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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美愛의 法秩序 攪亂, 禹柄宇와 比較도 안 돼|신동아

秋美愛의 法秩序 攪亂, 禹柄宇와 比較도 안 돼

[申平의 풀피리?] 曺國, 秋美愛는 司法改革 戰列 흩트린 歷史의 罪人

  • 申平 辯護士·㈔公正世上硏究所 理事長

    lawshin@naver.com

    入力 2020-12-0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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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曺國?秋美愛가 蹂躪하는 憲政秩序

    • 政治的 中立性 保障限 檢察廳法 짓밟아

    • “못 먹어도 故!” 외치듯 달려들어 尹 壓迫

    • 秋, 進步 長期執權 使命意識 갖는 듯

    • 檢察·法院·警察 아우르는 司法改革 해야!

    *19代 大選 當時 申平 辯護士(64·司法硏修院 13期)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候補 中央選對委에서 ‘公益提報 支援委員會’ 委員長과 ‘民主統合포럼’ 常任委員을 지냈다. 그는 文在寅 政府가 들어선 뒤 與圈을 向해 쓴 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公平無私(公平無私)韓 知識人의 本보기 役割을 하고 있다. 只今 慶北 慶州에서 農事를 짓고 詩를 쓰며 산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12월 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뉴스1]

    秋美愛 法務部 長官이 12月 1日 서울 종로구 政府서울廳舍에서 열린 國務會議에 參席하기 위해 移動하고 있다. [뉴스1]

    나이가 이렇게 들고 보니 種種 쓸쓸함을 느낀다. 훌쩍 늙어버렸는데, 흘러간 歲月이 잡히지 않고 저 멀리 떨어져 있어서다. 좋은 點도 있다. 젊음의 가늠할 수 없는 情熱은 더 以上 나를 쥐고 흔들지 못한다. 나는 이미 現實의 利害關係를 거의 떠나버렸다. 나를 恥事하게 얽어매는 것은 없다. 차분하게 大地에 발을 딛고 餘裕롭게 이리저리 살핀다. 할 말도 거침없이 할 수 있다. 시골에서 農事짓고 사는데 滿足하며 사는 處地에 누구에겐들 눈치 볼 일 없다. 

    돌이켜보면 아득하나, 그 길에 박힌 追憶의 片鱗(片鱗)을 召喚해본다. 잘된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 잘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일도 있다. 그런 것들이 내 人生길의 方向을 그때마다 決定해온 것이 아찔하기만 하다.


    그때 3000萬 원을 받았더라면

    判事로 勤務하던 30代 中盤의 일이다. 옆집 사람이 돈을 가득 싼 褓따리를 들고 왔다. 같은 法院에 勤務하는 判事에게 事件에 關해 한 마디만 해달라는 付託과 함께였다. 3000萬원이라고 했다. 받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른 判事에게 “事件 잘 檢討해 봐주세요”라는 말 한 마디 하는 것이고, 그때만 해도 이런 程度는 法官社會에서 暗默的으로 容納됐다. 欲心도 났다. 나도 名色만 判事였지 內面은 特別할 게 없었다. 

    그러나 拒絶했다. 拒絶하면서도 많이 아쉬웠다. 많은 時間이 지나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卓越한 選擇을 했다. 그 돈을 받았다면 어찌 내가 只今까지 그나마 若干의 社會的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 것인가! 그 돈을 받았다면 나는 내 靈魂을 팔아버린 셈이 되었을 것이다. 



    當時 나는 普通의 家庭을 꾸려갈 수 없다는 狀況에 處해 絶望感을 느꼈다. 차차 憂鬱症의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것이 憂鬱症인 줄도 미처 모른 채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코올에 依存했다. 勿論 效果는 없는 채 수렁은 漸漸 더 내 몸을 끌어내렸다. 法曹人은 元來 술을 많이 마시는 職業이다. 얼마나 내 酒量이 세었던지, 法曹界 全體를 통틀어 1等 아니면 2等 아니겠느냐는 말이 오갔다. 斗酒不辭(斗酒不辭)에 새벽 네 時, 다섯 時까지 飮酒도 例事였다. 

