協會에 섰던 人物로 守舊派로 알려졌으나 그는 本來 開化派였다. 者는 成熟(聲肅), 號는 友情(羽亭), 本貫은 南陽(南陽) 이다. 嘉善大夫 議政府 參贊에 追贈된 홍재원(洪在源)의 아들이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홍종우 肖像畫

不遇한 人生 [ 編輯 ]

南陽洪氏 남양군派 32歲손으로 할아버지는 弘治섭(洪致燮)이고, 아버지는 議政府參贊에 追贈된 홍재원(洪在源)이며, 어머니는 全州李氏의 외아들로 京畿道 안산군 에서 태어났으며, 全國을 떠돌다 古今島 에서 어린 時節을 보냈다고 記錄돼 있다. 黃玹 매천야록 에 따르면 '洪鍾宇는 어린시절에 古今島에서 不遇하게 지내왔다.'라고 記錄돼 있다. 한때 그는 '古今島에서 쑥물을 버리는것도 아까워했을만큼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왔다.'라고 大韓帝國 祕書院日記에서도 記錄되어 있다. 또, 濟州道 에서 火田民과 함께 살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靑年期 [ 編輯 ]

프랑스 留學 [ 編輯 ]

1886年 母親喪을 當한 後 日本으로 건너가 아사히 新聞 社에서 植字工으로 일하면서 프랑스語와 日本語 等을 익혔다. 國際 新聞 等을 接하며 海外에 對한 識見도 더 넓혀갔다. 2年여 간 日本에서 일해 배삯을 모았다. [2] 洪鍾宇는 프랑스에 最初로 留學한 朝鮮人이다.

日本에서 資金을 모은 그는 自己 스스로 費用負擔하여 프랑스 파리로 留學을 떠난다.(1890년) [2] 1890年 마르세이유에 到着하였다. 當時 40歲의 中年 留學生 洪鍾宇는 프랑스 留學期間동안 列强 帝國主義 勢力들의 本質에 對해 알기 始作하였고, 기메博物館(프랑스 國立기메東洋博物館, Muse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 等에서 일하면서 《 春香傳 》, 《 沈淸傳 》, 《直星行年便覽》을 프랑스語 로 飜譯하였다. [2] 또한 그 博物館에서 처음 設立된 韓國 文化 展示室을 만드는 데 큰 役割을 하였다. [3] (→ 韓佛 關係 ) 김옥균 이 日本 亡命 時節, 斷髮을 하고 이와타 슈사쿠로 改名한데 反해 洪鍾宇는 파리 滯留 時節 늘 韓服을 입고 다녔다. 金玉均은 日本을 朝鮮의 나아갈 모델로 보고 日本의 도움을 받아서 近代化를 推進하려고 했었으나, 洪鍾宇는 西歐 文明을 익히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帝國主義의 野心을 警戒했다. [4]

도일과 金玉均 暗殺 [ 編輯 ]

金玉均 暗殺 當時 日本의 어느 新聞社에 실린 記事와 揷畵

바로 그런 性向으로 洪鍾宇는 甲申政變으로 自身의 一族을 殲滅하려한 金玉均 等 急進開化派에 對한 膺懲의 機會를 노리고 있던 민영소 의 側近인 이일직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는 日本 征韓論의 具體的인 履行을 追求하는 겐요사 創設者 도야마 미쓰루 의 後見과 影響 下에 있는 김옥균 이 朝鮮의 獨立 近代化에 深刻한 惡影響을 끼치고 있음을 보고 민영소 는 홍종우로 하여금 金玉均을 暗殺하도록 敎師하였다.

