程頥大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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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의 程頥大將軍
征夷大將軍
所屬 英外觀
任期 終身職
上官 天皇
招待 오토모노 오토마로
設置일 791年
마지막 도쿠가와 요시노부
廢止일 1868年

程頥大將軍 ( 日本語 : 征夷大將軍 ( 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 ) , 세이이타이쇼군)은 日本 의 英外觀 將軍職 中 하나다. 줄여서 將軍 ( 將軍 쇼군 [ * ] ), 攻防 ( 公方 驅步 [ * ] ), 大樹將軍 ( 大樹將軍 다이주쇼군 [ * ] ) [1] , 御所 ( 御所 고쇼 [ * ] ) 等으로 불렀다. 나라 時代 , 헤이안 時代 에는 東쪽 地域에 에미視 征伐을 위해 派遣한 將軍의 名稱이었는데, 가마쿠라 時代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幕府 의 首長이자 동국 武士團의 棟梁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이 職責은 무가 棟梁 家門이 代를 이어 繼承하는 傾向이 생겼다. 이미 調整을 統制하고 巫歌를 거느리는 日本의 實質的 統治者를 의미하는 職責이 되었으며, 外國에서는 程頥大將軍을 國王으로 看做하는 게 通常的이었다. 에도 時代 까지 最高 權力者의 職責으로 存在하였으나 메이지 維新 以後 廢止되었다.

'情이'(征夷)라는 名稱에서 알 수 있듯, 이 職責은 東쪽의 오랑캐, 卽 에미視 를 혼슈의 東쪽 方面으로 征伐할 때 任命한 將軍이다. 에미詩를 西쪽 海岸 方向으로 攻擊하는 將軍은 ' 正敵大將軍 ( 征狄大將軍 歲이테키타이쇼군 [ * ] )', 규슈 로 進軍하여 하야토 等을 攻擊하는 將軍은 ' 情緖大將軍 ( 征西大將軍 세이세이타이쇼군 [ * ] )'으로 불렀는데, 이는 中國의 華夷館 乙 日本의 狀況에 適用해 생긴 이름이다. 當初에는 '정동將軍'과 같이 '정동'(征東)이라는 表現을 쓰다가 다시 '情이'를 使用했다.

에도 幕府의 程頥大將軍은 主로 우에私馬( 上? ( うえさま ) )라고 불렀다.

日本에서 程頥大將軍은 身分 制限이 엄청나게 까다로웠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賤民 出身 人物은 絶對로 오를 수 없는 官職이었다. 一旦 미나모토盧 겐지(源) 血統을 直系든 傍系든 外家 [2] 든 間에 어떻게든 갖고 있어야만 하며 그 外에도 여러 가지 宏壯히 까다로운 條件이 있었다. 따라서 미나모토盧 겐지와 一面識조차 없는 完璧한 男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이大將軍에 就任할 가장 根本的인 條件에서조차 符合하지 못해 程頥大將軍 資格이 없었다. 以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調整의 관백(關白) 자리에 올랐다. 反面 以後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미나모토 씨 한 分派인 세이와 겐지(淸和源氏)에 該當했기 때문에 政黨性있게 정이大將軍에 올랐다.

歷史 [ 編輯 ]

나라 · 헤이안 時代 [ 編輯 ]

정이將軍(征夷?軍) 卽 大將軍(大?軍)은 「에미視」(夷)를 征討함에 즈음해 朝廷으로부터 任命되는 將軍(大將軍)의 하나로, 日本 列島 의 太平洋 方面人 도카이道 側으로 進軍하는 君을 統率하였다. 이와는 別個로 東海 方面人 호쿠리쿠度 (北陸道)側으로 進軍하는 君을 統率하는 境遇를 政敵將軍(征狄?軍) 또는 진적將軍(?狄?軍) , 규슈 方面으로 向하는 軍隊를 統率하는 將軍을 情緖將軍(征西?軍) / 眞書將軍(?西?軍) 이라 불렀다. 이는 古代 中國에서 周邊 異民族들을 四方 方位에 따라 東이(東夷) ? 西戎(西戎) ? 남만(南?) ? 북적(北狄) 等으로 불렀던, 이른바 「사이」(四夷) 觀念에 맞춘 것이다. 이 가운데 「東夷」 方面에 該當하는 將軍으로써는 와도 (和銅) 2年( 709年 ) 3月 6日 육오振動將軍(陸??東?軍)에 任命되었던 高세노 마로(巨勢麻呂)가 最初였고 [各州 1] 「정이將軍」(通常 程頥大將軍과 同一한 것으로 看做됨)이 처음 보이는 것은 要路(養老) 4年( 720年 ) 9月 29日 지絶頂李將軍(持節征夷?軍)으로 任命된 多지히노 阿伽陀모리(多治比縣守)였다. [各州 2] 또한 같은 날에 「북적」에 對한 지절진적將軍(持節?狄?軍)으로 아베盧 스루가 (阿倍駿河)도 任命되었다. 「정동將軍」(征東?軍)이 처음 보이는 것은 엔랴쿠 (延?) 3年( 784年 ) 2月에 眞髓將軍(?守?軍)에서 昇格한 오토모노 야카모치 (大伴家持), 「貞洞大將軍」(征東大?軍)이 처음 보이는 것은 엔랴쿠 7年( 788年 ) 12月 7日에 辭任한 기노 枯死美(紀古佐美)였다. [各州 3] [各州 4]

