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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의 셰익스피어’ 김용|新東亞

卒記

‘中國의 셰익스피어’ 김용

中國 넘어 世界 감동시킨 武俠小說界 巨星

  • 入力 2018-11-2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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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東洋의 톨킨, 公認 販賣部數 1億 部 以上

    • 武俠을 넘어 大河歷史小說, 로맨스까지 涉獵

    • ‘名寶(明報)’ 創刊 後 言論人으로도 乘勝長驅

    • 80에 케임브리지대 博士學位 받은 ‘永遠한 現役’

    왼쪽부터 김용 소설 천룡팔부, TV 드라마 의천도룡기(1986), 신조협려(2006). 수많은 작품을 남긴 중국 무협소설 작가이자 언론인인 김용(본명·査良鏞)이 10월 30일 홍콩에서 별세했다. 향년 94세. [사진제공·홍콩 헤리티지박물관]

    왼쪽부터 김용 小說 天龍八部, TV 드라마 의천도룡기(1986), 신조협려(2006). 수많은 作品을 남긴 中國 武俠小說 作家이자 言論人인 김용(本名·査良鏞)李 10月 30日 홍콩에서 別世했다. 享年 94歲. [寫眞提供·홍콩 헤리티지博物館]

    “中國人이 있는 곳에는 그의 作品이 있고, 中國人이 모인 곳 對話 主題는 그의 作品이다.”

    10月 30日, 95歲를 一期로 世上을 떠난 한 作家를 두고 世上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中國의 셰익스피어, 東洋의 톨킨으로 불린다. 그의 삶과 作品 世界를 硏究하는 學會가 있고 大學 專攻科目도 開設됐다. 論文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作品 公認(公認) 販賣 部數는 1億 部 以上. 1億 部 클럽(正本 販賣 集計가 1億 部 以上 作家 클럽)에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等 巨匠, ‘해리포터’ 著者 조앤 롤링, 推理小說 女王 애거서 크리스티, 法定 스릴러 大家 존 그리셤과 더불어 이름을 올렸다. 中國 內에서 그의 作品 發行部數를 뛰어넘는 冊은 1964年 發刊된 最高指導者 마오쩌둥(毛澤東) 語錄 ‘소홍서(小紅書)’ 程度다. 이런 그의 別稱은 ‘宸筆(神筆)’, 이름은 ‘김용(金庸·진융)’이다.

    김용 作品은 現代 古典 班列에 올랐다. 1980年代 武俠小說 붐을 일으킨 ‘영웅문(英雄門) 3部作’을 筆頭로 우리나라에도 ‘김용 마니아’가 적잖다. 韓國이 世界著作權協約에 加入하기 前인 1986年 海賊版을 出版했던 出版社는 800萬 部 以上 販賣高를 記錄했다. 김용이 世上을 떠나자 韓國 讀者들도 巨星(巨星)의 逝去를 哀悼하고 있다.

    ‘武俠小說의 泰斗’ 김용은 1924年 3月, 中國 貯藏(浙江)省 下이닝(海寧)縣 위안貨(袁花)津에서 태어났다. 本名은 資糧융(査良鏞), 下이닝玄의 者(査)氏 家門은 名門巨族이었다. 靑(淸) 康熙帝(康熙帝) 때 文身으로 ‘競業堂집(敬業堂集)’을 남긴 自身行(査愼行)이 그의 直系 祖上이다. 家門은 名(明)·靑(淸) 交替期 22名의 眞사(進士·過去 合格者)를 輩出했다. 康熙帝가 姊氏 집안을 두고 “門中에 進士가 열 名, 叔姪 中 翰林學士(翰林學士)가 다섯 名”이라 感歎할 程度였다.


