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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株式會社 포스코
POSCO CO., LTD.
形態 大企業 , 株式會社 , 子會社
創立 1968年 4月 1日(最初 設立日)
2022年 3月 1日(新포스코 創立日)
ISIN US6934831099
産業 分野 鐵鋼業
서비스 製鐵業
기타 製鐵 및 製鋼業
淸淨에너지業
本社 所在地
大韓民國 
慶尙北道 浦項市 南區 東海岸로 6261(괴동동)
核心 人物
장인화 (代表理事 會長)
김학동(代表理事 副會長)
鄭琢(代表理事 副社長)
製品 熱延製品, 厚板製品, 善哉製品, 冷延製品, 鎔融亞鉛, 電氣亞鉛, 電氣鋼板, 스테인리스스틸製品, 티타늄, 高純度 페로망간, 마그네슘, 自動車素材, 淸淨에너지
賣出額 3,790,601,137,305원(2022.3)
營業利益
369,277,380,420원(2022.3)
228,866,663,921원(2022.3)
資産總額 43,303,700,575,698원(2022.3)
主要 株主 포스코홀딩스株式會社: 100%
從業員 數
17,772名(2022.3)
某企業 포스코홀딩스
子會社 포스코스틸리온株式會社
株式會社 포스코엠텍
株式會社 포스코휴먼스
株式會社 피엔알
資本金 482,403,125,000원(2022.3)
웹사이트 http://www.posco.co.kr/

株式會社 포스코 (POSCO, Po hang Iron and S teel Co ., Ltd)는 大韓民國 鐵鋼 會社이다. 本社는 慶尙北道 浦項市 南區 東海岸로 6261 (괴동동)에 位置에 있다. 1965年 韓日基本條約 에 따른 日本政府 로부터 우리政府 에 對한 經濟援助資金(ODA) 等을 통한 資本을 바탕으로 朴正熙 大統領의 周旋으로 1968年 設立, 1973年 浦項市에서 操業 開始. 當時 世界 톱클래스의 日本企業 3社, 야하타제철(現 日本製鐵 )과 후지제철(現 日本製鐵 ), 日本鋼管(現 JFE홀딩스 )의 技術 供與로 急速히 發展했다.

現在 포스코는 浦項市 光陽市 에 2곳의 一關 製鐵所 가 있으며, 日本 오사카 附議 物流센터와 美國 캘리포니아州 피츠버그 時에 US 스틸 과 1986年 4月 1日 合作 法人으로 設立한 冷延 單純壓延 法人인 UPI(USS-POSCO Industries)가 있다. 이 밖에도 中國 江蘇省 장가港에 中國 사강그룹(沙?集?)과 合作으로 1997~2006年, 3段階로 完工한 스테인리스 스틸 一貫 製鐵所 人 장가港浦項不銹鋼(張家港浦項不銹鋼有限公司) 等이 있다.

名稱 [ 編輯 ]

草創期 한글 公式 會社名은 포항종합제철株式會社 英語 公式 會社名은 Pohang Iron and Steel Co., Ltd 였는데 外國에서는 1970年代부터 略稱하여 POSCO로 呼稱되었다. [1]

그 後 2002年 3月 '포항종합제철株式會社'라는 使命에서 '株式會社 포스코(POSCO)'로 變更되었다 [2]

歷史 [ 編輯 ]

創立期

大韓民國 政府에서는 第2次 經濟開發計劃 期間(1967年~1971年)에 즈음하여, 鐵鋼工業의 多角的인 戰略性이 認定되기 始作하면서 長期的인 鐵鋼工業 育成計劃이 樹立되었다. 이에 따라, 1963年 에 5個國 8個社의 聯合體인 大寒國際製鐵借款團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KISA)李 結成되어 1968年 까지 豫備協定, 基本協定, 追加協定의 3次例에 걸쳐 協商이 이루어졌다. KISA와의 協商이 進行되면서 1967年 7月에는 浦項이 製鐵所의 立地로 決定되었고 같은 해 9月에는 대한중석 이 綜合製鐵事業의 主體로 選定되었다. 이어 1968年 4月 1日에 대한중석 을 母胎로 하여 浦項製鐵이 創立되었다. [3] :36