엔랴쿠 10年( 790年 ) 7月 13日, 오토모노 오토마로(大伴弟麻呂)가 정동大使 [各州 5] 로 任命되었다. 엔랴쿠 12年(792年) 2月 17日에는 定動詞(征東使)를 鄭理事(征夷使)로 고쳤다. 「大使」(大使)는 또한 「將軍」으로도 불렸다. 《日本機略》에는 엔랴쿠 13年( 794年 ) 1月 1日에 程頥大將軍 오토모노 오토마로에게 절도(節刀)를 하사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程頥大將軍」이 처음 보이는 事例로 그 由來로써는 天皇으로부터 任命된 軍事指揮官이라는 뜻이었다. 엔랴쿠 10年( 790年 ) 「정동大使」로 任命된 오토모노 高馬로는 그 뒤 「定動詞」가 「鄭理事」로 바뀌고 엔랴쿠 13年(794年) 1月 1日에 「程頥大將軍」으로써 節度를 下賜받았다. 오토마로의 府使(部長群)이었던 人物이 바로 사카老우에노 다무라마로 로, 그는 엔랴쿠 15年( 796年 ) 10月 27日 眞髓將軍(?守?軍)으로 任命되어 에미詩와의 戰爭을 指揮하였고, 이듬해 11月 5日에 程頥大將軍으로 昇格되었다. 다무라馬로는 그때까지 에미詩들을 이끌고 調整에 맞서 頑强하게 抵抗하던 理事와(??)의 아테루이 를 降伏시키고 首都로 데려왔고, 도호쿠 地方 全域을 平定하였다. 그 뒤 미치老쿠의 按察使가 된 勳야노 와타마로(文室綿麻呂)가 에미市와 交戰한 고닌(弘仁) 2年( 811年 ) 4月 17日 정이將軍 [各州 6] 에 任命되고 같은 해 尹12月 11日 에미視 淨土를 終了하였음을 朝廷에 告하였으며, 진수장郡에는 不將軍이었던 某呶呶베盧 다리쓰구(物部足?)가 昇格되었다. 그러나 고닌 5年( 814年 ) 11月 17日 다시금 勳야노 와타마로가 정이將軍으로 任命되는데, 實際 征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最初의 程頥大將軍 [ 編輯 ]

도고쿠의 獨立政權 [ 編輯 ]

가마쿠라 幕府 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의 肖像으로 傳하는 眞告知 3上의 하나.

最初 程頥大將軍(쇼군)으로 알려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一族(가와치 겐지)은 軍士가 家業이며, 調整을 섬기는 軍事貴族이었다. 그러나 이즈 에서 流配 生活을 하던 途中 도고쿠 武士團을 이끌고 半(反)헤이케 旗幟를 들었던 요리토모의 애初 處地는 朝廷으로부터 公認을 받지 못한 狀況이었다. 요리토모는 于先 朝廷으로부터 相對的으로 獨立한 「도고쿠 政權」을 쌓았고, 교토 朝廷에서 年號를 요와 로 바꾼 뒤에도 요리토모는 以前에 써오던 지쇼 年號를 그대로 使用하였다. [3] 그 뒤 調停과 關係를 包含해 旣存 헤이케 政權 ? 미나모토盧 요시나카 ? 오슈 후지와라 氏 (?州藤原氏) 地方政權 세 패턴의 比較檢討를 통해 自身만의 政權을 構想했다고 評價받고 있다.

  • 헤이케 政權은 旣存의 貴族의 價格(家格) 秩序를 따라 官位가 올랐고 天皇의 外戚으로써 朝廷의 權力을 掌握하는 길을 擇했으나, 헤이케의 繁榮을 誇示할 뿐 地方의 實效 支配者나 武士의 代表로서는 제 機能을 하지 못했다. 이것에 對해 도고쿠의 일정한 獨立性은 維持하면서도 朝廷에 무가 權力으로서의 自主的 統治權을 인정받기 위해서 交涉을 거듭했다.
  • 헤이케를 내쫓고 교토를 制壓한 미나모토盧 요시나카는 200年도 前에 存在했던 貞洞大將軍에 任官했다. 貞洞大將軍 冠名은 東邦을 征伐하는 職務를 가리키는 것으로, 도고쿠의 요리토모에 對抗하려는 요시나카의 意圖를 엿볼 수 있다. 요시나카를 制壓한 요리토모 亦是 이에 匹敵하는 稱號를 바라게 된다.
  • 當時 日本 도호쿠 地方은 調整의 支配가 미치지 않는 오슈 후지와라 氏의 獨立的인 地方政權이었다 [4] 오슈 후지와라 氏는 鎭守府將軍의 地位를 얻어 무쓰 國, 데와 國에서의 軍政이라는 形態의 地方統治權을 認定받아 100年 동안 그 땅을 支配하였다. [5] 變更 常備軍(程頥大將軍의 境遇는 臨時遠征軍)의 現地司令官이라는 性格을 가졌기 때문에 修道에 滯在할 必要가 없어, 地方 政權의 守令을 맡기에 적합한 地位였다. 요리토모 自身도 가마쿠라에 繼續 머물며 교토의 朝廷으로부터 公認을 받으면서도 일정한 獨立性을 維持하려고 했다.

