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權力中央’ 먼저 形成한 金日成 vs 美牽制로 뒤늦게 歸國한 李承晩|新東亞

‘權力中央’ 먼저 形成한 金日成 vs 美牽制로 뒤늦게 歸國한 李承晩

[김학준이 다시 쓴 現代史 決定的 場面 ⑤]

  • 김학준 檀國大 碩座敎授

    .

    入力 2020-12-13 10: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코리아에 關한 모스크바議定書’는 發表 直後 南과 北에서 서로 달리 받아들여졌다. 이 議定書는 韓半島 狀況에 커다란 變化를 가져온다. 

    • 그러면 이 議定書가 發表될 때까지 南과 北에서는 어떤 政治 狀況이 展開되고 있었을까. 單純化해서 말해, 北에서는 모스크바의 蘇聯共産黨이 세운 計劃表에 따라 極東러시아의 蘇聯軍에서 訓鍊을 받던 金日成 蘇聯 大尉가 歸國해 빠르게 權力中央을 만들어갔다. 그래서 모스크바議定書가 發表된 時點에 北에서는 이미 김일성을 頂點으로 하는 權力中央이 形成돼 있었다. 反面에, 南에서는 美國에서 獨立運動을 主導하던 李承晩이 美國 政府의 牽制로 뒤늦게 歸國해 政治勢力의 統合을 試圖했다. 

    • 그렇지만 모스크바議定書가 發表된 時點에 남은 北에서 볼 수 있는 單一 指導者 中心의 權力中央이 形成되지 못한 狀態였다.

    論點 1
    蘇聯에서의 金日成 行跡은 어떤 意味를 가졌나.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군중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왼쪽에서 두 번째). [동아DB]

    1945年 10月 14日 平壤時 群衆大會에 나타난 金日成(왼쪽에서 두 番째). [東亞DB]

    여기서 우리는 먼저 김일성과 李承晩이 各各 平壤과 서울로 돌아온 過程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 

    金日成, 베리야에게 連結되다? | 1930年代 滿洲에서 中國共産黨 傘下 동북항일연군에 所屬돼 게릴라運動에 參與한 김일성은 日帝 關東軍의 大規模 討伐作戰에 쫓겨 다섯 名의 同志와 함께 1940年 11月 蘇聯 領土인 極東러시아로 들어갔다. 그 過程에서 김일성은 部隊 안에서 食事와 洗濯을 맡고 있던 김정숙과 結婚했다. 김일성은 28歲였고, 김정숙은 23歲였다. 

    後날 北韓 權力構造에서 重要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최용건, 金策, 崔晛, 오진우, 임춘추, 오백룡 等을 비롯한 餘他의 朝鮮人 遊擊隊員들度 서로 다른 方面에서 極東러시아로 들어왔다. 김일성을 비롯한 그들은 그들의 實體를 제대로 把握하지 못한 蘇聯極東軍에 依해 拘禁됐다. 그러나 滿洲에서 이곳으로 먼저 옮겨왔던 동북항일연군의 中共軍 指導者 藷芋바오中(周保中)의 保證으로 釋放됐다. 이로써 일정한 規模의 무리를 이룬 그들 모두는 蘇聯이 1942年 8月 中國人 遊擊隊員들과 朝鮮人 遊擊隊員들을 中心으로 創設한 88特別國際旅團에 編入돼 러시아語는 勿論 落下傘訓鍊과 情報訓鍊을 包含한 特殊訓鍊을 받았다.
     
    여기서 重要하게 指摘돼야 할 것은 김일성을 비롯한 이 國際旅團에 所屬된 朝鮮人 隊員들이 蘇聯 陸軍 所長 안드레이 로마넨코의 指揮를 받았다는 事實이다. 로마넨코는 블라디보스토크 近郊의 보로시로프에 本部를 둔 蘇聯極東軍의 第1獨立軍摠政治局長으로, 自身의 麾下에서 宣傳部長職을 맡은 그레고리 메클레르 中領을 때때로 國際旅團에 보내 敎育 現況을 視察하게 했다. 메클레르는 金日成을 面談하고 좋은 印象을 받았다고 로마넨코에 報告했다. 

    日帝가 敗亡한 直後 蘇聯極東軍 傘下 第25軍은 北韓을 占領하면서 平壤에 蘇聯占領軍司令部를 設置한다. 로마넨코는 이 司令部에서 第2人者 또는 第3人者로 看做되는 민정管理總局長으로 일하고, 메클레르는 그의 指揮를 받는 政治課長으로 일하며, 김일성을 위해 여러 政治工作을 立案하고 推進한다. 

    그러나 政治的으로 그것보다 더 注目되는 事實은 이 國際旅團이 蘇聯의 國防部가 아니라 內務部에 所屬됐다는 事實이다. 그때 內務部는 國境經費에 對해서도 責任을 맡았기에 自體의 國境守備隊를 거느렸는데, 國境守備隊에 屬한 사람은 모두 蘇聯 陸軍 階級이 아니라 蘇聯 內務部 階級을 附與받았다. 비록 內務部 階級이라고 해도 階級의 名稱과 表紙는 軍 階級의 그것과 똑같았다. 그렇다면 김일성을 包含한 國際旅團 隊員들 亦是 蘇聯 內務部 階級을 받았을 것이다.
     
