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葛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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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葛亮
諸葛亮
제갈량
諸葛亮
무향후
在位 223年 ~ 234年
前任 (新設)
後任 제갈첨
蜀漢 丞相
在任 221年 ~ 234年
前任 (新設)
後任 장완
皇帝 劉備 有線
蜀漢 綠尙瑞司
在任 223年 ~ 234年
前任 (新設)
後任 장완
蜀漢 익주
在任 223年 ~ 234年
이름
諸葛亮(諸亮)
別號 臥龍(臥龍)
公明(孔明)
爵號 무향후(武鄕侯)
봉호 무향후(武鄕侯)
무興旺(武興王)
시호 忠武(忠武)
身上情報
出生日 181年 , 鑛化 4年
出生地 西周 (徐州) 낭야國 (琅邪國) 양도현(陽都縣) (現在 山東省 任期視 기남현 )
居住地 西周 洋酒 형주 익주
死亡日 234年 10月 8日 , 建興 12年
死亡地 우장위안 (五丈原) 蜀漢 軍營
國籍 後漢 蜀漢
學歷 사마휘 , 房덕공 에게서 師事
父母 父親은 낭야군 地方官 諸葛규
兄弟姊妹 제갈근
누나 2名
동생 제갈균
配偶者 黃夫人
子女 膝下 2男 1女, 長男(量子) 諸葛校 次男(赤字) 제갈첨 長女(庶女) 諸葛과
親姻戚 孫子: 제갈상 , 제갈경
조카(種子): 諸葛角 , 諸葛校 , 제갈융
四寸: 第褐炭
丈人: 황승언

諸葛亮 ( 中國語 正體字 : 諸葛亮 , 병음 : Zh?g? Liang 住居輛 [ * ]
主音 富豪 : ????ˇ????, 181年 ~ 234年 10月 8日 )은 中國 三國時代 蜀漢 宰相 , 政治人이다. 公明 (孔明)이며 者를 包含해서 諸葛孔明 이라고도 한다. 西周 낭야國 양도현(陽都縣) 出生이다. 別號 臥龍 (臥龍) 또는 伏龍 (伏龍). 시호 忠武 (忠武). 作爲는 무향후 (武鄕侯). 後漢 末 群雄人 劉備 를 도와 蜀漢 을 建國하는 帝業을 이루었다. 형주 南部 4軍을 발板으로 劉備의 益천을 도왔다. 221年 劉備가 帝位에 오르자, 丞相에 就任하였고, 劉備 事後 有線 을 補佐하여 蜀漢의 政治를 主張하였다. 227年부터 持續的인 北伐(北伐)을 일으켜 8年 동안 5番에 걸쳐 위나라 의 翁·楊州 地域을 攻掠하였다. 234年 5次 北伐 中 五丈原 (五丈原) 陣中에서 54歲의 나이로 病死하였다. 中國 歷史上 智略과 忠義의 戰略家로 많은 이들의 推仰을 받았다. 그가 위나라 討伐을 始作하면서 유선에게 올린 出師表 는 現在까지 傳해 내려온다.

東進 時期 諸葛亮을 무興旺 (武興王)으로 推尊하였다. [1]

生涯 [ 編輯 ]

諸葛亮의 生涯는 크게 형주 時節, 입鏃과 劉備가 죽기 前, 그리고 有線臺에 이르러 男丁과 北伐을 할 時期로 나눌 수 있다.

出生 및 序奏大虐殺 [ 編輯 ]

親兄은 제갈근 (諸謹)이고, 누나 2名, 親同生은 제갈균 (諸葛均)이다. 어떤 記錄에는 諸葛亮의 親母는 제갈균이 태어나기 前인 諸葛亮이 2~3살 쯤에 世上을 떠났고 제갈균은 諸葛亮의 새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親兄弟라고는 하나 諸葛亮과 제갈균은 7살이라는 나이差異가 난다.15세가 되기 前에 父親과 母親이 돌아가셔서 한동안 叔父 제갈현 (諸葛玄)李 藝場에서 諸葛亮을 돌봤다. 제갈현이 죽은 後 曹操 序奏大虐殺 을 일으켰고 諸葛氏 家門은 이 때 避難을 가게 되었는데 兄인 제갈근 은 江東으로 내려간 뒤 孫權 의 家臣으로 들어가서 生計를 책임지기로 하고 諸葛亮이 家門의 堂主가 되어 一族들을 이끌고 兄週로 避難갔다. 이 일로 因해 諸葛亮은 孫權 에게는 매우 友好的인 性向이 된 反面 曹操 와는 不俱戴天이 되었다.

융중 時節 [ 編輯 ]

諸葛亮은 亂을 避해 형주 로 移住하였다. 그는 襄陽(襄陽) 隣近의 융중이란 마을에서 學問(學文)과 農事로 消日 했는데, 이 時期에 지었다는 讓步音(葬送曲의 一種)은 現在까지 傳해지고 있다. 當時 형주는 戰亂을 避해 온 名望 높은 文人들이 많았는데, 諸葛亮은 이들과 活潑히 交流하였다. 또 그는 襄陽 地域의 有名한 文人이였다. 그 結果 20代 中盤의 나이에 在野의 賢人(賢人)으로 相當한 名聲을 얻게 되었다.