    學者, 作家 집안의 後裔

    김용 當代에도 家門의 名聲은 이어졌다. 四寸兄 資糧자오(査良釗)가 國立쿤밍師範學院(國立昆明師範學院) 院長, 國立大萬臺 敎授 等을 歷任했다. 또 다른 四寸 兄 資糧젠(査良鑑)은 法律家로 臺灣 行政院 法務部長과 最高法院長을 지냈다. ‘落葉(落葉)’ ‘偶然(偶然)’ 等을 쓴 ‘中國 現代詩의 開拓者’ 쉬즈모(徐志摩)도 집안 사람이다. 김용의 親兄 者良丁(査良錚) 또한 ‘無斷(穆旦·牧丹)’이라는 筆名으로 活動한 著名 詩人이다.



    이처럼 ‘墨香(墨香) 가득한 집’에서 태어난 김용은 幼年 時節을 冊 속에서 보냈다. ‘四書三經’ ‘諸子百家’ 等 儒敎 經典에 더해 佛敎·道敎 經典까지 涉獵했다. 이때 익힌 東洋古典이 後날 作家로 成長하는 土壤이 됐다.

    김용은 1938年 저장省립聯合高中 中學部에 入學했고, 이듬해 同期生들과 ‘級투苦楚中者(給投考初中者·中學生 入試를 위한 參考書)’를 出版했다. 當時 中學生 參考書로서는 最初였고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3年 後인 1941年 김용은 退學을 當하고 만다. 學校 訓導(訓導)主任의 投降主義를 諷刺한 글 ‘雅麗社萬遺棄(阿麗絲漫遊記)’를 壁報로 揭載한 게 問題가 됐다. 그의 才能을 아낀 學校長 勸誘로 저장省 취저우中學(衢州中學)으로 轉學한 김용은 이 學校를 卒業하고 1944年 國民黨이 黨(黨)·政(政) 幹部 養成을 위해 設立한 中國國民黨中央政治學校(中國國民黨中央政治學校·臺灣國立政治大 前身) 外交學科에 入學했다.

    大學 時節 김용은 急進 改革主義者로, 國民黨의 學生 統制 行爲에 不滿을 품고 抗議하다 退學 處分을 받았다. 以後 當時 中央政治學校 校長을 兼任한 장제스(蔣介石) 臺灣 總統과도 距離를 두게 된다. 自由人이 된 김용은 中央圖書館 臨時 司書로 일하며 各種 冊을 두루 耽讀했고, 1945年 日本 敗亡 後 故鄕으로 돌아와 항저우(杭州) 동남日報(東南日報)에서 外信 飜譯 일을 맡았다.


    小說家 ‘김용’의 誕生

    [바이두]

    [바이두]

    1946年 김용은 改新敎界 名門大 쑤저우大學(蘇州大學·縣 臺灣 동오臺) 法學院에 編入해 國際法을 專攻하고 1948年 卒業했다. 쑤저우大學 時節 상하이(上海) 대공보(大公報)에 入社, 國際部 外信 飜譯記者로 일하다 卒業 後 홍콩支社에 發令받았다.

    1950年 김용은 靑雲의 꿈을 품고 ‘新(新)中國(中華人民共和國)’ 首都 베이징(北京)으로 갔다. 出衆한 英語 實力을 살려 政務員(現 國務院) 外交部에서 일했으나, 共産黨 理念과 對外政策은 그와 맞지 않았다. 外交官職에서 물러난 그는 다시 홍콩 대공보로 돌아갔고, 1952年 신만보(新晩報)로 자리를 옮겨 副編輯長(偏執副刊)을 맡았다.

    신만보 時節 김용은 平生 知己(知己) 千원퉁(陳文統)을 만난다. 김용과 同甲인 그는 亦是 名文學者 집안 出身으로 文才(文才)가 있었다. 筆名 ‘양우생(梁羽生·輛衛星)’으로 1952年 첫 武俠 作品 ‘龍好投硬化(龍虎鬪京華)’를 發表하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才能을 알아본 신만보 編輯長 뤄푸(羅浮)는 新聞에 武俠小說을 連載할 것을 提案했다. 이때부터 김용은 本名 資糧융(査良鏞)의 마지막 字를 破字(破字)해 ‘김용(金庸·진융)’이라는 筆名을 使用하기 始作했다.

