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第5共和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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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大韓民國

1981年 ~ 1988年
標語 正義社會具現
國家 愛國歌
수도 서울特別市
政治
政治體制 大統領制 共和政 (事實上 軍部 獨裁 )
大統領 全斗煥
立法府 大韓民國 國會
歷史
 ?  9次 改正
6月 民主 抗爭
? 6·29 宣言
? 憲法 改正
1980年 10月 27日
1987年 6月 29日
지리
面積 100,210 km 2 (108位)
內水面 比率 0.3 %
人文
公用語 韓國語
人口
1987年 어림 4189萬名
經濟
通話 大韓民國 원

大韓民國 第5共和國 (大韓民國第五共和國)은 1979年 12·12 軍事 叛亂 1980年 5·17 非常戒嚴 全國擴大 [1] 以後 憲法 改正을 통해 誕生한 大韓民國의 다섯 番째 共和國이다. 1981年 부터 1987年 까지 存續했다.

10·26 事件 으로 새로 登場한 이른바 新軍部 勢力은 1979年 12月 12日에 兵力을 動員하여 軍事權을 차지했고 , 1980年 5月 17日 24時를 期해 非常戒嚴全國擴大 措置로 政權을 掌握했다. 新軍部는 이에 抗拒한 光州 民主化 運動 을 비롯한 國民들의 民主化 要求를 武力으로 鎭壓하고, 憲法을 改正하여 第5共和國 憲法을 公布했다. 第5共和國의 大統領으로는 第11代 全斗煥 이 選出되었으며, 正義社會具現, 福祉社會建設, 先進祖國創造 等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1980年代 의 時代相을 代表하는 政權으로 여겨지고 있다.

第5共和國은 第4共和國 과의 差別性을 浮刻시키는 데 注力했다. 第5共和國은 永久 執權이 可能했던 第4共和國의 6年 連任制 代身 7年 單任制를 固守했으며, 通禁 解除 및 校服 自律化 等의 宥和 措置를 取했다. 全斗煥 政權은 第3共和國, 第4共和國의 色滯를 지우기 위해 朴正熙 前 大統領의 追慕式을 8年동안 禁止시키고 過去 공화당 出身의 金鍾泌 等을 不正蓄財 嫌疑로 逮捕, 海外로 出國시키는 等 過去 3共, 4共 時節과의 完全한 斷絶을 爲한 措置를 取했다. 以後 6月 民主 抗爭 6.29宣言 을 통하여 第5共和國은 消滅하였고 改憲 으로, 國民이 直接 뽑은 選擧 를 통해 選出된 盧泰愚 大統領의 就任, 第6共和國 의 誕生으로 이어졌다.

被害者 [ 編輯 ]

被害者는 엄청나게 많지만, 그中 代表的인 朴鍾哲 (1964年 4月 1日 ~ 1987年 1月 14日)은 拷問致死 事件으로 夭折하였고, 李韓烈 (1966年 8月 29日 ~ 1987年 7月 5日)은 6月 9日 示威途中 警察이 쏜 催淚彈에 맞아 死境을 헤메다 夭折하였다.

成立 背景 [ 編輯 ]

1979年 10月 26日 朴正熙 大統領이 死亡한 以後 憲法에 따라 國務總理 최규하 가 大統領의 權限을 代行하였으나 곧 全斗煥 , 盧泰愚 를 中心으로 하는 新軍部 勢力이 12·12 쿠데타 로 實權을 掌握했다. 1980年 3月 保安司 에서는 情報處를 復活하고, 民主化 輿論을 잠재우고 軍部가 政治에 나서는 것을 正當化하는 輿論을 造成하기 위해 K工作計劃 을 實施했다. 1980年 4月 保安司令官 전두환은 中央情報部長 署理가 되어 國內의 모든 情報 機關을 掌握했다.

1980年 5月 新軍部 勢力( 하나회 )은 執權 시나리오에 따라 非常戒嚴 全國擴大 措置 를 내리고, 光州市民들을 暴力的으로 鎭壓한 뒤 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를 設置해 政權을 掌握했다. 1980年 9月 1日 통일주체국민회의 를 主體로 實施된 間選制에 따라 全斗煥이 第11代 大統領에 當選되었다. 10月 27日에는 任期 7年의 單任制 大統領制 等을 骨子로 하는 第8次 憲法 改正을 했으며, 1981年 2月25日 大統領 選擧人團에 依해 全斗煥 李 大統領으로 選出되었다.