    술 앞에는 壯士가 없다. 酒醉가 惹起하는 判斷力의 喪失은 致命的일 수 있다. 아찔한 瞬間이 더러 생겼다. 그때 單 하나의 境遇에라도 제대로 걸렸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 番씩 닥쳤던 危機들이 別일 없이 지나간 건 運이 좋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삶의 爆破 雷管을 잘 避할 수 있던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잘 나서 或은 내가 잘 選擇해서 避한 게 아니라 運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돈 褓따리도 어쩌다 그날 덜컥 받았을 수도 있다. 千 가지 萬 가지로 變하는 마음 한 番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可能한 일이었다. 내 삶의 方向을 左右한 여러 具體的 事件들이 연이어 머리에 떠오른다.


    李會昌과의 因緣

    大學을 다니면서 考試工夫를 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어린 마음에 法이나 法學이란 것은 社會의 ‘가진 者’, ‘强者’들의 利益을 保護하는 手段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法學을 至極히 嫌惡했다. 막걸리나 마시고 精神이 어찔한 狀態가 되지 않으면 法書를 읽을 수 없는 悲慘한 몰골로 지냈다. 

    1980年 1月의 일이다. 親兄弟처럼 지내던 李錫玄(前 國會副議長) 兄이 다니던 현대건설을 그만두고 동교동系(金大中 前 大統領의 家臣그룹)의 祕書로 들어갈 생각을 했다. 나와 함께 한 사흘間 집을 나와 낮에는 占집에 가서 占을 보고, 밤에는 술을 마시며 時間을 보냈다. 어떤 곳에 가니 동교동系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다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래야 한다는 式으로 占卦를 말해줬다. 

    相反되는 두 占卦가 모두 맞았다고 본다. 昔賢 兄은 멀쩡한 職場을 집어치우고 동교동系에 들어가면서 1980年 ‘서울의 봄’을 거쳐 5·18 光州民主化運動 過程에서 바로 連行됐다. 동빙고동에 가서 알몸으로 거꾸로 매달린 채 매를 맞았으니 무척 不幸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便으로는 그런 일이 바탕이 돼 5選 國會議員을 하며 國政運營에 나름의 役割을 할 수 있었을 터다. 

    그때 昔賢 兄은 나보고도 동교동系에 같이 가자고 했다. 考試를 準備하는 浪人으로서 故鄕에 계신 늙은 父母님의 期待를 차마 저버릴 수 없는 處地였다. 昔賢 兄은 김대중 先生이 當時 나만한 나이의 嶺南出身 靑年으로 英語, 日語 繪畫가 可能한 사람을 골라 自身의 後繼者感을 키우겠다는 計劃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거기에 應募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때 내가 昔賢 兄의 提議를 받아들였더라면 내 人生은 크게 달라졌음에 틀림없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말이다. 

    日本 留學 後 1993年에 法官 社會의 整風을 主張한 일로 現行 憲法 施行 後 처음으로 法官再任命에서 탈락했다. 그 前에 法官社會와 나 사이의 軋轢은 어느 程度 所聞이 나있었다. 내가 쓴 ‘日本 땅 日本 바람’은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冊에서 韓國 法官社會에 加한 辛辣한 批判이 司法府 上層部를 激忿시켰던 것이다. 

    이회창 當時 監査院 院長이 나를 딱하게 여겨 監査委員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法官再任命脫落 消息이 傳해져 霧散됐다. 30代의 나이로 出世(?)할 뻔 했다. 그러자 그 분은 나를 創設 初期의 憲法裁判所 事務處長(當時는 次官級으로 處長職을 두었음)으로 조규광 當時 憲法裁判所 所長에게 薦擧했다. 조 所長은 辯護士 經歷이 있는 사람으로 뽑고 싶다고 완곡히 拒絶했다. 

    그 後 1997年. 辯護士로 일하던 나에게 이회창 當時 신한국당 總裁의 腹心人 어느 議員이 日本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내가 日本語를 잘 하고 日本에 相當한 人脈이 있다는 點을 考慮해 李 總裁에게 유리한 國際環境을 造成할 目的이 있었던 것 같다. 大選 戰略의 一環이었을 것이다. 몇 番의 付託에도 不拘하고 나는 冷靜하게 拒絶했다. 왜 그렇게 거듭 拒絶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理由가 分明치 않다. 이때 拒絶하지 않았다면 내 運命의 方向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한다. 그 後 李 總裁가 겪게 된 不運에 對해 그에게 따뜻한 慰勞의 말 한 마디 傳하지 못한 내 背恩忘德함이 무거운 짐이 돼 아직까지 가슴을 누르고 있다.


