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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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봉
沈守峰
Shim Soo Bong
基本 情報
本名 심민경
沈玟卿
出生 1955年 7月 11日 ( 1955-07-11 ) (68歲)
大韓民國 忠淸南道 瑞山市
性別 女性
職業 歌手
장르 트로트 , 발라드
活動 時期 1978年 ~
學歷 명지대학교 經營學科 卒業
配偶者 김호경
家族 아들 한승현
宗敎 佛敎 -> 改新敎 [1]
레이블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所屬社 라이트웨이브엔터테인먼트
웹사이트 심수봉 - 公式 웹사이트
代表曲
그 때 그 사람 1978年
젊은 太陽 1978年
女子이니까 1979年*
아낌없이 바쳤는데 1980年
當身은 누구시길래 1980年
올 가을엔 사랑 할거야 1983年
男子는 배 女子는 港口 1984年
無窮花 1985年
사랑밖엔 난 몰라 1987年
나는 野球狂 원:1984年, 再:1987年
미워요 1989年
겨울 나그네 1989年
우리는 他人 1991年
아이야 1994年
薔薇빛 우리 사랑 1994年
비나리 1996年
百萬송이 薔薇 1997年
개여울 2005年
女子라서 웃어요 (feat. 미쓰라진 ) 2007年
나의 新婦여 2011年

심수봉 (沈守峰, 本名: 심민경 (沈玟卿), 1955年 7月 11日 ~ )은 大韓民國 歌手 다.

學歷 [ 編輯 ]

生涯 [ 編輯 ]

歌手 데뷔 移轉 [ 編輯 ]

1950年 曾祖父, 祖父, 伯父, 叔父, 父親, 姑母 等이 모두 有名한 音樂人인 家庭에서 태어났다. [2] 피아노와 재즈 音樂을 練習하여 로큰롤 을 主로 연주했던 보컬 그룹 <논스톱>의 드럼 走者로 美8軍 部隊 專用 클럽 舞臺에 섰다. 이 때 같은 그룹은 아니었지만 같은 部隊에서 함께 活動하던 김수희 와 親分을 쌓게 되었다. 워낙 音樂的 才能이 뛰어나 여러 樂器를 다루는데 能通하였으며 音樂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여러 場所를 찾아갔었다.

當初 瑞山國民學校 를 다녔으나, 男便과 死別한 어머니를 따라, 2學年 때 서울銀露國民學校 로 轉學을 간 後, 영등포에 있던 女中에 入學했으나 治療를 위해 또다시 2年 休學을 했다. 後날 仁川 人和女子高等學校 에 뒤늦게 入學하여, 1973年 卒業했다.

한便, 公式的으로는 1955年 忠南 瑞山에서 태어난 것으로 申告되어 있었으나 實際로는 5살 줄여진 나이였다. [3]

歌手 데뷔 以後 [ 編輯 ]

데뷔 [ 編輯 ]

1976年 南山 도쿄호텔 23層 스카이라운지에서 피아노를 치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심수봉은 當代 最高의 歌手이던 羅勳兒 가 우연찮게 손님으로 들르자 서비스 兼 그의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를 卽席에서 라이브로 膳物했다. 피아노를 치며 卽席에서 自身의 노래를 부르는 심수봉을 본 나훈아는 바로 어딘가로 나가더니 곧바로 有名 音盤社 社長 둘을 데려와서 "이 사람이 歌手가 안 되면 누가 되나"라며 데뷔를 勸誘했다. [4] 그리고 그의 周旋으로 1976年 新世紀 레코드와 50萬원에 音盤吹入 契約을 맺고 錄音에 들어간다. 하지만 音盤社와의 紛爭으로 音盤發賣가 取消되었고 심수봉은 같은 해 명지대학교 經營學科에 入學했다.

