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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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高麗

 

 

 

918年 ~ 1392年
1389년 고려의 강역.
1389年 高麗의 疆域.
수도 開京 北緯 37° 58′ 東經 126° 33′  /  北緯 37.967° 東京 126.550°  / 37.967; 126.550
政治
政治體制 君主制
國王
918年 ~ 943年
949年 ~ 975年
981年 ~ 997年
992年 ~ 1031年
1046年 ~ 1083年
1351年 ~ 1374年
1389年 ~ 1392年

太祖 (初代)
光宗
成宗
顯宗
文宗
공민왕
공양왕 (말대)
門下侍中
988年
1030年
1108年 ~ 1109年
1356年 ~ 1357年
1381年 ~ 1382年
1388年
1388年
1390年 ~ 1392年

최승로
강감찬
尹瓘
이제현
이인임
崔瑩
異色
정몽주
국성 開城 王氏
歷史
歷史的 時代 苦戰後 時代
 ? 高麗 建國
 ? 科擧制 實施
 ? 高麗-거란 戰爭
 ? 妙淸의 亂
 ? 武臣政權
 ? 元 干涉期
 ? 雙城摠管府 回復
 ? 요동성 奪還
 ? 威化島 回軍
 ? 滅亡 및 朝鮮 으로 政權交替
918年
958年
993年 , 1010年 , 1019年
1135年
1170年 ~ 1270年
1270年 ~ 1356年
1356年
1370年 11月 4日
1388年 6月 26日
1392年 8月 5日
人文
共通語 中世 韓國語
漢文 [a]
데모님 高麗人
民族 韓民族
人口
1000年 어림 3,070,000 [1]
宗敎
國校 佛敎
其他 宗敎 道敎 , 儒敎 , 回敎 , 巫俗信仰
기타
現在 國家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大韓民國

高麗 (高麗)는 918年 王建 이 建國한 以後, 1392年 李成桂 에 依해 滅亡하기까지 韓半島 에 存在했던 王國이다.

統一新羅 下待에 松嶽(現在의 開城特別市 ) 地方의 豪族인 王建 이 918年에 高麗를 建國하였으며, 919年에 松嶽을 開京이라 이름을 고치고 首都로 삼았다. 그 뒤, 935年 新羅 , 936年 後百濟 를 次例대로 服屬하였다.

光宗 은 皇權의 安定과 中央 集權 體制를 確立하기 위하여 奴婢按檢法 過去制度 等을 施行하고 功臣과 豪族 勢力을 除去하였다. 이어서, 警鐘 때는 田柴科 制度를 實施하였고, 成宗 은 支配 體制를 整備하였다( 時務28兆 ). 수도 開京 의 外航인 碧瀾渡 에서 , 日本 , 아바스 칼리파國 , 페르시아 等地의 商人들과 貿易했다. 遊牧帝國 , 과의 對立을 통해 東아시아 國際 秩序에서 高麗- - 北送 / 高麗- - 南宋 3强 構圖의 팽팽한 勢力 均衡을 維持하였다.

12世紀에 들어 高麗의 支配層 內部에서는 門閥 貴族과 側近 勢力 間에 政治權力을 둘러싼 對立이 熾烈해지기 始作해 武臣政變 이 일어났고 최충헌 , 崔瑀 , 崔沆 , 崔의 로 이어지는 崔氏 武臣政權 이 執權되었다. 또한 이 時期를 前後로 全國 到處에서 수많은 叛亂이 일어나고 武臣들의 暴政으로 인해 高麗의 國力은 全盛期에 비해 크게 衰退하게 된다.

國力이 매우 衰弱해진 狀況에서 13世紀 몽골帝國 의 侵略에 高麗 朝廷은 江華島로 遷都하고 30年 동안 抗爭했으나, 全 國土가 焦土化되고 結局 駙馬國으로 轉落하면서 [2] 國運이 기울게 되고, 恭愍王의 改革 失敗와 內憂外患에 이어 李成桂 威化島 回軍 을 起點으로 高麗는 滅亡의 길로 접어들었다.

結局 李成桂 배극렴 을 비롯한 새 王朝 個國 勢力을 앞세워 王大妃 安氏 에게 공양왕 廢位 및 새 王朝 開創을 允許하는 敎書를 强要하고, 結局 1392年에 공양왕 을 廢位시키면서 高麗는 事實上 滅亡하였고, 1393年에 高麗라는 國號를 朝鮮으로 바꾸면서 高麗는 完全히 滅亡하게 된다.

國號 [ 編輯 ]

高句麗의 繼承 [ 編輯 ]

王建은 弓裔를 몰아내고 나라 이름을 '高麗'라고 하였다. 考慮는 동명성왕 이 세운 高句麗 를 繼承하자는 뜻으로 定한 國號이다. 高句麗의 境遇 장수왕 以後의 正式 國號는 考慮였다. 元來 弓裔 가 建國한 나라 이름도 考慮였으나 3年만에 버리고 以後 마진(摩震)을 거쳐 泰封 (泰封)으로 變更되었다. 王建은 易姓革命을 통해 弓裔를 몰아내고 王位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建國하면서 나라 이름을 考慮(高麗)로 定했다.

英語名稱 Korea [ 編輯 ]

아라비아 商人들에 依해 高麗(Corea)의 이름이 西方 世界에 알려지기 始作하였다. [3] 西洋 사람들은 高麗를 Corea(꼬레아)라고 불렀다. [4] 오늘날 韓國의 英語 國號인 코리아(Korea)는 高麗에서 由來하였다. [5] [6] [7] [8]

美國人들은 1890年 戰後 영국왕립지리학회의 決定에 따라 Korea를 常用(常用)하였다. 韓國表記에 對한 公式的 表記는 1893年 시카고콜럼비아 世界博覽會 때이다.

漢字語 獨吟 [ 編輯 ]

高麗(高麗)의 純우리말 讀音이 考慮가 아니라 '고리'라는 意見이 있다. [9] 이는 '麗'의 讀音이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는 '리'로 發音된다는 音韻 法則에서 비롯되었다. [10] [11] [12] [13] 그러나 朝鮮 時代에 訓民正音 創製 以後에 나타난 한글 文獻에 따르면, '高麗'라 나타나고 [14] 《大東地志》에는 "(中國人이나 音韻學 冊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은 '려'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 [15] 라고 記錄하고 있으며,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도 '麗'는 '려'로 읽는다는 例外도 있기 때문에 [16] [17] [18] 該當 主張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國號 外에도 '高麗'는 高麗人 , 高麗大學校 , 高麗神學大學院 , 高麗航空 , 高麗 人蔘 等 많은 分野에 쓰이고 있다. 國號의 漢字語 略稱 表記는 동국(東國)이다.

歷史 [ 編輯 ]

新羅의 分裂과 高麗의 成立, 後三國 統一 [ 編輯 ]

10世紀 新羅 에서는 王位 爭奪戰이 頻繁히 發生하여 政治가 混亂해졌고 全國 各地에서는 租稅 收取에 反撥하여 農民 蜂起가 發生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地方 豪族들이 新羅 朝廷으로부터 獨立하여 各自 自身의 勢力을 키웠는데 그 中에서도 新羅 眞骨 王族이었던 弓裔 新羅 의 장수였던 甄萱 이 强한 勢力을 構築하였다. 甄萱 이 먼저 後百濟 를 自稱했고, 곧 弓裔가 泰封 을 세웠다. 이로써 新羅 , 泰封 , 後百濟 가 서로 對立하게 되었는데, 이 時期를 後三國 時代 라 부른다.

以後 弓裔 가 國號를 繼續 바꾸고 無理한 遷都를 하는 等 民心을 잃게 되자 이에 918年 統一新羅 松嶽 地方의 有望한 新羅 豪族 出身이자 泰封의 將軍인 王建 은 易姓革命을 일으켜 弓裔를 몰아낸 後, 임금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나라 高麗 를 建國한다. 그리고 年號를 天壽(天授)라고 하고, 919年 泰封의 初期 首都이자 自身의 故鄕인 松嶽( 開城 )으로 還都했다. 그 側近 或은 本人이 高句麗 의 血統이었기 때문에 國號로 考慮를 使用하여 高句麗 의 後孫을 自處하는 데에는 王建 과 草創期의 弓裔 나 다름이 없었다. 한便 926年 渤海 遼나라 의 侵略을 받고 滅亡하자, 渤海의 王族을 비롯한 流民을 받아들여 勢力을 키웠다. 이는 王建의 政治的·軍事的 基盤을 確固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高句麗에 對한 繼承意識을 確固히하면서 新羅 豪族으로서의 性格 亦是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또한 對外 政策에서도 弓裔와는 달리 親(親) 新羅 政策을 썼다. 이는 新羅 의 傳統과 權威의 繼承者가 되려고 한 것이었다. 王建 은 新羅를 保護하기 위해 金星 (金城) 北(北) 50里의 땅에 신광진(神光鎭)을 設置하여 高麗의 軍士를 駐屯하게 하였다.

結局 新羅 경순왕 은 新羅의 考慮 歸順을 決定했고, 936年 新羅 軍事와 함께 後百濟를 敗亡시킴으로써 高麗는 後三國을 統一하였다.

光宗의 改革 政治 [ 編輯 ]

太祖 의 뒤를 이은 惠宗 定宗 때에는 黃卷이 不安定하여 皇族들과 外戚들 사이에 繼承 다툼이 일어났다. 이러한 王權의 不安定은 太祖가 後三國 을 統一하는 過程에서 新羅 豪族 勢力을 糾合하기 위하여 取하였던 婚姻 政策 때문에 나타난 副作用이었다.

이런 狀況에서 卽位한 光宗 은 皇權의 安定과 中央 集權 體制를 確立하기 위한 政策을 推進하였다. 光宗은 奴婢按檢法 ( 956年 )을 實施하여 豪族들의 勢力을 약화시키고 國家의 輸入 基盤을 擴大하였다. 이로써 功臣이나 豪族의 經濟的·軍事的 基盤이 弱化된 反面, 奴婢들은 良民이 되어 租稅와 賦役의 義務를 지게 되었으므로 國家의 財政 基盤과 黃卷이 安定되었다. 勿論 이는 高麗 貴族들에 依해 限界가 있긴 하였다. 崔承老의 奴婢還賤法 은 奴婢按檢法으로 풀려난 者들을 도로 奴婢로 만들었다.

