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政治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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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出生 1928年 10月 2日 ( 1928-10-02 )
日帝强占期 朝鮮 平安南道 孟山郡
死亡 2022年 10月 4日 ( 2022-10-04 ) (94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西大門區 대신동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大韓民國
學歷 美國 보스턴 大學校 大學院 哲學博士
職業 英文學者
大學 敎授
政治가
社會運動家
政治學者
政治評論家
時事評論家
作家
經歷 延世大學校 副總長
第14代 國會議員
兄弟 누나 김옥길 (前 梨花女大 總長)
누이同生 2名 [1] (모두 旣婚)
配偶者 없음(독신)
宗敎 儒敎 ( 性理學 ) → 改新敎 ( 長老會 長老)
議員 選手 2
議員 臺數 14
正當 無所屬
웹사이트 김동길 연세대 名譽敎授의 Freedom Watch
山南 김동길 哲學博士의 링컨 思想硏究所

김동길 (金東吉, 1928年 10月 2日 ~ 2022年 10月 4日 )은 大韓民國의 作家 出身 政治人이다. 第14代 國會議員을 지냈다.

履歷 [ 編輯 ]

그는 연희대 英語英文學科 學士 學爲한 以後, 美國 보스턴 大學校 大學院 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關聯 硏究로 哲學博士 學位를 받았으며 大韓民國 歸國 以後 市民社會團體 運動 과 言論, 放送을 통한 講演 活動과 아울러 延世大學校 敎授, 延世大 敎務處 處長, 연세대 副總長을 歷任하였고 以後 조선일보사 論說顧問, 第14代 國會議員, 新民黨 代表最高委員을 거쳐 自由民主聯合 常任顧問을 지냈다. 1988年 以後부터는 放送에 出演하여 講演가 或은 司會者 로 進行하였으며, 私席에서 批評 을 하던 中 偶發的 發言한 "이게 뭡니까?"라는 이 發言을 後날 喜劇俳優 최병서 가 諷刺하여 한때 世間에서 話題가 되었다.

本館 풍천 (豊川)이며 雅號 (雅號)는 山南(山南)이다. 김옥길 梨花女大 總長은 그의 親누나이다. 1946年 6月 越南했다. [2]

기타 經歷 [ 編輯 ]

以外 履歷 [ 編輯 ]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및 軍事 政權 試鍊期 [ 編輯 ]

山南 김동길 (山南 金東吉)은 1928年 10月 2日 , 平安南道 孟山郡 에서 1男 4女 中 長男이자 둘째로 태어났다. 1951年에 演戱大學校 英語英文學科에서 學士 學位를 받았고 以後 1954年에 그는 美國 留學을 떠났다. [3] 留學을 마친 後 歸國, 講壇에 올라 1960年 부터 延世大學校 專任講師가 되었다. 이듬해 1961年 부터 延世大學校 敎授를 지내며 高麗大學校 講師도 1961年부터 이듬해 1962年 까지 暫時 兼職한 그는 辛辣한 諷刺와 諧謔으로 인하여 學生들로부터 人氣 있는 敎授였다.

그는 以後 延世大學校 哲學과 助敎授, 副敎授를 거쳐 敎授로 昇進한다. 延世大 敎授로 在任하며 社會 諷刺를 하는 式으로 腐敗를 批判하였다가 調査를 받고, 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1962年 에는 延世大 敎務處 處長을 지냈다.

維新政權 時節에는 《씨알의 소리》라는 雜誌에 《내가 萬若 大統領이 된다면》이라는 隨筆 을 發表, 大統領이 된다면 父母도 섬기지도 않던 놈들이 靑瓦臺에 가서 阿附하며 閣下 閣下 하는 것들을 차라리 모두 잡아다가 西海의 無人島에 보내 阿諂道라 하겠다고 批判했다. 그는 이 事件으로 인하여 中央情報部 에 連行되어 拷問을 받기도 했다. 出監 後 小學校 接狀하던 사람도 18年째 大統領을 하는데 大學 敎授가 大統領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但只 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 어찌 罪냐며 抗辯하였다.