羅勳兒 先輩가 新世紀레코드 社長에게 노래를 만들어왔고, 한 달 안에 節 說得해서 노래를 부르게 했죠. 當時 羅勳兒 先輩가 만든 '女子이니까'를 吹入했는데 結局 흐지부지돼 發表하지 않았어요. [4]

그 後 명지대학교 經營學科에 在學 中이던 1978年, 大學生의 資格으로 第2回 MBC 大學歌謠祭 에 명지대生으로 參加한 심수봉은 自身이 直接 作曲과 作詞를 한〈그때 그 사람〉으로 當時 裵哲秀 , 노사연 , 임백천 等 錚錚한 參加者들과 競爭하였다. 심수봉은 參加했던 歌謠祭에서 入賞을 하지는 못했지만, 大學歌謠祭에서 最初로 트로트 장르로 出戰한 異色的인 經歷으로 大衆들에게 注目받았고 自身이 工夫했던 재즈 音樂이 아닌 트로트로 처음 歌謠界에 발을 디뎠다. [5] [6]

競演 다음날 連絡이 온 音盤社 地球레코드와 契約을 맺고 歌謠祭에서 불렀던 自作曲 <그때 그 사람>과 同一한 題目으로 1979年에 첫番째 正式 앨범을 發表한다. [1]

靑瓦臺 演藝人 [ 編輯 ]

1975年에 처음으로 靑瓦臺 宴會에 招請받아 朴正熙 大統領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大統領과의 첫 對面에서 中學校 때 첫사랑인 家庭敎師 先生님으로부터 받은 日本 歌手 ‘ 미소라 히바리 ’의 ‘슬픈 술’을 첫 曲으로 불렀다. 朴 大統領은 靑瓦臺 宴會에 日本 歌手를 데려온 줄 알고 처음에는 언짢아 하였다가, 그女가 곧이어 눈물젖은 豆滿江, 황성옛터를 부르자 그제야 韓國 歌手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좋아했다고 한다. [7]

데뷔 以後에도 줄곧 靑瓦臺 宴會에 招請되었던 심수봉은 自然스레 靑瓦臺 側近들과도 面識이 생기게 되었다. 10.26 事件 當日 궁정동 大統領警護官 待機室에 들어갔을 때도 平素 紙面이 있던 大統領警護室 警護副處長 안재송을 알아보았다. [8]

심수봉은 이미 예전부터 靑瓦臺를 자주 오가며 朴正熙 大統領과 警護官들과도 이미 直接的인 顔面이 있었던 靑瓦臺 演藝人이었다. [9] 며칠 前에 처음 만났던 박선호 가 왜 當日 스케쥴까지 바꿔가며 그女를 固執했는지, 왜 익숙했던 大統領 訪問을 굳이 祕密로 하였는지, 왜 大統領을 기다리게 하면서까지 심수봉을 暗殺 現場에 데려오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10.26 事件 [ 編輯 ]

10.26 事件 當日 심수봉은 집에서 中央情報部 儀典誇張 박선호 로부터 呼出 連絡을 받게 되었다. 심수봉은 當日 저녁 '쇼쇼쇼' 프로그램 錄畫 스케줄이 잡혀있었기에 提案을 拒絶하였으나, 박선호는 스케줄 問題를 알아서 解決하겠다고 말하자 일거리로 演藝人들 公演이 있다는 것으로 알아듣고 承諾하게 되었다. 이 때 심수봉은 公演을 위해 흑석동에서 기타를 사다가 約束場所인 프라자 호텔에 늦게 到着하였고 그 곳에서 박선호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신제순을 만났다. 後날 조갑제 와의 인터뷰에서 萬若 大統領을 만나러 가는 자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朴正熙를 기다리게 行動은 쉽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回顧하였다. [10]

