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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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作 (子爵, Viscount, 女性型: 子爵夫人 (子爵夫人, Viscountess), 女子作 (女子爵))은 貴族 의 5階級 中 하나로 伯爵 (Count) 다음 가는 官職이다. 下位에는 男爵 (Baron)이 있다.

東洋 [ 編輯 ]

非公式的으로 儒敎 經典에서 다른 五等爵과 함께 古代 中國의 하나라 時代부터 存在하고 있었으며 商나라때에는 男爵위와 함께 廢止되다가 은주革命 以後 周나라가 霸權을 쥐면서 男爵위와 함께 復活했다하지만 人爲的으로 造作된 痕跡이 있어 實在로는 周나라 當時에 만들어진 것으로 推定되고 있다. 工作 (Duke), 侯爵 (Marques), 伯爵 (Count), 自作(Viscount), 男爵 (Baron)이 있다.

中國 [ 編輯 ]

春秋時代에서는 千乘之國을 呼稱하기에는 格이 낮은 作爲로 周나라 首都에서 떨어진 나라들의 大部分이 이 爵位를 받았다. 王에게 朝禮할 때 單獨으로 參與할 수는 없었으며 侯爵乃至는 伯爵들을 따라가 함께 朝禮하는 程度였다.

春秋時代에서 有名한 封建國 中에 子爵위를 가졌던 國歌는 楚나라와 陳(秦)나라가 있다. 楚나라는 超武王이 王號를 僭稱한 後에도 周나라의 歷史書에서는 初子(楚子)로 記錄되어 있으며, 陳(秦)나라는 本來 旺盛(王性)李 아니라 子爵위에 있었지만 진양共 時節에 周나라를 도와 뤄양을 회복시키고, 犬戎이 周나라로부터 빼앗은 基, 風 地方을 陷沒시키고 그 땅들을 下賜받음과 同時에 伯爵위에 오르게 되었다.

以後 진한 時代에 들어서 廢止되다가 다시 위진 南北朝 時代 當時인 西進에서 個國자란 名稱으로 다시 復活한 後 淸나라까지 이어져 왔으나 辛亥革命後 制定이 무너지면서 廢止된다.

日本 [ 編輯 ]

매이지 維新 以後 華族 階級이 成立하면서 華族 制度 中 公爵과 侯爵, 伯爵의 뒤를 잇는 第4等位 階級이다. 授與 基準은 其他 黨商家, 기타 다이묘, 分家한 공/後作家의 次男, 其他 國家에 勳功 있는 者이며 다른 作爲들과 마찬가지로 日本이 太平洋 戰爭에서 敗한 後 1947年 美 軍政에 위해 廢止된다.

韓國 [ 編輯 ]

高麗 時代 開國子란 名稱으로 封爵했으며 五等爵 中에 네番째 序列이다. 원의 屬國이 된 後인 忠烈王때 諸侯國이 쓸 수 없는 僭濫한 制度라는 名分으로 廢止되었다가 恭愍王때 다시 五等爵을 두지만 곧 사라졌다. 以後 朝鮮에서도 個國 初期 이러한 前例를 따라 開國功臣들에게 功臣들의 本館에 따라 封爵위를 授與하다가 太宗이 卽位한 後인 1401年 明과의 關係를 원활하기 爲해 封爵制는 다시 廢止된다. 以後 1898年 朝鮮이 大韓帝國으로 稱帝建元했으나 如前히 鳳軍制를 維持했고, 1910年 庚戌國恥 以後 日帝가 韓日竝呑條約에 功이 있다는 區 大韓帝國의 官吏들中 一部에게 子爵위를 授與했다. 이때 子爵위 授與者는 22名이었다.