    公職에 對한 抛棄와 老年의 自由

    2013年 8月에 親舊 목영준(前 憲法裁判所 裁判官)李 憲法裁判官 後任으로 나를 薦擧했다. 國會에서 選出하는 與野合議 몫이었다. 그 무렵 나는 日本 學者들과 共同으로 冊을 出版하기 위해 韓國 憲法學 敎授들을 이끌고 日本을 訪問 中이었다. 李穆熙 當時 민주당 議員에게서 電話가 와서 “민주당에서는 申 敎授를 새로운 憲法裁判所 裁判官으로 推薦하기로 했어요”하고 말했다. 같이 있던 韓國 敎授들이 “와!”하고 소리를 질렀다. 當時 與黨(새누리당) 쪽에서도 別 無理 없이 나를 選擇했는지, 나에 對한 最終 人事檢證에 突入했다는 消息을 接했다. 

    그러나 日本 長期出場에 이어 또 中國 베이징에서 열리는 ‘아시아 憲法포럼’에 參席해야만 했다. 내가 이 大會의 創設者여서 여러 準備를 위해 長期出張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中國에서 傳해 들으니, 狀況이 차츰 異常하게 흐르고 있었다. 結局 내가 아닌 강일원 氏가 後任 裁判官이 됐다. 後에 그는 박근혜 前 大統領 彈劾 審判에서 主審을 맡게 된다. 

    萬若 내가 日本과 中國에 長期出張을 가지 않고 國內에 있었다면 事情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래서 豫定대로 憲法裁判所 裁判官으로 國會에서 選出됐다면 하고 想像해보기도 하나 부질없는 짓이다. 그리고 여러 次例 大法官에 薦擧되던 中 2018年에 確實한 힘을 받으며 候補로 推薦받았으나, 뜻하지 않은 狀況이 造成돼 또 坐礁한다. 

    萬若 故(故) 조영래 辯護士가 젊은 나이에 世上을 떠나지 않았다면 國家의 重要 職責을 맡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랬으면 조 辯護士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보다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公的인 役割을 遂行할 수 있었으리라는 空想(空想)을 더러 하기도 했다. 

    이런 저런 事由가 겹쳐 내가 公職을 맡아 뜻을 펼칠 機會를 막아버렸다. 運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얼마 前까지도 이것이 좀 서운했다. 이젠 나이가 公職을 맡을 限界 時點을 지나버렸다. 그리고 知的 能力의 衰退를 如實히 느낀다. 이제는 나설 때가 아님을 잘 알게 됐다. 運命이라는 게 있다면, 그 運命은 내게 公職의 機會를 주지 않았다. 그런 役割, 奉仕를 하지 않은 것에 내 責任은 없다. 이젠 그런 꿈 自體를 完全히 抛棄했다. 抛棄는 나에게 훨씬 큰 自由를 줬다. 老年의 자유로움에 푹 젖었다. 자유로움이 주어진 데 至極히 感謝한 마음으로 산다. 

    그래도 발을 헛디디는 큰 事故를 當하지 않고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 고맙고 奇跡처럼 여겨진다. 딱 한 番을 除外하고는, 그 많았던 險한 구덩이들에 깊이 빠진 일이 없이 이 나이까지 살아온 게 어찌 奇跡이 아니랴! 엄청난 허물과 弱點을 가진 人間이면서도 그나마 크게 惡하고 삿되지 않은 마음가짐을 가진 德에 나에게 주어진 福이 아니랴 하고 自慰한다.


    禹柄宇가 한 일을 秋美愛와 比較하면

    추미애 법무부 장관 측 이옥형 변호사(왼쪽)와 윤석열 검찰총장 측 이완규 변호사가 11월 30일 서울행정법원에서 열린 윤 총장의 직무배제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사건 비공개 심문을 마친 뒤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영대,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秋美愛 法務部 長官 側 이옥형 辯護士(왼쪽)와 尹錫悅 檢察總長 側 이완규 辯護士가 11月 30日 서울行政法院에서 열린 尹 總長의 職務排除에 對한 執行停止 申請事件 非公開 審問을 마친 뒤 記者들 앞에서 發言하고 있다. [박영대, 양회성 동아일보 記者]

