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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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福澤 諭吉
學者 情報
出生 1835年 ( 덴抛 6年) 1月 10日
에도 幕府 오사카部 오사카 不젠
死亡 1901年 ( 메이지 34年) 2月 3日 (66歲)
日本 帝國 도쿄시
時代 19世紀
學派 啓蒙思想

후쿠자와 유키치 ( 日本語 : 福澤諭吉 , 1835年 1月 10日 ~ 1901年 2月 3日 )는 日本 開花期의 啓蒙思想家 , 敎育家, 著述家이다. 1860年 代부터 開港과 開化를 主張하고 自由主義 , 功利主義 的인 價値觀을 確立, 幕府 撤廢와 舊習 打破 等을 主張하고, 富國强兵論과 國家 中心의 平等論을 力說하였다. 1868年 도쿠가와 幕府 家門의 支配를 종식시키고 메이지 維新 을 세우는데 影響을 미쳤다. 게이오기주쿠 ( 게이오기주쿠 大學 )과 支持信保(산케이신문의 前身)의 創設者이다.

후쿠자와는 少年 時節 學問에 뜻을 두고 封建的이고 階級的 秩序의 根據로 批判받았던 漢學 等에 反撥하여 나가사키와 오사카에서 蘭學(네덜란드學) 工夫에 沒頭하였다. [1] 20代 中盤에 도쿄에 가서 當時 世界의 中心이 네덜란드가 아니라 英國·美國 等 英語圈이라는 事實에 놀라 學問의 方向을 靈學(英學)으로 바꾸었다. [1]

1858年 도쿄 에도 네덜란드語 語學校人 난학숙 (蘭學塾)을 열고, 1860年 네덜란드 船舶 艦長의 隨行員으로 美國 에 건너간 뒤 幕府의 龜尾地域 遣外使節團으로 프랑스 , 英國 , 獨逸 , 아프리카 等을 訪問하고 歸國, 自身의 見聞을 알리고 開港을 主張하였다. 메이지 維新 期間 中 메이지 皇帝 의 立脚 提議를 辭讓하고 [2] 學問 硏究와 啓蒙 思想 敎育, 討論 敎育과 言論 活動 等 政府 밖에서 메이지 維新의 理論的 土臺와 開化 靑年 養成에 注力하였다. 西歐思想과 文物의 日本 導入을 위해 앞장섰고 그가 平素 强調한 것처럼 在野에서 日本의 힘과 獨立을 增進시키는 데 寄與했다. 그는 近代 日本에 服飾簿記 槪念과 保險 을 最初로 紹介한 人物이기도 하다.

1984年 ~ 2004年 의 日本銀行圈 D號 1萬 엔權, 2004年부터의 E號 1萬 엔權에 肖像畫가 쓰여 [3] ‘유키치’라는 말이 1萬 엔權의 代名詞로 쓰이기도 한다. 게이오기주쿠를 設立하여 法人所屬의 大學 以下 學校에서는 敬意를 표하여 ‘후쿠자와 先生님’이라고 부르고, 다른 敎授나 敎員에게는 先生님이라는 稱號를 쓰지 않는다. 또한 朝鮮 開花期의 思想家 김옥균 , 박영효 , 홍영식 , 유길준 , 윤치호 , 서재필 , 서광범 의 스승이자 韓國 開化黨 에 影響을 준 人物로도 알려져 있다. 오사카 에서 태어나고 도쿄 에서 死亡하였다. 外三寸 나카무라 쓰히로 의 兩者였으므로 나카무라 유키치(中村諭吉)로도 알려져 있다. 號는 三十一曲인 ( 三十一谷人 산주잇코쿠진 [ * ] )이고, 者는 自慰 (子?), 諡號는 “汎”( )으로 汎공(範公)이다.

生涯 [ 編輯 ]

젊은 時節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그의 生家와 나카쓰 番 倉庫터 記念碑 ( 오사카部 오사카市 )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年 1月 10日 (陰曆 1834年 12月 12日 ) 오사카部 오사카 縣에서 不젠(豊前)國 나카쓰番 (中津藩) 所屬의 下級 無事 후쿠자와 하쿠스케 (福澤百助)와 誤쥰(於順)의 2男 3女 中 2男이자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이 유키치(諭吉, 油길)로 定해진 것은 그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 후쿠자와 하쿠스케 大明律 의 《 상유條例 (上諭條例)》를 求했기 때문에 그 傾斜를 記念하기 위해서 상유條例에서 이름을 따서 지었다. [4]

그의 집안은 그 곳에서 代代로 下級 無事이자 儒學者였던 집안이었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 하쿠스케는 當時 43歲, 어머니 吳쥰은 31歲였다. 아버지 하쿠스케는 性理學 敵 素養을 갖춘 儒學者였으나 名門家의 子孫이 아니었고 背景도 없는 下級武士 家門 出身이었기에 시골 나카쓰番 의 會計擔當 管理者 兼 番의 倉庫지기로 살다가 44歲의 젊은 나이에 世上을 떠났다.

1836年 후쿠자와의 나이 2世 때, 아버지가 死亡하자 不遇하고 가난한 環境에서 成長했다. [2] 後날 후쿠자와는 늘 回想하기를 "身分社會와 門閥 制度는 父母의 怨讐(かたき)였다"고 回想하곤 했다. 그의 兄 후쿠자와 山노스케 (福澤三之助) 亦是 著名한 儒學者 로 죽기 直前까지 늘 동생과 自身의 家族에게 孝悌忠信(孝悌忠信)을 强調하였다. 指摘, 學問的 素養이 뛰어났지만 집안 背景이 변변치 못해 結局 才能을 認定받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와 兄의 不幸을 보고, 그는 封建制度는 勿論이고 門閥社會, 族閥體制에 對해 平生 剛한 反感을 품게 되었다.

不遇한 幼年期 [ 編輯 ]

나가사키 미쓰나가사

어머니와 그의 兄弟姊妹와 生活하다가 나카쓰番 (中津, 現 오이타 現 나카쓰시)로 보내져 그곳에 살던 外三寸인 나카무라 쓰히로 (中村術平)의 養子가 되었다. 그는 本來의 姓을 따서 후쿠자와라고 하였지만 때로는 外三寸의 養子가 되었기 때문에 外三寸의 姓을 따서 나카무라 유키치로도 부른다. 그러나 後에 本來의 性을 復舊하고 후쿠자와 라는 姓을 使用한다. 不遇한 環境에서 자라났음에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고, 장난끼 많은 惡童으로 成長하였다. 10代 初의 그는 다다미 欌籠 을 만드는 外家의 일을 돕기도 했다.

8살 때 그는 自身의 親兄 후쿠자와 山노스케 의 文人이 되어 그로부터 性理學 을 修學하였다. 14,15歲 무렵에는 시라이시 쇼盞 (白石照山)이 세운 書室에 다니며 論語 , 孟子 , 市警 , 書經 을 떼고, 이어 詐欺 , 春秋左氏傳 , 路資 , 長子 等도 두루 涉獵하였다. 特히 그는 左氏傳 은 冊의 內容을 통째로 暗記하였다.

番地(蕃地) 나카쓰에서는 窒息할 것만 같았다. 分明히 學問的인 才能을 타고난 듯싶었다. 남들보다 늦게 始作했는데도 금세 따라갔다. 나중에는 書堂先生보다 實力이 나았다. [5]

후쿠자와 유키치는 열네살 以後부터 人文古典을 接한 以後로 至毒한 人文古典 讀書狂이 되어 頭腦를 根本的으로 변화시킨 後, 메이지 維新의 思想的 土臺를 닦았다고 알려져 있다. [6]

靑少年期 [ 編輯 ]

少年 時節 [ 編輯 ]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身分의 壁을 넘어설 수 없었다. 어른들의 交際는 當然하거니와 아이들의 놀이에도 上下貴賤의 區別이 있었다. [5] 나중에 學校에 가서 讀書灰독을 하면 언제나 上級四足을 이겼다. 腕力에서도 지지 않았다. [5] 하지만 外三寸이자 養아버지였던 나카무라 쓰히로는 生鮮장수였다. 養아버지의 處地에서 보더라도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外三寸은 그를 차라리 僧侶로 키우기로 했다. 하찮은 生鮮가게 아들이 大宗師가 되었다는 말은 널려 있었다. [5] 그러나 유키치는 僧侶가 되는 것은 決死 反對하였다.

周邊에서 不平不滿이 나오면 다 쓸데없는 짓이라 여겼다. 사람을 實力으로 評價하지 않고 門閥로 나누는 以上 希望은 없었다. 떠나지 않을 거라면 不平도 하지 말라고 퉁을 놓았다. 마침내 나가사키로 떠났다. 나카쓰에 傳統과 門閥이라는 惡靈을 묻어버리고 싶었으리라. 가슴에는 못다 이룬 아버지의 꿈을 품었으리라.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뒤돌아서 침을 뱉고는 바삐 달려갔겠는가. [5]

後날 그는 “중 노릇을 시키는 限이 있더라도 世上에 이름을 남기도록 하겠다고 決心한 그 괴로운 속마음, 그 깊은 愛情, 나는 그것만 생각하면 封建的 門閥制度에 憤怒하는 同時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心情을 헤아리게 되어 혼자서 울곤”했다고 回想한다. [5] 結局 그는 故鄕을 떠나기로 決心한다.

1853年 에는 나가사키 로 건너가 學校에서 네덜란드 語學人 '蘭學'(蘭學)라는 새로운 學問을 工夫했다. 이때 그는 나가사키 佛敎 寺刹인 미쓰나가지 (光永寺)에서 下宿하며 通學하였다. 砲術가인 야마모토 無知로 (山本物次?)의 집을 訪問하였다가 偶然히 砲術 關聯 書籍을 보고 거기에 魅了되었던 후쿠자와는 自身도 大砲를 다루고자, 大砲를 다루기 위해서는 原電을 理解할 수 있어야 된다고 보고 英語를 工夫하였다. 그에 依하면 '나가사키에서 처음으로 西洋글字를 배웠다. 스물 몇字를 외우는 데도 相當히 애를 먹었다지만, 네덜란드語 文法을 깨우쳤다. [5] ' 한다. 1855年 에는 야마모토의 집안과 葛藤하면서 結局 나카쓰 로 가라는 通知를 받고 오사카 로 가게 된다.