近衛隊場에서 程頥大將軍으로 [ 編輯 ]

겐큐 (建久) 元年( 1190年 ), 요리토모는 朝廷으로부터 牛筋위大將(右近衛大?, 禹콘노에노다이쇼)으로 任官되었으나, 近衛隊腸은 中央 근위군 司令官이라는 性格上 首都에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되었고, 半年도 못 되어 요리토모는 禹大將職을 辭任하였다. 優待腸은 벼슬이 높기는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받았던 정동대將軍처럼 無事를 統率하고 地方 爭亂을 鎭壓하는 地位는 아니었고, 오슈 후지와라 氏 堂主들이 받았던 鎭守府將軍처럼 도고쿠에 獨立 勢力圈을 갖출 만한 位相도 아니었다.

거기서 요리토모가 注目한 것이 程頥大將軍이라는 官職이었다. 半島(阪東) 武士들을 이끌고 있는 에미視(오슈 후지와라 氏) 征服이라는 大義名分을 보더라도, 鎭守府將軍과 마찬가지로 軍政(脂肪統治權)을 펼 名分이기도 하거니와, 高실로 따져보아도 鎭守府將軍보다 더 높은 職責이었다. 다시 말해

  • 도고쿠 武士들의 塗料(棟梁)인 가마쿠라逃奴(鎌倉殿)라는 私的인 地位
  • 守護 (守護, 追捕使追捕使) ? 지두 (地頭)를 全國에 配置하고 軍事 ? 警察權을 掌握하는 일본국銃追捕使(日本??追捕使) ? 일본국塚地두(日本??地頭) 라는 公的 地位
  • 優待張으로써 認知되는 家庭(家政) 機關을 萬도코로(政所) 等의 公的인 政治機關에 準하는 待遇를 받을 權限

等을 모두 網羅할 수 있는 公的으로 證明된 一體的 地位가 바로 程頥大將軍職이었다.

程頥大將軍의 意義 [ 編輯 ]

그러나 요리토모에게 程頥大將軍職은 오슈 후지와라 氏 征服을 위해 必要했던 벼슬이었으며, 오슈 戰鬪를 거쳐 實際로 任官한 겐큐 3年(1192年)에는 이미 쓸모없게 되었다는 視角도 있다. 實際로 요리토모는 程頥大將軍職을 그다지 固執하지 않았고 2年 後 辭任할 뜻을 밝혔다. [6] [各州 7]

또한 요리토모의 嫡男 料理理에는 家督을 이어받는 過程에서 于先 左近衛中將(左近衛中?), 左衛文督(左衛門督) 順으로 任官하였고, 정이大將軍에 任官한 것은 그 3年 後였다. 料理理에가 失脚한 히키 요시카즈의 便(比企能員の?) 때에는 銃秋無事(?追撫使) ? 總지두(?地頭) 地位 承繼가 問題가 된 反面, 程頥大將軍職은 對象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段階의 程頥大將軍은 武家의 塗料人 가마쿠라逃奴나 日本의 軍事的 支配者인 銃秋無事 · 塚地斗의 地位와 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다지 重視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요리토모는 朝廷의 常設最高職이었던 左大臣(左大臣)에 該當하는 情2位로 程頥大將軍職에 就任했고, 同時에 一部 調整과의 二重政權 狀態를 維持하면서 全國에 無價紙배정권을 形成했기 때문에, 以後 그 神格化와 함께 '天下인(天下人)'으로서의 程頥大將軍의 稱號가 徐徐히 浸透해 간다. 또한 後代에도 執權 (執權), 官令 (管領), 대로 (大老) 等 幕府 次席職의 官位는 種4位였고 將軍만이 至極히 높은 權威를 지니고 모든 武士들 위에 君臨한다(비록 實權이 繼續 維持되지 않았다 하더라도)는 慣習도 이 時期에 確立되어 있다.