大韓民國 政府 가 3億 원(75%), 대한중석이 1億 원(25%)을 出資하여 1968年 4月 1日에 設立資本金 4億 원으로 設立된 포항종합제철 株式會社는 國營企業으로 運營되었다. 박태준 은 대한중석에서의 成功을 바탕으로 創業 人力 39名과 함께 포항종합제철 株式會社의 創業式을 서울 鳴動 유네스코 會館에서 開催했다. 하지만 當時 抛撤이 正常化되기까지는 많은 難關들이 가로놓여 있었다. 製鐵所를 建設하기 위한 資金은 KISA에 期待하고 있었지만 그해가 다 가도록 제대로 된 資金 支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當時 世界銀行의 韓國 擔當者인 英國人 자페가 抛撤을 經濟性이 없다고 判斷한 것이 致命的인 弱點으로 作用했다. 結局 견디다 못한 朴泰俊은 1969年 1月 KISA의 母企業인 코퍼스의 포이 會長을 만나기 위해 美國으로 갔다. 밤늦은 時刻까지 포이에게 韓國의 狀況과 製鐵所의 必要性을 이야기했지만 事業的인 面에서 斷乎했던 포이 앞에 結局 挫折할 수밖에 없었다. 結局 KISA로부터 次官을 調達하는 데 失敗하였다. 內心 未安했던 포이 側의 配慮로 朴泰俊은 하와이의 高級콘도에서 休息을 보내게 되었다. 이 休息 期間 동안 朴泰俊은 抛撤 建設에 關한 資金을 動員할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는데 그것은 對日 請求權 資金이었다. 當時 8千萬 달러 程度의 對日 請求權 資金이 남아 있었고, 日本은 資金을 提供하면서 돈의 用處를 明示해뒀으나 그것을 바꿀 수 있다면 問題는 쉽게 解決될 수 있었다. 그 後 朴泰俊은 日本 政府와 合意한 끝에 資金을 製鐵所 設立에 有用할 수 있게 만들었다. [4] [週 1]

當時 日本 政府는 美國 主導의 KISA가 崩壞하면서 本人들이 主導權을 잡을 수 있다고 보았고, 製鐵所로 인한 環境公害 問題가 社會的인 이슈가 되어 鐵鋼工業設備를 販賣할 크고 安定的이며 中長期的인 프로젝트가 必要하였다. 또한 꾸준히 技術을 蓄積해온 韓國의 意志가 斷乎하다고 判斷했기에 資金을 製鐵所 建立에 流用하는 것을 同意하였다. 對日 請求權 資金은 10年間 分割하여 日本의 生産物과 人力을 代身 提供하는 것이었기에 日本 政府와의 事前 合意는 必須的이었다. [5]

政府는 以後에도 1968年부터 1992年 까지 現金出資 2341億 원, 對日請求權 資金 128億 원(5,080萬 달러), 現物出資 150億 원 合計 2,205億 원을 出資하였다. 條鋼基準 演算 103.2萬t 規模의 포항종합제철은 1973年 7月 3日에 竣工式을 擧行하였다. 포항종합제철은 朴正熙 政權 이 推進한 重化學工業의 象徵的 存在였다. [6]

抛撤의 發展

鐵鋼 一貫作業 形態의 포항제철은 1976年 5月 第2期 設備擴張工事를 竣工, 條鋼基準 演算 260萬t 規模로 擴大되었으며 1978年 12月에는 條鋼基準 演算 550萬t 規模의 第3期 設備擴張工事를 竣工했다. 1981年 2月에는 條鋼基準 演算 850萬t 規模의 第4期 設備擴張工事를 竣工했는데, 제3기 竣工 當時 鐵鋼需要의 持續的인 增加趨勢 展望으로 第2製鐵工場의 建設計劃이 樹立·推進되었다. 1987年 5月 條鋼基準 演算 270萬t 規模의 光陽 第1期 設備工事가 完工되었고 1988年 10月에는 同一規模의 第2期 設備工事가 竣工되었다. 포항종합제철은 浦項 의 一貫製鐵所에 이은 光陽에 第1·2期 設備를 完工·稼動시키고 있어 設備能力의 擴大에 主導的 役割을 하였다. 抛撤은 現在 進行하고 있는 條鋼基準 演算 270萬t 規模의 光陽 第3期 設備擴張事業을 1990年 中에 完工한 後 條鋼基準 演算 330萬t 規模의 光陽 第3期 設備擴張 事業을 1990年 中에 完工한 後 條鋼基準 演算 330萬t 規模의 第4期 設備擴張 事業이 1992年 完工되어 鳥綱自給率을 더욱 증가시켰다. [7]