적숙 時節 [ 編輯 ]

되돌아온 그는 나카쓰番 의 倉庫지기를 맡던 兄을 다시 찾아가게 된다. 兄은 그에게 에도 로 가지 말고 蘭學 을 배울 것을 勸告한다. 그는 모리 番(足守藩)으로 가 오가타 考案 이 세운 積石제숙(適夕齋塾)에 入學하여 蘭學 을 배웠다. 本디 그가 兄과 함께 네덜란드語를 배우기로 한 것도 페리 衝擊 以後 日本列島를 달군 砲術(砲術)을 工夫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베끼거나 飜譯한 冊도 主로 醫學書나 築城서 따위였다. [5] 그러나 적숙 在學 中 장티푸스 에 걸려 적숙을 自退하고 다시 나카쓰 番으로 되돌아오게 됐다. 數個月 間 療養 끝에 1856年 다시 모리 番의 적숙으로 가서 學業을 繼續한다.

1856年 兄이 死亡하면서 結局 그가 집안의 相續者가 된다. 그러나 그는 오사카 留學을 抛棄하지 않고 學業을 繼續한다. 當時의 日本은 아버지 或은 兄이 死亡하면 傳統에 따라 家督相續을 해야 했는데, 이를 拒否하고 오사카로 다시 나오기로 했다. 어머니에게 “工夫를 하면 어떻게든 成功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番에는 있어봤자 대단한 出世를 期待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5] 아버지가 남긴 藏書와 家財 道具를 팔아 費用을 마련하였다. 그는 學業을 繼續하려 했고, 집안의 反對를 무릎쓰고 다시 오사카로 가서 敵숙에서 工夫한다. 學費를 調達할 與件이 되지 않은 그는 直接 아르바이트와 勞動을 하는 한便 同僚 學生의 敎科書를 筆寫하여 그 筆寫本으로 授業을 받았다. 後날 自敍傳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敎育을 받게 되었다. 蘭學을 배우는 데라 大體로 同僚들의 職業이 醫師였다 [5] ' 한다.

1857年 적熟議 學院長이 自身의 後任으로 나가요 센사이(長與專齋)를 指目했다. 나가요 센사이가 校長으로 赴任한 뒤 그의 說明에 따라 化學 實驗 授業과 簡單한 科學 實驗 等도 배웠다. 그러나 化學과 醫術에 拒否感을 느낀 瀉血이나 手術 解剖는 避하고 代身 네덜란드語 工夫에 集中하였다. 이때 그는 簡單한 電氣機器 組立課 암모니아 製造 等을 배웠다. 1858年 적숙 을 卒業하고 一部 難學院 의 講師로 轉轉하였다. 學窓時節 그는 베개를 베고 잔 적이 없다 한다. 工夫하느라 베개를 베고 盞 記憶이 없다 [5] 는 것이다.

난학숙 開設과 英語 工夫 [ 編輯 ]

1862年 유럽 視察時 시바타 沙陀로 , 후쿠자와 유키치, 誤打 겐사부로 , 후쿠다 自他로
美國 에 訪問한 카린 마루 一行 ( 1860年 12月 ), 맨 오른쪽에 앉은 이가 후쿠자와

1858年 도쿄 에도 에 난학숙(蘭學塾, 네덜란드語 어학교)인 一掃學숙(一小家塾, 게이오기주쿠 大學 의 前身)을 열고 學生들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가쓰라價와 好슈 (桂川甫周), 간다 타카히로 (神田孝平), 미쓰쿠리 슈헤이 (箕作秋坪), 우쓰노미야 사부로 (宇都宮三?) 等과 交流하고 그들과 學問과 思想을 주고받았다.

1859年 美日修好通商條約 이 締結되면서 美國人 等 外國人 居留地가 形成된 요코하마 를 訪問하였다. 그러나 요코하마의 美國人 居住地는 거의 獨占的으로 英語 가 使用되고 있었다. 簡單한 英語를 했지만 相當히 서툴렀고, 自身이 배운 네덜란드語가 全혀 통하지 않았으며 美國人 居住地 看板의 文字조차 읽을 수 없게 되자 그는 衝擊을 받는다. 그 以後로 英語의 必要性을 痛感한 후쿠자와는 영란事前(英語-네덜란드語 事前)을 求하여 거의 獨學으로 英語 工夫를 始作한다. 그는 後날 “몇 年 동안 水泳을 배워 艱辛히 헤엄칠 수 있게 되자 水泳을 抛棄하고 나무타기를 始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노라고 했다. [5] 도쿄에 가서 當時 世界의 中心이 네덜란드가 아니라 英美圈 이라는 事實에 놀라 學問의 方向을 靈學(英學)으로 바꾸었다. [1] 그러나 英語 의 解釋이 쉽지 않자 그는 幕府의 通譯官 모리야마 에이노스케 (森山榮之助)를 찾아가 2年間 英語를 四史(師事)하고 專門用語를 飜譯하고, 流暢하게 繪畫를 하는 水準까지 到達하였다.

1859年 겨울 美日修好通商條約 의 批准 交換을 위한 幕府 側 使節團이 美國 軍艦 抛下彈 號를 타고 美國 으로 가게 되었다. 1860年 2月 10日 그는 네덜란드 船舶 慳吝마루 艦長 기무라 셋쓰 (木村?津)의 隨行員으로 배를 타고 太平洋 을 橫斷, 美國으로 건너갔다. 이때 만난 慳吝마루의 護衛武官 가쓰 가이슈 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以後 그는 가쓰 가이슈와 平生 怨讐처럼 지냈다 한다. 한便 셋쓰의 薦擧로 後日 그는 日本 外務省 에 暫時 出仕하기도 했다.

改革 運動과 政治 活動 [ 編輯 ]

美國, 유럽 視察 [ 編輯 ]

美國 訪問과 歸國 [ 編輯 ]
후쿠자와 유키치와 美國 少女 테오도라 앨리스 ( 샌프란시스코 에서, 1860年 )
( 게이오기주쿠 大學 후쿠자와硏究센터 所長)
美國 워싱턴 D.C 에서

美國 에 건너간 그는 美國人 自由主義 敵, 個人主義 的인 思考方式에 唐慌하였다. 日本式 價値觀이나 禮儀가 통하지 않던 西洋 社會에 對해 그는 처음에는 適應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西歐의 發達된 文明을 익혀가겠다는 마음으로 견뎌냈다. 後날 “나는 어떻게든 洋學이 盛行하도록 해서 반드시 日本을 西洋 같은 文明 富强國을 만들겠다는 野心을 품고 있었다.” 그러기에 처음으로 美國에 가면서 겪은 苦楚를 일러 “西洋에 對한 나의 信念이 뼈에 사무쳐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무섭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回顧하였다. [5] 歸國 直後 그는 어느 知人과의 對話에서 日本 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等 君主의 後孫과 外孫들이 어떻게 生活하는가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當時의 美國 國民들은 조지 워싱턴 의 後孫, 토머스 제퍼슨 의 後孫들이 現在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大部分 모른다는 點, 關心도 없다는 點에 對해 衝擊을 받았다고 하였다.

美國 滯留 中 그는 웹스터 큰 辭典 들을 入手, 後日 日本으로 歸國한 뒤 日本語 英語 單語를 比較하여 英日 辭典을 만드는데 參考하였다. 한便 歸國하기 前에도 美國 에 滯留 中, 그는 밤을 새워가며 簡單한 語學 辭典을 만들었는데 日本語 英語 , 廣東語 를 比較 分析한 《 贈呈화영通語 (?訂華英通語)》를 執筆하였다.

그는 1860年 美國 을 最初로 訪問했던 日本 使節團에 合流해 샌프란시스코를 찾았고, 沒落 直前의 幕府에서 外國 關聯書類 飜譯擔當官으로 勤務했다. [1] 1861年 一時 歸國 나카쓰番 의 도키 하쓰타로(土岐八太?)의 次女 도키 니시키 (土岐錦)와 結婚하였다. 그해 겨울 幕府에서 다케우치 야스노리 (竹?保德)를 正使로 하는 幕府(幕府)의 遣外謝絶(遣外使節)李 派遣될 때 후쿠자와는 마쓰키 考案(松木弘安)과 그의 親舊인 미쓰쿠리 슈헤이(箕作秋坪) 等과 함께 遣外使節의 隨行員으로 任命되었다.

유럽 巡訪과 西歐 制度 見學 [ 編輯 ]

1862年 陰曆 1月 1日 ( 1月 30日 ) 幕府(幕府)의 遣外使節의 隨行員에 任命되어 以來, 以後 유럽 과 美大陸에 派遣되는 幕府의 遣外使節로 選拔되어 유럽으로 건너갔다. 以後 3次例에 걸쳐 美國 , 프랑스 , 이탈리아 , 英國 , 네덜란드 , 獨逸 , 러시아 , 스페인 , 포르투갈 等을 두루 旅行하였다. 그는 海外를 旅行하고 自身이 目擊한 列車, 機關車, 機械 等 새로운 文物을 接하고 日本 으로 돌아와 이를 紹介하고, 日本 으로의 導入을 積極 主張하였다.

프랑스는 徵兵制라는데 英國은 徵兵制가 아니란다. 都大體 왜 나라마다 制度가 다른 것일까 궁금했다. 選擧法은 아예 理解조차 되지 않았다. 都大體 어떤 法律에 기초해서 實行하는지, 國會는 어떤 官公署인지 물었다. 그러니 質問받은 相對方은 그저 웃을 수밖에. 더 荒唐한 것은 黨派가 둘로 나뉘어 태평천하에서도 政治的인 싸움질을 해댄다는 點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敵인 相對方과 함께 술 마시고 밥을 먹는다. 到底히 理解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닷새고 열흘이고 걸려서 艱辛히 納得”했다. [5]

첫 巡訪 때는 프랑스 와 英國을 訪問하였다. 첫 巡訪 길에 홍콩 을 經由하였는데, 첫 經由地인 홍콩 에서 그는 植民主義 , 帝國主義 를 現實 目擊하고 衝擊받았다. 그는 英國人이 中國人들을 개나 고양이와 다름없이 取扱하는 것을 보고 剛한 衝擊을 받는다. 이어 배는 싱가포르를 거쳐 印度洋 , 紅海 를 건너 수에즈에 到着했다. 이어 이집트 수에즈 海峽 을 汽車로 넘어 地中海 를 건너 프랑스 에 到着, 마르세유 에 上陸하여 프랑스 政府 를 訪問하고 리옹 , 파리 等을 거쳐 英國 런던 을 訪問하였으며, 네덜란드 로 건너가 로테르담, 헤이그, 암스테르담, 獨逸의 베를린,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리스본 等을 訪問했다.

英國, 러시아 巡訪 [ 編輯 ]

두 番째 巡訪 길에는 英國 을 訪問, 런던 에서 萬國博覽會 를 視察할 때 그는 蒸氣 機關車 , 電氣裝備 , 活版 植字機 等을 有心히 觀察하였다. 이어 러시아 를 訪問, 사할린 國境 問題를 論議하기 위해 들어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서는 陸軍 病院 에서 手術하는 것을 見學했다.

