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 힘을 다해 사시고, 온 힘을 다해 죽으셨다”|신동아

“온 힘을 다해 사시고, 온 힘을 다해 죽으셨다”

東國大理事長 聲優스님의 ‘내 스승 越州大宗師’

  • 송화선 記者

    spring@donga.com

    入力 2021-11-08 10: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僧侶가 世上 아픔 外面하면 안 된다” 거리로 나선 큰스님

    • 7月 22日 全北 金堤 금산사에서 入寂

    •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 목마른 者에게는 法을 준 禪僧

    • ‘깨달음의 社會化’로 韓國 佛敎의 새 地平 연 先驅者

    • 弟子 앞에선 限없이 자애로웠던 스승

    • “本來 마음을 깨닫고 一切 衆生을 이롭게 하라”

    동국대 이사장 성우스님. 1976년 월주스님 문하로 출가해 수십 년간 깊은 인연을 맺었다. [지호영 기자]

    東國大 理事長 聲優스님. 1976年 越州스님 門下로 出家해 數十 年間 깊은 因緣을 맺었다. [지호영 記者]

    9月 8日 全北 金堤 금산사에서 越州스님(1935~2021) 49齋가 嚴守됐다. 曹溪宗 總務院長을 지낸 越州스님은 遂行과 宗務 行政에 힘쓰면서 同時에 貧民 救濟 等 社會 活動에도 앞장섰다. “僧侶가 山中에만 머물며 世上 아픔을 外面하면 안 된다”는 게 越州스님 信條였다. 그는 一生을 통해 이 뜻을 實踐했다.

    1980年 5·18 光州民主化運動이 武力으로 鎭壓된 直後, 越州스님은 曹溪宗 總務院長 資格으로 光州를 찾았다. 다친 市民을 慰勞하고, 犧牲者 넋을 기리는 追慕 行事를 열기 위해서였다. 1998年 外換危機 때는 가톨릭 金壽煥 樞機卿, 改新敎 강원용 牧師와 함께 ‘失業克服國民運動本部’를 만들어 活動했다. 2003年 國際開發救護 NGO ‘地球村共生會’를 設立해 아시아·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우물을 파주고 學校를 짓기도 했다. 越州스님이 ‘깨달음의 社會化 運動’을 提唱하기 前까지, 韓國 佛敎는 參禪 爲主 遂行을 最高의 價値로 여겼다. 越州스님을 통해 우리 佛敎의 外延이 한 次元 넓어졌다는 게 一般的 評價다.

    越州스님에게 沙彌戒를 받은 聲優스님(64·동국대 理事長)은 스승에 對해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고, 眞理에 목마른 사람에게는 ‘法’을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實踐하신 분”이라고 回顧했다. “平生 ‘李 뭣고’ 話頭를 들고 遂行 精進하며, 饒益中生(饒益衆生)의 慈悲行 또한 生活化하셨다”고도 했다. “恩師스님은 늘 堂堂하셨다. 그 모습이 그립다”고 떠올릴 때는 老스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잘못된 만남”인 줄 알았던 因緣의 始作

    수행, 종무 행정, 사회 활동을 통해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긴 월주스님. [금산사 제공]

    隨行, 宗務 行政, 社會 活動을 통해 佛敎界에 큰 足跡을 남긴 越州스님. [금산사 提供]

    49齋 닷새 만인 9月 13日, 東國大 理事長室에서 聲優스님과 마주 앉았다. 그間 어떻게 지냈는지 묻자 聲優스님은 “恩師스님 生前에 健康을 細心하게 챙겨드리지 못한 데 對한 自責으로 後悔와 懺悔의 나날을 보냈다”고 答했다. 聲優스님은 越州스님 入寂 後 佛敎界 新聞에 寄稿한 追慕의 글에서 “스님을 잃은 不肖 弟子의 눈물은 西海바다가 되어도 멈추지 않는다”며 애통한 心情을 吐露하기도 했다.

    聲優스님을 만난 건 世間에 잘 알려지지 않은 越州스님의 또 다른 面貌를 알고 싶어서였다. 聲優스님은 채 스무 살이 되기 前 越州스님 門下로 出家해 45年間 모셨다. 가까이서 지켜본 大宗師(大宗師)의 삶에 對해 듣고 싶었다. 聲優스님은 “나와 恩師스님의 因緣은 事實 잘못된 만남으로 始作됐다”는 알쏭달쏭한 말부터 꺼냈다. 聲優스님 이야기를 옮겨보면 이렇다.