近年에 밝혀진 새로운 事實 [ 編輯 ]

이 通說을 뒤집는 새로운 史料로써 《三槐荒凉發서요》(三槐荒??書要) [7] 에 실린 《山塊機》(山槐記) 겐큐 3年(1192年) 7月 9日條 및 12日組에 요리토모의 程頥大將軍 任官 經緯를 記述한 게 있다. 여기에 따르면 요리토모가 바란 게 「前任 우부(右大臣)」(前右府)라는 呼稱 代身 「大將軍」이며, 이를 受諾한 調整이 「摠管」(?官), 「貞洞大將軍」, 「程頥大將軍」, 「上將軍」 네 가지 候補를 提案했고, 檢討한 結果 예전 헤이케의 마지막 塗料였던 다이라노 무네謀利 (平宗盛)가 任官했던 「摠管」이나 요시나카가 任官했던 「貞洞大將軍」은 凶한 前例라 하여 排除하고, 「上將軍」도 日本에서는 그 先例가 없으니 排除, 사카老우에노 다무라마로가 任官했던 「程頥大將軍」李 吉한 前例라 하여 요리토모를 「程頥大將軍」으로 任官하게 했다는 것이다. 卽 요리토모에게서 重要한 게 「情이」(征夷)가 아니라 「大將軍」(大將軍)으로 調整이 消去法에 따라 「程頥大將軍」을 選擇한 게 分明하다. 때문에 요리토모가 「程頥大將軍」을 바랐다는 前提에서 「情이」에 重點을 두고서 解釋한 그동안 硏究는 再考해야 한다는 主張이 提起되었다(동시에 요시나카가 任官한 것도 아즈마카가미 等에 傳하는 「程頥大將軍」이 아니라 교쿠요玉葉에 나오는 「貞洞大將軍」이었다는 게 分明하다) [8]

요리토모가 '大將軍'을 願한 理由로는 10世紀 - 11世紀 鎭守府 將軍을 祖上에 두고 있는 사다모리類 헤이시(貞盛流平氏) ? 요시後尾類 헤이시(良文流平氏) ? 히데사토類 후지와라 氏(秀?流藤原氏) ? 料理要時流 겐지(?義流源氏) 等이 鎭守府「將軍」의 後裔라는 點을 그들의 正體性으로 삼고 있었기에 사다모리類 헤이시 一問(헤이케 包含) ? 히데사토類 오슈 후지와라 氏 ? 요리토모 自身과 같은 料理要時流 겐지의 미나모토盧 요시나카 ? 미나모토盧 유키이에(源行家) ? 미나모토盧 요시쓰네 等 鎭守府「將軍」의 後孫들의 霸權 다툼을 制壓해 唯一한 無紋(武門)의 塗料가 되어 오슈 戰鬪 (?州合?)에 있어서도 意識的으로 鎭守府「將軍」 미나모토노 料理요시의 後繼者라는 點을 誇示했던 요리토모가 自身의 地位를 象徵하는 것으로써 武士 社會에 있어서 鎭守府「將軍」을 뛰어넘는 權威로써 「大將軍」의 稱號를 바랬다는 說도 提起되었다. 또한 將軍職이 巫歌에 있어서는 戰鬪를 指揮統制하는 地位로 重視되어 이러한 點들을 아우르는 「大將軍」李 無紋의 塗料로써 指揮統制하기에 重要했다는 說이 있다.

또한 요리토모가 程頥大將軍을 願했지만 高시라카와 法皇 에게 거절당했다고 여겨지는 點에 對해서는 《아즈마카가미》 겐큐 3年( 1192年 ) 7月 26一助의 '?軍事、本自雖被懸御意、于今不令達之給、而法皇崩御之後、朝政初度、殊有沙汰被任之間' 等의 技術을 根據로 오랫동안 信賴되어 왔으나, 近來 들어 《아즈마카가미》 駐에이 3年(1184年) 4月 10日 記事와 內容이 矛盾되는 點이 있음이 指摘되고 있다. 이 記事는 요리토모가 3月 27日 遲暮쿠(除目)에 따라 鄭4爲하 棺위에 올랐음을 미나모토盧 요시쓰네의 獅子가 알린 것으로 같은 條項에는 智謀쿠의 警衛가 적혀 있다. 그것에 따르면, 요시나카 討伐의 專攻으로서 후지와라노 다다浮靡(藤原忠文)의 先例를 따라 정이장君의 地位를 주는 것을 高시라카와人이 檢討했지만, 論議에 따라 官位만 받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構造 가네자네 의 日記인 《교쿠요》(玉葉) 駐에이 3年( 1184年 ) 2月 20日 및 3月 28日組에는 요리토모로부터의 아뢴 바에 따라 高시라카와人이 요리토모에게 주려던 모든 官職을 辭任하고 西魏만 받았다고 되어 있다. 이 事態를 說明하기 위해서는 高시라카와가 이미 끝난 戰鬪의 專攻으로 정이將軍(=程頥大將軍)을 주려 했으나 요리토모가 辭退한 것이라고 解釋할 수밖에 없고, 헤이안 時代 初期 에미視 淨土가 끝나고 오랜 時間이 흘렀던 當時에 있어서도 高시라카와人이나 요리토모 모두 정이장君을 名譽官職으로 看做하여 '武家의 棟梁'이라던가 '동국의 支配者' 程度의 要職으로 認識하지는 않았을 可能性이 있다.