劉備의 參謀로 出仕함 [ 編輯 ]

當時 劉備 는 여남에서 曹操 에게 敗한 後 遊標 (劉表)에게 依託하고 있었는데, 諸葛亮의 名聲을 듣고 융중으로 直接 찾아와 諸葛亮을 自身의 模寫로 두었다. 이 때 만들어진 故事가 有名한 三顧草廬 (三顧草廬: 草家집을 세 番 찾아가다.)이다. 事實 三顧草廬는 諸葛亮이 스스로 劉備에게 出仕했다는 舊株春秋나 偉略의 記錄과는 다르다. 反面 出師表와 情事 三國志의 記錄에서는 劉備가 세 番만에 諸葛亮을 만났다는 情況이 보이기 때문에, 現在에는 事實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

先制께서 神을 鄙陋하게 여기지 않으셔서 세 番이나 몸을 낮추어 草廬를 찾아주시고, 神에게 親히 形勢의 일을 물으시니 신은 感激하여 先制께 이 한 몸 바치리라고 決心하였습니다 - 出師表

以後 華北 一帶를 席卷한 曹操 가 형주를 攻擊해오자, 南쪽으로 退却하는 劉備 를 遂行하였다. 이 過程에서 劉備는 曹操軍의 追擊을 받아 當陽에서 敗走하는 等 危機에 몰리지만, 遊標의 長男 遺棄 의 救援으로 剛하 地域에 屯兵하여 한동안 小康 狀態를 이루었다. 以後 曹操가 東進瑕疵, 孫權 에게 使臣으로 가서 半 曹操 同盟을 성사시켰다. 結局 208年 11月 손·劉 聯合軍이 赤壁 에서 曹操軍을 擊破하기에 이른다. 演義에서는 諸葛亮이 曹操軍의 화살을 消盡시키거나, 祭祀를 지내 東南風을 부는 等의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加工이다. 情事에서는 諸葛亮이 赤壁大戰 當時 어떤 일을 했는지에 對한 記錄이 없다. 正史 三國志 《船主展》과 《山羊공재기》에는 劉備가 敗走하는 曹操軍을 南軍까지 追擊했다는 記錄이 있기 때문에 이 過程에서 參謀로 從軍하거나 兵站 等을 擔當한 듯 하다. 以後 劉備 가 荊南 4軍(장사, 桂陽, 武陵, 영릉)을 征伐할 때 軍事中郞將으로 任命되어 行政(行政)과 兵站(兵站)을 擔當하였다. 卽, 內定에서의 手腕은 劉備에게 認定받은 듯 보인다.

무후사(武侯祠)

입觸 및 蜀漢의 建國 [ 編輯 ]

형주 南部를 掌握한 劉備 는 以後 서촉(西蜀)을 차지할 計劃을 세운다. 211年 한녕의 長老 유장 을 攻擊하자, 劉備는 이를 救援한다는 名目으로 西天으로 出兵하였다. 結局 212年 劉備와 儒將과 戰爭이 勃發하자 형주 兵力을 이끌고 서촉으로 進擊한다. 演義에서는 旁通 (龐統)이 죽자 軍隊를 이끌고 參戰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實際로는 劉備와 방통이 附隨管을 攻擊하자 바로 서촉으로 進軍하였다.

214年 유장 (劉璋)李 降伏한 後 '軍事將軍(軍師將軍)'에 任命이 되는데, 以後 劉備 가 皇帝를 稱할 때까지 이 職位에 머물러 있었다. 軍事將軍이란 職位가 이름을 붙여 만든 잡好職(雜號職)에 屬하므로 이 時期에는 劉備 政權 內에서 諸葛亮의 位相이 높지 않았다는 評價도 있다. 하지만 正史 三國志 駕後戰에서 曹操 가 諸葛亮의 政治가 뛰어나다고 評價한 記錄이 있기 때문에, 그 權限이 相當했으리라 主張하는 이도 있다. 이 時期에 새로운 法律人 鏃과(蜀科)를 만들고 翌週의 國家的 構造調整에 參與하였다.

219年 劉備 曹操 間의 一生一大의 激戰人 韓中攻防戰이 勃發한다. 半年 間에 걸친 戰爭은 劉備의 勝利로 끝나는데, 演義의 記錄에서는 갖가지 計策을 펼쳐 曹操軍을 擊破한 核心 브레인으로 描寫되어 있지만, 實際 韓中攻防戰에서 劉備를 遂行한 參謀는 法廷 (法正), 皇權 (黃權)이었다. 이 時期 諸葛亮은 成道에 있었으며, 兵站과 普及을 擔當했다.

以後 劉備가 韓中王이 된 後에도 繼續 軍事將軍 職에 있었고, 221年 劉備가 皇帝에 오르자, 朝廷의 首長인 丞相(丞相)에 就任하였다. 222年 船主(先主: 劉備를 말함)는 孫權 의 攻擊으로 敗死한 關羽 의 復讐를 위해 동오를 攻擊하는데, 이 때도 成道에 머물며 內政과 兵站을 管掌하였다. 223年 伊陵大戰 에서 敗한 선주가 白帝城 에서 病死하자, 尙書令(尙書令) 利嚴 (李嚴)과 함께 託孤를 받아 後周(後主: 劉備의 長男 有線을 말함)를 補佐할 顧命大臣이 되었다.

男丁 [ 編輯 ]

船主 가 죽고 後周 가 卽位하자, 丞相(丞相), 綠尙瑞司(錄尙書史), 益注目(益州牧) 및 事例敎委(司?校尉)를 겸하며, 大權을 掌握하였다. 以後 12年 동안 蜀漢의 宰相으로서 實權을 行使하였다.

223年 當時 익주 南쪽의 豪族이었던 옹個 (雍?), 固定 (高定), 主砲 (朱褒) 等이 孫權 의 隱密한 支援을 받아 反旗를 들어 固定이 炒黃을 殺害하고, 옹個 亦是 태수 正怏을 죽이고 後任 태수 腸例를 잡아 五로 보냈으며 主砲는 派遣나온 從事 喪期를 殺害하여 亂을 일으켰다.

諸葛亮은 一旦 內部 事情을 안정시킨 以後 直接 남정에 나섰다. 鏃의 南中(月準, 件녕, 장가, 營倉)은 遺言 (劉焉)과 유장 富者가 익주를 掌握하던 期間부터 異民族과 土着 豪族들이 結託하여 勢力을 形成하고 있었으며, 韓中攻防戰 期間에도 叛亂이 일어나 利嚴 을 출전시켜 鎭壓한 前例가 있었다. 諸葛亮의 남정은 225年 봄부터 같은 해 겨울까지 繼續되었으며, 七縱七擒(七縱七擒: 일곱 番 사로잡고 일곱 番 놓아주다.)의 告祀를 남기며 成功的으로 叛亂이 鎭壓되었다. 七縱七擒의 告詞는 火兩國地와 韓進春秋, 資治通鑑에 記錄되어 있으나 現代의 사람들은 이 事件의 信憑性을 疑心한다.