    김용과 양우생의 첫 作品은 1955年作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이다. ‘靑 乾隆帝(乾隆帝)가 실은 雍正帝(雍正帝)의 親아들이 아니며, 乾隆帝에게는 滿洲族이 아닌 下이닝性 出身 한족(漢族)의 피가 흐른다’는 野史를 모티프로 했다. 乾隆帝 後宮 中 위구르族 公主로서 ‘몸에서 香氣가 난다’고 해 향비(香妃)라 불린 函香公州(含香公主) 이야기도 담겨 있다. 한족과 異民族의 葛藤을 主題로 한 이 作品은 讀者 사이에 一大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56年 김용은 두 番째 小說 ‘壁血檢(碧血劍)’을 홍콩詳報(香港商報)에 連載하며 人氣를 이어나갔다. 名(明) 滅亡의 原因이 된 ‘李子晟(李自成)의 亂’을 背景으로 明나라 마지막 天子 崇禎帝(崇禎帝)에게 殺害當한 名匠 원숭환(袁崇煥)의 아들 원承旨(袁承志)가 무림(武林)에서 武功을 갈고닦아 아버지의 復讐를 꾀한다는 줄거리다. 이 作品 또한 大成功을 거뒀다.

    이를 발板으로 김용은 1957年 새로운 作品을 또 내놨다. 北送(北宋)李 女眞族 金(金)과 벌인 戰爭에서 敗한 뒤 南宋(南宋) 建國, 主戰派와 主和派의 葛藤, 칭기즈칸의 몽골 統一과 송 滅亡 等까지를 時代 背景으로 한 ‘思潮英雄傳(射英雄傳)’이다. 實際 歷史·地理·人物을 바탕으로 한 이 作品은 武俠小說의 地平을 大河歷史小說로까지 넓혔다는 評價를 받으며 또 한 番 큰 人氣를 모았다. 以後 映畫, TV드라마, 컴퓨터게임으로 脚色되고, 中國과 龜尾 各國에서 大學 敎材로 使用되기도 한 酬酌이다.


    言論社主로 變身

    김용(왼쪽에서 두 번째)과 영화 ‘신조협려’ 주연 배우들. [사진제공·홍콩 헤리티지박물관]

    김용(왼쪽에서 두 番째)과 映畫 ‘신조협려’ 主演 俳優들. [寫眞提供·홍콩 헤리티지博物館]

    作家로서 名聲을 鞏固히 하던 김용은 自己 作品을 大衆에게 더 널리 알릴 새로운 方法을 찾았다. 個人 媒體를 創刊한 것이다. 1959年 그는 홍콩에서 名寶(明報)를 創刊, 發行人·社長·主筆을 겸했다. 이때부터 낮에는 新聞社 經營者 兼 編輯者로, 밤에는 武俠小說 作家로서 二重生活이 始作됐다. 媒體 發刊을 맡은 김용은 1959年 新作 ‘신조협려(神俠侶)’를 名寶에 獨占 連載했다. 前作 ‘思潮英雄傳’ 續篇으로 時代 背景은 몽케 칸과 쿠빌라이 칸의 南宋 侵攻기다. ‘思潮英雄傳’에서 死亡한 兩强의 아들 兩科가 아버지 죽음을 둘러싼 恩怨(恩怨)을 알아가고, 社會的 慣習을 뛰어넘어 스승 小龍女와 사랑을 이루고자 鬪爭한다. 장르的으로는 로맨스物로, 作品 構成의 緻密性과 登場人物 描寫가 뛰어난 作品이다. 特히 女性 스승과 男性 弟子의 身分과 나이를 超越한 사랑은 當時 매우 破格的인 素材로 여겨졌다. ‘신조협려’는 後날 讀者에게 “最高 武俠小說은 아니더라도 最高 戀愛小說”이라는 評價를 받았다.

