怪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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怪量 (?良, ? ~ ?)은 後漢 末의 政治家로, 自由 (子柔)이며, 형주(荊州) 南軍(南郡) 重露現(中盧縣) 사람이다.

生涯 [ 編輯 ]

草平 (初平) 元年( 190年 ), 형주에서 蹤跡(宗賊)이라는 盜賊이 날뛰어 百姓들을 괴롭혔다. 형주自社(荊州刺史) 遊標 (劉表)는 怪量 · 怪月 (?越) · 菜某 (蔡瑁)를 찾아가 蹤跡을 鎭壓할 方案을 물었는데, 怪量은 仁義(仁義)에 따라 行動하여 軍士를 모으면 된다고 하였고 怪月은 盜賊들을 꾀어내어 사로잡아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유표는 怪月의 意見을 採擇하였고, 怪月로 하여금 盜賊들을 꾀어내어 죽이게 하였다.

後날, 怪量은 吏部尙書(吏部尙書)에 任命되었다. 아들 괴균(?鈞)은 南陽태수(南陽太守)를 지냈고, 괴균의 딸은 司馬炎 (司馬炎)의 側室이 되었다. [1]

《三國志演義》 속 怪量 [ 編輯 ]

아주 賢明하고 天文, 地理에 밝은 사람이자 忠臣으로 描寫되었으며, 怪月의 刑으로 登場한다. 孫堅 (孫堅)李 유표를 攻擊하자 황조 를 先鋒으로 세워 막게 했으나, 황조는 孫堅에게 졌다. 怪量은 袁紹에게 援軍을 請하기를 諫言했고, 유표는 이를 듣지 않고 菜某 로 맞서게 했다가 져서 襄陽性이 包圍되었다. 다시 遊標가 助言을 請하자, 怪量은 天文이 孫堅에게 不利한 것을 보고 다시 袁紹에게 援軍을 請하도록 했다. 이를 傳할 人物로 指目된 將軍 女工에게 孫堅의 包圍를 뚫을 計策을 알려 주었는데, 女工을 追擊하다가 이 策略에 걸려 죽은 게 손犬이어서 유표는 危機를 벗어났다. 以後 怪量은 孫堅의 屍體와 皇祖를 바꾸자는 江東側의 提案을 拒絶하자고 提案했으나 유표는 듣지 않았다.

以後 더는 登場하지 않으며, 怪月이 遊標가 積勞 (?盧)를 타지 못하도록 奸黠 때 怪量이 自身과 더불어 말을 알아보는 眼目을 가졌다고 이야기한다. 이때 怪月이 怪量을 線型이라고 부른 것을 보아 이때 이미 죽었을 것으로 推測된다.

怪量의 親族關係 [ 編輯 ]

各州 [ 編輯 ]

  1. 《진양秋(晉陽秋)》. 時期上 괴균은 위에서 任命된 것으로 보이며, 怪量은 後漢인지 위인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