그는 幕府로부터 支給받은 旅費 400兩으로 그는 英語 說明書, 物理 說明書, 유럽의 地圖 와 地理書를 사서 日本 으로 가져갔다. 유럽 旅行 길에 그는 土地 去來 契約書 作成 等 文化的 差異에 놀라면서, 當時 日本 의 冊에도 나오지 않았고, 유럽人에게는 흔하지만 日本人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일과 日常에 對해 調査했다. 例를 들어 西洋式 病院 이나, 銀行 業務, 高利貸金, 保險 業務, 郵便法, 徵兵 徵集制度, 選擧 制度 , 議會 制度 等에 對한 것을 有心히 살펴보았다. 使節團 隨行員의 參與 經驗을 통해 후쿠자와는 日本 에 西歐 文物과 洋學의 普及이 必要함을 痛感한다. 또한 프랑스 人 靑年 레온 드 로니 와 親交를 맺고 아메리카와 東洋民族學會 의 正會員이되어, 日本人 으로는 外國 學會의 正會員이 된 人物들 中 한 사람이 되었다. 이때 보고 느낀 바를 記錄한 西洋司正 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5]

開港論과 西歐 文物 受容 逆說 [ 編輯 ]

후쿠자와 유키치, 1862年

그는 淸나라와 朝鮮의 改革 失敗를 보고 "西洋文明의 流行은 막을 方道가 없다. 日本은 文明化를 받아들여 아시아에서 새로운 軸을 마련했다. 그 理念이 '脫亞(脫亞)'다. 近代化를 拒否하는 中國과 朝鮮은 西洋이 壓迫하는 가운데 獨立을 維持할 方法이 없다. 日本은 이웃과 헤어져 西洋列强처럼 그들을 對하자. 우리는 마음속에서부터 아시아의 나쁜 親舊를 謝絶해야 한다. [7] "며 西歐 文物을 日本이 積極的으로 受容해야 함을 力說하였다. 다만 脫亞論은 후쿠자와 유키치 本人이 寄稿한 것이 아니라는 意見도 있다. [8]

東洋에는 類型의 것으로는 水利學, 無形의 것으로는 獨立心 이 두 가지가 없었다. 政治家가 國事를 處理하는 것도, 實業家가 商去來와 工業에 從事하는 것도, 國民에게 輔國의 생각이 많고, 家族이 團欒한 情으로 充滿한 것도, 그 由來를 따져보면 自然히 그 根本을 알 수 있다. 卑近한 例를 들면 只今의 이른바 入國이 그렇고 擴大해서 말하면 人類 全體가 그렇듯이 人間萬事는 修理를 빼놓고는 論할 수 없으며 獨立 外에는 依支할 곳이 없다는 所重한 眞理를 우리 日本에서는 가볍게 여기고 있다. [5]

1863年 1月 30日 歸國 以後부터 3年間 그는 《 西洋司正 (西洋事情)》을 執筆하였으며, 幕府機構의 改革을 主唱했다. 그는 歸國 直後 理化學과 機械學을 배울 것을 特히 强調하고, 病院, 保險, 銀行, 貸付業, 郵便, 徵兵 制度와 그 施設에 對해 言及, 講演하며 日本 의 改革을 力說하였다.

西洋司正 을 통해 그는 英國 , 프랑스 , 美國 等 西歐各國의 政治, 社會, 經濟, 歷史, 地理, 文化 制度 等을 알기 쉽게 描寫하여 곧 널리 읽히게 되었다. 以後 西洋文物을 導入하려는 努力을 繼續했으며, 쉬운 文體를 開發해내고 大衆 講演과 對中 討論 을 처음으로 試圖, 普及하기도 했다. 메이지 維新 直前 日本 은 半(反)外勢 感情이 澎湃해 있었기에, 尊王攘夷와 함께 西洋文物을 積極的으로 擁護했던 그는 幕府派 等으로부터 刺客이 派遣되는 等 몇 次例 暗殺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當時 日本은 西歐 文物이 日本을 망친다는 怪談이 돌았다. 그가 시나가와 에 到着한 다음날인 12月 12日 에는 英國 公使館 放火 事件이 일어났고, 1863年 3月이되면 兆메이 天皇 은 오리 兩司에 가서 攘夷들을 쫓아내 줄 것을 神社에 祈願하였다. 4月 에는 兆메이 天皇이 이와시미즈 하치만區(石?水八幡宮)으로 避身하고 조슈번이 시모노세키 海峽 通過 美國 商船을 砲擊하는 等 過激한 量理論이 눈에 띄게되었다. 1863年 4月 그는 親舊들을 訪問하고 歸家하던 길에 浪人의 被襲을 當하기도 했다.

1863年 英國 艦隊에 依한 가고시마 砲擊으로 살英(薩英) 戰爭이 始作되자, 1863年 7月 부터 그는 나카사키 奉行(奉行, 公務修行者)인 마쓰다이라 야스히데 의 집에서 生活하며 外交 文書를 飜譯을 맡아보았다. 1864年 10月에는 幕府에 通譯官에 採用, 外國人 오야토이(御雇) 通譯官이 되어 飜譯業務를 맡아보았다.

在野 活動 [ 編輯 ]

1862年 무렵

유럽과 美國의 學問 및 西歐思想에 本格的으로 눈을 뜬 그는 ‘西洋司正’(1866年)을 비롯한 엄청난 著述活動으로 當代 베스트셀러 作家의 班列에 올랐고 또 著作物 輸入을 바탕으로 게이오義塾을 創設하였다. [1]

1867年 陰曆 1月 23日 (1867年 2月 27 일) 쓰다 센(津田仙), 세키 新派치(尺振八) 等과 함께 幕府 의 軍艦收取使節團長 오노 우고로 (小野友五?) 等 幕府 軍艦 收取委員會의 隨行員으로 選拔되어, 美國 콜로라도 號 郵便換을 타고 요코하마에서 다시 渡美,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DC를 訪問하고 같은 해 陰曆 6月 27日 (1867年 7月 28日)에 歸國했다.

現地에서 懊惱에게 阿附하였다는 理由로 歸國 後 暫時 謹愼하게 되었지만, 나카지마 사부로스케(中島三?助)의 辯護로 謹愼에서 풀려났다. 美國 滯留 中 그는 기슈 番, 센다이 番에서 支援받은 旅費와 活動費 約 5,000兩으로 英語 辭典과 實際 說明書, 美國 의 地圖 冊을 사들여 耽讀하고, 日本 歸國 後 《 西洋餘案內 (西洋旅案?)》를 著述하였다.

敎育, 著述, 啓蒙講演 活動 [ 編輯 ]

講演, 著述 活動 [ 編輯 ]

그는 "一身獨立해야 一國獨立한다 [9] "며 個人부터 精神的, 思想的으로 家庭에서 獨立하고, 家族과 社會로부터 獨立하여 獨立된 人格體로 살아갈 것을 力說하였다. 個人이 먼저 家庭, 家族, 社會와 같은 集團에서 獨立할 때만이 獨立社會를 이끌수 있다고 내다봤다.

1868年 난학숙 을 移轉하면서 게이오기주쿠 (慶應義塾, 경응의숙)로 改稱하였는데, 게이오기주쿠 는 後날 게이오기주쿠大學 의 起源이 되었다. 以後 敎育 活動에 專念하였다. 그해 6月 에는 幕府 에 辭職書를 提出하고 退職, 學校 運營에 專念했다. 후쿠자와는 國民의 代表者를 選拔하는 議會 制度의 導入과 議會主義 에 立脚한 立憲君主制 政府, 國民에 對한 初等學校 普通 敎育의 國家 支援, 國民의 言語 敎育 向上과 言語의 現代化 改革, 女性의 權利 保障 等에 對해 그 必要性을 力說하는 啓蒙 講演活動을 하였다. 이 過程에서 幕府波와 體制 維持파들의 反對 或은 被襲을 當하기도 했다. 1869年 구마모토番 의 要請으로 本格的인 西洋 戰術 書籍 '養兵명감'(洋兵明鑑)을 오바타 도쿠지로(小幡篤次?)· 오바타 振子部로(小幡甚三?)와 함께 共同으로 飜譯했다.

그는 또 歸國 直後부터 著述과 文筆 活動에도 힘써, 立憲君主制, 個人의 自由, 權利 保障, 社會 改革, 言語 改革, 義務敎育론, 女性 權利 等에 對한 冊을 100餘 卷 以上 執筆했다. 그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고 主張하였고, 自身의 著書 《 學問의 勸奬 (學問のすすめ)》의 序論에도 이를 記述하였다. 이는 유럽과 美國에도 紹介되어 名文 警句가 되었다.

文化, 文明社會 槪念 紹介 [ 編輯 ]
1862年 7月 네덜란드 에서
文明論지槪略 ( 1875年 )

1868年 에도幕府가 沒落한 뒤 新政府에 參與하지 않고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核心 政治家들과의 人的 네트워크를 活用하며 當代 오피니언 리더로 자리 매김했으며, 西歐化를 志向하는 在野人士이자 親政府的 國權論者로 變貌해 나갔다.

그는 日本 社會에 文化 또는 文明化의 槪念인 시빌리제이션(civilization)이라는 槪念을 導入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67年 執筆한 ‘西洋司正 外篇’에서 ‘文明開花’로 飜譯해 擴散시켰다. 進步, 發展을 向한 普遍的 活動이라는 意味다. [10] 시빌리제이션은 市民(civilis)에서 派生된 것으로 城 안에 사는 사람, 市民權을 가진 사람이라는 라틴語 에서 由來한 말이다. [10] 그는 日本이 文明化된 社會가 되기 위해서는 文明國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본받아야 된다고 力說하였다. 同時에 그는 日本 이 先導者가 되어 東洋의 다른 國家들을 文明으로 이끌어야 된다고 力說하였다.

오늘의 꿈을 펴기 위해 이웃나라의 改名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時間이 없다. 오히려 그 隊列에서 벗어나 西洋처럼 그들을 對해야 한다. 接受方法度 隣接國家라는 理由만으로 事情을 헤아려줄 수 없으며... [5]
 
— 1885年 3月 16日子 示唆新譜 社說 -脫亞論-

그러나 文明國으로 發展할 能力이 되지 않는 國家, 民族이라면 徹底하게 버리고 日本 만이라도 開化의 隊列에 들어서야 함을 力說하였다.

