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單獨] “‘5·18 光州’ 最初 報道한 記者는 故 유영길 監督이었다”|신동아

[單獨] “‘5·18 光州’ 最初 報道한 記者는 故 유영길 監督이었다”

當時 美 CBS 放送記者…着劍한 戒嚴軍 最初 撮影 報道 밝혀져

  • 김승재 言論人

    phantom386@daum.net

    入力 2021-09-01 09:16:06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8月의 크리스마스’ 撮影監督, CBS 記者로 光州 누벼

    • 5月 19日, 言論人 最初 戒嚴軍 暴力 鎭壓 取材

    • CBS 뉴스 통해 柳 監督 映像 放送…光州 慘狀 알린 첫 報道

    • 아내 “男便은 ‘光州 衝擊’으로 오랫동안 괴로워해”

    • 家族한테 避해 갈까 “光州 取材” 알리지 않아

    • ‘목숨 걸고’ 取材?撮影現場 뛰어든 人間 유영길

    영화 ‘꽃잎’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감독으로 각종 영화제를 석권한 유영길 촬영감독. 고인은 1980년 5월 미국 CBS 방송 영상 기자로서 광주항쟁 현장을 취재해 세상에 알린 것으로 확인됐다. [김명자 제공]

    映畫 ‘꽃잎’ ‘아름다운 靑年 전태일’ ‘8月의 크리스마스’ 撮影監督으로 各種 映畫祭를 席卷한 유영길 撮影監督. 故人은 1980年 5月 美國 CBS 放送 映像 記者로서 光州抗爭 現場을 取材해 世上에 알린 것으로 確認됐다. [김명자 提供]

    5·18 光州民主化運動(光州抗爭) 現場을 最初로 撮影해 世上에 알린 言論人은 高(故) 유영길(1935~1998) 撮影監督으로 確認됐다. 柳 監督은 映畫 ‘꽃잎’ ‘아름다운 靑年 전태일’ ‘8月의 크리스마스’ 等의 撮影監督으로, 韓國 리얼리즘 映像 美學의 代父로 評價받는다. 그가 ‘5月 光州’ 抗爭 現場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 戒嚴軍의 過激鎭壓이 始作되는 瞬間을 捕捉한 言論人이라는 事實은 그동안 全혀 알려지지 않았다. 올해 設立된 ‘힌츠페터 國際報道賞 組織委員會’(組織委)가 抗爭 41年餘 만인 올 8月, 柳 監督의 活動을 뒤늦게 把握했다. 光州抗爭 初期 緊迫한 狀況이 柳 監督의 카메라를 통해 世上에 알려진 點을 確認한 組織위는 이 功勞를 認定해 柳 監督에게 ‘힌츠페터 國際報道賞 五月의 光州上’을 授與하기로 決定했다. 施賞式은 10月 27日 서울에서 열린다.

    美 CBS 記者로 ‘光州 現場’ 뛰어든 유영길

    그동안 國內外 여러 媒體는 고(故)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가 光州抗爭을 世界 最初로 撮影한 言論人이라고 紹介해왔다. ‘힌츠페터 國際報道賞’은 힌츠페터처럼 透徹한 記者精神으로 世界 民主主義와 人權 守護 現場에서 奮鬪하는 映像 記者들을 致賀하고자 制定한 賞이다. 每年 本像과 더불어 功勞賞 格인 ‘五月의 光州上’을 授與한다. 組織위는 올해 첫 ‘五月의 光州上’ 受賞者를 選定하는 過程에서 柳 監督의 活躍相을 알게 됐다고 한다. 나준영 組織위 委員(韓國映像記者協會長)의 說明이다.

    “言論界에서는 前부터 힌츠페터 記者에 앞서 光州抗爭 現場을 撮影한 記者가 存在한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 人物을 確認하고자 여러 사람을 接觸하고 資料를 찾다가 그 主人公이 바로 柳 監督이라는 걸 把握하게 됐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의 活動을 紹介할 수 있게 돼 多幸이다. 光州抗爭 現場에 처음 뛰어들어 慘狀을 世界에 알린 記者가 韓國人이라는 事實이 뒤늦게나마 드러났다는 點에서 큰 意味가 있다고 본다.”