박선호는 심수봉과 신제순을 車에 태우고 午後 6時 40分 쯤 궁정동에 位置한 中央情報部 安家에 到着하였으며 그 곳에서 簡單한 禮節敎育을 하고 이들에게 機密誓約 維持書를 作成하게 하였다. 심수봉이 晩餐 中間에 노래를 부르던 中, 김재규 中央情報部長이 차지철 警護室長과 朴正熙 大統領에게 拳銃으로 그들을 狙擊하였다. 심수봉은 인터뷰에서 本人이 노래를 부르고 있던 渦中에 김재규가 高喊을 치며 차지철에게 먼저 銃을 쏘았으며, 몇秒 뒤 銃口를 朴正熙에게 겨눠 銃을 發射하였다고 證言했다. 朴正熙가 銃에 맞은 直後 김재규가 銃알이 떨어져 暫時 房을 나간 사이, 심수봉과 신제순은 朴正熙에게 다다가가 " 却下 괜찮으십니까?" 라고 물었고, 朴正熙는 매우 작은 목소리로 " 난 괜찮아..." 라고 짧게 答을 했다. [11] 그 直後 김재규가 다시 拳銃을 들고 房 안에 들이닥쳤고, 抵抗하려던 차지철을 먼저 쏜 뒤 朴正熙에게 다가가 大腿部에 1發 더 銃을 發射하였다.

狀況이 整理된 뒤 박선호는 심수봉과 신제순을 車에 태워 프라자 호텔로 데려다준 뒤, 오늘 벌어진 일에 對해 絶對的으로 緘口할 것을 注文한 뒤 자리를 떴다.

10.26 事件 以後 [ 編輯 ]

10.26 事件 2個月 뒤인 1979年 12月 , 全斗煥 을 爲始한 新軍部 勢力이 軍事叛亂을 일으키자 심수봉은 搜査에 連累되었다. 비록 無罪 判決을 받았으나 심수봉은 新軍部에 依해 1984年까지 放送 出演 禁止措置를 當했고, 精神病院에 强制入院되는 等 1980年代 내내 正常的인 歌手 活動을 하지 못하였다. 歌手 活動의 길이 막히자 심수봉은 俳優로 轉向, 1980年 映畫 《 아낌없이 바쳤는데 》에 主演으로 拔擢되었다. 特히 심수봉은 映畫 主題曲 OST도 直接 만들고 불렀다. 심수봉의 復歸作으로 話題의 中心이 된 映畫《아낌없이 바쳤는데》는 開封 以後 觀客 5萬名을 突破하는 興行몰이에 成功했고, 홍콩으로 輸出까지 成事되었다. [12]

또한, 1979年에는 드라마《荀子의 가을》主題曲 OST〈荀子의 가을〉도 直接 만들어 불렀다.〈순자의 가을〉이라는 曲은 처음에는 問題가 없었지만, 1980年 전두환政權이 出帆하자, 노래 題目에 令夫人의 이름 '荀子' [13] 가 나온다는 理由로 放送 禁止 措置를 當했다. 1983年 後輩 歌手 訪美가 이 노래의 題目을〈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로 變更하고 歌詞 一部를 修正해 人氣를 모았다.

1984年 放送 禁止 措置가 解除되자, 그 때의 아쉬움을 달래려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라는 題目으로 다시 音盤을 吹入하기도 했다. [12] 1984年에 歌謠界에 復歸한 뒤 家庭問題로 沈滯期에 빠졌던 狀況에서 直接 作曲, 作詞한〈남자는 배 女子는 港口〉가 收錄된 앨범이 猥褻是非에도 不拘하고 [14] [15] , 2萬 餘張이나 팔리는 販賣量을 記錄하며 심수봉은 다시 全盛期를 謳歌했다.

그러나 1985年 發表한〈무궁화〉라는 曲도 히트하였지만 歌詞가 時代的 狀況에 國民을 煽動하는 뜻이 있다고 여겨져 放送 하루만에 禁止 措置를 當했다. 다른 歌手들보다 直接的인 政治的 彈壓을 많이 받아 歌手活動에 支障을 많이 받았던 심수봉은 自身이 經驗했던 것들을 音樂에 表現하면서 大衆들의 耳目을 집중시켰고 슬프고 哀切한 曲들을 많이 불렀다.