政治 [ 編輯 ]

11代 大統領 에 就任한 全斗煥 朴正熙 政權을 全面 否定했다. 朴正熙와의 差別性을 浮刻시키기 위하여 그는 憲法 改正 過程에서 "5·16 革命精神"에 關聯된 事項을 削除했다. 또한 하나회 系列에 否定的인 共和黨 實勢들을 權力型 非理 嫌疑로 엮어서 除去하면서 朴正熙의 時代를 不正과 腐敗, 非理의 時代로 規定하고, 第5共和國은 '正義社會具現'을 追求한다고 宣言했다. [2] 全斗煥 政權은 더 나아가 朴正熙 前 大統領에 對한 公式的인 追慕式을 禁止시켰고, 公式 追悼式은 民主化가 된 1987年에야 다시 再開될 수 있었다. 1980年부터 1986年까지의 追悼式은 朴正熙의 子女인 朴槿惠 等이 家族끼리 祭祀를 지내는 것으로 갈음했다.

第5共和國 政權은 形式 上으로는 民主主義를 志向하였다. 一旦 大統領의 任期를 6年에서 7年으로 늘린 代身 永久執權이 可能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依한 連任制 代身 重任 制限을 基本으로 하는 大統領 選擧人團을 通한 單任制를 擇했다. 또한 大統領의 權限 中에 法官을 임명할 수 있는 權限과 國會議員을 임명하게 할 수 있게 하는 部分을 削除했으며, 國會의 權力을 强化하였다. 維新體制 當時에는 野黨人士의 大選 出馬가 事實上 禁止되어 있었으나 (名目 上으로는 許容했으나 政府機關이 이를 妨害했기 때문에 禁止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第5共和國은 野圈의 出馬를 許容하였다. 그러나 政權의 維持를 위한 確固한 保障을 위해, 第4共和國 통일주체국민회의 를 變形시켜 새롭게 大統領 選擧人團 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제5공화국은 維新體制처럼 間選制를 固守했다.

그럼에도 國家의 社會福祉 義務에 對한 規定을 設置하고(헌법 第32條), 經濟 秩序에 對한 公法的 規制를 擴大했다. 基本權에 對해서도 大體的으로 第3共和國의 條項 水準으로 回歸했고, 幸福追求權(憲法 第9條)이나 緣坐制의 禁止(憲法 第12條 3項), 私生活의 保護(憲法 第16條), 環境權(憲法 第33條) 等의 條項도 新設됐다. 憲法 改正에는 國民 投票 를 통한 改正만 可能하도록 規定해 節次를 一元化시켰다(헌법 第131條).

第5共和國은 金永三 , 金大中 等을 비롯한 主要 野黨 人士들의 政治活動을 禁止한 채 民主한국당 , 韓國國民黨 等의 이른바 官製野黨 을 내세워 政黨政治를 形式化하는 等 事實上의 1黨 獨裁 體制를 構築하였다. 國家安全企劃部 는 野黨 參與者를 미리 選別했을 뿐 아니라, 一部 運營費를 補助하고 全國區 候補들의 黨費 獻金 限度額(1億원)까지 親切하게 定해줬다. 政治規制者의 親姻戚, 친 金大中 人事, 解職 言論人 等은 公薦에서 除外하도록 嚴格히 管理하기도 했다. [3] 大選 때는 野圈의 立候補를 許容하면서도, 政府가 모든 것을 左右하는 것이 可能했다. 第5共和國은 任期 내내 政權 成立 過程에서 發生한 5·17 쿠데타 5·18 光州 民主化 運動 의 流血 鎭壓 等 正統性 없는 政權 創出 過程에 對해 在野人士들의 批判을 받았다. 1983年 5月 18日 光州 民主化 運動 3週期를 맞이하여 全斗煥 政權의 野黨人士 彈壓에 抵抗하는 意味에서 金永三 은 23日間 斷食鬪爭을 試圖했다. [4]

野黨의 突風 [ 編輯 ]

