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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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순 (高順, ? ~ 199年 2月 7日(198年 陰曆 12月))은 中國 後漢 말의 武裝이다.

生涯 [ 編輯 ]

이름 고순(高順)
時代 後漢
生沒 ? ~ 建安 3年( 198年 ) 陰曆 12月
別名
本館 · 出身
官職 都督(都督)〔呂布〕
→ 中郞將(中郞將)〔呂布〕
作爲
所屬 呂布

고순은 呂布 (呂布)의 部長으로, 그에 關한 記錄은 《 後漢書 》(後漢書)의 濾胞展(呂布傳), 《 三國志 》(三?志) 餘圃田의 기타, 兩쪽 冊에서 註釋을 모은 《 英雄機 》(英雄記), 《 舊株春秋 》(九州春秋) 等에 散在되어 있다.

建安 (建安) 元年( 196年 ) 6月, 濾胞가 하비(下?)를 劉備 (劉備)에게서 빼앗은 지 얼마 안 돼, 濾胞의 部長 學猛 (?萌)李 叛亂을 일으켰다. [1] 이때 都督(都督) [2] 고순은 自身의 兵營(兵?)에 濾胞를 데려와 保護하고, 재빨리 學猛毅 部隊에 화살로 一齊射擊을 퍼부어 叛亂을 鎭壓했다.

建安 2年( 197年 ) 開陽(開陽)에 駐屯 中인 將牌 (臧覇)가 낭야上(琅邪相) 訴件 (蕭建)을 攻擊해 擊破하고 거(?)를 占領하자, 그 時期 이미 小件을 我軍으로 끌여들였던 濾胞는 憤怒하여 將牌를 攻擊하였다. [3] 고순은 “앉아서 기다리시면 將牌는 降伏할 것입니다.”라는 忠告를 呂布에게 進言하였으나, 濾胞는 이를 듣지 않고 將牌를 攻擊하지만, 그의 堅固한 成果 抵抗에 부딪혀 兵力만 消耗한 채 하비로 돌아왔다. 結局 얼마 後에 濾胞와 將牌는 서로 和解했다.

建安 3年( 198年 )9月에는 中郞將(中郞將)으로서 匠料 (張遼)를 이끌고, 劉備,關羽,裝備가 지키고 있던 牌性(沛城)을 攻掠해 劉備의 妻子를 사로잡았다. 그러고는 劉備를 救援하기 위해 달려온 曹操 (曹操)의 部長 하후돈 (夏侯惇)과 싸워, 그도 擊破했다.

그러나 이런 고순의 눈부신 活躍도 헛되어 얼마 後 濾胞는 下批性 안으로 쫓겨 들어가 다음해 2月 最終的으로 曹操에게 敗北했다. 고순은 呂布, 진궁 (陳宮)과 함께 사로잡혔고 [4] , 曹操의 命令에 依해 絞首刑에 處해졌다. 그의 需給은 허도(許都)의 市場에 梟首 當한 後 埋葬되었다.

人物像 [ 編輯 ]

고순의 인물됨은 淸廉潔白하고 威嚴이 있으며, 寡默하여 一切 술을 마시지 않고, 어떤 膳物이나 賂物도 받지 않았다. 部下는 700名 程度였으나, 勇敢하기에 1,000名이라고 稱했고, 甲옷과 投球는 언제나 精鍊시켰다.

고순은 駐軍人 濾胞에 對한 忠誠心이 두터워, 자주 그에게 다음과 같이 諫言하였다.

大抵 집과 國家가 亡하게 되더라도, 忠臣과 지혜로운 者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禍根이 되는 것입니다. 將軍께서는 行動에 臨하실 때 깊이 생각지 않으시며 금세 기꺼워하여 잘못된 말씀을 하시니, 그 失手가 헤아릴 수 없을 程度입니다.

濾胞는 고순의 舞踊(武勇)과 忠誠心을 認定하고 있었으나, 고순을 싫어하여 學猛毅 叛亂 事件 後에는 그 傾向이 더 심해졌다. 濾胞는 胃속 (魏續)과 姻戚 關係를 맺고 있었기에 고순이 指揮하던 兵士를 모두 빼앗아 胃속에게 주었고, 戰爭이 일어나면 일부러 고순에게 胃속 麾下의 兵士를 指揮시켰으나 고순은 平生 怨望을 품지 않았다.