    이때 正規警察과 祕密警察 그리고 國境守備警察 모두를 管掌하던 內務長官은 蘇聯의 第2人者로 불리던, 惡名 높은 라브렌티 베리야였다. 그래서 김일성의 存在를 베리야가 알게 됐으며, 우리가 곧 보게 되듯, 後날 이오시프 스탈린이 누구를 北韓 最高權力者로 決定할지를 놓고 몇몇 候補를 比較할 때 베리야가 金日成을 强力히 薦擧해 結局 김일성으로 決定된다. 



    金日成이 先頭走者로 뽑힌 까닭은? | 김일성은 곧 이 國際旅團의 朝鮮人 사이에서 先頭走者로 자리를 굳혔다. 그는 國際旅團의 第1大隊長으로 뽑히면서 大尉 階級을 받았으며, 日帝의 敗亡을 눈앞에 둔 1945年 7月 末 國際旅團 안에 ‘朝鮮工作團委員會’가 結成됐을 때 ‘軍事와 政治 責任者’로 指名됐고 特히 앞으로 朝鮮에서 朝鮮共産黨이 ‘建立’되는 境遇 ‘影島責任’을 맡기로 決定됐다. 이것은 앞으로 北韓에서 展開될 權力鬪爭에서 김일성에게 유리한 條件이 된다. 

    그러면 그때 國際旅團에는 최용건과 金策 等 競爭者가 될 만한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무엇이 김일성에게 이러한 地位를 附與했을까. 최용건의 境遇 前妻가 日本軍에 捕虜가 된 뒤 轉向했고 後妻는 中國人이었다. 金策은 蘇聯軍 指示를 따르지 않았다는 理由로 謹愼 處分을 받고 있었다. 金日成에게는 그러한 問題들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최용건과 金策보다 各各 12年과 9年 아래인 33歲로 가장 健康했고 活力에 넘쳤으며, 滿洲의 朝鮮人들과 國內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최용건이 大體로 參謀型에 가까웠음에 비해, 김일성은 全的으로 野戰司令官型이었다. 

    이 무렵의 김일성에 對해 蘇聯 陸軍 少領으로 國際旅團 敎官으로 配置된 朝鮮人 박성훈은 “김일성은 빨치산 戰鬪戰術을 充分히 硏究했으며, 훌륭한 體格을 갖추었고 指揮官다운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다”고 回想했다. 그의 回想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 사람은 남에게 好感을 주었으며 愉快했다. 그것에 덧붙여 그는 自由奔放한 氣質을 지녔다. 自身을 사랑했고 모든 面에서 다른 將校들보다 自身이 더 優越함을 드러내려고 애썼다. 그는 自身의 지난 私生活에 對해 한 마디도 言及하지 않았다. 代身 그는 種種 滿洲에서 벌인 戰鬪에서 自身이 세운 功績들에 對한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國際旅團 高位 指揮官들의 回想 亦是 김일성에 對해 好意的이었다. 國際旅團 旅團長 슈린스 陸軍 大領은 “나는 恒常 그의 內部에 있는 커다란 野心을 눈치채곤 했다. 이 사람이 붉은군대의 眞正한 指揮者였다. 우리 旅團에서 勤務한 모든 朝鮮人 가운데 이 사람이 가장 政治에 能手能爛했고 軍事 業務를 잘 알고 있었다”고 報告했으며, 附與丹粧 洗料眞 陸軍中領은 “김일성은 眞正한 軍 將校이며 眞正한 레닌주의者였다. 政治煽動家로서 그는 旅團의 다른 大隊長들 가운데 두드러졌다”고 報告했고, 政治將校 아다모프 陸軍 中領은 “김일성은 작은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部下들을 손아귀에 쥘 수 있었다. 더구나 外面的으로 언제나 快活하고 親切한 모습을 維持했다”라고 報告했다. 

    김정일의 出生을 둘러싼 論爭 |
    極東러시아에서 活動하던 때, 金日成·金正淑 夫婦는 長男 김정일의 出生을 보았다. 北韓의 公式 說明에 따르면 김정일은 1942年 2月 15日 白頭山의 抗日遊擊隊 密營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 公式 說明은 事實에 어긋난다는 反論이 提起됐다. 

    于先 태어난 해에 對해서다. 金日成·金正淑 夫婦가 生活한 곳으로 알려진 보로시로프 브야츠코에의 한 마을에서 平生을 산 아우구스打 세르게例브나는 2002年 73歲의 나이로 김정일에 對해 “그는 1941年 2月 16日 雙둥이로 태어났으며 그의 동생은 서너 살 때쯤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回想했다. 그女의 이 回想이 있기에 앞서, 김정일 硏究者들 사이에서는 “김정일이 1941年 出生했으나, 1912年 태어난 김일성의 生日 祝賀 行事와 自身의 生日 祝賀 行事를 같은 週期(周期)에 치르게 하기 위해 김일성과의 나이 差異를 30年으로 만들고자 1942年 出生한 것처럼 바꿨다”는 主張이 提起됐다. 萬一 그女의 證言이 事實이라면, 이 主張은 妥當性을 갖는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 김정일이 象徵造作에 能하고 象徵造作을 自身의 統治에 活用한 事實을 考慮한다면 이 主張은 더욱 힘을 얻는다. 

