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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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開發者 民族問題硏究所
發表日 안드로이드 : 2012年 8月 29日 (11年 前) ( 2012-08-29 )
iOS : 2012年 9月 25日 (11年 前) ( 2012-09-25 )
安定化 버전
안드로이드 : 2.0
iOS : 1.0.1 /
안드로이드 : 2014年 11月 30日 (9年 前) ( 2014-11-30 )
iOS : 2013年 8月 8日 (10年 前) ( 2013-08-08 )
플랫폼 안드로이드 , iOS
크기 안드로이드 : 17MB
iOS : 7.7MB
言語 韓國語
種類 圖書 (事前)
狀態 開發 中
웹사이트 http://www.minjok.or.kr/

친일인명사전 (親日人名辭典)은 進步 性向의 民間人團體인 民族問題硏究所 日帝强占期 에 夫日 協力 等 親日反民族行爲에 參與한 韓國人 親日派 의 目錄을 整理하여 2009年 11月 8日 에 發刊한 人命 辭典이다. 民族問題硏究所는 친일인명사전編纂委員會의 基準에 따라 選定된 人物들에 對해 “具體的인 反民族行爲와 解放 以後 主要 行跡 等”을 收錄하였다고 發表했다.

履歷 [ 編輯 ]

  • 1991年 2月 27日, 親日問題硏究叢書 編纂을 主要 課業으로 삼은 半 民族問題硏究所 設立.
  • 2001年 12月 2日, 個人 1850名과 185個 團體가 發起人으로 參與한 統一時代民族文化財團 이 出帆했고, 當日 여러 分野의 120餘 名의 學者들로 構成된 친일인명사전編纂委員會 가 財團 傘下 特別 委員會로 發足.
  • 2004年 1月, 16代 國會의 친일인명사전 編纂 豫算 5億원 全額을 削減(委員長 박종근 ).
  • 2004年 1月 8日, 친일인명사전 編纂 國民(누리꾼) 募金 始作( 오마이뉴스 와 共同).
  • 2004年 1月 15日, 行政自治部 (現, 行政安全部)는 民族問題硏究所와 오마이뉴스 에 公文을 보내, 이 募金 運動이 '寄附金品募集規制法'에 抵觸된다며 募金 運動 中斷을 要求했으나 4時間 만에 撤回函.
  • 2005年, 一部 市民團體 等이 친일인명사전 編纂을 利敵 行爲로 摘示하고 批判的인 記者會見, 示威 等을 벌이자 民族問題硏究所는 名譽를 毁損당했다며 損害賠償 訴訟을 提起했다. 서울中央地方法院 (서울中央地法)은 친일인명사전의 編纂을 利敵 行爲로 볼 수 없다는 判決을 내렸다. [1]
  • 2005年 8月 29日, 民族問題硏究所와 親日事前編纂委員會는 1910年에 韓日 倂合 條約이 發效된 8月 29日을 맞아 1車路 〈친일인명사전〉에 실릴 人物 3,090名을 發表했다.
  • 2008年 4月 29日, 民族問題硏究所와 親日事前編纂委員會는 親日 人士들을 賣國, 中樞院, 官僚, 警察, 軍, 司法, 宗敎, 文化 藝術, 言論 出版 等 16個 分野에 걸쳐 選定했다. 分野別로 賣國 人士 24名, 酬酌(受爵) 및 習作(襲爵) 138名, 中樞院 335名, 日本 帝國 議會 11名, 官僚 1207名, 警察 880名, 郡 387名, 司法 228名, 親日 團體 484名, 宗敎 202名, 文化 藝術 174名, 敎育 學術 62名, 言論 出版 44名, 經濟 55名, 地域 有力者 69名, 海外 910名 等 5207名(重服者 包含)이며 重複 人士를 除外하면 〈친일인명사전〉수록 人物은 4776名이다.
  • 2009年 2月 22日, 韓國 畫家 장우성 서울大學校 敎授와 日帝强占期 檢事를 지낸 엄상섭 前 議員의 後孫들이 各各 民族問題硏究所를 相對로 낸 ‘친일인명사전 發行 및 揭示 禁止 假處分 申請’을 모두 棄却했다. [2]
  • 2009年 10月 10日, 장지연 登載 禁止 假處分 申請
  • 2009年 10月 26日, 朴正熙 登載 禁止 假處分 申請
  • 2009年 11月 6日, 朴正熙 , 장지연 登載 禁止 假處分 申請 棄却 [3]
  • 2009年 11月 8日, 친일인명사전 發刊式
  • 2012年 8月 29日, 친일인명사전 안드로이드 버전 庚戌國恥日에 맞춰서 出市
  • 2012年 9月 25日, 친일인명사전 iOS 버전 出市

