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第4共和國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 維新政權 에서 넘어옴)

大韓民國
大韓民國

1972年 ~ 1981年
國家 愛國歌
수도 서울特別市
政治
政治體制 韓國式 民主主義( 維新 獨裁) (1972-1980)
軍事 政權 (1980-1981)

大統領
朴正熙 (1962-1979)
최규하 (1979-1980)
全斗煥 (1980-1981)
立法府 大韓民國 國會
歷史
 ? 憲法 恐怖
? 國民投票
? 10·26 事態
? 12·12 事態
? 5·17 쿠데타
? 5·18 民主化 運動
? 憲法 改正
1972年 10月 17日

1979年 10月 26日
1979年 12月 12日
1980年 5月 17日
1980年 5月 18日
지리
面積 100,210 km 2 (108位)
內水面 比率 0.3 %
人文
公用語 韓國語
人口
1979年 어림 3755萬名
經濟
通話 大韓民國 원

大韓民國 第4共和國 (大韓民國第四共和國)은 1972年 10月 維新 으로 樹立된 大韓民國 의 네 番째 共和 憲政 體制이다. 維新 體制로 불리기도 하는 大統領 1人 獨裁 體制였다. 1972年 7·4 南北 共同 聲明 을 利用하여 10月 17日 , 當時 憲法을 改正하면서까지 長期 執權을 追求하던 大統領 朴正熙 는 全國에 非常戒嚴令 을 宣布하고 國會 解散, 政黨 活動 中止, 一部 憲法의 效力 停止 等의 非常措置 를 發表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를 構成했다. 11月 21日 國民 投票로 維新 憲法 을 確定하였고, 12月 23日 大統領으로 朴正熙를 選出, 27日 就任했다. 이것이 10月 維新으로 이 時期를 維新 時代 라 부르기도 한다. 第4共和國 政府는 10·26 事件 이 일어나 幕을 내렸다.

成立 背景 [ 編輯 ]

10月 維新 [ 編輯 ]

10月 維新 (十月維新)은 1972年 朴正熙 政權이 第3共和國 憲法을 第4共和國 憲法으로 改憲韓 것을 말한다. 이 때의 憲法을 維新 憲法 理라 하며, 維新憲法이 發效된 期間을 維新 體制 라고도 부른다.

第4共和國 憲法은 大統領이 國會議員의 3分의 1과 모든 法官을 임명하고 緊急 措置權 , 國會 解散權 을 가지며 任期 6年에 連任할 수 있었으며, 大統領 選出 制度가 直選制 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間選制 로 바뀜으로서 行政·立法·司法의 3卷이 모두 大統領에게 集中된 帝王的 大統領制로 1人 永久 執權 體制인 총통制(總統制)를 採擇하였다. [1]

政治 [ 編輯 ]

緊急 措置 1號에서 9號를 發動하여 改憲 論議 一切를 禁止하고, 反政府 勢力에 對한 政治 活動, 言論 및 表現의 自由에 甚大한 制限을 加하였다. [1] 이 憲政 體制 下에서 많은 民主化 運動과 그에 對한 彈壓이 벌어졌다.

1973年 에는 獨裁에 抵抗하던 政治人 金大中 日本 에서 拉致되는 김대중 拉致事件 이 發生하였고, 1974年 에는 繼續되는 民主化 運動을 抑壓하기 위한 緊急措置 가 宣布되고, 1975年 에는 高麗大學校 에 軍隊가 投入되었다. 김대중 拉致事件과 第2次 石油波動 으로 인한 經濟 危機 等으로 維新 體制에 對한 批判的인 목소리는 높아만 갔다. 朴正熙는 이러한 움직임을 遮斷하고자, 1975年 인혁당 再建 事件 關聯者를 民靑學聯의 背後로 指目하여 8名을 大法院 確定 判決( 2007年 再審에서 無罪 確定) 이튿날 死刑 執行하는 等 政權 反對者에 對한 彈壓을 强化하였다. 5月 13日 에는 維新憲法에 絶對的인 權限을 附與하는 緊急措置 9號 를 宣布하였다.