    이어 태어난 곳에 對해서다. 많은 硏究者는 1942年 金日成·金正淑 夫婦는 보로시로프 一帶에서 生活했는데, 김정일이 어떻게 白頭山 密營에서 태어날 수 있었겠느냐고 反問하면서, 그 主張은 김정일 偶像化를 위한 또 하나의 神話 만들기라고 批判한다. 여기서 注目되는 것은 北韓 當局이 1982年 처음으로 金正日 電氣를 出版하면서 出生地를 明白히 指摘하지 않은 채 ‘피어린 抗日의 決戰의 場(場)에서’ 태어났다고 說明했을 뿐이라는 事實이다. 그러나 김정일에 對한 個人崇拜가 頂點으로 치닫던 1984年부터 北韓 當局은 그가 白頭山의 抗日遊擊隊 密營에서 태어났다고 主張하면서 北韓 住民들을 相對로 ‘聖地(聖地) 白頭山 密營’을 巡禮하도록 强制한다.


    論點 2
    김일성은 어떤 過程을 거쳐 歸國했을까.

    1945年 8月 15日 日帝가 敗亡했다. 蘇聯軍이 北韓을 占領해 들어가던 時點을 전후해 스탈린은 蘇聯極東軍司令官 바실리예프스키 怨讐에게 蘇聯의 뜻에 맞게 北韓을 이끌 朝鮮人 指導者를 推薦하라고 指示했다. 바실리예프스키는 베리야가 이끄는 祕密警察機構의 極東支部長과 協議한 뒤 김일성을 推薦했다. 이미 김일성을 잘 알고 있던 베리야가 이 推薦에 同意하고 스탈린에게 報告하자 스탈린은 곧바로 裁可했다. 

    스탈린, 金日成을 面接? | 그런데 스탈린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證言이 뒤따르고 이 證言을 둘러싼 論爭이 뜨거웠다. 바실리예프스키 怨讐의 副官이었으며 後날 蘇聯共産黨 中央委員會 國際部 副部長이 된 이반 코바넨코의 回想에 따르면, 9月 初 어느 날 스탈린은 바실리예프스키 怨讐에게 自身이 金日成을 直接 面接하려고 하니 急히 모스크바로 祕密裏에 보내라고 指示했고, 바실리예프스키가 金日成을 祕密警察 要員들과 함께 軍用機에 태워 보내자 스탈린은 特別 別莊에서 네 時間에 걸친 面接을 하고 만족스럽다는 表情을 지은 뒤 다시 極東軍總司令部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다시 코바넨코에 따르면, 스탈린은 바실리예프스키에게 “김일성은 注目할 만한 人物이다. 北韓으로 보내고, 蘇聯軍이 全的으로 돌보아주라”고 指示했으며, 이에 따라 바실리예프스키는 蘇聯極東軍 안에서 北韓을 管掌하는 第1方面軍의 軍事委員 스티코프 上場에게 스탈린의 指示를 傳達했고, 스티코프는 平壤을 占領한 蘇聯 第25軍 軍事委員 레베제프에게 “김일성에 對해 警護를 徹底히 하고 그의 活動을 積極 도우라”고 指示했다. 

    이 回想은 果然 믿을 만한 것일까. 그렇게 묻게 되는 까닭은 이 ‘事實’은 蘇聯의 文書에서나 어떤 다른 사람의 回顧錄에서 確認되지 않은, 全的으로 한 個人의 回想에 登場할 뿐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確實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레베제프가 9月 初 스티코프로부터 “김일성이 곧 平壤에 到着할 豫定이니 잘 支援하라”는 指示를 받은 事實이다. 레베제프는 “스티코프는 나에게 ‘김일성이 祕密裏에 地方을 巡廻하면서 各界各層의 維持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하라’고까지 指示했다”고 回顧했다. 메클레르 亦是 같은 趣旨로 回顧했다. 

    金日成, 關東軍을 擊破하며 改善하다? 아니다, 蘇聯軍艦 푸가초프號로 歸國하다 | 北韓 當局은 오랫동안 金日成이 1945年 8月 15日 自身의 ‘朝鮮人民革命軍’을 이끌며 日帝의 關東軍을 擊破하면서 朝鮮으로 改善했다고 宣傳했다. 그러나 그것은 事實이 아니다. 그와 그의 同志들은 蘇聯極東軍 情報局 參謀 자이체프 少領의 引率 아래 蘇聯陷穽 푸가초프號(號)를 타고 9月 18日 元山에 到着했다. 에밀리안 푸가초프는 帝政러시아의 女傑 예카테리나 大帝(大帝) 때 大規模 農民叛亂을 일으켰다가 處刑된 革命家로, 이 陷穽의 이름은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배는 美國이 乾燥한 3000t級 트롤선인데, 美國은 自國의 武器貸與法에 根據해 이 배를 蘇聯에 넘겨줬다. 逆說的이게도 김일성과 그의 同志들은 ‘美 帝國主義者들이 만든 배’를 타고 歸國한 셈으로, 이 배는 改善號(號)로 命名된 채 오늘날까지 元山港에 保存돼 있다. 

    여기서 우리가 記憶해야 할 點은 이 陷穽에서 내린 한 무리의 共産主義者 가운데 蘇聯 國籍의 朝鮮人을 除外한 나머지 60名이다. 이들은 後날 北韓에서 滿洲派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또 88特別旅團에 함께 몸담고 있었기에 88特別旅團派라고 불렸고, 그저 빨치산派라고도 불렸다. 다른 한便으로, 蘇聯 國籍의 朝鮮人들은 北韓에서 蘇聯派라고 불렸다. 