    筆者 亦是 힌츠페터 國際報道賞 審査委員 資格으로 이 調査에 同參했다. 이를 바탕으로 光州抗爭 當時 美國 CBS 放送社 所屬 映像 記者로 일한 柳 監督의 活動相을 紹介하려 한다.

    그에 앞서 힌츠페터 記者의 光州 取材 過程부터 살펴보자. 힌츠페터가 光州에 가게 된 것은 獨逸 東아시아 宣敎會 所屬 파울 슈나이스 牧師 夫婦 德分이다. 슈나이스 牧師가 光州트라우마센터 消息紙에 寄稿한 ‘힌츠페터와 1980年 5月’이라는 題目의 글에 따르면, 슈나이스 牧師는 1980年 5月 中旬 日本 도쿄에 있었다. 그의 日本人 아내는 다른 宣敎師 아내와 함께 서울 조선호텔에 묵고 있었다. 이곳에서 슈나이스 牧師 아내가 韓國人 親舊로부터 光州 狀況을 처음 接했다. 光州와 全羅道는 野圈 指導者 김대중(DJ)을 支持하는 地域인데, 現在 休戰線을 지키던 軍이 急히 光州로 移動하고 있다는 內容이었다. 아내는 슈나이스 牧師에게 電話를 걸어 이 消息을 알렸다. 슈나이스 牧師는 곧바로 도쿄에 있는 獨逸 公營放送 記者 等에게 이 事實을 傳達했다. 이로써 當時 獨逸 第1公營放送(ARD-NDR) 日本 駐在 映像 記者이던 힌츠페터가 光州로 向하게 된 것이다.



    힌츠페터가 光州에 到着한 것은 1980年 5月 20日 午後였다. 光州抗爭 發生 사흘째다. 힌츠페터는 卽時 現場 狀況을 撮影하고, 다음날인 21日 午前 撮影 테이프를 챙겨 金浦空港으로 向했다. 當時 外信은 國內에서 海外로 映像을 電送할 수 없었다. 가장 빠른 方法은 撮影 테이프를 들고 日本 도쿄에 가는 것이었다. 힌츠페터는 도쿄空港에 내려 現地 關係者에게 撮影 테이프를 傳達한 뒤 곧 다시 光州로 向해 5月 23日부터 27日까지 取材를 繼續했다.

    1980年 5月 19日 ‘暴力的 示威 鎭壓’ 카메라에 담아

    유영길 撮影監督 움직임은 이보다 빨랐다. 柳 監督은 1980年 5月 當時 美國 CBS 서울支局 映像 記者였다. 그해 5月 19日 光州 東區廳이 作成한 狀況 日誌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10時 25分 美國 CBS 記者 3名이 撮影機와 마이크를 携帶하고 商工會議所 屋上으로 올라갔음.”(상황 日誌 參照)

    1980년 5월 19일 광주 동구청이 작성한 상황 일지 일부. 유영길 감독 등 CBS 취재진이 광주항쟁 현장을 취재했음을 보여준다.  [5‧18 기념재단 제공]

    1980年 5月 19日 光州 東區廳이 作成한 狀況 日誌 一部. 유영길 監督 等 CBS 取材陣이 光州抗爭 現場을 取材했음을 보여준다. [5?18 記念財團 提供]

    이 세 名 中 한 名이 바로 柳 監督이다. 當時 CBS에서 光州抗爭 記事를 報道한 記者는 서울에 있던 것으로 確認됐다. 따라서 柳 監督을 除外한 2名은 運轉技士 等 現地 助力者일 것으로 보인다. 東區廳 狀況日誌의 이 內容은, 光州抗爭 當時 公式 行政文書에 記錄된 最初의 現場 取材陣 同鄕이라는 點에서도 눈에 띈다.