80年代 中後半 警, 政治活動 禁止에서 解除된 人士들을 中心으로 여러 政黨들이 創黨되었다. 그 가운데 1985年 民主化 人士들을 中心으로 한 宸翰민주당 이 創黨되었고, 腐敗政治人으로 몰려 政界에서 逐出되었던 舊 民主공화당 界 人士들은 新民主공화당 을 創黨하여 政治活動을 再開했다. 그 當時 大統領 全斗煥 은 12代 總選 投票 날짜를 例年과 달리 겨울인 1985年 2月 12日로 定했는데 이는 신한민주당의 創黨 날짜와 最大限 가까운 時期에 總選을 치러서 野黨 突風을 最少化하기 위한 苦肉之策이었다. 勿論 當時의 選擧制度 自體가 與黨에게 유리하게 짜여져 있어(정부는 野圈 候補로 意味 없는 候補를 내세우기도 했고, 野圈의 分裂을 助長하기도 했다) 與黨의 過半數 議席 確保는 어렵지 않았으나, 名目上의 野黨이었던 민한당과 國民黨이 밀리고 신한민주당이 第1野黨이 될 境遇에는 政局이 어떻게 돌아갈지를 壯談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當時 安企部 의 分析 結果, 신한민주당은 最大限 좋은 與件이 주어진다고 해도 12 ~ 13席을 얻는데 그치고 特히 鍾路·中區 選擧區에서는 民政黨 李鍾贊 민한당 鄭大哲 이 各各 1位와 2位로 當選, 宸翰민주당 總裁 李珉雨 는 3位로 落選할 것으로 豫想되어 전두환은 어느 程度 安心하고 있었다. 그러나 第12代 國會議員 總選擧 結果는 單純한 異變을 넘어선 '突風' 그 自體였다.

創黨한 지 不過 한 달도 채 안된 新生 政黨 신한민주당이 首都圈을 비롯한 大都市 地域에서 壓勝을 거두는 突風을 일으키며 地域區 50石과 全國區 17席을 차지하고, 特히 鍾路·中區에서 豫想을 깨고 이민우가 2位로 當選된 것이다. 當時 與黨인 民政黨이 過半數 議席을 차지했지만, 地域區에서 第1黨이었던 민정당에 全國區 議席中 2/3을 配分한 結果로 事實上 民政黨이 敗北한 選擧였고 全斗煥이 憂慮한대로 신한민주당이 第1野黨으로 急浮上하였다. 이에 전두환은 激怒하였고 잘못된 選擧 分析을 내놓은 盧信永 安企部長을 叱責한 後 事實上 更迭하였다.

野圈의 分裂 [ 編輯 ]

1986年 12月, 宸翰민주당 總裁 李珉雨 는 全斗煥 政權이 民主化 措置를 먼저 斷行할 境遇 內閣制 改憲을 受容할 수 있다는 이른바 " 李珉雨 構想 "을 發表했다. 이에 對해 兩金을 中心으로 한 大統領 直選制 改憲派가 李珉雨 構想에 對해 反撥하였고, 이철승 · 이택돈 等의 內閣制 改憲派가 이에 反駁하면서 內紛이 일어났다. 이 餘波로 宸翰민주당 에서 脫黨한 人士들이 統一民主黨 을 創黨하게 된다.

沒落 [ 編輯 ]

1987年 1月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 으로 觸發된 學生 示威에 參加했던 李韓烈 催淚彈 에 맞아 숨지자, 이에 憤怒한 市民들과 學生들에 依해 일어난 6月 抗爭 으로 全斗煥 政權은 最大의 危機를 맞게 됐다.

示威가 繼續되는 가운데 4月 13日, 政府는 '5共 憲法에 依한 大權移讓'을 骨子로 하는 '4·13 護憲措置'를 發表, 改憲 要求를 全面 否定하였다. 그러자 野圈·在野가 再結合하고 學界·宗敎界 等에서도 이에 反對하는 時局宣言·籠城이 잇달았다. 以後 5月 27日 各界를 網羅한 各種 團體가 總結集된 '民主化推進 國民運動本部'가 結成되어 '軍事統治 終熄'과 '民主政府 樹立'을 슬로건으로 臺政權鬪爭에 突入했다. 國民運動本部는 '6·10 民主化 章程大會'를 開催, 6月 抗爭의 臺幕이 올랐다.

1987年 6月 10日, 노태우는 民主正義黨 大統領 候補로 選出되었다. 하지만 같은 날 全國에서 反政府 示威가 일어났다. 이를 不法集會로 規定한 政府는 無限定한 公權力을 投入하여 源泉封鎖를 試圖했으나 서울·釜山·廣州·仁川 等 全國 18個 都市에서 大規模 示威가 일어나고 市民의 參與가 두드러졌다. 結局 전두환 大統領은 民主正義黨 大統領 候補 兼 總裁 盧泰愚 를 내세워 時局收拾方案 을 發表하게 하고, 이를 통해 第5共和國 憲法이 改正된다. 그 結果 6.29 宣言으로 인하여 7月 1日, 노태우가 第12代 大統領으로 就任하고, 1971年 以後 16年만인 1987年 12月 16日, 國民에 依한 直接選擧 形態의 大統領 選擧가 치러졌지만, 民主化 勢力의 分裂속에서 5共 主役이었던 盧泰愚 가 第13代 大統領으로 選出되었다. 1988年 2月 25日 노태우는 第13代 大統領으로 재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은 終熄됐으나 事實上 1993年까지 延長되었다.

