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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事 아닌 政權 편드는 大法院長, 判事들은 괴롭고 힘들다”|주간동아

週刊東亞 1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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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事 아닌 政權 편드는 大法院長, 判事들은 괴롭고 힘들다”

[허문명의 Pick] 文 政府 批判하다 辭表 쓴 김태규 釜山地法 部長判事②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1-01-31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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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표를 낸 김태규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허문명 기자]

    辭表를 낸 김태규 釜山地方法院 部長判事. [허문명 記者]

    김태규 釜山地方法院 部長判事는 2018年 9月 文在寅 大統領이 司法府 70周年 記念式에서 “촛불精神을 받들겠다”고 했을 때부터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니, 그럼 太極旗 勢力이 執權하면 太極旗 精神을 받들어야 하나. 그런데 法院 안에서는 아무도 이에 對해 얘기하지 않았다. 그때보다는 只今 法院이 均衡을 많이 되찾긴 했지만 當時에는 너무 火가 났다.” 

    -金命洙 大法院長에 對한 總評을 해달라. 

    “金命洙 院長의 人品, 仁慈함은 다 認定하는데, 機關 首長한테 바라는 構成員의 마음이란 건 大槪 ‘防牌막이가 돼달라’는 것 아닐까. ‘判事들은 左顧右眄하지 말고 憲法과 原理에 따라 裁判만 하라’ 이런 大法院長 말이다.” 

    -以前에는 그런 大法院長이 있었나. 

    “以前 院長들은 社會가 이렇게 極度로 分裂되기 前이었으니까 그럴 必要조차 없었을 거다. 世上이 이렇게 便이 갈리고 政治的·이념적으로 不和가 深化되다 보니 그런 要求가 더 커졌다고 본다. 狀況이 이런데도 大法院長이 判事들을 保護하기보다 오히려 촛불精神을 받들라는 大統領에 和答하는 모습을 보였다. 

    野黨이 判事를 攻擊하거나 一般 市民이 攻擊할 때도 大法院長이 막아줘야 한다. 더구나 政權 關係者나 與黨 政治人이 攻擊하면 더 막아줘야 하지 않나. 金命洙 院長은 與黨 政治人이, 또 政權 支持者가 判事 이름을 摘示하면서 攻擊하는데도 默默不答이었다. 



    이러면 判事들은 그냥 曠野에 혼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周邊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아니면 나처럼 ‘또라이 짓’을 하든지(웃음). 判事들이 攻擊당할 때 제대로 된 大法院長이라면 ‘나를 攻擊하라, 法官은 攻擊하지 마라’고 했어야 한다. 

    只今 判事들은 正말 힘들고 외롭다. 光化門 集會를 許可한 ‘박형순 禁止法’을 만든다고 與黨 政治人들이 달려 나올 때도 朴 部長判事를 옆에서 보기가 正말 힘들었다. 判事들 意見을 듣는다는 全國法官代表會議도 法院이 完全히 政權 便이 되니 모임 自體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良心보다 法이 優先이다

    -最近 쓴 ‘法官이 良心을 핑계로 政治的 理念을 具現하려 들면 法治는 幕을 내린다’ 題下 글을 印象 깊게 봤다. 只今 判事들의 判決文을 보면 法보다 國民情緖法을 優先視하는 것 같을 때가 많은데, 이에 對한 辛辣한 批判이었다고 생각한다. 

    “‘曺國 事態’를 비롯해 이番 政府 들어 全般的으로 法院이 政權 눈치를 보는 일이 많지 않았나. 이렇게까지 判事가 法을 無視해도 되나. 너무 火가 나 쓴 글이었다. 法官들이 ‘良心’ ‘良心’ 하는데 順序가 잘못됐다. 優先은 憲法과 法律에 따라 判斷해야 하고, 良心은 補充的이고 補完的인 거다. 良心-憲法-法律 順序로 判斷한다면 그건 判事가 아니다. 國民 情緖, 國民 눈높이에 맞춰서 한다고 名分을 내거는데, 憲法과 法律을 無視하면서 그런 式으로 裁判할 것 같으면 一般人과 判事가 뭐가 다른가. 

    多分히 나의 主觀的이고 自嘲的인 解釋이긴 하지만 堂堂하게 職을 걸고 所信을 펼쳤던 先輩들과 달리 使命感, 正義感을 접어두고 法院 안에서 政治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드는 判事들이 있다. 法曹 市場 環境이 어려워지면서 職을 그만두는 瞬間, 거친 荒野로 던져져야 하는 現實 때문인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判事들이 왜 그렇게 輿論에 敏感한가. 

    “그만큼 外部의 影響이 세다. 너무 怯을 낼 必要는 없다고 본다. 事實 ‘威脅’은 實體가 없다. 찾아와 칼을 휘두르지도 않는데 댓글이나 輿論을 意識해 자꾸 讓步하면서 물러서는 判決을 내리니까 그 사람들이 判事를 더 우습게 보고 莫無可奈로 攻擊하는 거다. 判事는 政治人처럼 票를 얻는 職業도 아니니 政治的으로 屈服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나라가 잘 되려면 公務員들 心志가 굳어야 한다. 政治 狀況이 混亂스럽기는 美國이나 日本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安定感이 드는 理由는 官僚들이 中心을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法院 內部에 應援軍이 없었다는 게 좀처럼 理解가 되지 않는다. 

