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득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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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득실
朝鮮의 文臣 및 官僚

身上情報
出生日 1768年
死亡日 1805年 (享年 37歲)
國籍 朝鮮
本館 해평 尹氏
父母 아버지 綸綍
어머니 全州 李氏
兄弟姊妹 첫째 兄 윤득눌
둘째 兄 尹得술
셋째 兄 윤득길
男동생 尹得칠
配偶者 南陽 洪氏
子女 長男 尹校洞
次男 尹우동
三南 윤취동
長女 해평 尹氏

윤득실 (尹得實, 1768年 - 1805年 )은 朝鮮 後期의 文臣, 官僚였다. 京畿道 水原 出身으로, 그의 집터가 수원행궁 에 編入되어 그는 忠淸道 天安 으로 내려가야 했다. 本貫은 해평 이고 字는 성보(誠甫)이다.

生涯 [ 編輯 ]

1768年 京畿道 水原府 水原邑 에서 綸綍과 縣監 里長(李樟)의 딸 全州李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全州李氏는 縣監을 지내고 增 承政院 左承旨에 追贈된 里長의 셋째 딸이었으나, 庶女였다. 효령대군 破聲群 파 族譜에는 庶女로 나타난다. 어머니 全州李氏는 효령대군 의 後孫으로, 효령대군 의 12代孫이며, 破聲群 鐵洞의 8代孫, 壬辰倭亂 때의 將軍 이경록 의 5代孫이다.

셋째 아들이자 바로 윗 兄 윤득길(尹得吉)은 아들이 없던 三寸 尹침(尹沈)의 養子로 갔다. 그는 朝鮮 宣祖 때의 兄弟 政丞 윤두수 , 윤근수 兄弟의 後孫이었고, 倒載 尹昕 의 5代孫이었다. 高祖父 尹趣旨 淫書 制度 로 出世하여 官職 이 嘉義大夫 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할아버지 尹歲兼 은 淫書制度로 出仕하여 地方官을 歷任하고 種2品 嘉善大夫 同志돈녕부社에 이르렀다. 그러나 윤득실의 아버지 尹發은 庶子였고, 官職이 없었다. 後에 그의 집이 行宮에 編入되면서 아버지 尹發은 잠깐 郎廳 職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1794年 자리가 없어 다시 官職에 任用되지 못했다. 아버지 綸綍에게 後日 戶曹參議가 追贈된 것은 그의 아들 윤취동의 身元 上疏 때문이었고, 다시 祕書圓乘이 贈職된 것은 孫子 윤웅렬 의 出世로 내려진 贈職이었다.

水原府 에 살던 그의 집이 水原 行宮터로 編入되면서 그는 忠淸南道 天安郡 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1790年 (正祖 14年) 6月 7日 水原府 行宮에 집터가 編入된 士大夫들을 相對로 儒生과 武士들을 試取할 때 그는 考試(古詩) 部門에서 三相, 三重, 三下로 等級을 나눌 때 三下 等級이었고 卽席에서 善字(扇子) 2個를 賞物로 下賜받았다. 그해 12月 11日 正祖가 다시 水原府 製述을 主管할 때 應試, 이때 參與한 武士와 儒生들을 施賞할 때 그는 美 7豆를 下賜받았다.

1791年 (正祖 15年) 4月 3日 正祖가 水原 邑內 儒生들을 對象으로 應製詩(應製詩)를 主管할 때, 三下, 超三下, 次上, 次下, 갱, 위 等級으로 나눌 때 그는 갱 等級을 얻어 小魚鹽 頒給을 賞物로 받았다. 5月 26日 다시 水原 邑內 儒生들을 試取할 때 富(賦)에서는 三相, 三重, 三下, 次上, 車中, 次下, 外等으로 나눌 때 그의 成跡은 茶中이어서 美 2豆를 賞物로 받았다. 나중에 官職에 올라 最終 品階는 通德郞 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술을 좋아하여 술甁으로 死亡하게 된다. 後날 그의 孫子 윤영렬 은 다시 自身의 子孫들에게 술을 操心할 것을 强調했다 한다.

事後 孫子 윤웅렬 이 出世하여 贈職으로 通政大夫 吏曹參議에 追贈되었다가, 다시 增 嘉善大夫 議政府供饌, 다시 增 內部協辦으로 追贈 되었다. 後日 굶주린 佛敎 僧侶 를 잘 待接한 그의 셋째 아들 윤취동 은 僧侶가 알려준 李舜臣 墓 近處에 그를 埋葬했다가 뒤에 明堂자리의 發福으로 出世했다는 傳說이 傳한다. 그의 墓는 다시 牙山郡 둔포면 신항리로 옮겨졌고, 그의 內外 墓所와 長男 尹校洞 內外의 墓所, 이어 윤취동의 첫 夫人 高齡신氏 墓所가 順序대로 安葬되었다.

家族關係 [ 編輯 ]

기타 [ 編輯 ]

長男 尹校洞은 親戚의 아들을 養子로 들였으나 일찍 죽고, 尹우동의 後孫과 윤취동의 後孫이 傳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