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回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곽回
郭淮
出生地 太原群 糧穀
死亡日 255年
國籍 後漢 曺偉
作爲 管內後 → 社양정후 → 度向後 → 糧穀後
經歷 平原部勝 → 門下赤潮 → 丞相兵曹宜寧社 → 情緖將軍사마 → 眞書將軍장사 → 翁主自社 → 兼 健胃將軍 → 量武裝軍 → 左將軍 → 前將軍 → 情緖將軍 → 거機張郡 → 大將軍(贈職)

곽回 (郭淮, ? ~ 255年 )는 中國 後漢 말 ~ 三國 時代 위나라 將軍 으로 百濟 (伯濟)이며 倂奏 太原群 糧穀縣(陽曲縣) 사람 이다. 關西 地方에 뼈를 묻어 强族 蜀나라 를 相對로 猛活躍했다. 하후현 의 뒤를 이어 官署 軍隊의 最高 責任者까지 올랐다.

生涯 [ 編輯 ]

關西 服務 [ 編輯 ]

建安 年間에 孝廉 으로 薦擧되었고 平原部 勝(平原府丞)을 지냈다. 以後 五官中郞將(五官中郞將) 조비 가 起用해 그 밑에서 門下赤潮(門下賊曹)로 일하다가 丞相 曹操 의 兵曹宜寧社(兵曹議令史)로 轉任되었다. 215年 , 曹操의 韓中群 征伐에 從軍하였고 , 韓中에 남아 情緖將軍(征西將軍) 下後燕 의 사마(司馬)로 勤務하였다.

219年 , 疾病 으로 인해 出戰하지 못한 사이 下後軟餌 促裝 蝗蟲 에게 [1] 해를 當해 群衆이 뒤숭숭하였다. 곽膾가 흩어진 兵士들을 收拾하고 湯口將軍(?寇將軍) 장합 을 總大將으로 推戴하니 各 部隊가 安定되었다. 다음 날, 劉備 한手 를 渡江하려 하였다. 장수들은 衆寡不敵에 劉備軍이 氣勢를 타고 있으므로 을 따라 陣을 짜자고 하였다. 곽膾가 말하길, “이는 弱한 꼴을 보여 敵을 꺾기 어렵게 합니다. 에서 떨어진 채 陣을 쳐 劉備軍을 誘引하는 것만 못합니다. 半쯤 건넜을 때 襲擊하면 擊破할 수 있습니다.”라 하였다. 劉備는 疑心하여 넘어오지 않았으며 곽會는 굳게 지킬 뿐 歸鄕할 마음이 없음을 表示하였다. 曹操가 훌륭히 여겨 장합에겐 佳節(假節)을 授與하고 곽會는 그 私馬로서 繼續 從事하게 하였다.

220年 ( 軟鋼 元年), 祖妣가 曹操의 位를 繼承하였다. 곽會는 管內後 (關內侯)를 받고 진서장社(鎭西長史)로서 조진 [2] 所屬되었다. 정강호群(征羌護軍)을 代行해 左將軍 장합과 官軍將軍(冠軍將軍) 凉秋 를 도와 情感(鄭甘)과 노수호(盧水胡) 討伐에 寄與하였다. 祖妣의 위나라 皇帝 卽位를 敬賀하러 갔을 때는 途中에 病이 걸려 늦고 말았다. 祖妣가 正色하고 꾸짖기를, “옛날 于임금 이 倒産(塗山)에 諸侯 들을 모이게 했을 적에 防風氏(防風氏)가 늦게 와 處刑 하였소. 只今 온 天下가 같이 기뻐하는데[溥天同慶, 普天同慶, 保薦東京] 卿은 가장 遲滯하였소. 어째서인가?”라 하였다. 곽膾가 答하길, “神이 듣건대 五帝 時節엔 元來 德으로써 사람 들을 이끌었으나 하후 (夏后)에선 政治가 衰微해져 비로소 刑辟(刑?)을 썼다고 합니다. 只今은 唐虞時代 (堯舜時代)가 到來했으니 신은 防風氏의 일을 면할 줄로 압니다.”라 하였다. 祖妣가 기뻐하며 영 翁主 自社 (領雍州刺史)로 拔擢하고 社양정후(射陽亭侯)에 封하였다. 224年 ( 黃초 5年), 正式 翁主自社에 올랐다.