1974年 4月 民靑學聯 事件 에 連累되어 檢擧되었다. 嫌疑는 弟子인 김영준·김학민 두 學生에게 "緊急措置 1號로써 朴正熙 氏는 스스로 墓穴을 판 것이다."라고 말하여 緊急措置를 誹謗하고, "學生 示威를 緻密하고 大膽하게 展開하여 朴 政權을 打倒하라."고 激勵하여, 內亂을 煽動하였다는 것이었다. [4] 辯護士 한승헌을 選任했으나 最終 審問에서 尹潽善(尹潽善) 前 大統領, 池學淳(池學淳) 가톨릭主敎, 박형규(朴炯圭) 牧師, 김찬국(金燦國) 博士 等과 함께 背後支援 嫌疑로 모두 有罪判決을 받았고, 윤보선 前 大統領을 除外하고는 全部 拘束되었으며 日本人 關聯者 2名 等은 20年의 重刑에 處해졌으나 1975年 2月 15日 刑執行停止로 모두 釋放되었다.

法院은 김동길에게 懲役 15年을 宣告하였다. 김동길 敎授는 1審 宣告 當日에 抗訴를 抛棄하며 "法이 法 같아야지..."라는 言及을 하였다. [4] 1975年 3月 1日, 民靑學聯 事件으로 拘束된 김동길·김찬국 敎授의 釋放을 歡迎하는 모임이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렸다. [5]

1975年 9月에는 양일동 , 백기완 과 함께 장준하 葬禮式을 主管하고 追悼辭를 朗讀하였다.

그 뒤엔 김대중 內亂 陰謀事件 에 連累되어 獄苦를 치르는 等 所謂 ‘政治 敎授’로 불리며 學院 自由化 關聯 鬪爭에 앞장섰다.

또한, 各種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出演하여 辛辣한 政治·社會 批判으로 名聲을 얻었으며, 批評을 할 때마다 외치던 ‘이게 뭡니까?’라는 말은 개그맨 최병서 等에 依해 패러디가 되면서 當時 流行語가 되기도 하였다. 그 뒤 延世大學校 敎務處長, 副總長을 歷任하고 조선일보社 論說顧問으로도 言論 活動을 하기도 했다. [3]

1987年 學生運動圈이 同僚와 後輩들의 焚身 自殺을 强調하며 政權 打倒 運動을 벌이자 그는 學生運動家들이 同僚들을 利用한다며 批判하였다. 또한 民族 解放 系列의 路線을 批判하면서 學生運動家들을 批判, 以後 學生運動家들로부터 猛非難을 받기도 했다. 한便 言論과 放送에 講師로 招聘되어 講演 活動을 하기도 했다.

政治 參與와 試鍊 [ 編輯 ]

現實 政治를 批判하던 그는, 1991年 政治 參與를 宣言하고 새한당 을 創黨한 뒤 鄭周永 李 大統領 選擧에 參與하기 위하여 만든 保守 性向의 野黨인 통일국민당 에 合流했고 1993年 에는 代表에 推戴되었다.

本人도 第14代 總選 에서 院內進入에 成功하나, 14代 大選 에서 鄭周永 이 敗北한 뒤 政界 隱退를 宣言하면서 群小政黨으로 轉落한 통일국민당 의 代表로 推戴됐으며, 이 過程에서 黨舍 資金 마련을 놓고 鄭周永 과 甚한 葛藤을 겪기도 하였다. 1993年 통일국민당 代表에 再選出되고 以後 朴燦鍾 新政治改革當 과의 合黨으로 新民黨 의 最高委員을 지냈고 1995年 新民黨 自由民主聯合 에 吸收되면서 自由民主聯合 所屬이 되었다.