民主化 以後 [ 編輯 ]

1987年에 正統 트로트〈사랑밖엔 난 몰라〉를 發表하였으며 特히 이 曲의 歌詞가 사랑받고 싶은 女性의 마음을 담은 노래이기도 해서 女性들에게 널리 불렸다. 1997年에는 알라 푸가초바 의 같은 뜻을 가진 題目의 러시아語 노래를 韓國語로 飜案하고 새로운 멜로디로 編曲한〈 百萬송이 薔薇 〉가 히트하였다.

2005年, 全國투어콘서트를 進行하던 심수봉은 離婚 때문에 自身의 딸과 헤어졌던 事緣을 담은〈아이야〉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國民歌手라 불리고 있는 심수봉은 自身의 音盤을 製作할 때마다 새로운 노래를 直接 만들어서 收錄했었는데 거의 大部分의 히트曲은 심수봉이 作曲하고 作詞한 作品이다. 이와 같은 音樂的 才能을 兼備한 심수봉은 大韓民國 歌謠界 第 1世代 女性 싱어송라이터 中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16] [17]

2011年 以後에는 放送보다는 公演 爲主의 活動을 하였다.

家族 [ 編輯 ]

  • 曾祖父 - 審팔록 (沈八綠, 피리 名人, 伽倻琴 名人, ? ~ 1883年)
  • 祖父 - 심정순 (沈正淳, 판소리 中高制 代가, 伽倻琴 名人, 1873年 ~ 1937年)
  • 조某 - 尹愹 (1883年 ~ 1933年)
  • 堂叔 - 심상건 (沈相健, 伽倻琴 名人, 伽倻琴 散調의 第1世代 名人 심창래의 아들, 1889年 ~ 1965年)
  • 堂叔 - 審事件 (판소리 人間文化財)
  • 叔父 - 심재민 (1909年 ~ 2000年)
  • 部 - 심재덕 (沈載德, 民謠蒐集家, 1899年 9月 26日 (陰曆 8月 22日) ~ 1967年)
  • 某 - 장형복 (張炯福, 平安南道 鎭南浦 出身,1925年 ~ )
  • 全部 - 이관근(1919年 ~? )
  • 全貌 - 임순덕(1896年 ~ 1989年)
  • 姑母 - 심혜영 (甚梅香, 朝鮮券番과 對政權番의 이름난 禮記, 1907年 ~ 1987年)
  • 姑母 - 심화영 (沈嬅英, 忠南 無形文化財, 乘務 人間文化財, 판소리 名唱, 1913年 9月 4日 (陰曆 8月 4日) ~ 2009年 11月 17日)
  • 異腹 큰언니 - 심인숙
  • 異腹 작은언니 - 심현숙
  • 異腹 막내언니 - 심의숙
  • 이福 오빠 - 심현구
  • 二部 男동생 - 李尙玟
  • 二部 女同生 - 이상나
  • 男便 - 김호경
  • 者 - 한승현
  • 者 - 金奎顯
  • 女 - 박성희
  • 糖質 - 이애리

正規 앨범 [ 編輯 ]

