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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最初 勝利’ 최용남이 海兵隊로 간 까닭은|주간동아

週刊東亞 1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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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最初 勝利’ 최용남이 海兵隊로 간 까닭은

崔在亨 出馬로 再評價 大韓海峽海戰, 次期 航母는 백두산함으로

  • 이정훈 記者

    hoon@donga.com

    入力 2021-07-27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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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장 시절의 고(故) 최용남 해병 소장. [사진 제공 · 전쟁기념관]

    准將 時節의 故(故) 최용남 海兵 所長. [寫眞 提供 · 戰爭記念館]

    大選 競爭이 加熱되면서 候補者 깎아 내리기도 本格化했다. ‘까도 까도 美談’뿐이라던 崔在亨 前 監査院長의 잘못 들추기도 펼쳐졌다. 이런 攻擊은 뜻밖의 事態를 만들 수도 있다. 崔 前 院長의 父親 故(故) 최영섭 海軍 大領이 參戰한 大韓海峽海戰도 자칫 뒤집기 對象이 될 수 있다.

    大韓海峽海戰은 6·25戰爭 當時 우리 軍 最初의 勝戰이었다. 現役 時節 최영섭 氏는 專攻(戰功)이 많았지만 軍에서 이른바 잘나가진 못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海洋少年團 顧問으로 活動하며 海軍과 바다를 爲해 獻身했다. 海軍도 아들인 崔 前 院長이 大權에 挑戰하기 前까진 최영섭 氏를 내세워 海軍을 弘報했다. 다만 大韓海峽海戰 主役은 따로 있다. 백두산함 艦長이던 故(故) 최용남(崔龍男·1923~1998) 海軍 中領(最終 階級 海兵 所長)이다.

    榮光 속 葛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부친 고(故) 최영섭 퇴역 해군 대령. [동아D]

    崔在亨 前 監査院長의 父親 故(故) 최영섭 退役 海軍 大領. [東亞D]

    崔在亨 欠집 내기가 本格化하면 “勝戰 主役이 최영섭으로 造作됐다”며 大韓海峽海戰을 貶下하려는 主張이 나올 수 있다. 海軍과 海兵隊의 葛藤을 增幅시키려 할 수도 있다. 이를 막으려면 이 海戰을 客觀的으로 바라봐야 한다. 勝利의 榮光 속 숨겨진 葛藤을 드러내고 敎訓을 分明히 하는 것이다. 軍이 政治에 利用되는 事態를 막고 海軍과 海兵隊를 발전시키는 方案을 찾기 위해 大韓海峽海戰을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平北 구성군 出生인 최용남 氏는 名文 新義州 洞中(東中)을 首席으로 卒業하고 1942年 연희전문 商科에 入學했다. 그의 父親은 朝鮮日報 構成支局長으로서 布木商과 旅館業 等으로 財産을 일궈 몰래 獨立軍을 支援했다. 當時 日帝의 ‘學徒兵 支援’에 끌려가게 되자 父親은 그를 滿洲로 시집간 큰누이 집에 숨어 있게 했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가 크게 傷한 모습으로 日本 巡査와 함께 滿洲로 왔다. 최용남 氏는 “더는 아버지를 괴롭히지 마라”는 條件을 걸고 學徒兵에 志願했다.

    西太平洋 어느 섬에 配置된 그는 美軍機 爆擊과 그것보다 苛酷한 差別 속에서도 1945年 봄 將校試驗에 挑戰해 合格했다. 같은 해 8月 1日 日本 陸軍 少尉로 任官했는데 보름 後 日帝가 降伏했다. 分斷으로 以北 故鄕에 가지 못하게 된 그가 母校를 찾아가자 유억겸 當時 演戱專門 學長이 “자네는 軍 經驗이 있고 우리나라 3面이 바다이니 海軍으로 가라”고 했다. 有 學長 말을 들은 그는 손원일 初代 海軍參謀總長(國防部 長官 歷任)李 組織한 ‘解放兵端(海防兵團)’에 들어가 少尉가 됐다. 1948年 政府 樹立 後 正式으로 海軍이 出帆하고 이듬해 그는 中領으로 進級했다.



