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誤用된 民主, 御用된 進步, 感染된 保守|新東亞

誤用된 民主, 御用된 進步, 感染된 保守

[奉達號 便宜店 칼럼] 世上에 어떤 리버럴이 5·18歪曲處罰法 같은 駭怪한 法을 만드나

  • 奉達號 便宜店主

    runtokorea@gmail.com

    入力 2020-11-2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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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用語의 橫領, 用語의 掠奪

    • ‘民主進步’ ‘愛國保守’ 떠들며 政治的 分斷國家로

    • 야매(野昧) 根本主義 阿修羅 싸움판

    • 民主 保留하고 敵(敵)부터 쳐내는 ‘獨裁’

    • 世上에 이토록 輕薄한 ‘保守’도 있는가

    • 조지 오웰이 ‘1984’에 豫見한 신어(新語)의 새 時代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제40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인 5월 18일 광주 북구 국립5·18 민주묘지 추모탑에 분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文在寅 大統領과 夫人 金正淑 女史가 제40주년 5·18 民主化運動 記念日인 5月 18日 光州 北區 國立5·18 民主墓地 追慕塔에 焚香하고 있다. [靑瓦臺寫眞記者團]

    民主黨 大權 潛龍으로 꼽히는 어느 政治人과 食事를 함께한 적이 있다. 자리에 앉기 前 名銜을 주고받으며 略歷을 簡單히 말했더니 그가 환히 웃으며 했던 말, “同志, 반갑습니다.” 만난 지 채 3分이 되지 않은 때였다. ‘同志’가 3分카레처럼 척척 만들어지는 것도 아닐진대 그가 내 무엇을 알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고 判斷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어느 政治人의 學校 後輩라고 하니까 “어, 그래?”라며 곧장 말을 놓은 政治人보다는 그래도 나아 보였다. 한 番 만난 사람과 兄님 동생이 되고, 甚至於 同志도 되는, 何如間 政治人들의 넉살이란.

    “우리 民主進步勢力”

    그 潛龍과의 만남에서 疑訝함을 느낀 건 ‘民主進步勢力’이라는 表現이었다. 그는 對話에서 隨時로 “우리 民主進步勢力”이라는 表現을 使用했다. 언제부터 민주당이 民主進步勢力이 된 걸까? 民主는 그들의 슬로건이니 그렇다 치고, 果然 언제부터 그들은 ‘進步’마저 된 걸까? 

    내 記憶으로 言論이 韓國의 政黨 構造를 保守-進步로 兩分하기 始作한 것은 채 20年이 되지 않는다. 그前에는 與黨-野黨, 或은 신한국당, 民主黨, 평민당, 자민련 하는 式으로 그저 黨名(黨名)으로 말했지, 制度圈 政黨 가운데 어떤 政黨을 오롯한 保守政黨, 또 어떤 政黨은 特別히 進步政黨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黨內에도 保守-進步가 섞여 있어 黨內 保守派, 黨內 改革派 或은 少壯派라고 불렀으며, 保守-進步는 大體로 그런 意味로 使用됐다. 몇 個 政黨을 묶어 保守陣營, 進步陣營이라고 統稱하는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色깔論을 의식한 탓이지만 金大中 前 大統領은 生前에 自身의 理念 性向을 ‘中道 右派’라고 유난히 强調했다. 김대중이 만든 政黨들도 恒常 ‘中道 政黨’을 標榜했지 한 番도 스스로 進步勢力이라고 하지 않았다. 政黨 內部 理念 地形이 特定 方向으로 쏠리고, 外部에 그렇게 認識되는 것을 極度로 警戒했다. 

    變化가 생기기 始作한 때는 2003~2004年頃인 것 같다. 盧武鉉 大統領이 自身을 大統領으로 만들어준 민주당을 脫黨해 열린우리당에 合流하고, ‘大統領 노무현 彈劾訴追案’이 國會를 通過해 이른바 ‘彈돌이’라고 불린 運動圈 政治人들이 大擧 國會에 進出해 保革(保革) 葛藤이 觸發할 때, 열린우리당이 스스로 ‘進步’ 範疇 안에 差別的 포지셔닝을 한 것이 出發點 아닐까 싶다. 國民의 政治 性向도 保守-進步로 나누어, 輿論調査를 할 때 “當身은 自身이 保守라고 생각합니까, 進步라고 생각합니까” 묻기 始作한 것도 그즈음人 것으로 記憶한다. 그前에도 그런 式의 輿論調査가 있었나. 寡聞한 탓이지만 없던 것 같다. 

