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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民地 朝鮮의 ‘少年 家長’ 世界的 碩學이 되다 [卒記]|新東亞

植民地 朝鮮의 ‘少年 家長’ 世界的 碩學이 되다 [卒記]

世界 政治學界에 韓國 알린 故 이정식 펜실베이니아大 敎授

  • 송화선 記者

    spring@donga.com

    入力 2021-09-1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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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아’를 통해 본 故 이정식 敎授의 삶

    • 韓國 共産主義 硏究로 美國政治學會 最優秀著作賞 受賞

    • “解放 後 政治學의 새로운 方向 提示한 獨步的 學者”

    • “스탈린은 信託統治에 反對했다” 等 硏究 結果 ‘신동아’에 發表

    • 幼年期 네 次例 戰爭 겪으며 한·중·일어와 英語 習得

    • 初等 卒業 學歷으로 渡美, UCLA·UC버클리에서 工夫

    • “누구에게나 機會는 온다. 利用하려면 最善의 努力해야”

    한국이 낳은 세계적 정치학자 故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동아DB]

    韓國이 낳은 世界的 政治學者 故 이정식 美國 펜실베이니아大 敎授. [東亞DB]

    略歷
    ● 1931年 平南 安住 出生, 세 살 때 滿洲로 移住
    ● 1948年 北韓으로 歸國
    ● 1950年 서울路 避亂, 國民防衛軍 士官學校 入學
    ● 1951~53 美軍 飜譯通譯事業部隊(ADVATIS)
    ● 1954年 美國 UCLA 政治學科 入學
    ● 1957年 美國 UC버클리 博士課程 入學
    ● 1963年 美國 펜실베이니아對 政治學과 敎授 任用
    ● 1973年 스칼라피노 敎授와 共著로 ‘韓國共産主義運動史’ 出刊
    ● 美國政治學會 ‘最優秀 著作賞’(1974), 韋菴 張志淵 學術賞(1990), 경암學術賞(2012), 인촌賞(2018) 等 水上


    8月 17日(現地 時間) 美國 필라델피아에서 別世한 故(故) 이정식 美國 펜실베이니아對 名譽敎授(1931~2021)는 韓國이 낳은 世界的 政治學者였다. 李 敎授가 故(故) 로버트 스칼라피노 美國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敎授(1919~2011)와 共同 著述한 ‘韓國共産主義運動史(Communism in Korea)’는 韓國 共産主義의 起源 및 變化狀을 探究한 紀念碑的 著書로 손꼽힌다. 李 敎授는 이 冊으로 1974年 美國政治學會 ‘最優秀 著作賞’을 받았다. 1年에 單 한 卷만 施賞해 世界的으로 權威를 인정받는 賞이다.

    以後에도 이 敎授는 韓國 및 東아시아 現代 政治 分野를 꾸준히 硏究하며 西歐의 韓國學 硏究를 이끌었다. 그 成果로 1990年 胃癌(韋菴) 장지연 學術賞, 2012年 경암學術賞, 2018年 인촌賞 等을 받기도 했다. 이홍구 前 國務總理는 “이정식 敎授는 解放 後 韓國 社會科學, 特히 政治學의 새로운 方向과 基準을 提示한 獨步的 學者”라고 評했다.

    “스탈린 信託統治 反對” 新東亞 寄稿文 社會的 反響

    李 敎授는 自身의 硏究 結果를 바탕으로 社會와 疏通하는 데도 積極的이었다. 李承晩, 서재필, 呂運亨 等 韓國 現代史 主要 人物에 對한 著作을 多數 펴냈다. 月刊 ‘신동아’에도 꾸준히 硏究 結果를 發表했다. 美國 펜실베이니아對 政治學과 敎授로 任用된 지 3年 만인 1966年 ‘신동아’ 11月號에 “美國에서의 北韓硏究”에 對한 글을 寄稿한 以後 數十 年間 ‘신동아’와 因緣을 이어갔다. 그中에서도 ‘신동아’ 1993年 12月號에 揭載한 “스탈린은 韓半島 信託統治를 反對했다”, 2007年 9月號의 “呂運亨은 左翼(박헌영派)李 使嗾한 테러에 當했다” 等의 硏究는 社會的으로 큰 反響을 일으켰다.

    李 敎授가 日帝强占期 平安南道(平南)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少年 家長’으로서 中國 滿洲와 南·北韓을 오가는 苦難의 幼年期를 보낸 經驗을 털어놓은 곳도 ‘신동아’였다. ‘신동아’는 1997年 8月號부터 10月號까지 3回에 걸쳐 ‘재미 政治學者 이정식 回顧錄’(回顧錄)을 실었다. 이 글 첫 文章은 이렇게 始作한다.



    “나는 참으로 異常야릇한 八字를 타고난 사람인 것 같다.”

    이어 이 敎授가 돌아본 삶의 旅程은 이렇다.