梟首되어 楊花津 에 내걸린 金玉均의 需給

洪鍾宇가 金玉均에게 接近한 方法은 簡單했다. 먼저 淸의 外交部 協助를 받아, 當時 李鴻章 麾下의 朝鮮 駐在 淸國 公使 袁世凱(慰安 스카이)가 '東洋 平和를 함께 論議하고 싶다'며 金玉均을 請으로 招請한다는 書翰을 김옥균에게만 띄우게 한다. 그러면서 홍종우를 同伴者로 推薦했다. 洪鍾宇는 金玉均의 好感을 미리 사두고 있었다. 그의 프랑스 料理 솜씨는 어찌나 氣가 막혔던지 김옥균 本人은 勿論 그의 日本 親舊들 입맛까지 당길 程度였다. 開化派 性向에 프랑스 留學까지 갔다 왔다는 詐欺性이 가득한 履歷等 으로 洪鍾宇는 金玉均의 疑心을 사지 않을만큼 여러모로 權謀術數에 能한 人物이었던 것이다. 그는 金玉均의 中國旅行에 同行, 이듬해 상하이 에 있는 호텔 뚱허양행(東和洋行)에서 리볼버 拳銃으로 金玉均을 狙擊, 暗殺하였다.

金玉均은 홍종우를 完全히 自己 사람으로 생각했다. 洪鍾宇는 그만큼 暗殺 意圖를 徹底히 숨기고 僞裝 接近에 完璧하게 成功했다.

政治 活動 [ 編輯 ]

釋放과 歸國 [ 編輯 ]

곧 이어 淸나라 官員 警察에 逮捕, 拘禁되는 形式的인 模樣새를 取한 後, 미리 洪鍾宇의 身上 處理를 廳과 調律하고 있던 朝鮮 의 '釋放 交涉'으로 풀려나, 朝鮮 으로 歸國하였다.

朝鮮 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守舊派 大臣들로부터 歡喜와 歡待를 받았지만, 홍종우 自身은 '小生의 本뜻은 여러분들 個人의 敵을 討滅한 것이 아닙니다. 但只, 그는 國家의 公的이기 때문입니다.'라며 守舊派들의 歡待와 歡喜를 斷乎하게 拒絶하는 模樣새도 取한다. 洪鍾宇가 돌아오자 高宗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는 逸話가 있을 程度였다. 1894年 洪鍾宇의 '擧事'에 當時 朝廷이 隱密히 介入하고 있었음을 暗示해주는 대목이다. 그 後, '特採'次元이라고 解釋이 可能한 바 式年文科에 丙科로 及第, 校理(校理)가 되었으며, 高宗 의 寵愛를 받으며 新任을 얻어 要職에 올랐다.

勤王主義 政治 活動 [ 編輯 ]

1898年 獨立協會 萬民共同會 (萬民共同會)를 開催하며 中樞院 官制 改編 과 貴族 中心의 上院 設立을 主張하자 平民 中心의 下院 設立을 要求했으며 獨立協會의 外勢 依存的인 論調를 攻擊하여 外勢로부터 完全한 獨立을 主張하였다 , 그는 이기동 (李基東), 길영수 (吉泳洙) 等과 함께 皇國協會 를 組織, 褓負商 을 動員하여 獨立協會의 活動을 妨害하였다. 特히 徐載弼, 尹致昊等의 親外勢的 機會主義를 攻擊하여 朝鮮 自體로서의 産業發展과 自力自强의 길을 摸索했다. 또한 逆謀罪로 逮捕한 開化派 人士들을 裁判하는데 그 中에는 李承晩 이 있었다. 洪鍾宇는 監理使로 李承晩事件의 裁判을 맡는다. 처음에 그는 李承晩 에게 死刑을 求刑하였으나 刑을 減하여 終身刑에 笞刑 100臺를 宣告하였다.

洪鍾宇는 勤王派의 한사람으로 活動하며 皇帝權을 絶對化하는 作業에 着手하였고 下院의 設立을 통해 制限的 立憲君主制를 摸索했으나 時代錯誤的이고 外勢依存的 共和制 計劃을 事前에 遮斷 粉碎하였으며 萬民共同會 와 親日的인 獨立協會 의 活動을 監視하였다. 그리고 大韓帝國 의 主要 法規들을 모아 '法規類便 속일'을 編纂, 發刊하였다. 이는 主要 法規에 對한 案內와 法規 解說集으로 活用되었다.