    運이나 運命에 關해 생각하다보면, 朴槿惠 政府에서 民政首席을 하다가 그 後 엄청난 試鍊을 겪은 우병우 氏를 떠올린다. 사람들은 如前히 우병우 氏에 對한 印象이 좋지 않다. 나는 言論에서 그의 얼굴을 얼핏 對할 때마다 깊은 憂愁와 形言할 수 없는 絶望感을 본다. 그리고 그에 對해 한없는 憐憫을 가진다. 萬若 그가 少年登科를 하지 않았다면, 或은 朴槿惠 政府에서 벼락出世를 하지 않았더라면 自身에게 얼마나 좋았을까. 그가 只今 裁判을 받았거나 또 裁判이 進行 中인 事件에서 起訴된 犯罪行爲란 것들은 靑瓦臺에서 過去부터 別달리 잘못이라는 意識도 없이 慣行的으로 해오던 일이다. 그것들은 只今 秋美愛 法務部 長官이나 그와 한 팀을 이룬 李成尹 서울中央地檢長, 沈在哲 法務部 檢察局長 等이 벌이는 일과 比較하면 別 것 아니라고 할 수 있다. 于 氏는 決코 그렇게 露骨的으로, 또 權力을 利用한 野卑한 手法으로 國家의 法秩序를 어지럽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只今 ‘秋美愛 長官팀’은 憲法上 法治主義나 適法節次의 原理와 같은 原則들을 여지없이 無視하거나 或은 이를 巧妙히 비켜나며 權力의 칼을 휘두르고 있다. 그 結果, 檢察權의 政治的 中立性을 保障하는 檢察廳法 等 法律을 짓밟으며, 中立的 官僚制로 대표되는 國家의 紀綱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리고 있다. 그 絢爛한 작난(作亂)에 눈이 어지럽다. 

    아, 어찌하여 우리가 이 地境까지 와버렸는가! 그 팀은 고스톱 판에서 “못 먹어도 故!”라고 외치듯이 繼續 달려들어 尹錫悅 檢察總長의 骨髓를 후벼 파려고 한다. 그렇게 하여 그가 ‘人格的 死亡’에 이를 때까지 이 亂場판은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行動들에 對한 否定的 氣流가 只今 急激히 形成돼 政權의 힘을 빼고 있다. 

    法務部 監察委員會는 12月 1日 臨時會議를 열고 “秋 長官의 尹 檢察總長에 對한 懲戒請求, 職務排除, 搜査依賴는 모두 不適切하다”고 滿場一致로 結論 내렸다. 監察位 勸告가 나온 直後에도 秋 長官은 “여러 次例 疏明 機會를 附與하기 위해 努力하는 等 適法한 節次에 따라 監察이 進行됐고, 그 結果 懲戒 嫌疑가 認定돼 總長에 對한 懲戒 請求를 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같은 날 서울行政法院 行政4部(조미연 部長判事)는 尹 總長이 秋 長官의 職務 排除 命令에 反撥해 提起한 執行停止 申請을 引用했다. 監察위와 法院이 연이어 尹 總長 側 손을 들어준 셈이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檢察을 不當하게 擁護하고 있다고 錯覺한다. 하지만 내가 只今까지 얼마나 熾烈하게 檢察에 맞서 싸워왔는지는 記錄으로 남아있다. 過去 權威主義 政府 下에서 一筆短期로 달려 나가 民主化運動 人事, 勞動運動家를 放免해 救해냈다.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그것이 한 判事에게 안기는 엄청난 重壓感이나 또 그로 인해 내가 받았던 甚大한 不利益을 헤아려 달라고 要請하는 게 아니다. 나는 單 한 番도 그런 要請을 한 일이 없다. 다만 그런 過去를 가진 사람이 왜 祖國 敎授나 秋美愛 長官을 批判하는지 그 緣由가 있을지 모른다는 程度의 認識은 해주었으면 한다. 

    내가 反政府·反體制 人士들을 釋放해 擔當 檢事들은 考課(考課)評價에서 損害를 입었으니 내게 怨望의 마음을 품었을 터이다. 檢事 中에도 氣分은 나쁘지만 判事가 法에 따라 하는 일이니 甘受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大部分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나에 對한 온갖 中傷謀略을 서슴지 않았다. 甚至於는 나를 거꾸러뜨리는 것이 自身의 人生目標인 양 설쳐대며 내가 判事職을 떠난 뒤에도 긴 時間 내 뒤를 따라오며 害코지를 한 이도 있었다. 