이때 그는 컬쳐는 單純한 文化의 槪念으로 解釋하였고, 시빌리제이션은 文化, 文明化된 社會의 槪念이라고 紹介하였다. 以後 文化(文化)는 英語의 컬처(culture)나 시빌리제이션(civilization)을 飜譯한 말로 理解되어 왔다. [10] 그 外 紹介한 用語 中 liberty에 該當하는 自由(自由)라는 漢字語는 佛敎 用語를 參考해서 만들어졌다고 傳해진다. [11]

敎育, 社會 啓蒙 活動 [ 編輯 ]

그는 요시다 쇼인 , 이노우에 가오루 等과 交流하며 日本 의 開港, 開化에 對한 信念을 갖고 이를 積極 主張, 說破하였다. 1871年 메이지 維新 以後에는 議會 開設 運動이 全國으로 擴散되자 후쿠자와는 積極的인 議會 開設論者들과는 일정한 距離를 두면서 英國의 憲法의 흐름論을 主唱했다.

1871年 메이지 維新 宣言 以後 그의 同僚들은 神 政府에 出仕하였고, 政府로부터 繼續 立脚(入閣) 勸誘가 있었으나 獨立된 知識人層 育成의 必要性을 主張하면서 이를 뿌리쳤다. [2] 야마가타 아리토모 , 마쓰모토 料準 (松本良順) 等도 그의 出仕를 繼續 勸告하였으나 모두 辭讓하였다. 그의 名聲을 들은 메이지 天皇 은 그에게 여러 次例 立脚 提議를 하였지만, 그때마다 그는 自身의 任務는 따로 있다며 이를 辭讓하고 故鄕에서 敎育과 人材 育成, 留學生 支援, 言論活動에만 專念하였다. 그해 돈 300원으로 공獄事(攻玉社) 學校를 引受하고 새로운 땅을 買入하여 分校를 지은 뒤 장합地法 (帳合之法, 簿記學 의 前身)을 學生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在野에서 1871年 폐번치현 , 1873年 志操改正 (地租改正) 等의 政策을 積極 支持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理論的인 土臺를 마련, 說破하였다. 그 根據로 國家, 天皇 아래에서의 萬人의 平等論이었다. 多少 制限된 形態의 平等論이었지만 그의 이러한 主張은 現代 日本의 平等思想의 始原이 되었다. 1873年 9月 4日 부터는 이와쿠라 使節團 에 함께 隨行員으로 다녀온 나가요 센사이 (長???)의 薦擧로 4個月間 學制 制定에 參與하였다.

후쿠자와는 또 會計學 의 基礎가 되는 服飾簿記 를 日本에 最初로 紹介하였다. 또한 日本에 近代 保險 制度 를 紹介한 것도 후쿠자와였다. 후쿠자와는 《西洋 事情》에서 그는 "再難聽합"이라는 表現을 使用하여 保險 의 槪念을 紹介하고, 生涯靑합(생명보험), 火災靑합(화재보험), 海上靑합(손해보험)의 3種類의 再難聽合을 紹介·說明하였다. 그는 靑합(보험)이란 未久에 닥칠 災難을 對備하여 資金을 모아두는 一種의 貯蓄 槪念으로 日本人들에게 保險의 趣旨를 說明하였다.

言論, 文筆 活動 [ 編輯 ]

1873年 言論社인 메이로쿠社 (明六社)를 創設한 後로는 四柱이자 同人의 한 사람으로 活躍하면서 開化 靑年 養成과 討論 制度 普及, 實用的인 學問 等을 奬勵하였으며, 富國强兵論과 國家를 中心으로 한 萬人 平等論을 主張하여 日本 의 國力 向上, 資本主義 發達의 思想的 根據를 마련하였다.

憲法, 皇室典範 敎育勅語, 軍人 勅諭의 草案 모두에 參與했고 후쿠자와는 이토 히로부미 , 이노우에 타케시 等과 絶交하였다. 以後 이토 히로부미 와는 關係回復이 되지 못했다. 그 外에도 도쿄部 議會 副議長이 辭退하고, 도쿄學士會員 오바타 토쿠지로오(小幡篤次?), 쓰기무라 코우지(杉亨二), 미쓰쿠리 슈헤이, 스기타 겐하시(杉田玄端) 等 후쿠자와派 學者들은 憲法 作成 等에서 脫退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西歐式 敎育令 改正에도 參與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結局 敎育令 制定에서도 손을 떼게 되었다.

生涯 後半 [ 編輯 ]

朝鮮人 留學生과의 關係 [ 編輯 ]

후쿠자와는 1882年 壬午軍亂 後 朝鮮에서 淸나라 勢力이 擴大되자 朝鮮의 急進開化派를 支援해서 그들이 스스로 國內 改革을 推進해야 한다고 봤다. [1] 그러나 1884年 甲申政變 의 失敗는 그의 期待를 저버렸다. [1]

후쿠자와는 朝鮮 人 改革者 金玉均, 朴泳孝, 유길준, 徐載弼 等과의 만남을 契機로하여 朝鮮의 改革 運動에도 支援, 自問하게 된다. 후쿠자와는 當時 朝鮮은 日本의 메이지 維新 直前의 狀況과 恰似하고 小規模 武力 鬪爭도 일어나고 있었다고 보고, 이때 朝鮮에서 改革을 實施한다면 自由主義 敵人 零細中立國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보고 이들을 支援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日本의 文明 開化의 主役이라는 것이 朝鮮에 알려졌기에 이들 朝鮮人 靑年 開化人士들은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代身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請했다.

1875年 그가 著述한 《文明의 槪略》李 朝鮮에 入手되면서 그의 文明開化論은 朝鮮의 1880年代 開化思想에 큰영향을 끼쳤고 1881年 부터 日本을 訪問한 김옥균, 徐載弼, 朴泳孝, 兪吉濬, 尹致昊 等은 日本을 訪問하면서 후쿠자와를 만나면서 그의 識見에 歎服하였다. 후쿠자와는 自身의 祖國을 改革하겠다는 이들의 愛國心을 높이 評價하여 이들을 積極 後援하였다. 1881年 3月 6日 金玉均은 후쿠자와와 面談을 하며 朝鮮 獨立에 協力을 依賴했다. 1882年 7月 23日 壬午軍亂 이 勃發하자 후쿠자와는 요코하마 정금 銀行 에서 17萬원의 貸出金을 얻어 朝鮮 側 賠償金의 一部를 代身 納付해주기도 했다. 甲申政變 當時 후쿠자와는 프랑스 公使의 艦隊에 日本 自由黨 의 民兵隊 靑年들을 보내, 金玉均 一派를 支援하려고 했지만 이토 히로부미 의 反對로 霧散되고 만다.

朝鮮人 開化派 支援과 失敗 [ 編輯 ]

末年의 후쿠자와

1882年 朝鮮에서 留學生이 派遣되었다. 이때 生面不知의 外國人인 朝鮮의 咸鏡南道 兵馬節度使 윤웅렬 의 付託을 받고, 農業學校나 技術學校로 갈 뻔 했던 尹致昊를 都塵샤 를 가게끔 便宜를 봐 준다. 그는 朝鮮人 留學生 유길준, 박영효, 尹致昊 等과 만나 討論, 談論을 했는데, 以後 이들이 歸國한 뒤에도 꾸준히 連絡하며 助言을 해 주었다. 獨立新聞 等 新聞과 言論에 從事하던 윤치호와는 꾸준히 書信을 주고 받으며 言論 經營에 對한 助言을 해 주었다. [12] 후쿠자와 유키치는 또한 兪吉濬에게 《 文字지교 》라는 그의 著述을 國漢文混用으로 飜譯하게 하였다. [12] 그러나 甲申政變 이 失敗한 뒤 開化派 人士들에 對한 酷毒한 刑罰과 緣坐制 를 보고 悲憤慷慨하여 當日은 食飮을 全廢하였다. 그는 아까운 人材들을 잃었다며 大聲痛哭하였다. 이어 朝鮮獨立黨의 處刑 (朝鮮?立?の?刑)이라는 글을 發表하는 한便 朝鮮의 野蠻的인 刑罰을 非人道的이라며 糾彈하였다.

1885年 3月 16日 후쿠자와는 甲申政變 에 加擔한 一部 人士들과 그 遺家族의 悲慘한 處遇를 傳해듣고 憤慨, 示唆新譜 에 '脫亞論'을 發表하였다. 1885年 8月 에는 "朝鮮 人民을 위하여 朝鮮 王國의 滅亡을 祈願한다(朝鮮人民のために其?の滅亡を賀す)'며 朝鮮 政府를 糾彈했다. 여기서 그는 "人民의 生命도, 財産도 지켜주지 못하고, 獨立 國家의 自尊心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亡해 버리는 것이 人民을 救濟하는 길이다."라며 朝鮮 政府를 强力 批判하였다. 그러나 1894年 12月 朝鮮으로 歸國한 徐載弼이 兪吉濬, 윤치호와 손잡고 新聞社 開設을 試圖하며 이들에게 助言을 해주고 積極的으로 後援해주었다. 그는 徐載弼과 兪吉濬의 新聞 導入趣旨 說明을 듣고 이를 積極 支援하였다. 自身의 示唆新譜 社의 視察, 見學부터 新聞 印刷機와 活字, 優秀한 性能의 打字機와 잉크, 종이 等도 알아봐 주기도 했다. 그는 이들에게 漢字, 한글을 混合한 國漢文 混用 方法을 勸告하였으며 韓國 最初의 近代新聞 漢城旬報 의 刊行에도 後見, 助言을 해주었다.

東學 農民軍 非難과 反中 感情 [ 編輯 ]

甲申政變 의 失敗와 그 關聯者들에 對한 惡型과 緣坐制도 適用 以後 그는 朝鮮에 對한 嫌惡感을 增幅시켰다. 1894年 봄 朝鮮의 三南地方에서 東學農民軍이 蜂起했을 때 그는 東學 農民軍 에 對한 相當한 否定的인 認識을 드러냈다. "朝鮮 人民은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다." "朝鮮人의 完稿 無識함은 南陽의 未開人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며 東學 農民軍을 非難하였다. [7] 그는 淸國에 對해서도 敵愾心을 드러냈다. "서울에 駐屯中인 淸國病을 沒殺하라. [7] "고 呼訴하였다.