    “저는 出家를 決心한 뒤 서울 城北區에 있는 隊員癌 탄허스님 門下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隊員癌을 거쳐 깊은 五臺山으로 들어가리라. 그곳에 가면 今生에 아예 태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俗世로 다시는 내려오지 않겠다’ 다짐했지요. 그런데 제 손을 붙잡고 가던 작은아버지께서 다짜고짜 城北區 開運寺로 저를 데려가서는 마치 짐짝처럼 恩師스님에게 맡기고 쏜살같이 나가버리시는 게 아닙니까. 그때 恩師스님을 처음 親見했는데,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시고 손으로 큰 나무念珠를 돌리고 계셨습니다. 또 마당에서는 侍奉(侍奉)스님이 長대를 힘차게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도망가면 두 스님 손에 있는 持物로 죽도록 맞을 것 같아 하룻밤만 보내고 새벽녘 隊員癌으로 逃亡가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聲優스님의 작은아버지는 越州스님과 親分이 있었고, 조카가 그 門下에서 工夫하기를 바라셨다고 한다. 事情을 全혀 몰랐던 聲優스님으로서는 당혹스럽기만 한 첫 만남이었다. “그런데 왜 다음 날 도망치지 않으셨습니까.” 궁금함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食事 直後 스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車를 한盞 내주셨습니다. 이어 ‘李 雀舌茶 맛과 같이 달지도 쓰지도 않고 짜지도 싱겁지도 않고, 每事에 中道를 지키는 것이 中이다’ 말씀하시면서 ‘부처님의 生涯’라는 冊을 한 卷 꺼내 주셨어요. ‘이걸 다 읽은 뒤 單 한 줄이라도 좋으니 讀後感을 써오거라’ 하시더군요. ‘單 한 줄’이라는 但書가 붙은 말씀에 저도 모르게 엉겁결에 ‘예’라고 答했지요. 그 約束을 어기고 도망칠 수 없어 그만 ‘英語의 身世’가 됐습니다.”

    옛 追憶을 되짚는 聲優스님 얼굴엔 微笑가 가득했다. ‘소년 行者’ 時節로 돌아가 큰 배움을 베풀어주신 恩師스님을 자랑하는 듯 보였다.

    佛家에서는 普通 出家 後 一定 期間 行者 生活을 하며 修鍊한 뒤 沙彌戒를 받는다. 이때 비로소 僧侶가 된다. 行者 生活은 쉽지 않다. 끝없이 自身을 낮추고(하심·下心) 욕됨을 참아야 하는(인욕·忍辱) 時間이다. 聲優스님은 開運寺에서 行者 生活을 하던 中 한 스님께 말對答을 했다가 크게 꾸지람을 들은 일이 있다고 한다. 이番엔 그때의 追憶이다.

    깊은 밤 한 弟子만을 위해 연 水系式

    “스님 다섯 분이 제게 ‘몽둥이 50대를 맞고 行者 生活을 繼續할 것이냐, 아니면 매를 맞지 않고 이대로 俗世로 돌아갈 것이냐’ 選擇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매를 맞고 行者 生活을 잘하겠다고 말씀드렸죠. 只今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俗世로 나갔을 텐데(웃음), 그때는 스님이 되고 싶은 熱情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제가 매를 맞았다는 消息을 어떻게 들으셨는지, 그날 밤 恩師스님이 祕密裏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綠茶를 한盞 내주시며 구정선社의 逸話를 들려주시더군요. ‘僧廬가 되고 道를 깨우치려면 人慾(忍辱) 遂行이 第一이다. 목숨을 草芥처럼 버릴 수 있는 大丈夫여야 五濁惡世(五濁惡世)에 蓮꽃처럼 淸淨한 修行者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來日 아침을 먹고 俗離山 法住寺로 가서 行者 生活을 하여라’ 當付하셨지요. 이것이 스님께 받은 初發心(初發心) 가르침입니다. 그때 말씀은 아직도 제 燈불이자 지남(指南)입니다.”