    “글을 올린 後 몇몇 同僚 判事로부터 ‘잘했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었다. 그럼 暫時 慰安을 받아 아내한테 얘기하면 아내는 ‘感謝하다’고 하면서도 ‘그럼, 自己들도 말 좀 하지’라고 했다(웃음). 大韓民國 法官 3000名 中에서 나 같은 사람이 100名만 있다면 法을 함부로 運營하지 못할 거다.” 

    -왜 말들을 안 할까. 

    “于先은 判事라는 職業 自體가 限界가 있어 보인다. 判決文으로만 말한다는 생각이 剛하다. 特히 右派的 性向의 判事가 이런 原則에 忠實하다. 오히려 正義를 追求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 集團을 만들고 行動에 나선다. 두 番째로는 보이지 않는 周圍 視線을 꺼리는 側面도 있다. 判事 하면 公正性이 基本이니까, 政治的으로 自身이 어느 한쪽에 偏向돼 있다고 낙인찍히는 것 自體를 싫어한다.” 

    -人事上 不利益 때문은 아닌가. 

    “그런 건 없다. 法官은 彈劾 아니면 罷免을 못 시킨다. 憲法이 保障하는 價値다. 法官에 對한 最高 懲戒라고 해봐야 ‘正直’ 程度라서 人事上 不利益 側面은 一般 公務員과 다르다." 

    -그렇다면 더더욱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法治가 무너지고 있는데 集團行動이 없다는 게 異常할 程度다. 

    “判事들은 基本的으로 時流가 定해지는 대로 價値 判斷을 하는 境遇가 많다. 梁承泰 前 大法院長이 나쁘다고 하니 나쁜 게 맞는가 보다 하면서 내놓고 얘기하지 않는다. 判事들이 基本的으로 冊床물림들 아닌가. 平生 考試 工夫만 하다 바로 法官이 되고 法曹人이 돼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한 番 한 적 없이 살다 記錄과 만난다. 世上 보는 눈이 食堂 아주머니나 택시技士만 못할 수도 있다.” 

    -그런 點에서 世上 經驗을 많이 했나. 

    “내가 市場 價値나 돈을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 느낀 게 辯護士 事務室을 開業한 지 4年 됐을 때다. 職員들 月給을 못 맞출까 봐 날마다 줄담배를 두세 匣씩 피우고, 밤에는 不眠症에 시달렸다. 自營業者와 똑같았다. 쌍辱도 듣고 侮辱도 當하면서 ‘나도 別揭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經驗을 통해 視角이 좀 더 客觀的으로 變했다고 할까. 異常한 判決이 나오고 法治가 무너지는 狀況을 接할 때면 ‘國民이 얼마나 判事를 우습게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 버는 게 힘들다는 것 알게 된 辯護士 時節

    이 대목에서 그의 個人的 삶이 궁금해졌다. 

    -연세대 法大 85學番이다. 大學 때 運動圈이었나. 

    “붙잡히거나 監獄에 간 건 아니지만, 社會 雰圍氣上 民主化運動에 同參했다. 2學年 때는 科代表로 學生會 活動도 하고 前方入所拒否運動도 했다. 復學해 授業拒否運動을 할 때는 復學生 代表로 活動하기도 했다. ‘解放前後事의 認識’ 같은 冊은 다 읽었고, 가톨릭 信者라 解放神學에도 關心이 많았다.” 

    -法大는 왜 갔나. 

    “純全히 就職이 잘될 것 같아서 갔다. 判檢事 되는 것은 생각도 안 했다. 그러다 復學해 철이 들고 親舊들이 卒業 後 제 갈 길 가는 걸 보면서, 그리고 1990年代 들어 經濟가 안 좋아져 就職자리가 많이 줄어들다 보니 別 苦悶 없이 司法試驗을 봤다.”

    -硏修院 卒業하고 바로 辯護士 開業을 했다. 왜 任官을 안 했나. 

    “硏修院 2年 次 때 外換危機가 닥쳐 집안 形便이 어려워졌다. 父親도 돌아가셔서 工夫를 거의 못 했다. 任官을 抛棄하고 釜山으로가 로펌에서 1年 동안 일하다 蔚山에서 開業해 4年間 辯護士로 일했다. 離婚 事件부터 民事, 刑事 다 해봤다. 

    그러다 平素 꿈이던 美國 留學(美國 인디애나대 로스쿨)을 가느라 事務室을 접었다. 1年 4個月 뒤 돌아와 다시 事務室을 열까 苦悶했는데, 親한 後輩가 憲法裁判所 硏究官 經歷職 公募가 있다고 알려줬다. 1年假量 하다 보니 硏究官이라는 게 主로 裁判官 補助業務를 하고, 내가 憲法學을 專攻한 것도 아니어서 別 재미를 못 느꼈다. 마침 判事 開放形 公募가 나와서 應募해 判事가 됐다.” 