    김일성은 蘇聯 大尉 階級章을 달고 蘇聯軍이 附與한 平壤市群警務司令部 副司令官의 資格으로 9月 22日 平壤에 到着했다. 그들과는 別途로, 최용건은 藷芋바오重課 連絡할 일이 있어서 同乘하지 못해 10月 따로 歸國한다. 김일성의 아내 김정숙과 아들 김정일은 11月 25日 咸鏡北道 雄基로 歸國한 뒤 곧 平壤으로 合流한다. 

    金日成이 歸國한 뒤 蘇聯軍은 스탈린의 9月 20日子 指令에 따라 北韓에 單獨 政權을 세우기 爲한 措置들을 빠르게 밟아나갔다. 具體的으로, 蘇聯軍은 10月 10日 平壤에서 北韓 全體를 統轄하는 共産黨 中央機關으로 ‘朝鮮共産黨北部造船分局’을 創設했으며, 10月 8~11日 ‘北朝鮮5道人民委員會聯合會의’를 召集해 北韓 全體를 統轄하는 行政中央機關으로 10個 國(局)을 두도록 決定했다. 이로써 ‘北韓의 胎兒적 政府’가 出帆했다. 이러한 法的·制度的 措置를 끝내자 蘇聯軍은 10月 14日 蘇聯軍을 歡迎하는 平壤群衆大會를 열고 金日成을 公開的으로 등장시켰다.


    論點 3
    李承晩은 어떤 過程을 거쳐 歸國할 수 있었나.

    앞에서 보았듯, 김일성은 스탈린의 庇護를 받으며 蘇聯軍이 自身의 北韓占領計劃에 따라 定해놓은 日程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李承晩은 美國 政府의 庇護를 받지 못한 채 어려운 過程을 거쳐 歸國할 수 있었다. 

    李承晩의 歸國이 늦어진 事實은 무엇을 의미하나? | 李承晩은 김일성의 平壤 歸還보다 1個月 程度 늦게, 그리고 김일성이 大衆 앞에 처음으로 自身의 모습을 드러낸 때로부터 이틀이 지난 10月 16日에야 서울에 들어왔다. 이것의 意味는 컸다. 

    當時 反(反)李承晩 勢力은, 特히 左翼 勢力은, 李承晩이 美國 政府의 計劃에 따라 美國 政府의 ‘앞잡이’로 歸國했다고 헐뜯었고, 그러한 說明은 오늘날에도 部分的으로나마 存在한다. 그러나 우리가 方今 살핀 內容은 그것이 事實의 歪曲이었고 政治 謀略이었음을 傍證한다. 

    李承晩의 歸國을 둘러싼 美國 政府 안의 論爭 | 平生을 祖國 獨立을 위한 鬪爭에 獻身한 이 盧(老)愛國者의 歸國이 어째서 이렇게 어려워야 했던가. 元來 美國 政府는 反訴反共 性向을 지닌 李承晩이 歸國하면 蘇聯을 刺戟할 것을 憂慮해 그의 歸國에 好意的이지 않았다. 그러나 南韓에서 左翼의 힘이 크게 드러난 데 反해 右翼의 힘은 微弱함을 直視한 하지 司令官은 그의 歸國이 左翼을 牽制하고 右翼을 북돋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判斷했다. 

    그의 이러한 判斷에는 特히 美軍政에 所屬된 클래런스 윔즈 大尉가 9月 28日 作成한 ‘코리아와 臨時政府’라는 報告書가 影響을 주었다. 中國에서 美陸軍 戰略情報處(OSS) 隊員으로 活躍하며 臨政의 指導者들과 接觸했던 그는 臨政이 코리아의 獨立運動을 이끈 主導 勢力이었다고 評價하면서 臨政 要人들의 歸國을 建議했는데, 夏至가 그 建議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는 곧 李承晩 歸國安을 맥아더에게 建議했으며, 맥아더는 그 建議를 받아들여 本國 政府에 建議했다. 마침 戰略情報處의 實力者인 클래런스 굿필로 大領 亦是 國務部에 李承晩의 歸國을 도와줄 것을 建議했다. 이에 國務次官 兼 國務長官代理 딘 애치슨이 最終 決定을 내리면서 國防部에 그의 歸國을 도와줄 것을 要請했다. 그리하여 李承晩은 美陸軍 戰略情報處 文官大領 身分으로 10月 4日 美軍用機 篇으로 워싱턴 空港을 出發해 12日 도쿄에 到着했으며, 거기서 나흘을 머문 뒤, 맥아더가 내준 美軍用機 便으로 10月 16日 金浦空港에 到着했다.


    論點 4
    李承晩·맥아더·下肢의 非公開 3者會談에서 南韓單獨政府 樹立 計劃이 論議되다?

    도쿄에서의 3者會談 | 이 대목에서 우리가 重要하게 檢討해야 할 論點이 있다. 李承晩이 도쿄에서 머물며 맥아더, 그리고 急히 非公開裡에 도쿄를 訪問한 夏至와 여러 次例 非公開 會談을 가졌는데, (ⅰ) 이 會談에서 앞으로 南韓을 單位로 하는 過渡的 政府를 세운다는 데 合意가 이뤄졌으며 (ⅱ) 이에 따라 10月 15日 맥아더의 政治顧問 조지 애치슨(George Atcheson)은 南韓에 金九 및 金奎植 等 臨政 要因들을 核으로 삼아 ‘行政府적 政府機關으로 發展할 수 있는 前韓人行政執行委員會(National Korean Peoples Executive Committe)’를 設置할 것을 國務部에 建議했다는 趣旨의 主張에 對한 것이다. 