포항제철은 1994年 3月에 김만제 前 副總理를 4代 會長으로, 김종진 副社長을 7代 社長으로 選任함으로써 創立 後 처음으로 外部 人士에 依한 最高經營陣을 構成하였다. 김만제 會長의 就任을 契機로 포항제철은 經營 全般에 걸쳐 本格的인 體制變換氣를 맞이하였다. 김만제는 1994年 4月의 創立 26周年 記念辭에서 組織의 柔軟性, 民主性, 透明性에 立脚한 "綠色經營哲學"을 提唱하였다. [3] :142

民營化, 그 以後의 포스코

1998年 7月 3日 政府 는 政府 및 産業銀行 保有持分 26.7%를 1人當 3% 限度로 內外國人에게 分散 賣却하는 方案을 發表하였다. 以後 政府 및 産業銀行 保有持分이 여러次例 分割하여 賣却되었다. [8] 2000年 10月에 産業銀行 이 保有하고 있던 持分 36%를 賣却하여 完全히 民營化되었다. [9] 2002年 에 名稱을 포항종합제철株式會社에서 포스코로 變更하였다. 2003年 에 赴任한 이구택 會長은 4年間 賣出額과 營業利益을 各各 71%, 112% 높이고, 株價도 2003年 3月에 99,000원臺에서 2007年 基準으로 30萬 원을 훌쩍 넘겨 놓았다. 또한 2006年 부터 鐵鑛石 山地인 印度 에서 유례없는 國外 製鐵所 建立을 推進 中이었던 그는 포스코를 世界 속의 企業으로 바꿔놓았다는 評을 듣고 있었다. [10]

뉴욕 (1994年 上場), 런던 (1995年 上場), 도쿄 (2006年 上場) 證券市場에도 포스코 株式이 上場되어 있다. 포스코에 對하여 2007年 아르셀로 美頉 그룹이 敵對的 引受合倂을 試圖하여, 포스코가 經營權의 防禦를 위하여 約 1兆 원에 達하는 돈을 消費하면서 自社株를 買入하였다. [11] [12] 結局 아르셀로 美頉 의 敵對的 合倂試圖는 成功하지 못하였으나, 포스코는 當時 合倂 試圖가 可能하였던 것은 外國人 持分이 60%를 上廻하였기 때문이라고 判斷하여, 友好株式을 確保하기 위하여 2006年 10月 신일본제철 과 持分 2%를 相互 買入하기로 하는 約定을 締結 [13] 하였고, 2008年 國民銀行 과 3,000億원에 相當하는 株式을 맞交換하였다. [14]

비전 및 슬로건 [ 編輯 ]

포스코는 2018年 7月, 第9代 崔正友 會長의 就任과 함께 會社의 새로운 經營비전 'With POSCO'를 宣布했다. ‘With POSCO’ 達成을 위한 戰略으로는 顧客, 供給社, 協力社 等 비즈니스 파트너와 함께 價値를 追求하는 Business With POSCO, 더 나은 社會를 함께 만들어 가는 Society With POSCO, 信賴와 創意의 企業文化를 함께 만들어가는 People With POSCO를 提示했다. 또한 單純히 利潤을 創出해 내는 經濟 單位가 아닌 社會的 責任을 完遂해 가야 하는 ‘企業市民’으로써의 役割을 强調했다. [1]

支配構造 [ 編輯 ]

CEO [ 編輯 ]

서울 POSCO 센터
歷代 CEO [15]
이름 任期 비고(생존 與否)
김학동 2022年 3月 ~ 現在

포항제철 (現 포스코)의 初代 會長이었던 朴泰俊은 抛撤을 創業 25年이란 짧은 期間에 世界的인 鐵鋼業體로 키운 鐵鋼業界의 巨木으로 꼽혀 왔다. 設立 當時부터 政治 外風으로부터 포스코를 지키는 울타리 役割을 해 온 朴泰俊은 金永三 政府 와 不和로 結局 政權 樹立 直前인 1992年 10月 5日 會長職 辭退書를 提出했다. 朴泰俊은 金永三 민자당 大統領 候補의 選擧對策委員長職을 拒絶하고 白衣從軍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抛撤은 緊急理事會를 召集, 朴泰俊의 辭退 番의(飜意)를 促求키로 決意하기도 하였다. [16] 會長職은 황경로 當時 副會長이 넘겨 받았다. 10月 9日 午後, 緊急理事會는 代表理事 會長에 황경로 副會長, 代表理事 副會長에 정명식 社長, 代表理事 社長에 박득표 代表理事 副社長을 各各 選任했다. [17] 1993年 3月 12日 第25回 定期株主總會에서 新任會長에 정명식 現 副會長, 社長에는 조말수 首席 副社長이 昇進, 選任되었으며 또한 朴泰俊 名譽會長과 황경로 會長 박득표 社長의 辭表가 各各 修理되었다. 황경로는 任期 6個月을 艱辛히 채운 것이다. [週 2] [18] 이날 朴泰俊의 側近 人士들도 排除되었다.