諸葛亮 防禦에 一助 [ 編輯 ]

안정군 一帶에서 反抗하던 강인 (羌人) 頭領 辟除(??)를 攻擊하여 降伏시켰다. 강인과 號인(胡人)들이 歸附해올 때마다 人口 等 各種 情報 를 緻密하게 蒐集하여 그 속事情까지 낱낱이 알았다. 다들 곽膾가 神明하다고 稱讚하였다. 228年 ( 泰和 2年), 蜀相 諸葛亮 이 記事(祁山) 을 통해 쳐들어왔다 . 天壽群 을 巡察하고 있던 곽會는 急히 上규현(上?縣)으로 달려갔다. [3] 諸葛亮이 마속 을 家庭(街亭)에, 高尙 을 熱流性(列柳城)에 配置하였다. 장합이 마속을, 곽膾가 고상을 물리쳤다. 또한 農書群 의 有名 강인 黨制(唐?)를 不한현(?罕縣) [4] 에서 무찔러 翁主自社에 健胃將軍(建威將軍)을 더하였다.

229年 , 促裝 陣式 無挑群 音評軍 을 攻略하였다. 應戰하려 했으나 諸葛亮까지 健胃(建威)로 오기에 물러났다. [5] 230年 , 促裝 위연 吳의 가 强族이 있는 南岸群 께로 들어왔다. [6] 後將軍 匪擾 와 함께 養鷄(陽谿)에서 맞붙었다가 敗하였다. [7] 231年 , 諸葛亮이 또 魯省(鹵城) 方面으로 侵入해 常規에서 四魔의 를 邀擊하려 하였다. 곽膾가 匪擾와 함께 막아섰다가 敗退하였다. [8] 當時 農牛(?右)엔 穀食 이 없어 觀衆 으로부터의 大量 輸送 얘기마저 나올 程度였다. 곽膾가 강인과 好人들을 威嚴과 恩惠로 어루만져 穀食을 調達받으니 軍糧이 充足해졌다. 量武裝軍(揚武將軍)으로 옮겼다.

234年 ( 靑龍 2年), 諸葛亮이 제5차 北伐을 일으켜 夜曲(斜谷)을 나와 屯田 을 運營하였다. 司馬懿度 衛戍 南쪽에서 對峙하였다. 곽膾가 進言하기를, ‘諸葛亮이 반드시 北元(北原)을 爭奪하려 할 것이므로 마땅히 先占해야 한다’고 하였다. 많은 이들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萬若 諸葛亮이 渭水 건너 北元에 오른 後 北쪽의 까지 아우른다면 弄(?)으로 가는 길이 끊어져 百姓과 異民族 들이 動搖할 것’이라 豫見하였다. 司馬懿가 옳다 여겨 곽回로 하여금 北元을 防備하게 하였다. 垓子 와 堡壘가 채 完備되기 前에 鏃의 大兵이 닥쳐와 곽膾가 逆擊하였다. 며칠 後 諸葛亮軍이 西쪽으로 움직였다. 多數가 西쪽 陣營을 칠 模樣이라고 하니 곽回 혼자 이는 西쪽으로 關心을 쏠리게 後 羊水(陽遂)를 攻取할 心算이라고 내다보았다. 果然 그날 에 諸葛亮이 羊水로 前進했는데 미리 對備하고 있던 戶主 과 곽膾가 積石(積石)에서 싸워 몰아냈다. [9]

諸葛亮 事後로도 繼續되는 紛爭 [ 編輯 ]

