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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大 400億 원臺 寄附 양영애·金永錫 夫婦|新東亞

인터뷰

高麗大 400億 원臺 寄附 양영애·金永錫 夫婦

“가장 稱讚받는 사람 됐으니 後悔 없는 人生”

  • 최호열

    honeypapa@donga.com

    入力 2018-11-21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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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無一푼 始作해 과일 장사로 平生 모은 全 財産 400億 快擲

    • 戰車料金 아까워 걸어 다니고, 葬事 後 食堂일 하며 끼니 解決

    • 山地까지 찾아가 좋은 과일 先占…“맛있는 과일 판다” 입所聞

    • 乳房癌 鬪病, 腦硬塞 診斷…精神 있을 때 寄附하자 決心

    • 내가 죽더라도 苦生한 보람 남으니 寄附가 相續보다 더 기뻐

    • 子息에게 相續? 自己가 힘들여 벌지 않으면 意味 없어

    [김도균 기자]

    [金度均 記者]

    株價는 暴落하고, 失業者는 늘고, 就業者 數는 갈수록 주는 팍팍한 現實이다. 쥐꼬리만 한 權力과 돈을 내세워 常識에서 벗어난 ‘甲질’을 일삼고, 不動産投機와 不淨腐敗로 自己들 배를 불리는 데만 血眼이 된 社會指導層의 行態는 안 그래도 힘겨운 國民을 더욱 悲慘하게 만든다. 살아 숨 쉬는 것조차 苦役인 時代에 ‘따뜻한 事緣’ 하나가 우리 社會를 薰薰하게 적셨다. 平生 과일 장사를 해서 모은 400億 원臺 全 財産을 大學에 寄附한 盧 夫婦 이야기다. 

    김영석(91)·양영애(83) 夫婦는 平生 안 쓰고 아껴 모은 全 財産을 子息에게 물려주지 않고, 10月 25日 形便이 어려운 學生들을 위해 써달라며 고려대학교를 經營하는 學校法人 고려중앙학원에 寄附했다. 夫婦는 1次로 市가 200 億 원臺인 땅 5筆地와 建物 4棟을 寄贈했고, 追加로 時價 200億 원臺인 나머지 不動産도 寄贈할 것을 約束했다. 이 事緣은 한동안 膾炙되며 사람들에게 ‘遺産 相續’과 ‘寄附’의 意味를 되새기게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老夫婦는 初等學校도 나오지 않은 舞鶴(無學)으로, 平生 市場거리에서 과일을 팔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는 別 關係없는 삶을 산 셈. 그럼에도 ‘社會指導層度 하기 힘든 寄附를 한 理由가 뭘까’ ‘大體 어떤 분들일까’ 하는 궁금症을 안고 11月 2日 午後 서울 청량리에 있는 老夫婦의 집을 찾았다. 양영애 어르신이 記者를 맞았다.

    고려대병원 患者保護者 出入證

    400億 원臺 資産家의 집이라기엔 너무 儉素했다. 骨董品처럼 보이는 裝飾欌과 韻致 있는 木造 裝飾品이 눈에 띄긴 했지만, “家口 工場에서 10萬 원도 안 주고 산 것”이라고 한다. 居室에 놓인 가죽 소파도 40年 前 親언니에게 얻은 것이고, 작은房엔 40年 前 장만했다는 ‘生涯 첫’ 欌籠이 놓여 있었다. “좋은 걸로 바꾸시지…”라고 하자 “아직 멀쩡한 걸 왜 바꿔요”라며 記者를 나무란다. 

    居室 壁面에 韓國化 두 點이 걸려 있다. “그림에 關心이 많으신가 봐요” 하고 묻자 “20年도 훨씬 前에 샀어요. 보기에 좋아서. 그림 좋지요?” 하며 빙그레 웃는다. 그림 價格을 물어보았지만 “살 만했으니까 샀죠. 마음에 들어서” 하며 얼버무린다. 그림을 바라보는 量 어르신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量 어르신은 高齡인 데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인터뷰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목소리에 힘이 있고 發音도 또렷했다. 



