房덕공
(龐德公, ? ~ ?)은
後漢
末期의
恩師
로,
형주
南軍
양양현(襄陽縣) 사람이다.
私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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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産(峴山) 南쪽에 살았으며, 夫婦가 서로 손님을 對하듯이 尊重하며 지냈다.
형주
自社
遊標
가 여러 次例 불러들였으나 듣지 않았고, 結局 遊標가 直接 찾아가 방덕공에게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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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自己 몸을 保全하는 것보다는 天下를 保全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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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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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덕공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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紅穀(鴻鵠)의 둥지는 빽빽한 수풀 위에 있는데, 날이 저물어야 겨우 到着합니다. 원打(??)의 굴은 깊은 못 아래에 있는데, 저녁이 되어서야 잠이 듭니다. 나아갔다가 사리고 가다가 멈추는 것 또한 사람의 둥지라 하겠습니다. 各其 그 둥지와 굴을 얻으면 될 것이지, 天下를 保全할 必要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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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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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妻子와 함께 밭을 갈았는데, 遊標가 이를 가리켜 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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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께서는 힘들게 밭을 일구며 貫祿 받기를 마다하시는데, 後世의 子孫에게 무엇을 남기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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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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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덕공이 答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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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上 사람들은 그렇게 하여 危險을 남기는데, 이렇게 홀로 있으니 便安함을 얻게 됩니다. 남기는 것이 다르기는 하나, 남길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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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표는 歎息하며 물러갔다.
後날 방덕功은 妻子를 이끌고 藥草를 캐러 綠門山(鹿門山)에 올라갔는데, 그 後 돌아오지 않았다.
者 論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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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四庫全書
》 齒林(?林) 便에서 방덕共의 者를
上場
(尙長)이라고 하였는데, 《
宋書
》를 典據로 들었다. 하지만 宋書의 該當 部分은 방덕共의 者를 '上場'이라고 直接的으로 言及하지 않았으며, 原文의 '上場'은 後漢의 恩師 上場(向長)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史臣曰:襄陽龐公謂劉表曰:「若使周公與管、蔡處茅屋之下,食藜藿之羹,豈有若斯之難。」夫天倫由子,共氣分形,寵愛之分雖同,富貴之情則異也。追味尙長之言,以爲太息。- 《宋書》 卷68
使臣이 말한다. 襄陽 사람 방공이 遊標에게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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住公과 管叔·채숙이 草家집에 살며 거친 飮食을 먹었더라면, 어찌 이런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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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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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抵 天倫을 타고나는 자는 기는 같으나 모습이 다르며, 寵愛하는 바가 같더라도 富貴함은 서로 다르다.
上場
(尙長)의 말을 곱씹어보니, 한숨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