    法住寺는 越州스님이 出家한 寺刹이다. 當身과 깊은 因緣이 있는 절로 弟子를 보내신 셈이다. 聲優스님은 以後 法住寺에서 行者 生活을 하다 越州스님이 계신 금산사로 옮겨 沙彌戒를 받았다. 1976年 陰曆 7月 15日의 일이다. 이날 聲優스님에게는 ‘스승의 사랑’을 實感한 또 한 番의 事件이 벌어졌다.
    “그날 斜視(午前 9時~午前 11時)에 금산사 大寂光殿은 온통 祝祭 雰圍氣였습니다. 여러 行者님이 沙彌戒를 받으셨어요. 行者 가운데 저를 包含해 2名만 除外하고요.”

    - 왜 그렇게 된 건가요.

    “저는 法住寺에서, 다른 분은 佛國寺에서 各各 行者 生活을 했습니다. 금산사에서 戒를 받으려면 行者 生活을 더 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悲劇的인 消息이었지요. 性格 急한 다른 行者님은 바로 褓짐을 싸서 夕陽 무렵 散文을 나가버렸습니다. 저는 行者室에서 限없이 울었어요. 그러다 지쳐 저녁 供養이 끝난지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데, 누군가 房門을 열고 들어와 제 얼굴을 흔들더군요. 界 받을 準備를 하라고요. 꿈인지 生時인지 어안이 벙벙한 채로 法堂에 들어가자 恩師스님이 함박웃음을 짓고 계셨습니다. 저를 보시고는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契를 說하기 始作하셨죠. 水系式은 한밤이 돼서야 겨우 끝났습니다. 水系式은 普通 司試에 열립니다. 저는 한밤中에 戒를 받은 唯一한 僧侶입니다. 제가 어찌 恩師스님 恩惠를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聲優스님은 또 한 番 활짝 웃었다. 이番엔 웃음 끝이 촉촉했다. 聲優스님은 “恩師스님을 떠올리면 뵙고 싶다는 생각에 자꾸 눈물이 난다”고 했다.

    - 弟子가 傷心할까 봐 越州스님이 밤늦게 따로 자리를 마련하신 거군요.

    “그러신 것 같습니다. 事實 저는 그때 ‘하룻밤만 더 자고 다음 날 새벽 쥐도 새도 모르게 절을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어요. 스님은 그런 저를 한 番 더 잡아주신 겁니다. 제가 平素 恩師스님 말씀을 잘 따른다고 저를 ‘曉霜座(孝上佐)’라고 하는 門도(門徒)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絶對 孝上佐가 아닙니다. 제게 베풀어주신 恩師스님 사랑에 조금이나마 報答하고자 指示 事項에 大部分 順從했을 따름입니다.”

    살아온 모든 生涯가 바로 臨終게

    2010년 캄보디아 뜨라빼양 뜨라우에서 열린 초등학교 기공식에 참석한 월주스님(왼쪽). 오른쪽 사진은 북한 농기계수리공장 준공식 참석차 평양을 방문해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으로 식사하는 성우스님(왼쪽)과 월주스님. [금산사 제공, 성우스님 제공]

    2010年 캄보디아 뜨라빼양 뜨라우에서 열린 初等學校 起工式에 參席한 越州스님(왼쪽). 오른쪽 寫眞은 北韓 農機械修理工場 竣工式 參席次 平壤을 訪問해 옥류관에서 平壤冷麵으로 食事하는 聲優스님(왼쪽)과 越州스님. [금산사 提供, 聲優스님 提供]

    越州스님 또한 聲優스님을 尊重하고 아꼈다. 聲優스님은 “恩師스님은 不肖 弟子인 나를 單 한 番도 ‘聲優野’라고 부르신 적이 없다. 늘 ‘聲優스님’이라고 높여주셨다”며 “弟子를 비롯해 凡夫 中生 모두를 부처님으로 섬긴 큰스님이 나의 恩赦셨다는 事實이 놀랍고 자랑스럽다”고 回顧했다.

    ‘깨달음의 社會化’를 强調하며 經濟正義實踐市民聯合(經實聯), 우리民族서로돕기운동본부 等 여러 市民團體에서 活動한 越州스님은 奉仕活動과 非政府機構(NGO) 間 交流 等의 目的으로 種種 海外를 다녀오곤 했다. 聲優스님은 그 길에 同行한 記憶도 떠올렸다.