1975年 10月 8日 大韓民國 第9代 國會에서 女性 議員 김옥선 은 半 維新憲法 趣旨 發言을 했고, 이로 인해 議員職 辭退, 公民權 制限이라는 波動 을 일으켰다. 1978年 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를 통한 間接選擧로 朴正熙 가 第9代 大統領 選擧에 當選되어 5線에 成功했다. 하지만 5個月 後 치러진 第10代 國會 議員 選擧 에서 執權 民主공화당 이 野黨인 新民黨 에 得票率에서 뒤지는(다른 野黨인 民主통일당 까지 더하면 得票率 隔差는 8%에 이른다) 等 民心 離叛의 兆朕이 나타났다. [2]

1979年 10月 YH 女工 신민당使 占據 籠城 事件이 發生하였다. 警察은 强制로 신민당使에 들어가 女工들을 끌어내는 過程에서 1名이 墜落해 死亡했고 이에 抗議하는 신민당 黨首 金永三 等과 摩擦을 빚었다. 김영삼은 美國을 向해 朴正熙 政府에 對한 支持를 撤回할 것을 主張했다가 國會 內에서 除名事件이 發生하기도 했다. 이 事件이 하나의 契機가 되어 1979年 10月 2日 釜山 에서 大規模의 民主化 示威인 釜馬抗爭 이 發生하였으며, 馬山 , 昌原 等으로 擴散되었다. 이는 朴正熙 大統領에게 큰 危機感을 주었고, 1979年 10月 20日 戒嚴令이 宣布되며 부마抗爭은 鎭壓되었다.

10月 26日 朴正熙 大統領이 김재규 에 依해 殺害되고, 12月 12日, 殺害 場所에 함께 있었던 鄭昇和 全斗煥 等이 連行한 事件 이 發生했다. 實權을 掌握한 新軍部 勢力은 計劃的인 執權 시나리오에 따라 民主化 輿論을 彈壓하고 國家保衛非常對策機構를 設立해 第5共和國 憲法을 制定했다.

10·26 事件 [ 編輯 ]

10·26 事件 1979年 10月 26日 , 大韓民國 中央情報部 部長이던 김재규 박선호 , 박흥주 等과 當時 大統領 朴正熙 와 大統領 警護室長 차지철 等을 殺害한 事件이다. 이 事件으로 維新體制 는 崩壞되었다.

10月 26日 , 揷橋川 防潮堤 竣工式과 KBS唐津送信所 開所式 參席 後 귀경하여, 궁정동 安家에서 警護室長 차지철, 祕書室長 김계원 , 情報部長 김재규 와 함께 歌手 심수봉 , 한양대生 신재순 을 도우미로 불러 宴會를 하던 中 中央情報部長 김재규의 銃에 저격당하였고 곧 國軍 서울地區 病院으로 移送되었으나 午後 7時頃 過多出血로 死亡하였다. 當時 朴正熙의 나이 滿 62歲였다.

김재규는 裁判 過程에서 民主化에 對한 熱望으로 大統領을 殺害했다고 主張하였다. 當時에 朴政權의 核開發과 關聯된 것, 그리고 박동선 코리아게이트 事件 等으로 韓美 關係가 惡化된 點 때문에 美國 政府가 朴正熙의 暗殺을 隱密히 助長했다는 說도 있다.

12·12 軍事 叛亂 [ 編輯 ]

12·12 軍事 叛亂은 1979年 12月 12日 , 全斗煥 盧泰愚 를 中心으로 한 新軍部 勢力이 최규하 大統領의 承認 없이 戒嚴司令官인 鄭昇和 陸軍 參謀總長 , 장태완 首都警備司令部 司令官 그리고 정병주 特殊戰司令部 司令官 을 連行한 事件이다. 이 事件으로 當時 保安司令官이던 전두환 所長이 軍部權力을 掌握하고 政治的인 實勢로 登場하였다.