    柳 監督이 現地 助力者와 함께 5月 19日 午前 10時 25分 商工會議所 屋上에 올라간 것을 보면, 그는 늦어도 5月 18日 午後엔 光州에 到着해 現地 助力者를 求하는 等 取材 準備 作業을 했을 것으로 推定된다. 柳 監督 아내 金明子(82) 씨는 筆者에게 當時 狀況을 說明하며 “男便이 日本에서 休暇를 보내다 갑자기 光州로 急派됐다”고 말했다. 金 氏에 따르면 柳 監督은 一週日 日程으로 日本에 가 있었다. 映畫 關聯 일 때문이었다고 한다. 映畫는 柳 監督에게 平生 가장 큰 關心事여서, 그는 CBS 記者로 일하면서도 틈틈이 休暇를 내고 映畫 撮影 關聯 일을 했다고 한다.

    金 氏는 1980年 5月 그때 日本에 있는 줄 알았던 男便이 “光州에 와 있다”고 電話를 걸어와 깜짝 놀랐다고 한다. 柳 監督은 아내에게 “여기는 많이 危險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當身도 몸操心해라. 異常한 사람이 찾으면 絶對 나가지 마라. 當分間 날 찾지도 마라.”

    柳 監督은 며칠 뒤 다시 집에 電話를 걸었다. 이番엔 “只今 新聞이나 放送에 光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對한 報道가 나오느냐”고 물었다. 金 氏가 “아무 뉴스도 없다”고 하자 크게 失望하면서 電話를 끊었다고 한다.

    光州 取材를 마치고 돌아온 後 柳 監督은 아내에게 自身이 겪은 衝擊的인 일을 털어놓았다. 平素 집에서 일에 對해 좀체 말하지 않는 性格이었는데, 그때만은 달랐다는 게 金 氏 傳言이다. 그에 따르면, 柳 監督은 光州抗爭 期間 中 어느 날 밤 四方이 깜깜해진 뒤 現地 大學生 도움으로 어느 山 中턱에 올랐다. 그곳에서 大學生 10~20名이 討論을 하고 있었다. 柳 監督은 이들과 함께 늦게까지 對話를 나눈 뒤 “來日 아침 6時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宿所로 돌아갔다. 그런데 約束 時間에 다시 現場에 가보니 大學生 모두가 銃에 맞아 숨을 거둔 狀態였다.

    光州抗爭 取材 以後 柳 監督은 現地에서의 記憶 때문에 자주 괴로워했다고 한다. 술에 醉한 채 夫人에게 “더는 記者 일을 하고 싶지 않다. 무섭다. 괴롭다”고 하소연한 일도 있다. “너무도 끔찍한 일이 都市 한복판에서 벌어졌는데, 國內 어느 言論도 이러한 事實을 報道하지 않는다”며 鬱憤을 吐하고 “왜 大學生들이 銃에 맞아 죽고, 無辜한 市民이 그토록 悲慘하게 죽어가야 했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하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當時 高等學校 敎師이던 金 氏도 柳 監督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고 한다.

    着劍한 채 示威 鎭壓하는 戒嚴軍 모습 생생히 捕捉

    柳 監督이 撮影한 映像은 5月 19日 美國 CBS 이브닝뉴스를 통해 처음 放送됐다. 世界 最初로 光州의 慘狀이 公開된 瞬間이었다.(CBS 報道 캡처) 當時 記事를 쓰고 報道한 記者는 CBS 도쿄支局 特派員이던 브루스 더닝이다. 그는 연세대 等 서울地域 示威 狀況을 取材하러 光州抗爭 以前부터 서울에 와 있었다. 5月 19日 報道 當時 더닝은 서울에 머물며 柳 監督이 撮影한 映像을 利用해 記事를 作成했다. 當時 映像에는 軍이 탱크를 몰고 光州市內에 들어오는 모습, 銃과 棍棒을 든 軍人이 市民을 暴行하는 모습, 市民이 悽絶하게 피를 흘리며 길가에 쓰러진 모습, 젊은 男性 여러 名이 悲慘한 모습으로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强制 連行되는 光景 等이 생생하게 담겼다. 모두 柳 監督이 現場에서 撮影해 보낸 것이다.