以後 그는 " 지나 , 朝鮮 을 對하는 法度 이웃 나라이기 때문에 特別히 待遇할 것이 아니라, 正말로 西洋人이 이를(일본인을) 對하는 方式에 따라 處分해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13]

淸日戰爭이 일어나자 示唆新譜 에 公開的으로 中國을 批判했다. "中國人은 장구벌레, 개돼지, 거지, 誤合散炙이다." 日本軍이 '벌레와 짐승'을 죽이는데 罪意識을 가질 必要는 없었다. [7] 그는 自身의 反中 感情에 對해 平素의 合理性을 發揮하지 못한다는 批判이 일자, 中國人의 未開함과 欲心을 指摘하고, 이것이 바로 中國人을 짐승으로 볼 수 밖에 없는 當然한 理由라고 主張했다. 日本軍의 政訓敎材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發行한 新聞인 「示唆新譜」였고, 그것이 그가 생각한 文明이었다. [7]

그러나 1898年 3月 22日 字 社說에서는 그는 '支那人과 親하게 지내야 한다. [13] '는 글을 發表한다. 社說에서 그는 日本이 中國에 要求할 것은 領土가 아니라 貿易이라고 主張한다. 兩國은 이를 통해 相互 利益을 圖謀하고, 親密한 關係를 맺을 必要性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爲해 日本人은 淸日戰爭 後 시모노세키 條約 에 따라 高調된 中國人 蔑視를 삼가야 한다고 注文한다. [13] 이 社說은 匿名으로 寄稿되었지만 1934年 이와나미쇼텐 出版社 刊行 <후쿠자와 유키치 全集>에 그의 作品이라고 밝혀지게 된다. 이는 個人的 反省보단 學問的으로 中國과 日本의 戰爭에 對해서 다른 結論을 내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著述 活動과 最後 [ 編輯 ]

1897年 以後에는 메이지 維新 國家主義 敵, 軍國主義 敵 改革 政策에 對한 批判的인 論調의 講演, 칼럼 等을 寄稿, 發表하였다. 示唆新譜 의 한 社說에는 메이지 政府의 國家主義的인 西歐化 政策, 近代化 政策에 對한 批判 칼럼을 發表하고, 民情一身이나 메이지 維新 以後의 日本 社會보다 具 幕府 쪽이 좋았던 것은 아닐까 라는 見解를 力說하기도 했다. 1897年 9月 4日 者의 示唆新譜 칼럼에서는 基督敎 를 비롯한 宗敎들에 對해 "宗敎 안에는 다양한 宗派가 있지만, 그 差異는 普通 車와 紅茶의 差異 程度이고, 두 茶를 마셔도 큰 差異는 없다"며 一部 宗敎들의 獨斷性과 獨善을 批判하기도 했다.

晩年에는 女性도 人間이라는 見解를 主張하고, 女性 參政權을 主張하는 等 日本 女性의 基本權 向上 및 女性도 國民이라는 認識을 심기 위하여 努力하였다. [14] 著書에는 《西洋司正》, 《學問의 勸誘》, 《 文明論의 槪略 》과 《腹癰自轉 (福翁自傳)》, 《新여대학 (新女大學)》 等을 남겼다.

죽기 直前인 1901年 부터 著述한 自身의 후쿠자와 유키치 自敍傳 에서 그는 메이지 維新 으로 모든 封建的 特權들과 因習들을 相當部分 廢止하였지만 그때까지도 日本 社會에는 舊習의 弊端이 殘存하고 있음을 指摘하였으며, 1894年 1895年 淸日戰爭 으로 淸나라 의 權威를 制壓한 것과 淸나라를 꺾음으로서 日本이 世界列强 隊列에 끼는 契機가 된 일 等은 自身의 人生에서 最高의 보람스러운 瞬間이었음을 自負하였다. 여기서 그는 單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요시다 쇼인 을 비롯한 그의 많은 親舊들이 이러한 훌륭한 變化를 보지 못하고 腦出血에 依해 죽은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事後 [ 編輯 ]

'日本에 福을 주기 위해 하늘이 내린 位인'이라는 이광수 의 極讚처럼 후쿠자와는 日本 近代化에 크게 貢獻한 代表的 계몽사상가로 金玉均, 朴泳孝, 유길준, 崔南善, 李光洙 等 國內 開化派 知識人에게 至大한 影響을 미쳤다. [15]

著書 [ 編輯 ]

  • 《西洋司正》( 西洋事情 Archived 2008年 6月 13日 - 웨이백 머신 ) ( 1866年 , 1867年 , 1870年 )
  • 《贈呈화영通語 (?訂華英通語)》
  • 《西洋餘案內 (西洋旅案?)》( 1867年 )
  • 《學問의 勸誘》( 學問のすすめ Archived 2008年 6月 13日 - 웨이백 머신 ) ( 1872年 ~ 1876年 )
    • 《學問을 勸함》 엄창준/김경신 옮김, 지안사 펴냄, 1993年 1月 23日 ISBN   89-85424-03-3
    • 《學問의 勸奬》(日本學總署 70) 남상영 옮김, 消化 펴냄, 2003年 2月 20日 ISBN   89-8410-222-9
  • 文明論의 槪略 》( 文明論之?略 Archived 2020年 10月 1日 - 웨이백 머신 ) ( 1875年 )
    • 후쿠자와 유키치의 文明論
    • 文明論의 槪略
    • 文明論 槪略
  • 《후쿠자와 유키치 自敍傳》( 福翁自傳 Archived 2008年 6月 13日 - 웨이백 머신 ) ( 1899年 )
  • 《新여대학 (新女大學)》

西洋 事情 [ 編輯 ]

1856年 메이지 維新이 일어나는데 先覺者 후쿠자와 유키치가 이때 『西洋司正』이라는 冊을 쓴다. 單番에 20萬 部가 팔렸다. [16] 1872年 에는 22萬部가 팔려 3,500萬 名의 日本人 160名 中 1名 꼴로 읽었다 한다. [17] 總 17篇으로 構成된 이 冊은 ‘國家는 同等하다는 것’,‘國法의 貴重함에 對한 論함’,‘자신의 마음으로 他人의 몸을 抑壓하지 마라’‘연설하는 方法을 勸奬하는 說’等 當時 知識人들의 關心事를 論하고 있다. [17]

花郞 [ 編輯 ]

思想과 信念 [ 編輯 ]

그의 以上은 그가 남긴 語錄 中에서 가장 有名한 ‘獨立自存’이라는 한마디에 壓縮돼 있다.

封建秩序에 對한 反感 [ 編輯 ]

후쿠자와는 封建秩序와 身分制度 에 剛한 反感을 품었다. 身分制度 外에도 그는 門閥에 對해서도 甚한 反感을 품게 된다. 그는 어려서 學者로 成功하고 싶었지만 身分과 背景, 財力 때문에 挫折해야 했던 아버지 후쿠자와 하쿠스케 의 挫折이 그에게 影響을 미쳤다.

封建秩序가 强固하게 자리잡은 時代에 下級 無事家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脫亞(脫我)’에 對한 欲望이 强烈했다. 아버지는 본디 漢學者였다. 그러나 番에서 하는 일은 會計擔當 [5] 과 倉庫지기였다. 그의 아버지 하쿠스케는 오사카의 甲富들과 交際하면서 番의 債務를 解決하는 일을 도맡았다. [5] 유키치에 依하면 生父 하쿠스케는 '元來 冊만 읽는 學者로 成長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籌板을 들고 돈 計算하는 것을 業으로 삼아야 했으니, 아버지의 挫折感은 깊었으리라 [5] ' 한다.

보잘것 없는 家門에서 태어나 成功하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 著名한 儒學者였지만 成功하지 못하고 죽은 兄의 挫折은 그로 하여금 現在의 身分 制度 社會를 打破해야 한다는 信念을 품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民衆을 輕蔑하였고 封建制를 讚揚하였으며 우민을 量産하는 儒敎 思想을 極端的으로 싫어했다. 이는 儒敎에 對한 否定的 認識과 東아시아에 對한 日本의 優越意識으로 發展하였다. [18] 生涯 初期에는 民衆이나 우민을 擁護하는 儒學에 對해서도 肯定的이었으나 現實을 깨닫고 否定的인 立場으로 轉換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家族의 悲劇이 影響을 준 것인지 貴族들을 慇懃히 否定的으로 描寫했으며 非民衆的 正體性을 지닌 資本家들을 肯定的으로 보았다. [19]

自由主義론 [ 編輯 ]

후쿠자와 유키치는 人間은 누구나 平等함을 力說하였다. 그는 平素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고 主張하며, 權威와 暴力에 對한 積極的인 拒否 意思를 드러냈다. 이는 그가 1860年 臺 龜尾 巡訪을 다녀온 뒤 身分 制度 廢止論을 主張한 것과 一脈 相通하였다. 그의 著書 《學問의 勸奬》의 書頭에도 이 말을 揷入하였다. 후쿠자와는 萬人이 平等함을 力說下였데, 다만 사람마다 그의 能力과 人格에는 差異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어떤 틀이나 形式에 얽매이지 말 것을 力說했다. 후쿠자와는 "人生은 演劇과 같다. 훌륭한 俳優가 乞人도 되고 三流俳優가 大監이 될 수 도 있다. 어쨌든 지나치게 人生을 거북하게 생각을 하지 말고 率直하게 어떤 일이든지 熱心히 하라. [20] "고 했다.

學問觀 [ 編輯 ]

그는 獨立을 위해서라도 힘써 배워 익혀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要旨는 西洋 列强으로부터 日本의 獨立을 지키기 위해서는 個個人이 學問을 통해 獨立해야 한다는 것이다. [17] 그는 實學 을 해야 한다고 力說하고 있다. “學問이란 그저 어려운 글字를 알고 와카 를 즐기고 詩를 짓는 等의 實生活에 도움이 되지 않는 文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熱心히 工夫해야 하는 것은 日常生活에 必要한 實學이다. [17] 후쿠자와 유키치는 理論이 巨創하더라도 實用的이지 않은 學問, 實生活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學問은 쓸모가 없다고 力說하였다. 便紙를 쓰는 法, 帳簿 處理하는 法, 籌板알 놓는 法 等을 배워야 한다.”그는 以外에도 地理學, 歷史, 經濟學, 修身學 等 배울 것이 많다고 强調하였다. [17]

또 다른 學問의 目的은 政府로부터 人民의 獨立이었다. 그는 自身의 著書 《學問의 勸奬》에서“인민들이 暴政을 避하고 싶으면 學問에 精進하여 재주와 德行을 높임으로써 政府와 同等하게 相對할 수 있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 [17] 그는 스스로 管理로의 登用을 拒否하고, 代身 學校를 세워 後進을 養成하거나 新聞을 刊行하는 等 政府로부터 獨立的인 삶을 살았다. [17] 그는 他人 或은 政府, 또는 外勢로부터 自身을 지키려면 스스로 깨닫고 工夫하는 길밖에 없다고 力說하였다.