    - 김영석 어르신은요? 

    “많이 아파요. 元來 아파요. 年歲가 많아서. 다리를 못 쓴 지는 한 4年 됐어요. 化粧室도 혼자 못 가고, 이젠 말도 잘 못 하고…. 그날(고려대에서 基腐蝕을 한 날) 이튿날 새벽에 化粧室에서 쓰러지고 집에 누워 있었는데, 그 얘기를 들은 學校 사람들이 救急車를 보내서 高大病院으로 데리고 갔어요.” 

    居室 卓子에 고려대병원 患者保護者 出入證이 놓여 있었다. 

    - 男便 보러 病院엔 每日 가세요? 

    “잘 못 가요. 나도 다리를 잘 못 쓰고, 많이 아파요.” 

    - 寄附를 한 後 어떻게 지내세요. 

    “괜히 바빠요. 電話도 많이 받고. 오늘 아침에도 여러 通 받았어요. 記者들도 자꾸 찾아오고. 쓸 것도 없는데 未安하게(웃음).” 

    - 寄附한 것에 對해 周圍에서는 뭐라고들 하던가요. 

    “좋은 일 했다고들 하죠.” 

    - 異常한 사람들이 찾아오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아직 그런 일은 없었어요. 집 밖에 잘 안 나가니까요.” 

    - 마음이 허전하진 않으셨어요? 

    “뭐가요. 오히려 寄附라는 게 이래서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 뭐가 그렇게 좋은가요. 

    “사람들이 다들 稱讚하잖아요. 電話하는 사람마다, 洞네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잘했다’고 하니까요. 이렇게 稱讚받고 사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요.”

    “工夫 안 시켜도 兄弟들 中 가장 잘살 거다”

    김영석·양영애 부부(가운데)가 10월 25일 고려대에서 열린 기부식에서 김재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맨 왼쪽), 염재호 고려대 총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김영석·양영애 夫婦(가운데)가 10月 25日 고려대에서 열린 寄附式에서 金在鎬 고려중앙학원 理事長(맨 왼쪽), 염재호 고려대 總長과 記念撮影을 하고 있다. [박영대 동아일보 記者]

    김영석 어르신은 光復 後 北韓 地域이 된 江原道 平康郡 南面 出生이다. 15歲에 父母를 잃은 後 돈을 벌기 위해 兄弟들을 남겨놓고 맨손으로 越南했다 돌아가지 못한 失鄕民이다. 量 어르신은 “令監은 平生 苦生을 너무 많이 했어요. 가여워요”하며 애틋한 夫婦愛를 보여줬다. 

    “苦生을 많이 했어요. 6·25戰爭이 나자 먹고살려고 軍隊에 自願했을 程度니까요. 除隊 後 京畿道 楊平에 가서 머슴살이를 했어요. 主人집 아들이 東大門에서 과일 都賣商을 했는데, 令監 보고 ‘여기 있으면 平生 이러고 살아야 한다’며 서울로 데리고 와 自己 가게에서 일을 시켰다고 하더군요.” 

    - 두 분은 어떻게 만났나요. 

    “작은어머니가 東大門市場에서 장사를 했어요. 아버지가 내 新郞감 찾던 中 令監을 紹介받고는 ‘平生 밥은 안 굶기겠다’며 結婚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結婚했죠.” 

    - 누군지 만나보지도 않고요? 

    “아버지가 무서워서 시키면 無條件 해야 했어요.” 

    - 어르신은 結婚 前까지 뭘 했나요. 

    “동생들 工夫하는 거 뒷바라지했죠. 언니하고 저는 初等學校도 못 나왔지만 女同生은 서울女商, 男동생들은 중앙고와 연세대를 卒業했어요. 다들 좋은 學校 나왔어요.” 

    - 어르신은 왜 工夫시켜달라고 하지 않았죠? 

