皇帝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진 始皇帝 또는 簡單히 影幀은 紀元前 220年부터 紀元前 210年에 死亡할 때까지 秦나라의 初代 皇帝였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 또는 簡單히 아우구스투스는 紀元前 27年부터 서기 14年에 死亡할 때까지 로마 帝國의 初代 皇帝였다.

皇帝 (皇帝, 英語 : Emperor 엠페러 [ * ] )는 帝國 (帝國)을 다스리는 君主 稱號 이다. 漢字의 皇帝는 賃金 黃과 賃金 제이나, 帝(第)의 境遇에는 本來 ‘賃金’이란 뜻이 아닌 神에게 祭祀를 바치기 위해 차려놓은 祭司長을 意味하는 漢字語였다. 帝 밑의 巾(手巾, 건)자는 床 밑의 나무를 엮어 만든 선반 模樣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帝(第)字는 本來 하늘에 드리던 祭祀를 뜻했지만 天子와 聯關하면서 뜻이 賃金으로까지 나중에 擴大하게 되었다.

由來 [ 編輯 ]

東洋 의 初代 皇帝는 진 始皇帝 에게서 始作되었다. 旣存 中國에서 君主의 呼稱은 이었다. 周나라 天子 만이 王의 職位를 가졌고, 周邊 諸侯들은 五等爵 에 따라 差等되는 呼稱을 附與받았다. 그러나 春秋 戰國 時代 를 거치면서 周나라 天子의 權威는 바닥에 떨어졌고 漸次 王을 稱하는 나라가 늘어나 모든 國家들이 王을 稱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中國을 統一 의 始皇帝는 王과 差別化되는 稱號를 願했고, 三皇五帝 에서 各其 黃과 祭를 따와 皇帝라는 稱號를 만들었다. [1] 皇帝의 아들 은 王이나 親王 으로 封해졌다. 第(帝)는 本來 祭政一致 (祭政一致) 社會였던 商나라 에서 祖上神을 일컫는 呼稱이었으나 [2] 始皇帝가 皇帝라는 稱號를 만든 以後 皇帝의 略語로 使用되었다.

西洋 의 皇帝는 招待 로마 皇帝 아우구스투스 의 稱號에서 비롯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稱號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에서 ‘ 임페라토르 ( Imperator )’는 元來 凱旋將軍이란 뜻이었으나 漸次 皇帝를 가리키는 單語로 변용되었고 英語 ‘엠퍼러( emperor )’의 語源이 되었다. ‘카이사르( Caesar )’는 카이사르 家門의 이름이었으나 漸次 皇帝를 가리키는 普通 名詞가 되어 獨逸語 카이저 ( Kaiser )’와 러시아語 차르 ( царь )’로 變形되었다. [3]

意味 [ 編輯 ]

본디 皇帝란 君主를 麾下에 둔 君主 라는 意味로 王보다 더 높은 職位이다. 때문에 東西古今을 莫論하고 大韓帝國 처럼 特異한 境遇를 除外하면 皇帝의 麾下에는 언제나 王 또는 王의 役割을 하는 다른 벼슬을 麾下에 두었다.

아시아 [ 編輯 ]

東아시아 [ 編輯 ]

皇帝는 여러 諸侯를 冊封 하고 年號 (年號)를 定했으며 諸侯國은 朝貢 을 바치고 年號를 받아 썼다. 그래서 傳統的으로는 이를 垂直關係와 從屬性으로 認識하려고 했다. 그러나 實際 外國 間의 朝貢冊封은 어느 程度 國力의 差異를 反映하여 形式上 差等的 關係를 設定하기는 하지만, 內政干涉 은 없는 相互 認定과 侯王舶來(厚往薄來) [4] 의 外交 行爲로서 當時의 自主的 國際 秩序였다. [5]