經濟 [ 編輯 ]

1980年代 前半期에는 1960·70年代 經濟開發의 後遺症으로 外債問題가 主要 懸案으로 떠올랐고, 장영자 事件 , 명성그룹 事件, 國際그룹 解體 等 많은 問題가 表面化되었다. 그러나 80年代 中盤 以後로 政府의 緊縮政策과 國際 油價의 下落, 달러 價値의 下落, 金利의 下落 等 3低現象이 持續되어 物價가 한 자리數로 잡히고, 輸出이 好調를 보였으며, 附加價値가 높은 自動車·電子·其他 半導體 尖端産業이 活氣를 띠고 成長했다.

1986年 現代自動車 포니 엑셀 이 美國으로 輸出된 것은 우리나라가 自動車 産業에서 先進國과 어깨를 겨루게 되는 첫 信號彈이었다. 한便, 先進國의 市場開放 壓力이 높아지면서 工産品뿐만 아니라 農畜産物도 輸入自由化의 幅이 擴大되어 1986年 基準 輸入自由化率은 91.5%에 到達했으며, 外國資本의 投資比率度 漸次 擴大하여 100%까지 許容하였다. 政府의 市場開放政策은 大企業에는 有利한 環境을 提供하였으나, 값싼 外國産 弄.畜産物의 輸入으로 農村經濟는 打擊을 입었다. 糧穀自給率은 1970年의 86%에서 1985年에는 48.4%로 낮아졌다. 그리하여 韓國人의 밥床에는 外國産 弄.畜産物이 큰 比重을 차지하게 되었다.

10大 大企業이 國民總生産에서 차지하는 比率은 1979年의 33%에서 1989年에는 54%로 增加하고, 30大 大企業의 系列企業은 1970年 126個, 1979年 429個, 1989年 513個로 늘어났다. 이와 對照的으로 農村人口는 急速히 減少하고, 離農民의 大多數는 都市貧民層을 形成하여 막勞動에 從事하거나 産業勞動者 或은 서비스業으로 轉換하였다. 輸出好調에 힘입어 國民總生産이 急速히 成長하여 每年 平均 成長率이 10% 內外를 維持하게 되었으며, 1人當 GNP가 1987年 基準 3千 달러를 넘어서서 中進國에서 先進國으로 넘어가는 門턱에 서게 되었다. 1980年부터 컬러 TV 放送이 始作된 것도 經濟成長의 한 徵標였다.

쌀 輸入과 統一벼 勸奬 政策의 中斷 [ 編輯 ]

軍士 쿠데타 市民 虐殺 로 政權을 잡은 전두환 政府는 民心 을 달래기 위해 220萬 톤이 넘는 을 輸入한다. [5] 이듬해부터 統一벼 系列에 對한 勸奬 政策은 事實上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1984年에는 公式的으로 農民의 自由로운 品種 選擇을 돕게 된다. [5] 그렇게 1989年 무렵에 統一벼 系列은 事實上 우리나라의 農土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5]

外交 [ 編輯 ]

反共의 旗幟 아래 한·美·日 三角同盟 을 推進했다. [6] 第5共和國은 前 政權에 이어 親美(親美) 一邊倒의 政策을 推進하여, 韓國에 있어서 美國은 血盟關係라고 指稱될 만큼 傳統的인 友邦이었다. 이러한 政策은 學生들의 反美主義 運動을 助長한 側面도 있다. 5?18 光州 民主化 運動 에 對한 美國의 介入 또는 幇助 疑惑은 이 時期 學生運動의 한 테마였다. 日本과는 日本의 歷史敎科書 問題 , 在日韓國人 指紋捺印制度, 日本의 對北 接近 等 主로 日本이 惹起시킨 各種의 懸案 때문에 葛藤을 빚었다. 韓國은 北韓에 對해 民族和合民主統一方案과 南北 頂上會談을 提議하였으나, 北韓은 아웅산墓域 爆彈테러事件 , 대한항공 858篇 爆破事件 을 일으켰다. 西유럽과는 政治的 이슈가 크지 않았고, 經濟·通商 部門에 集中하였다.