    “아버지가요 좀 별나요. 사람을 잘 봐요. 하루는 親舊분들이 제가 딱해 보였는지 ‘왜 쟤는 집에서 밥만 시키냐’고 하니까 아버지 말씀이 ‘쟤는 工夫 하나도 안 시켜도 兄弟들 中에서 가장 잘살게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工夫를 안 시켰어요. 戰爭 때문에 工夫할 機會를 잃은 것도 있고요.” 

    - 新婚生活은 어땠나요. 

    “스물넷에 結婚했는데, 令監이 돈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苦生 많이 했어요. 창신동 山꼭대기 板子집 門間房에서 月貰를 살았어요.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먹고, 公衆化粧室을 使用하는 곳이었죠. 비가 내리면 머리맡으로 빗물이 떨어지고, 겨울엔 코가 얼 程度였죠. 令監이 과일가게에서 받는 月給이 500원이었는데, 집에는 100원밖에 안 가져와요. 나머지는 술 사 먹는데 다 쓰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첫째를 등에 업고 鍾路5街 제일은행 앞에서 과일을 팔기 始作했어요.”

    아이 업고 리어카 露店

    量 어르신은 과일 장사를 한 게 이때가 처음은 아니라고 했다. 

    “戰爭 때 내가 우리 食口를 먹여 살렸어요. 慶北 尙州가 故鄕인데, 大邱를 지나 慶山 자인면으로 避難을 갔어요. 政府에서 避難民에게 쌀은 넉넉하게 配給했지만 飯饌이 될 만한 게 없었어요. 파란色 謝過가 있었는데, 避難民들이 다들 그걸 채 썰어 소금에 절여 밥하고 먹곤 했죠. 그걸 보고 20里를 걸어 果樹園에 가서 主人에게 許諾을 받아 떨어진 沙果를 한 소쿠리 주워 市場에서 팔았는데, 금세 다 팔렸어요. 그렇게 번 돈을 가져가 果樹園 主人에게 주니까 折半을 다시 주며 ‘먹을 거 사 먹으라’고 해요. 그 돈으로 沙果 한 소쿠리를 달라고 해서 市場에서 팔고 우리 食口 飯饌도 해 먹고 그랬죠.” 

    - 처음부터 男便과 함께 과일 露店을 한 건가요. 

    “같이는 무슨…. 令監에겐 말도 안하고 始作했어요. 며칠 後 알고는 찾아와 ‘살림이나 하지 왜 장사를 하느냐’며 火를 내긴 했지.” 

    - 과일은 男便이 일하는 가게에서 가져다 판 건가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여러 都賣商을 돌아보고 맛있는 걸 골라서 가져다 팔아야지.” 

    - 맛있는 과일을 고르는 要領이 있나요? 

    “처음엔 주는 대로 팔았는데, 안 팔리는 날이 많았어요. 과일은 在庫가 남으면 損害예요. 이래선 안 되겠다, 맛있는 걸 팔아야 잘 팔리겠다 싶어 새벽부터 市場에 나갔어요. 全國에서 과일을 실은 트럭이 鍾路5街 市場에 到着하는 게 새벽 1時頃이거든요. 맛있는 과일을 먼저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夜間通行禁止가 있었지만 每日 通禁을 뚫고 淸凉里부터 鍾路5街까지 1時間을 걸어갔어요. 처음엔 警察이 붙잡기도 했지만 每日같이 나오니까 그냥 보내줬어요.” 

    이런 努力은 이내 “이곳 과일은 맛있다. 믿고 살 만하다”는 입所聞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하루 10짝 남짓 팔았지만 이내 70∼80짝을 가져다 놔도 금세 동이 났다.

    解酲국집 아르바이트

    量 어르신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돈 버는 재주가 있었던 模樣이다. 漸漸 장사 手腕이 늘었고, 規模도 커졌다. 勿論 努力 없이 이뤄지는 건 없었다. 처음엔 市場에 온 트럭에서 좋은 과일을 先占해 팔다, 나중엔 아예 山地까지 내려가 좋은 과일을 先占해 가져다 팔았다. 