1990年代 初盤에는 그를 패러디한 개그맨 최병서 가 進行하였던 《MBC 日曜日 日曜日 밤에》의 〈이게 뭡니까〉 코너가 人氣를 끌면서 話題가 되기도 했다.

政治 活動과 同時에 放送, 言論 活動을 하였고 保守 性向의 市民社會團體에서 活動하였다. 1994年 신민당 總裁 자리를 놓고 벌어진 角木 全黨大會 波動과 이어진 覺書 波動을 契機로 政治 人生에 最大 危機를 겪었다. 自由民主聯合 常任顧問에 委囑되지만 자민련 全國區 公薦獻金說으로 因해 朴燦鍾 , 金鍾泌 과 잇달아 갈라지며 그 해 1994年 5月 , 次期 總選거 不出馬를 宣言하였고 及其也 2年 後 1996年 3月 5日 을 期하여 自由民主聯合 脫黨 宣言을 한다.

1990年代 後半 國民行動本部 , 反核反金國民協議會 等의 保守主義 團體에서 反共 市民團體 元老로 活動하면서 半 金大中 活動과 講演에 活潑하게 參與하였으며 金正日 北韓 政權과 조선로동당 , 朝鮮人民軍 , 金大中 盧武鉉 , 國民의 政府 參與政府 의 《 햇볕政策 》 等을 批判하는 講演과 活動을 하였다.

2001年 2月 10日 서울YMCA 神官 大講堂에서 조만식 을 追慕하는 古堂記念事業會에서 主管하는 古堂記念回 創立 25周年 記念 大講演會에 參席하였고, 印度 指導者 간디 와 韓國 指導者 古堂 曺晩植 의 民族 運動이라는 題目으로 講演하였다.

2009年 4月 檢察 搜査에서 賂物 授受說을 否認하는 盧武鉉 을 批判, 對國民 謝過 次元에서 自殺하거나 裁判받고 服役하라고 主張했다. '노무현 氏가 남의 돈을 한 푼도 먹지 않았다고 끝까지 우기기는 어렵게 되어 가는 듯하다. 勿論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自己의 過誤를 是認하기가 어렵다는 事實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一國의 大統領을 지냈다는 者가 그토록 卑怯하게 굴어서야 되겠느냐 [6] '며 盧武鉉 의 不道德性을 叱咤, '人類의 歷史의 어느 때에나 人間에게 있어 가장 所重한 것은 眞實인데 眞實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 구실 못하게 마련이며 그런 者가 公職의 높은 자리에 앉으면 많은 百姓이 苦生을 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氏는 正말 딜레마에 빠졌다'고 했다. 이어 '그가 5年 동안 저지른 일들은 다음의 政權들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道德的인 過誤는 바로잡을 길이 없으니 차라리 國民에게 謝過하는 意味에서 自殺을 하거나 아니면 裁判을 받고 監獄에 가서 服役하는 수밖에는 없겠다'는 것이라며 盧武鉉 을 辛辣하게 批判했다. [6] [7]

그리하여 5月 盧武鉉 慶南 金海 私邸 뒷山 부엉이 바위에서 投身 自殺하자, 그의 盧武鉉 批判 發言 關聯이 結局 問題가 되었다. [7] [8] 親盧 性向의 네티즌은 그의 批判을 막말이라 하며 逆批判을 하였다. [7] [8] [9] 6月 初 김동길은 盧武鉉 國民葬 에 對해 차라리 家族葬을 勸했어야 했다며 國民葬 을 한 李明博 政府 를 叱咤하였다. [10] 放送 3社가 盧武鉉 을 殉敎者로 만들었다고 批判하기도 하였다. [11]

7月 조갑제 와 함께 大邱 에서 共同講演會를 열었는데 2千名의 人波가 몰렸다. [12]