238年 ( 勁草 2年), 修繕강후(守善羌侯) 蕩心(宕?)李 鏃의 音坪 태수 妖花 에게 攻擊당했다. 곽膾가 狂位 태수 王胤(王贇) 및 男안태수 鞣革(游奕)에게 妖花 討伐을 指示하였다. 얼마 뒤 造詣 에게 上書하여 ‘王胤과 鞣革 等이 産을 사이에 두고 東西로 갈라져 壓迫하고 있으며 곧 完破할 것 같다’고 하였다. 造詣는 病勢가 너무 흩어졌다며 곽回더러 鞣革한테 要處에 있지 않은 兵營은 더 좋은 곳으로 옮기라고 어서 傳하게 하였다. 미처 到達하기 前에 鞣革軍이 깨지고 王胤은 幼時(流矢)에 맞아 死亡 하였다. [10] 240年 ( 定試 元年), 農書君을 侵犯한 促裝 姜瑜 를 강중(彊中) [11] 까지 따라갔다. 剛柔가 撤退한 後 강인 미당 等을 討平하고 저인 部落 3,000餘 가를 按舞하여 觀衆으로 이주시켰다. 左將軍 이 되었다.

洋酒 의 休저號(休屠胡)인 兩院壁(梁元碧) 等이 2,000餘 가를 데리고 翁主로 歸附하였다. 곽膾가 奏請을 올려 이들을 안정군 考評縣(高平縣)의 住民으로 받아들였다. 그 後 이로 因해 鉏主導위(西州都尉) 或은 서천도위(西川都尉)가 設置되었다. 前將軍 에 任命되었으며 翁主子辭職은 如前히 維持하였다. 244年 , 情緖將軍이자 都督옹양主題軍事(都督雍?州諸軍事)인 하후현 [12] 蜀나라 征伐을 開始하였다 . 곽膾가 그 先頭를 擔當했는데 形勢를 살펴보니 不利하여 撤收하였다. 그 때문에 大敗하지 않았으며 돌아와 佳節(假節)을 받았다.

强族의 大規模 叛亂을 平定 [ 編輯 ]

247年 , [13] 農書群 , 南岸群, 금성군 , 서평군 一帶의 强族 아하소과 (餓何燒戈), [14] 罰東(伐同), 아차새(蛾遮塞) 等이 서로 結合해 叛亂하였다. 이들은 城邑을 치는 同時에 蜀나라 軍隊를 불러들였다. 楊州의 著名 號인 치舞臺(治無戴)도 이들에게 呼應하였다. 土觸護軍(討蜀護軍) 下朽敗 가 위시(爲翅)에 駐屯하였다. 곽會는 農書群 赤道縣(狄道縣)에 다다랐다. 麾下에선 應當 不한현부터 整理해야한다고 하였으나 곽會는 剛柔가 하후敗를 찌를 것이라 보고 風中(?中)을 거쳐 南쪽의 下朽敗에게로 向하였다. 果然 剛柔가 爲始로 進攻했다가 適切히 到着한 곽回軍으로 因해 回軍하였다. 이어서 곽會는 아하小科를 참하고 萬餘 部落을 降伏시켰다.

248年 , 아차새 等은 農書群 하관현(河關縣)과 금성군의 白土高聲(白土故城)에서 黃河 를 끼고 對抗하였다. 곽會는 上流에서 作戰하는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고는 隱密히 下流에서 渡河하여 백土城을 占據한 後 襲擊해 大破하였다. 치舞臺는 武威群 을 侵奪하고 있었는데 그 加速은 서해군 에 있었다. 이에 서해군으로 빠르게 進擊했는데 마침 歸還하는 치舞臺를 용이(龍夷) 以北에서 만나 敗走시켰다. 復歸하는 길에 席斗山(石頭山) 西쪽에서 蠢動하던 금성군 영거縣(令居縣)의 異民族 무리도 粉碎하였다.