西洋 [ 編輯 ]

카롤링거 王朝 時期의 유럽에서 ' 非勢코미테스'(vicecomites) 또는 '未時 코미티스'(missi comitis)는 伯爵의 代理人이나 副官으로서 伯爵의 委任을 받아 公式的인 權限을 行使했다. 이들은 伯爵이 不在中인 狀況에서 伯爵의 業務를 代身해왔다. 以後 伯爵 爵位가 漸次 世襲하는 것이 되자 副官들人 自作의 職位도 大勢의 흐름에 따라 漸次 世襲되어 갔다. 예컨대 나르본과 님스, 알비 等地의 自作들은 10世紀初에 自身들의 職位를 世襲制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自作들은 한동안 伯爵의 管理라는 것 말고 다른 地位가 없는 狀態였으며, 自身들을 單純히 非勢코미테스라고 呼稱하거나 自身들의 權力의 源泉이 되는 伯爵 作爲의 名稱을 가지고 自身들의 稱號를 規定했다. 어떤 境遇에는 領地 또한 자작령이 存在하지 않으며 個別 領地의 榮州로 君臨했던 일도 있었다.

프랑스 [ 編輯 ]

11世紀末에 이르러 地位를 土地所有權과 결부시키는 封建主義의 全般的인 趨勢에 따라 프랑스 自作들은 自身들이 所有한 가장 重要한 封土의 名稱을 가지고 自身들의 稱號를 定하게 되었다. 푸아티에 伯爵이 工作으로 있는 아키텐과 툴루즈에서 自作들은 種種 自身들의 封建 領主를 相對로 自己 主張을 내세울 수 있을 만큼 대단한 貴族들이었다. 反面에 일드프랑스와 샹파뉴, 부르고뉴 一部 地方 等地의 自作은 12世紀末에 이르러 自身의 특별한 行政的 機能을 '프레보'(prevots)에게 넘겨주고 보잘것없는 封臣(封臣)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노르망디에서는 如前히 自作이 公爵의 代理人으로서 司法的 機能을 다했다. 11世紀 中葉에 이르러 노르망디 地方의 大部分은 行政上 '자작령'(vicomtes)으로 區分되었다. 이때문에 노르만人들은 잉글랜드의 週[州] 長官을 '바이카운트'[viscounte] 또는 '바이스콤스'[vicecomes]라고 指稱하기 始作했다. 또한 잉글랜드의 헨리 1世는 그의 노르만 領地에 있는 자작령의 世襲的 所有者를 大部分 공작령의 管理로 交替했다.

英國 [ 編輯 ]

英國에서는 노르만 征服 以後 거의 400年이 지나도록 貴族階級 中에 自作의 職位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1436年에 불로뉴 伯爵이 된 보몬트 警 존이 1440年에 最初로 모든 男爵들보다 優位에 있는 잉글랜드 貴族階級의 爵位로서 보몬트 自作 爵位를 받았다. 以後 20世紀 後半까지 남아 있는 英國의 가장 오래된 自作 作慰勞는 1550年에 授與된 헤리퍼드 自作이 있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高어맨스턴 自作은 그보다 앞선 1478年에 授與되었다.

스페인 [ 編輯 ]

8世紀에 카롤루스 大帝 가 카탈루냐에 자작령을 創設한 以來 이 稱號는 아라곤과 카스티야로 擴大되었으며, 伯爵의 代理人이라는 機能은 줄어들고 貴族으로서의 序列은 높아졌다. 스페인의 펠리페 4世는 1631年에서 1664年의 法令에서 先自作(先子爵 vizcondados previos) 制度를 導入했다. 이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먼저 自作(vizconde)을 거치지 않으면 伯爵이나 侯爵이 될 수 없다. 이 資格을 따기 위해서는 伯爵의 아들을 除外하고 누구나 750두카트의 手數料를 支拂해야 했다. 또한 더 높은 爵位를 받게 되면 義務的으로 自作 稱號를 取消하게 되는데 이때도 750두카트의 手數料를 내야 했다. 1846年에 이 取消義務 條項이 廢止되면서 수많은 家門들이 取消된 爵位를 되살려달라고 請願하는 바람에 많은 混亂이 빚어졌다. 結局 1858年에는 더 높은 爵位를 받는 데 반드시 自酌을 거칠 必要가 없다는 布告令이 發表되었다.

獨逸 [ 編輯 ]

獨逸에는 自作은 성백이라고도 부르는 부르크그라프로 알려졌다. 이들은 一介性에 봉해진 貴族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