문명관 [ 編輯 ]

후쿠자와는 文明이란 地選(至善)李 아니라 線을 向해 나아가는 過程일 뿐이며, 進步의 瞬間瞬間을 일컫는 것이라 했다. 健康하다고 해도 病에서 完全히 自由로울 수 없듯이 文明化되었다 하여 缺點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文明化가 곧 正答은 아니며 다만 正答을 向해 나아가는 길일 뿐이라고 展望했다.

그렇지만 文明은 大勢였고, 어쩔 수 없는 現實이었다. “世界의 交流가 나날이 빨라지고 西洋文明이 東洋으로 傳播되어 그 이르는 곳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할 것 없이 모두 感化되고 있”는 狀況이었다. 西洋文明이 온 世界를 征服하는 일은 避하기 힘든 形勢였다. 東洋의 民族은 抵抗할 만한 힘이 없었다. 도쿄 사람이 나가사키로부터 번져온 紅疫을 治癒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狀況이라고 후쿠자와는 생각했다.

또, 그는 어떤 段階에 到達하는 것이 끝이 아니고 繼續 發展, 文明化되어 가는 것으로 보았다. 후쿠자와는 다양한 修辭學을 使用하면서 文明에 이르는 方法은 하나가 아님을 力說한다. 그에 依하면 어떤 화살을 쓰건 標的을 맞추는 것이 目的이듯, 江이 어떤 模樣으로 흐르건 結局 바다로 모여들듯, 어떤 制度를 어떻게 活用하여 ‘安樂과 品位의 進步’를 이룰지는 저마다 놓인 狀況에 따라 判斷해야 한다는 것이다. 生活이 便利해지고 潤澤해진다 하여 그것이 正答은 아니며, 便利한 삶이 全的으로 幸福을 保障해주지는 않는다고 展望했다.

人間觀 [ 編輯 ]

그는 人間의 二重잣대와 偏見을 指摘하며 嘲笑하였다. 그는 "壓制도 내가 當하면 싫지만 내가 아니라면 남을 壓制하는 것은 몹시 愉快하다. [21] " 라며, 自身의 苦痛은 고통스럽게 여기면서 他人의 苦痛을 慇懃히 즐기는 人間의 二重的인 態度를 指摘했다. 그는 修養이 덜된 人間, 鄙陋하고 賤한 人品을 가진 人間일 수록 些少한 것으로 優越感을 느끼려 하고, 다른사람에게는 二重잣대를 들이대기 좋아한다고 指摘했다. 그는 二重잣대를 들이대고 싶다면 그 사람을 相對하지 않는편이 더 낫다고 指摘하였다.

후쿠자와는 學歷이 낮다 하여 모두 어리석은 것은 아니라고 봤다. 다만 學歷이 높아서 博士 , 碩士 學位 를 받더라도 어리석은 人間에게는 所用이 없다는 結論을 내리게 된다. 오히려 碩士, 博士 學位를 자랑삼아 自身의 어리석음을 認定하지 않고, 我執만 부리려 들 뿐이라고 指摘했다. 그는 西歐 社會의 碩士, 博士 學位가 自身을 治粧하는 治粧품으로 轉落할 수 있음을 指摘했다.

宗敎觀 [ 編輯 ]

그는 어리석은 人間들을 위해서라도 宗敎는 必要하다고 力說하였다. 그는 合理的으로 判斷할 能力이 되지 않는 人間에게는 權利를 附與해봤자 必要가 없다고 主張했다. ' 判斷力 이 缺如된 人間은 自身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고, 믿을 뿐이며 그런 人間에게는 애當初 對話가 통하지 않는다'고 봤다. 그는 '바보와 病身들에게는 宗敎 가 꼭 맞는 具色 [22] '이라고 冷笑하기도 했다. 勿論 후쿠자와 유키치 自身은 無神論 者였다. [22]

女性觀 [ 編輯 ]

進步的인 女性觀 [ 編輯 ]

後쿠가와 유키치는 女性의 社會的 地位向上을 위하여 크게 貢獻하였다. [23] 그는 男女差別없이 同等한 敎育機會 提供, 夫婦間 平等, 女性 參政權 附與 等을 主張하였다. 이런 主張은 그의 行步를 통해 들어난다. 1875年에 치루어진 모리 아리노리 의 破格的인 西洋式 結婚式에 參席하여 證人 兼 社會를 보았다. 傳統的인 婚禮式을 拒否한 이 結婚式은 洋裝 차림의 新婦와 小禮服을 입은 新郞이 서로 팔짱을 끼고 結婚式을 치렀다. [24] 모리 아리노리 는 蓄妾廢止, 一夫一妻制, 夫婦 平等, 結婚에 따른 權利와 義務에 對해 夫婦間 相互 遵守를 主張한 改革的 官僚였다. 當時 言論은 이 結婚式에 對해 '新式夫婦의 誕生'이라는 題目下에 大書特筆 하였고 이 結婚은 世間에 큰 話題가 되기도 했다. [25] [26]

時代的 限界 [ 編輯 ]

後쿠가와 유키치의 女性觀은 時代的 狀況으로 볼때 매우 進步的이기는 하나 貧民 出身의 ' 가라유키상 '에 對한 發言을 살펴보면 그 亦是 時代的 限界를 벗어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27] 가라유키상 이란 메이지 維新 前後 時期에 斡旋業者들의 海外就業詐欺에 속거나 誘拐를 堂下채 海外로 나가서 性賣買業에 從事한 女性들을 말한다. [28] 日本政府는 誘拐와 人身賣買 事實을 默認하고 뒤에서 暗暗裏에 斡旋業者들의 活動을 부추기고 奬勵했는데 [29] 가라유키들의 外貨벌이가 메이지 改革課業 遂行과 日本近代化 過程에 必要한 財源調達에 큰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다. [30] 러일戰爭 을 전후하여 가라유키들의 諜報活動과 戰費獻納 等 活躍이 이어지자 日本 言論들도 娘子軍(娘子軍)이라 하며 이들을 치켜세운바가 있다. [28]

發言 內容 [ 編輯 ]

世上사람들은 돈벌이로 女子들을 海外에 보내는 것을 보고 遺憾과 함께, 卑賤한 醜態에 나라의 體面을 더럽히는 行爲를 禁止시켜야 한다고 論하고 있지만, 人間社會에 倡夫는 어디든지 있는 것, 또한 植民地(各 나라 現地)에는 必要하므로 그들을 굳이 非難한다 해도, 이주의 奬勵와 함께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더 나은 世上을 위해서 必要할 수 밖에 없다. [31]

아시아 連帶論 [ 編輯 ]

후쿠자와가 金玉均을 支持할 때까지는 아시아 連帶論者였다. 所謂 흥아論이라 불리는 생각을 가졌던 그는 朝鮮과 請을 日本보다 낮은 國家로 보고 있었지만, 힘을 키워 아시아를 부흥시켜 西歐 勢力을 牽制해야 할 國家들로도 보았다. 하지만 甲申政變의 失敗를 보고 亦是 아시아 民衆들을 愚昧하다고 設定하였고, 그들과 함께 文明化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여 日本 主導의 獨自的인 活動, 龜尾 勢力과 同等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脫亞論'의 생각을 펼쳤다. 다만 脫亞論이라는 社說은 후쿠자와 유키치 本人이 敍述한 것이 아니라는 意見도 있다. [32]

脫亞論 [ 編輯 ]

그는 1882年 壬午軍亂 以後 朝鮮에서 靑 勢力이 擴大되자 朝鮮의 急進 開化派를 支援해서 그들이 스스로 朝鮮의 國內 改革을 推進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후쿠자와는 當時 朝鮮 의 調整이 外勢를 끌어들여가며 體制 維持에 汲汲하는 것은 잘못이며, 흥선大院君 一派의 閉鎖性과 殘忍性 亦是 排擊해야 할 것이라고 力說하였다. 그는 自身의 信念대로 金玉均, 朴泳孝, 徐載弼 等을 全力을 다해 支援하고 助言해주었다. 그러나 1884年 淸國 干涉에 依한 甲申政變 의 失敗로 그는 크게 挫折, 落膽하였다. 甲申政變의 失敗와 그 關聯者들에 對한 緣坐制, 陵遲處斬 等의 事件 以後 후쿠자와는 有名한 '脫亞論'을 發表하였다. 脫亞論에서 그는 朝鮮 朝廷의 腐敗와 殘忍性을 極度로 批判하였다.

脫亞論에서 후쿠자와는 유럽 美國 等 龜尾의 列强이 아프리카 東南아시아 에서 그러했듯 日本 政府가 東아시아에 對한 急速한 勢力 擴大와 새로운 政治的, 經濟的, 文化的 植民地化 해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그러나 日本 政府의 植民地化 企圖에 맞서 朝鮮 開花人들도 西洋 文明을 받아들여 近代化를 推進해야 함을 力說하였다. 그리고 후쿠자와는 近代化하지 못하는 國家, 民族 或은 近代化를 할 能力이 없는 國家와 民族은 獨立을 維持할 수 없다고 主張하고, 日本이 淸나라와 朝鮮의 近代化에 積極 앞장서고 支援해야 한다고 力說했다. 그러나 스스로 自力으로 近代化할 수 없는 周邊 國家와 民族이 있다면 그러한 國家, 民族은 日本의 植民 支配 壓迫에 依해 果敢하게 抛棄하고 日本의 近代化를 더욱 推進하여 龜尾 列强의 隊列에 끼도록 國力을 向上시켜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그는 淸나라나 조선도 只今 現在 龜尾 列强이 日本을 對하듯이 해야 하며, 必要하다면 淸나라와 러시아 等과의 戰爭도 必要하다면 不辭해야 함을 力說하였다. 한便 脫亞論 을 主張해 日本의 뿌리깊은 아시아 蔑視에 論理的 根據를 提供하기도 했다. [33]

親舊론 [ 編輯 ]

후쿠자와 유키치는 좋은 親舊를 사귈 것과 나쁜 親舊를 排擊할 것을 主張하였다. 그는 脫亞論(脫亞論)에서도 좋은 親舊를 사귀고 그렇지 못한 親舊는 避할 것을 力說하였다.

오늘날의 (國際 關係를) 圖謀함에 있어서 우리 나라는 이웃 나라의 改名을 기다려 더불어 아시아를 興하게 할 餘裕가 없다. 오히려 그 隊伍에서 脫皮하여 西洋의 文明國들과 進退를 같이하여 저 지나(支那, 靑)와 朝鮮을 對하는 法度 이웃 나라라고 해서 特別히 사이좋게 待遇해 줄 것도 없고, 바로 西洋人이 저들을 對하듯이 處分을 하면 될 뿐이다. 나쁜 親舊를 사귀는 者는 더불어 汚名을 避할 길이 없다. 우리는 마음 속으로 아시아 東方의 나쁜 親舊를 謝絶해야 한다.
 