    “1996年 恩師스님이 曹溪宗 總務院長이던 時節 함께 유럽에 가서 2週 동안 그린피스, 옥스팜, 消費者保護聯盟 等 多樣한 分野 非政府機構를 訪問하고 온 일이 있습니다. 그때 恩師스님은 旅行 費用을 아끼고자 ‘3流 호텔’만 利用하셨어요. 日程 내내 現地 市民團體 活動 모습을 보고, 그에 對한 說明을 듣고, 衆生을 돕는 데 더 바람직한 方向을 찾고자 討論하셨고요.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스님의 思想과 삶의 方向에 對해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습니다. 제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르침이었지요.”

    聲優스님은 2002年 ‘우리民族서로돕기운동본부’ 活動 一環으로 平壤을 찾은 일도 잊지 못했다. 當時 越州스님과 함께 옥류관에서 點心食事를 하는 모습이 담긴 寫眞을 꺼내 보이며 “이것을 보니 밥과 法을 다 重要하게 여기신 恩師스님의 삶이 새삼 떠오른다”고 했다.

    “恩師스님이 平素 찬 飮食을 즐기지 않으셨는데 이날 平壤冷麵만큼은 참 맛있게 드셨어요. 다만 後食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은 제게 勸하셨죠. 그날 아이스크림을 제 것까지 두 倍로 먹은 탓인지 以後 배頉이 났습니다. 北韓에 있는 내내 끙끙 앓으며 틈날 때마다 化粧室을 오가느라 애를 먹었지요.”

    물끄러미 寫眞을 바라보다 빙그레 微笑지으며 聲優스님이 들려준 옛 이야기다. 그가 떠올린 追憶談은 또 있다.

    “우리나라에서 飛行機로 15時間, 車輛으로 5時間을 더 가면, 케냐 마사이족 人키니 마을에 到着합니다. 말 그대로 奧地지요. 그곳 아이들은 소똥으로 뒤덮인 荒蕪地에서 뒹굴며 지내요. 스님은 그곳에 農場과 最尖端 太陽光 植樹施設, 그리고 學校를 짓는 데 앞장서셨습니다. 스님이 일흔이 넘으셨을 때 그 마을에 함께 訪問한 적이 있는데 달라진 모습을 보시며 얼마나 기뻐하시던지요. ‘健康이 다시 좋아진 것 같다’고 환히 웃으셨어요. 돌아보면 스님은 微笑가 正말 아름다우셨습니다. 只今도 그 모습이 가장 그립습니다.”

    聲優스님은 越州스님의 삶은 그 自體가 곧 遂行이었다고 돌아봤다. 越州스님이 2016年 펴낸 回顧錄 ‘토끼뿔 거북털’에는 “나의 隨行 現場은 社會와 地球村의 구석진 곳이다. 나는 늘 그곳에 서 있을 것이다”라는 다짐이 담겨 있다. 이것이 그저 宣言的인 文句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聲優스님 說明이다.

    “參禪 修行이 習慣化되면 걷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말하거나 沈默하거나 시끄럽거나 고요하거나(語默動靜), 어떤 惡條件에도 話頭에 專念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飛行碑座三昧(非行非坐三昧) 또는 수자醫三昧(隨自意三昧)라고 하지요. 恩師스님은 時間과 場所에 拘礙하지 않고 ‘李 뭣고’ 話頭를 참구(參究)하셨습니다. 그랬기에 生活 自體가 參禪 遂行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境地에 이르기 前, 한때 越州스님은 밤낮을 잊은 채 遂行에 專念하다 健康을 해친 일도 있다고 한다. 越州스님 回顧錄에는 스승 금오스님이 “遂行과 戒律을 强調한 虎狼이 스승”이었다고 描寫돼 있다. 聲優스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금오老스님은 매우 嚴格하셨습니다. 戒律을 어기거나 參禪을 忌避하고 게으름을 피우면 境內 淸掃나 3000倍를 시키셨지요. 恩師스님은 平生 老스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습니다. 財物과 女人을 멀리하고, 戒律을 스승으로 삼으셨지요. 젊은 時節 밤잠을 자지 않고 金剛經 讀誦에 매달리다 오랫동안 앓던 病이 危重해지신 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스승께 받은 ‘李 뭣고’ 話頭 遂行을 거듭하자 모든 病이 씻은 듯 사라졌다고 합니다. 저는 恩師스님이 當時 天地가 本來 크게 비어 있다는 實相을 自覺하고(天地本太空·천지본태공) 一時的으로 虛武功에 빠졌지만, ‘李 뭣고’ 話頭 遂行을 통해 不退轉의 願力菩薩로 換骨奪胎하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以後 恩師스님은 一切 衆生을 부처님처럼 尊敬하고 供養하며(一切亦如來·일체역여래), 胴體大悲의 普賢行원을 平生 遂行하셨습니다(唯我全生涯 卽是臨終偈·幼兒全生涯 卽時臨終게).”