三國志演義에서는 맹획 (孟獲)李 叛亂의 主謀者로 登場하지만, 맹획은 觸寒과 親和的인 人物이었다. 또한 祝融否認, 兀突骨 目錄大王 等도 演義에서 만들어낸 架空의 人物이다. 남정의 成果 中 하나는 구리鑛山의 開發이었다.

北伐 [ 編輯 ]

諸葛亮의 北伐 計劃들은 익주 北部의 中心地인 韓中에서 出發한다. 3世紀 當時 한중은 原始林에 둘러싸인 相對的으로 閑寂한 地域이었다. 그러나 한중은 漢江 流域의 肥沃한 平野가 北쪽의 秦嶺山脈과 南쪽의 大巴山脈으로 둘러싸인 軍事的 要衝地로서, 南쪽으로는 豐饒로운 쓰촨 盆地의 平野에 닿았고, 北쪽으로는 衛戍를 넘어 北西쪽의 西凉(오늘날의 甘肅省) 河西州랑 乾燥地帶로 통할 수 있었다.

秦嶺山脈은 長安과 韓中 사이의 莫强한 自然障壁으로 存在하는데, 山脈 自體가 여러 個의 平行한 山줄기가 겹쳐 있는 데다가 온갖 溪谷이 街지쳐서 迷路처럼 얽혀 있었다. 地震으로 인한 構造 破壞로 地形學的으로는 매우 어지럽고 複雜했다. 南쪽에서 北쪽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所謂 棧道라고 불리는 매우 적은 險峻한 길들 뿐이었다. 諸葛亮의 北伐에서 主要 戰鬪들과 據點 奪還戰은 이 殘徒들을 周圍로 벌어진다.


자오度(子午道): 韓中에서 出發해 長安에 到着한다. 北쪽 入口를 字谷, 南쪽 入口를 五穀이라 하여 통틀어 자오曲이라고 한다. 가장 東쪽에 있는 길이며, 字谷이 長安城 코앞에 있다. 그러나 길이가 660里로 긴데다 좁고 險峻하기까지 하여 잘 使用되지는 않았다. 黨落島(?駱道): 韓中에서 出發해 자오度를 따라가다가 落成에서 北쪽으로 갈라져 장성현으로 나온다. 길이는 420里. 落穀도라고도 한다. 길이와 位置가 모두 曖昧해서 諸葛亮의 北伐 때는 使用되지 않았고, 나중에 위가 鏃을 攻擊할 때 한番 使用된다(낙곡 大戰). 野曲도(斜谷道): 韓中에서 出發해 五丈原에 到着한다. 五丈原에서 衛戍를 건너면 迷眩이다. 길이는 470里. 初寒相爭 때 丈量이 불태운 棧道人 抛野도(褒斜道)와 같은 길이다. 基曲도(箕谷道): 韓中에서 出發, 夜曲도와 같은 方向으로 가다 中間에 東쪽으로 갈라진다. 基曲도 出口에서 衛戍를 건너면 진창이다. 紀元前 3世紀 秦나라 때 開發된 오래된 길으로, 진창古都(陳倉故道)라고도 한다. 初寒相爭 때 韓信이 長恨을 잡았던 "암도진창"의 진창도가 바로 이 길. 길이는 夜曲도와 얼추 비슷. 起算로(祁山路): 韓中에서 出發해 韓脩를 따라 西쪽으로 가서 秦嶺山脈의 西쪽 끝인 기산에 到着한다. 起算에서 北進하면 千水軍이 咫尺이고, 天壽에서 東쪽으로 向하면 진창이다. 길이 相對的으로 넓고 便하지만 길이도 가장 길다.}}

227年 諸葛亮은 船主 의 遺詔를 名分으로 胃(魏)나라에 對한 北伐軍을 일으켰다. 出陣하기에 앞서 올린 上奏文이 바로 有名한 出師表 이다. 이는 350字로 되어 있으며, 船主에 對한 忠誠과 後周 에 對한 當付가 담겨있다. 北伐은 227年부터 234年까지 8年間 다섯 番 이루어졌다. 諸葛亮은 北伐 期間 동안 戰爭이 없는 狀況에도 韓中에 상주했는데, 이 期間 蜀漢은 準戰時 體制로 運營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次 北伐 [ 編輯 ]

228年 봄 諸葛亮은 사곡(翁主 西部)과 技曲(長安의 西쪽)으로 同時에 進擊하였다. 이 때 絲穀의 本陣은 諸葛亮이 指揮하였고, 技曲에 派遣된 別動隊의 指揮官은 조운 이었다. 위의 命題 (明帝)는 조진 (曹眞)을 都督으로 삼아 防禦하게 하였고, 조진은 長安과 가까운 技曲에 全力을 집중시켰다. 諸葛亮이 사곡에 進出하자 翁主 一帶의 豪族들이 一齊히 呼應하였고 南岸, 天水, 安定 3軍을 占領하게 된다. 이 過程에서 諸葛亮의 後繼者로 評價되는 姜瑜 (姜維)가 歸順하였다.