    그것부터 다시 살펴보자. 政治 地形을 保守-進步로 나누는 일은 果然 妥當한가. 進步를 英語로 옮기면 當然히 Progressive일 텐데, 世界 어디에도 政治 地形을 Conservative와 Progressive로 兩分하는 나라는 없다. Progressive는 事實 政治用語로 잘 쓰이지도 않는다. 保守에 대척하는 用語로는 大體로 Liberal을 使用한다. 리버럴의 뜻을 穩全히 살려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 그리 수월치 않고, 勿論 리버럴에 ‘進步的’이라는 뜻도 들어 있지만, 韓國의 이른바 進步勢力을 果然 ‘리버럴’이라고 할 수 있을까? 世上에 어떤 리버럴이 5·18歪曲處罰法 같은 駭怪한 法을 만들려 하며, 世上에 어떤 民主나 進步가 黨員 26%가 參與한 온라인 投票를 “壓倒的 贊成” “全幅的 支持”라며 黨憲까지 뜯어고쳐 自身들의 性醜行 波紋으로 實施되는 補闕選擧에 期於이 候補를 내려고 할까? 



    却說하고, 韓國의 進步는 果然 뭐가 進步인지 알 수 없는, 그야말로 ‘韓國的 進步’다. 말이 進步誌 大體 무엇을 志向하는 進步인지 알 수 없고, 그저 “우리는 進步”라고 用語를 先占해 버린 꼴이다. 全혀 進步的이지 않은 사람들이 進步를 自處하고 있으니 用語의 橫領이라고 말할 수 있고, 用語의 掠奪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보이는 模樣으로는 “썩어빠진 旣得權 勢力을 몰아내고 우리가 새로운 社會의 主流(主流)가 되겠다”는, 이른바 主流 交替가 그들이 말하는 進步라고 볼 수 있겠는데, 그러한 論理라면 탈레반도 進步고 朴正熙는 革命한 것이 된다.

    야매(野昧) 根本主義 阿修羅 싸움판

    進步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用語를 먼저 ‘찜’해 버렸는데 어쩌겠나. 問題는 이른바 ‘保守’라고 불리게 된 勢力이다. 스스로 保守라고 낙인찍혔으면 어떻게든 그것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쳐야 하는데 오히려 保守라고 불리지 못해 안달이다. 무슨 이런 荒唐한 사람들이 다 있을까 싶을 程度다. 

    用語 自體의 好感度로 볼 때 保守는 出發부터 不利하다. 世上 어떤 사람이 “나는야 保守”라고 자랑하고 싶을까? (요즘 보면 그런 사람들이 있긴 하다. 世上은 그들을 ‘꼰대’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되도록 改革的이고 進取的이고 싶은 것이 人之常情이지 일부러 頑固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려 애쓰는 사람은 없다. 國民 가운데 30%假量이 아직도 自身의 理念 性向을 保守라고 밝히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싶겠지만, 政治用語로서 保守-進步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觀點과 態度’로서 保守-進步를 묻는다면 사람들은 大體로 進步的이고 싶어 한다는 말이고, 이것이 政治 프레임으로 옮겨와 保守에 不利하게 作用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補修-進步는 되도록이면 벗어나야 하는 프레임이다. 出發부터 공정하지 못하니까. 이른바 進步가 用語를 橫領해 스스로 進步라고 떠드는 것은 當然한 일인데, 報酬는 그럴수록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도록 努力해야 한다.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는 政治 書籍으로는 이제 古典의 班列에 들어선 冊인데, 이 冊의 核心은 題目 그대로 코끼리(공화당의 象徵)는 생각하지도 말라는 忠告다. 美國 민주당이 選擧에 지는 理由를 分析해 보니 共和黨이 짜놓은 프레임에 자꾸 휘말려 그들 主張에 論駁하는 일만 繼續하다 有權者에게는 共和黨의 들러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프레임에 끌려다니지 말고 自己 主導 프레임을 만들라”는 것이 이 冊의 結論이다. 只今 韓國의 이른바 保守에게 그대로 適用되는 말 아닐까. 言論이 韓國의 政治 地形을 保守와 進步로 兩分하려 할수록 “요즘 世上에 報酬가 어디 있고 進步가 어디 있느냐”며 그것을 낡은 二分法으로 만들어버려야 하는데, 이 바보들은 “내가 바로 眞性(眞性) 保守”라며 그 프레임 안으로 깊숙이 빠져 들어간다. 아찔한 일이다. 

