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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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 (勝緣)

정봉 (丁奉, ? ~ 271年 )은 中國 三國時代 吳나라 의 장수이며 는 勝緣(承淵)이다. 洋酒 餘强軍 안풍현 사람 이다.

生涯 [ 編輯 ]

어려서부터 勇敢하여 所長(小將)李 되어 감녕 , 육손 , 班長 等에게 屬했다. 數次例 征伐에 따라가 싸움마다 恒常 軍隊의 으뜸이 되었다. 每番 적 장수를 베고 敵의 旗발을 뽑았고, 自身도 傷處를 입었다. 漸次 昇進하여 편장군이 되었다.

젊어서부터 勇猛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하나, 仔細한 活躍은 傳하지 않는다. 손량 (孫亮)이 卽位한 後 關東將軍(冠東將軍)이 되었다.

252年 12月 위나라 에서 大軍을 일으켜 동흥(東興)을 攻擊해 오자, 諸葛角 (諸葛恪)을 따라 參戰하여 위軍 陣營을 奇襲하러 나섰다. 位軍은 잔치를 벌이면서 防備를 疏忽히 했기 때문에 急襲에 成功하여 한種 (韓綜)李 이끄는 先鋒部隊를 무찌르고 한種 을 베는 功을 세웠다. 이 敗北로 氣가 꺾인 位軍은 더 以上 進擊하지 못하고 後退했다.

255年 毌丘儉 (?丘儉)의 叛亂에 加擔했던 門欠 (文欽)李 위軍에게 敗하여 吳나라로 쫓겨 오자, 頂峯을 護衛(虎威)將軍으로 삼고 손준(孫峻)을 따라 壽春(壽春)에 가 맞이하고, 敵의 追擊軍과 固定(高亭)에서 싸웠다. 정봉이 말을 타고 긴 槍(矛)을 들고 敵의 陣中에 突入하여, 數百名의 머리를 베고, 軍紀(軍器)를 鹵獲했다. 安風後(安豊侯)에 封해졌다. 257年 第褐炭 (諸葛誕)李 壽春에서 反旗를 들었을 때도 參戰하여 功을 세웠다.

吳나라의 實權을 잡고 있던 손鍼 (孫?)은 총명한 資質을 지니고 있던 손량 (孫亮)李 長成하면서 國史에 意欲을 보이자 後날을 두려워하여 照會에 나오지 않았다. 손량 亦是 손鍼 을 눈엣가시로 보았기에 除去하려 했으나, 計劃이 새어나가 도리어 廢位당하고 會計王(會稽王)으로 降等되었다. 뒤이어 皇帝로 推戴된 손휴 (孫休) 亦是 손鍼 을 除去하려 했는데, 손휴 와 함께 擧事를 謀議하던 菖蒲 (張布)가 頂峯을 推薦하여 손鍼 除去에 加擔하게 되었다. 손鍼 이 除去된 後 大將軍으로 昇進하였다.

263年 位君의 攻擊으로 困境에 處한 蜀나라 가 援兵을 要請하자, 정봉은 命을 받고 蜀漢을 救援하기 위해 壽春부터 成道에 이르기까지 攻擊을 始作했으나 정봉의 部隊가 成道에 到着했을 때는 이미 촉나라가 滅亡한 後였기 때문에 정봉은 回軍했다. 268年 11月에는 第褐炭 의 아들 제갈정 (諸葛?)과 함께 합비를 攻擊했으나, 秦나라 의 餘音王(汝陰王) 사마준(司馬駿)에게 격파당했다. 269年 에는 哭羊(穀陽)을, 270年 1月에는 瓦溝(渦口)를 攻擊했으나 모두 失敗했다. 정봉은 末年에 교만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 때문에 頂峯을 못마땅하게 본 孫皓 (孫皓)는 그의 家族들을 林泉(臨川)으로 이주시켰다.

271年 12月, 世上을 떠났다.

《三國志演義》에서의 정봉 [ 編輯 ]

演義에서는 孫權 (孫權)李 손책 (孫策)의 뒤를 이은 後 人材를 모을 때 登用된 것으로 나온다. 以後 赤壁 大戰 , 합비 攻擊, 伊陵 戰鬪 等에 參戰하여 功을 세웠으며, 조비 (曹丕)가 攻擊해왔을 때 匠料 (張遼)를 화살로 쏴서 죽였다. 그 外에 東南風을 부르던 諸葛亮 (諸葛亮)이나 江東에서 兄週로 빠져나가던 劉備 (劉備)를 뒤쫓기도 한다. 그러나 實際로 匠料 는 정봉에게 射殺된 것이 아니라 病으로 죽었으며 정봉이 蜀漢의 마지막 瞬間에 蜀漢을 도와주러 왔다가 蜀漢이 滅亡해서 回軍한 것을 羅貫中 (羅貫中)李 높게 評價했으므로 羅貫中 은 그 補償으로 三國志 演義에서 정봉이 匠料 를 射殺한 것으로 描寫해줬다. [1]

정봉의 親族 關係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三國志演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