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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新東亞

유럽歷史紀行

터키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 興亡盛衰 새겨진 유라시아의 關門

  • 백승종 韓國技術敎育大 待遇敎授

    chonmyongdo@naver.com

    入力 2019-04-05 10: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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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탄불’ 하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推理小說 ‘오리엔트 特級 殺人’이 떠오른다. 유럽의 主要 都市를 하나로 잇는 超豪華 鐵道 旅行 中 일어난 殺人事件을 다룬 推理小說이다. 이스탄불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가는 關門으로서 먼 옛날부터 유럽人에게 특별한 存在로 다가왔다. 이곳에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아시아의 낯선 風景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의 榮辱은 大體로 東西 두 陣營의 關係에서 비롯됐다.
    이스탄불 전경.

    이스탄불 前景.

    터키 最大의 都市인 이스탄불은 都市가 形成된 그리스 時代(紀元前 660年)에는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불렸고, 書記 330年 콘스탄티누스가 이곳을 東로마帝國의 首都로 삼으면서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이름이 바뀌었다. 以後 1453年 오토만 帝國의 征服으로 只今의 이스탄불로 불리게 되기까지 長長 1123年 동안 유럽 文明의 本據地로 君臨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온 世界 珍貴한 物件이 넘쳐났다. 이 都市는 아득한 古代부터 15世紀까지 國際貿易의 中心地로서 큰 利得을 봤다. 오늘날에도 이곳은 터키의 政治와 文化, 宗敎的인 面에서 中心地 役割을 하고 있다. 四通八達의 交通網은 貿易과 商業, 金融業의 隆盛을 可能케 했다. 

    내가 이곳을 訪問한 때는 雨期가 끝날 무렵인 4月이었다. 사흘에 하루쯤 비가 내렸고 氣溫은 서울의 4月 中旬과 비슷해 攝氏 7度에서 17度를 오르내렸다. 바깥 活動을 하기에 딱 좋은 날씨여서 둘러보고 싶은 곳은 거의 다 볼 수 있었다. 이스탄불 出身의 親舊인 이스마일은 이스탄불의 地理的 位置를 强調했다. 이곳은 보스포루스 海峽과 골든혼(Golden Horn)· 마르마라海(海)에 依해 위스퀴다르, 베욜루, 파티프(이스탄불) 3地區로 나뉜다.

    世上의 富를 거머쥐다

    이스탄불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인 대규모 시장 그랜드 바자르.

    이스탄불 觀光客들의 必須 코스인 大規模 市場 그랜드 바자르.

    먼저 위스퀴다르는 아시아로 가는 東쪽의 前進基地로 高大에 蕃盛했다. 옛 이름은 ‘스쿠타리(Scutari 四角帽兄의 防牌)’. 그리스인들이 이곳을 占領한 뒤에는 ‘크리小폴리스(Chrysopolis)’로 이름이 바뀌었다. 크림전쟁(1853-1856) 當時 英國軍의 基地로 活用된 交通의 要旨이기도 하다. 

    베욜루는 中世 時代 交易 舞臺였다. 그 當時 베욜루 南部 갈라打 地域에는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貿易商社가 布陣해 있었다. 只今도 갈라打 周邊 埠頭가에는 여러 나라의 船舶이 櫛比하다. 베욜루 東쪽에는 一級 호텔과 레스토랑, 劇場이 櫛比하고 各國의 領事館도 눈에 띈다. 파티프는 그리스 植民都市 ‘비잔티움’이 있었던 만큼 歷史的으로 重要한 곳이라 할 수 있다. 後날 비잔틴제국(東로마)의 中心地이자, 콘스탄티노플의 中心이 됐고, 大帝國 비잔틴의 1100年 歷史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라는 點에서 意味가 크다. 



    그 當時 만들어진 城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아야소피아 大聖堂(現在는 아야소피아 博物館(Hagia Sophia Museum)’을 비롯해 이른바 兩大 이슬람 寺院으로 불리는 ‘아흐메드 寺院(블루 모스크)’과 ‘술레이만 寺院’도 이곳에 있다. 토프카피 宮殿(現在 博物館)과 考古學 博物館, 古代 오리엔트 美術館, 터키·이슬람 美術館 및 이스탄불 大學校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大規模 市場 ‘그랜드 바자르’는 現地人은 勿論 이곳을 처음 찾은 旅行客도 꼭 訪問하는 곳이라 都市에 活氣를 불어넣어준다. 

    콘스탄티노플의 隆盛은 ‘실크로드’와 關係가 깊다. 貿易路에서 가장 西쪽에 位置한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로 들어가는 關門으로 여겨졌다. 東쪽으로는 商業都市로 名聲이 藉藉하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이라크 바스라· 바그다드 等이 펼쳐져 있다. 