東아시아 에서 皇帝나 獨立國의 王의 2人稱 敬稱은 陛下 (陛下)이다. 이는 “높이 우러러 볼 사람이기에 뜰에서 層階 위로 우러러 뵌다.”라는 뜻이다. 諸侯 (諸侯)의 2人稱 敬稱은 殿下 (殿下)로 “階段 아래 뜰에서 우러러 뵌다.”라는 뜻이다. 卽 君主가 있는 곳이 다를 뿐이고 臣下는 언제나 ‘뜰’(뜰層階의 아래)에 자리하게 된다. 中世 韓國語 에서도 ‘ 陛下ㄴㆍㄴ 버ㅌㅓㅇ 아래니 皇帝ㄹㆍㄹ 바ㄹㆍ 몯 ㅅㆍㄹㅸㅏ 버ㅌㅓㅇ 아래ㄹㆍㄹ ㅅㆍㄼㄴㆍ니라 ’라 하여 [6] 陛下와 殿下의 뜻이 버ㅌㅓㅇ 아래 로 같다. 다만 그 品格에서 陛下가 殿下보다 높았다. 太上皇 , 太皇太后 , 皇太后 等은 皇帝를 陛下라 부르지 않는 代身 皇上(皇上), 聖像(聖上) 等으로 불렀다. 皇帝의 1人稱은 짐(朕)으로, 本來 一般 1人稱이었으나 始皇帝 가 皇帝만이 쓸 수 있는 1人稱으로 바꾸었다.

中國 [ 編輯 ]

秦始皇 卽位 以前에는 中國은 王(王)稱號를 썼다.

紀元前 221代에 진 始皇帝 가 皇帝의 稱號와 各種 用語를 定立한 以來 中國 의 歷代 王朝 들은 自國의 國家元首 를 皇帝라 하였다. 이는 한족 이 建國한 王朝뿐만 아니라 몽골 滿洲 에서 生活하던 여러 騎馬民族(騎馬民族)이 세운 遼나라 · 金나라 · 元나라 · 淸나라 等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旣存에 (Khan) 等의 固有한 稱號를 使用하였지만, 中國을 넘볼 程度로 强力해지면 餘地없이 稱帝建元하여 中國式 皇帝의 稱號를 採用하였다. 그러다가 1912年 淸나라가 滅亡하면서 廢止되었다. 1934年 滿洲國 에서 허수아비지만 暫時 復活하기도 하였으나 1945年 滿洲國道 滅亡하면서 完全히 없어졌다.

이와는 別途로 唐나라 高宗 은 皇帝 稱號 代身에 ‘ 天皇 (天皇)’이라는 稱號를 쓰기도 하였다. [7]

中國은 皇帝 麾下에 王으로 태수 를 두었는데 이는 一般人 國家 指導者를 의미하며 皇族이 國家 指導者가 되면 王으로 冊封하는 代身 國喪(國相)이라는 總理를 두었다.

韓國 [ 編輯 ]

韓國 高宗 大韓帝國 을 宣布하면서 皇帝(皇帝)를 稱했다. 다만 帝國 宣布 以前에도 황제국에서 使用하는 用語들을 種種 借用하였다. 任意的으로 皇帝라 불리기도 하였다.

高句麗 新羅 는 獨自 年號 를 使用한 때가 있고 金春秋 에게 太宗(太宗)이라는 廟號 (廟號)를 올리기도 하였다. 渤海 는 各種 記錄에서 讀者 年號의 使用과 皇上, 皇后 (皇后) 等의 用語가 나타나지만 廟號를 올리지 않고 皇帝라 稱하지 않았다. [8]

高麗 는 廟號를 올렸고, 太祖 光宗 때 約 20年 동안 讀者 年號를 使用한 적이 있다. [9] 수도 開京 을 黃道(皇都)라 부르고 [10] 圜丘壇 에서 하늘 에 祭祀 지냈으며 [11] 任意로 皇帝라 부른 記錄들이 있다. [12] 이렇듯 高麗는 外部로는 中國에 稱臣하고 內部的으로는 황제국體制를 志向했다. [13] 다만 公式 職銜은 內部的으로도 皇帝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 왕태후, 王后, 王太子라는 말을 絶對的으로 더 많이 썼고 [15] 시호 도 大王(大王)으로 올렸다. 光宗度 讀者連呼를 쓴 時期는 約 7年 뿐으로 宋나라 의 年號를 받아들였으며 [16] 스스로도 皇帝라는 表現은 쓰지 않았다. [17]

元나라 駙馬國 이 된 충렬왕 以後로는 官制와 王室의 呼稱을 모두 諸侯國의 規格으로 格下되었고, 朝鮮 時代에도 이를 繼承하였다. 하지만, 操縱(祖宗)의 廟號 를 回復하고 과 王妃의 事後 大王과 王后 (后)의 尊號(尊號)를 올렸다. 1894年 淸나라 의 年號를 完全히 廢止하고, 君主를 大君主 陛下(大君主陛下)로 格上해 불렀다. [18]

1897年 高宗 光武 (光武)로 年號를 바꾸고 圜丘壇에서 韓國의 皇帝 에 올라 大韓帝國 을 宣布하였다. 그러나 정작 內實이 不足하여 列强 의 內政干涉은 深化됐고, 結局 1910年 日本 帝國 과의 韓日 合倂 으로 制定이 廢止된다.