反應 [ 編輯 ]

20餘個 市民團體 等은 이에 反撥하여 記者會見을 열고 “民族問題硏究所는 大韓民國의 建國을 否定하고 政略的 目的에 依한 親日 造作, 歷史 歪曲으로 大韓民國의 指導者들을 根據 없이 陰害하고 있다”며 “體制 守護와 國家 安保 次元에서 民族問題硏究所를 反國家 利敵 團體로 告發할 豫定”이라고 밝혔다. 淑明아트센터 앞에서 열린 한 示威에서는 民族問題硏究所와 反對者들 間에 舌戰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對해 民族問題硏究所 側은 “解放 政局에서도 獨裁 政權 下에서도 親日 勢力은 反共 을 轉嫁의 報道처럼 使用했다. 親日에서 親美 ·親獨裁로 權力과 富를 좇아 機會主義的인 變節을 거듭한 者들과 反省하지 않는 그들의 後裔들이 恥部를 감출 수 있는 唯一한 空間이 反共”이라며, 親北·進步 性向 人物이 登載되지 않았다는 批判에 對해 “左派 人物이나 越北 人士들에 對한 (親日의) 客觀的 證據가 確保되고 基準에 符合한다면 어떤 人物이라도 事前에 登載할 것”이라고 밝혔다. [4]

批判 [ 編輯 ]

  • 宗敎關聯 人士들 - 宗敎 關聯 人士들의 境遇 自發的이냐 不可避 했느냐의 基準도 模糊한 것도 있고, 特히 盧基南 大主敎와 場面 總理의 境遇 金壽煥 樞機卿이 直接나서서 '그분들은 韓國 天主敎會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 側面이 많기 때문에 이분들을 親日로 規定하기에는 問題가 많다'라고 言及한 바 있으며, 강원룡 元老牧師 亦是 煽情性 基準에 對해서 ' 송창근 牧師 等 恣意的이 아닌 酷毒한 拷問끝에 半强制的으로 끌려간 분들 境遇 생각하지 않았다.'라며 否定的인 見解를 드러낸바 있었다. [5] [6]
  • 朝鮮日報 의 有名 論客인 조갑제 는 自身의 블로그에 올린 "親日派(親日派)와 親北派(親北派) 比較"라는 글을 통해, 류근일은 뉴 데일리에 寄稿한 "親日辭典 만든 理由"라는 글에서 各各 친일인명사전 發刊을 非難하고 있다. 이들은 親日 行爲를 나라를 잃은 百姓으로서는 不可抗力的인 選擇이었다고 規定하고 있다. "이미 日帝에 依해 朝鮮이라는 나라가 사라진 마당에 植民地의 大衆과 知識人들이 生計를 위해서건, 出世를 위해서건 體制에 順應한 것은 當然한 일이고 이를 탓하는 건 苛酷한 일"이라고 主張했다. [7]
  • 中立性 疑惑 - 임헌영 (本名 임준열)은 친일인명사전의 編纂에 主導的으로 參與한 사람 가운데 한 名이었다. 이를 두고 池萬元 等 保守 人士들은 眞情性 및 政治的 意圖에 對한 疑惑을 提起하였다. 친일인명사전 發表 直後 2009年 12月 9日 保守 人士 池萬元 정창인 等 保守 人士들은 "林氏는 경향신문이 發行하는 ‘주간경향’ 等에서 在職하다 지난 1974年 1月 ‘文人間諜團事件’에 連累돼 反共法 違反으로 立件, 1976年 7月 大法院으로부터 懲役 1年에 執行猶豫 2年을 宣告받은 것으로 傳해졌다. 以後 남민전(南朝鮮民族解放戰線準備委員會)에서 活動하다 大法院으로부터 懲役 5年을 宣告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8] 며 非難했다. 정창인은 “임준열이라는 사람은 親日을 論할 資格도 없는 從北主義者이며, 反逆者日 뿐 [8] ”이라며 “그가 김일성 김정일에 충성하기 위한 親日 장난에 놀아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主張했다. [8] 정창인 自由統一 代表는 朴 前 大統領이 親日人名事典에 包含된 것과 關聯해서도 “(民族問題硏究所가) 軍人의 境遇 階級은 中尉까지 낮춘 것은 바로 朴 前 大統領을 親日人士로 만들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고 强調했다. 그는 “말하자면 特定人을 親日人士로 定해놓고 그 人物을 包含시키려고 基準을 定한 것”이라며 “그러니 하나마나한 硏究를 한 셈”이라고 批判했다. [8] 지 代表는 “林氏가 朴 前 大統領을 親日派로 몰아간 것은 國家, 社會에 對한 아버지의 怨恨과 몇 次에 걸친 監獄生活에 對한 報復心理, 그리고 그가 心醉했던 共産主義 書籍에 依해 形成된 共産主義 思想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分析했다. [8] 以後 池萬元 은 公開 칼럼 몇 篇을 통해 그의 아버지 임우빈이 報道聯盟員이었다는 點과 그가 남민전 事件 關聯者라는 點을 들어 親日人名事典의 公正性에 疑惑을 提起했다.
  • 親日人名事典에 親北派(親北派)系列 人士들의 親族에 對한 內容이 漏落되어 있다는 點에서 論難이 있다.