    當時 韓國 海軍은 손원일 總長 主導로 戰鬪艦 導入에 애쓰고 있었다. 손 總長이 벌인 募金運動과 李承晩 大統領의 도움으로 6萬 달러를 마련했다. 英語에 能한 최용남 當時 中領에게 美國으로부터 購入할 戰鬪艦을 알아보라는 指示가 떨어졌다. 이에 앞서 崔 中領은 美國에서 250t級 漁業指導船(後日 ‘지남호(指南號)’)을 導入하라는 任務도 받은 터였다. 渡美한 그는 美 海軍이 自國 海洋大에 寄贈한 450t級 哨戒艇(patrol craft·PC)에 注目했다. 함부로 賣却할 수 없는 現役 軍艦과 달리 武裝 解除된 哨戒艇은 購入이 可能했기 때문이다. 美國 側도 海洋大가 引受한 陷穽을 韓國이 導入하는 것에 同意했다.

    이 艦艇은 整備를 받고 1949年 12月 26日 大韓民國 海軍 ‘백두산함’으로 거듭났다. 函番은 ‘럭키세븐’을 딴 701. 백두산함은 하와이에 入港해 美 陸軍이 提供한 3인치 陸上砲를 艦砲 삼아 裝着했다. 괌에 들러선 砲彈 100發을 引受했다. 백두산함이 이듬해 4月 10日 鎭海에 入港하자, 海軍은 崔 中領을 艦長 삼아 두 달間 全國 主要 港口를 돌며 國民에게 戰鬪艦을 마련한 事實을 弘報케 했다.

    6月 24日 ‘全國 투어’를 마친 백두산함이 鎭海에 돌아온 이튿날 6·25戰爭이 터졌다. 25日 새벽 北韓 海軍은 여러 隻의 陷穽을 動員해 東海岸 옥계·墨湖·죽변으로 武裝兵力을 上陸하게 했다. 그러곤 上陸에 失敗한 것처럼 兵力을 후퇴시켰는데 날이 저물자 艦艇 한 隻을 그대로 南下시키는 양동(陽動)作戰을 펼쳤다. 놀란 海軍은 이날 正午 ‘作戰命令 49號’로 崔 中領이 指揮하는 백두산함에 出動 指示를 내렸다. 25日 저녁

    8時쯤 백두산함은 釜山 앞바다를 지나 東海로 들어섰는데 犬侍病이 怪船舶을 發見했다. 探照燈을 비추니 機關砲와 北韓 人民軍이 보였다. 軍 指揮部의 昏迷로 백두산함은 迂餘曲折 끝에 이튿날 0時 10分 射擊 承認을 받았다. 곧이어 0時 30分쯤 우리 海軍 史上 처음으로 ‘艦砲射擊’을 했다.

    대한해협해전 승리 주역인 해군 백두산함. [사진 제공 · 해군]

    大韓海峽海戰 勝利 主役인 海軍 백두산함. [寫眞 提供 · 海軍]

    ‘全國 투어’ 다음 날 터진 6?·?25

    炒炭은 命中하지 않은 듯, 怪船舶이 卽刻 應射했다. 謀議練習만 해본 抛術部가 3인치 砲彈을 10餘 發째 날리자 怪船舶에서 엔진 演技와는 다른 검은 煙氣가 피어올랐다. 砲彈이 怪船舶 옆구리를 찢고 들어가 엔진室을 破壞한 것이 분명했다. 決定打를 맞은 敵艦이 繼續 激烈히 機關砲를 쏴 백두산함度 繼續 砲擊했는데, 35番째 砲彈이 砲身에 걸려 射擊 不能이 됐다. 多幸히 그때쯤 敵艦은 抵抗을 그치고 沈沒했다. 이 交戰으로 백두산함 여러 곳이 피탄됐고 2名이 戰死했다. 1950年 2月 海士 3期로 任官한 최영섭 氏는 當時 유용빈 砲術腸을 補佐하는 甲板士官으로서 백두산함에 탔다. 犬侍病이 怪船舶을 發見했을 當時 當直士官이던 그는 遲滯 없이 艦長 崔 中領에게 報告했다. 그리고 敵彈이 쏟아지는 甲板에서 水兵들을 指揮해 韓國 海軍 最初의 戰鬪이자 勝戰인 大韓海峽海戰에 一助했다.