    舌禍 ‘아라비안나이트’의 舞臺이기도 한 바그다드는 古代 바빌론의 首都로, 바벨塔과 空中庭園으로 有名하다. 바스라는 屈指의 貿易港으로 로마 時代의 遺物이 많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度 主要 商業 據點都市였다. 이들 모두 古代 地中海 貿易의 中心地로서 실크로드로 連結돼 있다. 

    ‘실크로드’라는 用語는 19世紀 獨逸 地理學者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에 依해 처음 使用됐다. 실크로드는 中國에서 中央아시아와 印度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진 古代의 交易路로, 主된 交易品이 中國産 緋緞이어서 緋緞길 卽 실크로드라 불리게 됐다. 中國 長安에서 始作해 西쪽 콘스탄티노플로 이어지는 길인 것이다. 값비싼 緋緞과 陶瓷器가 이 길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갔다. 로마의 琉璃그릇도 이 都市들을 지나 東邦으로 傳해졌다. 遺物 專門家들은 우리나라 慶州 天馬塚에서 出土된 琉璃盞(寶物 620號) 亦是 西方에서 실크로드를 통해 왔다고 본다. 緋緞길은 韓國과 日本까지도 이어졌다.

    실크로드의 西쪽 關門

    비록 한 番에 그쳤지만, 로마帝國은 中國에 使臣을 보낸 적이 있다. 使臣 一行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漢나라 調整으로 갔다. 東西 交流가 가장 活潑했던 時期는 唐나라 때로, 唐나라의 首都 長安이 國際都市로 크게 繁榮할 수 있었던 것도 다 緋緞길 德分이었다. 그러다 8世紀 中盤, 탈라스 戰鬪에서 唐나라가 이슬람諸國에 大敗하면서 狀況이 突變했다. 唐나라 制止공이 捕虜로 잡히면서 中國의 製紙 技術이 이슬람 國家와 유럽으로 傳播된 것이다. 이는 곧 르네상스와 印刷革命의 導火線이 됐다. 

    몽골(怨)帝國에 들어서는 中國이 다시 東西 交易의 霸權을 쥐었다. 몽골軍隊는 바그다드를 焦土化했고 이슬람 文化圈을 쥐락펴락했다. 그리고 얼마 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商人 마르코 폴로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元나라로 먼 旅行을 떠나게 되면서 文明은 또 한 番 大轉換을 맞는다. 이처럼 오랜 歲月 동안 東西 交易이 繼續되면서 콘스탄티노플과 中國은 該當 交易의 最大 受惠者가 됐다. 바이킹이 이 都市를 ‘黃金수레’라 부르며 讚歎한 것도 이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에는 아랍을 비롯해 이탈리아, 北아프리카, 러시아 및 北유럽 商人들이 늘 북적였다. 

    東로마帝國 皇帝들은 일찌감치 콘스탄티노플의 地政學的 價値를 알아봤다. 4世紀頃 게르만 民族의 移動으로 首都인 로마가 威脅에 處하자 콘스탄티누스 1世는 이곳을 ‘第2의 首都’로 삼으며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했다. ‘콘스탄티누스 大帝의 都市’란 뜻이었다. 以後 330年 5月 11日, 分裂됐던 로마帝國을 再統一한 콘스탄티누스 皇帝는 이 都市를 ‘새로운 로마(Nova Roma)’라 부르며 東로마帝國의 首都로 宣布했다. 381年 第1次 콘스탄티노플 公議會는 이 都市를 로마에 버금가는 곳으로 認定했다. 以後 이곳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首位權(敎皇의 權限)을 놓고 競爭할 程度로 急成長했다. 콘스탄티누스 2世가 지은 아야소피아 大聖堂은 敎皇廳과 霸權 다툼을 벌인 곳으로 有名하다.

    로마帝國의 復興을 꿈꾼 아야소피아 大聖堂

    아야소피아 대성당. [위키피디아]

    아야소피아 大聖堂. [위키피디아]

    아야소피아 大聖堂의 運命은 決코 順坦하지 않았다. 火災로 큰 損失을 입어, 416年 테오도시우스 2世가 다시 지은 데 이어 532年 니카 叛亂으로 또 破壞됐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누스 皇帝는 5年에 걸쳐 聖堂을 大大的으로 改築했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神殿과 레바논 바르베크의 아폴론 神殿에서 기둥을 실어왔고, 地中海 여러 都市에서 많은 石材를 가져왔다. 東로마帝國의 財力 德分에 可能한 일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皇帝는 옛 로마帝國의 榮光을 되살리고 싶어 했다. 로마법을 集大成해 歷史에 큰 足跡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念願은 오직 한 가지였으니, 바로 로마帝國의 永續性을 證明하고 復興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아야소피아 大聖堂의 再建은 반드시 이뤄내야 할 宿題였다. 大聖堂은 東로마帝國의 自尊心이었던 것이다. 皇帝들은 大聖堂의 華麗한 모습을 통해 이미 사라진 서로마제국(476年 滅亡)의 榮光을 부활시키고자 했다. 