    김용은 ‘신조협려’ 人氣에 힘입어 1959年 ‘雪山庇護(雪山飛狐)’도 선보였다. 滿 하루 사이에 일어난 事件을 背景으로 하지만 登場人物의 回想과 내레이션을 통해 數個月, 數年, 數十 年 前 事件이 ‘이야기’로 再現되는 額子小說이다. 한 話者 이야기를 다른 人物이 反駁하고, 다른 人物이 또다시 反駁하는 形式으로 進行되는데 모든 人物 이야기를 綜合해야만 全體 줄거리를 알 수 있다는 點, 作品 結末을 讀者 想像에 맡기는 ‘열린 結末’을 取했다는 點 等 때문에 김용 武俠小說 中 獨特한 作品으로 꼽힌다.

    이듬해인 1960年 김용은 ‘雪山庇護’ 續篇 ‘비호외전(飛狐外傳)’ 連載를 始作했다. 前作 主人公 號費(胡斐)의 10代 時節을 다룬 作品이다. ‘思潮英雄傳’부터 ‘雪山庇護’ ‘비호외전’까지 연달아 成功하면서 新生 媒體 名寶는 熾烈한 홍콩 言論界에서 금세 立地를 다졌다.

    1961年 김용은 다시 名寶에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連載를 始作했다. 後날 ‘思潮英雄傳’ ‘신조협려’와 더불어 ‘思潮三部曲(射三部曲)’으로 불리는 시리즈 마지막 作品이다. 時代 背景은 원(元)말 名(明) 初, 원 마지막 皇帝 惠宗(惠宗) 土곤테무르 在位기다. 前作 ‘思潮英雄傳’과 ’신조협려‘ 主要 人物인 곽정·황용 夫婦가 主人公이다. 송 滅亡 後 한족이 元나라에 맞서고자 製作한 神祕의 兵器 ‘義天檢’과 ‘도룡度’를 둘러싸고 무림 高手들이 벌이는 暗鬪, 强豪 世界의 恩怨, 한족과 몽골族의 葛藤 等을 다뤘다.


    歷史와 想像의 만남

    영화 ‘소오강호’의 한 장면.

    映畫 ‘소오강호’의 한 場面.

    ‘의천도룡기’의 特徵은 遠大한 스케일이다. 中心이 名敎(明敎·中國에 傳來된 摩尼敎를 起源으로 하는 祕密 宗敎 組織)여서 西域 페르시아까지 作品 背景으로 登場한다. 김용이 旣存에 즐겨 다룬 화이(華夷·한족과 異民族) 葛藤에 더해 中東(中東)의 異國 色까지 加味한 이 作品은 祕密宗敎 集團을 中心으로 小說的 想像力을 發揮해 김용 小說 中 歷史的 事實과 가장 距離가 먼 것으로 評價받는다. 一角에서는 ‘歷史的 蓋然性 不足’을 批判하지만 事件의 蓋然性, 登場人物 描寫, 人物 關係의 緻密性 等은 卓越해 思潮三部曲 中 斷然 白眉로 꼽힌다.

    이 餘勢를 몰아 김용은 1961年 長篇 ‘鴛鴦度(鴛鴦刀)’, 短篇 ‘白馬小西風(白馬嘯西風)’ 等도 연달아 썼다. 鴛鴦度는 원도(鴛刀)와 仰禱(鴦刀)라는 길고 짧은 칼 한 雙을 차지하면 天下無敵 武功을 지니게 된다는 傳說을 素材로 한 作品이다.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는 ‘仁者無敵(仁者無敵)’ 메시지를 傳하며 끝을 맺는다.

    ‘白馬小西風’은 김용 小說 中 唯一하게 女性이 主人公인 作品으로 西域 한 마을에 버려진 한족 少女 이문수(李文秀)의 成長과 사랑 이야기다. 抒情性이 돋보이는 作品이다. 1963年 김용은 무림 世界를 떠나 不法 世界에서 想像의 나래를 펼쳤다. 이때 發表한 作品 ‘年聖潔(連城訣)’은 佛家에서 말하는 貪慾(貪慾) 陣에(瞋) 憂恥(愚癡), 卽 涅槃에 이르는 데 障礙가 되는 欲心과 노여움,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毒(毒)을 主題로 삼았다. 作品 導入部에서 主人公 積雲이 謀陷을 받고 投獄되는 狀況 描寫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伯爵’을 聯想시킨다. 實際로는 김용이 어린 時節 집에서 일하던 종 ‘化生’에게 들은 崎嶇한 過去事를 모티프로 한 것이다.