    이 問題를 깊이 硏究한 도진순 敎授는 “이들의 비밀스러운 도쿄 會同”李 우리가 앞으로 살피게 되듯 모스크바 3上會談의 決定에 對한 反對와 美蘇共同委員會에 對한 反對의 源泉이 되고 結局 南韓單獨政府 樹立의 出發點이 된다고 보았다. 美軍政은 11月 初 前韓人行政執行委員會案을 聯合諮問委員會(Coalition Advisory Committee)안으로 발전시킨다. 

    美軍政과 李承晩이 蘇軍丁과 김일성에 앞서 單獨政權 樹立을 推進했다? 아니다! | 이 事實에 對해서도 論爭이 뒤따랐다. 韓半島에서 分斷 政權의 樹立을 먼저 推進한 쪽은 蘇聯軍政과 金日成이 아니라 美軍政과 李承晩이었다는 主張이 提起된 것이다. 

    이 主張의 妥當性을 檢討하기 위해, 우리는 이 會談이 열린 時點이 1945年 10月 14~16日이라는 事實에 注目해야 할 것이다. 이 時點이면 蘇聯軍은 韓半島에서 分斷 狀況을 改善하려는 美軍이 내놓은 一連의 提議를 모두 拒否한 채, 우리가 論點 2의 끝部分에서 指摘했듯, 스탈린의 9月 20日子 指令에 따라 北韓에 單獨政權을 세우기 爲한 措置들을 밟고 있었다. 맥아더 司令部는 이러한 狀況을 正確히 把握했을 것이며, 따라서 蘇聯軍의 그러한 試圖에 對應하는 措置를 計劃했을 것이다.


    論點 5
    李承晩의 ‘大同團結論’을 둘러싼 論爭

    李承晩, “無條件 합치자”고 呼訴 | 李承晩은 歸國 卽時 “우리 모두가 舍監(私感)과 舍利(私利)를 버리고 合心協力해야 한다”는 趣旨로 演說했다. 言論은 그것을 ‘大同團結路線’으로 명명했다. 

    우리 學界 一角에서는 李承晩의 이 “大同團結路線”에 對한 批判이 提起됐다. 그때 가장 重要한 課題는 ‘親日派 肅淸’이었는데, 李承晩이 ‘親日派 肅淸’에 對해서는 말하지 않고 오히려 過去를 묻지 않은 채 無條件 합칠 것을 强調하면서 ‘親日派’를 끌어안은 것은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李承晩이 ‘親日派 肅淸’에 反對로 一貫한 것은 아니었다. 于先 各黨 各派가 統合을 成就해 獨立國家를 세운 뒤에 ‘親日派’를 肅淸해도 늦지 않다는 뜻으로, 그래서 그의 立場은 ‘先(先)獨立國家樹立 後(後)親日派肅淸’으로 불렸다. 

    38度線 以北에서 共産主義를 앞세운 全體主義的 獨裁國家 蘇聯의 軍事占領 아래, 東유럽에서처럼 蘇聯이 또 하나의 衛星國家를 세우려는 試圖가 進行되고 있음을 念頭에 둔다면, 南韓에서 거기에 맞설 國家를 세우는 것이 가장 重要한 課題라고 判斷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李承晩의 路線은 理解될 만하다. 

    獨立促成中央協議會가 出帆하다 |
    그러한 믿음에서, 李承晩은 11月 2日 서울 天道敎大講堂에서 송진우·金性洙의 韓國민주당, 金九의 韓國獨立黨, 安在鴻의 朝鮮國民當, 呂運亨의 조선인민당 等 네 政黨 代表들이 參席한 가운데 獨立促成中央協議會를 公式으로 出帆시키기에 이르렀다. 韓國獨立黨의 境遇, 金九는 아직 還國하지 못했기 때문에 參席하지 못했다. 박헌영의 朝鮮共産黨은 李承晩이 ‘親日派 肅淸’에 消極的이라는 理由로 不參했다. 이 結成大會에서도 李承晩은 모든 勢力의 ‘合心’을 强調했다. 

    獨立促成中央協議會는 이틀 뒤 美國·蘇聯·英國·中國 等 聯合國들에 보내는 메시지를 採擇했다. 이 메시지는 (ⅰ) 코리아를 南韓과 北韓으로 分割한 ‘重大한 過誤’가 聯合國에 있음을 指摘하고 (ⅱ) 코리아가 자주 獨立을 實現할 수 있도록 于先 大韓民國臨時政府를 承認할 것을 要求한 데 이어 (ⅲ) 大韓民國臨時政府가 聯合國의 承認 아래 換局하면 1年 以內에 ‘全國選擧’를 斷行할 것임을 約束함과 아울러 (ⅳ) “우리는 우리 自身의 運命을 스스로 打開할 수 있는 能力이 있는 만큼 共同信託制를 拒否한다”고 闡明했다. 그들은 聯合國이 코리아에 對해 國際的 信託統治를 實施하려는 構想을 갖고 있음을 正確히 把握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 메시지는 李承晩이 이끌던 獨立促成中央協議會가 韓半島의 分斷이 아니라 完全한 自主的 獨立을 目標로 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일성은 왜 李承晩의 提議를 拒否했나? | 이 무렵인 11月의 어느 時點에서, 李承晩은 自身의 密使를 平壤의 朝鮮민주당 委員長 조만식에게 보내, 曺晩植과 김일성을 서울로 招請하면서 서울에서 함께 朝鮮의 獨立 問題를 論議하고자 한다고 提議했다. 이것은 李承晩이 南韓單獨政府 樹立보다는 南北韓統一政府 樹立을 志向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스티코프가 蘇聯共産黨 中央委員會 祕書 말렌코프에게 보낸 報告書에 따르면, 曺晩植은 이 提議를 김일성에게 傳達하면서 北韓이 南韓의 計劃에 參與해 12月까지 統一된 中央政府를 樹立할 것을 提議했다. 曺晩植은 이 構想이 實現된다면 南韓과 北韓에서 美軍과 蘇聯軍이 1945年 말까지 同時에 撤收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拒絶했다. 