[19] 1993年 末, 朴泰俊은 日本에서 月刊誌 "한국논단"과의 會見에서 韓國 政府와 抛撤을 强度높게 非難했고, 特히 조말수 社長 等 改革主義勢力을 非難했다. 1994年 1月初, 人事 問題 等으로 정명식 會長과 조말수 社長 間의 葛藤이 發生하였고, [20] 이어 2名 모두 同伴退陣하는 事態가 發生하였다. 1994年 1月 2名은 辭表를 提出하였다. 정명식 會長은 副會長에서 會長으로 昇進한 지 1年餘 만에 물러난 것이다. 1994年 3月 8日 第26期 定期株主總會에서 이들 2名의 辭表가 修理, 退任하였다. 이렇게 約 2年間의 過渡期를 거쳐 이 株主總會에서 김만제가 새 會長에 選任되었다. [21] 財務長官 出身의 김만제는 史上 첫 外部人士人 會長이었고 唯一한 外部人士 拔擢 記錄을 남겼다. 當時 포스코 持分을 재무부가 20.0%, 산업은행이 14.7% 保有하던 時節이어서 外部人士에 對한 뒷말이 많았다. 그 前까지 포스코 內部에서는 社長-副會長-會長 巡으로 段階를 밟아 昇進하는 節次를 깼다는 批判이 컸다. 김만제 會長은 金永三 政府 時節에 4年間 포스코 首長職을 맡았다.

김대중 政府 때는 이른바 "DJP 連帶"를 통해 박태준 名譽會長(當時 자민련 總裁)의 發言力이 다시 强化된 1998年 當時, 포스코는 監査院의 大大的인 監査를 받은 바 있다. 60餘 名의 監査 人力이 75日 以上 監査에 매달렸을 程度이다. 當時 政治權에서는 朴泰俊 當時 자민련 總裁와 유상부 會長 等 "TJ 師團"李 監査院 監査를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김만제 前 會長 體制의 痕跡을 지울 機會로 여기고 있다는 評價가 支配的이었다. [22] 結局 김만제 會長은 물러났다. [23] 兪 前 會長은 김대중 政府 時節인 지난 1998年 3月부터 2003年 3月까지 5年間 포스코를 맡았다. 兪 前 會長은 連任에 成功했지만 노무현 政府가 出帆하면서 任期를 못 채우고 이구택 會長에게 자리를 내줬다.

2007年 2月, 이구택의 連任이 決定될 때, 社外理事들로 構成된 CEO候補推薦委員會는 포스코가 오너없는 企業인 만큼 CEO 交替 以後 經營 一貫性을 維持하기 위해 透明한 承繼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經營陣에게 要求했다. 또 團地 代案이 없다는 理由만으로 旣存 CEO가 連任하는 弊端도 事前에 막아야 한다는 指摘도 있었다. [24] 2008年 11月, 정준양(生産技術部門長) 代表理事 社長이 포스코건설 社長職務代行으로 選任되면서 代表理事職을 辭任했다. 이에 따라 포스코는 3人 代表理事 體制에서 이구택 會長, 윤석만 社長 等 2名이 代表理事를 맡는 體制로 바뀌었다. [25] 2009年 1月 15日 이구택 會長은 理事會에서 辭任을 表明하였다. 포스코 側은 "李 會長은 글로벌 企業으로의 成長基盤을 構築한 것을 自身의 使命을 다했다고 스스로 判斷하고 後進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勇退를 決定했다"고 말했다. [26] 金 前 會長 以後 유상부 會長과 이구택 會長은 모두 포스코 出身이다. 그러나 두 名 모두 連任에 成功했지만 政權이 바뀌면서 任期를 못 채우고 물러나는 記錄을 만들었다. [15] 2009年 1月 29日 最高經營者(CEO) 推薦委員會가 열렸다. 當時 會議席上에서 윤석만 포스코 社長은 外壓이 있음을 暴露했다고 알려져 있다.