日本 [ 編輯 ]

日本 야마토 時代 부터 大王 (大王)의 稱號를 使用했고 大略 7世紀 天皇 ( 天皇 )으로 改稱하였다. [19] 무로마치 時代 에는 쇼군 日本國王 으로 冊封 받기도 하였다. [20] 메이지 維新 以後 王政復古 가 이루어지면서 幕府 가 廢止되고 天皇 中心의 近代的 獨逸式 內閣制를 採擇하였다. 第2次 世界 大戰 에서 敗戰한 後로도 天皇制는 存續하였고, 21世紀 現在 題號(帝號)를 維持하고 國際的으로 'Emperor(皇帝)'가 通用 表記되는 唯一한 나라 이다. [21]

日本에서 天皇은 王에 該當되는 다이묘 를 麾下에 두었다.

베트남 [ 編輯 ]

베트남 은 對外的으로는 中國의 冊封을 받아 皇帝의 稱號를 對外的으로 쓰지 않았지만 對內的으로는 '皇帝’를 稱하고 獨自的인 廟號 年號 를 使用하였다. 그러다가 19世紀 以後부터는 대놓고 皇帝를 稱했고, 最後의 王朝 응우옌 王朝 19世紀 프랑스領 인도차이나 에 編入되어 植民地 가 되었어도 名目上 皇室은 維持하다가 1945年 完全히 幕을 내렸다.

西아시아 [ 編輯 ]

페르시아 [ 編輯 ]

紀元前 550年 키루스 2歲 以來 페르시아 帝國 의 皇帝는 傳統的으로 파디샤 (Padishah) 或은 샤한샤 (Shahanshah)라 하였다. 이는 古代 페르시아語 흐샤야티야 흐샤아티야남, 卽 ‘王 中의 王’李 縮約된 形態이며 普通 皇帝로 飜譯한다. 사파비 王朝 카자르 王朝 에서는 페르시아의 皇帝가 이슬람敎 시아派 의 우두머리를 겸했기 때문에, 質룰라(Zill'ul'lah)라는 呼稱이 皇帝의 휘(諱) 앞에 붙기도 하였다. 皇后 는 샤흐바누(Shahbanu)라 불렀는데 사파비 王朝 以後에는 마흐돌리야라고 부르기도 했다. 親王 은 샤흐자드(Shahzade)라고 불리고 미르자(Mirza)라는 尊稱이 붙었다. 內親王 은 샤흐자데(Shahzadeh)라고 불렸으며 베곰(Begom)이라는 尊稱이 붙었다. 20世紀 팔라비 王朝 까지 이어졌으나 1979年 이란 革命 으로 廢止되었다.

이슬람 文化圈 [ 編輯 ]

이슬람 文化圈에서 君主의 意味를 가지는 稱號는 칼리파 , 술탄 , 에미르 等이 있는데 칼리파가 實權을 가지고 다스렸던 初期 이슬람 帝國 과 술탄이 다스렸던 셀주크 투르크 系統의 여러 國家들을 帝國이라 稱한다. 그러므로 칼리파 및 술탄을 皇帝로 飜譯할 수도 있지만, 一般的으로 飜譯하지 않고 固有의 稱號로서 使用한다. 오스만 帝國 은 비잔티움 帝國을 멸망시킨 뒤 第3의 로마 帝國을 自處했으므로 로마 皇帝의 稱號도 함께 使用했다. 페르시아의 파디샤도 自稱했고, 술打네스 셀라틴(Sultanes Selatin, 술탄 中의 술탄)라는 呼稱도 使用했다. 또한 압바스 王朝 칼리파의 後孫에게 칼리파 地位까지 讓渡받아 칼리파를 自處하기도 했다. 當時 오스만 帝國이 支配한 文化圈 內에서 皇帝에 該當하는 稱號를 모두 使用한 것이다. 오스만 帝國 以後 술탄 은 格이 낮아져 오스만 帝國과 무굴 帝國, 페르시아 等地에서는 親王의 槪念으로 쓰였다.

南아시아 [ 編輯 ]

皇帝를 의미하는 다양한 산스크리트語 稱號들은 다음과 같다.