나아가 駐에이 以後 요리토모의 程頥大將軍 補任까지의 사이에 정이將軍 ? 程頥大將軍의 地位나 職權에 對해서 論議된 痕跡이 교토나 가마쿠라 兩側 모두의 같은 時代 史料에서 確認되지 않는데, 가마쿠라逃奴가 지닌 權限이란 特定 官職에 依한 것이 아니라 週에이 2年 10月 선지(?永二年十月宣旨)나 盆地 勅許(文治の勅許) 等 가마쿠라逃奴가 朝廷으로부터 承認받은 도고쿠 支配權이나 帝國 守護權(諸?守護?) 等 各種 軍事的 ? 警察敵 權限에 依한 것이었고 요리토모 ? 料理理에 ? 사네토모 3代의 程頥大將軍 自體는 職分 ? 實權 없는 公明(空名)의 官職보임 以上의 것은 아니었다고 보인다. 이 說에 따르면 《아즈마카가미》에 3代의 程頥大將軍 보임 記事는 程頥大將軍의 權威가 確立된 뒤에 脚色된 記事로 實際로 정이大箏群 보임이 政治的 意味를 지니는 것이 된 것은 가와치 겐지 적류가 斷絶되고 무가 겐지 아닌 가마쿠라逃奴( 섭街將軍 ?家?軍)을 맞이하게 된 때에 이르러서였다. 섭假裝君을 擁立한 執權 好調 氏 等 가마쿠라 幕府側은 가마쿠라逃奴의 後繼者의 地位 및 요리토모 以來 認定되었던 여러 가지 權限들을 요리토모 以來의 3臺가 共通的으로 補任되어온 共鳴의 官職이던 程頥大將軍의 職權으로써 連結시키는 가운데 새로운 가마쿠라度老人 섭街將軍이나 宮將軍 (宮?軍)들에게도 이를 繼承해 줄 것을 要求했고, 兆큐의 난 以後 親幕剖破에 依해 掌握된 調整도 이를 認定함으로써 程頥大將軍이 「武家의 塗料」, 「도고쿠의 支配者」의 官職으로 轉換되었다고 하는 見解를 따르고 있다. [9]

섭街將軍과 宮將軍 [ 編輯 ]

가마쿠라 時代 以後 幕府의 政治力은 漸次 높아져 갔다. 그러나, 요리토모의 親子로서 將軍에 就任하고 가마쿠라逃奴가 된 미나모토노 料理理에 · 미나모토盧 사네토모는 權臣 好調氏에 對抗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 사네토모의 죽음으로 요리토모의 直系 血統이 끊기자, 當初 好調氏는 皇族 가운데 한 名을 보내 將軍으로 就任하게 해 줄 것을 朝廷에 要求했지만 最終的으로 거절당했다. 이 때문에 요리토모의 親戚에 該當하는 攝官가 에서 두 살 된 미토라 (三寅)를 가마쿠라逃奴로 맞이하고 요리토모의 美다이도코로인 好調 마사코가 後見이 맡았다. 情實이 된 것은 媤宅의 딸이며, 사네토모의 正室인 步몬 노부코(坊門信子)의 養女 다케노 고쇼(竹御所)였다.

미토라는 6年 뒤에 元服(元服)을 行하고 후지와라노 料理쓰네(藤原??)라 하였으며, 程頥大將軍으로 就任하였으나 實權은 微弱했고 幕府의 꼭두각시에 不過하였다. 그러나 好調 야스토키 (北?泰時) 死後의 混亂 속에서 半(反)도쿠소케(得宗家) 고케닌들을 糾合해 長男 好調 쓰네토키(北??時)의 執權 就任에 反對하는 等의 運動을 보이기도 했다. 그 直後 아들 후지와라노 料理쓰구(藤原?嗣)가 6歲로 元服을 行하고 將軍職을 넘겨받았는데, 이는 그 影響으로 보인다. 그러나 料理쓰네는 그 뒤에도 隱然中에 自身의 勢力을 維持하였고, 나고에 미쓰토키(名越光時) 等 半島쿠소 勢力과도 提携하며 好調 도키料理 (北?時?)와 對立하다(미야 騷動) 그 直後 교토로 送還되었다. 要리쓰構圖 僧侶 料쿄(了行) 等의 母斑 事件에 連累되어 廢位되었다.

그 뒤 皇族이 將軍으로 擁立되어 이를 「宮將軍」(미야쇼군)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好調 도쿠소케 前提라 稱하는 幕府에서 도쿠소케 卽 好調 本宗家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6大 將軍인 무네打카 親王 은 情實의 密通事件이 發生하고 母斑 嫌疑를 사서 교토로 쫓겨났다. 7代 將軍이 된 고레야스 親王 은 《마스카加味》(?鏡)에서는 「將軍宮(?軍宮)에 떠밀려」라고 表現될 程度로 거의 罪人 取扱을 받으며 교토로 쫓겨 났다. 히사아키 親王 은 確實하지 않은 理由로 33歲에 辭任하고 교토로 돌아왔고, 모리쿠니 親王 은 가마쿠라 幕府 滅亡(1333年)과 함께 出嫁하였다.