對北 關係 [ 編輯 ]

南韓과 北韓은 各各 統一方案을 提示했으나 모두 自身에 유리한 條件을 내세운 것으로, 結局 宣傳的인 意味를 갖는 데 지나지 않았다. 北韓은 南韓의 要求를 받아들여 1985年 9月 20日 雙方 151名의 離散家族이 板門店을 넘어 3泊 4日間 서울과 平壤을 訪問했다. 1983年 10月 北韓의 테러 에 依해 버마 郎君의 아웅산 墓域에서 副總理 等 17名이 死亡하고 14名이 負傷하는 不祥事가 일어났다. 아웅산 테러는 大統領과 政府閣僚들을 겨냥한 北의 對政府테러였다는 點에서 매우 크게 다루어졌으며 實際 死亡者도 發生했다. 또한, 1987年 11月에 일어난 대한항공 858篇 爆破事件 은 北韓이 88 서울올림픽 을 妨害하기 위해 일으킨 對民테러라는 點에서 매우 크게 다루어졌다.

전두환은 執權 初期 政權 安定을 위해 1982年 北韓과 '暫定協定'을 맺고 非政治的, 非軍事的 交流부터 漸進的으로 하자는 ' 民族和合民主統一方案 '을 提議했다. 歷代 政權으로선 처음으로 南北頂上會談을 提議하기도 했다. [7]

1983年 10月 9日 午前 10時 23分, 버마의 首都 郎君 中心地의 아웅산 墓所에서 爆發이 일어났다. 서석준 副總理, 李範奭 外務部 長官, 김동휘 商工部 長官, 서상철 동력자원부 長官, 함병춘 靑瓦臺 祕書室長 等 長官級 5名이 목숨을 잃고 여기에 김재익 靑瓦臺 經濟首席, 심상우 민정당 總裁祕書室長, 이중현 <東亞日報> 記者 等 민·관의 犧牲者가 21名, 負傷者가 46名에 達하는 大慘事가 빚어졌다. 以後 軍 內部에서 北韓에 武力으로 報復해야 한다는 意見이 나왔지만, 전두환 大統領은 武力 報復 計劃을 承認하지 않았다. 그리고 10月 13日 서울 汝矣島廣場에서 殉國 外交使節 合同 國民葬을 치르고, 20日에는 大統領 特別談話에서 "이것이 우리의 平和 意志와 同族愛가 忍耐할 수 있는 最後의 忍耐이며, 다시 挑發이 있을 境遇에는 반드시 膺懲할 것이다"라고 發表했다. 事實上 武力 報復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對內外에 밝힌 것이다. [8] [9]

1984年 9月 初 南쪽에 發生한 洪水로 全國에서 190餘名이 生命을 잃고 財産被害도 1,300億원이 넘는 水災가 發生하자 北韓은 9月 8日 朝鮮赤十字會 이름으로 通知文을 보내 쌀 5萬石(7千200t), 千 50萬m, 시멘트 10萬t 및 醫藥品 支援을 提案했다. 當時 전두환 大統領은 1年 前 버마(미얀마)에서 北韓이 저지른 아웅산墓所 爆彈 테러事件에도 不拘하고 北側의 提案을 電擊 受容했다. 北側의 食糧支援 以後 南北 兩側은 赤十字會談 本會談을 가진 데 이어 1985年에는 離散家族 故鄕訪問 및 藝術公演團의 交換訪問을 실현시켰고 南北間 最初의 經濟會談度 始作했다. 人道主義로 包裝된 北側의 戰略的 提案이었던 食糧支援을 南側이 受容함으로써 南北關係의 물꼬를 튼 것이다. [10]

1985年 전두환 大統領은 北韓에 南北頂上會談을 提議했고, 北韓 亦是 같은해 9月 虛談 祕密特使를 서울에 特派해 전두환 大統領과의 頂上會談 論議를 打診했다. [11] 전두환은 虛談 密使와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의 말을 傳해듣고 다음과 같이 答했다.

김일성 主席께서 말씀하신 內容을 傾聽해보니 內容 하나 하나가 내 생각과 거의 同一합니다. 金 主席께서는 公開的으로 말씀이 계셨지만 40年 前에는 民族解放 鬪爭으로, 그리고 平生을 祖國과 民族을 위해서 애써오신 忠情이 넘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南北韓 最高責任者들의 會談이 이와 같은 雰圍氣라고 할 것 같으면 時期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하는 것도 나의 意見입니다. [12]

第5共和國 沒落 後 1987年 11月 29日 에는 北韓 工作員 김승일, 김현희가 대한항공 858篇 爆破 事件 을 일으키기도 했다.