이 때 위연 (魏淵)은 1萬의 病死로 秦嶺山脈을 넘어 長安(長安)을 急襲하는 "자오曲 計策"을 進言하였다. 當時 長安은 無能하다고 알려진 管仲(關仲)都督 下後無 (夏候楙)가 지키고 있었는데, 위연은 열흘 동안 迅速하게 行軍하여 者五穀을 지나 長安을 奇襲하면 하후巫歌 逃走할 것이고, 이를 通해 長安을 占領하면 위軍은 事例週 쪽으로 移動할 것이라고 豫想하였다. 卽, 戰線이 東쪽으로 移動하여 蜀漢이 옹양株를 掌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諸葛亮은 各種 危險負擔을 理由로 이를 拒否하였다. [3]

以後 命題 는 自身이 直接 觀衆으로 出兵하는 한便, 當時 魏나라 第一의 勇將으로 꼽히던 장합(張?)에게 5萬의 軍士로 諸葛亮의 本陣을 相對하게 하였다. 장합은 絲穀과 韓中을 잇는 家庭으로 進擊하여, 觸君의 補給路를 遮斷하고자 하였고, 諸葛亮은 마속 (馬謖)에게 防禦하게 하였다. 하지만 마속은 峽谷을 막아 防禦하라는 諸葛亮의 指示를 無視한 채 山위에 屯兵하였고, 腸合意 包圍戰術을 맞아 苦戰하였다. 왕평 (王平)과 高尙 (高翔)李 奮戰하였으나, 衆寡不敵으로 大敗하였다. 補給路가 끊긴 觸群 本隊는 韓中으로 退却하였고 技曲 戰線에서는 조운의 義軍 別動隊가 조진에게 밀려 韓中으로 退却하기에 이른다. 이로서 1次 北伐은 失敗한다. 以後 諸葛亮은 마속에게 敗戰의 責任을 물어 處刑했는데, 이 過程에서 泣斬馬謖 또는 揮淚참마속이라는 故事가 생겼다.

諸葛亮은 후주에게 票를 올려 北伐 失敗에 對한 謝罪의 意味로 스스로 右將軍(右將軍)으로 地位를 낮추었지만, 宰相의 權限은 維持하였다.

2次 北伐 [ 編輯 ]

같은 해 가을 諸葛亮은 진창으로 進擊하였다. 진창은 조진 의 部下 將帥인 謔笑 (?昭)가 不過 1千名의 兵力으로 守備하고 있었는데, 그는 20日에 걸친 觸君의 攻擊을 막아내는 底力을 보였다. 以後 조진이 洛陽에서 救援軍을 이끌고 出兵하고, 食糧까지 떨어지자 諸葛亮은 韓中으로 歸還하였다. 이 때 伏兵戰을 통해 兆進軍의 將帥인 王雙 (王雙)의 追擊軍을 擊破하였다.

3次 北伐 [ 編輯 ]

229年 諸葛亮은 陣式 (陳式)에게 無道와 音評을 奇襲하게 하였다. 無道와 音坪은 옹洋酒(擁凉州)와 鏃을 直接 잇는 메인 루트로 이곳을 占領하면 익주(益州)의 防禦가 容易해진다는 長點이 있었다. 위나라에서는 옹양主導毒 곽回 (郭淮)가 진식의 觸君을 맞아 싸웠는데, 諸葛亮의 本震이 件慰勞 進擊하자, 곽回 는 無道와 音評을 抛棄하고 退却했다. 하지만 겨울이 오자 兩側은 小康狀態에 進入하고, 諸葛亮은 韓中으로 歸還하여 機會를 엿보게 된다. 無道와 音評을 占領한 공으로 諸葛亮은 勝常直에 復職하였다.

以後 해가 바뀌어 230年이 되자 조진 은 軍勢를 3輅路 나누어 反擊을 試圖하였다. 조진의 本陣은 絲穀에서 韓中을 攻擊하고, 四魔의 (司馬懿)와 장합 의 2로군은 各各 商用과 無道를 攻擊하였다. 이에 諸葛亮은 성고에 本陣을 두고 防禦하였다. 以後 繼續된 여름 장마로 道路가 遺失되고, 普及이 어려워지자 位軍은 退却하였다. 그해 가을 諸葛亮은 위연 에게 江中으로 進出하게 하여 곽回 의 位君을 相對하게 했다. 위연은 養鷄(陽溪)에서 곽回軍을 大破하였다.

4次 北伐 [ 編輯 ]

231年 諸葛亮은 다시 起算으로 進擊하였다. 이때 위나라는 조진 이 病死하고, 四魔의 가 代促戰爭을 主管하는 眞書大都督으로 起用된다. 4次 北伐부터 諸葛亮은 木牛流馬 (木牛流馬)를 使用하여 普及의 輸送力을 높이고, 屯田(屯田)을 强化한다. 이는 매 北伐에서 問題가 된 軍糧 不足 問題를 解決하기 위한 努力이었다. 觸軍은 常規에서 가을 보리를 收穫하는 한便, 匪擾 , 곽回 의 位君을 擊破하였다. 以後 魯省에서 觸軍과 位君의 大規模 戰鬪가 벌어지는데, 司馬懿를 諸葛亮이 相對하고 장합을 王坪이 막았다. 이 戰鬪는 觸軍이 位君을 擊破하여 觸君의 勝利로 끝난 듯 하다. [4] 魯省 戰鬪 以後 司馬懿는 本營으로 退却하여 觸軍에 對한 戰略을 堅壁擧手(見?擧守: 壁을 바라보며 守備만 函)로 修正하고 守備로만 一貫하였다. 하지만 이 時期에 兵站을 擔當한 利嚴 (李嚴)의 怠業이 發生하였고, 觸軍은 다시 軍糧不足으로 退却하였다. 司馬懿는 參謀들의 反對를 무릅쓰고 장합 에게 燭君을 追擊하게 하는데, 장합은 木門度(木文道)에서 觸君의 埋伏界에 걸려 戰死하였다.

諸葛亮은 以後 調整에 復歸하여 表記將軍 利嚴 에 對한 眞相調査 後 이엄의 怠業이 밝혀지자 延命腸을 올려 彈劾, 利嚴은 그에 따라 免職되어 재동軍으로 移住하게 된다.

5次 北伐 [ 編輯 ]

234年 諸葛亮은 北伐을 再開하였다. 旣存의 北伐이 7 ~ 8萬 程度의 兵力으로 이루어진데 反해, 5次 北伐은 10餘 萬의 兵力이 投入된 最大 規模였다. 觸軍은 五丈原에 屯兵하여 位君과 對峙했는데, 諸葛亮이 양염을 시켜 무空輸를 건너자 司馬懿가 攻擊하였으나 諸葛亮이 무空輸를 건너오자 退却한다. 以後 諸葛亮은 두番의 欺瞞機動으로 위君의 虛를 찌르나 곽回만이 이를 看破하여 危急한 狀況에 이르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사이 觸軍은 위빈 一帶 五丈原 地域에서 食糧을 備蓄하고 該當地域 住民들과 親和力을 높여 가면서 周邊을 掌握하였다. 이 渦中에 위軍人 總帥인 四魔의 는 堅壁擧手 戰略을 固守하였으며 諸葛亮은 位軍이 戰鬪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 挑發했으나 [5] , 司馬懿는 守備로만 一貫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結局 4個月 間의 對峙 끝에 그해 10月 陣中에서 病死하였다. 그의 나이 54歲였다.