    ‘성스러운 智慧’를 뜻하는 아야소피아 大聖堂은 15世紀까지만 해도 世界最大의 規模를 자랑했다. 中央 돔은 直徑이 31m, 높이 54m다. 壁을 메운 아름다운 모자이크 壁畫가 特히 有名하다. 나 亦是 本堂 2層 갤러리에서 黃金色 모자이크 壁畫를 보자마자 歎聲이 절로 나왔다. 只今 남아 있는 모자이크는 9世紀 以後의 作品으로, 最後의 審判을 描寫한 것이다. 예수와 성모마리아, 洗禮者 요한이 성스러우면서도 華麗한 雰圍氣를 자아낸다. 聖堂 出口 쪽에 있는 모자이크 作品도 特別하다. 皇帝들이 성모마리아에게 콘스탄티노플과 大聖堂을 奉獻하는 모습을 描寫한 것이다. 

    1054年 가톨릭교회는 兩分됐다. 한쪽은 로마敎皇廳을, 또 다른 한쪽은 아야소피아 大聖堂을 中心으로 삼았다. 이 무렵 아야소피아 大聖堂은 東方敎會의 求心點 노릇을 했다. 다시 500年이 흐른 16世紀 中盤, 東로마帝國은 命을 다했다. 이슬람의 支配 아래 아야소피아 大聖堂 亦是 모스크(이슬람敎 禮拜堂)로 바뀌고 말았다. 大聖堂에는 새로 미흐랍(mihrab·메카를 向해 만든 우묵하고 둥근 模樣의 禮拜室)과 미나레(minare·尖塔)가 設置됐다. 이때 聖堂 壁畫 위에는 偶像을 禁止한 이슬람 禮法에 따라 灰漆이 됐다. 現在 壁畫를 볼 수 있는 건 最近 모스크가 博物館으로 탈바꿈하면서 當時 漆해진 灰漆을 모두 벗겨내고 專門的인 復元이 이뤄진 德分이다. 아야소피아 博物館 앞에는 琉璃壁으로 둘러쳐진 地下 空間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선 소피아 聖堂의 時代別 特徵을 地層別로 볼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을 掠奪한 十字軍

    콘스탄티노플의 滅亡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다. 이 都市의 莫大한 부는 四方으로부터 嫉妬와 侵略의 對象이 됐다. 내 親舊 이스마일은 이러한 얘기를 주고받다가 불쑥 ‘十字軍의 콘스탄티노플 入城’(1840)이란 그림을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프랑스의 루이 필립 王의 注文으로 誕生한 이 作品은 1204年 4月 12日, 第4次 十字軍遠征隊가 콘스탄티노플을 陷落한 場面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畫家 外製 들라크루아는 掠奪과 殺戮의 現場을 매우 事實的으로 描寫했다. 

    第4次 十字軍遠征隊는 本來 이집트를 目標로 삼았다. 그러나 迂餘曲折 끝에 富裕한 콘스탄티노플을 掠奪하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베네치아共和國의 役割이 컸다. 地中海上 主要 貿易國으로 꼽히던 베네치아는 地理的으로 유리한 位置에 있는 콘스탄티노플을 늘 牽制했다. 따라서 베네치아는 第4次 十字軍遠征을 勝利로 이끌어 自國의 立地를 다지고자 했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遠征軍은 兵力도 不足했고, 軍資金이 형편없이 적었다. 이에 베네치아는 十字軍의 指揮部를 說得해 달마티아의 자라(헝가리 保護領)를 掠奪하기로 決定했다. 자라는 基督敎 都市였다. 이에 놀란 敎皇 인노첸시오 3世는 特使를 보내 十字軍의 脫線을 批判했다. 그럼에도 遠征軍은 上陸線까지 動員해 자라를 陷落하고 殺戮과 掠奪을 恣行했다. 그 結果 베네치아 사람들과 유럽의 領主들은 戰利品을 獨차지하게 됐다. 