    “平南 시골의 普通學校 先生의 長男으로 태어난 나는 남들같이 平穩한 人生길을 걷지 못하고 어린 時節을 波瀾萬丈 속에서 지냈다. 中國 양쯔江(揚子江) 上流에 있는 漢口(漢口)에서 日本 大陸 侵略의 慘狀을 目擊하기도 했고, 解放 後 3年을 中國 內政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내기도 했다. 平壤에 돌아와 共産 政權下에서 場돌뱅이 노릇을 하다가 韓國戰爭의 쓰라린 맛을 보았고, 南으로 내려와서는 中共(中共) 捕虜를 訊問하는 일도 했다. 그리고 어쩌다 美國 留學길에 올라서는 할리우드 映畫俳優 노릇도 해보았고 食堂보이 노릇도 3年 했는데, 結局 大學敎授로 落着돼 지내고 있다. 나처럼 많은 種類의 軍隊를 겪어보고, 여러 政權 밑에서 살아봤으며, 많은 種類의 職業을 가져본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滿洲의 嚴冬雪寒에 눈을 치우던 淸掃夫, 中國 工場의 使動(使童), 病院 助手, 平壤의 米穀商(米穀商)李 美國의 大學敎授가 됐으니 異常한 八字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李 敎授는 自己 삶을 “激動的인 國際政治와 中國 政治, 그리고 韓半島 現代史의 激浪에 밀려다녔다”고 整理했다. 그러면서 “내가 後에 學者가 돼 東洋의 國際政治를 硏究하고, 日本과 中國 政治를 가르치며, 韓國 現代史를 硏究하는 敎授가 된 건 우연한 일이 아닌지 모른다”고 했다.

    激動의 國際 情勢에 휘말린 ‘少年 家長’의 삶

    이정식 교수(왼쪽)는 평생 동아시아 역사 및 정치 연구에 헌신한 공로로 2018년 인촌상을 받았다. [동아DB]

    이정식 敎授(왼쪽)는 平生 東아시아 歷史 및 政治 硏究에 獻身한 功勞로 2018年 인촌賞을 받았다. [東亞DB]

    實際로 이 敎授는 어린 時節 中日戰爭, 第2次 世界大戰, 中國 國共內戰, 6·25戰爭 等 人類史의 慘禍를 온몸으로 겪었다. 李 敎授는 2011年 慶熙大 特講에서 이렇게 말했다.

    “戰爭은 모든 것을 破壞합니다. 그 破壞力은 너무나 慘酷합니다. 저는 여러 番의 戰爭을 겪었기 때문에 戰爭의 慘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1937年에 터진 中日戰爭을 中國 大陸에서 經驗했고, 1941年에 勃發한 太平洋戰爭(第2次 世界大戰)을 겪었으며, 滿洲에서 벌어진 中國 內戰 때는 우리 집 바로 앞 토치카에서 울려오는 機關銃 소리에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1950年에 일어난 6·25戰爭 때는 每日같이 美國 爆擊機가 爆彈을 떨어뜨리는 光景을 구경하면서 살았습니다. 숨어 있느라 어디로 逃亡갈 수도 없는 處地였습니다. 제가 戰爭을 따라다녔는지, 戰爭이 저를 따라다녔는지 모르지만 異常야릇한 八字를 타고난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時節 이 敎授 삶을 더욱 깊은 那落으로 몰아넣은 것은 아버지의 不在였다. 李 敎授 아버지는 그가 滿 열네 살이던 1946年 3月, 日帝의 降伏과 中國 內戰 等으로 混亂이 深化하던 滿洲에서 失踪되고 말았다. 當時 이 敎授 어머니는 妊娠 狀態였고, 長男인 李 敎授 아래로 여덟 살, 네 살, 한 살짜리 동생이 줄줄이 있었다.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生死조차 確認하지 못했다. 李 敎授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日本語, 中國語, 英語를 익혔다. 母國語인 韓國語를 包含해 4個 言語를 自由自在로 驅使하는 그의 能力은 以後 東아시아 政治史 硏究에 所重한 資産이 됐다. 李 敎授는 ‘신동아’ 1995年 3月號에 寄稿한 ‘外國語 배우기와 童心’이라는 글에서 自身만의 外國語 工夫法을 公開한 일이 있다.

    “말을 배우는 것은 나이와 相關이 없다. 나는 20世가 지나서 처음으로 英語를 배우기 始作했다. 始作 後 約 1年 뒤에는 쉬운 말을 곧잘 하게 되었다. 每日 英語 배우기에 沒頭했기 때문이다. 2年 後에는 水準級에 到達했다.”

    李 敎授가 亦是 ‘신동아’에 寄稿한 回顧錄에는 그 過程이 좀 더 仔細히 나와 있다. 그가 처음 英語를 工夫하기 始作한 건 6·25 때라고 한다. 當時 그는 軍人으로서 美 極東軍 總司令部 飜譯通譯事業部隊(ADVATIS)에 背馳돼 中國 및 北韓軍 砲로 新聞 任務를 맡았다. 問題는 中國語와 日本語에 能通한 反面 英語를 全혀 못 했다는 點이다. 그는 回顧錄에 이렇게 썼다.