    1980년 5월 미국 CBS 뉴스에 보도된 광주항쟁 당시 모습. 한 시민이 피를 흘리며 길가에 쓰러진 이 모습은 유영길 감독이 촬영한 것이다. [한국영상기자협회 제공]

    1980年 5月 美國 CBS 뉴스에 報道된 光州抗爭 當時 모습. 한 市民이 피를 흘리며 길가에 쓰러진 이 모습은 유영길 監督이 撮影한 것이다. [韓國映像記者協會 提供]

    1980년 5월 미국 CBS 뉴스에 보도된 광주항쟁 당시 모습. 젊은 남성 여러 명이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강제 연행되는 광경은 유영길 감독이 촬영한 것이다. [한국영상기자협회 제공]

    1980年 5月 美國 CBS 뉴스에 報道된 光州抗爭 當時 모습. 젊은 男性 여러 名이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强制 連行되는 光景은 유영길 監督이 撮影한 것이다. [韓國映像記者協會 提供]

    이재의 5·18記念財團 硏究委員은 光州 東區廳 狀況日誌와 美國 CBS 5月 19日 리포트 映像 및 아카이브 映像(劉 監督이 5月 19日 撮影한 映像 全體)을 比較한 뒤 이렇게 分析했다.

    “CBS 映像은 東區廳 3層 屋上에서 5月 19日 午前 10時 30分부터 12時 사이에 撮影한 것이 確實하다. 東區廳 狀況日誌를 보면 當日 午前 11時 戒嚴軍(11空輸旅團 61大隊 所屬) 小委가 돌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다는 描寫가 나온다. 柳 監督 映像 가운데 이 內容과 正確히 一致하는 場面이 보인다. 또 軍 資料에 따르면 5月 19日 午前 東區廳이 있는 금남로 一帶에 群衆이 雲集瑕疵 11空輸旅團 61大隊가 鎭壓作戰을 벌였다. 그 結果 點心時間 以後부터는 示威隊가 금남로 아래쪽으로 밀려났다. 柳 監督 映像은 아직 示威隊가 금남로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示威隊와 戒嚴軍의 衝突 初期 모습을 撮影한 것이다. 戒嚴軍의 一方的 過激鎭壓이 始作되는 바로 그 時間, 그 場所를 記錄했다는 點에서 意味가 크다.”

    이 委員이 꼽은 이 映像의 史料的 價値는 또 있다. 戒嚴軍이 帶劍을 銃口 쪽에 꽂고 있는 이른바 ‘着劍(着劍)’ 모습이 鮮明히 捕捉된 點이다. 軍은 1988年 光州抗爭 國會聽聞會 當時 着劍 事實을 줄곧 否認했다. 當時 示威隊 鎭壓에 나섰던 11空輸旅團 61大隊長 安某 中領은 1995年 12月 31日 檢察搜査에서조차 “제가 아는 範圍 內에서는 저희 大隊는 大檢을 使用한 적이 없고 示威者를 逮捕한 事實도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柳 監督 映像으로 인해 이 陳述은 거짓임이 確認됐다. 戒嚴軍이 光州抗爭 初期부터 이미 着劍을 할 程度로 示威隊를 過激 鎭壓했음도 드러났다.

    30年 映畫 人生 속 15年 記者로서의 삶

    기자 시절 유영길 감독의 모습. [김명자 제공]

    記者 時節 유영길 監督의 모습. [김명자 提供]

    柳 監督은 CBS 서울支局 映像 記者로 1975年부터 1991年까지 15年 程度 일했다. 柳 監督 아내 金 氏가 들려준 柳 監督의 CBS 入社 背景은 매우 興味롭다. 柳 監督은 6·25 戰爭 當時 15歲 어린 나이에 學徒兵으로 끌려갔다가 美國人 從軍記者 눈에 띄었다. 이 從軍記者는 撮影 才能이 엿보이는 柳 監督을 特別히 챙겨줬고, 戰爭 後 柳 監督이 高等學校에 進學할 수 있도록 經濟的 支援도 해줬다고 한다.