957年 後周 (後周)에서 歸化한 雙機 新羅 讀書三品科 (讀書三品科)를 繼承·擴張하자고 建議하였고, 958年 光宗은 文藝와 儒敎 經典을 試驗하여 文班 管理를 選拔하는 過去 制度 를 施行하였다. 過去는 功臣의 自制를 優先的으로 登用하던 從來의 管理 登用 制度를 抑制하고, 새로운 管理 選拔 基準을 마련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光宗은 留學을 익힌 新進 人士를 登用하여 신구 勢力의 交替를 圖謀하였다. 또한 이것은 文治主義(文治主義)로 轉換한 表示로, 무신 代身에 文身을 管理로 登用하려는 것이다. 文身을 登用하는 基準은 儒敎 에 두었다. 따라서 科擧制度의 實施는 王權의 强化를 위한 새로운 官僚 體制 設定의 基礎 作業이었다. 이것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마련한 것이 百官 (百官)의 空腹 (公服) 制定이었다. 服色을 制定함으로써 王權 中心으로 貴族層을 安定시키고 支配層의 位階 秩序를 確立하게 된다.

一連의 改革을 통하여 自信感을 갖게 된 光宗은 本格的으로 功臣과 豪族 勢力을 除去하여 王權을 强化하였다. 이로써 王朝 成立 初期의 功臣과 豪族 勢力이 크게 弱化되고 王權이 强化될 수 있었다. 또한 光宗은 스스로 皇帝라 稱하고, 開京 을 黃道, 書經 을 서도(西都)라 稱했으며, 廣德(光德)·준풍(峻豊)이라는 獨自的 年號 를 使用하였다. 다만 高麗 國王들은 스스로를 皇帝라 稱했으나 光宗처럼 對內外에 露骨的으로 皇帝를 稱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高麗 外王內題를 쓰는 國家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光宗의 改革은 警鐘 때의 經濟 改編으로 이어져 中央 官僚들의 經濟的 基盤을 保障하기 위한 田柴科 制度가 實施되었고, 成宗 때의 支配 體制 整備로 이어져 統治 體制가 確立되었다. [19]

門閥 貴族 社會의 成立 [ 編輯 ]

成宗 以後 中央 集權的인 國家 體制가 確立됨에 따라 中央에서 새로운 支配層이 形成되어 갔다. 이들은 新羅 末期 脂肪 豪族 出身으로 여러 世代에 걸쳐 高位 官職者들을 輩出하였으며, 門閥 貴族 이라 불리었다. 門閥 貴族들은 官職에 따라 科田 을 받고, 子孫에게 世襲이 許容되는 功蔭田 과 官職에 따라 惠澤을 받았으며, 自己들끼리 婚姻 關係를 맺는 閉鎖的인 通婚圈을 形成하였고, 때로는 皇室과도 婚姻 關係를 맺어 外戚 으로서의 地位를 利用하여 政治 權力과 經濟力을 거의 獨占하여 政局을 主導해 나가기도 하였다.

한便 11世紀에 들어와서는 先代(先代)에 이룩해 놓은 成果를 바탕으로 선대 以來 解決하지 못한 어려운 宿題들이 當面한 現實 問題로 浮刻되어 試鍊과 陣痛을 적지 않게 겪어야만 하였다. 이를 內政과 對外 政策으로 區分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수 있는데,

于先 內定에서 高麗 王朝가 建國한 以來의 오랜 宿題이던 皇權의 强化는 歷代 皇帝의 一貫된 努力에 依해 相當히 成果를 거둔 것이 事實이지만, 아직도 그 基盤이 確固하게 자리 잡히지는 않았다. 假令 成宗 의 다음 王인 穆宗 (穆宗)李 서북면 巡檢司(西北面巡檢使) 强調 (康兆)에게 廢位(廢位)당하고 그에 代身하여 顯宗 (縣宗)이 卽位하게 된 것이 例가 될 것이다. 考慮는 臣下에 依해 王이 廢位되는 非正常的인 일이 非一非再 하였다.

다음으로 對外 問題에도 考慮는 어려운 處地에 놓여 있었다. 當時 高麗의 對外 關係는 매우 微妙하고도 複雜하였다. 中國 大陸에는 한족 (漢族)인 宋나라 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高麗는 宋나라와 友好的인 外交 關係를 맺고 宋나라의 優秀한 文物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北方 民族인 거란이 세운 遼나라 가 强盛해지면서 東아시아 情勢에 破綻이 생기게 된 것이다.

卽 거란은 高麗의 親宋 政策(親宋政策)에 反感을 품고, 두 나라의 外交 關係를 斷絶시켜 考慮를 遼나라 의 影響圈 아래에 두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10世紀 末에는 거란이 大君(大軍)을 거느리고 來侵하여 高麗를 武力으로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희 (徐熙)의 外交 手腕으로 危機를 謀免하고, 오히려 江東 6週 (江東六州)을 確保할 수가 있었다. 이때 高麗에서는 形式的으로 거란과 友好 關係를 맺고 송과의 關係를 斷交한다고 했다. 그러나 高麗는 文化的으로 後進性을 면치 못하고 있던 거란에 對하여 誠意 있는 態度를 取하지 않았으며, 한便으로 송과는 如前히 親善 關係를 維持하고 있었다.

이러한 外交的 矛盾을 빌미로 11世紀 初 거란은 大大的인 武力 侵略을 恣行한다. 1010年 거란 成宗 은 親히 大軍을 이끌고 來侵하여 이듬해까지 高麗의 首都 開京 (開京)을 비롯한 西北部 地域을 侵攻/掠奪하였으며, 顯宗 은 全羅道 羅州 (羅州)로 避難하였다. 그러나 楊規 가 이끄는 高麗軍의 奮戰으로 遼軍의 氣勢가 꺾였으며, 이에 요君은 高麗와 講和 後 물러갔다.

1018年 거란은 高麗를 다시 侵攻하였으나 高麗軍의 强力한 反擊을 받아 本國으로 敗退하던 中 鬼誅에서 강감찬 이 指揮하는 高麗軍에게 殲滅되었는데, 이를 鬼誅 大捷 理라 한다. 結局 高麗가 遼나라 와 싸워서 勝利함으로써 考慮, 宋나라 , 遼나라 사이에는 勢力의 均衡이 維持될 수 있었다.

戰爭이 끝난 뒤 高麗는 國防 强化에 더욱 努力하였다. 강감찬 의 主張으로 開京에 羅城 을 쌓아 都城 守備를 强化했고, 北쪽 國境에 千里長城 을 쌓아 外勢의 侵入을 沮止코자 하였다. [20]

그 뒤에도 거란은 여러 次例 侵略 行爲를 恣行하였다. 이에 따라 高麗에서는 擧國的인 抗戰을 繼續하였으며, 內寢한 거란軍에게 커다란 打擊을 加하기도 하였다. 그 뒤 高麗와 거란은 和平을 되찾아 比較的 平穩한 外交 關係를 維持하게 되었다.

高麗에서는 이러한 內憂外患(內憂外患)을 克服하면서 漸次 그 社會와 文化를 向上시켜 나갔다. 10世紀 末에 成宗 이 施行한 制度 整備는 主로 堂祭(唐制)를 模倣한 것이었다. 따라서 制度를 施行하는 데 高麗의 現實에 符合되지 않는 要素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1世紀의 高麗에서는 高麗 社會의 實情에 맞추어 部分的 改編을 마침으로써 高麗 一帶의 制度 整備를 完成하게 되었다. 卽 文宗 (文宗) 때에 이루어진 一連의 施策이 代表的인 例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이 世紀의 高麗에서는 빛나는 文化的 業績을 남기기도 하였다. 特히 大覺國師 (大覺國師) 義天 (義天)은 文宗 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宋에 가서 佛敎의 깊은 境地를 攄得하고 돌아와 敎藏都監 (敎藏都監)을 設置하여 當時 東洋의 佛敎 文化를 集大成한 事實을 注目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 世紀는 高麗 一帶를 통하여 佛敎의 全盛期를 이루어 놓았다.

말하자면 이 世紀는 前(前)世紀가 남겨 놓은 難題(難題)를 풀어 나가면서 高麗 一帶의 社會 體制를 보다 確固하게 마련하였다는 데에 歷史的 意義가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北方 民族인 女眞族 (女眞族)과의 關係도 妙하게 展開되고 있어서, 때로는 女眞族의 侵略을 받기도 하였으나, 勢力이 別로 講對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이 世紀까지 女眞族은 高麗에 服屬(服屬)韓 狀態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 女眞族은 漸次 勢力을 糾合하여 强盛해지면서 12世紀 初부터는 高麗 社會에 커다란 影響을 미치게 된다.

遼나라의 侵攻 [ 編輯 ]

落星垈에 서 있는 강감찬 銅像

10世紀 初에 遼나라 를 세운 거란족 宋나라 를 攻擊하기에 앞서, 宋나라 를 外交的, 軍事的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渤海 流民이 세운 定安國 을 討伐하고 考慮와의 關係를 改善하려 하였다. 그러나 高麗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北進 政策을 强力하게 推進하여 高麗와 遼나라 사이에는 數次例 外交的 衝突이 있었다.

처음 遼나라 는 6萬의 軍士로 考慮를 侵攻했다 (993年). 遼나라는 高麗가 永有하고 있는 高句麗 의 옛 땅을 要求하는 것과 함께 宋나라와의 交流를 끊고 自身들과 交流할 것을 要求하였다. 考慮는 安戎鎭 에서 遼나라의 攻擊을 沮止하는 한便, 서희 가 遼나라와의 協商에 나섰다. 이때 遼나라로부터 考慮가 高句麗의 後繼者임을 認定받았다. 아울러 遼나라로부터 高句麗의 옛 땅인 鴨綠江 東쪽의 江東 6週 를 確保하는 한便, 遼나라와 交流할 것을 約束하였다.

遼나라 가 軍隊를 거둔 뒤 高麗는 宋나라 와 親善 關係를 繼續 維持하면서 遼나라와 交流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遼나라는 强調의 政變 을 빌미 삼아, 江東 6週 를 넘겨줄 것을 要求하였다. 요 成宗 은 直接 40萬 大軍을 이끌고 다시 高麗를 侵攻했다 (1010年). 强調 가 直接 거란군을 擊破하기도 하였으나 하지만 統主 에서 大敗하였다. 이에 開京 이 一時 陷落되는 難關을 겪기도 하였으나, 楊規 가 이끄는 高麗軍에 依해 거란軍은 곳곳에서 敗退하였다. 이에 요君은 退路가 遮斷될 것을 두려워하여 高麗와 强化하고 물러갔다.

