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後漢)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왕이 (王異, ? ~ ?)는 中國 後漢末 時代의 人物로 조앙 의 아내이다. 洋酒 天壽群 사람으로, 조앙과의 사이에서 아들 繰越(趙月), 딸 造營(趙英)을 낳았다. 《 三國志 》에서 登場하는 女性 中 唯一하게 戰鬪에 參加한 女性이다.

男便 조앙이 强盜 縣令이 되었을 때 왕이_ 서현에 살고 있었다. 이때 같은 洞네의 量雙(梁雙)李 叛亂을 일으켜 조앙과 왕이의 아들 둘을 죽였다. 왕이_ 처음에 自殺하려 했으나 딸 造營(當時 6歲)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고 汚物을 넣은 삼베옷을 입고 穀氣를 끊어 깡말라졌다. 以後에 양쌍이 軍 長官과 和解해 捕虜로 잡혀 있던 왕이와 조영은 풀려났다.

建安 年間(196年 ~ 220年) 中盤에 조앙이 참군사(參軍事)에 就任하여 家族이 奇聲으로 移住했다.

建安 18年(213年) 마초 가 寄顯을 攻擊하자( 寄顯 戰鬪 ) 왕이_ 宮受容 팔찌를 끼고 나서 몸소 싸웠으며, 裝身具나 奢侈品을 兵士들에게 賞으로 나눠주어 士氣를 높였다. 8個月에 이르는 마초의 猛攻에 城 안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自社 胃腔 은 마초에게 和議를 請했다. 조앙과 兩部 가 胃腔에게 降伏에 反對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조앙은 歸家해서 아내에게 그 일을 말했다. 그러자 왕이_ "( 下後燕 의) 救援이 가까이 오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兵士를 鼓舞해서 節槪를 다하고 죽지, 降伏은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앙은 胃腔을 다시 挽留하러 갔지만, 이미 胃腔은 마초에게 降伏한 뒤였다.

마초는 胃腔의 降伏을 받아들인 뒤, 約束을 어기고 胃腔을 죽였다. 同時에 조앙의 아들 繰越을 人質로 잡아갔다. 마초는 조앙을 쓰고 싶었지만 信賴하지 못했는데, 때마침 마초의 아내가 왕이의 評判을 듣고 알고 있었기에 왕이를 宴會에 招待했다. 이것을 機會로 왕이_ 마초의 아내와 親해졌고, 마초가 조앙을 信賴하게 되었다.

養父가 魯省에서 講書와 함께 叛亂을 일으키고, 마초가 이를 鎭壓하러 出陣했다. 조앙은 養父에게 내應하기로 해놓고 왕이에게 人質로 잡혀간 兆月은 어떻게 해야할지 물었다. 왕이_ "忠義를 세우고 軍部의 恥辱을 씻기 위해서는 自身의 목을 잃어도 別 것이 아닐진대, 아들 하나쯤이 무엇입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조앙은 洋館 等과 함께 養父에게 內應하여 마초의 妻子息들을 죽였고, 갈 곳을 잃은 마초는 韓中 으로 달아나 長老 에게 依支하게 되었다.

以後 長老의 支援을 얻은 마초가 復讐를 하기 위해 돌아왔으나 왕이_ 男便과 함께 기산에 틀어박혀 싸웠다. 3日이 經過하자 장합 이 이끄는 救援軍이 到着했고, 마초는 그때까지 人質로 잡혀 있던 繰越을 죽였다.

小說 《 三國志演義 》에서는 이름 없이 "王氏"(王氏)라고만 言及되며, 聯의 第64火에 登場한다. 實際 歷史에 記錄된 策略家로서의 面貌는 一切 찾아볼 수 없다.

參考 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