森羅트는 王中王 을 指稱하는데, 이는 그가 主權 統治者인 同時에 封建 君主라는 것을 意味한다. 漢字 文化圈 에서 轉輪聖王 으로 飜譯되는 車크라바르티는 말 그대로 電車 바퀴가 妨害받지 않고 모든 곳에서 구르는 統治者를 뜻하는 單語로, 前 印度 亞大陸 또는 南아시아를 다스리는 統治者를 가리킨다. 世界의 皇帝를 意味하는 三라트 차크라바르틴, 或은 車크라바르티 森羅트는 바로 이 삼라트와 車크라바르티가 結合된 單語로, 後記 베다 時代에서는 一般的으로 삼라트가 아슈바메다 를 遂行한 後에만 車크라바르티 삼라트라고 불렸으며, 宗敎的 傳統에 따라 다른 王과 王子보다 優越하다고 主張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차크라바르티는 恒常 三라트로 看做되지만 삼라트가 반드시 車크라바르티로 看做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리그베다에서 證明된 바와 같이 이 單語는 바루나와 같은 다양한 베다 神들의 別名으로 使用되었으며, 三라트의 稱號는 印度 亞大陸의 많은 統治者들은 힌두 神話에서 主張한 대로 삼라트라는 稱號를 使用하였다. 大部分의 歷史家들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가 巨大한 마우리아 帝國 을 다스렸던 것을 理由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를 印度 亞大陸의 첫番째 三라트(皇帝)로 看做하고 있으며, 그의 孫子인 아소카는 第一 有名한 引渡의 皇帝이다. 판다바 5兄弟 中 하나인 아르주나 의 後孫이자 북인도의 巨大한 地域을 統治한 阿낭그팔 토마르(Anangpal Tomar)는 中世 印度의 偉大한 皇帝로 看做되며, 마라타 帝國 차트라파티 人 시바지는 近代 初期 印度의 가장 偉大한 마지막 皇帝로 看做된다. 歷史家들은 마우리아 帝國 以外에도 토마르, 굽타 , 비자야나가라 , 카카티野 , 好이살라 촐라 等의 引渡 王朝들을 帝國으로 看做하고 있다.

무슬림 統治者들을 위한 皇帝의 代替 稱號는 파디샤 (또는 바드샤)였다. 마찬가지로 마라타 帝國 의 皇帝는 차트라파티라고 불렸으며, 印度를 統治한 英國의 印度 皇帝 는 카이사르-李-힌드(Kaisar-i-Hind)라는 稱號를 追加的으로 採擇하였다.

유럽 [ 編輯 ]

西區 에서 皇帝는 招待 로마 皇帝 아우구스투스 가 使用한 稱號에서 由來한 以來 基本的으로 로마 帝國 의 最高 支配者를 일컫는다. 아무리 强大한 나라라도 로마 帝國의 傳統을 물려받지 못하면 使用할 수 없었고, 아울러 敎會 의 承認도 必要했다. 유럽에서 使用된 皇帝 稱號는 全部 로마 皇帝 의 職銜에서 由來한 것으로, 로마 時代에는 아우구스투스 , 임페라토르 , 프린켑스, 카이사르 等이 皇帝의 稱號로 使用되었다. 中世 부터는 로마 時代에 使用된 稱號들 中 임페라토르 와 카이사르가 皇帝 稱號로 使用되었는데, 代表的인 事例로 獨逸語 로 皇帝를 意味하는 카이저 러시아語 로 皇帝를 意味하는 차르 두 單語는 모두 카이사르의 該當 言語式 表現이다.

古代 ~ 近世 [ 編輯 ]

로마 時代 皇帝의 權力은 '護民官 特權'(potestas tribunicia)과 '代行 執政官 權限'(imperium proconsulare)에 依해서 만들어졌다. 護民官 特權은 皇帝에게 拒否權(veto)를 附與하게 됐고, 이는 元老院과 民會의 決定까지도 拒否할 수 있는 權限으로써, 本來 共和政 時代에는 서로에 對한 牽制의 意味로써 두名의 執政官과 10名의 護民官 모두에게 주어졌던 權限이다. 또한 護民官 特權은 皇帝의 身體는 神聖不可侵으로 만들었다. 그에게 暴力을 加하거나 그의 義務 遂行을 意圖的으로 妨害하는 者는 詛呪 곧 死刑에 處해졌다. 이는 共和政 時代에는 護民官에게 주어졌던 特權으로, 本來 共和政 時代에는 平民들의 權利를 保護하는 護民官의 特性上 身邊의 安全을 保障하는 性格이 더 剛했던 特權이었다. 代行 執政官 權限(共和政 時代의 總督 役割을 맡던 代行 執政官의 權限)을 통해 皇帝는 로마軍 統帥權을 가지게 된다. 皇帝는 共和政 時代에는 元老院과 民會의 몫이었던 戰爭 宣言, 條約 批准, 外交 協商 等의 外交權度 가졌으며, 元老院 議員 任命權 等 過去 監察官이 맡던 여러 權限을 行使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皇帝는 宗敎 組織을 統制하였으며, 皇帝는 늘 最高 司祭長(pontifex maximus)이며 네 가지 主要 司祭團의 一員이었다.