5·17 쿠데타 [ 編輯 ]

10.26 事態 以後 韓國의 모든 政治 勢力은 維新憲法을 廢止하고 民主的인 內容이 담긴 憲法으로 改正하기로 合意했다. 오랜 1人 獨裁 體制를 마감하고 民主化를 期待하는 國民 輿論이 높아졌다. 1980年 5月 12日 與野는 같은달 20日 國會改憲特委가 마련하는 憲法改正案을 接受하는 한便, 戒嚴解除案을 비롯한 政治問題를 論議하기로 合意하였다. [3] 신현확 總理 亦是 國會와 協議를 통해 憲法을 改正하고, 改憲 日程을 앞당긴다는 內容의 談話를 發表하였다. [4] 전두환을 中心으로 한 新軍部 勢力은 反對 勢力을 彈壓하고 政局을 主導하기 위해 非常戒嚴을 全國으로 擴大한 後 臨時國會를 霧散시키고, 國保委 를 設置하여 內閣을 掌握한다는 趣旨의 執權 시나리오를 謀議하였다. 新軍部 勢力은 5月 17日 24時 非常戒嚴을 全國으로 擴大하고 同時에 戒嚴布告令 第10號를 發表하여 政治活動 禁止, 休校令, 報道檢閱 等의 措置들을 내렸다. 新軍部 勢力은 이에 抗拒하는 5·18 民主化運動 을 流血鎭壓하고, 事前 計劃대로 國保委를 設置하여 實質的으로 統治權을 行使했다. 新軍部 勢力은 최규하 大統領을 下野시킨 以後, 9月 第5共和國 憲法을 確定하고, 10月 27日 公布하였다. 이듬해 3月 3日 전두환이 大統領에 就任하면서 제5공화국은 公式的으로 出帆하였다.

經濟 [ 編輯 ]

朴正熙 政府는 維新體制下의 70年代에도 輸出主導型 成長政策을 持續的으로 밀고 나갔다. 1972年부터 第3次 經濟開發 5個年 計劃이, 1977年부터 第4次 經濟開發 5個年 計劃 이 施行되었는데, 이 時期에는 只今까지의 輕工業 中心에서 重化學工業 優先政策으로 方向을 旋回하여 經濟構造에 均衡이 잡히고 産業構造의 高度化를 이룩하여 本格的인 産業社會로 進入하게 됐다.

1973年에 竣工된 포항제철 과 1978年에 竣工된 고리原子力發電所 는 이 時期 重化學工業의 象徵的인 事業이었다. 1973年 1月 重化學工業政策 育成을 宣言하면서 工業振興廳 을 新設했다. 같은해 3月 重化學工業의 基盤을 擴充하기 위해 온산, 昌原, 麗水~光陽, 群山~비인, 龜尾 等 5個 大單位工業團地 造成 計劃을 樹立했다. 1973年 中盤 技能工 養成政策을 樹立하고 1973年 10月 ~ 1974年 12月에는 이리 輸出自由地域을 着工했다. [1] 70年代에는 中東의 石油輸出國家들이 石油價格을 引上하여 經濟發展에 壓迫을 加하였으나 輸出은 꾸준히 持續되어 1977年에 100億 달러, 1981年에 200億 달러를 突破하고, 輸出商品에서 工産品이 차지하는 比重이 90%를 넘어섰다. 그리고 工業生産에서 重化學工業이 차지하는 比重이 55%를 上廻하게 되었다. 또한 이 時期에는 建設業體들이 中東으로 進出하여 外貨를 버는 데 큰 몫을 擔當하였다.

全體的으로 60年代와 70年代의 輸出伸張率은 年平均 40% 程度, 經濟成長率은 8.9%를 記錄하여 世界的으로도 開發途上國의 模範이 되었다. 이러한 經濟成長은 民族主體性을 强調하여 國民의 自尊心을 부추기고, ‘하면 된다’는 말로 대표되는 朴大統領의 强力한 信念과 開發獨裁型의 指導力이 크게 作用한 것이 事實이다. 그리고 國民의 높은 敎育熱과 成就欲, 數千年 間 先進文明을 꾸려온 文化的 潛在力이 되살아난 것 또한 原動力이었다. 그러나 外形的인 經濟成長의 裏面에는 一部 副作用이 따랐다. 對外的으로 美國과 日本에 對한 依存性의 深化, 財閥과 政治權의 癒着에서 오는 腐敗, 地域發展의 偏差 等이 생겼다. 이러한 點들이 學生運動을 격화시키는 要因이 되었다.