    “美軍이 必要한 것은 英語 情報였다. 美軍은 日本語를 할 줄 아는 日本人 2歲를 ADVATIS로 보내 英語로 된 質問紙를 日本말로 바꿔 우리에게 傳達했다. 우리는 다시 捕虜에게 中國語로 質問했다. 우리는 한자리에서 每日 3個 國語를 하고 들었다. 當時 2年 동안 中國語 實力이 늘고 軍事 知識도 쌓였다. 가장 큰 收穫은 英語를 배운 것이다. 처음에는 美軍들이 하루에도 몇百 番씩 쓰는 ‘갓뎀’의 뜻을 몰랐지만 3個月이 지나니 무슨 얘기를 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半年이 지나니 거의 解得하게 됐다. 그리고 1年이 될 무렵부터는 英語를 꽤 지껄이기 始作했다.

    나는 英語를 猛烈히 工夫했다. 거기에는 지기 싫어하는 내 性格도 크게 作用했다. 時間이 날 때마다 辭典을 찾았고 出退勤 時間에는 單語를 외웠다. 그리고 休暇次 日本에 가는 美軍 將校들과 士兵들에게 日本말로 된 英語自習書들을 사달라고 付託했다. 그리고 英語로 日記를 써서 美軍 士兵들에게 고쳐달라고 付託했다.”

    이런 李 敎授 모습을 눈여겨본 軍隊 同僚들의 도움을 받아, 李 敎授는 終戰 直後인 1954年 1月 初 美國 留學길에 오른다. 當時 이 敎授는 公式的으로 ‘初等學校 卒業’ 狀態였다. 滿洲에서 中學校를 卒業하지 못한 채 아버지 失踪으로 生業에 뛰어든 탓이다. 늘 工夫에 목말랐던 李 敎授는 1951年 釜山 避亂 中 現地에 옮겨온 慶熙大 前身 신흥대에서 暫時 授業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亦是 戰爭의 混亂 속에 學位 課程을 마치지 못했다. 李 敎授는 2014年 10月 경희대에서 名譽學士 學位를 받으며 當時의 恨을 풀었다. 當初 경희대는 李 敎授에게 名譽博士 學位를 提案했지만, 그가 “只今 내게 博士學位가 무슨 所用인가”라며 “韓國에서 받지 못한 學士學位를 달라”고 請했다고 한다.

    이정식 교수가 은사 고(故) 로버트 스칼라피노 UC버클리 교수와 함께 쓴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974년 미국정치학회 최우수 저작상을 받은 기념비적 저서다.

    이정식 敎授가 恩師 고(故) 로버트 스칼라피노 UC버클리 敎授와 함께 쓴 韓國共産主義 運動史. 1974年 美國政治學會 最優秀 著作賞을 받은 紀念碑的 著書다.

    “누구에게나 機會는 온다”

    李 敎授는 美國에서 접시닦이 等으로 生活費를 벌어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代(UCLA) 學·碩士 過程을 마치고, 1957年 스칼라피노 敎授가 있는 UC버클리 博士課程에 入學했다. 當時 스칼라피노 敎授는 東아시아 共産主義에 對한 硏究를 計劃하고 있었는데, 이 敎授가 한·중·일 3個國語에 能通한 데다 日帝强占期 朝鮮과 滿洲 및 南·北韓 모두에서 生活한 履歷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大學院生으로 뽑았다고 한다. 李 敎授는 以後 스칼라피노 敎授가 入手한 日本과 中國, 北韓 資料를 통해 韓國 獨立運動과 民族主義, 共産主義 等에 對한 本格 硏究를 始作했다. 그 成果로 30代 初盤, 美國 아이비리그에 屬하는 世界的 名門 펜실베이니아大 敎授가 됐다. 李 敎授는 ‘신동아’ 回顧錄에 이렇게 썼다.

    “(中國 滿洲에서) 光復을 맞은 뒤 渡美(渡美)하기까지 8年의 歲月은 그야말로 多事多難했다. 滿洲에서 2年 8個月, 平壤에서 2年 8個月, 그리고 釜山 大邱 서울을 合해 3年이라는 期間에 每日같이 새로운 일이 벌어졌고 새로운 挑戰과 싸워야 했다. 나와 우리 家族은 困境 속에서도 참으로 놀라운 祝福을 받았다. 絶望의 時期에 뜻하지 않은 곳에서 恩人이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

    李 敎授는 以後 平生 동안 硏究를 통해 自身이 받은 ‘祝福’을 社會에 되돌리고자 努力했다. 李 敎授의 ‘신동아’ 回顧錄은 다음의 말로 마무리된다.

    “나는 누구에게도 언젠가 좋은 機會가 온다고 믿는다. 運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고도 믿는다. 運이 찾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또 찾아온 機會를 제대로 利用하기 위해서는 只今 自己가 處한 狀況에서 最善의 努力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激動期 韓民族의 辛酸한 삶을 온몸으로 겪으며 끝없는 努力을 통해 世界 韓國學 硏究의 電氣를 마련한 巨人. 韓國을 넘어 世界 政治學界가 記憶할 李 敎授의 삶을 돌아보며, 삼가 故人의 冥福을 빈다.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韓國共産主義運動史 #韓國學 #新東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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