    柳 監督은 以後 仁荷大 工大 1學年 時節 映畫 撮影 現場에 놀러가 일을 도와주다 映畫와 因緣을 맺고, 大學 中退 後 本格的으로 撮影의 길로 들어섰다. 1968年 고 유현목 監督 映畫 ‘나도 人間이 되련다’를 통해 撮影監督으로 데뷔했다. 그러던 어느 날, 6·25 때 만난 그 從軍記者가 有名 言論人이 돼 韓國에 왔다. 그는 搜所聞 끝에 柳 監督을 찾아 CBS 서울支局 映像 記者 자리를 提案했다. 當時 映畫 일은 배고픈 職業이어서 撮影監督만 하면서는 먹고 살기 힘들었다. 柳 監督은 記者職 提案을 받아들이며 條件을 하나 걸었다. “映畫를 1年에 한 篇은 撮影하게 해 달라”였다. 柳 監督은 以後 50代 中盤까지 CBS 映像 記者로 活動하면서 同時에 다양한 映畫도 撮影했다. 撮影監督으로서 그가 韓國 映畫界에 남긴 足跡은 굵고 華麗하다. 反面 記者로서의 삶은 相對的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柳 監督은 光州抗爭을 素材로 한 장선우 監督 映畫 ‘꽃잎’ 撮影監督 時節, 言論 인터뷰에서 自身의 過去 經驗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1995年 10月의 일이다. 當時 ‘꽃잎’ 撮影팀은 光州에서 戒嚴軍이 市民을 向해 처음 發砲한 5月 21日 狀況을 撮影하고 있었다. 柳 監督은 ‘한겨레’ 記者에게 5月 21日 光州 狀況을 이렇게 說明했다.

    “當時 나는 美國 CBS 撮影記者로 光州에서 取材했다. ENG 放送 카메라는 꽤 무겁다. 이런 裝備를 지고 전남대병원으로, 또 금남로로 空輸部隊가 남긴 慘酷한 痕跡을 찍으러 다녔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한 市民이 배터리를 代身 들어주겠다고 해서 고맙다며 건네줬다. 그런데 混亂 속에 그만 배터리를 든 市民과 헤어지고 말았다. 結局 배터리를 求하러 全南 將星으로 가게 됐다. 當時 將星에는 外信記者가 많이 모여 있었다. 光州市內 通信이 모두 끊기고, 將星郵遞局에만 回線 單 하나가 살아남은 狀態였기 때문이다. 外信記者들이 送稿를 위해 다 그곳에 모여 있었다. 거기 간 사이, 戒嚴軍이 光州에서 市民을 向해 發砲했다. 當時 場面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이 繼續 恨(恨)으로 남아 있다.”

    5月 21日 戒嚴軍 發砲 場面은 어느 言論도 捕捉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이 인터뷰에는 柳 監督이 5月 19日 言論인 最初로 光州抗爭을 撮影했다는 內容은 없다.

    ‘힌츠페터 神話化’를 넘어

    이처럼 國內에서 ‘光州 속 유영길’의 重要性은 아무도 몰랐다. 反面 힌츠페터에 對한 關心은 可히 暴發的이었다. 그는 光州抗爭을 象徵하는 言論人으로 통했다. 힌츠페터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映畫, 言論 報道가 쏟아졌다. 代表的인 것으로 2003年 KBS 다큐멘터리 ‘80年 5月, 푸른 눈의 目擊者’, 2017年 張勳 監督 映畫 ‘택시 運轉士’, 2018年 장영주 監督 다큐멘터리 映畫 ‘5·18 힌츠페터 스토리’ 等을 꼽을 수 있다. 힌츠페터는 2003年 송건호 言論賞을 받기도 했다.