社會 [ 編輯 ]

東亞日報 白紙廣告 事態 [ 編輯 ]

1974年 12月 朴正熙 政府의 彈壓으로 東亞日報 에 廣告를 내기로 했었던 會社들이 무더기로 解約하고, 그 結果로 동아일보에서는 廣告를 채우지 못한 部分을 白紙로 내보내거나 아예 全 紙面을 記事로 채워버린 事態가 發生하였다.

이 事態로 동아일보 廣告가 解約되었을 뿐만 아니라, 東亞日報 系列社인 동아방송 에도 事態의 影響力이 퍼져서 이듬해 1月 11日 報道 프로그램 廣告가 무더기로 解約되어 放送 廣告 없이 프로그램을 進行하거나 몇몇 放送 프로그램은 아예 廢止하고, 甚至於는 全體 放送 時間이 短縮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廣告를 平常時처럼 싣지 못한 東亞日報 白紙廣告 事態는 無慮 7個月間 이어져,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經營難을 가져왔다.

結局 東亞日報 經營陣이 政權에 屈服하여 當時 朴正熙 大統領의 軍事獨裁에 反對하는 示威에 나갔던 職員들을 强制로 解雇함으로써, 事態가 終結되었다. 當時 해고당한 職員들은 한겨레新聞 을 만들었다.

外交 [ 編輯 ]

南北 關係 [ 編輯 ]

CIA 祕密文書를 통해 朴正熙는 10月 維新을 宣布하면서 北韓에 미리 알린 事實도 드러났다. [5]

韓美 關係 [ 編輯 ]

1977年 5月 2日 朴正熙 大統領 署名 基地村淨化對策 .

美國의 第39代 大統領인 지미 카터 의 執權期는 韓美 關係 가 惡化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人權外交와 民主主義, 美軍撤軍을 외치는 카터와 朴正熙 는 가장 껄끄러웠던 사이였다. 또한 알려진 바는 없으나 朴正熙가 祕密裏에 核開發을 試圖하여 美國과 껄끄러운 關係를 維持하였다는 主張도 있다. [ 出處 必要 ] 1977年 1月 26日 지미 카터 美國 大統領 은 駐韓美軍의 減縮을 包含한 韓半島政策 全般에 對한 再檢討를 國務部와 國防部 그리고 安保關聯 部署에 指示 [6] 했고, 朴正熙는 駐韓美軍 撤收政策에 初期에는 反撥하다가 뒤에는 할테면 하라는 套로 應對 [7] 하였다.

1977年 1月 末 지미 카터는 월터 먼데일 (Walter F. Mondale) 美國 副統領 日本 에 派遣하여 駐韓美軍의 段階的 撤收를 直接通報하는 誠意를 보였다. [6] 그러나 먼데일은 韓國을 訪問하지도 않았다. 그와 같은 外交的 無禮는 朴正熙와 韓國政府를 甚히 憤怒하게 만들었다. [6] 2月 15日 지미 카터에게서 書信을 받았다. 지미 카터는 스나이더 大使와 존 베시 (John W. Vessey) 駐韓美軍司令官을 통해 朴 大統領에게 보낸 便紙에서, 韓國의 安保에 對한 美國 의 公約을 再確認하면서도 駐韓美軍의 撤收問題를 提起했을 뿐만 아니라 朴正熙의 人權政策의 改善도 함께 促求했다. [6] 그러나 朴正熙는 이를 屈辱이나 下待로 看做하고 應하지 않았고, 韓美關係는 1970年代 末에는 破局으로 치닫게 된다.