    “葡萄는 慶山 葡萄가 가장 有名하고 맛있어요. 慶山에서 올라오는 트럭 技士에게 기름값을 줄 테니 慶山까지 태워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經産을 오가며 貨主, 山地 買入商들과 親해지고, 달러 빚을 내서라도 無條件 現金으로 사니까 最上品을 내게 供給해줬어요. 거기서 더 나아가, 내려갈 때 돼지 한 마리 잡고 막걸리 받아 葡萄밭에서 일하는 일꾼들 먹이게 했어요. 그렇게 해주면 일꾼들이 신이 나 내가 가져갈 箱子는 더 精誠을 다해 담아줘요. 當時만 해도 箱子 아래에 中·하품을 깔고 위에만 最上品을 얹고는 最上品이라고 붙여 파는 境遇가 많았어요. 하지만 일꾼들이 제 것은 穩全히 最上品으로만 채워놓았죠. 그러니까 손님들이 제 物件은 無條件 믿고 사가요. 새벽 4時에 와서 열 짝, 스무 짝씩 싣고 가곤 했어요.” 

    - 다른 과일도 그렇게 한 건가요? 

    “11月이면 濟州島에 내려가 橘을 사느라고 2月까지 있었어요. 거기서도 빚을 내서라도 無條件 現金 去來하고, 일꾼들 잘 먹이고 하니까 좋은 橘을 많이 先占할 수 있었죠. 내가 濟州島에 있으니까 서울에선 男便이 장사를 했어요. 우리 橘을 사려고 새벽부터 줄을 섰다고 해요.” 

    - 집을 많이 비웠겠네요. 

    “그래서 저는 平生 밥을 안 했어요. 只今도 밥할 줄 몰라요. 平生 엄마가 살림을 다 해줬거든요. 代身 남이 하루 5時間 잘 때 난 3時間밖에 안 자고 일했어요.” 

    - 初等學校도 안 나왔으면 글字도 몰랐을 테고, 셈도 느려 장사하면서 苦生했을 텐데. 

    “처음엔 그랬어요. 안 되겠다 싶어 國民學校 1學年 國語冊을 사서 혼자 한글을 깨쳤어요. 돈 計算을 하다 보니 셈은 저절로 늘더군요. 내가 장사머리가 있는 模樣이에요. 웬만한 셈은 暗算으로 착착 했으니까요. 그래서 令監이 物件 팔고 날 속여서 非常金을 만들려 해도 속異質 못했어요(웃음).” 

    새벽 장사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量 어르신은 葬事 後 近處 解酲국집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했다고 한다. 일을 해주면 夫婦가 空짜로 아침과 點心을 解決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밥값만 아껴도 그게 얼마인데요. 부지런해야 돈을 모으죠. 처음엔 鍾路5街에서 청량리 집으로 돌아올 때 電車를 탔어요. 料金이 20前인가 30前인가 했는데, 그 돈도 아까워서 나중엔 뛰어서 갔어요.”

    建物 購入 後 가슴 치고 後悔도

    그렇게 모은 돈으로 建物을 사기 始作했다. 1976年 첫 建物을 산 後 옆 建物, 앞 建物이 賣物로 나올 때마다 銀行돈을 빌리고 傳貰 保證金을 合해 買入했다. 어느새 銃 11筆地 8個 建物의 主人이 됐다. 다 合하면 500坪쯤 된다고 한다. 量 어르신은 “남들은 戰爭 直後가 사는 게 힘들었다고 하지만, 난 建物을 산 다음이 더 힘들었다”며 當時를 回想했다. 