    問題는 힌츠페터에 對한 關心이 高調되면서 神話化, 偶像化 傾向까지 나타났다는 點이다. 代表的인 것이 “光州의 慘狀을 世界 最初로 撮影해 알린 記者”라는 타이틀이다. 앤드류 잭슨 濠洲 모나쉬대 韓國學科 敎授는 지난해 1月 이런 現象의 問題點을 꼬집은 論文 ‘1980年 光州抗爭의 위르겐 힌츠페터와 外信 特派員’을 發表했다. 그는 힌츠페터가 世界 最初로 光州抗爭을 알린 記者로 認識되고 있지만, 實際로는 光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밝힌 여러 記者 가운데 한 名이었을 뿐이라고 强調했다. 그러면서 오직 힌츠페터만 記憶하고 높이 評價하는 것은 問題라고 指摘했다. 잭슨 敎授는 韓國에서 製作한 여러 다큐멘터리와 映畫, 뉴스 報道 等을 具體的으로 言及하며 “當時 光州抗爭 狀況을 最初로 報道한 言論社는 美國 CBS인데, 相當數 文獻이 힌츠페터를 最初 報道者로 紹介하는 誤謬를 犯했다”고도 批判했다.

    美國 CBS가 光州抗爭을 世界 最初로 報道했다는 事實을 確認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제임스 라슨 韓國뉴욕주립朱代 敎授가 1990年 發表한 論文 ‘텔레비전 時代의 조용한 外交: 韓國에 對한 言論과 美國의 政策’에도 光州抗爭 消息이 5月 19日 美國 CBS 이브닝뉴스에 처음 報道됐다는 事實이 적혀 있다. 그럼에도 힌츠페터 映像이 널리 알려지고 注目받게 된 背景에는 映像著作權 問題가 있다는 分析도 나온다. 한원상 組織委員長의 說明이다.

    “獨逸 言論界는 創作者(촬영자)가 映像物의 著作者 地位를 갖는 것을 認定한다. 創作者는 所屬 言論社의 利益에 反하지 않는 限度에서 一定한 水準의 利用權을 갖는다. 反面 美國은 創作者 權利를 制限한다. 創作者라 해도 個人이 直接 映像을 利用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兩國의 差異 때문에 힌츠페터 撮影物이 世界的으로 擴散한 反面 CBS 資料는 相對的으로 덜 알려졌다고 본다.”

    光州抗爭 以後 基督敎界를 中心으로 한 國內 市民社會團體는 世界 곳곳에 當時의 慘狀을 알리고자 애썼다. 힌츠페터 映像을 中心으로 여러 外信 報道 內容을 編輯해 만든 비디오테이프가 重要한 手段 가운데 하나였다. 이 映像에는 CBS를 비롯한 여러 放送社 뉴스가 包含돼 있지만, 힌츠페터 映像이 主를 이루다 보니 視聽者는 모든 映像을 힌츠페터가 撮影한 것으로 誤解하기 쉬웠다.

    勿論 光州抗爭을 取材한 言論人으로서 힌츠페터의 努力과 業績은 決코 否認할 수 없다. 當時 光州에 있던 記者 가운데 그만큼 많이 움직이며 現場을 取材하고 以後에도 持續的으로 關心을 기울인 이는 없다. 힌츠페터는 50分짜리 다큐멘터리 ‘岐路에 선 韓國’을 통해 光州抗爭을 集中 照明하기도 했다.

    다만 國內 어느 言論이나 學者도 光州에서 活動한 映像 記者 유영길의 存在를 照明하지 못한 點은 아쉬운 일이다. 아내 金 氏는 “柳 監督은 自身이 光州抗爭을 最初로 撮影한 記者인 걸 알고 있었지만 그 事實을 積極的으로 알리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고 傳했다. 甚至於 子女들에게조차 光州에서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或是라도 家族이 안 좋은 일을 當하게 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光州抗爭 以後 柳 監督이 作故한 1998年까지 大韓民國의 政治 社會 狀況을 보면 그가 걱정한 理由를 斟酌할 만도 하다.

    “무엇이든 한 番 빠지면 깊이 沒頭했던 사람”

    아내 金 氏에게 柳 監督은 무슨 일이든 한 番 빠지면 매우 깊이 沒頭하는 사람, 自己 感情을 잘 表現하지 않는 寡默한 사람, 家族보다 映畫를 더 사랑한 사람이었다. 金 氏는 映像 記者 유영길에 對해 크게 두 가지를 記憶하고 있다. 첫 番째가 光州抗爭 取材 後 괴로워하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1988年 百潭寺에서 隱遁生活을 하던 전두환 前 大統領 夫婦를 撮影하고 돌아왔을 때의 모습이다. 그때도 어느 날 훌쩍 出張을 갔던 柳 監督이 며칠 만에 집에 들어왔는데 손발과 얼굴 여기저기가 얼어붙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柳 監督은 집에 들어서면서 夫人에게 딱 한 마디를 했다.