그는 皇國協會 의 主要한 人物이었다는점 때문에 守舊派 人事로 評價받고 있지만, 實際로 그는 外勢依存的인 開化派와는 달리 近況注意를 强調하는 自主的 開化派 人士였다. 그는 數次例 '外國軍隊 撤收'와 '防穀令 實施', '商工業 育成責', '外國公使의 內政干涉 反對' 等을 主張하였고, 大韓帝國 皇帝 高宗한테 이러한 主張의 內容인 上疏를 11 次例 올리곤 했다.

最後 [ 編輯 ]

그러나, 1900年代 되면서 大韓帝國 內에서는 日本帝國 의 影響力이 漸漸 커져가자, 洪鍾宇는 漸次 閑職으로 밀려나게 된다. 日本帝國 의 視角에서는 '洪鍾宇는 김옥균 을 暗殺한 者'라고 낙인찍혔기 때문에 決코 홍종우를 놔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03年 (光武 8年)에 親日 管理勢力들이 本格的으로 得勢를 하면서 洪鍾宇는 主要 官職에서 밀려나 濟州道 牧師로 左遷되었고, 이 마저도 얼마 못 가 結局 濟州道 牧師 官職마저 辭任하고 落鄕하였다. 그가 상하이 에서 김옥균 을 暗殺한 張本人이라는 것이 朝鮮 社會에 알려지면서 그는 殺人者라는 非難에 直面하였다. 그러나 그는 泰然히 自身의 擧事를 正義와 愛國心에 依한 것이라고 抗辯하였다.

金玉均은 우리나라의 宰相으로 大逆不道한 事件에 連累되어 몇 百 名을 죽였다. 그런데 그는 日本으로 逃避해 이름까지 바꿨다. 나는 金玉均을 죽여 王의 마음을 便하게 해드린 것이다.

日本 日本 禍와 日本 社會에 比較的 友好的이었던 김옥균 을 爲人으로 추켜세우고, 그를 暗殺한 洪鍾宇를 테러리스트로 埋葬했다. [5] 그 以後 洪鍾宇의 末年에 關한 記錄은 알려진바가 없다. 一說에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어렵게 살아갔다고 하지만 仔細한 行跡이나 記錄이 없다. 洪鍾宇는 日本帝國 大韓帝國 倂合 以後인 1913年 에 죽었다. 이도 確認된 바는 없으며 1905年 以後의 行跡은 制限的으로 日本 官憲의 記錄에 남아 있느나 그도 믿을 바는 안된다. 오히려 1906年 李容翊의 유럽行에 同行하여 1906年에 豫定됐던 헤이그 萬國 平和會議에 役割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李容翊의 與圈이 프랑스 領事館에서 發行한 프랑스 旅券이었고 1907年 李容翊의 死亡 以後에 洪鍾宇의 行跡이 制限的이나마 把握된다. 1909年 블라디보스톡으로의 移住를 計劃했으나 挫折된 것으로 보인다.

咀嚼 [ 編輯 ]

著書 [ 編輯 ]

  • 《直星行年便覽》
  • 《法規類便 속일》

曆書 [ 編輯 ]

  • 《春香傳》프랑스語 飜譯本
  • 《沈淸傳》프랑스語 飜譯本, (Le Bois sec refleuri), 1895 Gallica

評價와 批判 [ 編輯 ]

批判 [ 編輯 ]

기타 [ 編輯 ]