以上이 主로 《英雄機》에서 描寫된 고순의 人物像이다. 고순은 曹操의 宿敵이던 濾胞의 部長으로서 언제나 曹操軍에게 여러番 쓴盞을 마시게 만들었던 人物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魏나라의 王粲 等이 編纂한 것으로 보이는 《英雄機》에서도 고순의 舞踊科 人格에 關聯해서 極讚을 아끼지 않았다.

그밖에도 學猛毅 叛亂 等도 原因이 있었지만, 고순은 振窮과 사이가 나빴다. 下批性 攻防戰에서 濾胞는 振窮과 고순에게 城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兵士를 이끌고 나가 曹操의 補給路를 끊으려고 試圖했으나, 아내로부터 고순과 진궁의 不和를 指摘받아 出擊을 斷念했다.

《三國志演義》 속의 고순 [ 編輯 ]

三國志演義 》에서는 興坪 (興平) 元年( 194年 )에 濾胞가 曹操에게서 連奏(?州)을 빼앗는 場面에서 첫 登場한다. 卽 고순은 팔健壯 (八健將)의 一員이 아니다. 福羊(?陽)에서 曹操軍과의 첫 戰鬪에서는 曹操를 거의 한걸음 距離까지 쫓았으나, 曹操의 部長 前衛 (典韋)에게 擊退되었다. 그 後 曹操의 反擊으로 濾胞가 演奏에서 쫓겨나갈 때 濾胞의 家族을 護衛했다.

濾胞가 劉備 不在中을 노려 西周(徐州)을 빼앗을 때 고순은 濾胞의 命令으로 元述과 對峙하던 劉備軍을 背後에서 攻擊해 그들을 敗走시켰다. 고순은 元述의 部長 機齡 (紀靈)에게 元述이 呂布에게 約束했던 兵糧을 要求했으나, 그 場所에서 받지 못했다. 元述이 濾胞를 攻擊하던 時期에는 고순은 元述 側의 交遊 (橋?)君과 對峙해 이들을 擊破했다.

小敗省에 있을 때 曹操軍의 하후돈과 一對一 對決을 펼쳐 數十 合을 겨루었으나 結局 逃走했고, 이때 고순의 部下 造成 (曹性)李 하후돈의 눈을 화살로 쏘아 맞추었기에 窮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後 君을 되돌려 하후돈君을 擊破했다.

하비에서 濾胞와 함께 붙잡힐 때 고순은 一切 抵抗하지 않고, 목숨을 求乞하지도 않고 濾胞를 따라 죽겠다고 말해 그 말대로 斬首시켰다.

各州 [ 編輯 ]

  1. 怨讐 (袁術)과 濾胞의 參謀였던 진궁 (陳宮)李 背後에서 劃策했다고도 한다.
  2. 《三國志》 濾胞展 主席 《英雄機》, 卽 《後漢書》 濾胞前에 따르면, 建安 2年( 197年 )에 독葬(督將)의 地位에 있었다고 한다.
  3. 事實 將牌는 濾胞의 部下는 아니었고, 하나의 獨立 勢力의 指導者였다. 또한 《後漢書》 濾胞前에 따르면, 呂布에게 約束한 上納金을 將牌가 보내주지 않은 것이 原因이었다고 한다.
  4. 《後漢書》 濾胞前에 따르면, 振窮과 함께 후성 (侯成)의 손에 依해 포박당했다.

參考 文獻 [ 編輯 ]

  • 陳?『三?志』魏書第七「呂布?」(和?:井波律子?今鷹?『三?志 正史 2』ちくま?芸文庫、1993年)
  • 同上、魏書第一「武帝紀」(和?:今鷹??井波律子『三?志 正史 1』ちくま?芸文庫、1992年)
  • 同上、蜀書第二「先主?」(和?:井波律子『三?志 正史 5』ちくま?芸文庫、1993年)
  • 范曄『後漢書』列?第六十五「呂布?」
  • 盧弼『三?志集解』(古籍出版社、1957年)
  • 『三?演義』(和?:立間祥介『三?志演義 上』平凡社、1972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