CEO 推薦委 會議에 앞서 社外理事들은 이구택 會長을 비롯한 포스코의 主要 任員들을 個別的으로 불러 "어떤 사람이 次期 CEO로 적합하냐"는 質問을 던졌다. 이에 對해 任員들은 特定人을 擧論하지 않은 채 "이러이러한 資質을 갖춘 사람이 돼야 한다"는 趣旨의 答辯을 내놓았다. 그러나 <한겨레21> 取材에 應한 社外理事들은 "윤석만 社長의 暴露에 앞선 進行된 이구택 會長의 인터뷰에서, 이 會長은 정준양 社長을 뽑았으면 한다는 自身의 뜻을 明白하게 드러냈다"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22] 이러한 이구택 會長의 갑작스런 辭退 表明과 정준양 포스코 建設 社長의 次期 會長 內定으로 인해 政治權의 포스코 會長 人事 介入 疑惑이 提起되자, 社外理事 安哲秀 는 이를 否認하였다. [27] 이러한 疑惑과 關聯해, 浦項地方法院은 當時 會長 候補 選出 過程에서 열린 理事會 議事錄을 公開하라는 決定을 내렸다. [28] 2009年 2月 27日, 株主總會에서 정준양 李 代表理事 會長에 選任되었다. [29]

理事會 [ 編輯 ]

1997年 3月에 社外理事制를 導入하여 旣存의 社內理事 22名으로 構成되었던 理事會를 社內理事 9名, 社外理事 10名으로 構成하도록 改編하였다. 民營化 以後 포스코는 社外理事가 過半數인 理事會와 監査委員會, 理事候補推薦委員會 等을 構成해왔다. 2000年 3月에는 監査委員會 設置로 經營監督機能을 提高하여, 任員 成果年俸制 導入으로 經營成果에 聯動되는 經營陣 保守體系를 定立하였다. 2003年 定期株主總會에서는 理事候補推薦 및 評價委員會와 監査委員會를 全員 社外理事로 構成했다. 포스코는 이에 滿足하지 않고 社外理事 選任 節次를 改善하는 한便 社外理事 比重 擴大 等을 摸索함으로써 最上의 企業支配構造를 構築해 나가기로 했다. [30] 이에 따라 2004年에 旣存이 社內理事 7名, 社外理事 8名이던 것을 社內理事 6名, 社外理事 9名(社外理事 比率 62%)으로 改編하였다. 現在는 다시 各各 1名씩 減縮하여 社內理事 5名, 社外理事 6名으로 構成되어 있다. 社外理事는, 候補推薦諮問團에서 候補者를 推薦하고 (專門機關 美活用), 理事候補推薦委員會에서 資格審査 및 最終 推薦을 거친다. 評價補償委員會에서 CEO의 經營承繼 및 經營者 育成計劃을 樹立하며, 理事候補推薦委員會에서 代表理事 選任을 事前審議하고, 理事會 決意로 代表理事를 選任한다.(상법 第389條 1項 本文) 2004年 3月, 企業支配構造憲章을 制定, 公布하였다. 2010年 2月 ~ 3月, 理事會와 株主總會를 통해,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에서 理事會를 열고 常任理事 6名 中 2010年 2月末 任期가 끝나는 4名을 全員 交替하였다. 退陣한 常任理事는 윤석만 포스코建設 會長, 이동희 포스코 財務投資部門長(社長), 정길수 스테인리스部門長(副社長), 허남석 生産技術部門長(副社長)이다. 정준양 會長과 함께 2009年에 選任된 최종태 經營支援部文章을 除外하고 全員 물갈이되었다. 代身 박한용 포스코ICT 代表理事(社長), 오창관 포스코 副社長(마케팅部門長), 김진일 포스코 副社長(포항제철所長) 等 3名이 新任 常任理事가 되었다. 포스코는 2009年 2月 새로 出帆한 정준양 會長 體制 安着을 위해 3年 任期를 保障한 代身 新規 任命된 常任理事 任期는 1年으로 制限했다. [31]