겐무 新正과 무로마치 將軍 [ 編輯 ]

죠도지에 所藏되어 있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影幀.

겐무 新訂으로 天皇과 宮家(公家)의 親庭과 國亞軍制 復活을 目標로 하던 朝廷의 獨裁政治로 銀賞(恩賞)이나 領地를 놓고 巫歌와의 對立이 頻發하였다. 아시카가 다카우지 의 擧兵으로 겐무 政權은 瓦解되고, 다카우지는 북조(北朝)를 받들어 自身이 程頥大將軍으로 就任하고 교토에 무로마치 幕府(室町幕府)를 열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幕府는 有力 守護人 호소카와 氏(細川氏) ? 시바 氏(斯波氏) ? 하타케야마 氏(?山氏) 等과의 聯合政權이었고, 公務政權(公武政?)의 特色이 늘어났다. 3代 將軍 요시미쓰(義?)는 空家와 무가 두 權力의 頂點에 섰다. 그 뒤 程頥大將軍은 武家의 最高權威가 되었다(반면 교토의 朝廷은 日本 歷史上 最低였다고 할 程度로 統治權을 잃었다). 다만 實質的인 權力은 前 將軍인 무로마치逃奴(室町殿)나 오고쇼(大御所)가 쥐고 있는 境遇가 있어서 반드시 程頥大將軍이 掌握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將軍職은 요시미쓰의 敵南人 요시모치(義持)에게 讓位된 뒤에도 權力은 인세이 時期 治天의 君(治天の位)과 같은 地位에 該當하던 '前任 將軍' 요시미쓰에게로 集中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에이(?永) 15年( 1408年 ) 5月에 요시미쓰가 急逝한 뒤에 將軍의 權限이 急速히 回復되어 호소카와 間레이 (細川管領)와 시바 요시마사(斯波義?) 等 熟路(宿老)와 連繫한 가운데 將軍 權力과 幕府 機能이 復活해 요시미쓰의 정청(政?)으로 쓰이던 其他야마 邸宅(北山第)도 金閣(金閣)만을 남기고 헐렸다. 그 뒤 天皇과 調整은 센고쿠 다이묘(??大名)들의 貴族化, 獵官(?官) 接近을 통한 將軍 權威의 再建도 있기는 했지만, 事實上 統治權이 없고 名目上으로만 存在하며 幕府가 日本 全 國土를 實質的으로 統治하는 政府 노릇을 하였다.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 代에는 頻繁하게 守護다이묘(守護大名) 집안의 相續에 介入하며 獨裁的인 權力을 行使하였으나, 요시노리가 暗殺되고 守護다이묘들이 主導해 叛亂을 鎭壓하면서 다시 幕府 將軍의 權力은 失墜되었다. 아시카가 요시마사 의 代에는 守護다이묘 間의 武力抗爭에서 아무 影響力을 行使하지 못했고( 오닌의 난 ) 요시마사의 아들 요시히사 가 實權 回復을 노리고 롯카쿠 氏(六角氏) 討伐軍을 몸소 指揮하기도 했지만, 中途에 病死하는 바람에 完遂하지는 못했다.

南北朝 時代에는 南朝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北??家)가 鎭守府將軍을 鎭守府大將軍으로 부르는 것이 許容되었는데, 이는 세이카게(?華家)의 價格을 지닌 기타바타케 家門에 있어 鎭守府將軍이 明確하게 非職(卑職)이었다는 것을 아키이에가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센고쿠 時代의 將軍 [ 編輯 ]