— " (1885年 3月 16日 《 示唆新譜 》 社說에서

그는 이웃나라라고 해서 딱히 親하게 지낼 必要도 없고, 가까운 곳에 있다 하여 親하게 지낼 必要는 없으며 좋지 못한 個人, 國家는 避하는 것이 當然하다고 主張하였다.인간관

그는 人間의 二重잣대와 偏見을 指摘하며 嘲笑하였다. 그는 "壓制도 내가 當하면 싫지만 내가 아니라면 남을 壓制하는 것은 몹시 愉快하다. [33] " 라며, 自身의 苦痛은 고통스럽게 여기면서 他人의 苦痛을 慇懃히 즐기는 人間의 二重的인 態度를 指摘했다. 그는 修養이 덜된 人間, 鄙陋하고 賤한 人品을 가진 人間일 수록 些少한 것으로 優越感을 느끼려 하고, 다른사람에게는 二重잣대를 들이대기 좋아한다고 指摘했다. 그는 二重잣대를 들이대고 싶다면 그 사람을 相對하지 않는편이 더 낫다고 指摘하였다.

후쿠자와는 學歷이 낮다 하여 모두 어리석은 것은 아니라고 봤다. 다만 學歷이 높아서 博士 , 碩士 學位 를 받더라도 어리석은 人間에게는 所用이 없다는 結論을 내리게 된다. 오히려 碩士, 博士 學位를 자랑삼아 自身의 어리석음을 認定하지 않고, 我執만 부리려 들 뿐이라고 指摘했다. 그는 西歐 社會의 碩士, 博士 學位가 自身을 治粧하는 治粧품으로 轉落할 수 있음을 指摘했다.

朝鮮에 對한 觀點 [ 編輯 ]

그는 甲申政變을 일으킨 金玉均의 後援者였다. [5] 當時 그가 朝鮮을 보는 觀點은 當時 西洋人들이 ‘未開한 野蠻’을 보는 오리엔탈리즘의 視線 그대로였다. [33] 江華島 條約(1875)를 앞두고는 “스스로 調整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려 우리의 屬國이 된다고 해도 기뻐할 만한 價値가 없다”고 했다. [33] 그는 1880年 부터 派遣된 朝鮮의 靑年들을 보고 朝鮮의 改革에 期待를 품게 된다. 特히 自身도 兩班 士大夫 家門이고 勢道家問議 子孫이었던 金玉均의 意志와 學識, 兩班 士大夫家門 出身이면서도 軍事學校를 自請하고 奴婢, 中人 出身 靑年들과 함께 訓鍊을 받는 徐載弼을 보고 剛한 印象을 받게 된다. 그러나 甲申政變의 失敗로 朝鮮의 改革에 對한 그의 期待는 곧 冷笑와 憎惡로 變하게 된다.

1880年부터 그는 日本을 訪問하는 朝鮮人 靑年에게 富國强兵論과 身分 制度와 門閥 特權層의 打破 等을 力說하였다. 그는 김옥균, 徐載弼, 尹致昊, 兪吉濬 等의 靑年들이 朝鮮을 改革할 수 있으리라 確信하였다.

1881年 朝鮮은 日本의 開花 文明을 배우겠다며 젊은 官僚들이 參與한 ‘ 調査視察團 ’을 派遣해 日本人들의 關心을 끌었다. [34] 또 후쿠자와 유키치가 發行하는 支持信保(時事新報) 等 日本 新聞에 朝鮮의 守舊黨과 開化黨의 葛藤이 자주 紹介되는 等 朝鮮에 對한 日本 大衆의 關心이 높아지던 狀況이었다. [34] 후쿠자와는 日本 이 先導者가 되어 朝鮮 中國 , 베트남 의 改革과 啓蒙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理想論에 따라 朝鮮의 春香傳 , 鼈主簿傳 , 興夫傳 等의 作品들을 自身의 支持信保 와 다른 雜誌 等을 통해 日本 에 積極 紹介하기도 했다.

후쿠자와의 勸告로 니카라이 도스이 는 朝鮮의 小說 春香傳 을 筆頭로 朝鮮의 傳說들을 日本語 로 飜譯하여 아사히 新聞 에 寄稿한다. 新聞小說家로 한때 이름을 날렸던 나카라이 도스이는 1882年 6月 ‘계림정火 春香傳’을 아사히 新聞에 20回 連載해 큰 人氣를 끌었다. 이는 日本에서 發表된 한글 古典文學 飜譯本意 嚆矢로 손꼽힌다. [34] 나카라이는 '계림정火 春香傳'의 譯者 序文에서 “朝鮮의 風土와 認定에 對한” 情報提供을 꾀했고, 이것이 “通商貿易을 圓滑하게 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必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34]

후쿠자와는 日本 이 周邊國의 開化와 改革을 支援해야 함을 力說했다. 그는 "조선국은(…) 未開하므로 이를 誘引하고 이끌어야 하며, 그 人民 正말로 頑固하고 고리타분하므로 이를 깨우치고(…) 끝내 武力을 使用해서라도 그 進步를 도와야 한다."(1882.3)라고 主張하였다. [35] 그는 甲申政變이 터지자 프랑스 潛水艦 에 日本 自由黨 日本 民兵隊 라도 支援하자고 日本 調整과 週日 프랑스 公使館에 建議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反對로 霧散된다. 한便 甲申政變의 失敗로 朝鮮의 改革은 어려울 것이라고 展望하였다. 그러나 甲申政變 直後 一部 開化派 人士들이 苛酷한 刑罰을 받고, 家族들은 緣坐制로 처단당하는 것을 보면서 朝鮮에 對한 期待感은 輕蔑과 憎惡로 變貌하였다.

朝鮮 人民 一般의 理解 어떤지를 論할 때는 滅亡이야말로 오히려 그들의 幸福을 크게 하는 方便이다"(1885.8.13) [35]

甲申政變 關聯者들의 處刑과 逃避 直後 그는 朝鮮獨立黨의 處刑 (朝鮮?立?の?刑)이라는 글을 發表하는 한便 朝鮮의 野蠻的인 刑罰을 非人道的이라며 糾彈하였다. 1885年 3月 16日 에는 示唆新譜 에 '脫亞論'을 發表하였다. 이어 1885年 8月 에는 支持信保 의 社說을 통해 "朝鮮 人民을 위하여 朝鮮 王國의 滅亡을 祈願한다'며 朝鮮 政府를 糾彈하였다. 그는 "人民의 生命도, 財産도 지켜주지 못하고, 獨立 國家의 自尊心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亡해 버리는 것이 人民을 救濟하는 길이다."라며 어떤 나라가 朝鮮을 占領下든 새로운 體制가 들어서든 當時의 朝鮮王國은 滅亡하는 것만이 朝鮮 百姓들을 束縛에서 풀어줄 수 있는 지름길로 내다봤다.

甲申政變 當時 關聯者와 家族에 對한 緣坐制 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等을 비롯한 日本 知識人들에게 衝擊을 주었다. 結局 그는 腐敗하고 堅固한 朝鮮 體制의 '滅亡이야말로 오히려 朝鮮 人民들의 幸福을 크게 하는 方便 [22] '이라고 冷笑하게 된다.

한便 그는 朝鮮의 知識人들에게 思想的 支柱가 되었다. 金玉均, 朴泳孝, 徐光範, 이동인, 유길준, 徐載弼, 尹致昊, 崔南善, 李光洙 等 錚錚한 舊韓末 韓國 知識人들의 尊敬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36]

甲申政變의 失敗와 함께 甲申政變 關聯者들에 對한 朝鮮 政府의 酷刑은 그에게 衝擊을 주었다. 甲申政變이 失敗로 돌아간 以後 후쿠자와는 '朝鮮 獨立黨의 處刑'이라는 글을 게이오기주쿠에서 發行하던 新聞 '示唆新譜'에 싣는다. 이 글은 甲申政變의 主謀者를 處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朝鮮 政府가 罪 없는 父母, 祖父母와 妻 子息, 나이 어린 孫子까지 處刑하는 것은 決코 容恕할 수 없는 野蠻이라고 猛烈하게 批判한 글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7沈熏 [ 編輯 ]

그는 7個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남겼다. 이는 메이지 時代 다이쇼 時代 의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時代精神(時代精神)으로 認識되었으며, 近現代 日本의 名言이자 箴言의 하나로 알려졌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實際로는 作者不明의 僞作이다. [37] 「후쿠자와 沈熏」、「후쿠자와 유키치옹 沈熏」、「후쿠자와 七勳 漆칙」、「유키치 沈熏」、「沈熏」、「漆칙」等으로 불린다.

  1. 世上에서 가장 즐겁고 멋진 것은 一生을 바쳐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2. 世上에서 가장 悲慘한 것은 人間으로서 敎養이 없는 것이다.
  3. 世上에서 가장 쓸쓸한 것은 할 일이 없는 것이다.
  4. 世上에서 가장 醜한 것은 他人의 生活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5. 世上에서 가장 尊貴한 것은 남을 위해 奉仕하고, 決코 報答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6. 世上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든 事物에 愛情을 갖는 것이다.
  7. 世上에서 가장 슬픈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38]
    ? 후쿠자와 유키치의 7沈熏

후쿠자와 유키치는 거짓말을 하면서 眞實을 歪曲하면 維持할 수 없는 그런 人間關係는 悲慘한 人間關係라고 力說하였다. 그는 恒常 참되고 眞實하고 성실할 것을 主唱하였다.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人生의 主人은 自身이라며 最終 決定은 自己 스스로 내려야 함을 强調하였다.

評價 [ 編輯 ]

肯定的 評價 [ 編輯 ]

西洋文明의 衝擊 속에 日本을 主權的 國民國家로 만들기 위한 精神的 土臺를 만든 偉大한 思想家로 評價된다. 日本에서는 ‘近代化의 아버지’로 看做되지만, 反對로 大韓民國 中國 에서는 帝國主義 侵略을 부르짖은 脫亞論 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帝國主義를 正當化하는 오늘날 日本 右翼 의 뿌리로 評價된다. 그는 甲申政變 以後인 1885年 3月 16日 字 日本의 《示唆新譜》( 日本語 : 時事新報 )의 社說을 통해, 日本의 ‘脫亞’(脫亞), 卽 아시아 脫皮를 부르짖으며, “中國과 朝鮮을 클리어(淸掃)해야 한다.”라고 主張 [39] 하였고, 그해 8月 13日 者에 “朝鮮 人民을 위해서 그 나라의 滅亡을 祝賀한다”라는 題目의 記事를 싣기도 했다.