    “첫 建物을 5400萬 원 주고 샀는데, 當時 내 손엔 400萬 원밖에 없었어요. 아는 사람에게 1000萬 원을 빌리고, 銀行에서 4000萬 원을 빌렸어요. 普通 無理한 게 아니었죠. 當時 建物 公示地價가 3000萬 원이 안 됐는데, 第一銀行 會長님이 直接 保證을 서서 빌릴 수 있었어요. 種種 내게 과일을 사가는 老紳士분이 있었어요. 弄談처럼 ‘자네가 結婚 안 했으면 며느리 삼았을 텐데’ 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분이 第一銀行 會長님이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建物을 사겠다며 돈을 빌리려니까 會長님이 直接 나를 車에 태우고 支店長과 함께 建物을 보러 갔어요. 包裝도 안 된 곳에 位置한 建物을 보더니 支店長은 ‘왜 저런 걸 사느냐’고 했지만, 會長님은 ‘이 분이 하자는 대로 해라. 銀行돈 한 푼도 안 떼어먹을 사람이니 내가 保證을 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 빌린 돈은 今方 갚았나요. 

    “今方 갚기는요. 과일 장사해서 元金과 利子를 갚는 데 15年 걸렸어요. 利子 갚는다고 죽을 둥 살 둥 살았어요. 처음엔 貸出 갚는 게 버거워 밤마다 가슴을 치며 後悔하고, 다시 팔까도 했어요. 그런 모습이 불쌍했는지 建物을 仲介해준 不動産 할아버지가 自己가 책임지고 팔아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慰勞할 程度였어요. 實際 몇 달 後에 ‘사람이 나타났다’며 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팔았냐”고 묻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얼마 줄 거냐고 물으니 坪當 85萬 원을 준대요. 坪當 43萬 원에 샀는데 몇 달 만에 두 倍 가까이 오른 거예요.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點心 값을 쥐여주며 ‘1年만 있다가 오세요’ 그랬죠. 그러니까 9個月 만에 다시 와서는 坪當 130萬 원을 주겠대요. 이番에도 用돈을 쥐여주며 ‘팔 생각이 있으면 내가 連絡하겠다’고 했죠. 몇 달 있다 또 왔는데 이番엔 200萬 원 주겠대요. 그렇게 오르니 팔겠어요?” 

    量 어르신은 얼마 前 처음으로 이 建物 權利證을 꺼내 보았다고 한다. 表紙가 누렇게 變하고 글씨가 다 사라져 안 보일 程度였다고 한다. 그만큼의 歲月이 지난 只今 이 建物은 坪當 6000萬 원이 넘는 것으로 評價받고 있다.

    - 다른 데 投資하지 않고 建物에 投資한 理由가 있나요. 

    “그때는 投資니 뭐니 하는 말도 몰랐어요. 그저 建物을 조금씩 사두면 나중에 돈이 되겠다는 생각만 했죠. 時間이 지나면 돈 價値는 떨어지지만 不動産 價値는 올라가잖아요. 韓屋도 몇 채 샀어요. 이후락이 살던 집도 사서 살다가 아이들이 美國으로 간 後 夫婦 둘이 살기엔 너무 커서 팔았죠.”

    미역 살 돈으로 利子 낸다 생각

    夫婦는 齷齪같이 돈을 모으면서도 自身을 위해 쓰는 法이 없었다. 옷과 洋襪 等은 돈 주고 사는 일 없이 얻어다 입었다. 旅行 한 番 간 적 없고, 甚至於 外食은 고사하고 첫째가 高等學校 卒業할 때까지 자장면 한 番 사준 적이 없다고 한다. 

    - 어느 程度 經濟的 餘裕가 생기면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이 생길 법한데…. 

    “그런 거 없었어요. 平生 利子 갚느라 아등바등 살았으니까요. 이때까지 내 生日도 몰라요. 미역 살 돈으로 利子 낸다고 생각했어요. 옷도 생기면 20~30年씩 입었어요. 깨끗이 빨아 입으면 되는데 뭐 하러 사요. 어느 記者가 우리 집에 왔다가 밥 먹는 거 보고는 깜짝 놀라요. 飯饌이 김치, 콩나물무침, 고추장아찌 이렇게 딱 세 가지거든요. ‘이렇게 잡숴요? 저는 그렇게 먹으면 일을 못 해요’ 하더군요(웃음).” 