諸葛亮이 죽자 觸軍은 羊의 (楊義)의 指揮아래 韓中으로 退却하였고 이 事實을 안 司馬懿는 追擊하여 觸君을 擊退하려 했으나 觸軍이 바로 攻擊할것처럼 態勢를 轉換하니 곧바로 軍士를 물러 退却하고 다시 燭君을 逼迫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觸軍이 完全히 退却한 後에야 司馬懿는 自身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追擊하려 했으나 失敗하였다. 이 過程에서 洋醫와 사이가 나빴던 위연 이 叛亂을 일으키지만, 왕평과 麻袋 (馬代)의 活躍으로 鎭壓되었다.

諸葛亮의 영구는 聖徒 로 운구되어, 遺言대로 韓中 의 定軍山에 埋葬되었다. 子孫들에게 남긴 財産으로는 뽕나무 800그루와 瘠薄한 農土 15景이 있었다고 한다.

小說 《 三國志演義 》에서는, 이때 諸葛亮은 自身이 죽을 때를 알고 북두 를 向해 祈禱한 뒤 7日間 燈불이 꺼지지 않으면 壽命이 12年 延長된다는 儀式을 行했지만, 6日째 되는 날 位君의 奇襲을 알리려고 온 위연 이 등을 밟아 불이 꺼지는 것으로 描寫한다.

評價 [ 編輯 ]

諸葛亮에 對한 가장 一般的인 評價는 情事《 三國志 》에 실린 진수의 評이다.

諸葛亮은 百姓들을 안정시키고, 가야 할 길을 提示하고, 時代에 맞는 政策을 내고, 마음을 열고, 공정한 政治를 行하였다. 이리하여 領土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尊敬하고 사랑했다. 刑罰과 政治는 嚴格했는데도 怨望하는 者가 없었던 것은 그의 마음가짐이 公平하고 賞罰이 明確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每年 軍勢를 動員하면서 成功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은, 생각하건대 臨機應變의 軍略은 그의 長技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진수 는 諸葛亮을 政治가 및 行政家로써 높이 評價하였지만 軍事的 能力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고 記述하고 있다. 이에 對해 진수의 아버지가 諸葛亮에게 棍刑(머리를 깎고 近信토록 하는 刑罰)을 當했기 때문에 [6] 진수가 個人的인 感情으로 諸葛亮을 批判한 것이라고 主張이 있다. 하지만 後日 진수가 陳(晉) 無題 에게 올린 上疏文에서 諸葛亮을 觀衆 蕭何 에 버금간다고 極讚한 것을 勘案하면 진서의 主張은 信憑性이 떨어진다. 또한 이를 根據로 진수의 아버지가 陣式 (陳式)이라는 主張도 있는데, 이것 亦是 說得力이 不足하다. 陳書 에서 진수의 아버지는 家庭 戰鬪에서 마속 의 部長으로 從軍했다가 敗戰 後 棍刑을 받았다는 內容이 있을 뿐 이름조차 記錄되지 않았다. 反面 陣式은 韓中攻防戰에 從軍했고, 劉備 의 동오 復讐戰에서도 水軍 指揮官이었으며, 諸葛亮의 3次 北伐에서 無道 攻掠을 指揮한 高位級 장수였다. 진식과 같은 核心人士가 마속의 部長으로 從軍할 理는 없으며, 敗戰으로 棍刑을 當한 人士가 無挑 攻略戰과 같은 重要한 戰鬪의 指揮官으로 任用되는 것도 蓋然性이 낮다.

諸葛亮은 새로운 法律人 鏃과(蜀科)를 制定하고 信賞必罰을 明確하게 하였다. 이는 諸葛亮의 政治觀이 法家(法家)에 基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德望이 높은 사람들을 管理로 起用했다는 點에서 遊學(儒學)을 輕視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가 丞相에 在任한 期間 동안 蜀漢의 經濟 規模가 크게 成長했다는 點에서 [7] 經濟 政策 面에서도 有能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內定(內政)과 治國(治國)의 側面에서는 觀衆 (官仲)과 蕭何 (蕭何)에 比肩될 程度의 讚辭를 받았다. 軍事的인 側面에서는 基本技와 正攻法(正攻法)을 重視한 指揮官으로써 三國志演義에 描寫된 策略家的 面貌와는 相當한 距離가 있다. 卽 諸葛亮의 軍事的 特技는 策略이 아닌 部隊運用이었다. 이를 記錄한 文獻들은 다음과 같다.

諸葛亮이 軍隊를 이끌고 起算(祁山)을 攻擊했는데, 陣營이 잘 整頓되어 있고, 賞罰이 嚴肅하며 號令이 분명했다. - 三國志(三國志) 諸葛亮戰(諸葛亮傳)

諸葛亮은 部隊를 巧妙하게 統率하였으며, 軍令은 嚴命하였다. - 진양秋(晉陽秋)

三國志演義에서는 諸葛亮을 化工(火功) 및 反間計(反間計)의 名手로 描寫하고 있는데 反해, 實際 歷史의 諸葛亮은 8年間의 北伐 동안 化工을 使用한 적이 없으며 反間計의 活用 頻度 亦是 낮았다. [8] 또한 위연 이 提案한 者五穀 計策을 拒否한 것으로 볼 때 速攻이나 夜襲과 같은 危險負擔이 있는 作戰 亦是 選好하지 않은 듯 하다. 卽 全般的으로 政敵(靜的) 스타일의 作戰을 使用한 것으로 보이며 臨機應變의 軍略이 將棋가 아니었다는 진수 의 坪은 相當한 說得力을 가진다. 하지만 意外로 動的(動的)인 側面도 있다. 伏兵 戰術을 자주 驅使하였고, 이를 利用해 여러 次例 勝利하였다. [9]