    -왜 判事職을? 

    “法曹人이라면 누구든 되고 싶어 하지 않나. 當時 40代 初盤이었는데 檢査를 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變化가 많은 삶이었다. 

    “安住하고 익숙해지면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釜山地法, 釜山高法, 昌原地法, 大邱地法에서 일했다. 主로 民事와 刑事를 擔當했다.” 

    -地域法官으로 살았는데. 

    “全國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애初 法曹人으로서 始作을 蔚山에서 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웠다. 아이들 敎育도 있고 모든 게 서울 中心이니까 地域法官은 아웃사이더다. 서울과는 完全히 結緣하겠다는 마음으로 申請했다.” 

    -페이스북에 地域法官을 ‘庶子(庶子)’라고 表現했던데 

    “‘인싸’(主流)가 아닌 ‘아싸’(非主流)라는 뜻이다. 法院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成績으로 바로 任官한 사람, 可能하면 서울대, 그것도 法大, 그리고 林地(任地)는 서울을 選好하지 않나. 그것의 反對는? 서울대도 아니고 바로 任官된 것도 아닌, 品階로 따지면 4頭品 以下인 나 같은 사람 아닌가(웃음). 法院 行政處나 大法院 判事로 가는 길을 아예 접으니 마음이 便해 좋았다. 우리 用語로는 ‘亡失(亡失) 法官’이라고 하는데 心理的으로 너무 便했다. 그냥 默默히 裁判만 하면 되니까.” 

    -亡失 法官? 

    “우리 業界 用語다. 잊힌 法官, 存在感이 別로 없는 透明 法官이라는 뜻이다. 釜山에서 刑事 單獨 할 때가 正말 내 人生 黃金期였다. 아무도 나를 干涉하지 않았고. 서울에서 關心이 集中되는 事件을 맡으면 心理的 負擔이 큰데 그럴 일이 없으니 어떤 面에서는 일을 즐기면서 했다. 昇進을 抛棄한 公務員은 무서울 게 없다고 하지 않나.” 

    -判事 組織이 워낙 ‘엘리트 組織’이다 보니 相對的 剝奪感이 클 것 같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을 보면서 反骨 氣質이 생기기도 한다. 서울대 나오고 바로 任官한 사람끼리도 서로 比較하면서 自愧感을 吐露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가진 게 많은데 왜 저럴까. 나는 그 모든 리그에서 빠져 있으니 마음 便하게 일했다. 말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法官이 大部分 名譽나 評判으로 살아가는데 남한테 안 좋게 비칠까, 或如 口舌에 휘말릴까 操心하느라 말을 줄이는 境遇가 많다. 그런 것만 抛棄해도 나처럼 할 말 다하면서 살 수 있는데 말이다.”


    政治勢力이 바뀌었다고 司法府까지 흔들려서야

    -이番에 辭表를 낸 高法 部長判事가 많다. 

    “退職 前 3年 동안 일했던 機關의 事件을 退職 後 3年 동안 受任할 수 없게 한 ‘3年 制限 規定’ 탓이 가장 크다. 게다가 法院長을 投票로 뽑는 法院長 推薦制가 實施되고 特定 學會 出身 判事들이 要職을 獨食하는 狀況에서 熱心히 일해 봐야 未來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當身은 왜 辭表를 썼나. 

    “未練이 없었던 건 아니다. 判事라는 職業이 자랑스러웠고. 다른 行政府 事務官이나 書記官을 만나면 ‘判事들은 政權이 바뀌어도 自己 일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은가’라는 소리도 듣고 살았다. 實際로 그랬다. 그런데 이番 政權 들어 狀況이 完全히 바뀌었다. 

    政治 勢力이 바뀌자 法院이 攻擊을 當하는, 有史 以來 처음인 狀況을 겪고 있다. (朴槿惠 前 大統領) 彈劾 바람이 불 때까지만 해도 설마 法院이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想像하지 못했다. 世上이 미쳤다는 생각이 들 때가 너무 많았다. 일에 對한 厭症, 世上에 對한 幻滅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個人的으로 50代 中盤이라 다음 삶을 생각해볼 때도 됐고.” 

    -앞으로 計劃은? 

    “蔚山에서 辯護士를 할 豫定이다. 大槪 判事를 그만두고 辯護士를 하면 모드 轉換이 잘 안 된다고 하는데, 나는 바로 할 自身이 있다(웃음). 人生 別거 없더라. 한때는 移民을 생각한 적도 있다. 이 나라에 自由가 없으면 내가 自由를 찾아 떠나겠다는 생각이었다. 只今은 開業하고 職員 求하는 일로 苦悶이 많다.” 

    김태규 部長判事는 率直담백한 性格에 무엇보다 憲法精神이 透徹해 보였다. 司法府는 市民들이 마지막으로 期待는 堡壘다. 그와 헤어지면서 또 한 사람의 아까운 法官이 法院을 떠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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