    “特種했다.”

    柳 監督 입에서 特種이란 말이 나온 건 이때가 唯一했다고 한다. 當時 柳 監督은 百潭寺 附近에서 빵과 牛乳만 먹으며 오랜 時間을 버틴 끝에, 言論社 最初로 전두환 前 大統領 夫婦의 ‘流配’ 모습을 撮影하는 데 成功했다.

    그렇다면 撮影監督으로서의 男便은 金氏 記憶에 어떻게 남아 있을까. 金氏는 “늘 苦悶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고 回顧했다. 映畫 ‘아름다운 靑年 전태일’을 撮影할 때는 하이라이트인 焚身 場面 撮影을 앞두고 一週日假量 苦悶에 苦悶을 거듭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전태일 焚身 當時의 狀況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撮影 途中 幸여 俳優나 스태프가 다치는 것은 아닐까?” 等이 苦悶의 主題였다. 그렇게 힘들던 撮影을 마치고 歸家해서는 이틀을 앓아누웠다. 映畫 ‘꽃잎’ 撮影 때도 마찬가지였다. 撮影을 마무리하고 며칠을 끙끙 앓았다. 한 가지에 沒頭하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붓고 結局 脫盡해 쓰러지는 것이 ‘人間 유영길’의 特徵이었던 셈이다.

    映畫 爲해 瀑布에 몸을 내던진 撮影監督

    ‘東亞日報’ 2006年 2月 15日子에 실린 ‘백형찬의 文化칼럼’에는 ‘撮影監督 유영길’의 特徵을 잘 보여주는 逸話가 담겼다. 하길종 監督 映畫 ‘한네의 昇天’ 撮影 當時 일이다. 이 映畫는 韓國的 샤머니즘을 主題로 ‘한네’라는 女性의 悲劇的 사랑을 다루고 있다. 當時 칼럼 一部를 그대로 옮긴다.

    “映畫 撮影 現場에서 있었던 일이다. 瀑布에서 女人이 떨어지는 場面을 찍어야 하는 狀況이었다. 人形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代身해 봤지만 아무래도 生動感이 없었다. 하지만 너무 危險한 일이어서 演技者는 勿論 스턴트맨까지도 벌벌 떨며 무서워했다. 아무도 나서질 않았다. 이때 카메라를 잡고 있던 撮影監督이 女子 韓服으로 갈아입고 瀑布 위로 올라가 몸을 던졌다. 그 한 場面을 찍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내렸던 것이다. 그 撮影監督은 한 作品 한 作品에 魂을 담아 찍었다. 그래서 觀客들은 그가 撮影한 映畫에서 깊은 感動을 받았고 그 作品들은 韓國映畫 가운데 名作으로 評價받고 있다. ‘8月의 크리스마스’ ‘草綠물고기’ ‘하얀 戰爭’ 等이다. 그 撮影監督이 바로 故 유영길 氏다.”

    柳 監督은 1998年 映畫 ‘8月의 크리스마스’를 撮影하다 腦出血로 世上을 떠났다. 享年 63歲였다.

    撮影監督으로서 그의 足跡은 豐富하다. 柳 監督과 함께 한 映畫人들은 하나같이 그의 映畫 사랑과 熱情에 歎服하고 敬意를 표한다. 光州抗爭 41年이 지난 時點에 이제는 ‘映像 記者 유영길’도 正確하게 記憶해야 할 때다. 柳 監督의 平素 持論은 映畫人으로서든 記者로서든 삶을 對하던 그의 哲學을 잘 담고 있다.

    “좋은 構圖는 없다. 하지만 나쁜 構圖는 있다. 作爲的인 것은 나쁜 構圖다.”

    #光州抗爭첫報道 #유영길撮影監督 #光州民主化運動 #힌츠페터 #新東亞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