여러 次例 小規模의 侵入을 試圖하던 遼나라는 다시 10萬의 大軍으로 侵攻해 왔다 (1018年). 開京 隣近까지 侵入했던 요君은 到處에서 高麗軍의 强力한 反擊을 받아 結局 黃海道 신은현 에서 軍士를 돌려 本國으로 敗退하던 中 鬼誅 에서 강감찬 이 指揮하는 高麗軍에게 殲滅되었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遼나라의 軍士는 數千 名에 不過할 地境이었다(1019년). 이를 鬼誅 大捷 理라 한다.

考慮와의 大規模 戰爭에서 연달아 慘敗한 遼나라는 더 以上 高麗를 攻擊할 수 없었고, 宋나라를 侵入할 수도 없었다. 結局 高麗가 遼나라와 싸워서 勝利함으로써 考慮, 宋나라 , 遼나라 사이에는 勢力의 均衡이 維持될 수 있었다.

戰爭이 끝난 뒤에 高麗는 國防을 强化하는 데 더욱 努力하였다. 강감찬 의 主張으로 開京에 羅城 을 쌓아 都城 守備를 强化하였고, 北쪽 國境 一帶에 千里長城 을 쌓아 遼나라를 包含한 外勢의 侵入을 沮止코자 하였다. [20]

女眞族과 9星 開拓(12C, 1107年) [ 編輯 ]

考慮는 豆滿江 沿岸의 女眞族 을 經濟的으로 도와주면서 回游 및 同和 政策을 펴서 이들을 包攝해 나갔다. 그러나 12世紀 初 滿洲 하얼빈 地方에서 일어난 餘震 완옌부 의 酋長이 다른 女眞 部族들을 統合하면서 井州 까지 南下하여, 高麗와 衝突을 빚게 되었다.

女眞族 과의 1次 衝突에서 敗戰한 高麗는 起兵 中心의 女眞族 을 步兵만으로 相對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尹瓘 의 建議에 따라 騎兵을 補强한 特殊 部隊인 約 15萬의 別武班 을 編成하여 여진 征伐을 準備하였다. 윤관은 別武班 을 이끌고 千里長城 을 넘어 女眞族을 北方으로 쫓아 버리고(1107년), 東北 地方 一帶에 9星 을 쌓아 防備하였다.

그러나 生活 터전을 잃은 女眞族 의 繼續된 侵略으로 考慮는 9星 守備에 어려움을 겪었다. 結局 高麗 朝廷은 다시금 高麗를 侵略하지 않고 해마다 朝貢을 바치겠다는 女眞族 의 條件을 受諾하고, 1年 만에 9城을 돌려주었다. 高麗의 處地에서도 西北쪽의 遼나라 와 對峙하는 狀況에서 女眞族 防禦에만 힘쓸 수 없었기 때문에 女眞族의 條件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後 女眞族은 더욱 强盛해져 滿洲 一帶를 掌握하면서 金나라 를 세우고(1115), 高麗에 君臣 關係를 맺자고 壓力을 加해 왔다. 高麗는 그들의 事大 要求를 둘러싸고 激甚한 政治的 紛爭을 겪었다. 그러나 現實的으로 金나라와 武力 衝突을 하기 어려운 點을 考慮하여 結局 金나라 의 要求를 받아들이고 臣下의 나라가 되었다. [21]

李資謙의 亂과 書經 天道 運動(12世紀) [ 編輯 ]

한便 12世紀의 人種 (仁宗) 初로부터 高宗 (高宗) 卽位 前後에 이르는 約 90年間은 政治的·社會的인 面에서 確實히 한 劃을 그을 만한 特徵을 지니고 있다. 이때는 高麗 前期 以來의 政治 組織 自體에 內包된 文臣 貴族 全盛期의 惰性과 腐敗 속에서 여러 矛盾과 相剋的 要素가 자라 次例로 暴發되었다. 그 紛糾는 먼저 開京의 腐敗한 貴族 社會 自體에서 發生하기 始作하였다. 卽 이자겸 (李資謙)의 亂이 그것이다. 그 뒤를 이어 書經 中心의 所謂 改革政治를 꿈꾸던 妙淸 (妙淸) 一派의 遷都運動이 일어났다.

貴族 勢力의 擡頭는 必然的으로 그들 相互間의 抗爭을 造成하였다. 그러한 抗爭은 數次에 걸친 叛亂의 形態를 띠고 나타나게 되었다. 貴族 文化의 極盛期라고도 할 수 있는 人種(仁宗)· 毅宗 (毅宗) 때에 연달아 일어난 叛亂은 慶源 李氏(인주 李氏) 勢力의 絶頂을 이룬 이자겸 (李資謙)이 일으켰다.

11世紀 以來 代表的인 門閥 貴族 人 慶源 李氏 家門은 王室의 外戚 이 되어 80餘 年間 政權을 잡았다. 慶源 李氏는 이자연 의 딸이 文宗 의 皇后가 되면서 政治 權力을 掌握하기 始作하였고, 이자연 의 孫子인 이자겸 睿宗 人種 의 外戚이 되어 執權하였다. 特히, 李資謙은 睿宗의 側近 勢力을 몰아내고 人種이 皇位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勢力이 莫强해졌다. 皇室과 重複된 婚姻 關係를 맺은 李資謙은 權力과 財産이 皇帝보다 더했으며, 內外의 要職에 一族을 앉히고 反對 勢力을 去勢하여 權勢를 獨차지했다.

李資謙 勢力은 對內的으로 門閥 中心의 秩序를 維持하고 對外的으로 金나라와 妥協하는 政治的 性向을 보였다. 反面 李資謙의 橫暴를 憎惡한 人種은 1126年(人種 5年) 金瓚(金粲)·안보린(安甫麟)·최탁(崔卓)·汚濁(吳卓) 等 側近 勢力을 結集하면서, 李資謙의 權力 獨占에 反對하고 나섰다.

이에 李資謙은 反對派를 除去하고 척준경 과 함께 亂을 일으켜 權力을 掌握하였다( 1126年 ). 李資謙은 十八子(十八子)가 王이 되리라는 讒舌 (讖說)을 믿고, 人種을 廢하고 스스로 王이 되려는 野心을 품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척준경 의 軍事行動으로 王을 禁足(禁足)시키고 側近의 여러 臣下에게 害를 입혔다. 그러다가 뒤에는 도리어 一黨인 척준경과의 不和로 失脚되고, 李資謙을 몰아낸 척준경마저도 정지상 의 彈劾으로 除去되니 貴族의 跋扈는 一旦 鎭壓되었다. 李資謙의 난 은 中央 支配層 사이의 分裂을 드러냄으로써 門閥 貴族 社會의 崩壞를 促進하는 契機가 되었다.

皇權의 衰微와 貴族 勢力의 강대로 빚어진 李資謙의 난 以後 人種은 失墜된 皇權을 回復하고 民生을 安定시키며 國防力을 强化하기 위한 政治 改革을 推進하였다. 이 過程에서 李資謙 一波, 卽 開京 貴族 勢力의 除去에 앞장섰던 妙淸 · 白首限 (白壽翰)· 정지상 等 地方 出身의 改革的 管理와 김부식 을 中心으로 한 保守的 官吏 사이에 對立이 벌어졌다.

妙淸 勢力은 風水地理說 을 내세워 書經 을 1首都로 變更, 保守的인 開京의 門閥 貴族 勢力을 누르고 稱帝建元함으로써 皇權을 强化하면서 自主的인 革新 政治를 施行하려 하였다. 이들은 西京에 遷都하여 새 王宮인 大花宮 (大華宮)을 짓고, 金나라 를 征伐하자고 主張하였다. 書經은 高麗 初부터 北進政策 과 關聯하였으며, 또 開京 貴族 勢力을 牽制하기 위해서도 重要視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太祖 때부터 西京에서는 分司制度 (分司制度)가 實施되기도 하였다.

反面 開京을 勢力 基盤으로 하며 傳統을 尊重하는 김부식 等 開京 貴族 勢力은 儒敎的 理念에 忠實함으로써 社會 秩序를 確立하자고 主張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民生 安定을 내세워 金나라와 事大 關係를 맺었다. 結局 이러한 政治 改革과 對外 關係에 對한 意見 對立이 地域 間의 葛藤으로까지 擴大되었다.

妙淸 勢力은 署經을 1首都 遷都를 통한 政權 掌握이 어렵게 되자 1135年( 人種 13年) 署經에서 有참 · 趙匡 等과 더불어 나라 이름을 大爲國 (大爲國), 年號를 千個(天開), 그 軍隊를 淺見충의군 (天遣忠義軍)이라 稱하면서 亂을 일으켰다.

朝廷에서는 妙淸 反對派의 首長인 김부식 (金富軾)에게 書經 淨土(征討)의 命令을 내렸다. 金富軾은 出征에 앞서 정지상 · 백수환 等을 죽이고 北上하여 平壤城을 包圍했다. 趙匡 (趙匡)은 情勢의 不利함을 깨닫고, 妙淸 · 有참 等을 목베어 鬼斧(歸附)의 뜻을 표했으나 拒絶된 後 끝까지 反抗하였다. 1136年 ( 人種 14年) 2月 서경성 이 陷落되어 亂은 1年 만에 平定되었다. 이로써 書經 勢力의 政權 掌握의 꿈은 水泡로 돌아갔던 것이다.

武臣政權의 成立(12世紀, 1170年) [ 編輯 ]

12世紀에 들어 高麗의 支配層 內部에서는 門閥 貴族 側近 勢力 間에 政治權力을 둘러싼 對立이 熾烈해지기 始作해 政治가 혼란스러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平素에 文臣들만 優待받는 것에 不滿이 高調되었던 武臣들은 정중부 , 이의방 等을 中心으로 1170年에 政變을 일으켜 多數의 文臣들을 죽이고 毅宗 을 廢하여 巨濟島 로 귀양 보낸 後 허수아비 임금인 明宗 을 내세워 政權을 掌握하였다. 이를 武臣政變 이라고 부른다. 또한 최충헌 (崔忠獻)李 頭角을 나타내기까지에는 無人의 群雄時代로서 정중부 · 이의방 · 이고 (李高)· 이의민 경대승 사이에 勢力 爭奪과 軋轢이 甚하였다. 明宗3年(1173年), 동북면 兵馬使로 있던 김보당 毅宗 慶州 로 데려와 毅宗을 復位 시켜준다고 하여 鄭仲夫에게 金甫當의 亂을 이르켰다. 金甫當은 鄭仲夫에게 붙잡혔다.