2009年 8月 當時 金永三 金大中 을 찾아가 和解를 하자 그는 "이番에 벌어졌다는 '和解'는 都大體 무슨 意味가 있는 거냐"며 金永三 을 非難하였고 이에 連이어 "김영삼 大統領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데, 김대중 氏를 찾아가서 그가 죽기 前에 謝過할 일이 果然 있느냐"며 金永三 을 批判하였다. [13] 이어 謝過를 하기 前에는, 謝過를 받기 前에는 '和解'가 成立될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거듭 反問한 뒤, "나라의 큰일을 맡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 버리면 都大體 國民은 무슨 꼴이 되냐"며 剛하게 批判하였다. [13]

2020年 1月에 國民革命政治學校長으로 共産主義를 排擊하고, 自由民主主義를 鼓吹하며, 全光焄 牧師와 함께 李承晩廣場에서 여러次例 演說을 하였다. 그는 '自由 民主主義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覺悟가 必要하다'고 演說하였다. [14]

末年 [ 編輯 ]

2022年 2月 코로나19 에 確診한 後 回復했지만, 같은해 3月 健康 異常으로 呼吸器가 나빠져서 病院에 入院했다가 오랜 鬪病 끝에 2022年 10月 4日 死亡하였다.

論難 [ 編輯 ]

2009年 5月 23日 盧武鉉 前 大統領의 逝去 後, 김동길이 4月 15日 自身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 《먹었으면 먹었다고 말을 해야죠》라는 글과, 월간조선 2009年 5月號에 寄稿한 〈링컨을 尊敬한다더니, 이게 뭡니까?〉에 다음과 같은 內容을 실었다는 事實이 뒤늦게 浮刻되어 論難을 불러 일으켰다.

노무현 氏는 正말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그가 5年 동안 저지른 일들은 다음의 政權들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道德的인 過誤는 바로잡을 길이 없으니 차라리 國民에게 謝過하는 意味에서 自殺 을 하거나 아니면 裁判을 받고 監獄에 가서 服役하는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15]
그렇게 되면 노무현은 正말 설 자리가 없다. 그에게는 “나는 간다. 맘대로들 해라”는 內容의 遺書(遺書)나 한 張 남기고 장자연 처럼 목을 매거나 日本의 사무라이 처럼 배를 가를 勇氣도 없는 것이 分明하다. [16]

이에 關해 김동길 側에서는 誤解라 主張하였고 차라리 堂堂하게 하라는 意味였다면서 하루 이틀 일이라 생각하고 그런 事案 또한 크게 생각하지는 않고 있으며 該當 關聯 論難에 關한 것도 김동길은 主張한즉 "狀況을 아직 모르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17]

그는 5月 25日 다시 自身의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요약한 것임).

移轉 高宗 皇帝 朴正熙 將軍이 崩御하셨거나 被殺되었을 때도 오늘처럼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다. 言論媒體들이 왜 이렇게도 惹端법석인가. 내가 前에 쓴 글을 갖고 노사모 들이 나를 盧 氏 自殺의 幇助者처럼 만들고 싶어한다. 周邊人들이 테러 當할 危險이 있으니 外出하지 말아달라고 付託하지만, 테러 맞아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며 警察 에 身邊保護 要請하지 않겠다. 이 나라에는 法은 없고, 感情과 同情뿐인가. 노무현 氏는 檢察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 뿐이다. [18]
自殺로 生을 마감한 16代 大韓民國 大統領의 國民腸은 可히 '世紀의 葬禮式;이라고 할 만큼 歷史에 남을 巨創한 葬禮式이었다"며 "印度의 聖者 간디가 暗殺되어 化粧으로 局長이 치르어졌을 때에도 우리나라의 이番 國民葬과는 比較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던 것으로 記憶한다. 中國의 毛澤東 主席이나 北의 김일성 主席의 葬禮式도 2009年 5月 29日의 大韓民國 國民葬을 凌駕하지는 못하였을 것으로 斟酌한다 [11] [19]

기타 [ 編輯 ]