    10年 넘게 집안일을 돕고 있다는 아주머니가 옆에서 거들었다. 

    “두 분 모두 消息을 하세요. 그리고 쓰고 난 비닐封紙 한 張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할 程度로 儉素하세요. 텔레비전도 數十 年 된 낡은 걸로 보시다 5年 前쯤 바꾸셨죠.” 

    - 子弟분들이 어릴 때 투덜거리지 않았나요? 

    “그런 거 없었어요. 큰애는 오히려 새벽같이 나와 配達도 하는 等 장사를 도와주고 그랬어요.” 

    아끼며 살았다고 하지만 子息에 對한 投資까지 아낀 것은 아니다. 

    “큰애가 工夫를 좀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當時는 課外를 할 때였으니까 큰애 高等學校 數學先生에게 數學 課外를, 英語先生에게 英語 課外를 시켰죠. 두 아이를 美國에 보낸 것도 제가 勸誘했어요. 둘 다 아비를 닮아 술을 너무 좋아했어요. 안 되겠다 싶어 美國으로 보냈죠. 큰애는 美國에서 大學院을 나와 就職하고, 둘째는 流通業을 하게 하고요.” 

    - 과일 장사는 언제까지 하셨어요? 

    “50代 中盤까지 하다 그만뒀어요. 몸이 아파 더 以上 할 수가 없었죠. 그리고 산 집들이 낡아서 補修하는 것도 일이었어요. 建物 管理하고, 病院 다니고, 집들 補修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바빴어요.”

    고려대에 寄附한 理由

    - 寄附하실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처음엔 老後對策을 위해 돈을 모았어요. 그러다 ‘子息들에게 必要한 것을 해주고 남는 것은 寄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나중엔 ‘나 죽으면 全部 寄附해야겠다’고 決心한 거죠. 寄附하고 나니까 子息들에게 물려준 것보다 훨씬 기뻐요. 돈 없어 工夫 못 하는 學生들을 위해 쓰는 게 子息에게 주는 것보다 더 값지잖아요. 우리 夫婦가 죽더라도 苦生하며 살아온 보람이 남게 되니까요.” 

    - 死後에 안 하고 生前에 하신 건…. 

    “令監이 아픈 데다 말까지 못 하게 되면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애 낳고 다음 날 장사를 나가고 해선지 나이가 들며 몸이 많이 아파요. 昨年엔 乳房癌 診斷을 받고 手術과 抗癌治療를 받았어요. 腦硬塞 診斷도 받고…. 精神이 있을 때 해야 할 것 같아서 令監과 議論해 서두른 거죠.” 

    居室엔 夫婦가 두 아들 內外, 孫子, 孫女와 함께 찍은 大型 家族寫眞이 걸려 있다. 

    - 子弟분들에게 물려줄 생각은 안 하셨어요? 

    “애들에게 줄 수도 있지만, 내가 이곳에서 힘들게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고 모은 돈인데 子息들이 잘 지킨다는 保障이 없잖아요. 自己들 사고 싶은 거 사고, 먹고 싶은 거 사 먹으면서 흐지부지 사라지면 슬프잖아요.” 

    - 全 財産을 寄附하겠다고 子弟분들에게 이야기는 하셨나요? 

    “안 했어요. 이젠 言論에 나왔으니까 自己들도 알겠죠.” 

    - 서운해하지 않던가요? 


    “電話도 없어요(웃음). 서운해도 할 수 없어요. 둘 다 美國에 남부럽지 않은 집으로 한 채씩 사줬고, 車도 사줬고…, 그만큼 먹고살게 해줬으면 父母로서할 일은 했다 싶어요. 돈이라는 게 自己가 힘들여 벌지 않으면 意味 없어요. 財産 많이 물려준다고 해서 子息들이 더 잘되는 것도 아니고…. 잘못하면 子息이나 망치지.” 