武臣政變 以後 武臣들은 朝廷의 主要 官職들을 모두 獨占하고 富를 늘려갔으며, 저마다 私兵을 길러 서로 權力을 뺏고 빼앗기는 爭奪戰을 벌였다. 이 때문에 中央 政府의 統制力은 갈수록 弱化되어갔고 百姓들에 對한 收奪은 더욱 심해져 여기저기에서 여러 次例 蜂起가 일어났다.

또 이러한 支配 體制에 對한 反撥的 運動이 무신 相互 間의 相剋, 各 地方의 農民 및 奴婢의 叛亂이란 形態를 띠고 일어났다. 이리하여 20餘 年의 짧은 期間에 走馬燈같이 武人들의 群像(群像)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等 高麗 社會는 混亂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

1196年 에 將軍 최충헌 과 그의 아우 최충수 이의민 을 殺害하여 政權을 獨占한 것은 武人 政治의 進展에 있어서의 한 劃을 그은 것이다. 이리하여 최충헌 一帶의 努力으로 이루어진 崔氏 政權의 基礎는 그의 아들 崔瑀 (崔瑀)에 이르러 더욱 强化되어 武人 政權의 機構가 整備되기에 이르렀다.

崔瑀 에 依해 崔氏 政權이 더욱 强化된 結果 정방 (政房)· 西方 (書房)이 設置되고 崔忠獻이 組織한 道傍 은 더욱 擴大되었다. 崔瑀 는 또한 敎定都監 을 依然(依然)히 존속시켜 權臣(權臣)의 幕府로 삼았으며, 이에 따라 敎定別監 의 官職도 權威가 서게 되어 歷代 權臣의 必須職이 되었다.

農民과 奴婢의 난 [ 編輯 ]

毅宗 때의 奢侈와 遊樂(遊樂)은 國家 財政의 破綻을 가져왔고, 이는 農民 收奪의 强化를 招來했다. 이에 塗炭에 빠진 農民들은 支配 體制의 紊亂과 武臣들의 下剋上 風潮에 刺戟되어, 身分 解放과 支配層의 壓迫·收奪에 抗拒하기 위하여 大規模 叛亂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12世紀 初부터 集團的인 盜賊이 되어 散發的으로 各地를 騷亂케 하던 遺民들은 武臣政變을 전후하여 全國 到處에서 벌 떼처럼 일어났다.

1172年( 明宗 2年) 北界 의 창주(昌州, 昌城 )·星州(成州, 成川 )·撤酒(鐵州, 鐵山 ) 等地에서 地方官의 橫暴에 憤激하여 叛亂이 일어났고, 그 뒤 妙香山 을 根據로 趙位寵 (趙位寵)의 남은 무리가 農民들의 呼應을 받아 叛亂을 繼續하였다.

南쪽의 叛亂은 1176年( 明宗 7年) 公州 鳴鶴所 (鳴鶴所)에서 網이·망소이가 蜂起 를 하기에 이르러 크게 번져갔다. 慶尙道에서는 손청 (孫淸)과 李珖 (李光) 等이 叛亂을 일으켰으며, 1182年(明宗 12年) 電柱에서 軍人과 官奴 (官奴)들이 官吏의 苛酷한 朝鮮(造船) 督役(督役)에 反抗하여 亂을 일으켰다. 이러한 初期의 叛亂은 大體로 自然 發生的인 것으로서, 地方官 이나 鄕吏 들의 抑壓에 反抗하여 農民이나 軍人 或은 奴婢 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들의 目的은 不當한 壓迫의 除去와 身分 解放 等이었으나 아직은 個別的인 要求에 不過하였다.

그러나 1193年( 明宗 23年) 김사미·孝心의 亂 에서부터 叛亂軍은 聯合 戰線을 펴며, 또 一連의 持續的인 樣相을 띠게 되었다. 이리하여 名酒 (溟州, 江陵 )의 農民 叛亂軍은 東京(東京, 慶州 )의 叛亂軍과 合勢하였고, 晋州 (晋州)의 奴婢 叛亂軍은 合奏 (陜州, 陜川 )의 부곡 叛亂軍과 聯合하여 共同 戰線을 폈다. 또 新羅 復興을 외치며 일어난 東京의 叛亂軍은 韻文 (雲門)· 蔚珍 (蔚珍)· 初戰 (草田) 等 各地의 叛亂軍과 聯合하였다. 慶尙道 一帶에는 서로 密接한 連絡을 가진 叛亂軍의 聯合 戰線이 이루어져서 10餘 年間 勢力을 떨쳤다. 이러한 叛亂은 脂肪뿐만 아니라 開京에서도 일어났다.

1198年( 新種 1年)에 일어난 萬積의 亂 은, 身分 解放 은 勿論 더 나아가서 政權 奪取를 위해 計劃된 것이었다. 이들 叛亂은 모두 최충헌 이 鎭壓하였다. 그러나 이 叛亂軍의 부르짖음은 그 後 政府 施策에도 反映되었다. 高麗의 身分 秩序의 童謠를 말하여 주는 이들 叛亂은 古代的인 遺産을 淸算하려는 社會的인 움직임으로서 그 意義가 크다.

몽골과의 戰爭 [ 編輯 ]

13世紀 初 中國 大陸의 情勢는 急迫하게 變化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部族 單位로 遊牧 生活을 하던 몽골族 이 統一된 國家를 形成하면서 金나라를 攻擊하여 北中國을 占領하였다.

이때 金나라의 隸下에 있던 거란족 의 一部가 몽골에 쫓겨 高麗로 侵入해 왔다. 高麗는 이들을 反擊하여 江東城 ((江東城)에서 包圍하였고, 거란족을 追擊해 온 몽골 및 豆滿江 流域에 있던 동진국 의 軍隊와 聯合하여 거란족을 討伐하였다. 以後 몽골은 自身들이 거란족을 몰아내 준 恩人이라고 내세우면서 지나친 貢物을 要求해 왔다.

마침 高麗에 왔던 몽골 使臣 一行 저고여 가 歸國하던 길에 國境 地帶에서 거란족 에게 被殺되자 이를 口實로 몽골군이 侵入해 왔는데(1231년), 이른바 高麗-蒙古 戰爭 의 始作이었다. 힘겹게 義州를 占領한 몽골軍은 貴州省 (龜州城)에서 朴犀 의 頑剛한 抵抗에 부딪히자 길을 돌려 開京을 包圍하였다. 이에 高麗는 몽골의 要求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몽골軍도 큰 所得 없이 물러갔다.

그러나 當時 執權者인 崔瑀 는 몽골의 無理한 朝貢 要求와 干涉에 反撥하여 江華島로 都邑을 옮기고, 長期 抗戰을 위한 防備를 强化하였다. 이에 몽골군이 다시 侵入해 왔으나 처인성 戰鬪 에서 長壽 살리타 金允侯 가 이끄는 民兵과 僧兵에 依해 射殺되자 退却하였다. 以後 考慮는 7次에 걸친 몽골 侵略을 끈질기게 막아 내며, 約 30年間의 長期 抗戰에 들어갔다.

海印寺 ( 八萬大藏經 이 있는 곳)

江華島의 高麗 調整은 住民들을 山城과 섬으로 避難시키고 抗戰과 外交를 竝行하면서 抵抗하였다. 한便, 支配層들은 부처의 힘으로 外敵을 防禦하겠다는 마음으로 八萬大藏經 을 組版하였다. 江華島의 高麗 調整은 水路를 통하여 租稅를 걷어 들여 命脈을 維持할 수 있었으나 長期間의 戰爭으로 國土는 荒廢해지고 百姓들은 塗炭에 빠지게 되었다. 아울러 皇龍寺 9層 木塔 을 비롯한 수많은 文化財가 消失되었다.

이에 高麗 朝廷에서는 漸次 그 勢力을 挽回하기 始作한 文臣들은 몽골와의 强化를 主張했다. 卽 文臣들은 外勢를 利用하여 武人 勢力을 牽制하려고 한 것이다. 이리하여 몽골과 强化를 맺으려는 主和派는 一部 無信과 結託하여 崔氏 政權이 무너졌다. 이에 對해 김준(金俊)·林衍(林衍) 等 武人들의 反對도 露骨化하였으나 1270年 開京 環刀와 더불어 高麗는 몽골과 强化를 맺고 戰爭은 끝이 났다.

그러나 高麗 朝廷이 開京으로 還都하자 大夢 抗爭에 앞장섰던 三別抄 裵仲孫 의 指揮 아래 反旗를 들었다. 이들은 長期 抗戰을 計劃하고 進度로 옮겨 勇將性 을 쌓고 抵抗하였고, 旅夢 聯合軍의 攻擊으로 進度가 陷落되자 다시 濟州島로 가서 金通精 의 指揮 아래 繼續 抗爭하였다. [22]

元나라 干涉期 [ 編輯 ]

高麗人들은 긴 抗爭에 버티고 元 干涉期 때는 몽골의 軍隊는 元나라로 돌아가고 高麗의 貴族과 高位層, 官吏들은 모두 高麗人이였다. 元나라 의 侵略을 받은 考慮는 約 30年 동안 抗戰을 벌였으나 結局 强化가 成立되었다. 몽골 과의 抗戰을 主導하던 崔氏 武臣政權 은 崩壞되었다. 이와 함께 王政이 復古되었지만, 高麗는 元나라의 支配를 받게 되었다. 高麗王은 위구르보다 序列이 낮은 것에 對하여 不滿을 提起하기도 하였으나 元나라 皇帝는 위구르가 抵抗없이 빨리 降伏했기에 當然하다고 反論했다. [23] [24]

高麗는 元나라와의 强化 以後에 많은 試鍊을 겪어야 했으니, 特히 1274年과 1281年 두 次例에 걸친 日本 征伐 은 高麗에 莫大한 被害를 끼쳤다. 그 後 高麗 王室은 元 皇室과의 結婚 政策을 取함으로써 王權을 强化하려 했으며, 그 結果 高麗에는 몽골의 風俗이 많이 들어왔다. 또한 濟州道 에는 몽골에 對한 抗爭을 繼續하던 三別抄 를 除去한 뒤 耽羅摠管府 를 設置하고 木磨場을 經營하였다.