諸葛亮이 臨機應變의 策略에 能하지 못했다는 點을 根據로 軍事的 能力이 크게 떨어진다는 主張을 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에 對해서는 다양한 反論이 있다. 먼저 實際 戰爭의 境遇 臨機應變의 策略 못지않게 部隊運用 能力의 重要性이 크다는 點을 들 수 있다. [10] 또한 1次 北伐 當時 조운 의 別動隊로 當時 위君의 總帥였던 조진 의 本陣을 誘引한 點, 3次 北伐이 奇襲의 形態로 이루어진 點, 그리고 埋伏界를 利用한 伏兵展에 能通했다는 點은 策略家로써의 能力 亦是 水準級이었다는 根據로 使用된다. 特히 當時 魏나라 第一의 戰略家인 四魔의 가 4次 北伐 時 魯省 戰鬪에서 敗한 以後 [4] 觸軍에 對한 戰略을 堅壁擧手(見?擧守: 壁을 맞대고 守備만 函)로 修正했다는 點을 보면 諸葛亮이 만만한 相對가 아니었음을 反證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諸葛亮이 위연 의 字五穀 計策을 採擇하지 않은 것에 對해, 軍事的 眼目이 없었다고 評價하기도 한다. 事實 자오曲 計策은 只今의 視角으로도 꽤 革新的인 作戰이었고 成功했을 境遇 蜀漢이 위나라 西部를 席卷할 수도 있었겠지만, 相當한 危險負擔을 안고 있었다. 먼저 1萬의 軍事(戰鬪兵 5千, 補給兵 5千)가 險峻한 山岳地域을 700餘里나 移動해야 하기 때문에 疲勞 累積에 依한 戰鬪力 低下를 甘受해야 했다. 위연은 者五穀을 지나 長安(長安)을 急襲하면 守備軍의 司令官인 下後無 (夏候楙) [11] 가 逃走할 것으로 豫想했다. 하지만 長安이 要塞化된 都市임을 勘案하면 쉽게 陷落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特히 長安의 위軍이 籠城戰을 벌이는 同時에 技曲에 있는 조진 의 本陣에서 救援軍을 派遣하면 위연 의 別動隊는 孤立되어 敗退할 可能性이 높았다. 이는 基本을 重視하고 冒險을 選好하지 않는 諸葛亮으로써는 받아들일 수 없는 作戰이었다.

結局 諸葛亮의 軍事的 能力에 對한 論難은 진수 가 말한 "臨機應變의 將略이 將棋가 아니었다"를 어떻게 解釋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그의 軍事的 能力을 批判하는 이들은 이를 諸葛亮의 策略 驅使 能力이 매우 떨어졌다는 意味로 解釋한다. 反面 諸葛亮을 擁護하는 이들은 策略家로서의 力量이 政治家로서의 力量과 比較했을 때는 相對的으로 떨어지지만 그마저도 非凡한 水準이었으며, 그의 軍事的 能力은 部隊運用의 側面에 重點을 두고 評價해야 한다고 主張한다. 一旦 當代 諸葛亮을 가까이서 본 사람들은 諸葛亮의 軍事的 能力을 높이 評價한 듯 하다. 이는 다음의 記錄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諸葛亮이 衛戍(渭水) 流域으로 進擊하자. 觀衆(關中) 一帶가 발칵 뒤집혔다. - 三國志(三國志), 世說新語(世說新語)

諸葛亮이 病으로 죽자 祭場들은 屯營을 불태우고 退却했다. 先制(宣帝: 四魔의 를 말함)께서 出兵해 이를 追擊했다. 諸葛亮의 장사 羊의 가 북을 치며 軍士들을 되돌리니 다시 맞서 싸우려는 듯 했다. 先制는 "窮地에 몰린 敵은 몰아붙이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돌아왔다. 果然 兩儀는 結陣한 채 떠났다. 다음 날 先制는 諸葛亮이 陣을 쳤던 자리에 가서 가서 남은 痕跡을 살펴보고 圖書와 糧穀을 많이 鹵獲했다. 그제서야 諸葛亮이 죽었음을 알아채고 말했다. "그는 果然 天下의 記載(奇才)로구나." - 陳書(晉書) 善提起(宣帝記)

軍이 退却하자 先王(宣王-司馬懿)이 그의 零淚(營壘)와 處所(處所)를 둘러보고 말했다, "天下의 記載(奇才)로다!" 羊의(楊儀) 等이 君을 整頓하고 出發하자 百姓들이 先王(宣王)에게 急히 告했고 先王이 이를 追擊했다. 剛柔는 量醫에게 命하여 軍紀를 反對로 하고 북을 울리도록 하여 先王에게로 向하는 것처럼 하자, 先王은 이내 물러나 敢히 逼迫하지 못했다. 이에 兩儀는 陣形을 짠 채 물러나고 溪谷으로 들어간 뒤 發想(發喪)했다. 先王이 退却하니 百姓들은 俗語(諺)를 지어 "죽은 諸葛(諸葛)이 살아있는 仲達(仲達)을 달아나게 했다." 라고 했다. 어떤 이가 이를 先王에게 高下字 先王이 말했다, "나는 산 者를 헤아릴 수는 있지만 죽은 者를 헤아려 對敵할 수는 없다" - 三國志(三國志) 諸葛亮戰(諸葛亮傳)

諸葛亮이 죽고 비의 姜瑜 의 北伐을 反對하며 말했다. "丞相조차 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할 수 있겠소? 傑出한 人物이 나타나기 前까지 기다림만 못하오." - 三國志(三國志) 非儀典(費?傳)