  • 1978年 10月《第 2回 MBC 大學歌謠祭 omnibus - 그때 그사람》
  • 1979年 5月 《심수봉/최현군 스필里 音盤 - 그때 그 사람/ 젊은 太陽》
  • 1979年 9月 《심수봉과 나훈아의 아베크SONG! - 女子이니까》 [18]
  • 1980年 1月 《심수봉 골든디럭스20曲 - 當身은 누구시길래/여자이니까》
  • 1980年 7月 《심수봉의 第3彈 - 아낌없이 바쳤는데》
  • 1982年 7月 《심수봉의 노래天國 메들리》
  • 1984年 4月 《심수봉 新曲 1輯: 그대와 탱고를/남자는 배 女子는 港口》
  • 1985年 5月 《심수봉 新曲 2輯: 無窮花/나의 四季節》
  • 1987年 2月 《沈守峰 - 사랑밖엔 난 몰라》
  • 1987年 8月 《沈守峰 - 님이여. 나는 野球狂》
  • 1988年 9月 《심수봉 - 미워요/이슬비 내리는 午後》
  • 1991年 3月 《沈守峰 - 自己. 우리는 他人》
  • 1994年 11月《7th 沈守峰 單價집 - 비나리/눈물의 술》
  • 1996年 1月 《심수봉 `96 Music Drama - 비나리/눈물의 술》
  • 1999年 2月 《심수봉 - 아! 나그네/잃어버린 사랑》
  • 2001年 11月《沈守峰 - 사랑했던 사람아/ 眞實 그 사랑》
  • 2003年 10月《심수봉 - 비나리》
  • 2005年 1月 《10輯 꽃 - 개여울 / 離別 없는 世上》
  • 2007年 10月《11輯 - 오늘, 문득》

出演作 OST [ 編輯 ]

드라마 出演作 [ 編輯 ]

  • 1979年 《荀子의 가을》 主題曲 OST - 《荀子의 가을》(나중에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로 曲名 變更) [12]

映畫 出演作 [ 編輯 ]

放送 出演作 [ 編輯 ]

라디오 [ 編輯 ]

심수봉을 演技한 俳優 [ 編輯 ]

新派劇 [ 編輯 ]

著書 [ 編輯 ]

  • 1994年 《사랑밖엔 난 몰라》

受賞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日報 - 박선영 記者의 Who's now 데뷔 30年 歌手 심수봉
  2. 뉴스엔 - 심수봉 4代 國樂家門 出身 깜짝 公開 “民俗樂의 바흐 집안”
  3.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2003年 10月 2日). “[追憶의 LP 旅行] 심수봉(上)” . 데일리韓國 . 2018年 1月 16日에 確認함 .  
  4. 이은정 記者 (2018年 5月 2日). “심수봉 "統一되면 九旬 어머니 北녘 故鄕에 가고파 " . 聯合뉴스 . 2021年 11月 15日에 確認함 .  
  5. 朝鮮日報 - '그때 그 사람' 심수봉의 '그때 이야기'
  6. 京鄕新聞 - 頂上에 오른 大學生 歌手 심수봉 "中學生 때부터 和聲學 배워" 哀切한 唱法 '그때 그사람' 큰 人氣
  7. 朝鮮日報 - 심수봉 "朴正熙, 엔카 듣고 火냈다" 아사히 報道 反駁
  8. 조갑제닷컴 - 朴正熙의 最後 目擊者 신재순 심수봉 軍檢察 陳述 內容
  9. 주간한국 - [追憶의 LP 旅行 심수봉(上)]
  10. 조갑제닷컴 - 朴正熙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女人 신재순 證言
  11. 1993年 SBS 《주병진쇼》 인터뷰 中
  12. 주간한국
  13. 當時 令夫人의 이름이 '이순자'였다.
  14. 韓國日報 - ‘乘勝長驅’ 심수봉, '男子는 배 女子는 港口'는 猥褻 가요 아닌 '戀人의 사랑' 表現한 것
  15. 스포츠조선 - 심수봉, 노래로 본 人生 파노라마
  16. 경인일보 - <이름600·開港130 仁川을 본다·3>⑤ 大衆文化(노래)
  17. 스포츠서울 - '不朽2' 눈물 흘린 심수봉, 빛났던 '傳說'의 後輩사랑
  18. Discogs - 심수봉
  19. 每日新聞 - <映畫속 藝術 散策> 임순례 監督 '와이키키 브라더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