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남
(姜熙南,
1920年
1月 13日
~
2009年
6月 6日
,
全羅北道
金堤
)은
韓國基督敎長老會
所屬 全州難산교회 名譽牧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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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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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年
韓國神學大學
을 卒業하고 한때 敎職에 몸담았다.
- 1970年代 維新鬪爭을 하다 逮捕됐다.
- 1980年 ~ 1983年
韓國基督敎農民會
理事長을 지내는 等 農民運動에 關心을 보였다
- 1986年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로 拘束되는 等 세 次例나 獄苦를 치렀다.
- 1990年 11月
문익환
牧師와 함께
祖國統一汎民族聯合
(범민련)을 結成하고 南側本部 議長을 맡았다.
- 1994年 北韓의
金日成
主席이 死亡하자
범민련
南側本部 代表團을 이끌고 訪北 弔問을 祈禱해 拘束됐다.
- 2003年에는
大韓民國軍 이라크 派兵
沮止를 위한 木浦~서울 千里 徒步 行進과 靑瓦臺 앞 斷食을 벌였다.
- 2003年 以後
中國 東北 3城을 가다
,
새飜譯 환단고기
,
우리民族 奬勵된 上古史
等 韓民族 歷史에 關聯한 冊을 냈다.
- 2004年부터 한 달에 두 次例 龍山 美軍部隊 앞에서 反美 集會를 主導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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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 平和를 名分으로 내세우면서 되레 戰爭을 부추기는 美國의 軍部隊가 이 땅에서 나가야 韓半島가 統一도 되고 平和도 定着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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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年 5月
李明博
政府 들어 民主主義가 後退하고 南北關係가 破綻 난 데 對해 一週日間 斷食鬪爭을 했다.
- 2009年 6月 6日
李明博
에 對한 民衆抗爭을 主張하는 遺書를 남기고 自殺하였다.
향린敎會
에서 葬禮式이 치러졌다.
[2]
[3]
[4]
“
|
只今은 民衆 主體의 時代다.
4·19
와
6月 民衆抗爭
을 보라. 民衆이 아니면 나라를 바로잡을 主體가 없다. 第2 6月 民衆抗爭으로 殺人魔 里名朴을 내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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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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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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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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