諸葛亮의 北伐은 위나라를 滅하여 閑室을 回復하는 것이 名分이었겠지만, 實際 現實的인 目標는 翁·量 2個州를 占領하여 國力의 伸張을 꾀하고 中院 進出을 수월하게 한다는 評價가 妥當하다. 《三國志》《魏書》《眞胎田》에 그 記錄이 나온다. 또 諸葛亮은 높은 權力을 얻었지만 王이 되려고 하진 않았는데 諸葛亮집에는 利嚴 이 구석을 勸하자 答信을 통해 "天下가 平定되면 모두 더불어 높아지고 十名도 받을 수 있는데 하물며 아홉이랴?"라는 發言을 한 記錄이 남아있다. 여기서 十名은 實際로 存在하지 않는 것이니 이엄을 달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제갈충武器에 이르길: 환온(桓溫)李 燭(蜀)을 征伐하였는데 제갈무후가 (生存하였을) 때 素砂(小史)를 지낸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어 나이가 1百餘 歲였다. 환온이 묻기를

“제갈승賞은 只今의 누구와 더불어 比較 할 만한가?”

하니 自身과 比較할 만하다 여겨 마음으로 자못 自矜(自矜)하였다. 對答하여 말하기를

“諸葛共께서 계실 때에는 또한 남다름을 깨닫지 못하였사온데, 공께서 돌아가신 後부터는 그분과 比較할 만한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일화 [ 編輯 ]

  • 諸葛亮은 後漢 獻帝 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해에 死亡했다.
  • 當時 著名한 人士였던 王粲(王粲)과 倍잠(裴潛)은 諸葛亮(諸葛亮)에 對해 "天地소胰子(天之所以資)" 하늘이 준 資産이라고 하였다.
  • 진수의 諸葛亮戰에 따르면 키는 8隻(184cm) [12] 에 容貌가 매우 빼어났다고 한다. 世說新語에 따르면 그의 親兄인 제갈근 은 말처럼 머리가 길게 생겼다고 하니 兄弟의 風貌가 달랐을 수도 있다. 다만, 情事에서는 제갈근 亦是 外貌를 갖추고 있었다고 記錄하고 있으니 제갈근 亦是 單純히 얼굴이 긴 美男이었을 可能性도 있다.
  • 諸葛亮의 風貌에 對해서는 冠玉같은 얼굴에 흰 鶴氅衣와 白羽扇을 가진 모습이 神仙과 같다고 描寫되는 것이 大部分이다. [13] 以外의 異見으로 諸葛亮이 皮膚가 거칠어 松柏같으며 깡마른 外貌였다는 主張이 있는데, 그 主張의 出處로 使用되는 聲援韻譜(性源韻譜)는 信賴할 수 있는 史料가 아닐 뿐더러 그 存在 自體도 疑心되는 것이다. 다만, 平素 消息하고 過勞하는 習慣이 있었으며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다녔던 것을 보아 實際로 마른 體格에 몸이 弱했을 可能性은 크다. 어떤 意見에서는 피를 吐했다는 偉略의 記錄을 根據로 그의 持病이 肺結核이라고도 한다.
  • 諸葛亮의 아내인 黃氏는 '황두黑色(노란 머리, 검은 皮膚)'에 키가 8隻(184 cm) [14] [15] 二나 되어 女子로서의 魅力이 不足하였다고 傳해진다.
  • 偉略에 諸葛亮이 劉備 에게 먼저 찾아왔다는 記錄이 있긴 하지만, 該當 記錄은 蜀漢에 對한 情報가 잘못된 것이 많으며 諸葛亮은 그의 出師表에서 三古의 例를 分明히 明示하고 있다.
    • 諸葛亮을 迎入하자 關羽 (關羽)와 裝備 (張飛)는 不滿을 품었는데, 劉備 가 그들에게 '(나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格(水魚之交)'이라고 하여 그들의 不滿이 없어졌다고 한다.
  • 出師表 에서 諸葛亮이 直接 言及한 뽕나무와 瘠薄한 土地는 諸葛亮이 淸貧했음을 알려주는 逸話라기보다는 '그 程度의 땅이 있으니 子孫들이 먹고 살기에는 充分했다'라고 理解할 수 있다.
  • 古今島檢錄에 따르면 劉備 에게 劍을 下賜받기도 했고 검을 佩用했다는 말이 있어 나름 劍術에 素質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 三曹視門譯註에 따르면 赤壁大戰 移轉에 曹操 에게 懷柔당한 적이 있다. 曹操는 諸葛亮에게 便紙와 함께 丁香 5斤을 보냈는데, 定向은 當時 皇帝를 가까이 모시는 高官들이 口臭 除去를 위해 服用하던 것이었다.
  • 翌週에 있을 때 堤防을 쌓았는데 '諸葛第'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花亭(火井)을 巡視하자 그 後 불길이 더 거세졌다는 逸話도 있다.
  • 饅頭
諸葛亮이 雲南 地域을 征伐하고 오는 길에 路需에서 甚한 風浪을 만난다. 맹획 이 風習에 따라 마흔아홉의 사람의 머리로 祭祀를 지내야 風浪이 멎는다고 하자 諸葛亮이 사람 머리 模樣의 밀가루로 祭祀를 지낸 것이 萬頭의 始初라는 이야기가 있다.
諸葛노(諸葛弩)는 열 個의 화살을 連續해서 發射할 수 있는 連發式 涓奴이다. 諸葛亮이 發明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實際 諸葛노는 明나라 때 改良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諸葛亮에 對한 中國人의 愛情表示로 볼 수 있다. 實際 諸葛亮이 開發한 것은 涓奴(連弩)를 改良한 원융(元戎)이라 했다. 쇠로 화살을 만들고 화살 길이는 8寸이었고, 한番 노(弩)를 쏘면 10個의 화살이 함께 發射되었다고 한다.
  • 法의 執行에 있어서는 原則的이었다. 自身이 그렇게 아끼던 人材이자 自身의 親舊인 馬糧 (馬良)의 동생 마속 家庭 戰鬪 의 責任을 물어 斬首( 泣斬馬謖 )시켜 解弛해질 수 있는 軍의 紀綱을 바로잡았다. 뿐만 아니라 自身도 丞相에서 右將軍으로 降等시켜 責任을 져 法의 執行에 例外가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 원준(袁準)李 諸葛亮의 北伐에 對한 記錄을 남겼는데, 여기에 따르면 諸葛亮이 平素 軍士들의 武裝과 武器 狀態를 언제나 最高 狀態로 維持했고 眞彩와 倂記, 그外 戰爭에서 쓰는 道具도 멋있고 精巧하게 꾸몄다고 한다. 蜀나라 사람이 輕薄해 이렇게라도 해야 軍隊가 維持된다고 圓環의 아들은 評했지만 이는 地域感情的인 發言이라 額面 그대로 믿기 힘들고 兵士들의 事機를 最高 狀態로 維持하고 百姓들의 負擔을 덜어주기 위한 諸葛亮의 手腕과 配慮의 一環으로 봄이 옳다.
  • 中國 에서 巫俗의 神으로 崇拜된다. 이때는 '臥龍先生'神이라고 부른다.
  • 序奏에서 移住해 형주에 定着한 以後 諸葛亮의 一族은 형주의 豪族들과 通婚하였다. 菜某 에게는 누나가 두 名이 있었는데 큰 누나는 諸葛亮의 丈人 황승언 에게 시집갔고 둘째 누나는 遊標 에게 시집갔다. 諸葛亮은 황승언의 딸中 한 名에게 장가를 갔고 다른 하나는 油種에게 시집갔다. 한便 제갈근 은 諸葛亮이 劉備를 만나기 以前에 이미 吳나라의 重臣이 되어 있었고 諸葛亮의 큰 누나는 괴기 에게 시집갔는데 괴기는 怪量 , 怪月 과 親族이다. 또한 諸葛亮의 작은 누나는 방덕共의 아들인 防産民 에게 시집갔는데 旁通 은 防産民과 四寸 兄弟 사이였다. 또한 魏나라의 將帥 第褐炭 은 諸葛亮의 親戚 兄弟였다. 結果的으로 황승언, 유표, 菜某, 旁通, 怪奇, 怪量, 怪月이 모두 다 諸葛亮과 親姻戚인 셈이다.
  • 諸葛亮은 後漢 獻帝 와 같은 年度에 태어난 同甲내기( 181年 出生)이며 같은 나이에 死亡( 234年 死亡)하기마저 했다.