    김용은 亦是 1963年 不法(佛法)을 지키는 여덟 腎臟(神將)인 千(天)·勇(龍)·夜叉(夜叉)·乾闥婆(乾婆)·阿修羅(阿修羅)·迦樓羅(迦樓羅)·緊那羅(緊那羅)·摩睺羅迦(摩羅迦)를 素材로 한 ‘天龍八部(天龍八部)’도 선보였다.

    北宋과 거란족 사이 요(遼) 紛爭機를 時代 背景으로 삼은 作品으로, 거란인이면서 韓人으로 자란 悲劇的 英雄 소봉, 武藝를 싫어하면서도 수많은 節氣를 몸에 익히는 端倪, 破戒한 小林寺 僧侶 虛죽, 滅亡한 ‘大宴國’의 後裔로 王朝 復興을 꿈꾸는 모용복 等 네 젊은이가 主人公이다. 華麗한 무공 描寫가 壓卷이다.

    本名이 ‘個雜種(狗)’인 席播遷을 主人公으로 한 1965年作 ‘협객행(俠客行)’도 人氣를 끌었다. 詩人 李白(李白)의 同名 詩를 題目으로 삼은 이 作品은 世上 物情을 잘 모르지만 品性 바르고 純粹한 主人公이 强豪의 事件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20世紀 中國 代表 小說家

    1967年 김용은 린칭샤(林靑霞·임청하)의 名演技로 널리 알려진 映畫 ‘동방불패’의 原作이라 할 수 있는 ‘소오강호(笑傲江湖)’를 世上에 선보였다. 소오강호는 登場人物 有正風과 曲量이 만든 소(蕭·피리)와 金(琴·거문고)의 合奏曲. 文字的 意味는 ‘强豪의 束縛을 비웃는다’는 뜻이다. ‘鄭(正)과 社(邪)의 對立은 模糊하다’는 作品 主題를 象徵한다. 政派(正派)와 蛇巴(邪派)의 意見 差異에 拘礙하지 않고 友情을 지켰다는 理由로 죽음을 맞이하는 武林들의 狀況을 諷刺한 題目이다. ‘동방불패’는 이 作品 속 일월新敎 敎主로 絶對 武功을 지닌 存在다. 古典小說 傳統을 이어받아 勸善懲惡에 立脚한 줄거리가 많은 김용 小說 中 드물게 虛無的이고 悲劇的인 色彩가 剛한 作品이다. 歷史的 背景도 不明確하다.

    3年 後인 1970年 김용은 春秋時代 오(吳)나라에 復讐를 다짐한 月(越)王 九泉과 忠臣 범려 앞에 뛰어난 劍術과 智慧를 가진 女人이 나타나 오를 멸망시키는 걸 도왔다는 ‘月女(月女) 傳說’을 모티프로 한 小說 ‘月女檢(月女劍)’을 完刊했다.

    1972年에는 김용 最後의 大作 ‘녹정기(鹿鼎記)’를 마무리했다. 3年間 繼續한 連載의 結實이다. 靑 最全盛期를 時代 背景으로 삼아 康熙帝(康熙帝) 等 實存 人物과 歷史的 事件을 虛構的 想像力과 絶妙하게 엮어 쓴, 이른바 ‘宸筆(神筆)’의 最高 境地를 보여준 作品이다.

    ‘녹정기’를 마지막으로 김용은 더 以上 새로운 小說을 쓰지 않았다. 出刊한 作品을 改作해 再出刊하는 데 集中했다.