로마 帝國이 東西로 分割되면서 皇帝도 2名이 되었다. 이 中 서로마 皇帝의 境遇 서로마 帝國 5世紀 中後半에 滅亡하면서 그 祭位(帝位)가 오랫동안 비어 있다가, 프랑크 王國 의 國王 카롤루스 1歲 800年 12月에 敎皇 으로부터 서로마 皇帝 의 棺을 받았다. 이 자리는 오토 1歲 神聖 로마 皇帝位 로 이어졌고 16世紀 부터는 합스부르크 王朝 가 神聖 로마 皇帝位를 世襲했다.

反面 東로마 皇帝 의 境遇 東로마 帝國 이 오래 存續하면서 安定的으로 帝位를 維持하였다. 이라클리오스 皇帝 때부터 라틴語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代身 그리스어 바실레프스 (Βασιλε??, 皇帝)를 稱號로 使用하고 이보다 더 나중에는 專制者를 의미하는 亞프토크라토르 라는 稱號도 같이 使用하였다. 15世紀 러시아 統一 이반 3歲 는 東로마 帝國이 滅亡하자 그 正統性의 繼承과 東方 正敎會 의 守護를 主張하며 스스로 차르 (Tsar)에 올랐다. 名分은 마지막 東로마 皇帝 의 조카딸과의 婚姻 모스크바 로 東方 正敎會의 中心地가 移動한 點이었다. 1721年 표트르 1歲 는 아예 러시아 帝國 을 宣布하고 임페라토르 (Imperator)를 稱하였다. 한便 東로마 帝國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를 陷落시킨 오스만 帝國 술탄 메흐메트 2歲 는 自身이야말로 콘스탄티노폴리스 總大主敎 의 保護者이자 第3의 로마 皇帝라고 主張하였으나 敎會의 認定을 받지는 못하였다.

以外에도 東로마 帝國 및 敎皇의 認定을 받아 公式的으로 皇帝가 된 第 1次 불가리아 帝國 이 있다. 東로마 帝國이 弱化된 틈을 타서 皇帝로 認定되긴 하였으나 以後 弱化되면서 100餘 年 만에 滅亡하였다.

近代 ~ 現代 [ 編輯 ]

1804年 프랑스 나폴레옹 은 샤를마뉴로부터 위그 카페 , 그리고 自身으로 그 正統이 이어진다며 프랑스 帝國 을 宣布하고 스스로 皇帝에 卽位하였다. 以前까지만 해도 스페인 카스티야 王國 이나 발칸半島 세르비아 帝國 에서 皇帝를 自稱한 적은 있었으나 公認 받은 것은 아니었다. 1801年 英國 조지 3歲 아일랜드 王國 을 合倂했을 때 國內의 皇帝 稱號 勸誘를 拒絶하기도 하였다. 反面에 나폴레옹에게 刺戟받은 오스트리아 大公國 對空 利子 神聖 로마 帝國의 皇帝였던 프란츠 2歲 오스트리아 帝國 을 樹立하여 前無後無한 두 個의 皇帝를 겸하였다. 神聖 로마 帝國은 1806年 나폴레옹에게 해체당했지만 各地에서 皇帝가 亂立하면서 皇帝 卽位의 原則은 깨지고 그 價値도 떨어졌다. 獨逸 19世紀 中後半 여러 對外戰爭에서 勝利하여 統一된 後 호엔촐레른 王家 빌헬름 1歲 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宮殿 에서 獨逸 諸侯 들의 推戴를 받는 形式으로 帝位에 올라 獨逸 帝國 을 宣布하였다. 20世紀 까지 유럽에서 題號를 썼던 나라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 獨逸, 터키 의 4국이었는데 第1次 世界 大戰 의 結果 모두 廢止되었고, 現在 유럽에서 題號를 쓰는 나라는 없다.