1979年 6月 29日 지미 카터 美國 大統領이 韓國을 訪問하였다. [8] 도쿄 에서 7個國 經濟頂上會談을 마친 카터는 豫定相 金浦空港 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으나 金浦地域의 안개로 着陸이 늦어져 2時間을 기다려야 했다. 歡迎 人波 等 겉모습으로 ‘友邦’이었지만, 카터와 대면한 朴正熙는 人權政策과 美軍撤收 問題로 摩擦을 빚어야만 했고 合意點을 導出해내지 못하였다. [9] 카터는 訪韓 前부터 韓國 內 人權 彈壓이 是正되지 않으면 駐韓美軍을 撤收시키겠다고 壓迫했다. 카터는 迎賓館에 머물러 달라는 朴 大統領의 招待를 無視하고 異例的으로 서울 용산 美8軍 營內에 宿所를 定했다. 頂上會談에서 朴 大統領은 40餘 分間 카터에게 駐韓美軍 撤收의 不當性을 ‘講義’했다. 火가 난 카터는 陪席했던 사이러스 밴스 國務長官에게 “이 自家 2分 以內에 입을 닥치지 않으면 나가 버리겠다”는 메모를 건넸다. 駐韓美軍 撤收 問題는 한·美 政府와 民間이 모두 말린 結果 카터는 3,000名假量 減縮하는 線에서 마무리지었다. [10]

1960年代 부터 1970年代 에 朴正熙 政府는 美軍 慰安婦 의 性病 豫防策을 講究하고 敎養을 强化했다. [11] [12] [13] [14]

日本과의 關係 [ 編輯 ]

1970年 6月에는 濟州島 南쪽 8萬km 2 를 第7鑛區로 定하고 韓國領으로 公式 宣布했다. 하지만 1972年 日本이 “韓日間의 中間線에서 日本 쪽으로 넘어온 部分은 兩國이 50%씩 持分을 갖고 共同開發하자”고 提議했고 韓國은 이 提案을 받아들여 1974年 韓日大陸棚 協定이 맺어진다. 日本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濟州道 中國 大陸 에 붙어있는 7鑛區의 海底地形 때문이었다. 日本과 7光球는 깊이가 8000m에 이르는 ‘오키나와 海溝’가 갈라놓고 있다. 當時까지 支配的 理論이었던 自然延長설로 볼 때 日本이 決코 유리하지 않은 狀況이었다. 1972年 當時 定說이었던 自然延長설에 依하면 우리나라가 유리한 處地였으나, 朴正熙 政權의 共同開發 合意로 유리한 處地가 浮刻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政權이 이 事實을 알고 合意를 맺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現在 日本은 共同開發이라는 地位를 利用해 繼續 遲延시키고 있다. 繼續 遲延시키면 2028年 大陸棚 協定이 滿了하는 날 自然延長설 代身 UN의 새 海洋法이 適用되어서 日本에 유리하게 된다는 視角이 있다. [15]

아시아·太平洋과의 關係 [ 編輯 ]

對中國 關係는 第1共和國 과 差異 없이 中華人民共和國 을 敵對視하고 中華民國 과의 關係를 維持하였다. 朴正熙는 타이베이시 를 訪問하여 ‘自由의 波濤’ 發言을 하였다 [ 出處 必要 ] . 中華民國 總統 장제스 가 逝去하자 金鍾泌 名義로 哀悼를 表示하기도 했다. 勿論 中華人民共和國 과의 關係 改善을 아주 等閑視하지는 않았는데 中國 共産黨 側이 呼應하지 않아서 無爲에 그쳤다 [16] .

特히 1970年度 初부터 東北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變化는 아시아 太平洋 理事會 의 性格을 전환시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韓國을 둘러싸고 있는 國際的인 狀況은 다른 分野의 外交政策에도 繼續的인 變化를 强要했다. [17] 그런데 1975年 인도차이나 半島 의 共産化 以後 太平洋 地域의 外交 狀況은 急激히 變貌하여 많은 國家들이 中立化 傾向을 標榜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한 때, 太平洋의 國家들間에는 勞動黨 政權이 들어서서 南北韓과의 等距離 外交를 追求하던 적도 있었다. 韓國은 이런 國家들과도 積極 外交關係를 維持·强化하면서 安保外交의 成果를 노리고 있다. 그러나 印度차이나 事態 以後 東南亞 地域에서의 共産化는 韓國 外交에 달갑지 않은 結果를 가져왔다. [18]