    言論社 使嗾로서 會社 經營과 事業 擴張에도 邁進했다. 名寶 姊妹紙로 夕刊 名寶萬步(明報晩報), 月刊 名寶月刊(明報月刊), 週間 名寶週刊(明報週刊) 等을 잇달아 創刊했다. 出版界로 領域을 넓혀 名寶出版社, 名唱(明窓)出版社를 設立했다. 1991年 持株會社인 名寶企業有閑公社를 세워, 言論社 最初로 홍콩證券去來所에 上場하기도 했다. 當時 名寶그룹 純利益은 1億 위안(元)에 達했고, 上場 直後 김용은 經營 一線에서 물러났다.

    1994年은 김용에게 紀念碑的인 해였다. 그해 5月 김용 前作 15種 36卷이 ‘김용作品집’으로 公式 出版됐다. 그해 中國 ‘독서잡지(讀書雜志)’는 20世紀 中國 代表 小說家를 꼽으며 루쉰(魯迅), 선충원(沈從文), 바진(巴金)에 이어 김용을 네 番째로 올렸다. 베이징大(北京大學)에서 名譽敎授職度 받았다. 옌자옌(嚴家炎) 베이징大 중어中文學科 敎授는 名譽敎授職 授與式에서 “김용의 創作 實踐은 또 하나의 文化大革命이고, 조용히 進行된 革命”이라고 賞讚했다. 이듬해 베이징大에 ‘김용 小說 硏究’ 科目이 正式 開設됐다.


    사나이는 그저 껄껄 웃을 뿐

    홍콩 헤리티지 박물관에 있는 김용 갤러리. [사진제공·홍콩 헤리티지박물관]

    홍콩 헤리티지 博物館에 있는 김용 갤러리. [寫眞提供·홍콩 헤리티지博物館]

    商業的 成功, 文學的 成就에 더해 言論事業 成功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김용은 老年에 向學熱을 불태웠다. 2005年 81歲의 나이에 英國 케임브리지大學 大學院에서 碩士學位를 받았고, 2010年 86歲 때 亦是 케임브리지대학에서 博士學位를 取得했다. 各國 政府 勳章도 받았다. 1981年 英國 OBE勳章(外國人對象 名譽勳章)을 始作으로 1992年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勳章, 2000年 홍콩政府 最高勳章(Grand Bauhinia Medal), 2004年 프랑스 文化藝術功勞勳章 코網되르腸 等을 받았다.

    김용은 三流 通俗小說로 置簿되던 武俠小說 境地를 한 段階 끌어올린 人物로 評價 받는다. 옌자옌 베이징大學 敎授는 그의 文學的 成就를 “아(雅·순수문학)와 속(俗·大衆文學) 雙方의 文學 經驗을 吸收하고, 이를 바탕으로 我와 속을 超越한 것”이라며 “具體的으로 네 가지 業績을 達成했다”고 說明했다. △삶과 娛樂을 同時에 達成하고 統一했다. △寫實主義라는 主流 藝術 思潮에 非凡한 想像力을 結合했다. △傳統 白話文(白話文· 當代에 發生하여, 송·元·明·淸 時代를 거치면서 確立된 口語體 中國語) 小說 形式과 言語를 維持·改造·창신(創新)했다. △純粹文學과 大衆(通俗)文學의 壁을 깨고 眞正한 亞屬公傷(雅俗共賞·識者와 庶民이 함께 鑑賞하고 즐기는 것)을 達成했다는 것이다.

    神이 내려준 筆力으로 鄭(正)派와 사(邪)파를 넘나들며 ‘文學 强豪’를 統一한 김용은 生前 누린 富와 名譽를 뒤로하고 自然 攝理에 따라 世上을 떠났다. 저世上에서 그는 “萬物은 웃기를 좋아하고 俗世의 榮譽를 싫어하니(蒼生笑不再寂寥), 사나이도 그렇게 어리석고 어리석어 껄껄껄 웃는다(豪情仍在癡癡笑笑)”는 映畫 ‘소오강호’ 主題曲 歌詞처럼 ‘모든 것은 덧없다. 나는 그저 웃기를 좋아할 뿐’이라며 함박웃음 짓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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