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福宮 重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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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福宮 重建 (景福宮 重建)은 朝鮮 (朝鮮) 時代 末期 垂簾聽政 을 하였었던 신정왕후(神貞王后) 에게서 指示를 받은 흥선大院君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李 정원용 (鄭元容), 조두순 (趙斗淳), 李敬載 (李景在), 김병학 (金炳學) 等 4名의 歷代 領議政 (領議政)들과 野合하여 1865年 ( 高宗 2年)부터 1872年 (高宗 9年)까지 行한 宮闕 重建이다. 景福宮 重建을 興宣大院君이 指揮함으로써 約9年餘의 權力( 攝政 )을 掌握하게 된다. 그러나 景福宮 重建의 費用이 많이 나와 이유원 (李裕元)과 최익현 (崔益鉉) 等에게 痛烈히 警告 및 批判 [1] 等을 받으며 結局 흥선大院君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은 1873年 權不十年(權不十年)처럼 攝政 權座에서 9年餘만에 물러나게 된다.

背景 [ 編輯 ]

勢道政治 로 말미암아 王室의 威信이 떨어진 朝鮮 末期에 高宗이 卽位하자 政權을 잡게 된 興宣大院君은 王室의 尊嚴性을 天下에 誇示하여 中興(中興)의 氣勢를 높이고자 壬辰倭亂 때 타버린 景福宮 의 重建을 着手했다. 景福宮은 朝鮮時代의 法宮으로 太祖가 創建한 것인데 1592年 (宣祖 25年) 壬辰倭亂 때 타버린 後 國家의 財政이 不足하여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있었다. 順調 (純祖) 末葉에 驍名世子 가 重建을 計劃하다가 일찍 죽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憲宗 때도 計劃은 했으나 實行하지 못하였다.

經過 [ 編輯 ]

興宣大院君은 1865年 4月 26日 (高宗 2年 陰曆 4月 2日 ) 高宗 의 垂簾聽政을 하던 신정왕후 의 指示로 [2] 景福宮 重建의 計劃을 發表하고 營建圖鑑(營建都監)을 두어 工事에 着手하니 찬·반의 意見이 紛紛했으나 大院君이 그 總責任을 맡고 일을 그대로 推進했다.

처음에는 百姓들의 負役에 愼重을 期하고 官吏와 一般 百姓 및 宗親(宗親)들에게 고루 願納錢을 强制로 바치게 하였으므로 [3] 自進하여 賦役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4] 大院君도 이들을 위해 慰勞金도 支給하고 舞童對(舞童隊)·農樂隊(農樂隊) 或은 男사당牌를 動員하여 激勵·鼓舞하여 工事는 順調롭게 進行되었다. 큰 材木(材木)李 必要하여 陵(陵)의 山林에서도 나무를 베어다 썼는데, 다음 해 陰曆 3月에 再牧場에 큰 불이 나서 建築 作業 全體에 큰 支障을 招來하였다.

1866年 3月 火災가 發生, 전각과 材木이 消失되자 흥선大院君 은 大怒하여 흥인군 이경하 를 投獄, 處刑하려고 했으나 重臣들의 挽留로 그만두었다. 當時 마감龍 木材에 기름漆을 하는 倉庫에서 불이 나 800餘 칸에 쌓아 둔 木材가 모두 타버려 工事가 中斷될 處地에 놓였다. 工事를 始作한지 1年 만의 일이었다. [5] 흥선大院君 은 工事 責任者인 이경하 와 흥인군을 불러 面前에서 크게 叱責하며 極刑에 處하도록 했으나 여러 朝廷 大臣들의 諫言으로 原狀 復舊의 責任만 지게 되었다. [5]

只今까지 伐木한 나무는 國有林에서 가져온 것이니 只今부터는 山 主人과 墓 主人의 許諾 與否는 相關하지 말고 私有林에서 伐木하도록 하라! [5]

그러나 이경하 흥인군 木材 가 더 以上 나올 곳이 없다며 오히려 罪를 請했다. 이에 興宣大院君은 크게 火를 냈다. [5]

그러나 大院君은 初志一貫하여 工事를 推進시켜서 江原道·咸鏡道의 材木은 뗏木으로 運搬해 오고, 各處에서 石材(石材)를 모아들이는 한便 서낭堂의 큰 돌이나 材木도 供出케 하고, 兩班 집안의 墓地에서도 木材를 마구 베어 왔다. 經費가 차차 壅塞해지자 願納錢을 받고 벼슬을 파는가 하면 稅金을 올리고, 甚至於는 서울의 城門을 出入하는 데도 稅金을 賦課하고 當百錢 을 發行하는 等 無理한 일을 强行하였다.

이리하여 1872年 (高宗 9) 朝鮮 末期의 建築·工藝·美術의 決定(結晶)이라고 할 만한 景福宮의 重建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일은 結果的으로 兩班 貴族으로부터 一般 百姓에 이르기까지 怨望의 對象이 됐으며, 經濟的인 破綻을 招來하여 大院君 沒落의 한 原因이 되었다.

나비效果 日帝强占期 의 間接的인 原因이 되었는데 朝廷의 豫算으로 景福宮을 重建할 게 아니라 兵力을 훈련시키고 軍事力을 增進시키는 데에 使用했더라면 日帝强占期를 막을 수 있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이유원 과 翼弦]]李 景福宮 重建의 相當數 大量 흥선臺 에게 痛烈한 痛駁이 섞인 警告 및 一喝과 함께 辛辣히 批判.
  2. 《고종실록》(卷2 高宗2年 4月2日)
  3. “朝鮮時代 强制 寄附金은?…'LG 考試'에 1萬餘名 몰려” . 머니투데이. 2017年 10月 14日.  
  4. “景福宮 重建 천일의 記錄 : 네이버 統合檢索” . 2020年 3月 20日에 確認함 .  
  5. 尹孝貞, 《大韓帝國아 亡해라: 百姓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亡國史》 (다산초당, 2010) 16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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