그는 盧武鉉 精神 繼承 主張에 對해서도 否定的인 視角을 披瀝했다. 2009年 6月 當時 그는 "우리 國民은 눈을 疑心하고 귀를 疑心할 수밖에 없다. 國民이란 잘 잊어버리고 어리석기만 한 存在로 誤解하지 말라"고 叱咤했다. [20] 이어 지난 2006年 當時 狀況을 言及하며, 黨內에서 克明하게 갈리었던 盧 前 大統領에 對한 評價를 곱씹었다. "2006年 地方選擧에 慘敗하고 민주당과 그 前身인 열린 우리黨은 盧 氏의 國政 運營에 對한 支持率이 急落하자 되도록 盧 氏와 因緣을 멀리하고자 努力한 것이 事實인가. 아닌가. 그런 民主黨에서 丁世均 代表가 突然 態度를 바꿔 '盧武鉉 精神 繼承'을 부르짖고 나온다면 이것은 國民을 愚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故人에 對한 黨의 態度에 一貫性이 없다'는 批判의 소리가 黨內 一角에서도 일어났다고 들었다. [20] "는 것이다.

같이 보기 [ 編輯 ]

著書 및 論文 [ 編輯 ]

著書 [ 編輯 ]


2012 젊은이여 어디로 가는가
2009 MB 이게 뭡니까
2008 自由여 너를 위해 목숨 바치게 하라
2007 北韓自由宣言
2003 大統領 閣下, 이게 뭡니까
2002 어떤 사람이기에
2000 밝은세상 좋은나라
1999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998 링컨의 一生
1998 한 時代의 證言 3
1997 한 時代의 證言 2
1997 한 時代의 證言 1
1997 김동길 칼럼集
1996 政治 이대로는 안됩니다
1995 떠날 때와 죽을 때
1994 夕陽에 홀로 서서
1992 해서는 안 될 사람 없다
1992 말버릇이 그게 뭔가
1992 길을 묻는 女性을 위한 人生論
1992 大統領의 웃음
1992 幸福의 파랑새는 그대 마음 속에
1992 젊은 그대에게
1992 結婚과 性
1992 世上이 왜 이 模樣인가 2
1992 이래도 됩니까
1991 이게 뭡니까
1991 敗北의 自由 成功의 義務
1991 追憶은 아름답다
1991 그대와 내가 하나 될 때
1991 잊을 수 없는 말 한 마디
1991 사랑으로 勝利하리라
1991 사랑은
1990 政治人의 暴力
1990 그대가 아름다울 때
1990 바람처럼 햇빛처럼
1989 사는 멋 죽는 멋
1989 길을 묻는 젊은이들에게
1989 생각하며 산다
1989 瑞山 정석해
1989 世上이 왜 李某孃인가
1989 내가 부르다 죽을 노래여
1989 어떤 사람이기에
1988 너와 나의 사랑을 위하여
1988 믿음, 所望, 사랑
1988 自由의 이름으로 살리라
1988 그대 靈魂에 불을 밝히고
1988 젊은 날엔 사랑이
1988 女性學 講義 이브
1988 이브, 너의 이름으로 묻는다
1988 꽃은 무슨 일로
1988 自由여 統一이여 民主主義餘
1988 할 말이 없다면서
1988 이 어둠을 사르리 사르리
1988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1987 韓國 딸들에게 高喊
1987 韓國 靑年에게 高喊
1987 美國이라는 나라
1987 한 點 부끄럼 없기를
1987 가르치며 사랑하며
1987 뜻을 찾아서 길을 찾아서
1987 김동길 人生論
1987 사랑하는 그대에게
1987 人生의 길 사랑의 길
1987 떠날 때와 죽을 때
1987 서서 말하는 까닭
1987 孤獨한 靈魂과의 對話
1987 歷史 에세이
1987 할 말은 하고 살자
1987 큰 革命 작은 革命
1987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1986 젊음의 對話를 찾아서
1986 사람으로 태어나서
1986 새벽에 부는 나의 喇叭소리
1986 그 때 그 사람
1986 永遠한 自由인
1986 열린 大門으로
1986 우리가 이 땅에 사는 理由
1986 새벽빛이 우리 앞에 있다
1986 그래도 그리운 그 時節
1985 어머니와 아들들
1985 歷史의 발자취
1985 사랑이여, 永遠한 그 生命이여
1984 東窓을 열고
1984 나의 人生, 나의 冥想
1984 새야 새야 파랑새야
1983 겨울이 오기 前에
1983 죽어서 흙이 될지라도
1983 생각하며 산다
1983 하느님 나의 하느님
1982 그래도 길은 있다
1979 永遠히 남는 것
1977 끝이 없는 이 길을
1977 하늘을 우러러
1977 불어라 봄바람
1977 歷史의 언덕
1977 가노라 三角山아