    韓國의 制度圈 酒類 政黨이 스스로 保守政黨이라고 포지셔닝하기 始作한 것도 極히 最近 일이다. 생각해 보자. 李承晩과 朴正熙, 전두환의 政黨이 언제 保守政黨을 自處한 적 있던가? 오히려 改革的이고 進取的으로 보이기 위해 안달이었다. 이른바 ‘安定 속의 改革’을 내세우면서, 野黨이 强占으로 자랑하는 것을 “우리도 할 수 있다”며 自己 쪽으로 끌어오는 것을 當然한 戰略으로 삼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이 發言을 보자. “現代 政黨은 社會 多數의 목소리를 代辯해야 하기 때문에 保守와 進步가 함께 있는 것은 短點이 아니라 長點이다. 따라서 根本主義者들로만 뭉친 黨은 受權政黨이 되기 어렵다.” 누가 한 말일까? 2001年 5月, 이회창 한나라당 總裁가 한 말이다. 그는 當時 “健全한 保守와 合理的 進步가 어우러진 政黨, 卽 保守의 基調 위에서 改革을 志向하는 이른바 改革的 保守政黨”을 한나라당의 指向點으로 삼았다. 

    參考로 이 發言도 보자. “우리 黨은 改革的 保守와 合理的 進步의 두 날개를 갖고 中産層과 庶民에 力點을 두는 國民政黨이다.” 여기서 ‘우리 黨’은 어떤 黨일까? 이 말은 또 누가 했을까? 2001年 8月 박상천 민주당 最高委員이 한 말이다. 2001年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制度圈 政黨들은 이렇게 ‘멀쩡’했다. ‘國民政黨’을 當然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瞬間 그런 것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당치도 않은 理念을 앞세우며 ‘民主進步’니 ‘愛國補修’니 하면서 偏向性이 두드러졌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목소리 크고 活動力 旺盛한 少數가 市民의 이름을 假裝해 政黨을 뒤흔들며 社會를 ‘兩極化’하는, 政治的 分斷國家가 돼버렸다. 自身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根本도 모르면서 根本을 떠드는 야매(野昧) 根本主義者들의 阿修羅 싸움판이 펼쳐지고 있다. 

    用語가 掠奪當했다. 民主는 誤用된 지 오래고, 進步는 計算器를 두드려 御用이 됐으며, 保守는 異常하게 感染됐다. 

    運動圈 出身 민주당 政治人의 多數를 占有하는 NL(民族解放)系列은 元來 ‘進步政黨’ 戰術을 즐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NL의 世界觀은 “大韓民國은 未濟(美帝)의 完全한 植民地”라는 不滅의 觀點에 立脚해 있는데, 미제가 制度圈에 進步政黨을 許容하는 일은 幻想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地下 前衛黨(前衛黨) 戰術을 基本으로 했다. 그것에 龜裂이 일어나기 始作한 것은 김영삼 大統領 當選이었고, 김대중 大統領 當選으로 기둥이 흔들렸는데, 김대중 執權 初期만 해도 “軍복쟁이든 私服쟁이든 大韓民國 大統領은 美製 앞잡이”라던 그들은, 김대중이 ‘首領님’을 만나면서 아노미 狀態에 빠졌다. 노무현 政府 들어 大大的 制度圈 進入은 이 같은 背景에서 일어났다. 


    民主 保留하고 敵(敵)부터 쳐내는 ‘獨裁’

    2019년 11월 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 인근에서 열린 ‘검찰개혁, 공수처 설치 촉구 촛불문화제’(왼쪽). 2019년 12월 14일 대구 동구 동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태극기집회 참석자들이 문재인 대통령 퇴진을 주장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뉴스1]

    2019年 11月 2日 서울 永登浦區 汝矣島公園 隣近에서 열린 ‘檢察改革, 公搜處 設置 促求 촛불文化祭’(왼쪽). 2019年 12月 14日 大邱 東區 동대구역 廣場에서 열린 太極旗集會 參席者들이 文在寅 大統領 退陣을 主張하며 口號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뉴스1]