高麗 王은 몽골 公主와 結婚하여 몽골 皇帝의 駙馬가 되었고, 王室의 呼稱과 格이 自主國에서 諸侯國으로 格下되었다. 아울러 官制도 改編되었으며 亦是 格이 낮추어졌다. 또한 高麗는 더 以上 國王에게 皇帝의 稱號인 廟號 (太祖, 惠宗, 光宗, 毅宗, 神宗, 熙宗, 康宗과 같은 組,種 呼稱)를 붙일 수 없게 되었으며, 甚至於는 6代 王들은 몽골에 충성한다는 意味로 '忠'字를 붙여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便 원은 日本 攻掠을 目的으로 設置한 征東行省 (征東行省)을 통하여 高麗를 職·間接的으로 支配를 하면서 政治에 干涉하려 했으며, 또 高麗의 領土 一部를 直屬令(直屬領)으로 하였다. 곧 貨主 雙城摠管府 를 設置하여 鐵嶺 以北의 땅과 자비령 以北의 땅을 直屬令으로 編入하고, 書經에 東寧府 를 設置하였다. 원의 考慮에 對한 經濟的 要求도 高麗의 農民에게 커다란 負擔을 지웠다. 또 원은 南滿洲 一帶를 管轄하기 위해 충선왕 (忠宣王)을 瀋陽王 (瀋陽王)에 封하고 後에 그의 後繼者를 利用하여 考慮를 牽制하는 政策을 쓰기도 하였다 오랜 戰爭이 끝나고 社會가 變化·安定되면서 새로운 支配 勢力이 登場하였다. 이러한 여러 變化는 支配 體制의 紊亂을 招來했고, 이것은 또한 社會·經濟面에서 새로운 樣相으로 나타났다. 農場(農莊)李 擴大됨에 따라 國家의 空轉 (公田)李 侵蝕되고 이에 따라서 國家財政의 困窮과 窮乏이 招來되었다. 이때 權門勢族 이 登場하는데, 高麗 前期부터 있던 門閥貴族 一部와 武臣 執權期에 成長한 家門, 그리고 몽골語 通譯官으로 出世하는 等 몽골과의 親善 關係를 통해 새로 登場한 家門으로 構成되었다. 權門勢族은 權力을 앞세워 民衆의 土地를 빼앗아 廣大한 農場을 만들고 良民을 抑壓하여 奴婢로 삼는 等 社會 缺陷을 다시 격화시켜 高麗의 政治는 非正常的으로 運營되었다. 權門勢族의 不法行爲로 말미암아 被害를 입은 一般 百姓들은 살던 곳을 떠나 떠도는 身世가 되었고, 이것은 國家의 統治秩序를 威脅하는 水準에 이르렀다.

新進士大夫의 成長 [ 編輯 ]

高麗 後期에는 農業 生産力이 꾸준히 發展하였다. 먼저 元나라와 戰爭 中에 高麗의 獨自的인 醫術이 發達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人口가 增加하였으며, 그 結果 集約的 農業이 可能해졌다. 이러한 때에 中國 大陸 으로부터 人糞을 거름으로 使用하는 農業 技術이 傳來되어 休閑을 克服하고 한 土地에서 해마다 農事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 結果 農業 生産力이 크게 增大되었다.

일찍부터 存在해 온 貴族들의 事前 (私田)은 支配秩序의 紊亂을 틈타 漸次 擴大되어 田柴科 (田柴科)의 崩壞를 가져왔다. 事前 (私田)은 武人政權 이 打倒된 뒤에 더욱 進展되어 갔던 것으로 이를 普通 農場(農莊)이라고 한다. 農場의 耕作은 電弧 (佃戶)나 奴婢 (奴婢)가 擔當하였다. 流民(流民)도 包含된 이들 耕作者는 農奴 (農奴)와 性格이 비슷하였다. 農場의 增大는 國家 財政을 枯渴케 했고, 그 結果 官吏의 祿俸 (祿俸)李 廢止되었다. 이에 農場을 가지지 못한 新進 士大夫 官吏들은 權門勢家 에 不滿을 가지게 되었다.

武人 政權으로 말미암아 貴族政治가 崩壞된 以後에 새로운 官僚層이 登場하였다. 그들은 學問的인 敎養을 갖추었으며, 또한 政治 實務에도 能한 士大夫 (士大夫)들이었다. 이들의 社會的 進出은 드디어 高麗의 政治的 大勢를 一邊시켰다.

權門勢家들의 勢力은 元나라의 强大한 勢力을 뒷받침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明)李 興起하고 원이 漸次 衰退하여 北方으로 쫓겨 가는 원·明 交替期에 卽位한 공민왕 (恭愍王)의 改革으로 對外的으로는 班員政治(反元政治), 對內的으로는 權門勢家의 抑壓이라는 두 가지 政策이 採擇되었다. 恭愍王은 後日 辛旽 (辛旽)을 登用하여 國政을 管轄하게 하였다. 辛旽 이공수 (李公遂) 等 權門 出身을 逐出하고, 門閥이 변변하지 못한 者를 登用하였다. 또한 田民辨正都監 을 設置하여 權門勢家의 經濟的 基盤을 剝奪하였다. 이러한 改革은 權門勢家의 反對로 滿足할 만한 成果를 거두지 못했으나, 新進 士大夫 의 進出을 容易하게 하였다.

高麗 末의 改革 政治와 新進士大夫의 登場 [ 編輯 ]

공민왕 이 그린 天山大獵圖

14世紀 中盤 元나라 의 勢力이 弱化되자 공민왕 은 半圓(反元) 運動을 일으켜 元나라의 干涉에서 벗어나는 데 成功하였다. 恭愍王은 元나라를 몰아낸 後 辛旽 및 新進 士大夫와 함께 大大的인 社會 改革을 推進해 나갔다. 그리하여 權門勢族 이 不當하게 빼앗은 土地나 財産을 本來의 主人에게 돌려주고, 抑鬱하게 奴婢로 轉落한 사람들을 良民으로 解放시켜 주었다. 그러나 元의 勢力을 背景으로 하는 權門勢族들의 反對에 부딪혀 辛旽 이 除去되고, 공민왕 까지 弑害되면서 權門勢族 이 다시 登場하여 政治 權力을 獨占하면서 改革은 中斷되고 말았다. 공민왕 때의 改革 努力이 失敗하자 政治紀綱이 紊亂해지고, 百姓들의 生活은 더욱 어려워지는 等 高麗 社會의 어려움은 더욱 심해졌다.

權臣(權臣)인 이인임 (李仁任)李 10歲의 禑王 (禑王)을 擁立함으로써( 1374年 ), 權力은 다시 權門勢家의 손에 들어갔다. 李仁任 一派는 新興 士大夫 들을 抑壓하고 露骨的으로 土地兼倂을 恣行하였다. 班員政策度 修正되어, 元나라 明나라 에 對한 等距離 外交가 追求되었다.

禑王 代 初의 最大 懸案은 14世紀에 들어와 急激히 猖獗하게 된 倭寇 (倭寇)를 擊退하는 것이었다. 倭寇는 到處에서 殘酷하게 擄掠질을 하여 稅穀(稅穀) 輸送網人 조운 (漕運)까지 마비시킬 程度였다. 高麗 朝廷은 日本 幕府 에 倭寇의 擄掠질을 根絶해달라고 要求하였으나, 內亂에 處한 바쿠후 가 地方을 統制할 수 없었기 때문에 別 成果가 없었다. 1377年 ( 禑王 3年)에 최무선 (崔茂宣)의 努力으로 火㷁都監 이 設置되어 火砲가 製作되었다. 1380年 (禑王 6年)에는 錦江 入口에 侵寇해 온 倭寇 5百餘 隻의 大船團에 火砲 攻擊을 하여, 배를 모두 불태워 退路를 遮斷하였고 內陸으로 浸透한 倭寇들度 李成桂 (李成桂) 等의 討伐軍이 完全 掃蕩하였다. 이로써 倭寇들은 氣勢가 꺾이기 始作하였는데, 1389年 ( 昌王 元年)에는 朴葳 (朴?)가 이끄는 高麗軍이 倭寇의 巢窟인 對馬島 (對馬島)를 征伐하였다.

崔瑩 의 墓
高麗의 將帥이자 朝鮮을 開國한 李成桂

倭寇 問題가 어느 程度 收拾된 後인 1388年 (禑王 14年) 陰曆 1月에는 土地 兼倂으로 惡名 높은 權門勢家人 이인임 一黨이 大大的으로 肅淸되었다. 이 肅淸은 權門勢家 出身이지만 청렴하고 剛直하기로 이름난 崔瑩 (崔瑩)李 禑王 과 相議하여 執行하였고, 新興勢力인 李成桂 將軍이 힘을 더하였다. 이로써 權門勢家의 氣勢가 꺾이고 新興 士大夫 들이 本格的인 政治活動을 始作하게 되었다. 그러나 微溫的인 政策을 推進하던 崔瑩 과 積極的인 改革을 願하는 新興 士大夫 間에는 틈이 있었다.

같은 해에 明나라 鐵嶺衛 (鐵嶺衛)를 設置하겠다며, 雙城摠管府 地域을 내놓으라고 强壓的인 通報를 해오자, 崔瑩 은 北으로 밀려난 元나라 에 明나라를 挾攻할 것을 提議하고 明나라의 東北 方面 前進基地인 搖動 에 對한 征伐을 推進하였다. 이에 對해 李成桂 는 軍事的 難點을 들어 反對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민수 (曺敏修)와 함께 遠征軍을 이끌고 出兵한 李成桂는 鴨綠江 가운데에 있는 威化島 (威化島)에 머물면서 指揮權을 掌握한 다음 軍事를 開京으로 돌려 崔瑩을 除去하고 政權을 掌握하였다( 1388年 ). 以後 明나라의 鐵嶺衛 設置 祈禱도 中止되었다.