    귀一心院 饒益中生(歸一心源 饒益衆生)

    9월 9일 전북 김제 금산사에서 엄수된 월주스님 49재. [금산사 제공]

    9月 9日 全北 金堤 금산사에서 嚴守된 越州스님 49齋. [금산사 提供]

    聲優스님이 言及한 “天地本太空(天地本太公)/ 一切亦如來(一切逆如來)/ 唯我全生涯(幼兒全生涯)/ 卽是臨終偈(卽時臨終게)”는 越州스님의 ‘臨終게’ 內容이다. 臨終게는 高僧이 죽음을 앞두고 깨달음을 後世에 傳하고자 남기는 말 또는 글을 일컫는다. 越州스님은 涅槃 前 “하늘과 땅이 本來 크게 비어 있으니/ 一切가 또한 部處로다/ 오직 내가 살아온 모든 生涯가/ 바로 臨終게가 아닌가”라는 臨終게를 남겼다. 聲優스님은 이 말씀이 오랜 修行의 結果임을 說明했다.

    越州스님은 이처럼 깊은 遂行과 큰 사랑을 바탕으로 언제나 弟子에게 든든한 울타리 같은 存在였다고 한다. 또 한 가지 聲優스님이 記憶하는 逸話가 있다.

    “恩師스님은 2011年 全州革新都市의 宗敎用地 608坪(藥 2010㎡)을 坪當 180萬 원에 拂下받았습니다. 4年이 지나자 땅값이 坪當 600萬 원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제가 ‘衆生을 救濟하는 願力도 크지만 投資 能力도 대단하십니다’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러기가 무섭게 恩師스님께서 ‘聲優스님이 布敎堂을 新築하도록 하려고 산 땅’이라 하시더군요. 瞬間 精神이 멍해졌어요. 施主 能力이 全無한 제가 어떤 재주로 그 일을 맡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여쭙자 ‘映畫社에서 5億 원을 送金할 테니 種子돈 삼아 建物을 지어보라’고 하셨습니다. 激勵의 말씀을 듣는 瞬間 힘이 샘솟았고, 쇠뿔을 단김에 뽑듯 工事를 始作해 一瀉千里로 完工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施主金이 豫想보다 많이 모여 內部 什器는 勿論 버스까지 購入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절이 수현社입니다. 마침 附近이 公園用地라 地自體에서 절 周圍로 1萬5000坪(藥 4萬9600㎡) 規模 都心公園까지 造成했습니다. 누군가의 加被(加被)가 作用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越州스님 回顧錄에는 ‘귀一心院 饒益中生(歸一心源 饒益衆生)’ 卽 ‘本來 마음을 깨닫고 一切 衆生을 이롭게 하라’라는 警句를 지남(指南)으로 삼고 살았다는 대목이 있다. 聲優스님은 더할 나위 없이 큰 本보기였던 스승의 뒤를 따라 이 삶의 길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恩師스님은 願오극근(圓悟克勤·1063~1135) 스님 말씀처럼 ‘살 때는 온 힘을 다해서 사시고, 죽을 때는 온 힘을 다해서 죽으셨습니다(生也全機現 死也全機現).’ 그동안 우리 스님을 支持하고, 激勵하고, 돕고, 追慕해 주신 모든 분께 머리 숙여 敬意를 표하며, 스님이 남긴 普賢行원(普賢行願)을 이어가도록 精進하겠습니다.”

    聲優스님의 다짐이다.

    #越州스님 #聲優스님 #饒益中生 #普賢行원 #新東亞

    생전 사찰 경내를 걷고 있는 월주스님. [금산사 제공]

    生前 寺刹 境內를 걷고 있는 越州스님. [금산사 提供]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