將軍 아시카가 요시키 는 요시히사가 完遂하지 못했던 롯카쿠 親政을 成功시켰으나, 이로 因해서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와 對立하게 되었고, 하타케야마 征伐로써 가와치(河?)로 出兵했을 때 쿠데타가 일어나 將軍職을 잃었다( 메이오의 政變 ). 幕府는 호소카와 氏 支配 體制가 確立되고 또한 幕府와 將軍의 全國 統治의 權力은 消滅해 무로마치 幕府는 基나이 (畿?)에만 支配權이 그치는 地方政權으로 轉落하였다. 巫家에 對해 將軍의 權威는 어느 程度 男兒는 있었으나 센고쿠 다이묘가 成立하고 將軍은 有力 다이묘들의 動向에 거스르기 어려웠고, 그들을 敵對視했다가 다이에이(大永) 元年( 1521年 ) 無慮부터 쫓겨나 逃亡다니며 교토에 상주하지 못하고 「떠돌이 將軍」(流れ公方)이라는 비웃음을 샀다. 將軍의 守護補任圈은 斷續的인 것이 되어 天皇의 高쿠시 任命이 復活하고 將軍은 官位의 調整 취차 權限을 行使하지 못하게 되어 將軍의 權力은 縮小되었다. 덴分 (天文) 22年( 1553年 ) 미요시 政權(三好政?)을 성립시킨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에게 13代 將軍 요시테루 (義輝)는 反撥하다 誤美國 (近江?)으로 쫓겨나 5年 뒤에야 돌아왔고, 에이로쿠 (永?) 8年( 1565年 ) 陰曆 5月의 에이로쿠의 便으로 니조고쇼가 急襲당하고 殺害되는 等 將軍이라고 해서 넘볼 수 없는 存在였던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요시테루의 동생인 요시아키 (義昭)는 오다 노부나가 의 協力을 얻어 미요시 政權이 擁立했던 14代 將軍 요시히데 (義?)가 急逝한 가운데 교토로 돌아와 15代 將軍이 되었다. 그는 무로마치 幕府 再建을 위해 基나이 支配를 부활시켰으나, 무로마치 幕府 創設 以來의 傳統이던 다케다 신겐 等 다른 有力 다이묘들과의 複數提携를 目標로 했고, 이에 노부나가와 對立하게 되어, 結局 逮捕되고 교토에서 쫓겨났다. 幕府의 官僚였던 鳳空中(奉公衆)의 二世 氏(伊勢氏) 等 大部分이 아케치 미쓰히데 에게 吸收되어, 事實上 무로마치 幕府는 滅亡하였다. 그러나 아시카가 氏의 가직(家職)으로 變해 있던 將軍을 調整은 積極的으로 解官하려 하지 않았고 그 뒤 쇼쿠호 政權 (織豊政?)은 程頥大將軍 ? 幕府 體制와는 다른 政權을 樹立하게 되었기에,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도요토미 政權 初期 辭任할 때까지 將軍職을 그대로 維持하였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賤한 身分으로 인해 程頥大將軍 職位에는 絶對로 오를 수 없었기에 이에 對해 火가 난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程頥大將軍에서 물러나자마자 程頥大將軍 職을 廢止해버렸으며 本人을 태合이라 僭稱하면서 程頥大將軍 代理者라 稱했다.

에도 時代의 將軍 [ 編輯 ]

에도 幕府의 初代 將軍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게이初 (慶長) 5年( 1600年 ) 세키가하라 戰鬪 에서 勝利하고 도요토미 政權 內部의 對抗 勢力을 一掃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도요토미 氏에 從屬되지 않은 獨自的인 共의(公儀)로써의 名目 確立을 爲해, 게이쵸 8年( 1603年 )에 정이大將軍에 就任하였다. 더욱이 2年 後에는 敵南人 도쿠가와 히데타다 에게 將軍職을 물려주고, 過去의 아시카가 氏처럼 將軍職을 가직으로 삼아 덴노 家門의 代理임을 나타냈다. 이 도쿠가와 政權은 後에 에도 幕府(江戶幕府) 로 불리게 된다.

?大臣源朝臣

左中辨藤原朝臣光廣傳宣 權大納言藤原朝臣兼勝宣 奉 勅件人宜爲征夷大將軍者

慶長八年二月十二日 中務大輔兼右大史算博士小槻宿?孝亮奉

(解析)

內大臣(?大臣) 미나모토盧 아손(源朝臣, 도쿠가와 이에야스, 62歲 때)

座中便(左中弁) 후지와라노 아손(藤原朝臣) (街라스마루烏丸) 미쓰히로(光?)가 선지를 傳하고, 곤노다이羅곤(?大納言) 후지와라노 아손 (히로하시?橋) 街네카쓰(兼勝)가 宣布한다. 삼가 칙을 받들고 이 사람을 마땅히 程頥大將軍으로 삼노라.

게이初 8年 2月 12日에 中舞大寶(中務大輔) 兼 禹大使(右大史) 山博士(算博士) 오즈키노스쿠네(小槻宿?) 다카스케(孝亮)가 받들어 傳하노라.

? ?川家康征夷大?軍の?令(官宣旨)、日光東照宮文書

過去의 가마쿠라 幕府나 무로마치 幕府와 달리, 에도 幕府에서는 幕角(幕閣)의 權臣이 도쿠가와 將軍가를 凌駕하는 事態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9世紀 中盤에 個國 問題를 契機로 朝廷의 權威와 幕角 밖의 西南 雄番(西南雄藩)의 政治力이 높아지면서 將軍의 公醫로서의 힘이 失墜되고, 公務合體나 대정委任론(大政委任論)으로 公醫의 再議政을 試圖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게이오 (慶?) 3年( 1867年 ) 도쿠가와 요시노부 (?川慶喜)는 程頥大將軍을 辭任하고 「대정」(大政)을 調整에 返納하는 것( 臺정봉환 )으로 도쿠가와 가 堂主가 程頥大將軍이 아닌 「마님」(上?)으로써 공의정체(公議政?)의 指導者가 되는 것을 노렸으나, 그 直後의 王政復古로 옛 將軍가를 排除하는 새로운 政權이 發足, 또한 程頥大將軍職을 包含한 從來의 官職도 廢止되었다.

