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國을 代表하는 女性 監督 앤드리아 아널드의 映畫엔 늘 自傳的 要素가 조금씩 들어 있다. 그의 映畫에서 자주 反復되는 主題는 ‘버려진 少女들에 對한 사랑’일 테다. 이런 態度는 아널드에게 名聲을 안겨준 두 番째 長篇 ‘피쉬 탱크’(2009)를 통해 分明히 드러났다. 길거리에서 홀로 자라는 少女들, 삶의 難關을 스스로 뚫으려는 그들의 몸부림은 觀客의 感情을 뜨겁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그의 映畫엔 언젠가부터 女性 觀客의 特別한 應援이 뒤따른다.
네 番째 長篇인 ‘아메리칸 허니’는 아널드의 첫 美國 映畫다. 18歲 少女 스타(사샤 레인 분)는 두 어린이(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쓰레기場을 뒤지고 있다. 먹을거리를 求하기 爲해서다. 그때 마트 駐車場에서 自己 같은 10代들이 미니버스에 올라타는 모습을 본다. 그들의 ‘危險할 程度’로 자유로운 態度, 귀를 울리는 힙합 爲主의 젊은 音樂은 單숨에 스타의 關心을 잡아끈다. 10代들의 리더인 제이크(샤이아 러버프 分)는 自身들을 訪問販賣하는 사람이라고 紹介하며 合流를 提案한다. 自己 몸을 더듬는 ‘아빠’라는 男子, 아이들을 自身에게 내팽개친 채 살아가는 ‘엄마’(正確한 關係는 알 수 없다)와 함께 살던 스타는 도망치듯 집을 나와 제이크 一行에 合流한다.
아널드의 成長期 環境은 스타와 別로 다르지 않았다. 父母는 10代였고, 그들이 곧 헤어지는 바람에 아널드가 어린 동생들을 키우다시피 했다. 어릴 때부터 뭔가를 쓰며 時間을 보내던 아널드는 高校를 自退한 뒤 TV 어린이 프로그램에 出演하며 演技者의 삶을 始作했다. 그 渦中에도 늘 뭔가를 썼다. 自身의 이야기가 映畫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45歲 때 뒤늦게 監督에 挑戰했다. 그런 挑戰의 삶이 아널드 映畫의 美德이고, 이는 ‘아메리칸 허니’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아널드가 英國에서 만든 前作 ‘피쉬 탱크’와 달리 이 映畫에선 버려진 10代 少女의 삶이 個人 次元을 훌쩍 넘어 社會的 問題로 擴大돼 있다. ‘아메리칸 허니’에서 10代들이 집과 學校에서 (어쩔 수 없이) 나와 거리를 떠도는 것은 이제 別로 특별한 일이 아니다. 靑少年은 事實上 어른에게 搾取되는 訪問販賣 같은 劣惡한 勞動에 내몰려 있다. 反面 ‘돈과 時間밖에 없다’고 말하는 白人 老人들은 스타의 젊음을 利用할 口實을 찾는다. 階層別?·?世代別 隔差가 赤裸裸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世界 最高 國家’ 美國에서 말이다.
아널드의 映畫가 觀客으로부터 支持를 받는 것은 이런 일을 感傷的으로 그리지 않아서다. 보기에 따라서는 10代들이 구렁에 빠진 듯한데, ‘아메리칸 허니’가 强調하는 것은 그런 危機에 맞선 이들의 生命力이다. 마치 잭 케루악의 小說 ‘길 위에서’ 속 疾走하는 靑春의 熱情을 스크린에 옮긴 것 같다. 大陸을 橫斷하며 한瞬間도 지루할 수 없다는 듯 靑春을 불태우고 있어서다. ‘아메리칸 허니’는 길 위에서 彷徨하는 이들에 對한 뜨거운 應援이다. 第69回 칸映畫祭(2016) 審査委員賞 受賞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