剛柔가 石英(石營)에서부터 江天(彊川)으로 가 치舞臺를 맞이하고 妖花는 性中産(成重山)에 陣地를 建設해 敗北한 강인들을 거두었다. 곽膾도 이에 對應해 兵力을 둘로 나누려 하였다. 將帥들이 江柳君은 西쪽으로 號인에 接하고 妖花軍은 險한 곳에 자리를 잡았으니 君을 兩分한다면 도리어 弱해져 나아가도 剛柔를 制壓할 수 없으며 물러서도 妖花를 무너트릴 수 없다고 하였다. 한데로 뭉쳐서 西進함으로써 號인과 촉나라의 關係를 斷絶시키는 것이야말로 筏橋(伐交)의 兵法이라고 하였다. 곽膾가 答하길, “생각치 못한 때에 妖花를 奇襲한다면 剛柔는 不安해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소. 剛柔가 온 힘을 다해 올 것을 勘案하더라도 妖花를 쓰러뜨리기엔 充分하오. 게다가 剛柔를 奔走히 움직여 疲弊하게 만들 수 있소. 西쪽으로 멀리 가지 않아도 號인과의 關係는 저절로 찢어질 것이니 이야말로 一擧兩全(一擧兩全)의 策略이오.”라 하였다. 下朽敗 等으론 答中(沓中)의 剛柔를 쫓게 하고 곽會는 妖花를 掩襲하였다. 剛柔는 妖花를 救援하러 달려왔고 모든 것이 곽膾가 꾀한 대로 되었다. 度向後(都鄕侯)로 進封되었다.

官署의 最高 責任者까지 올라 [ 編輯 ]

249年 ( 加平 元年), 情緖將軍과 都督옹양第軍士를 맡았다. 後任 翁主自社로는 진태 가 赴任하였다. 姜瑜 가 國産(麴山)에 基盤해 두 個를 築造하고는 아문장(牙門將) 具案 과 이흠(李歆) 等을 位置시키고 강인과 好人들을 모아 여러 을 逼迫하였다. 진태가 建議하길, “국성(麴城)李 堅固할지라도 自國에서부터 멀고 險한 길로 樣式 을 運搬해와야만 합니다. 江이(羌夷)는 剛柔의 勞役에 괴로워하지 기꺼이 따르는 게 아닙니다. 城을 包圍만 하고 있어도 묻히지 않고 陷落할 수 있습니다. 援軍이 있어도 山길이 險難해 起動이 어렵습니다.”라 하였다. 곽膾가 받아들여 진태로 하여금 土觸護軍 서질 과 남안태수 等愛 等을 거느리고 補給路를 끊게 하였다. 剛柔가 具案 等을 求하기 爲해 우두산(牛頭山)에서 나왔다. 진태는 各 部隊에겐 守備만 持續하게 한 채 곽回에게 헌冊하길 ‘自身이 南쪽으로 白手(白水)를 건넌 後 을 따라 東쪽으로 가는 동안 곽會는 우두산으로 疾走해 剛柔의 退路를 遮斷하자’고 하였다. 곽膾가 承諾해 助手(?水)로 移動하였다. 剛柔는 包圍網이 完成되기 前에 달아났고 孤立無援에 빠진 具案 等은 投降하였다. [15]

250年 , 關羽(關右)에 30餘 年을 있으면서 밖으로는 敵을 膺懲하고 안으로는 百姓과 異民族을 便安히 하였다. 여러 公的들이 인정받아 官職은 거機張郡 , 儀同三司(儀同三司)에 이르고 지절(持節)을 받았으며 都督 權限은 如前하였다. 作爲 는 糧穀後(陽曲侯)로 올랐고 食邑 은 모두 합쳐 2,780號였는데 300號를 分割해 아들 한 名이 정후(亭侯)에 封해졌다.