    金日成이 拒絶한 背景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時點에 김일성은 朝鮮共産黨北部造船分局에서 自身의 指導權을 確立하는 일에 專念하고 있어서 서울을 訪問할 時間 餘裕를 갖지 못했다. 蘇聯占領軍度 그의 서울 訪問에 同意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蘇聯과 김일성이 南北을 통튼 統一政府 樹立에 熱意가 없었음을 보여주었다.


    論點 6
    金九는 어떠한 過程을 거쳐 歸國할 수 있었나.

    1945년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사진. 맨 앞줄 중앙의 백범 김구 왼쪽이 김규식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年 11月 3日 臨時政府 要因 還國 記念寫眞. 맨 앞줄 中央의 白凡 金九 왼쪽이 김규식이다. [國史編纂委員會 提供]

    그러면 장제스의 中國國民黨 政府가 머물던 中國 충칭에서 大韓民國臨時政府를 이끌고 있던 指導者들의 還國 過程은 어떠했나? 

    金九, ‘當面政策 14個 條項’ 發表 | 日帝의 降伏이 알려진 直後 臨政의 要因들 사이에서는 對應 方法을 둘러싸고 論議가 紛紛했다. 곧바로 열린 臨時議政院에서 어떤 議員들은 國務委員의 總辭職을 主張했으며 어떤 議員들은 臨政을 解散한 뒤 歸國하자고 主張했다. 이때 金九는 “臨時政府 解散 云云은 千萬不當하고 總辭職度 不可하다. 우리가 將來에 서울에 들어가 全體 國民에게 政府를 바친 뒤 國務委員이 總辭職하는 것이 옳다”고 說得했다. 

    金九는 9月 3日 臨時政府 主席의 이름으로 ‘當面政策 14個 條項’을 發表했다. 여기서 그는 全國的 總選을 통해 正式 政府가 세워질 때까지는 臨政이 國內秩序와 對外關係를 主導할 것임을 宣言했다. 그는 同時에 中國戰區(中國戰區)의 美軍最高司令官인 웨드마이어 中將에게 (ⅰ) 臨政이 歸國한 뒤 朝鮮의 國內 治安 秩序는 臨政에 맡길 것 (ⅱ) 美軍政은 臨政의 政治活動에 對해 干涉하지 말 것 等 4個 條項을 提示하고 回答을 기다렸다. 

    이러한 措置를 取하면서 金九는 臨政이 가장 빠른 時日 안에 歸國할 것임을 다짐했지만, 臨政 要人들은 日帝 敗亡으로부터 100日이 지나서야 還國할 수 있었다. 金九·金奎植·李始榮 等 第1陣은 11月 23日에야, 신익희·趙素昻·金元鳳·金星淑 等 第2陣은 12月 2日에야 겨우 서울에 到着할 수 있었다. 蘇聯 政府가 臨政에 對해 否定的인 것이 한 理由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도 美國 政府가 임정의 歸國에 消極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雰圍氣 속에서, 臨政을 積極的으로 後援해야 할 中國國民黨 政府 亦是 微溫的이었던 것도 또 다른 理由가 됐다. 

    臨政에 對한 美國 政府 안에서의 討論 | 그러면 美國 政府는 왜 임정의 歸國에 消極的이었던가? 첫째, 美國 政府는 臨政이 ‘政府’임을 내세울 뿐만 아니라 民族主義的 性向이 剛하고 中國國民黨 政府의 庇護를 받았던 만큼 臨政이 歸國하면 美軍政의 南韓 統治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警戒한 것이다. 둘째, 美國 政府는 蘇聯 政府가 中國國民黨 政府의 後見을 받는 存在로 認識하는 臨政을 早期에 歸國시키면 蘇聯 政府는 美國 政府가 中國國民黨 政府와 提携해 臨政을 中心으로 韓半島 全體를 統轄하는 臨時政府를 세우려 할 것으로 받아들여 北韓에서 自身의 獨自的 政府를 세우고 그것을 鞏固化하는 쪽으로 가게 되리라고 憂慮한 것이다. 그래서 美國 政府는 臨政을 歸國시키면서도 相對的으로 保守的인 要因들은 第1陣으로 歸國시키고, 相對的으로 左派的인 要因들은 第2陣으로 歸國시켜 그들 自體를 분열시키고 特히 左派的 要因들의 影響力을 약화시키려고 試圖했다. 