    - 많은 寄附處 中에서 고려대를 選擇한 特別한 理由가 있나요. 

    “周圍 사람들이 高麗大가 잘돼야 가까이 있는 이곳 청량리도 좋아진다고 하더라고요. 큰애가 高麗大(土木工學科 79學番)를 나오기도 했고요.” 

    - 寄附金은 어떻게 쓰이기를 願하세요. 

    “우리 夫婦 所望이 저 땅에 빌딩을 세우는 거였어요. 근데 中間에 끼어 있는 땅 하나를 못 사기도 했고 돈도 없어 빌딩 짓는 걸 抛棄했어요. 學校에서 그걸 해주기로 했어요. 저 땅에 建物을 짓고, ‘金永錫, 양영애’ 이름도 새겨준대요. 令監하고 내 이름이 있는 빌딩이 생기는 거죠.”

    後悔 없는 人生

    인터뷰를 始作한 지 한 時間쯤 지나면서 兩 어르신은 疲困했는지 對答을 마칠 때마다 “이제 그만 됐어요. 얼른 가보세요”를 反復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먹을 거 못 먹고 사고 싶은 거 사보지 못한 걸 한 番도 後悔한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寶石이나 예쁜 옷은 쳐다볼 餘裕도 없었고, 생각도 안 해봤어요. 얼굴에 뭘 발라본 적도 없어요. 고기는 元來 안 좋아하고…. 後悔는 없어요. 오히려 寄附해서 기뻐요. 내 이름으로 된 빌딩이 생기니까.” 

    - 旅行을 平生 한 番 안 가보셨어요? 

    “旅行은 무슨…. 美國에 있는 애들 보러 간 적은 있지만, 놀러가보기는커녕 6·3빌딩 한番 가본 적 없어요. 장사 때문에, 收金하러 地方에 간 적은 있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量 어르신이 웃으며 말했다. 

    “50年 前엔 이곳 청량리에서 내가 가장 밑바닥 人生이었죠. 그런데 只今은 가장 稱讚받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 程度면 後悔 없는 人生 아닌가요.”

    高麗大學校 寄附金 現況
    1994年 以後 寄附者 4萬9000餘 名지난해 年間 寄附額 1100億 원 넘어

    고려대는 1905年 前身인 보성專門學校가 設立될 때부터 民族을 살리기 위한 뜻 있는 분들의 十匙一飯 同參으로 만들어졌다. 以後에도 巨額의 資産을 快擲한 篤志家들의 寄附부터 쌈짓돈과 마지기 논과 밭, 고이 간직해온 佩物을 팔아 내놓은 所重한 誠金이 이어져왔다. 

    2000年代 들어 寄附金은 해마다 數百億 원臺로 늘어 지난해엔 年間 藥精液 1100億 원을 넘어섰다. 寄附者 數字도 電算化가 始作된 1994年부터 只今까지 約 4萬9000餘 名에 達하고, 1億 원 以上 寄附者도 銃 570名에 達한다. 

    고려대는 2015年 基金企劃本部를 만들어 ‘KU PRIDE CLUB’ 等 體系的인 募金과 寄附者 禮遇 等을 하고 있다. 特히 1億 원 以上 高額 寄附者들의 禮遇 프로그램인 ‘크림슨 아너스 클럽’을 만들어 禮遇 프로그램과 招請行事를 運營하고 있다. 10億 원 以上 寄附者에게는 고려대병원 醫療費 全額 免除 等 最善의 禮遇를 하고 있다. 

    고려대는 “寄附金은 敎育, 奬學, 建築, 硏究, 一般, 其他 特定目的基金 等 다양한 用途로 使用되고 있다”며 “寄附金은 寄附者의 寄附 目的대로 正確히 執行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寄附金 執行 後 結果에 對해 寄附者에게 詳細하게 알리고 있다”고 說明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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