그의 김옥균 暗殺 事件이 " 淸日戰爭 의 原因을 提供했다"는 視角도 있다. 金玉均 暗殺 計劃을 미리 感知한 쪽은 日本 政府였으며, 그의 暗殺을 애써 沮止하지 않았던 것은 事實이다. 한때 金玉均을 近代化의 先驅者 云云하며 全幅的으로 支援한 日本이었지만, 金玉均이 政變에 失敗하고 刺客에게 쫓기는 몸이 되자 찬밥 對하듯 했다. 卽 귀찮은 存在였던 셈이다. 朝鮮의 近代化에 日本을 利用하는 데만 뜻이 있었던 金玉均이 朝鮮의 日本植民地化 野慾에도 태클을 걸 것임이 분명했다. 金玉均이 상하이에서 洪鍾宇의 손으로만 암살당하자 日本 政府와 言論은 一齊히 호들갑을 떨기 始作했다. 마치 暗殺 當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그를 哀悼하고, 義捐金을 모으고, 屍體 收拾 問題를 協議하는 等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自己들의 朝鮮 內 立地를 强化하기 위한 言論 플레이이었을 뿐이다.

한便 朝鮮은 金玉均 暗殺이 國家의 傾斜라고 큰 意味를 附與했다. 洪鍾宇가 돌아오자 高宗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는 逸話가 있을 程度였다. 洪鍾宇는 單番에 實力派 皇室 官僚로 浮上한다. 그로서는 프랑스에서 외롭게 工夫하며 朝鮮을 近代 國家로 발돋움시키겠다는 決然한 意志를 實行에 옮길 좋은 機會였을 것이다. 상하이에서 暗殺 事件이 일어난 것은 金玉均을 '親日'로 看做했던 請이 그의 暗殺을 도운 結果였다. 그리하여 日本은 金玉均은 日本人이나 다름없고, 日本 旅館에서 事件이 일어난 만큼 事件 管轄은 日本에 있다고 主張 해가며, 暗殺을 '放置'韓 淸國 政府를 猛非難했다. 그러나 事實上 金玉均 暗殺의 共謀者나 다름 없던 청은 洪鍾宇의 身元을 確認한 다음 朝鮮 政府의 要求 대로 홍종우와 김옥균 屍身을 朝鮮에 넘겼다.

朝鮮과 청은 日本의 속내를 꿰뚫지 못했다. 萬國公法과 같은 허울 좋은 世界 共存論을 盲信하며 그것이 日本帝國主義의 朝鮮 浸透를 막아 주리라고, 그리하여 結果的으로 淸의 朝鮮에 對한 宗主權을 維持시켜 주리라고 安易하게 豫想하고 있었다. 朝鮮 侵略, 나아가 大陸 侵略의 機會를 虎視眈眈 노리던 日本에게 金玉均 暗殺 事件은 自身들의 朝鮮內 存在의 名分을 强化시켜 準것이라고 日本은 主張하지만 핑계일뿐이다. 決定的 原因은 그 해 일어난 東學 農民 運動 에 依해 서로 間에 맺혀 있는 淸日 兩國으로만의 톈진 條約 을 發效 直後에 卽時 破棄하였던 淸과 日本은 韓半島 朝鮮 땅에서만 正面으로 부딪친다. 이것이 바로 淸日戰爭 이다.

參考 資料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高宗時代社

各州 [ 編輯 ]

  1. 조재곤, 《그래서 나는 金玉均을 쏘았다》, 푸른역사
  2. 洪鍾宇의 眞實 驪州市民新聞 2010年 9月 6日
  3. Official website of the French embassy in South Korea
  4. ‘그래서 나는 金玉均을 쏘았다’…암살자 홍종우와 김옥균, 果然 누가 옳았는가 쿠키뉴스 2005年 11月 25日子
  5. 以後 朴泳孝, 兪吉濬, 尹致昊 等이 金玉均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朝鮮이 植民地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言及을 여러番 함으로써 金玉均도 言及 禁忌 對象이 된다.
  6. 조재곤 (2005年 11月). 《그래서 나는 金玉均을 쏘았다》. 푸른역사. 327쪽. ISBN   89-91510-11-6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