    臨政은 이미 이 點을 把握하고, 1945年 8月 30日 외무부장 趙素昻으로 하여금 충칭에 主宰하는 美國大使館을 訪問하게 하고 臨政의 立場을 要約한 5個項의 ‘備忘錄’을 傳達하게 했다. 美大使館은 이것을 國務部에 報告했다. 이 文書에서 臨政은 (ⅰ) 러시아 內部의 韓人들과 옌안의 韓人 共産主義者들이 코리아로 入國해 共産主義 政府를 세우려고 하고 있고 (ⅱ) 臨政을 歸國시킨다면 臨政 指導者들은 美國 占領軍과 國務部의 뜻에 거슬리는 行動을 하지 않을 것이며 (ⅲ) 結局 코리아가 民主國家로 發展하느냐 또는 共産國家가 되느냐는 美國이 取할 態度에 달려 있다고 主張했다. 臨政은 이 文書에서 自身의 親美的 性向을 强調함으로써 美國 政府의 好意的 反應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臨政의 이러한 主張은 美國 政府와 美占領軍을 說得하지 못했다. 美國 側은 如前히 臨政에 對해 非友好的이었다. 두 가지 事例를 指摘하기로 한다. 첫째, 장제스는 金九와 臨政에 歸國한 뒤 獨立運動에 쓰라고 20萬 달러의 資金을 주었다. 그러나 美軍政은 金九를 통한 中國國民黨 政府의 韓半島 內 影響力 行事를 遮斷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돈의 國內 搬入을 막았다. 

    둘째, 美軍政은 金九가 歸國聲明을 京城放送局을 통해 發表하고자 했을 때 2分이라는 매우 짧은 時間만 許容했다. 그래서 그는 “나와 (臨政의) 각圓一同은 (…)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獨立完成을 위하여 盡力하겠습니다. 앞으로 全國 同胞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國家獨立의 時間을 最小限道路 短縮시킵시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論點 7
    南韓에서 왜 政黨統合運動은 失敗했는가.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1945년 12월 19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전국환영대회’에 참석해 이승만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앞줄 왼쪽)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金九 大韓民國臨時政府 主席(앞줄 왼쪽에서 두 番째)李 1945年 12月 19月 서울運動場에서 열린 ‘大韓民國臨時政府 改善全國歡迎大會’에 參席해 李承晩 獨立促成中央協議會 會長(앞줄 왼쪽)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미디어韓國學 提供]

    金九를 비롯한 臨政 要人들의 歸國이 알려지면서 民衆의 期待는 그들에게로 쏠렸다. 解放이 돼 100日이 넘었는데도 政府 樹立의 可能性이 거의 보이지 않는 混亂한 狀態에서 南韓의 民衆은 “이제 臨政이 돌아왔으니 臨政을 中心으로 새로운 政治秩序가 胎動하지 않겠느냐”는 希望을 다시 갖게 됐다. 李承晩이 그날로 그를 訪問한 것은 民衆의 그러한 期待를 反映한 것이었다. 

    民衆의 關心과 期待 속에서, 臨政은 金九 主席의 主宰로 1945年 12月 6日 京橋莊에서 國內 첫 國務會議를 열었다. 李承晩은 臨政이 임명했던 駐美外交委員會 委員長 資格으로 그 자리에 參席했다. 

    그러나 李承晩과 金九의 關係는 곧 微妙함을 드러내기 始作했다. 李承晩이 自身이 이끄는 獨立促成中央協議會가 臨政을 ‘掩護하는 團體’라고 主張하면서 이 機構가 南韓 政治勢力의 統合을 이끌어야 한다는 뜻을 表示한 데 對해, 金九는 自身이 이미 發表한 ‘當面政策 14個 條項’에서 言及된 ‘國內 過渡政權’을 牽制할 수 있는 機構로 認識한 것이다. 

    이렇게 金九와 李承晩 사이에 葛藤의 싹이 보이는 가운데, 임정의 重要한 指導者인 신익희는 李承晩에게 가까워지는 兆朕을 보였다. 1945年 12月 以後, 그는 日帝强占期 高等文官試驗에 合格해 總督府에서 行政 經驗을 쌓은 장경근과 최하영 및 윤길중 等을 中心으로 行政硏究會를 발족시켜 將次 樹立될 政府의 組織과 政策 等을 硏究하게 했는데, 이 行政硏究會는 結局 李承晩에 連結된다. 1945年 12月 中旬이 되면 그와 李承晩의 提携는 훨씬 더 분명하게 나타났다.

    論點 8
    黨權을 掌握한 김일성의 演說은 어떤 뜻을 담았나.

    그러면 北韓에서는 政治 狀況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었나? 

    ‘서울중앙’ 理論을 排擊하다 | 가장 重要한 새로운 局面은 1945年 12月 17~18日 平壤에서 열린 ‘朝鮮共産黨北部造船分局’ 第3次 中央擴大執行委員會에서 展開됐다. 여기서 于先 指摘돼야 할 것은 이 會議 때부터 ‘中央’이라는 말을 使用하기 始作했다는 事實이다. 그사이 北韓의 共産主義者들은 서울에서 박헌영이 主導하는 朝鮮共産黨을 ‘中央’으로 認定하는 ‘서울중앙’ 理論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自身들의 集結體를 ‘朝鮮共産黨北部造船分局’으로 불렀던 것인데, 이 ‘서울중앙’ 理論을 拒否하는 첫 試圖 가운데 하나로 擴大執行委員會 앞에 ‘中央’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金日成, 責任祕書로 選出되다 | 이 會議에서 김일성은 ‘北部造船黨의 錯誤와 缺點에 對하여’라는 題目으로 報告했다. 매우 긴 이 報告는 다음과 같은 文章으로 始作됐다. 