    事實 NL은 ‘民主’도 그리 달갑게 생각지 않았다. NL은 革命의 3代 課題를 자주·民主·統一이라고 整理하고(줄여서 자민통), 그것을 이름으로 내건 NL系列 地下組織度 있었는데, 나중에는 ‘자민통’마저 改良(改良)이라고 했다. (理念 運動圈에서 ‘改良’은 더러 變節者보다 深刻한 內部의 敵으로 取扱된다.) 어찌 敢히 者-民-桶을 同一線上에 놓느냐는 것이다. “자주 없이 民主 없고, 자주 없이 統一 없다. 오로지 反美自主!” 이것이 正統(!) 酒邪派다운 立場이다. 게다가 學生運動 內部가 軍隊 組織처럼 上命下服 爲主였고, 北韓의 人權彈壓이나 守令獨裁를 辨明하자니 NL은 民主主義를 後順位債券처럼 여겼다. 必要할 때 갖다 쓰는 道具 같은 存在였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야, 우리가 人民에게 好意를 베풀 듯 實現할 수 있는 것이 民主라고 內心 가늠했다. 事實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獨裁’도 그런 理致 아닌가. 民主는 保留하고 敵(敵)부터 쳐내는 것이 優先이며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중국 文豪 루쉰의 에세이 題目)고 이를 악무는 態度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獨裁 ― 이른바 ‘착한 獨裁’다. 只今 이른바 ‘대깨文’들도 그런 精神으로 싸우는 것 아닐까 싶다. 

    理解할 수 없는 것은 ‘進步’라는 用語의 元來 占有權(?)을 갖고 있는 運動圈 PD(民衆民主)系列이다. 1987年 백기완을 이른바 民衆 候補로 推戴하려 한 때로부터, 1997年 大選에서 國民勝利21을 만들어 進步政黨의 가시밭길을 헤쳐 가던 때로부터, NL에 밀려나 制度 政治權에 먼저 進入해 ‘進步’라는 用語를 들여오려 무던히도 애쓴 勢力은 바로 그들이었다. 다른 누군가 進步를 僭稱하면 奮然히 들고일어나 鮮明한 ‘進步 角(角)’을 세워야 하는 것이 進步政黨 本然의 모습일 텐데, 지난 몇 年間 正義黨은 말 그대로 2中隊가 돼버렸다. 이제는 天下가 아는 일이 됐지만 가당찮은 이른바 聯動型 比例代表制와 그로 인해 얻게 될 國會議員 배지 몇 個에 눈이 멀어 그랬던 것 아닌가. 

    大韓民國에 進步政黨은 사라졌다. 權力型 不正非理가 눈앞에 無數히 보이고, 靑瓦臺와 結託한 詐欺꾼들의 挾雜으로 數兆 원이 空中에 사라졌으며, 改革을 憑藉한 脫線과 妄動, 權力掌握 陰謀가 着着 繼續되고 있는데 自稱 進步政黨은 民主의 橫領者들과 한牌가 돼 있다. 이 犯罪는 착한 犯罪, 저 犯罪는 나쁜 犯罪인가. 大韓民國에 이른바 進步的 知識人도 사라졌다. 꼼수와 爲先, 거짓과 辨明으로 點綴된 勢力을 ‘얕은 허물’이라고 감싸주면 곧장 ‘깨어 있는 知識인’이 되는 그런 수월한 世上이 됐다. 덧붙이자면 放送이 이렇게 御用인 時節이 언제 또 있었던가 싶다. 그리하여 먹고살기는 한참 便해졌으니, 어느 쪽이 이길지 약삭빠르게 判斷하며 그쪽에 가서 넙죽 달라붙으면 되는 것이다. 이 便한 民主進步 世上!

    世上에 이토록 輕薄한 ‘保守’도 있는가

    者, 그래서 正名(正名) 運動이라도 하자는 것인가. 民主를 破廉恥라 부르고 進步는 사쿠라라 부르면 되는 것일까. 그런다고 問題가 解決될까. 

    조지 레이코프가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 紹介하는 것처럼, 政治는 逆說的으로 ‘國民은 政治에 關心 없다’는 것으로 始作한다. 民主니 進步니 守舊니 保守니 하는 것에 關心 있는 國民이 果然 얼마나 될까? 소셜미디어에 글줄깨나 쓰는 사람들은 그런 論爭에 대단한 價値와 意味를 두는지 모르겠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民草들에게는 한낱 閑暇로운 識者들의 外界語일 뿐이다. 모든 것은 말장난에 不過하고 結局 ‘밥그릇 싸움’이란 事實은 賢明한 國民이 더 잘 안다. 