經濟改革連帶는 포스코가 2009年 2月 27日 開催된 定期 株主總會에 3人의 新規 常任理事의 任期를 1年으로 定하는 等 理事들의 任期를 달리 定하는 時差任期救助(staggering board)를 維持하고 있는 理由에 對해 非公開 質疑書를 보냈다. 이에 對해 포스코는 理事會 運營의 安定性과 會社 經營의 連續性 維持가 可能한 範圍 內에서 成果主義에 바탕으로 한 柔軟한 經營을 통해 會社의 글로벌 競爭力을 提高할 수 있도록 3人의 常任理事 任期를 1年으로 定하였으며, 向後에도 常任理事의 任期를 彈力的으로 運營할 것이라고 答辯하였다. [32]

事業場 [ 編輯 ]

浦項製鐵所 [ 編輯 ]

浦項 포스코 製鐵所

浦項製鐵所는 60年代 農業 中心의 1次 産業에서 重化學工業을 育成하기 위해 1970年에 着工해 1981年까지 迎日灣 에 세워졌으며, 歷史的으로도 意味가 깊은 곳이다. 포스코 浦項製鐵所의 第1高爐는 지난 1973年 6月9日 이 땅에 最初의 쇳물을 吐해냈다. 이어 같은해 7月3日 포스코(當時明 포항종합제철株式會社)는 第1고로를 完全竣工해 國內 最初로 一貫製鐵所 稼動에 들어가 ‘韓國 鐵鋼神話’의 序幕을 올렸다. [33] 2023年 스테인리스 鳥綱 累積 生産量 5000萬 t을 達成했다. [34]

광양제철소 [ 編輯 ]

광양제철소

광양제철소는 1970年代 國家經濟가 飛躍的으로 發展하면서 暴發的으로 增加하는 鐵鋼需要에 對應하기 위해 포항시에 이어 全羅南道 光陽市 에 우리나라에서 두 番째로 세워진 製鐵所다. 광양제철소가 들어서기 前 이곳은 漁業과 김養殖을 主로 하던 조용한 바다였었는데 1982年부터 15,074,448m²의 바다를 埋立해 1985年에 着工했고 汝矣島 5倍 크기의 世界에서 가장 큰 製鐵所로 발돋움하는 大役事가 이루어진 우리나라 産業發展의 한 典型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광양제철소가 들어선 光陽灣은 우리나라 最南端 中央에 位置한 海洋 經營의 要衝地로 河東, 順川, 麗水, 求禮와 接한 光陽灣의 中心地이다. 本來 크고 작은 13個의 섬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中 11個의 섬이 爆破되어 工事에 使用되었다. . [35]

2012年 3月 광양제철소는 鍍金製品 總生産量 5,000萬 t을 2012年 3月 達成했다. [36]

2019年 12月 鳥綱 累積生産 5億톤을 達成했다. [37]

한便, 포스코는 該當 事業場(광양제철소) 等 湖南 情緖를 考慮하여 [38] 1999年 쌍방울 레이더스 野球團 - 1998年 以後 해태 타이거즈 野球團 引受對象 物望에 오르기도 했지만 [39] 公企業이란 關係로 프로팀을 引受하거나 創團할 境遇 國會의 同意節次가 必要하다는 理由 때문에 [40] 挫折된 바 있었으며 이로 인해 該當 事業場(광양제철소)이 세워지기 前까지 포항제철 野球團 全國體典 當時 野球 慶北 代表로 參加했으나 [41] 뒷날 野球 全南 代表로 參加(1998年까지)했다.

主要 技術 [ 編輯 ]

파이넥스 公法 [ 編輯 ]

가루 形態의 鐵鑛石과 石炭을 使用해 鐵鋼製品 生産 過程에서 發生하는 溫室가스 排出量을 줄일 수 있는 파이넥스 公法 을 開發해 使用하고 있다. [42]

스트립 캐스팅 [ 編輯 ]

스트립캐스팅은 쇳물을 슬래브로 만들고 이를 다시 加熱, 連續 壓延해 熱演鋼板(핫코일)을 만드는 旣存의 公正과는 달리 쇳물에서 直接 얇은 鋼板을 製造할 수 있는 鐵鋼製造 工程이다. 스트립캐스팅은 特히 旣存의 加熱 壓延 工程을 省略할 수 있어 投資費는 勿論 에너지 使用量과 公害物質 排出量을 줄일 수 있고 製造工程과 납祈禱 短縮되는 長點이 있다. 포스코는 지난 89年 傘下 産業科學技術硏究所와 함께 小規模 試驗設備로 스트립캐스팅 工程開發을 始作, 自體 技術을 確保했다. [43]