그는 個人과 國家의 自主 獨立을 위해서는 西洋 文明의 導入이 急先務라고 하며, 英國의 立憲政體(立憲政體) 實踐을 主張하였다. [40] 후쿠자와의 代表的인 名言은 ‘獨立自存’으로 그의 誡命이기도 했다. 이 意味는 心身을 독립시키고 自己自身을 尊重하며, 品位를 지키는 것이다. 또 베스트셀러가 된 《西洋司正》이나 《文明論의 槪略》 等의 著書를 發表하여 메이지 維新 以後의 日本이 中華思想, 儒敎精神에서 脫皮하여 西洋文明을 좀 더 積極的으로 받아들이는 흐름을 만들었다.

후쿠자와는 會計學의 基礎가 되는 服飾簿記 를 日本에 紹介하였다. 또한 日本에 近代 保險 制度를 紹介한 것도 후쿠자와다. 후쿠자와는 《西洋案內書》에서 “再難聽합”이라는 表現을 使用하여 生涯靑합(생명보험), 火災靑합(화재보험), 海上靑합(손해보험)의 3種類의 再難聽合을 紹介·說明하였다.

메이지 維新 以後 關係 進出 勸誘를 拒絶하고 言論과 大學을 세워 오직 日本精神의 近代化를 위한 啓蒙思想家로 活動해 日本人들이 尊敬을 보내고 있다. [41]

否定的 評價 [ 編輯 ]

그의 ‘脫亞’理論이 日本을 軍國·帝國主義와 戰爭으로 몰아넣었고 原爆被害를 當하게 만들었다는 批判도 存在한다. [41]

銀行圈 [ 編輯 ]

후쿠자와 유키치는 ‘ 10000엔 紙幣 의 얼굴’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戰爭 後 紙幣에 印刷될 人物은‘민주주의에 貢獻한 日本人’으로 여겨진 이타가키 다이스케 로 定해져 있었고, 후쿠자와는 自由民權運動을 反對하고 있었다. 그는 法理(法利)에 對한 一般의 自由 重視를 一國의 獨立과 결부시키고 있다. 이는 그가 民圈, 人權보다 國權, 國法을 優先視 할 수 있는 可能性이 있음을 말해준다. [42]

日本 軍國主義의 理論的 발板이자, 歷史 敎科書 歪曲을 主導하고 있는 日本 右翼의 이념적 源流라는 否定的인 評價도 있다.

名言 [ 編輯 ]

  • 내 생각만으로 남을 評價, 判斷해서는 안된다.
  • 家庭은 習慣의 學校이고, 父母는 習慣의 敎師이다.
  • 내가 잘못한 일을 깨닫고, 고치는 것은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해 보지도 않고, 될지 안 될지 疑心부터 하지말라!
  •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사는 것이야말로, 人生 獨立의 根本.
  • 結婚이 人生에 있어 重大한 일이라면, 配偶者 選擇은 그中 가장 重要한 일이다.
  • 다른 사람에게 民弊를 끼치지 않는 範圍 안에서 내 自由가 있다.
  • 世上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모든 事物에 愛情을 갖는 것이다.
  • 世上에서 가장 즐겁고 멋진 일은, 平生을 바쳐 할 일을 갖고 있는 것이다.
  • 내가 當한 輕蔑과 猖披함을, 다른 사람에게 火풀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 政治를 한다는 건, 罪를 더 짓느냐 덜 짓느냐의 選擇이다.
  • 法이란 「單純히 嚴해야」한다.
  • 펜은 칼보다 强하다.
  • 世上에서 第一 價値있는 일은, 남을 위해 奉仕·獻身하되, 報答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 努力은 千名까지도 바꾼다.
  • (朝鮮말 朝鮮人의 行動實態를 보고서 東學亂以後)朝鮮人民은 小와말, 돼지나 개와 같다.

기타 [ 編輯 ]

그는 1890年 代 後半 朝鮮의 滅亡을 豫見하였다. 그러나 그 朝鮮을 멸망시키는 것이 日本이라고는 豫想하지 못했다. 그에 依하면 朝鮮 政府가 外國의 侵入으로부터 自國民을 保護하지 못하며, 支配層은 國民의 權益 保護에 關心이 없다. 그리고 一般 百姓들 조차도 腐敗와 貪慾, 違法 行爲를 恣行하는 等 內部的으로도 深刻하게 腐敗해 있다고 指摘했다. 후쿠자와는 朝鮮의 滅亡은 어쩔수 없는 것으로, 腐敗한 政權과 戚族, 無能한 官吏들의 世襲과 不淨腐敗版인 政府의 滅亡은 當然한 것이며, 머지 않은 朝鮮의 滅亡을 祝賀한다는 套의 論說 〈朝鮮 人民을 위해서 그 나라의 滅亡을 祝賀한다〉(朝鮮人民のために其?の滅亡を賀す)를 남겼다.

후쿠자와에 對한 欽慕와 熱情으로 ‘朝鮮의 후쿠자와’를 自處한 春園 李光洙 亦是 후쿠자와와 마찬가지로 朝鮮의 계몽사상가로,언론인으로,대문장가로 活動하면서 特히 우리 民族의 劣等性을 强調한 ‘민족개조론’를 쓰기까지 했는데 여기에 후쿠자와의 影響이 그대로 나타난다. [41]

各州 [ 編輯 ]

  1. [世上을 바꾼 삶의 記錄-自敍傳 30線]<4>후쿠자와 유키치 自敍傳 東亞日報 2007.02.09
  2. 박구재 <紙幣, 꿈꾸는 者들의 肖像> 황소자리 2006年 p246
  3. 박구재 <紙幣, 꿈꾸는 者들의 肖像> 황소자리 2006年 p244
  4. 武士이면서 性理學 , 考證學 知識이 該博한 그의 아버지 후쿠자와 하쿠스케 淸나라 乾隆帝 때의 法條文人 《 상유條例 (上諭條例)》를 오랫동안 求하던 中 그가 태어나던 날 入手하게 되었다.
  5. [自敍傳 읽기] (4) 후쿠자와 유키치 自敍傳 京鄕新聞 2008.08.15
  6. 讀書의 힘
  7. "朝鮮·中國人은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다" 忠北一步 2011.11.27
  8. 이다 晨夜,『?史とテクスト 西鶴から諭吉まで』光芒社, 2001. 12
  9. 日本 아베 總理 "安全確認된 原電 再稼動"
  10. 쿨투어·시빌리제이션 어떤 差異가 있을까?
  11. 民主主義와 資本主義, 福祉國家
  12. 황호덕, 《近代 네이션과 그 表象들》(소명출판, 2005) 314페이지
  13. [어제의 오늘] 1898年 후쿠자와 유키치 ‘支那人’ 社說 揭載 京鄕新聞 2010.03.21
  14. [네이버 知識百科] 후쿠자와 유키치 [Fukuzawa Yukichi, 福?諭吉(복택유길)] (두산百科)
  15. [出版] 후쿠자와 유키치
  16. 3大 惡材 '致命的 結合' 5年 내 올 것規制撤廢·敎育改革으로 突破해야
  17. "배움이 곧 獨立의 길" 逆說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韓國日報 2003.03.21
  18. 封建制론, 日 優越 意識의 根據가 되다 文化日報 2013.03.29
  19. 駐노스케|이향철, 야스카와.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神話 - YES24》 .  
  20. “家族 演劇 ‘곰팡이’를 보고 ……” . 2013年 2月 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6月 28日에 確認함 .  
  21. 近代 日本의 스승이라는 후쿠자와 유키치 ‘啓蒙家’ 탈 쓴 侵略 元兇
  22. [700字 읽기]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侵略思想을 묻는다 Archived 2015年 6月 10日 - 웨이백 머신 每日新聞 2011.04.21
  23. [네이버 知識百科] 후쿠자와 유키치 [Fukuzawa Yukichi, 福?諭吉(복택유길)] (두산百科)
  24. [네이버 知識百科] 모리 아리노리 [森有?] - 日本의 近代 敎育制度를 創設한 招待 文部大臣 (日本 官僚, 김경리)
  25. 서현섭 <日本人과 에로스> 고려원 1995年 p29
  26. [네이버 知識百科] 모리 아리노리 [森有?] - 日本의 近代 敎育制度를 創設한 招待 文部大臣 (日本 官僚, 김경리).....모리 스스로 自身의 主張에 對한 實踐을 위해 히로 歲쓰네와 ‘契約結婚’을 했으며 이는 世上 사람들에게 큰 話題가 되었다. 이 結婚에 對한 사람들의 關心은 當然히 컸으며 參席者가 200名이 넘었다. 社會 兼 證人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主宰하는 가운데 洋裝 차림의 新婦와 小禮服을 입은 新郞이 서로 팔짱을 끼고 結婚式을 치렀다. 式이 끝난 後에는 別室에서 西洋式 파티가 열렸다.
  27. 서현섭 <日本人과 에로스> 고려원 1995年 p169
  28. 以上서 記者 [聯合뉴스] 메이지 政府, 遠征 性賣買 日本女性 50萬名 管理했다. (2017.05.30)
  29. [네이버 知識百科] 性文化 (새로운 日本의 理解, 2005. 3. 2., 共意識).....메이지維新 時代가 되면서, 어려운 國內 事情으로 인해 또다시 日本 女性들은 海外로 外貨벌이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을 가라유키라고 하는데 많은 外貨를 벌어 들였기 때문에, 政府에서는 公式的으로는 制裁를 加하였으나 뒤에서는 오히려 이것을 부추기고 奬勵하였다.
  30. 유재순 <日本女子를 말한다> 창해 1998年 p50
  31. 유재순 <日本女子를 말한다> 창해 1998年 p51
  32. 이다 晨夜,『?史とテクスト 西鶴から諭吉まで』光芒社, 2001. 12.
  33. 近代 日本의 스승이라는 후쿠자와 유키치 ‘啓蒙家’ 탈 쓴 侵略 元兇
  34. 춘향은 어떻게 19世紀 日本을 홀렸나
  35.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侵略思想을 묻는다 / 야스카와 駐노스케 釜山日報 2011.04.16
  36. [話題의 冊] 定日性 지음 '후쿠자와 유키치' 每日經濟 2001.04.20
  37. 福澤心訓
  38. 후쿠자와 유기치의 7訓
  39. “日本右翼의 뿌리 후쿠자와 유키치” . 在外同胞財團. 2005年 11月 28日.  
  40. 野裸婦 아키라 (2003). 《飜譯語成立事情》. 서혜영 옮김. 서울: 圖書出版 일빛. 12쪽쪽.  
  41. [손에 잡히는 冊]‘후쿠자와 유키치’
  42. 김봉진. “西區 '權利 觀念'의 受容과 變容”.  

같이 보기 [ 編輯 ]

關聯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