    敎皇은 헝가리 王室의 鎭靜을 받아들여 遠征軍과 베네치아共和國을 모두 破門했다. 그런데 遠征軍은 敎皇의 敎書를 隱蔽하고, 다음 攻擊 目標로 콘스탄티노플을 指目했다. 當時 콘스탄티노플에서는 皇位를 둘러싼 內紛이 深刻했다. 勢力을 잃은 알렉시오스 皇子는 廢位된 理事키오스 2歲의 아들이자 皇帝인 알렉시오스 3歲의 조카였다. 그는 遠征軍에게 接近해 帝王의 威嚴을 되찾아주면 엄청난 補償을 하겠다고 宣布했다. 遠征軍이 콘스탄티노플에 진 빚을 蕩減해주고, 遠征費用으로 20萬 마르크를 提供하며 1萬 名의 兵力과 500餘 名의 記事를 보태주겠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敎皇의 首位權을 認定하고 東方正敎會를 로마敎皇廳에 바치겠다고 公言했다.

    콘스탄티노플의 陷落

    파우스트 조나로의 그림 ‘마호메트2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

    파우스트 兆羅老의 그림 ‘마호메트2歲의 콘스탄티노플 征服’.

    戰雲이 짙어지자 敎皇은 다시 特使를 보내 콘스탄티노플에 對한 侵略을 中斷하라고 命令했다. 遠征軍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都市를 占領했다. 2萬 餘 名의 遠征軍은 사흘 동안 城안에서 價値 있어 보이는 物件을 닥치는 대로 强奪했다. 敎會 亦是 放火와 破壞의 對象이었다. 遠征軍은 男女老少를 不問하고 暴行과 殺害, 拉致, 强姦을 서슴지 않았다. 貴族 女性은 勿論 修女들도 被害者가 됐다. 遠征軍은 皇帝들의 무덤까지 파헤쳐 副葬品을 나눠 가졌다. 아야소피아 大聖堂도 禍를 면치 못했다. 侵略者들은 司祭들마저 모두 殺害한 뒤 敎會의 寶物들을 모조리 掠奪했다. 3日間 遠征軍은 銀貨 90萬 마르크 相當의 戰利品을 얻었다. 代身 世上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基督敎 都市는 탐욕스러운 十字軍遠征隊의 발길에 無慘하게 짓밟혔다. 

    이 都市의 災殃은 쉬 끝나지 않았다. 周邊의 여러 民族이 잇따라 侵略을 敢行했다. 東로마帝國의 領土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 15世紀에는 鐵甕城으로 둘러싸인 콘스탄티노플만 남았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콘스탄티노플은 如前히 富裕했다. 이 都市를 거쳐 유럽으로 輸出되는 香辛料의 量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 中 60~70%가 후추였는데 印度 南部地方에서 해마다 1000t의 후추가 유럽으로 건너갔다. 

    1453年 드디어 運命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軍事戰略에 빼어난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마호메트 2世가 콘스탄티노플을 이슬람제국의 새로운 中心地로 삼고자 7萬 大軍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왔다. 헝가리 出身의 技術者 우르半이 만든 超大型 靑銅 大砲는 總 길이 6.5km에 이르는 테오도시우스 城壁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結局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으로 改宗했고, 都市 이름도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이스마일과 나는 風霜을 이기고 아직 남아 있는 이 都市의 城壁 밑을 거닐며 콘스탄티노플 最後의 날을 어림짐작했다. 

    마호메트 2世는 東西 貿易의 據點을 掌握하자 香辛料 價格을 大幅 올렸다. 유럽의 商人들은 利潤이 크게 줄어 東洋으로 가는 貿易路를 渴望했다. 콘스탄티노플이 陷落되고 30年 뒤, 포르투갈 探險家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未知의 바다로 나아갔고, 드디어 直航路가 열려 地中海 貿易時代는 終末을 맞았다. 

    콘스탄티노플이 滅亡하자 많은 學者와 藝術家는 이탈리아로 移住했다. 그들은 千年 동안 고이 간직한 古代 그리스와 로마의 知識을 傳해줬다. 이로부터 새로운 文化運動인 르네상스가 일어날 土臺가 마련됐다. 

    第1次 世界大戰이 끝나고 몇 해가 지난 1923年, 그리스는 이 都市에 對한 緣故權을 主張했으나 터키의 指導者 케말 파샤는 이를 一蹴했다. 그러면서도 首都는 앙카라로 옮겼다. 또 로잔條約을 통해 東方正敎會의 信仰을 保護하기로 公言했다. 그러나 正敎會의 活動은 只今도 自由롭지 못하니, 이 또한 깊게 파인 歷史의 주름살 때문일 것이다. 

    이스탄불은 如前히 大陸 間의 重要한 交叉路로 불린다. 러시아와 美國의 利害關係가 이곳에서 부딪친다. 地政學的 價値는 不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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