韓美 關係 [ 編輯 ]

第5共和國은 前 政權에 이어 親美(親美) 一邊倒의 政策을 推進하여, 韓國에 있어서 美國은 血盟關係라고 指稱될 만큼 傳統的인 友邦이었다. 이러한 政策은 學生들의 反美主義 運動을 助長한 側面도 있다. 1979年 12·12 軍事 叛亂 1980年 5?18 光州 民主化 運動 에서 新軍部의 政權 掌握을 위해 軍隊가 投入되었다. 當時 平時 作戰統制權은 韓美聯合司令部 에 있어서 美國의 承認 없이는 軍隊의 자유로운 移動이 不可能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를 알고서도 默認한 美國에 對한 反感이 形成되었고, 이는 1982年 3月의 釜山 美文化院 放火事件 을 始作으로 1985年 5月에는 서울 美國文化院 占據 籠城 事件 等을 통해 學生·在野에서는 反美運動이 가속되었고 政府間에는 通商摩擦이 深化되어 及其也 國民的 葛藤으로까지 擴大되었다. 美國 政府는 1988年 열린 光州聽聞會에서 聲明書를 통해 5·18 光州 民主化 運動에 動員한 特戰司 部隊나 20師團 部隊는 光州에 投入될 當時나 光州에서 作戰을 遂行하던 中에는 韓美聯合司 作戰統制權下에 있지 않았으며, 그 期間 동안 光州에 投入되었던 韓國軍의 어느 部隊도 美國의 統制下에 있지 않았다고 解明했다. [13]

이 時期의 美國의 레이건 政府는 民主化 運動을 彈壓하는 戒嚴令 發動에 對해서 牽制하는 態度를 維持해왔다. [6] 兩國間의 位相照明과 關係 再正立 主張이 擡頭되고 있는 바, 이는 韓國現代史를 돌아보면 至極히 當然한 것이었다. 卽 軍事的으로 韓國이 美國의 保護 아래 있다고 只今까지의 政治的·經濟的 對美 依存性이나 不平等關係를 持續한다는 것은 더 以上 韓國民의 支持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14] 美國 의 壓力으로 大統領 朴正熙 가 開發한 核을 廢棄하였다는 見解가 있으나 確認된 것은 없다.

韓日 關係 [ 編輯 ]

1980年代 兩國은 日本의 歷史敎科書 問題 , 在日韓國人 指紋捺印制度, 日本의 對北 接近 等 主로 日本이 惹起시킨 各種의 懸案 때문에 葛藤을 빚었다. [15]

전두환은 大統領 在任 中, 韓國의 大統領으로서는 처음으로 公式 席上에서 韓國에도 國權피탈의 責任이 一部 있었다고 認定해 當時 日本 言論에서도 크게 報道됐다. [16] 1981年 8月 15日 에 있었던 第36周年 光復節 記念式에서 가진 演說에서 "우리는 나라를 잃은 民族의 恥辱을 둘러싸고 日本의 帝國主義 를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當時의 情勢, 國內的인 團結, 國力의 弱함 等 自責하는 姿勢가 必要하다"라고 主張했다.

1982年 8月 15日의 光復節 記念式戰에서도 그는 日本 政府의 歷史 敎科書 歪曲 問題에 依해 日本人 에 對한 택시 乘車拒否가 일어나는 等 反日 感情 이 소용돌이치고 있던 때 强勁的인 姿勢를 보이면서도 "異民族 支配의 苦痛과 侮辱을 다시 經驗하지 않기 위한 確實한 保障은, 우리를 支配한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보다 富强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 밖에 없다"라고 하여 盲目的 '反日'(反日)이나 '排日'(背日)보다는 實力을 形成하여 日本을 이기는 '克日'注意를 强調했다.

西유럽과의 關係 [ 編輯 ]

韓國은 親美·親西方 外交基調를 維持해 오면서도 西유럽 國家와는 多少 疏遠한 듯한 感이 있었다. 西유럽 國家들이 親美卷·獨自路線圈으로 나뉘어 親美圈의 境遇는 韓國이 直接 接觸을 試圖하지 않아도 國際政治 懸案에 對해 共同步調를 醉해왔기 때문에 對美外交에 偏重되어 있었고 獨自路線圈은 소·中·北韓과 外交關係를 維持하고 있을 뿐 아니라 社會主義 政黨이 執權하고 있는 國家들이 多數 있었기 때문이었다. 實狀 西유럽 國家들과 韓國은 서로의 事情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한 狀態에서 1980年代 韓國은 輸出市場 多邊化政策의 一環으로 EC市場을 攻掠했고 그 結果 兩側間에는 通商摩擦이 빚어졌다. 따라서 1980年代 韓國의 對西歐 外交는 經濟·通商 部門에 集中되었다. [17] 아일랜드 와는 1983年에 修交하였다.