251年 , [16] 王陵 一黨이 四魔의 에게 誅殺되었다. 곽會議 아내 는 王陵의 누이였기에 그女도 連坐 되어 御史(御史)가 잡으러 왔다. 部下들과 江(羌)·濠(胡)의 樹齡[擧手, 渠帥] 數千 名이 挽留하는 票를 올리라고 곽回에게 머리 를 조아리며 請하였다. 夫人이 護送길에 오르자 울지 않는 이가 없고 저마다 憤怒를 표하며 强制로 못 가게 하려 하였다. 다섯 아들도 피가 흐를 程度로 머리를 찧으며 곽回에게 懇請하였다. 곽膾가 차마 더 以上 볼 수 없어 數千 氣(騎)로 쫓아가게 해 數日 만에 데려왔다. 司馬懿에게 便紙 해, “다섯 아들이 어미 를 애타게 사랑해 그 自身도 아끼지 않습니다. 或如 어미가 없으면 다섯 아들도 없고 다섯 아들이 없으면 곽回 亦是 없습니다. 아내를 되찾아온 것이 에 許容되지 않는다면 제가 모든 責任 을 지고 皇帝 앞에서 當然히 를 받겠습니다.”라고 하니 容恕를 받았다. [17] 255年 ( 庭園 2年)에 世上 을 떠나 大將軍 追贈 되고 시호 는 정후(貞侯)라 하였다.

三國志演義 [ 編輯 ]

조홍 補佐 [ 編輯 ]

司書가 아닌 小說 三國志演義 》에서는 第70回에 韓中 의 男丁(南鄭)을 進水하던 조홍 君의 行軍司馬(行軍司馬)로 첫 登場한다. 장합 過失 이 있으면 郡名을 달게 받는다는 條件으로 탕거 戰鬪(瓦溝館 戰鬪)에 나섰다가 져서 돌아온다. 조홍이 處刑 하려고 하니 곽膾가 한 番 더 機會를 줘서 加盟館(?萌關)으로 出擊시켜보자고 提案한다. 장합은 또 敗한다. 곽膾가 다시금 조홍을 말려 장합을 살린다.

조진 補佐 [ 編輯 ]

第91回, 諸葛亮 第1次 北伐 을 始作한다. 第93回, 下後無 代身 大都督이 된 조진 이 英翁主自社 곽會를 不都督으로 採用한다. 軍事(軍師) 왕랑 이 老軀임에도 諸葛亮과 舌戰을 벌이다 숨을 거둔다. 곽會는 諸葛亮이 肖像을 틈타 來襲할 것이라 보고 位君을 네 갈래로 나눠 두 部隊는 逆襲을, 다른 두 部隊는 埋伏 했다가 邀擊하는 안을 세우는데 諸葛亮한테 간파당해 敗戰한다. 第94回, 이番엔 西江 을 끌어들여 觸君을 앞뒤에서 挾攻하지만 또다시 크게 敗한다. 結局 四魔의 가 평서都督(平西都督)李 되어 援軍으로 온다. 第95回, 조진은 미성(?城)을 守備하게 된다. 조진과 곽會는 司馬懿만 공을 가져갈까봐 곽會를 家庭으로 分遣한다. 司馬懿가 먼저 家庭을 占領했단 消息에 熱流性으로 轉換해 가는데 마침 退却해오던 위연 · 高尙 · 왕평 一行을 만나 殲滅한다. 다만 熱流星 亦是 司馬懿가 先占한 狀態다. 觸群 追擊으로 變換해 技曲(箕谷)의 조운 을 뒤쫓는데 先鋒將 邵雍 은 刺殺당하고 만정 목숨 만 건지는 等 失敗한다.

第97回, 諸葛亮이 第2次 北伐 을 敢行한다. 진창성(陳倉城)의 謔笑 · 王雙 과 달리 起算의 조진은 匪擾 를 잃는 等 苦戰한다. 第98回, 太常卿(太常卿) 寒氣 가 와서는 ‘나가 싸우지 말고 고수만 하라’는 造詣 의 調書를 傳한다. 司馬懿가 조진에게 功勞를 돌리고자 自身의 意見임을 숨겼는데도 곽膾가 알아채며 後날 觸甁을 堪當해낼 이는 司馬懿日 것이라 豫言한다.