아스팍을 主導하면서 아시아 帝國間의 反共 堡壘를 다져오던 韓國 外交는 1975年 越南의 共産化에 이어 라오스·캄보디아까지 赤化됨에 따라 軌道修正을 해야 될 새 段階에 접어들었다. 特히 越南에 國軍을 보냈던 韓國은 世界 外交舞臺에서 公算 越南의 强力한 反撥을 가져와 非同盟會議 等에서 摩擦을 일으키게 되었다. 인도차이나 半島 全域의 共産化는 非但 韓國뿐이 아니라 그間 親美 反共路線을 追求하던 이 地域의 모든 나라들에게 커다란 衝擊을 주어 獨自的인 外交路線의 追求를 實施하는 契機가 되었다. 더구나 1976年에 美國에서는 카터 大統領이 當選되어 對東南亞 政策에 對한 人權問題와의 結付 等으로 不安이 겹치게 되자 이 地域 國家들은 自救策으로 脫美(脫美) 中立化 政策을 標榜하기에 이르렀다. 이 地域 國家들은 個別的 活動으로 東南亞의 中立化 目標를 追求하는 한便 1976年 2月에는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에서 首腦會談을 열고 外部의 內政干涉을 排擊하는 等의 自主 連帶性을 强調한 友好協力條約을 調印했다. 이처럼 政治的 이데올로기 面에서는 外部의 干涉을 排擊하는 中立化를 내걸면서 經濟協力에서는 地域內의 協力을 强調하는 아시안 協力宣言을 採擇했다. 한便 필리핀은 아시안 外相會議에서 '超强大國의 保障 아래 東南亞에서의 强大國의 角逐과 地域內 干涉을 排除하며 이 地域 國家들만의 影響圈으로 宣言'하는 世稱 '아시안 독트린'을 提議했다. 또 인도차이나의 새로운 政治秩序에 對處하기 위하여 이 地域 國家들은 中國 및 蘇聯과의 外交關係 改善을 서두르는 中·蘇 兩國과 國交를 맺고, 싱가포르도 對中國 宥和政策을 펴기 始作했다. 이런 東南亞 地域의 政治的인 變化 속에서 日本은 經濟協力을 통한 反共路線의 强化를 支援하는 立場을 維持하는 한便 自國의 貿易增大를 꾀했다. 따라서 韓國은 이 地域에서 貿易 增大를 통한 經濟的 外交와 反共 强化를 위한 中立化 外交를 同時에 追求해 나갔다. [19] 10月 16日 에는 싱가포르의 리콴유 首相이 來韓하여 頂上會談을 갖기도 하였다. 1975年 中華民國 장제스 가 死亡하자 이를 哀悼하는 聲明을 發表하였다.

이 時期에 인도네시아 , 방글라데시 , 印度 (以下 1973年), 네팔 , 오만 , 카타르 (以下 1974年), 미얀마 , 싱가포르 (以下 1975年), 바레인 (1976年), 스리랑카 (1977年), 쿠웨이트 (1979年)와 修交하였다.

西유럽과의 關係 [ 編輯 ]

프랑스 는 1972年 第27次 유엔總會에서 韓國問題 不上程案에 棄權함으로써 새로운 問題點을 던져 주었다. 英國 은 經濟協力·通商問題 等에서는 큰 比重을 차지하지 못하나, 그 代身 政治問題에서는 韓國을 積極 支援해 주었다. 그 中에서도 유엔 韓國問題에 對한 英國의 寄與는 特記할 만하다. 유엔에서의 韓國 問題가 共産側의 活動으로 微妙해지자, 韓國政府는 1971年부터 韓國政策에 不上程政策(不上程政策)을 取하였다. 이러한 韓國政策에 英國政府는 1971年 유엔 總會에서 韓國問題 1年 延期案을 英國안으로서 提出 採擇하게 하는데 積極 努力하여 성공시켰다. 1972年 第27次 유엔 總會에서도 英國은 다시 韓國問題 討議 1年 延期案을 提出하고, 콜린 크로우 英國代表는 서울과 平壤에서 열린 南·北 赤十字會談, 7·4 共同聲明을 指摘하면서, 유엔의 會員國들이 韓國의 이같은 努力을 도울 수 있는 最善의 方法은 유엔에서 이 問題를 끌어들임으로써 惹起될 冷戰(冷戰)의 辛辣하고 亂暴한 言語를 防止하여 和解精神에 寄與하도록 하는 것이라 指摘하면서 韓國問題 討議 延期를 强力히 主張하여 貫徹시켰다. [20] 1973年에는 핀란드 와 手交하였다.