受賞 [ 編輯 ]

포스코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의 企業支配構造評價에서 2004年, 2006年, 2007年, 2008年에 最優秀企業으로, 2005年에 優秀企業으로 選定된 바 있다. 포스코는 企業支配構造 憲章을 導入하여 支配構造 改善意志를 實踐하고, 集中投票制 및 書面에 依한 議決權 行事制度를 導入하였으며, 理事會에 6個의 委員會를 設置, 運營함으로써 理事會의 專門性을 提高한 바 있다. SAM 다우존스 持續可能指數의 持續可能企業으로 2005年부터 2009年까지 連續 選定되었다. 2006年 2月에는 韓國經營者總聯盟 等 經濟5團體의 透明經營對象을 受賞하였다. 2009年 6月 30日 氣候變化對應을 위한 全社的 環境經營 活動을 높이 評價받아 國內 環境關聯 喪 中 가장 權威 있는 國家環境經營大賞에서 專門對象을 受賞했다. 2011年 6月 18日 서울 카이스트 (KAIST) 經營大學院에서 韓國知識經營學膾가 主管하고 知識經濟部와 매일경제신문사가 後援한 ‘2010 知識經營學會 學術大會’에서 ‘大韓民國 知識經營賞’을 受賞했다. 2011年 9月 28日 韓國上場會社協議會와 金融監督院이 共同으로 主管한 第15次 監査人大會에서 監査對象을 받았다. 2011年 6月 24日 韓國去來所 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主催한 ‘2011 企業支配構造 優秀企業’ 施賞式에서 ‘대상(大賞)’을 받았다. 2011年 12月 20日 매경미디어센터에서 열린 ‘第8回 大韓民國 新成長經營大賞’ 施賞式에서 大企業 部門 大統領表彰을 受賞했다. 2011年 9月 28日 韓國上場會社協議會와 金融監督院 이 共同으로 主管한 第15次 監査人大會에서 監査對象을 받았다.

最近 動向 [ 編輯 ]

포스코는 ‘世界에서 가장 競爭力 있는 鐵鋼社’에 9年 連續 1位로 選定됐다. 世界鐵鋼專門分析機關 WSD(World Steel Dynamics)는 全 世界 36個 鐵鋼史를 評價한 結果 ‘世界에서 가장 競爭力 있는 鐵鋼社’로 포스코를 9年 連續(2010年~) 1位로 選定했다. 2018年 포스코는 技術革新, 原價節減, 加工費用, 勞動熟鍊度, 構造調整, 投資環境, 高附加價値 製品構成, 下公正 競爭力  等 總 8個 項目에서 滿點인 10點씩을 獲得하며 지난해 보다 0.06點 높은 8.37點으로 綜合 1位를 記錄했다.

系列社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內容主
  1. 政府는 以後에도 1968年부터 1992年까지 現金出資 1934億 원, 對日請求權 資金 121億 원(3080萬 달러), 現物出資 150億 원 合計 2205億 원을 出資하였다.
  2. 退任 後인 1993年 6月 16日, 去來業體와 協力業體로부터 巨額의 賂物을 받은 황경로 前抛撤會長(62歲)과 유상부 前抛撤副社長(51歲)李 特加法違反(賂物收受)嫌疑로 拘束되었다. 黃前抛撤會長은 1990年 12月부터 2年 동안 朝鮮耐火 等 5個 去來業體로부터 원활한 關係를 維持해 달라는 付託과 함께 朴泰俊 前會長의 賂物과는 別途로 數次例에 걸쳐 9,200萬원을 받은 嫌疑이다. 兪 前抛撤副社長은 會社의 海外業務를 擔當하면서 日本 이토추 上司 浦項事務所長 무로다니로부터 工場設備供給權을 달라는 付託과 함께 모두 8600萬 원을 받는 等 3個 業體로부터 모두 1億6百萬 원을 받은 嫌疑이다.
參照週
  1. 「協心(協心)」의 鎔鑛爐(鎔鑛爐)
  2. 포스코(POSCO)라는 會社 이름은 어떻게 만든 거예요?
  3. 송성수 (2004). 《소리없이 世上을 움직인다》. 知性史. ISBN   89-7889-0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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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