기타 對外 關係 [ 編輯 ]

아프리카 大陸 各國 巡訪, 아시아 6個國 巡訪 等을 다녔다. 1983年 아시아 6個國 巡訪 中 버마 (미얀마)의 랭군에 位置한 아웅산 國立墓地에서 아웅산 墓所 爆彈테러 事件을 當하여 巡訪 日程을 取消하고 되돌아오기도 했다. 아랍에미리트 (1980年), 레바논 (1981年), 파키스탄 (1983年), 브루나이 (1984年), 부탄 (1987年)과 修交하였다.

大韓航空 007篇 러시아 事故 現場 訪問이 日本人 遺家族들과 달리 不許된 韓國人 遺家族들 [ 編輯 ]

社會 [ 編輯 ]

油化 措置 [ 編輯 ]

이러한 批判을 잠재우기 위해 第5共和國은 社會 政策 面에서 規制解除를 志向하는 態度를 보였는데 夜間通行禁止 의 解除와 中高等學校 校服 自律化, 프로野球 , 프로蹴球 , 프로씨름 等의 스포츠産業의 活性化 等이 代表的이었다. 컬러 텔레비전 의 普及과 컬러TV放送도 이 時代에 이루어졌다. 經濟的으로는 回復되어가던 國際的 經濟에 힘입어 物價安定, 經濟 成長, 서울 아시안게임 서울올림픽 誘致 및 開催 準備 成功, 貿易黑字 再達成 等의 經濟的 成果를 이룩함으로써 暗鬱했던 朴正熙 政權 末期의 經濟難을 解消하였다. 後代에 이 政策들은 3S 政策 으로 通稱되게 된다. 三淸敎育隊 라는 이름 아래 社會的 問題를 일으키던 暴力犯 乃至 犯罪者들을 處理하고자 하였으나 一律的 割當量을 채우기 위한 警察署의 五行으로 오늘 날 人權蹂躪의 現場으로 照明받는 곳이기도 하다.

손 모내기 現場 TV生中繼의 中斷 [ 編輯 ]

日本에 이어 國內 農村에 動力 移秧機 가 普及되기 始作한 것은 1977年부터이다. [18] 논을 푸른 모로 채우기 위해서 手作業으로 進行되는 못줄에 맞추어 모를 심는 손 모내기 가 農村 벼農事에서 移秧機가 普及되기 前에는 꼭 必要하였다. [19] 國民 모두가 農村의 不足한 손 모내기 일손을 돕자는 TV放送이 每해 모내기철에는 있어왔는데, 1985年頃에는 機械모내기가 TV放送에 登場한다. [20]

福祉 [ 編輯 ]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 으로 시끄럽던 [21] 1987年 1月 16日 檢察이 [22] 浮浪兒 收容所 釜山 兄弟福祉院 의 院長室 押收 搜索을 하는데 院長 冊床의 서랍 안에서 전두환 大統領의 親筆 書信이 發見된다. [21] 거리의 浮浪兒를 掃蕩하라는 指示事項의 內容이었다. [21] 兄弟福祉院의 運營 主體는 박인근 院長이 아닌 全斗煥 政權이었다고 當時 擔當 檢事는 證言했다. [21]

改閣 [ 編輯 ]

第1次 전두환 政府(彫刻) [ 編輯 ]

1980年 9月 1日 就任式을 가진 전두환은 남덕우 國務總理를 筆頭로 하여 신병현 副總理와 11個 部處 長官을 임명했다.

第2次 전두환 政府 第1期 內閣(第12代 大統領 當選과 조각) [ 編輯 ]

1981年 2月 25日 第5共和國의 大統領으로 當選된 전두환은 3月 10日 교통부 長官과 遞信部 長官을 임명했다.

第2次 전두환 政府 第2期 內閣(第1次 改閣) [ 編輯 ]

4月 8日에는 勞動部 長官과 政務 第1長官職을 新設했다.

第2次 전두환 政府 第3期 內閣(第2次 改閣) [ 編輯 ]

1982年 1月 3日 經濟 部處를 中心으로 改閣을 斷行했다.

第2次 전두환 政府 第4期 內閣(第3次 改閣) [ 編輯 ]

5月 21日 11個 部處 長官을 交替했다.

第2次 전두환 政府 第5期 內閣(第4次 改閣) [ 編輯 ]

6月 24日 國務總理와 3個 部處 長官의 任命이 연이어졌다.

第2次 전두환 政府 第6期 內閣(第5次 改閣) [ 編輯 ]

1983年 10月 14日 아웅산 墓所 테러事件 때문에 생긴 空白으로 改閣을 發表한다.