新進士大夫 執權과 滅亡 [ 編輯 ]

李成桂 一派의 執權 後 新興 士大夫 들은 權門勢家 나 社員이 保有한 農場 等을 沒收하고 새로운 土地制度를 實施하기 위해 事前 (私田)改革을 推進하였다. 權門勢家 들의 勢力은 크게 弱化되었으나, 反撥도 적지는 않았다. 廢位된 禑王 의 아들 昌王 이 李成桂 一派의 反對에도 不拘하고 어렵게나마 王位를 이을 수 있을 만큼 舊勢力度 命脈을 維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李成桂 一派가 昌王마저 廢位하고 공양왕 (恭讓王)을 擁立하자(1389), 政治는 完全히 新進 士大夫가 主導하였다.

또한 事前 改革도 本格化되었다. 全國의 土地에 對한 測量이 始作되어 공양왕 2年(1390)에 完了되자 從來의 工事全的 (公私田籍)李 모두 불태워졌다. 事前 改革으로 國家의 稅收(稅收) 對象 土地가 確保됨으로써 國家 財政이 擴充되고, 官僚들에게도 經濟的 給付로서 科田 (科田)이 支給될 수 있었다. 공양왕 3年 田柴科 制度와 마찬가지로 收租地 科田 을 分給하는 科田法 (科田法)이 公布되었다. 그러나 田柴科制度 그대로 復舊된 것은 아니었으니, 科田法 의 收租地 分給 對象 地域은 京畿地域 에 限定되도록 縮小되었고, 分級 對象도 大體로 現職 官吏들을 中心으로 한 範圍에 制限되었다.

이러한 收租地 制度의 大幅的인 縮小는 所有權에 依한 土地 支配가 擴大되고 收租權에 依한 土地 支配가 縮小·衰退되어가는 時代的 狀況이 反映된 것이다. 新興 士大夫 들은 政治와 思想 等의 面에서도 새로운 秩序를 追求하며 改革을 擴大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照準 (趙浚)· 정도전 (鄭道傳) 等 急進的 改革을 追求하는 易姓革命派 (易姓革命派)가 溫乾한 改良을 主張하는 異色 (李穡)· 정몽주 (鄭夢周) 等의 反對派를 꺾고 李成桂를 王으로 推戴함으로써 高麗에서 朝鮮 (朝鮮)으로 王朝가 바뀌게 되었다.

高麗에서 朝鮮으로의 王朝 交替는 國家 社會로서는 連續性을 가졌던 것이었으니, 王朝만이 아닌 旣存 國家 社會 自體가 滅亡하여 領土와 國民이 크게 變動하였던 앞 時代의 三國에서 新羅 · 渤海 로의 變化나, 南北國 時代 에서 後三國 을 거쳐 高麗에 이르는 王朝의 變化와는 다른 性格을 가졌다.

高麗에서 朝鮮으로의 變化는 王室과 王朝로서는 終末과 새로운 開創이었으나, 領土와 國民으로서는 連續이었으며, 高麗 末 當時 國家 體制 안에 包括된 支配層 內에서의 政權交替라는 性格을 剛하게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政權 交替의 裏面에서는 高麗 後期 以後 廣範한 社會 變動 속에서 暗中摸索되던 改革이 確固한 方向을 잡고 새로운 體制를 具體化시키는 結實을 보고 있었다.

中國 歷史書와 韓國 歷史書에 나타난 高麗의 領土 [ 編輯 ]

宣和奉使高麗圖經 의 高麗의 疆域

原文:

高麗。南隔遼海。西距遼水。北接契丹舊地。東距大金。又與日本、琉球、聃羅、黑水毛人等國。犬牙相制。…(中略)…舊封境東西二千餘里,南北一千五百餘里。今??新羅、百濟,東北稍廣,其西北與契丹接連。

飜譯: 高麗의 南쪽은 了解(遼海)로 막히고 西쪽은 夭壽(遼水)와 맞닿았고, 北쪽은 옛 거란 땅과 連續되고 東쪽은 金(金) 나라와 맞닿았고, 또, 日本ㆍ遺構ㆍ담라(聃羅)ㆍ黑手(黑水)ㆍ모인(毛人) 等 나라와 犬牙相制(犬牙相制)의 模樣으로 되어 있다. …(中略)… 옛적에는 封境(封境)이 東西 2千餘 리, 南北 1千 5百餘 里이었는데, 只今은 이미 新羅와 백제를 合倂하여 東北쪽은 조금 넓어졌지만 그 西北쪽은 거란(契丹)과 連續되었다.

《高麗史》에서는 考慮醫領土를 이렇게 記錄되어있다

그 四方 警戒[四履]는, 西北은 黨(唐) 以來로 압록(鴨綠)을 限界로 삼았고, 東北은 선춘령(先春嶺)을 境界로 삼았다. 무릇 西北은 그 이르는 곳이 高句麗에 미치지 못했으나, 東北은 그것을 넘어섰다.

政治 [ 編輯 ]

光宗 (光宗)이 죽자 新羅 6頭品 系統의 儒學者들이 政治의 主導的 役割을 擔當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代表的인 人物이 新羅 中央 貴族이었던 최승로 (崔承老)였다.

新羅 崔承老의 政治 理念은 集權的인 貴族 政治를 實現하는 것이었다. 그는 新羅 가 歸順할 때 高麗의 臣下가 된 사람으로서 豪族과는 달리 地方에 自己의 根據地를 갖고 있지 않은 學者였다. 이것은 自然히 그의 政治的 見解를 集權的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또 王權의 專制化에 反對하고 儒敎의 政治 理念을 내세웠으니 그가 成宗 에게 建議한 時務(時務) 28條는 이러한 그의 立場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成宗은 光宗의 改革이 失敗한 뒤의 政治的 收拾을 이 儒學者들의 見解에 依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中央에서 地方官을 派遣하고, 鄕職(鄕職) 改革을 實施하여 地方 豪族들의 地位를 格下시켰다. 한便 豪族들은 되도록 中央貴族으로 吸收하려고 하였으며, 古典과 儒敎에 밝은 貴族들의 意見을 聽取하여 政治에 反映시키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高麗 貴族 政治의 터전이 잡혀가고 있었다.

考慮는 新羅 가 貴族인 眞骨 中心의 政治(聖骨인 王族은 數가 적었다 그 證據로는 2名의 女王이 나왔다.)를 했던 것과는 달리, 여러 異性(異姓) 貴族들에 依해 政治를 해 나갔고, 이 理性 貴族들은 自己의 出身地를 重要視하였다. 卽, 本館(本貫)은 豪族의 勢力을 가늠하는 하나의 標準이 되었고, 그러므로 門閥(門閥) 또는 家門(家門)李 重要視되었으며, 戶籍(戶籍)李 平民과 別途로 作成되었다. 豪族은 自己 家門의 勢力을 擴張시키기 위하여 婚姻政策(婚姻政策)을 使用하였다. 이에 따라 高麗 最高의 貴族인 王室과의 通婚은 家門으로서의 最高 榮譽日 뿐만 아니라, 政權 掌握의 捷徑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王室의 外戚으로서 政權을 追求하는 名門世族(名門世族)들이 나타났다.

安山 金氏(案山金氏)와 인주 李氏(仁州李氏)는 代表的인 存在였다. 新羅 契였던 安山 金氏는 김은부 (金殷傅)가 세 딸을 新羅 王室의 外孫이기도 한 顯宗 (顯宗)의 비(妃)로 들인 以後 文宗 (文宗)에 이르는 4代 50餘 年間 外戚으로서 政權을 차지하였으며, 마찬가지로 新羅系였던 인주 李氏는 이자연 (李子淵)의 세 딸이 顯宗 의 아들이었던 文宗(文宗)의 비로 들어간 後부터 人種 때까지 7對 80餘 年間 政權을 잡았다. 그 外에도 崔沖 을 代表的 人物로 하는 海州 최氏도 當代의 名文(名門)이었다.

이리하여 高麗는 政治·社會 面에서 貴族 中心의 體制가 이루어졌다. 首都 開京은 貴族의 中心地로서 또는 全國의 心臟部로서 發展하였다.

외왕내제 體制 [ 編輯 ]

高麗史 凡例에 이르기를,
"무릇 種(宗)을 稱하고 陛下(陛下)?太後(太后)?太子(太子)?절일(節日)?제(制)?조(詔)를 稱한 따위는 비록 僭濫된 일이라고 하겠으나 이제 當時의 불렸던 바에 따라 그 事實을 그대로 두었다."
라 하여 高麗에서는 저와 같은 皇室 用語를 使用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高麗史 高麗史節要 에 依하면 諡號가 皇帝 로 올려진 賃金은 없다.

電氣에 千壽, 廣德, 준풍 等의 獨自的인 年號, 廟號, 五等爵 , 圜丘壇, 三星體制(三省體制), 宮城(宮城)에 5 門(門) 設置 等 황제국의 制度를 使用하여 高麗가 新羅는 勿論 耽羅와 渤海, 餘震의 여러 小國들을 藩國(蕃國)으로 아우르는 千自國임을 標榜했지만 外交 慣例上 從來 中國 中心의 世界 秩序를 認定하여 後周, 宋, 요, 금 等의 年號를 使用하고 形式上의 冊封을 받기도 했다.

以後 원의 駙馬國으로 轉落하여 實質的 干涉을 받게 되었으며 體制 또한 諸侯國으로 格下 되었다.

太廟에는 成宗 代에 諸侯國 制度를 따라 5墓祭로, 毅宗代에 千自國의 制度에 맞추어 7墓祭로 하였다.

統治 機構 [ 編輯 ]

考慮는 新羅 를 잇는 새로운 統一 王朝로서 歷史的 意義를 지닌다. 高麗의 成立은 古代 社會에서 中世 社會로 履行하는 韓國 歷史의 內在的 發展을 의미한다. 統一新羅 末期의 6頭品 出身 知識人과 新羅의 地方 豪族 出身을 中心으로 成立한 考慮는 骨品 制度 爲主의 新羅 時代 보다 더 開放的이었고, 統治 體制도 科擧制를 實施하는 等 效率性과 合理性이 强化되는 方向으로 整備되었다. 特히 思想的으로 儒敎 의 政治 理念을 新羅 때보다 더욱 受容하여 古代的 性格을 벗어날 수 있었다.