아프리카 [ 編輯 ]

솔로몬 으로부터 이어지는 世界 最長壽 王朝라 主張하는 에티오피아 솔로몬 王朝 3世紀 에 在位한 엘라 아메다 1歲부터 네驅使 네게스트(Negusa Nagast, 王中의 王)라는 皇帝 稱號를 使用하였다. 象徵은 예수 를 나타내는 王冠을 쓴 獅子 로 ‘유다의 獅子’ 라고 불린다. 1974年 軍部 쿠데타 가 일어나 하일레 셀라시에 1歲 는 最後의 皇帝가 되었다.

아메리카 [ 編輯 ]

잉카 帝國 아즈텍 帝國 의 君主는 一般的으로 皇帝로 呼稱된다.

멕시코 는 매우 짧은 2番의 制定 이 있었다. 第1帝政 은 스페인으로부터 獨立 한 後 1822年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 가 스스로 帝位에 올랐다가 1823年 共和政 으로 轉換되었다. 1864年 프랑스 나폴레옹 3歲 는 멕시코를 保護國으로 삼을 目的에서 막시밀리안 1歲 를 내세워 第2帝政 을 열었으나 1867年 베니토 후아레스 에 依해 共和政이 復活하였다.

포르투갈 植民地 였던 브라질 나폴레옹 戰爭 으로 브라幹事 王家 가 避難오면서 그 地位가 格上되었다. 結局 王室이 本國으로 돌아간 後 1822年 獨立 하여 남아있던 페드루 1歲 를 皇帝에 올려 브라질 帝國 을 宣布하였다. 그러다가 1889年 共和政으로 轉換되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詐欺 》6卷 秦始皇本紀 市況 26年
  2. 貝塚茂樹·伊藤道治, 《中?の?史》1卷 〈原始から春秋??〉. 講談社, 1974
  3. Stephen Howe, 《Empire: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4. 가져오는 것[朝貢]은 가볍게 하고 보내는 것[會社]은 厚하게 함. 諸侯國이 ‘ (禮)’를 갖추면 皇帝國道 禮를 갖추어 더한 을 베풀어야 함. 《 禮記 》31篇 〈 重用
  5. 李龍熙 저 노재봉 篇, 《韓國民族主義》, 서문당, 1977. 권선홍, 〈儒敎文明圈의 國際關係 : 冊封制度를 中心으로〉, 《韓國政治外交史論叢》vol.31 no.2,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10
  6. 月印釋譜 》 2卷 65張
  7. 上元元年 ~(中略)~ 八月壬辰,皇帝稱天皇,皇后稱天后。(上院 元年 八月 壬辰日(譯註:율리우스력 674年 9月 20日), 皇帝가 天皇이라 稱하고 皇后를 天候라 稱했다.) 《 新唐書 》(新唐書) 〈 本紀 第3 高宗
  8. 정혜공주墓地 , 정효公主墓碑 . 宋基昊, 〈溶解區域 古墳 發掘에서 드러난 발해국의 性格〉, 《高句麗渤海硏究》, 高句麗渤海學會, 2010
  9. 高麗史 》1卷 世가 第1 太祖 元年, 2卷 世가 第2 光宗 元年
  10. 《高麗史》2卷 世가 第2 光宗 11年
  11. 《高麗史》59卷 지 제13 吉禮
  12. 〈高達寺原從大使혜진塔非〉(975年) . 〈太平2年銘磨崖藥師佛坐像〉(977年)
  13. 김기덕, 〈高麗의 帝王制와 황제국體制〉, 《국사관論叢》vol.78, 國史編纂委員會, 1997
  14. 박재우, 〈高麗 君主의 國際的 位相〉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1584 〈고미현서원종〉(963年)], 〈雲門寺원응국私費〉(1147年)
  15. 《高麗史》
  16. 《高麗史》2卷 世가 第2 光宗 2年, 光宗 14年
  17. 〈大般若波羅蜜多經 死境 卷數〉(952年), 이기백 編著, 《韓國相對古文書資料集成》, 일지사, 1987
  18. 朝鮮王朝實錄 》 高宗 31年 12月 17日
  19. 本位田菊士, 〈‘大王’から‘天皇’へ--古代君主?の成立をめぐって〉, 《ヒストリア》89, 大阪?史??, 1980
  20. 《선린국보기》(善隣國寶記)
  21. (日本語/英語) 日本 宮內廳 사이트

外部 링크 [ 編輯 ]

  • 위키미디어 公用에 皇帝 關聯 미디어 分類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