    數十 年 間에 걸쳐 우리 社會에서 莫强한 힘을 갖는 司法 權力과 不和했다. 이는 한 個人에게 破滅的(devastating)인 影響을 미치기 마련이다. 나는 이것이 나에게 加해진 天刑(天刑)이라 생각하고 꿋꿋이 견뎠다. 모질고도 野俗한 隔絶(隔絶)의 긴 歲月이었다. 언젠가는, 아마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내가 남긴 著述이나 資料를 읽으며 後世에서 나에 對해 작은 名譽回復은 해주리라는 稀微한 希望의 불씨를 안고 살아왔다. 뜻하지 않게 不遇한 處地의 나를 理解하며 도움을 베풀기를 마다하지 않은 적잖은 사람들에게도 恒常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살아왔다.


    曺國, 秋美愛 머릿속 ‘眞正한 司法改革’ 없어

    나는 檢察의 어두운 面을 누구 못지않게 잘 꿰뚫고 있다. 行動으로 抵抗했다. 平生을 통해 檢察, 法院, 警察을 모두 아우르는 司法改革을 硏究하고 主張했다. 많은 法曹人들이 이에 참을 수 없는 反感을 품었다. 露骨的으로 내 面前에서 甚하게 侮辱을 주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의 大部分은 所謂 ‘개川에서 난 龍’으로 自身이 法曹人이 된 것을 一生의 榮譽로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法曹界를 大幅 改革해야 한다는 主張을 끈질기게 하니 甚한 憤怒를 느끼는 것이다. 

    司法改革을 畢生의 課題로 생각하고 行動을 해온 내가 어찌 檢察을 擁護하기 위해 秋美愛 팀을 批判하겠는가. 決코 그렇지 않다. 내가 아는 限, 조국 敎授나 秋美愛 長官의 머릿속에는 우리가 願하는 ‘眞正한 司法改革’은 들어있지 않다. 逆說的으로 말하면, 조 敎授나 秋 長官은 司法改革의 戰列을 흩트린 歷史의 罪人들이다. 우리나라는 OECD(經濟協力開發機構) 國家 中 司法信賴度 꼴찌인 나라다. 司法改革이 그토록 切實히 必要한데 그들 때문에 千金 같은 貴重한 時間이 虛費됐다. 

    秋 長官이 只今 벌이고 있는 ‘活劇’은 司法改革과는 無關한 일이다. 왜 내가 이런 말을 斷定的으로 하는지 궁금하다면 내가 그間 司法改革에 對해 써놓은 글을 한 番 읽어봐 줬으면 한다. 그리고 秋 長官이나 조 敎授가 무엇 때문에 檢察改革의 회오리를 일으켜 왔는지 그 緣由를 한 番 돌아봐 주기를 바란다. 오직 나는 한 名의 民主市民으로서 그리고 憲法學者로서 그들이 無慘하게 蹂躪한 憲政秩序, 國法秩序를 지키는데 작게라도 쓰임새 있는 사람이 되고자 그들의 지나친 行動을 批判하는 것이다. 

    尹錫悅 總長이 그들의 意圖대로 일찌감치 눈치를 채고 辭職했더라면, 그래서 政權의 心臟을 겨눈 搜査들이 有耶無耶로 끝날 수 있었더라면, 그들은 더 以上의 無理數를 犯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영화롭게 權力을 즐기며 나른한 몸으로 봄 낮잠을 자듯 한 世上 잘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尹 總長이 버티자 자꾸 더 强度가 甚한 手를 두고 있다. 卑劣함과 狡猾함이 程度를 漸漸 더해가고 있다. 그런 行動들은 尹 總長이나 한동훈 檢事長 같은 몇 몇 個人에게만 不法, 不當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國家 全體에 深刻한 害惡을 끼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고 있다. 過去에 우병우 氏가 한 行爲들과는 比較도 할 수 없는 次元의 行爲다. 