    國民은 實속 없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 檢察改革인지 檢察掌握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是是非非를 가리더라도, 싸움이 길어지고 뒤엉켜 俗稱 ‘개싸움’李 돼버리면 國民은 兩쪽 모두에 火를 낸다. ‘누가 이기든 빨리 끝내라’는 式으로 넌더리를 친다. 只今 딱 그렇게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민주당 사람들은 그런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인 것 같고, 모든 것을 개싸움으로 만드는 中이다. “惡辣하게 前進하자”(과거 노사모가 내세웠던 口號)는 예전 그들의 다짐대로 말이다. 政治에 對한 國民의 關心을 完全히 끊어버리고, 無關心의 曠野에서 새로 그들만의 世上을 만들려는 것은 아닌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視線은 다시 이른바 ‘保守’로 돌아온다. 民主와 進步가 救濟 不能이라면 保守라도 제 役割을 해주면 된다. 어떤 側面에서 ‘保守’라는 用語가 그리 나쁜 位置 選定은 아니다. 外部에서 “저 사람들은 保守勢力”이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게 作用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保守가 ‘改革’할 때 그렇다. 當身들이 保守라는 事實은 世上이 다 안다. 그런데 “어라, 保守라더니 改革도 하네?”라는 式으로 이른바 ‘改革保守’로 거듭날 때, 그런 때에 保守의 價値는 倍加된다. 民草는 希望을 갖는다. 

    하나 昨今 韓國의 保守는 단단히 感染됐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도 말아야 할” 時點에 자꾸 “코끼리처럼 되지 못해” 안달이다. 가장 큰 問題는 싸움에 執着하는 態度. 자꾸 “싸우는 野黨이 돼야 한다”는 注文이다. 世上에 그리 輕薄한 報酬도 있는가. 연신 場外 鬪爭을 외치고, 민주당 사람들과 똑같은 方式으로 말하고 行動하려 든다. 그래야 存在感이 산다고 생각하는 模樣인데 國民 多數는 그런 政治에 신물이 나 있다는 事實을 이 사람들은 아직 모른다. 이들이 깨닫지 못한 事實이 또 하나 있는데 文在寅 政府에 對한 反感이 아무리 높다 한들 國民들은 아직 ‘李明박槿惠’ 時節을 잊지 않았다는 事實이다. 最近에는 “차라리 박근혜가 나았다” 말하는 사람마저 생겨나고 있지만 그들이 미처 多數는 아니다. 게다가 只今은 코로나19街 國民의 모든 思考 判斷을 掌握한 時節이다. 戰術의 基本은 彼我(彼我) 力學 關係를 제대로 把握하는 일로 始作한다. 

    保守는 自己들이 少數이고 國民의 支持를 받지 못하며 主流에서 이미 排除됐다는 事實을 如前히 自覺하지 못하는 것 같다. 차마 認定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 하긴 朴槿惠 大統領이 彈劾되고 곧장 치른 大選에도 自己들 候補를 냈을 程度니 이들의 判斷 能力이 어느 程度인지는…. 한숨이 나오는 일이다. 그로부터 벌써 4年이 지났고, 지난 總選 民心을 통해 ‘確認 射殺’까지 當하고도 ‘愛國保守’를 외치고 있으니…. 갈수록 慘澹한 일이다.

    조지 오웰이 ‘1984’에 豫見한 신어(新語)의 새 時代

    韓國人의 理念 性向을 分析한 2004年 어느 輿論調査에 눈여겨볼 點이 있다. 韓國人은 保守와 進步의 差異를 大體 무엇을 基準으로 나누느냐 하는 것인데, 結論인즉 ‘弱者에 對한 配慮’가 進步的 價値觀, ‘國家安保 重視’는 保守的 價値觀으로 認識한다는 事實이다. 15年이 넘게 지났지만 이러한 判斷 基準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 大體로 平均的 韓國人은 保守-進步를 그렇게 가늠한다. 

    알다시피 保守와 進步는 相對的 價値觀이다. 安保를 重視한다고 弱者를 外面하지 않고, 弱者를 配慮한다고 安保를 無視하지도 않는다. 다만 어느 곳에 더 傍點을 찍느냐 하는 것에 달렸을 뿐. 그래서 現代社會의 政黨은 基本的으로 大衆政黨, 國民政黨을 志向하는 것이다. 保守와 進步 모두를 包括하려 말이다. 元來 進步는 理念으로 살아가고 保守는 融通性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進步는 理念 政黨이어도 保守는 實用 政黨이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理由로 保守가 執權할 수 있었다. 只今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 돼버렸다. 神奇하게도, 保守는 融通性을 잃어가고 進步는 利益으로 똘똘 뭉치고 있다. 用語를 掠奪하고 及其也 獨占하려는 者들의 至毒한 世上이다. 조지 오웰이 ‘1984’에 豫見한 신어(新語)의 새 時代가 찬연히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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