主要 手下 長壽 [ 編輯 ]

親族 關係 [ 編輯 ]

諸葛亮이 황승언 의 딸인 黃夫人 과 結婚한 關係로 菜某 와도 親姻戚關係이다. 菜某에게는 누나가 두 名 있는데 큰 누나가 황승언의 아내이며 작은 누나가 遊標의 아내이다. 卽, 菜某는 寸數上 諸葛亮의 처外叔父가 된다. 그리고 菜某의 큰누나의 작은딸, 卽 黃夫人의 동생은 菜某의 의붓조카 有終의 아내였으니 유종과 諸葛亮은 동서지간이 된다.

또한 諸葛亮의 아버지 諸葛규는 膝下에 3男 2女를 두었는데 長男 제갈근 은 吳나라의 重臣으로 孫權 의 家臣이며 諸葛亮의 큰 누나는 방덕共의 아들인 防産民意 아내인데 防産民은 旁通 의 四寸 兄弟다. 諸葛亮의 작은 누나 亦是 형주의 有力 家門인 怪氏 집안의 一員인 괴기 의 아내인데 괴기는 怪量 , 怪月 과 같은 一族이다.

一族 [ 編輯 ]

現存하는 後孫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出處
  2. 《정사 三國志》權35〈諸葛亮戰(諸葛亮傳)>
  3. 拒否의 理由로는 別動隊가 山岳地域을 700里나 行軍해야 한다는 點과, 長安의 守備軍이 많았다는 點을 꼽는다.
  4. 陳書 》〈善提起〉에서는 위軍이 勝利하여 觸群 1萬餘名이 戰死했다고 記錄하였으나, 《 韓進春秋 》와 《 資治通鑑 》에서는 觸軍이 勝利하여 위君의 需給 3千餘個를 獲得했고 많은 物資를 鹵獲했다고 記錄했다. 歷史家들은 後者의 記錄을 定說로 본다.
  5. 世說新語(世說新語)에서는 女人의 옷을 보내 嘲弄했다고 한다.
  6. 陳書 》〈진수전>에 記錄되어 있다.
  7. 蜀漢의 貨幣가 位(魏)의 옹洋酒와, 오(吳)의 형주 南部地域까지 通用될 程度였다.
  8. 1次 北伐 前에 常用性의 猛달 을 懷柔하여 內應을 誘導한 것이 代表的이다. 하지만 이 計劃은 事前에 發覺되었으며 猛달 四魔의 에게 敗事(敗死)했다.
  9. 伏兵戰의 成果: 絲穀에서 王雙 軍을 擊破(2次 北伐), 常規에서 匪擾 , 곽回 軍을 擊破(4次 北伐), 木門에서 장합 軍을 擊破(4次 北伐)
  10. 칭기즈칸 의 蒙古軍이 유라시아를 再敗한 原動力은 바로 效率的인 起兵 運用에 있었다.
  11. 《偉略》에 따르면, 當時 無能한 人物로 評價받았다고 한다.
  12. 中國 古文獻에서 8隻 키는 實際 키보다는 風采가 좋고 氣骨이 壯大했다는 意味로 使用하였음.
  13. 該當 描寫는 三國志演義가 집필되기 한참 前인 東進 時期에 이미 完成되었다.
  14. 中國 古文獻에서 8隻 키는 實際키가 아니라 氣骨이 壯大하고 風采가 좋았다는 表現으로 理解해야 한다.
  15. 다만 當代에 男性 平均 伸張과 맞먹는 長身이던 領事皇后 가 美女로 여겨졌고 黃氏가 單身이었다는 버전도 있어서 單身으로 보기도 한다.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新設)
蜀漢 丞相
221年 ~ 234年
後任
장완
前任
(新設)
蜀漢 綠尙瑞司
223年 ~ 234年
後任
장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