四魔의 補佐 [ 編輯 ]

조진이 病이 나 洛陽 으로 돌아간 사이 諸葛亮의 第3次 北伐이 勃發해 司馬懿가 大都督으로 發令된다. 第99回, 音坪 · 無挑 두 軍의 連絡이 끊긴다. 司馬懿의 命에 따라 손禮 와 함께 그 背後를 掩襲해 두 君을 求하려 하지만 왕평과 姜瑜 가 벌써 陷落해서는 城밖에 布陣해있다. 計略이 있을 것 같아 撤收하는데 진즉에 埋伏해있던 諸葛亮에게 깨진다. 第101回, 諸葛亮이 제5차 北伐에 나서 怒聲을 차지하고는 農産(?山) 一帶의 을 收穫한다. 곽膾가 司馬懿에게 提議해 같이 攻城戰을 벌이지만 城밖 네 地點에 숨어있던 伏兵에 當한다. 反轉을 위해 翁主와 洋酒의 人馬를 動員해 檢角 (劍閣)을 急襲하는 案을 짜지만 이마저 成功하지 못한다.

第102回, 諸葛亮이 제6차 北伐을 實施해 司馬懿가 衛戍 에서 對敵한다. 곽膾가 助言하기를, ‘觸軍이 衛戍를 건너와 北쪽의 언덕과 山을 이어 弄으로 가는 길을 封鎖한다면 큰 근심’이라 한다. 司馬懿가 곽會와 손禮로 하여금 北元을 防備시킨다. 來侵해온 위연과 麻袋 를 司馬懿의 埋伏 作戰에 따라 물리친다. 諸葛亮이 開發한 木牛流馬 를 司馬懿가 複製해 使用한다. 王坪이 北元 附近에서 運送臺를 襲擊한다. 곽膾가 奪還하러 가니 王坪이 몰래 木牛流馬의 를 비틀고는 일부러 내버려둔다. 곽膾가 몰고 오려는데 꿈쩍도 하지 않아 唐慌하던 次 姜瑜, 위연, 왕평의 合攻을 當해 敗走한다. 다시 追擊하려니까 이番엔 六丁六甲의 兵士인 듯 怪異하게 생긴 이들이 木牛流馬를 바람 처럼 몰고 간다. 神이 그들을 돕는다며 크게 놀라 더以上 쫓지 못한다.

剛柔를 相對 [ 編輯 ]

第107回, 司馬懿가 考評陵 事變 을 벌여 權力을 掌握하고 翁主에 있던 下朽敗 까지 誘引한다. 이에 亂을 일으킨 하후敗를 곽膾가 진태 의 도움을 받아 逐出한다. 具案 과 이欠이 剛柔의 命令을 履行해 國産 아래에 姓 두 個를 쌓고 抵抗한다. 곽會와 진태가 이들을 에워싸 激戰하는 한便 上流도 막아 食糧과 食水를 枯渴시킨다. 剛柔는 翁主를 攪亂함으로써 國産의 包圍를 풀려고 우두산으로 進軍한다. 진태의 戰略에 따라 진태가 우두산으로 가 剛柔君의 視線을 잡아둔 사이 곽膾가 助手를 取해 그 軍糧 輸送路를 遮斷한다. 도망가는 江幼君을 打擊해 大勝을 거둔다.

第109回, 剛柔의 제2차 北伐에 司馬所 가 臨했다가 鐵籠山(鐵籠山)으로 내몰린다. 곽膾가 이를 救出하기 위해 진태의 計策을 實行한다. 一旦 剛柔와 聯合한 강왕 미당 에게 진태를 거짓 降伏시켜 곽回 軍營으로의 講習을 誘導한다. 그렇게 온 아하소과 를 潰滅시키고 强族病의 本震까지 逆襲해 미당을 生捕한다. 손수 미당의 結縛을 풀어주며 回游해 힘을 합치고 鐵籠山으로 進擊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미당을 歡迎하려던 剛柔를 總攻擊해 粉碎한다. 말고는 어떤 武器 도 없이 逃走하는 剛柔를 追擊한다. 剛柔의 활 쏘는 소리 에 連달아 避하는데 정작 화살 이 보이지 않는다. 화살조차 없음을 알고는 射擊했는데 剛柔가 그 화살을 잡아서는 道路 날린 게 的中한다. 軍士들에게 救助되어 화살鏃을 뽑지만 가 멈추지 않아 生을 마감한다.