批判에 對한 反論 提起 [ 編輯 ]

조세열 民族問題硏究所 事務總長은 委員會에는 임헌영을 비롯한 民族問題硏究所 硏究院만이 單獨的으로 活動한 게 아닌 歷史問題硏究所 , 獨立記念館 硏究委員, 國史編纂委員會 等 各 分野의 歷史學者들이 多數 參與하고 있다 [9] [10] 고 主張하며, 친일인명사전 編纂에서 '人物選定 作業'은 日帝强占期 公文書, 新聞, 雜誌 等 3千餘種의 文獻資料를 蒐集하고 이를 바탕으로 250萬 件의 人物情報를 데이터베이스로 構築 等의 過程을 통해 2萬5千 件의 親日嫌疑子 母集團을 抽出하고, 20餘 分野의 專門分科會議와 常任委員會 審議를 거친 結果 4430名을 選定하게 된 것이며, [9] 이렇게 選定된 人物들은 各 分野別 學界에서 再次 檢討 및 諮問을 거쳐, 全體會議에서 確定되는 것이라> [11] 고 主張한다. 한便 이 過程에서 民族問題硏究所 所長 임헌영의 大學時節 精神的으로 많은 影響을 준 大學敎授인 白鐵 , 親日派 硏究 權威者인 임종국 의 父親 임문호 , 大韓民國 에서 進步性向의 代表的인 人物인 백낙청 의 父親 白崩制 等이 收錄되어있다 [9] 는 反論을 편다. [ 出處 必要 ] 그밖에 金甲洙 오마이뉴스 記者는 一部 言論에서 提起하는 '選定委員들의 性向'에 對해서 論難이 있는 것에 對해 '保守言論들이 反復하는 色깔論에 不過하다'는 [11] [12] 主張으로 反論했다.

친일인명사전編纂委員會 [ 編輯 ]

編纂委員長 [ 編輯 ]

指導委員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친일인명사전 編纂 利敵行爲 아니다”” . 聯合뉴스. 2006年 11月 7日. 2007年 10月 1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10月 22日에 確認함 .  
  2. 송진원 (2009年 2月 22日). “親日事前 發行 禁止 假處分 모두 棄却” . 聯合뉴스 . 2009年 11月 9日에 確認함 .  
  3. 朴敏植 (2009年 11月 6日). ' 장지연·朴正熙 親日事前서 削除' 假處分 棄却” . 韓國日報 . 2009年 11月 9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 朴正熙도 場面도 끝내 親日派라고?
  5. ['正體性 混亂' 韓國號 어디로가나]김수환추기경 特別會見
  6. (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169930 강원용 牧師 “無差別的 親日歷史 淸算 안된다”)
  7.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1112085203&section=03 언제부터 親日 行爲가 愛國이었나?)
  8. (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6042 '친일인명사전' 만든 임헌영이 누군가 했더니…) 뉴데일리 2009年 12月 17日子
  9.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96948 "社會 各 分野와 우리 知性史에 衝擊的인 記錄될 것")
  10. ( http://www.banmin.or.kr/kimson/home/minjok/doc.php?doc=59&title=%ED%8E%B8%EC%B0%AC%EC%9C%84%EC%9B%90%EB%8B%A8 [ 깨진 링크 ( [ 깨진 링크 ([https://web.archive.org/web/*/http://www.banmin.or.kr/kimson/home/minjok/doc.php?doc=59&title=%ED%8E%B8%EC%B0%AC%EC%9C%84%EC%9B%90%EB%8B%A8 過去 內容 찾기)] 過去 內容 찾기])] #)
  11. 歷史批評 2010年 봄號 季刊誌
  12.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1961597 朝中東, 친일인명사전이 그렇게도 두려운가)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