第2次 전두환 政府 第7期 內閣(第6次 改閣) [ 編輯 ]

1985年 2月 18日 總選擧에서 신민당이 躍進瑕疵 刷新 次元에서 12個 部處 長官을 更迭했다.

第2次 전두환 政府 第8期 內閣(第7次 改閣) [ 編輯 ]

1986年 1月 7日 8個 部處 長官이 交替된다.

第2次 전두환 政府 第9期 內閣(第8次 改閣) [ 編輯 ]

8月 26日 민정당의 黨職 改編에 이어 10個 部處 長官을 새로 임명했다.

第2次 전두환 政府 第10期 內閣(第9次 改閣) [ 編輯 ]

1987年 5月 26日 國務總理와 副總理 兼 經濟企劃院 長官, 3個 部處 長官을 交替하는 中規模 改閣을 施行했다.

第2次 전두환 政府 第11期 內閣(第10次 改閣) [ 編輯 ]

7月 14日 6.29 民主化 宣言 으로 민정당 總裁職에서 물러난 전두환은 國務總理와 8個 部處 長官을 交替하는 마지막 改閣을 斷行했다.

評價 [ 編輯 ]

장태완 前 首都警備 司令官은 “軍人 本然의 任務를 遂行해 軍事叛亂을 鎭壓하던 사람들은 强制로 轉役을 當해 悲慘한 삶을 살고, 叛亂軍에 加擔한 軍人들은 首警司令官, 保安司令官, 軍司令官, 參謀總長을 다 해먹었으니 이렇게 不公平한 世上이 어디 있어요?”라고 評價했다. [23]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世界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라는 記錄이 있다. (約 5個月)
  2. 전재호, 《反動的 近代主義者 朴正熙》(冊世上, 2000) 112~113쪽.
  3. 總裁까지 指定해 "野黨 만드시오" 2005.02.24
  4. 金永三 - Daum 百科事典
  5. “韓國文化史 > 04卷 近現代 科學 技術과 삶의 變化 > 第3章 韓國人이 배우고 開發한 科學 技術 > 1. 綠色 革命, 그 빛과 그림자 > 維新의 끝, 統一벼의 끝” . 《우리歷史넷》.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4日에 確認함 .  
  6. 大統領 따라 출렁거린 한·美 關係 30年
  7. [뉴시스아이즈]이슈診斷 '加熱되는 統一費用 論難'-歷代 政府 統一方案 살펴보니…정국따라 千差萬別 :: 네이버 뉴스
  8. 아웅산 테러가 '成功'했다면 :: 네이버 뉴스
  9. 一部 保守 勢力은 1983年 의 아웅산 墓域 爆彈테러事件은 全斗煥의 對北觀 및 全斗煥 政權의 對北政策을 否定的으로 보게 했고, 全斗煥 體制에 對한 反撥로 생겨난 主體思想派 (NL) 亦是 全斗煥 政權의 對北政策을 硬直시키는 하나의 要因이 됐다는 見解도 存在한다. 하지만 當時에는 政府의 方針에 따라 言論을 통해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5공화국 政府와 전두환 大統領은 持續的으로 祕密裏에 南北對話를 推進했다.
  10. <南北關係史와 '쌀'支援 函數> :: 네이버 뉴스
  11. [뉴스테이션/딥포커스] 北韓의 ‘挑發과 對話’ 二重戰術의 祕密<2> :: 네이버 뉴스
  12. “統一뉴스” . 2015年 4月 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9月 3日에 確認함 .  
  13. 1980年 5月 大韓民國 光州서 일어난 事件에 關한 美國政府 聲明書
  14.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1980年代의 韓美關係
  15.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1980年代 以後의 韓日關係
  16. 이는 日本에 依한 强制 侵略을 公式席上에서 主張하던 李承晩, 朴正熙와도 對照的이다.
  17.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1980年代의 對西歐 外交
  18. “動力移秧機(動力移秧機)” . 《韓國民族大百科事典》. 國立民俗博物館 . 2024年 3月 4日에 確認함 .  
  19. “傳統 農耕儀禮 再演, 소 써레질에 손 모내기” . KBS. 2023年 6月 2日.  
  20. 《[國民리포트] 그땐 그랬지, 住民들 總出動한 '모내기' 風景》 . KTV國民放送. 2019年 5月 30日.  
  21. 이규원의 스포트라이트 184回 福祉院, '王族과 奴隸들' JTBC 2019-02-07
  22. “兄弟福祉院 事件 搜査했던 檢事 “國家가 責任져야” 特別法制定 促求” . 中央日報. 2018年 2月 6日.  
  23. “[어떻게 지내십니까?] 張泰玩 前 首都警備司令官” . 월간조선. 2010年 1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