    “동무들! 쏘련의 붉은군대는 우리 人民에게 自由와 獨立을 가져왔다. 그는 우리 祖國의 零토에서 日本帝國主義를 永遠히 構築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民族은 永遠히 幸福을 누리게 되었다. 우리는 붉은군대와 그의 指導者 쓰딸린동무가 우리에게 준 兄弟的 幇助를 언제나 잊을 수 없다.” 

    김일성과 北韓 當局은 1960年代 들어가서는 이러한 말을 하지도 않고 지난날에 그러한 말을 했다는 事實조차 否認하는 뜻에서 지난날의 出版物들을 고친다. 

    그러면 김일성의 이 演說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指摘할 수 있을까. 첫째, 이 演說에는 南韓에 對한 言及이 全혀 없다. 우리가 이미 살핀 그 以前의 몇몇 公開的 演說에서도 그는 南韓에 對해 事實上 沈默했다. 이것은 이때 南韓의 政治指導者들이 38度線에 對해 자주 言及한 事實과 對照된다. 그의 一次的 關心은 오로지 北韓에 있었던 것이다. 

    둘째, 이 演說은 그가 蘇聯에 對해, 그리고 레닌과 스탈린의 가르침에 對해 매우 충성스러운 態度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演說에서 그는 레닌을 ‘우리 樹齡’이라고 부르며 네 次例 擧名했고 스탈린을 일곱 次例 擧名했다. 거기에 더하여, ‘레닌選集’에서 두 次例, 그리고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第(諸)問題’에서 두 次例, 스탈린의 ‘黨事業의 缺點 等에 對하여’에서 한 次例 引用하기도 했다.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그들의 著作들 以外에는 어느 누구의 이름이나 著作도 言及되지 않았음에 미뤄, 이 演說은 그가 얼마나 깊이 레닌과 스탈린에 依存해 있었는지 말해주었다. 

    이 演說에서 그는 野涕洟카, 구룹빠, 쀼로 等 러시아語 單語들을 使用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蘇聯共産黨 敎育의 影響을 받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뒷날 北韓의 公式 刊行物에 이 演說을 收錄하는 境遇 러시아 單語들을 可能한 限 줄였으며, 特히 레닌과 스탈린에 對한 言及을 거의 削除한다. 레닌을 ‘우리 樹齡’이라고 呼稱한 대목은 完全히 削除한다. 

    셋째, 이 演說은 그가 레닌주의의 틀 안에서 思考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糖이 勞動者 中心의 黨이 돼야 한다는 것, 下部組織은 上部組織에 無條件 服從하는 것을 鐵의 紀律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職業同盟은 黨의 指導를 따라야 한다는 것 等은 모두 레닌主義 黨組織 原則에 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그때 國內派 共産主義者들을 代表해 일정하게 影響力을 行使하던 오기섭에 對한 攻擊이기도 했다. 오기섭은 職業同盟은 黨의 指導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主張했다. 

    넷째, 이 演說은 그가 群衆路線을 매우 重視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黨의 群衆과의 連繫에 對해 깊은 關心을 보이면서 黨의 일꾼들이 群衆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力說했다. 群衆路線에 對한 그의 强調는 그 以後에도 一貫되게 繼續되며 그의 政治 資産이 된다. 

    다섯째, 그는 親日派의 黨內 浸透에 對해 警告했다. 여섯째, 이 演說은 그가 1945年 11月 下旬 新義州에서 일어난 反共學生示威로부터 큰 衝擊을 받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事件이 社會民主黨의 敎師(敎唆)에 依해 일어났다고 把握하면서도 糖이 ‘群衆의 氣分’을 알지 못한 데서 發生한 것으로 보았다. 

    여섯째, 이 演說은 그가 統一戰線路線에 如前히 執着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 亦是 오기섭을 비롯한 國內派 共産主義者에 비해 國內 基盤이 弱한 그가 自身의 支持者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入黨시키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必須的이었다. 

    일곱째, 그는 朝鮮共産黨北部朝鮮分局이란 말을 全혀 쓰지 않았으며 ‘北部共産黨’ ‘北朝鮮共産黨’ ‘우리共産黨’이란 말을 썼다. 그는 ‘分局’이란 말이 싫었던 것이다. 여기서 出發해, 1946年에 들어가서는 ‘北朝鮮共産黨’이란 呼稱 하나만을 쓰기 始作한다. 

    마지막으로, 이 演說은 러시아語를 飜譯한 것 같다는 느낌 또는 朝鮮語에 能熟하지 않은 蘇聯系 朝鮮人이 쓴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볼셰비크들이 群衆들과 廣範한 連絡을 保全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들을 당적할 者가 없을 것임을 正當하게 是認할 수 있다. 그와 反對로 볼셰비크들이 群衆들과 絶緣되어 있고 群衆들과의 連絡을 잃으며 官僚主義的 色彩에 덮여 있다면 그들은 모두 힘을 喪失할 것이며 廢墟地로 化하고 말 것이다”라는 대목이 그러한 느낌을 준다. 

    가장 重要하게, 김일성은 12月 18日 蘇聯占領軍의 强力한 影響力 行事에 힘입어 ‘北朝鮮共産黨’의 責任祕書로 選出됐다. 入國한 때로부터 90日째 되는 時點에 그는 北韓에서 共産黨 最高責任者의 자리를 獲得한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