共産圈과의 關係 [ 編輯 ]

1970年代 以後 世界情勢가 和解와 對話의 時代로 變貌하자 韓國도 이에 適應할 수 있는 外交政策을 必要로 하게 되었던바 1973年 朴正熙 大統領은 '6·23 外交宣言'을 大統領 特別聲明 形式으로 發表했다. 그 內容 要旨는 ① 平和統一을 위한 努力 및 南北韓의 相互不侵略과 對話 再開, ② 南北韓이 UN 및 國際機構에 同時 加入, ③ 對共産圈 國家 等에 對해서도 相互平等의 原則下에 門戶를 開放한다는 等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只今까지의 社會主義 國家들과 斷絶시켜 오던 閉鎖政策 代身 門戶開放 政策을 펴면서 非同盟 勢力을 비롯한 多角的인 外交戰略을 展開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6·23 宣言 以後에도 蘇聯·中國 및 東歐 共産圈으로부터는 아무런 反應이 없었고 다만 國際的인 和解 무드에 依한 直接·間接的인 交流가 多少 늘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蘇聯과의 關係에서는 1973年 유니버시아드 大會 에 韓國 選手가 參加한 것을 비롯하여 1974年에는 國會 圖書館 과의 資料 交換이 있었고, 1975年엔 力道·레슬링 等의 選手權 大會에 韓國 選手가 參加하기도 했다. 東歐圈과도 各種 國際會議나 大會 때 韓國 代表가 入國할 수 있는 契機가 늘어나고 있는데 IPU 理事會, 赤十字平和會議 等으로 유고에 入國한 것을 비롯해 1976年에는 東歐圈 人士가 6名이나 韓國을 다녀갔다. 中國은 6·23 宣言 以後에도 繼續 敵對感을 보이면서 오히려 蘇聯이 韓國人을 入國시킨 事實을 猛烈히 攻擊하는 態度를 取했다. 또한 韓國 漁夫들이 中國의 漁撈(漁撈)를 妨害한다는 等의 非難을 繼續하면서 가끔 韓國 漁夫들을 拉致해 가서는 送還시키기도 했다. 6·23 宣言 以後 韓國이 보여준 開放政策에도 不拘하고 韓國의 對共産圈 外交는 그 限界가 있었다. [21]

非同盟國과의 關係 [ 編輯 ]

國際情勢의 바로미터인 유엔의 變化에 따라 韓國 外交는 유엔總會 그 自體보다 非同盟·中立地域의 國家들과 깊은 紐帶를 갖는 方向으로 차츰 轉換해 가고 있다. 따라서 韓國이 오랫동안 固守해 왔던 할슈타인 原則은 더 以上 유리한 外交戰略이 아니었으므로 修正이 不可避하게 되었다. 卽 韓國과 外交關係를 맺고 있는 國家가 비록 北韓과 修交를 해도 斷交까지는 取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反對로 北韓과 修交中인 中立·非同盟 國家와 外交關係를 갖도록 心血을 기울였다. 非同盟 國家와의 緊密한 紐帶關係를 위해서는 이미 1975年 페루의 리마에서 열린 非同盟會議에 加入을 申請하였다. 그러나 同時에 加入申請을 提出한 北韓은 承認되었으나 韓國은 拒否當하였는데 그 理由는 韓國의 對美·親西方 偏向 및 베트남 戰爭參戰에 對한 非同盟國家들의 排他였다. [17]

國防 [ 編輯 ]

武器 國産化와 原子爆彈 開發 [ 編輯 ]

1975年 戰鬪常備軍部隊를 創設하였다. 兵器 開發에도 努力을 들였으며 [1] 1975年 11月 艦隊艦미사일 試驗 發射에 成功하였다. 1977年 1月 核武器와 戰鬪機를 除外한 모든 武器를 國産化하고 있음을 闡明하였고 1978年 9月 26日 世界 7番째로 國産 長距離 誘導彈 等과 多連發로켓 試驗 發射에 成功하였다. [1] 朴正熙는 1970年代에 核開發 推進을 試圖하였다. 一部의 意見으로는 朴正熙가 核開發을 推進하는 過程에서 이를 反對하던 强大國에 依해 被殺되었다는 意見이 提起되고 있다.