歷代 幕府의 程頥大將軍 [ 編輯 ]

가마쿠라 幕府 [ 編輯 ]

무로마치 幕府 [ 編輯 ]

에도 幕府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內容主 [ 編輯 ]

  1. 同時에 사에키노 이와유(佐伯石湯)가 正月후하李將軍(征越後蝦夷?軍)로 任命되었다.
  2. 要路 4年 9月 28日에 육오按察使(陸?按察使) 街미쓰케노 히로히토(上毛野?人)가 殺害된 다음날 多지히노 阿伽陀모리가 지절정이將軍으로 任命되었다.
  3. 기노 高沙彌의 境遇는 엔랴쿠 7年 6月에 任命되었는데 《속일본기》에는 「정동大使」(征東大使), 《日本機略》(日本紀略)에서는 「정동將軍」(征東?軍)으로 되어 있다.
  4. 將軍의 名稱은 記錄上 統一되어 있지는 않다. 例를 들어 후지와라노 牛馬카이(藤原宇合)의 境遇 任命될 때는 「지절將軍」(持節?軍)이었는데 首都로 돌아올 때는 「정이지節大使」(征夷持節大使)로 되어 있다.
  5. 「정동大使」로써 따로 후지와라노 쓰구나와(藤原??)나 후지와라노 고쿠로마로(藤原小?麻呂) 等이 任命된 事例도 存在한다.
  6. 다른 貞洞 ? 情이 將軍은 代代로 天皇보다 節度를 받고 全權을 委任받았으나, 와타마로의 境遇는 節度를 下賜받지 않았다.
  7. 겐큐 3(1192)年의 程頥大將軍 就任으로 하문(下文)이 「將軍家庭小下問」(?軍家政所下文)으로 바뀌었는데, 겐큐 5年 10月 以後에 다시금 文書의 形式이 「前任 禹大將 家庭소 下問」(前右大?家政所下文)으로 돌아온다. 이를 요리토모가 程頥大將軍職을 辭任할 意思를 表示하기 위해서였다는 說도 있는데, 다카하시 도미오(高橋富雄)는 「前任 禹大將」 쪽이 權威가 더 높기 때문에 되돌린 것이고 辭任할 생각이었다면 該當 人物이 最終的으로 지녔던 官職에 따라 尊重받는데도 前任 將軍을 使用하지 않았다며 辭任 意思가 있었다는 說을 否定하였다(高橋富雄 1987, pp. 65-66.). 한便 요리토모의 禹大將 辭任이 受理되었는지 아닌지에 對해 이시이 료스케는 《遜避빈먀쿠》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겐큐 3年(1192年) 7月 將軍으로 就任했다는 技術의 뒤로 겐큐 5年 10月 10日組에 '?將軍'으로 되어 있어서 요리토모가 實際로 將軍職을 辭任했었다는 설을 提起하였다.

出處週 [ 編輯 ]

  1. 《後漢書》 風以前에 依하면 風이(馮異)라는 將軍은 戰場에서의 功이 있음에도 다른 장수들이 저마다 自己 功을 자랑할 때 홀로 큰 나무(大樹) 아래로 가서 自己 功績을 자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考査로부터 臺數(大樹) 或은 大樹將軍이 將軍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이 말이 日本으로 건너와서는 程頥大將軍의 異稱이 되었다.
  2. 外家일 境遇 外三寸의 養子로 入養하는 形式을 使用해서 程頥大將軍 就任이 可能했다. 當代 日本에는 外三寸의 養子로 들어가는 境遇가 慇懃히 흔했는데 一例로 우에스기 가게카쓰 는 實際로는 外三寸인 우에스기 겐新 의 養子로 入養되었다.
  3. 쓰나노 요시히코(綱野善彦) 1997, pp. 34-35.
  4. 쓰나노 요시히코(綱野善彦) 1997, pp. 19-31.
  5. 다카하시 도미오(高橋富雄) 1987, pp. 56-57.
  6. 이시이 요스케(石井良助) 『다이카 改新과 가마쿠라 幕府의 成立』(大化改新と鎌倉幕府の成立) 掃墳샤(創文社) 1958年 p.87-91
  7. 나카야마 다다치카(中山忠親, 1131~1195)의 日記 《山塊機》(山槐記), 후지와라노 스케스에(藤原資季)의 日記 《荒凉機》(荒?記)에서 官職 任命 ? 여러 年中行事 ? 그밖의 여러 가지 일들에 對해 拔萃한 것. 《山塊機》 拔萃 技士의 境遇 후지와라노 사다요시(藤原定能)의 記事가 많고 스케스에가 사다요시의 孫子임을 勘案할 때 편자는 사다요시나 스케스에의 子孫일 可能性이 있다.
  8. 사쿠라이(櫻井), 2004年.
  9. 其他무라(北村), 2005年、137-194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