論文 [ 編輯 ]

  • 《American Attempts to Open Korea》 / 〈人文科學〉 第10輯 記念號 (1963. 12)

學歷 [ 編輯 ]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92年 總選 14代 國會議員 서울 江南區 甲 통일국민당 54,568票
46.10%
1位 初選

各州 [ 編輯 ]

  1. 女同生 김옥영, 김수옥
  2. [김동길 人物에세이 100年의 사람들] <54> 金日成(1912~1994) 朝鮮日報 2018.12.22
  3. “±eμ¿±æAC Freedom Watch” . 2008年 12月 2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12月 19日에 確認함 .  
  4. [길을 찾아서] 維新에 所信으로 맞선 두 敎授 / 한승헌: 社會一般: 社會: 뉴스: 한겨레
  5. [길을찾아서] 김지하의 ‘오적’ 民衆神學 재촉 / 문동환: 社會一般: 社會: 뉴스: 한겨레
  6.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53644
  7. “PTODAY - 記事內容 - 김동길 敎授, “盧武鉉 自殺해야 한다” 發言 論難” . 2009年 6月 2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6月 6日에 確認함 .  
  8. "노무현 自殺하라" 김동길 敎授에 네티즌 非難 洑물 世界日報 2009年 5月 23日子
  9. “노컷뉴스” . 2009年 5月 2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6月 6日에 確認함 .  
  10. 김동길 名譽敎授 노사모-言論 猛非難 - 世上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世界日報
  11. 김동길 "放送3社, 노무현氏 殉敎者로 浮刻시켜" - 世上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世界日報
  12. 김동길·조갑제 大邱講演會 市民들 2千餘名 몰려 每日新聞 2009年 7月 23日子
  13. 김동길, YS에 剛한 背信感 表出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뷰스앤뉴스 2009-08-12
  14. " 自由民主主義를 위해 목숨 버리겠다는 覺悟가 必要하다 " . 2019年 11月 15日. 2020年 1月 1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0年 1月 13日에 確認함 .  
  15. 김동길 敎授 (2009年 4月 15日). “먹었으면 먹었다고 말을 해야죠” . 김동길 敎授의 Freedom Watch. 2016年 3月 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5月 23日에 確認함 .  
  16. 김동길 敎授 (2009年 5月). “링컨을 尊敬한다더니, 이게 뭡니까?” . 월간조선 . 2009年 5月 26日에 確認함 .  
  17. 白眞珠 (2009年 5月 23日). “김동길 側, '自殺해라 = 堂堂하게 해라' 意味였다. 論難 一蹴!?” . 消費者가 만드는 新聞 . 2009年 5月 23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8. 김동길 敎授 (2009年 5月 25日). “只今은 할 말이 없습니다” . 김동길 敎授의 Freedom Watch. 2016年 3月 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5月 25日에 確認함 .  
  19. 뉴스韓國 | NewsHankuk.com - 김동길, "盧武鉉, 모든 映畫 누리고 저승길 選擇"
  20. 뉴스韓國 | NewsHankuk.com - 김동길의 쓴소리, "盧武鉉 精神 繼承? 이러지 말라"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