    萬若 海軍이 敵艦을 막지 못했다면 北韓 特攻隊가 釜山에 上陸해 모든 戰線에서 밀리던 大韓民國은 崩壞됐을 公算이 크다. 백두산함 全 將兵은 武功勳章을 받았는데, 崔 中領은 ‘살아서는 받기 어렵다’는 太極武功勳章을 授勳했다. 美軍은 日本에서부터 釜山을 잇는 海上 補給路를 지켜냈다며 은성(銀星)武功勳章을 授與했다. 崔 中領은 以後 仁川上陸作戰에 參加해 忠武武功勳章度 받았다. 海軍에서 가장 많은 實戰과 專攻을 쌓은 이가 된 것이다. 그러자 “다음 總長은 當身이네” “眞짜로 北韓 艦艇을 擊沈한 것 맞느냐”며 弄談을 핑계로 猜忌하는 李珥 늘어났다.

    苦心하던 崔 中領에게 人生의 變曲點이 찾아왔다. 1949年 4月 15日 申鉉濬 中領이 海軍에서 大隊 規模 兵力을 떼어내 海兵隊를 創設한 터였다. 海兵隊 創設에 參與한 解放兵端 動機 김성은 中領이 崔 中領에게 合流를 勸했다. 1951年 말 決心을 굳힌 崔 中領은 陸軍 砲兵學校에 들어가 1年間 敎育을 받고 1953年 初 海兵隊로 옮겼다. 그리고 所長까지 進級해 海兵隊 1師團長 等을 지냈으며 5·16 軍士政變 後 轉役했다. 그는 朴正熙 政權에 協助하지 않았기에 그 뒤로 다시 답답한 歲月을 보냈다.

    1973年 朴正熙 政權은 海兵隊司令部를 解體해 海軍本部에 倂合시켰는데, 그 때문인지 海軍과 海兵隊는 以後 大體로 反目했다. 1987年에야 海兵隊司令部가 復活해 海軍에서 獨立했다. 海軍은 1988年 처음으로 大韓海峽海戰을 기리기로 하고 釜山 大淸公園에 戰勝塔을 세웠다. 최용남 氏는 백두산함 艦長 資格으로 參席했으나 海軍 中心의 行事를 不便해했다. 한동안 海軍은 大韓海峽海戰 行事를 海軍 行事로만 限定하는 短見을 維持했다. 海軍 最初의 戰鬪艦이자 升轉함 백두산함度 일찌감치 古鐵로 팔렸다.

    英雄들 오롯이 記憶해야

    戰爭 後 최영섭 氏는 어찌 지냈을까. 그 또한 많은 專攻을 세우고 武功勳章을 받았지만 到處에서 ‘時期의 덫’에 걸려 大領으로 轉役했다. 老兵들이 續續 別世하는 가운데 大韓海峽海戰 勝戰의 산證人으로 남아 있다 올해 他界했다. 海軍은 뒤늦게 백두산함 複製品 乾燥를 推進했는데, 崔在亨 前 院長이 大權 挑戰에 나서자 망설이고 있다. 이를 두고 一角에선 “大選과 無關하게 複製品 乾燥를 서둘러라” “백두산함 複製品을 光化門廣場 李舜臣 銅像 附近에 設置하라”는 竹篦 소리도 나온다. 最近 韓國 海軍은 輕航空母艦 導入을 推進하고 있다. 첫 輕航母에 백두산함이라는 銜名을 繼承하면 어떨까. 潛水艦에 손원일 初代 海軍參謀總長, 高速艦에 延坪海戰 戰死者인 윤영하 少領의 이름을 붙였듯, 새 海軍 艦艇에 최용남이라는 이름을 붙여 海軍과 海兵隊 關係를 敦篤히 하자는 主張도 나온다. 大韓海峽海戰과 英雄들을 오롯이 記憶할 때 韓國 社會와 軍은 좀 더 成熟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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