太祖 · 光宗 은 年號를 세워 對外的으로도 皇帝를 稱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高麗의 君主들 또한 스스로를 짐(朕), 首都를 황성(皇城), 君主의 尊稱을 陛下(陛下), 次期 寶位를 繼承할 임금의 長男을 정윤(正胤) 또는 太子(太子), 君主의 어머니는 太後(太后), 君主의 命令은 兆(詔)와 칙(勅)으로 부르는 等 帝國의 制度를 使用해왔다. 그러나 13世紀 元나라 의 支配 以後, 모든 制度가 格下되었다. 짐(朕)을 寡人(寡人)으로, 陛下(陛下)를 殿下(殿下)로, 太子 (太子)도 世子 (世子)로 불렸다.

高麗 時代는 外敵의 侵入이 類달리 많았던 時期였다. 그러나 高麗人들은 줄기찬 抗爭으로 이를 克服하였다. 12世紀 後半 武臣들이 일으킨 武臣政變 은 從前의 文臣 貴族 中心의 社會를 변화시키는 契機가 되어, 身分이 낮은 사람도 政治的으로 進出할 수 있었다.

以後, 武臣 執權期와 元 干涉期를 지나 高麗 後期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成長한 新進士大夫를 中心으로 性理學 이 收容되어 合理的이고 民本的人 政治 理念이 成立되었고, 이에 따른 社會 改革이 進展되었다.

中央 管制 [ 編輯 ]

中書門下省
二部
尙書省 兵部
戶部
兄夫
禮部
工夫






中樞院
御史臺
三四

太祖 王建은 泰封 新羅 의 制度를 아울러 使用하였으나, 이것은 新羅 時代 骨品制 (骨品制)를 淸算하고 王權(王權)李 確立될 때까지의 過渡期的 措置에 지나지 않았다. 나라의 基盤이 튼튼해지고 王權이 確立된 成宗 (成宗)에서 文宗 (文宗)에 이르는 期間에 黨(唐) · 송(宋) 의 制度를 輸入하여 管制를 整備 完成하였다. 임금의 最高 顧問(顧問)으로 三四(三師) [b] 와 三公(三公) [c] 이 있었는데, 이것은 國家 最高의 榮譽職이요, 實務는 보지 않았다. 中央 行政의 最高 機關으로는 三星(三省) [d] ·六腑가 있었으며, 三星은 中서(中書) [e] , 門下(門下), 相서(尙書) [f] 의 세 省(省)이며, 이것은 唐나라의 制度를 模倣한 것이다. 門下省은 賃金의 命令을 傳達하고, 臣下들의 建議를 받아들이는 事務, 中書省은 詔勅(詔勅)에 關한 事務, 尙書省은 實地로 國務(國務)를 맡아보는 執行 機關으로 그 밑에 6部가 있었다.

門下省의 長官을 侍中(侍中)이라 하고 受賞(首相) 格이었으며, 中書省의 長官은 中書令(中書令) [g] , 尙書省의 長官은 尙書令(尙書令)이라 하였다. 이 誠意 高官을 再伸(宰臣)이라 불렀다. 이 中에서 門下省과 中書省은 매우 密接한 關係가 있어서 合해서 中書門下省 이라 불렀다.

尙書省 의 指揮를 받는 六腑는 이父(吏部)·兵符(兵部)·戶部(戶部)·兄夫(形部)·禮部(禮部)·工夫(工部)였다. ① 二部는 官吏의 任免과 上作(賞爵), ② 兵部는 武官의 任免, 群舞의(軍務)·의장(儀仗), 郵驛(隅驛), ③ 戶部는 虎口, 賦役, 全量(錢糧), ④ 兄夫는 法令, 訴訟, 刑獄(形獄), ⑤ 禮部는 禮義, 祭祀, 朝會(朝會), 交聘(交聘), 學校, 過去, ⑥ 工夫는 山澤(山澤), 工匠(工匠), 英祖(營造)를 各各 맡았다.

이 밖에 三星과 거의 같은 資格을 가진 三司(三司)가 있어 國家財政을 統一하였다. 또 軍國(軍國)의 機密과 宿衛(宿衛)를 맡은 機關을 中樞院 (中樞院) [h] 理라 하고 그 長官을 判院事 (判院事)라 하였다. 中樞院은 三星과 더불어 國家의 最高 機關으로, 그 高官을 追伸(樞臣)이라 했고, 三星의 高官인 在神과 아울러 宰樞(宰樞)라 불렀다. 또 이 두 機關을 養父(兩府)라 한다. 特殊 機關으로, 國家의 主要한 格式(格式)을 決定하는 式目都監 (式目都監), 監察을 맡은 司憲臺 (司憲臺), 照明(詔命)을 맡은 翰林院 , 모든 市政(時政)을 記錄하는 士官(史觀) [i] , 大學으로 國子監 (國子監)이 있었다.

寶文閣 (寶文閣)은 競演 과 藏書를 맡았고, 御書院 (御書院)은 王室 圖書館이었고, 祕書省 (秘書省) [j] 은 警笛(經籍)과 縮小(祝疏)를 맡았다. 재주 있는 文臣(文臣)을 뽑아 임금을 모시게 한 弘文館 (弘文館) [k] , 또 照會(朝會)와 意識(儀式)을 맡은 闔門(閤門), 祭祀와 證市(贈諡)를 맡은 太常寺(太常寺) [l] , 監獄을 맡은 大理寺(大理寺) [m] , 賓客에 對한 宴會와 接待를 맡은 禮賓寺(禮賓寺) [n] , 市場을 團束하는 京市署(京市暑), 王室과 宗親의 族譜를 맡은 殿中省(殿中省), 王室의 醫藥과 疾病 治療 等을 맡은 太醫監(太醫監), 功勞(公路)와 驛院(驛院)을 맡은 供驛署(供驛暑) 等이 있었다.

地方 行政 [ 編輯 ]

高麗의 地方制度는 建國 初期에는 미처 中央의 行政力이 全羅道까지 미칠 수가 없어서 全羅道 行政은 豪族(豪族)들에게 放任된 狀態에 놓여 있었다. 그 뒤 983年( 成宗 2)에 12牧(牧)을 두어 여기에 中央의 官員을 派遣한 것이 地方官制의 始初였다. 그러다가 차츰 王權의 確立을 보게 된 995年(成宗 14)에는 競技 以外의 全國을 便宜上 10度(道)로 나누는 同時에 12週(州)의 節度使(節度使)를 비롯하여 아래로 團練使(團練使)·自社(刺使)·防禦使(防禦使) 等 外觀을 設置하였지만 10度는 이내 有名無實하게 되었으며, 團練使·自社·防禦使 等의 外官職度 곧 廢止되었다.

結局 全國은 5道 兩界와 競技로 크게 나뉘었다. 그 안에 3景·4都護府·8牧을 비롯하여 軍·縣·辰 等을 設置하였다.

關係 [ 編輯 ]

高麗의 關係(官階)는 情1品(正一品)에서 種9品(從九品)까지 30段階가 있었다. 1品에서 3品까지는 情과 種으로 區分하고, 4品에서 9品까지는 鄭.種과 上.下로 區分하여 30段階였다. (3x2 + 6x4 = 30). 3品 以上은 正ㅁ品, 종ㅁ품으로 區分하고, 4品 以下는 情ㅁ品嘗, 정ㅁ품하, 종ㅁ품상, 종ㅁ품하로 區分하는 式이었다. 이 밖에 王의 最高 顧問 格으로 三四(三師)·삼공(三公)의 職이 있었는데, 文宗 때 이들의 關係는 鄭1품이었다.

經濟 [ 編輯 ]

考慮는 商業 (商業)을 重要視하였다. [25] 考慮는 新羅 後期의 混亂을 克服하고 田柴科 制度를 만드는 等 土地 制度를 整備하여 統治 體制의 土臺를 確立하였다. 또, 紊亂해진 收取 體制를 다시 整備하면서 財政 運營에 必要한 官廳도 設置하였다. 또한 新羅 민정文書 制度를 繼承하여 土地와 人口를 把握하기 위한 兩岸 事業을 實施하고 戶籍 을 作成하였다. 이것을 根據로 租稅, 貢物, 負役 等을 賦課하였다. 아울러 國家가 主導하여 産業을 再編하면서 耕作地를 擴大시키고, 商業과 手工業의 體制를 確立하여 安定된 經濟 基盤을 確保하였다.

農業에서는 技術의 發達로 農業 生産力이 增大되었고, 商業은 市廛을 中心으로 都市 商業이 發達하면서 漸次 地方에서도 商業 活動이 增加하였다. 手工業도 官廳 手工業 中心에서 漸次 社員이나 農民을 中心으로韓 民間 手工業을 中心으로 發展해 갔다.

特히 開京의 外航인 碧瀾渡 에는 中國, 日本, 아라비아, 페르시아 等地의 商人들이 와서 活潑하게 貿易하여 人蔘, 農器具, 陶瓷器 等을 輸出하고 琉璃 工藝品, 書籍, 緋緞 等을 輸入했다.

大松 貿易 [ 編輯 ]

高麗는 政治的으로 宋나라와 密接한 友好 關係를 맺으면서 北方 民族을 牽制했다. 또한 兩國은 頻繁한 交易을 통해 서로의 文物을 交換하였다.

高麗가 宋나라에서 輸入하는 物品은 主로 貴族들의 愛好品人 能見(綾絹 : 緋緞)·自己·藥材·樂器·香料·文房具(종이·붓·먹) 等이었다. 이 中에서 特히 自己·書籍은 各各 高麗의 靑瓷 와 木版 印刷術(木版印刷術)의 發達에 크게 影響을 미쳤으나, 그밖에 다른 物品 輸入은 貴族의 奢侈 風潮를 더욱 助長시켰다.

高麗의 輸出品으로는 金·銀·九里·人蔘·송자(松子 : 잣)·毛皮 等의 元山品과 綾羅(綾羅 : 緋緞)·苧麻布·白紙(닥나무 종이)·金銀銅機·負債·금은장度, 그 밖에 종이·붓·먹 等 加工品이 많았다.