    그들이 이 모든 일에 얽혀 들어간 것이 純全히 그들의 主體的 選擇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秋 長官은 元來 大權을 念頭에 두고 只今까지 熾烈하게 살아온 사람이니 順順히 自身의 選擇이었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人生에서 어떤 때는 마치 홀린 듯이 握手(惡手)를 두는 때가 頻繁하게 있지 않은가. ‘秋美愛 팀’의 팀員들은 나중에 가서는 어쩌다보니 不運한 일에 휘말려 들었다고 길게 歎息하지 않을까 한다. 모진 사람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 式으로 當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秋 長官! 溫柔함과 平穩함 찾으시오

    秋 長官은 只今 自身이 歷史의 물줄기를 바꿔 進步政權의 長期執權을 위한 坦坦大路를 만든다는 使命意識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不滅하는 韓國의 ‘盞 다르크’가 된다는 心情일 터다. 저 썩어빠진 保守 集團이 尹錫悅을 媒介로 다시 살아나는 慘酷한 事態를 막기 위해 自身의 모든 걸 바치겠다는 決然함일 것이다. 

    그러나 秋 長官! 사람은 當身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剛하고 偉大한 存在가 아니오. 不滅은 우리 人間에게 元來 없는 것이오. 當身 亦是 다른 어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不運을 보며 눈물 흘리는 한낱 平凡한 지어미에 不過한 것이오. 우리가 人生에서 겪는 大部分의 일들은 우리의 意志나 選擇과는 別 相關없이 運이나 或은 運命이라고 하는 것이 제멋대로 決定해버리는 것이오. 우리는 그에 依해 隨時로 翻弄당하는 稀微하게 깜빡이는 存在일 뿐이오. 바람 앞에 하염없이 흔들리는 촛불 같은 것이오. 當身이 나라 全體의 命運을 願하는 方向으로 이끌고 가겠다고 欲心을 부리는 것은 至極히 교만한 짓이오. 世上은 한 番씩 그런 者들에게 苛酷한 罰을 내리는 것이오. 그 罰은 人間의 罰이 아니라도 다른 次元의 것도 있는 法이오. 

    그리고 進步의 쪽에도 썩은 無理가 있고, 報酬의 쪽에도 眞正으로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獻身하는 이들이 있는 것을 애써 無視하지 마시오. 政權의 將來는 國民들에게 맡기고, 이제 溫柔함과 平穩함을 찾으시오. 내가 故鄕 先輩로서 當身에게 해줄 수 있는 몇 마디 어리석은 말이오.


    ■ 當身 곁에서

    너희들 내 곁을 떠나지 마라는 말씀
    뼛속에 次인 寒氣 으스스 튀어나와
    눈물을 글썽거리며 慌忙함을 참습니다

    저 해가 기울어 한밤이 되어도
    찬 空氣 덮쳐서 온 풀잎이 시들어도
    當身은 곁에 序詩어 품 안에 거두십니다

    가없는 길 걸으며 오로지 바라기는
    기쁘고 서러움이 일어서고 스러져도
    無心히 當身 곁에서 한 生을 보내렵니다

    집을 지을 때 먼 곳에서 오죽 뿌리를 도끼로 캐와 심었다. 다 잘 자랐다. 세 군데 무성한 대나무밭을 이루었다. 농가에서 대나무는 자재로 귀하게 쓰인다. 용도가 무척 다양하고, 손쉽게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른 대나무나 비바람으로 굽어버린 대나무를 솎아내는 것만 해도 양이 상당하다. 이웃집에서도 자주 얻어간다. [신평 제공]

    집을 지을 때 먼 곳에서 오죽 뿌리를 도끼로 캐와 심었다. 다 잘 자랐다. 세 군데 茂盛한 대나무밭을 이루었다. 農家에서 대나무는 自在로 貴하게 쓰인다. 用途가 무척 다양하고, 손쉽게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른 대나무나 비바람으로 굽어버린 대나무를 솎아내는 것만 해도 量이 相當하다. 이웃집에서도 자주 얻어간다. [申平 提供]


    ● 1956年 出生
    ● 서울대 法學科 卒業
    ● 第23回 司法試驗 合格·司法硏修院 第13期
    ● 仁川地方法院, 서울家庭法院, 大邱地方法院 判事
    ● 경북대 法學專門大學院 敎授, 韓國憲法學會 會長 歷任
    ● 著書: ‘法院을 法廷에 세우다’ ‘로스쿨 敎授를 위한 로스쿨’ ‘들판에 누워’(시집)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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