家計 [ 編輯 ]

  • 할아버지  : 藿田(郭全) - 大司農 을 지냈다. [18]
    • 아버지  : 곽온(郭縕) - 안門 태수 를 지냈다. [18]
      • 本人 : 곽回
        • 아들  : 곽桶(郭統) - 襲封한 아들로 官職은 형주 自社 에 達하였다.
          • 孫子 : 곽정(郭正) - 곽桶을 이었다. 함희 年間에 爵位 制度가 五等爵 으로 改編되었다. 곽會議 공이 顯著했으므로 곽정은 分讓者(汾陽子)로 開封(改封)되었다.
      • 동생 : 곽倍(郭配) - 는 中南(仲南). 名聲이 높았으며 成樣 태수까지 하였다. [19]
        • 조카 : 藿田(郭展) - 者는 泰西(泰舒). 有能하여 太僕 (太僕)까지 昇進하였다. [19]
        • 조카 : 곽예(郭豫) - 者는 태녕(泰寧). 相國 參軍(相國參軍)에 從事하며 이름 이 알려졌으나 夭折하였다. 딸은 王淵 (王衍)에게 시집갔다. [19]
        • 조카딸 : 排水 의 妻 [19]
        • 조카딸 : 곽怪 - 가충 의 妻 [19]
      • 동생 : 곽진(郭鎭) - 字는 계남(季南). 謁者僕射(謁者僕射)를 하였다. [19]
        • 조카 : 곽혁 (郭奕) - 者는 怠業(泰業). 酸度 로부터 高尙하고 꾸밈이 없으며 雅量까지 있다고 稱讚받았다. 翁主 自社와 相서 (?書)를 歷任하였다. [19]
      • 동생 : 곽輛(郭亮) - 後孫으로 北緯 의 곽조(郭祚)가 있다. [20]
      • 否認  : 王陵 의 누이

各州 [ 編輯 ]

  1. 《三國志》36卷 蜀黍 第6 蝗蟲
  2. 《三國志》9卷 魏書 第9 조진
  3. 御患(魚?), 《 偉略 》 ; 配送地 主席, 《三國志》44卷 蜀黍 第14 剛柔에서 引用
  4. 抛한현이 아닌 부한현이라 發音한다. 耳峴 主席, 《 後漢書 》87卷 列傳 第77 西江 無益원檢(無?爰劒)
  5. 《三國志》35卷 蜀黍 第5 諸葛亮
  6. 《三國志》45卷 蜀黍 第15 양희
  7. 《三國志》40卷 蜀黍 第10 위연
  8. 습착치 , 《 韓進春秋 》 ; 配送地 主席, 《三國志》35卷 蜀黍 第5 諸葛亮에서 引用
  9. 陳書 》1卷 提起 第1 古朝鮮第 司馬懿
  10. 王鍼(王沈), 《魏書》 ; 配送地 主席, 《三國志》3卷 魏書 第3 命題 造詣에서 引用
  11. 《三國志集解》에 따르면 江天(彊川)
  12. 《三國志》9卷 魏書 第9 하후上 自現
  13. 華陽局地 》7卷 유후周知의 演戱 9年은 傲氣이다. 《三國志》 곽回轉과 강유전을 따른다.
  14. 아하, 그리고 小科라는 別個의 人物일 수도 있다.
  15. 《三國志》22卷 魏書 第22 進軍 姿態
  16. 《三國志》28卷 魏書 第26 王陵
  17. 《세어》(世語) ; 配送地 主席, 《三國志》26卷 魏書 第26 곽會에서 引用
  18. 《郭氏步》(郭氏譜) ; 配送地 主席, 《三國志》26卷 魏書 第26 곽會에서 引用
  19. 《賑濟供饌》(晉諸公贊) ; 配送地 主席, 《三國志》26卷 魏書 第26 곽會에서 引用
  20. 魏書 》64卷 列傳 第52 곽조

參考 文獻 [ 編輯 ]

  • 三國志 》26卷 魏書 第26 萬全犬藿田(滿田牽郭傳) 곽回戰
  • 《三國志》1卷 魏書 第1 無祭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