大統領 暗殺 時期에 共産圈에 挑發 牽制 [ 編輯 ]

日本 政府가 朴正熙 前 大統領을 殺害한 김재규 中央情報部長과 美國과의 聯關 可能性을 蘇聯 側에 間接的으로 言及하였으며, 이같은 事實은 外交通商部가 '外交文書 公開에 關한 規則'에 따라 30年이 經過해 22日 公開한 1979年 外交文書에서 드러났다. 이 文書에서 日本의 偶語茅島 週 모스크바 大使는 1979年 10月 29日 彙類빈 蘇聯 外務次官을 訪問한 자리에서 朴 前 大統領의 逝去와 關聯해 "朴 大統領은 美國과 密接한 關係에 있는 中央情報部(KCIA) 部長에게 殺害된 것"이라고 說明했다. [22]

內閣 構成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朴正熙 大統領 記念事業會” . 2007年 9月 3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5月 10日에 確認함 .  
  2. 김정렴 이 그가 쓴 冊 《最貧國에서 先進國 門턱까지》에서 言及. 이고운 記者 (2006年 8月 23日). “朴正熙의 經濟政策 18年, 생생한 證言” . 209年 5月 12日에 確認함 .  
  3. 1980年 5月 13日 東亞日報, 兩黨國會對策 戒嚴論議 等 活性化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 1980年 5月 12日 동아일보, 政府 改憲日程 2~3個月 短縮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5. [5·16쿠데타 50年 學術大會] “朴政權, 10月 維新 宣布 北韓에 미리 알렸다” 2011-03-14 京鄕新聞
  6. 韓美同盟 50年 (차상철 저 생각의나무 2004) 34페이지
  7. “‘駐韓美軍 撤收’ 主張한 朴正熙의 속내는?” . 채널예스 . 2021年 10月 13日에 確認함 .  
  8. “朴·카터 1次頂上會談” . 《東亞日報》. 1979年 6月 30日 . 2009年 5月 13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9. 記者 趙 甲 濟의 세 界 :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10. “大統領 따라 출렁거린 한·美 關係 30年” . 중앙일보사. 2008年 11月 7日. 2012年 7月 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7月 7日에 確認함 .  
  11. “朴正熙도 ‘美軍 慰安婦’ 管理”…‘親筆 資料’ 公開유승희 “‘基地村 女性 無理한 監禁治療로 死亡者 相當’ 陳述도” Archived 2015年 11月 7日 - 웨이백 머신 國民TV 2013.11.06
  12. Former Korean 'comfort women' for U.S. troops sue own government Archived 2014年 7月 23日 - 웨이백 머신 로이터 Jul 11, 2014
  13. 2013 國監 朴正熙 政府, 美軍 慰安婦 直接 管理 유승희 議員, 性病 걸린 女性 페니실린 過多投與 死亡事例 發見 Archived 2014年 10月 20日 - 웨이백 머신 프라임經濟 2013.11.06
  14. 大韓民國 政府가 抱主였다 한겨레21 2011.11.28 第887號
  15.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259832
  16. 저우언라이 國務院總理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 友好的이었고 大韓民國 에 敵對的인 性格이었다. 이는 當時 中共의 大部分 指導部들도 마찬가지.
  17.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自我意識과 試鍊의 時期(1961∼80年)
  18.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韓國과 太平洋地域 帝國의 關係〔序說〕
  19.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印度支那事態 以後의 東南亞 外交
  20.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第3共和國의 對西歐 外交
  21.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6·23 宣言 以後의 對共産圈 外交
  22. “2010年 2月 22日 야후뉴스, 外交文書公開 - 日 朴正熙 被殺 美國 背後說 提起” . 2011年 8月 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12月 15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