隊員 貿易 [ 編輯 ]

2005年 7月에 中國 산둥(山東)性에 發掘된 高麗 船舶에서는 高麗 象嵌靑瓷와 甕器, 접시 等의 土器가 나왔다. [26] 元나라의 貿易船이 아닌 高麗의 배 또한 遠洋 航海에 나섰다. [26]

社會 [ 編輯 ]

我執度大連, 高麗時代 開京 의 生活相을 담은 會話

高麗社會는 身分 社會로서 中인, 平民, 賤民, 兩班 官僚 等의 身分으로 構成되어 있다. 身分은 世襲되는 것이 原則이었고, 各 身分에는 그에 따른 驛이 賦課되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境遇도 있었는데, 鄕里로부터 文班職에 오르는 境遇와 軍人이 軍功을 쌓아 武班으로 出世하는 境遇를 들 수 있다. 貴族들은 文班, 武班, 貴族과 王族이고 中人은 署理와 技術官이다. 貴族과 中人은 支配層이고 被支配層은 平民과 賤民이 있다. 貴族은 工作 (公爵), 侯爵(侯爵) 等의 制度를 두어 英國 의 貴族과 類似한 形態를 갖췄다. 平民은 農民, 手工業者, 商人이 있는데 農民이 大多數를 차지하고 있었다. 賤民은 奴婢와 鄕, 소, 部曲民, 禾尺, 在人 等이 있었다. 百姓의 大部分을 이루는 良民은 郡縣에 居住하는 農民으로, 租稅, 公納, 役을 負擔하였다. 香, 部曲, 소 같은 特殊 行政 區域에 居住하는 百姓은 租稅 負擔에 있어서 軍현민보다 差別받았으나, 高麗 後期 以後 特殊 行政 區域은 一般 郡縣으로 바뀌어 갔다. 凶年이나 災害 等으로 어려움을 겪는 百姓들의 生活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國家는 義昌 常平倉 을 設置하고, 여러 가지 社會福祉政策을 實施하였다. 再婚女도 高麗의 王妃 가 될 수 있었으며 一般人들에게도 再婚 이 惡으로 取扱되지 않았다. [27] 遺産은 男女가 均等하게 相續받았으나 女性은 官職에 進出할 수가 없었다. [28]

高麗의 收取 體制 [ 編輯 ]

田柴科 (田柴科)로 대표되는 土地制度 밑에 高麗의 農民은 空轉 또는 事前 을 耕作하고 國家 또는 個人 地主에 對하여 租稅(租稅)·工夫(貢賦)·力役(力役) 等의 負擔을 졌다. 前兆 (田租)는 土地 收穫物의 一部를 바치는 것이며, 그 量은 空轉 事前 에 差異가 있었다. 空轉 은 1結마다 收穫物의 ¼에 該當하는 2席 程度를 바쳤으며, 事前 인 境遇에는 그보다 倍加되는 收穫物의 ½을 바치게 規定되었다. 또한 土地의 肥沃度(肥沃度)에 따라 租稅率에 差等이 있었으며, 凶作일 境遇에는 租稅를 減免하도록 하였다. 高麗에서는 開墾을 奬勵하여 進展(陳田)을 開墾하는 農民에게는 1~2年 동안 前兆를 免除해 주었다.

前兆 는 收租者(收租者)가 國家에 바치는 세美(稅米)와 아울러 各 地方의 漕倉 (漕倉)에 蒐集되어 陸路 或은 海路를 통하여 中央에 수송되었다. 前兆 外에 貢物(貢物)이 있어서 上空(常貢, 歲貢)과 別貢(別貢)으로 나누었다. 上空은 쌀·砲(布)·綿絲(綿絲)·流蜜(油蜜) 等을 바치게 했으며, 別貢은 그 地方 特産物을 따로 바치게 한 것이다. 農民에게 가장 負擔이 큰 驛(役)은 軍役(軍役)과 了役 (?役)으로 區別되어 16歲 以上, 60歲 以下의 正南(丁男)이면 누구나 이를 져야 했다. 徭役은 各種 土木工事(土木工事)에 動員되는 것으로 一時的인 것이었으나 軍役은 長期間에 걸쳐 服務해야 하는 것이었다.

一般 農民은 大槪 20歲가 되면 軍政(軍丁)李 되어 大體로 勞動 部隊 性格을 띤 地方軍(地方軍)에 編入되었고, 旅程(餘丁)은 軍政을 經濟的으로 돕게 되었다. 이러한 收取 體制 中 農民은 特히 軍役의 負擔에서 벗어나고자 流民(流民)이 되거나 豪族 에 依支하여 佃戶(佃戶)가 되는 境遇가 많았다.

交通 인프라 [ 編輯 ]

高麗의 交通 인프라에서 比重은 陸路交通보다 水路와 海路交通이 크게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29] 全 國土에 이 많고 道路가 險하여 수레 로 運搬이 不利하였기 때문이다. [29] 水路와 關聯이 있는 陳(津) · 道(나루터) 等에 勢力家들이 크게 繁榮하였다. [29]

考慮는 統一新羅 와 달리, 租稅를 수도 로 運搬하였기 때문에 더욱 道路體系가 整備된다. [30] 道路 가운데 政治的·軍事的·經濟的으로 重要하다고 判斷되는 尿路에는 驛(驛)李 두어졌고, 橋梁 으로 이어지지 않는 河川에는 陳(津)李 設置되어서, 全國的인 道路網은 陣에 依하여 補完되는 驛路(驛路)로 이루어졌다. [31] 하지만 高麗 後期가 되면 武臣執權期 원干涉期 를 거치며 發展되었던 道路體系는 무너진다. [30]

文化 [ 編輯 ]

高麗佛畫 人 彌勒하생경變相圖

新羅 時代 에 들어온 儒敎가 政治 理念으로 採擇, 適用됨으로써 儒敎에 對한 認識이 擴大되었으며, 後期에는 性理學 도 傳來 되었다. 佛敎는 新羅時代 보다 擴大되어 生活 全般에 影響을 끼쳤다. 이런 가운데 佛敎 思想이 深化되고, 敎宗 腺腫 의 統合 運動이 꾸준히 推進되었다.

中世의 藝術은 貴族 中心의 優雅하고 세련된 特徵을 드러내고 있다. 建築과 彫刻에서는 古代의 性格을 벗어나 中世的 樣式을 創出하였으며, 聽者와 印刷術은 世界的인 水準을 자랑하고 있다. 그림과 文學에서도 中世의 品格 높은 멋을 찾아 볼 수 있다.

高麗 初期에는 科擧制 와 함께 漢文學 이 크게 發達하였고, 成宗 以後부터는 文治主義가 盛行함에 따라 必須 敎養으로 發展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優秀한 詩人이 많이 登場하게 되었다.

高麗靑瓷

高麗人들은 自身들의 奢侈 生活을 充足하기 위하여 다양한 藝術 作品들을 만들어 즐겼으므로 藝術 面에서도 큰 發展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 中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分野는 工藝였다. 工藝는 生活 道具와 佛敎 儀式에 使用되는 道具를 中心으로 發展하였고, 特히 自己 工藝 가 뛰어났다.

灌燭寺 彌勒菩薩 立像

考慮는 佛敎 를 國敎로 삼았으나 다른 宗敎도 禁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等 信仰의 自由 를 認定하였다.

高麗 後期의 文化 曹溪宗 의 隆盛과 朱子學 의 傳來로 특징지어진다. 佛敎에 있어서의 曹溪宗은 백운 (白雲)· 太古 (太古)· 懶翁 (懶翁)· 舞鶴 (無學) 等의 活躍으로 宗風(宗風)을 크게 떨쳤으나 새로 일어나는 朱子學의 發展으로 佛敎의 精神界에 對한 指導力은 喪失되어 갔다.

朱子學은 충렬왕 以後 儒敎의 振興으로 中國에서 傳來되어 漸次 發達, 佛敎 排斥의 기운을 造成했다. 또한 私學(史學)이 發達하여 많은 司書(史書)가 編纂되었으며, 한便 새로운 形式의 市價인 景幾體歌 (景幾體歌)와 장가 (長歌)가 나타났다. 美術에 있어서도 많은 作品을 남겼다. 韓國의 現存(現存)하는 最古(最古)의 木造 建物인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無量壽殿)을 비롯하여 적잖은 建築物들이 當代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外에 石塔 (石塔)· 席不渡 (石浮屠) 等도 當時의 藝術을 말해준다. 또 繪畫도 漸漸 發達하였으며, 西島에는 優雅한 松雪體 (宋雪體) 傾向이 나타났다. 그러나 高麗 後期의 文物 中 무엇보다 特記할 것으로는 印刷術의 發達과 木綿(木棉)의 傳來 및 火藥의 製造를 들 수 있다.


한 硏究에 따르면 高麗 建國 後 요·금 交替期人 12世紀 初까지 約 17萬 名假量의 異民族이 高麗로 移住했다, 이는 當時 推定 人口의 8.5%로, 只今의 國內 滯留 外國人 比率 3.9%보다 훨씬 높다. [32] 個人單位의 歸化와 國際 結婚을 통한 歸化가 흔한 只今과 달리 高麗 時代에는 家族 單位, 集團 單位로 移住해 오는 歸化人들이 많았다. [33]

百官의 官服은 新羅 王室의 慣例를 따랐다가 光宗 宋나라 制度로 바꾸었고, 몽골의 內政 干涉 期間에는 몽골式을 따랐다. 以後 원·明의 勢力 版圖가 바뀌는 過渡期에는 狀況에 따라 몽골服과 命題(明制)를 따랐다. 李成桂가 威化島 에서 돌아온 後로 命題가 確定되어 近世에 이르렀다.

一般 庶民은 大槪 흰 옷을 입었고 女子들은 洪(紅)·黃(黃)色 等 色옷을 입기도 하였다. 處女는 붉은 댕기, 總角은 검은 댕기를 달았고, 貴族은 가죽신, 庶民은 짚신을 신었으며 貴族의 夫人은 너울을 썼다. 罪人은 官이나 두건을 쓰지 못했다.

王室과 貴族들은 金·銀그릇과 精密한 陶瓷器를 썼고, 庶民은 조제(粗製)陶瓷器·土器·구리그릇·놋그릇을 썼다.

新羅 時代 보다 佛敎가 더욱 盛行하여 사람이 죽으면 火葬(火葬)하는 風習이 퍼졌고, 父母喪에는 大槪 100日 동안 卜相하였다. 三年 동안 卜相하는 習慣은 末期의 정몽주 等 儒學者들에 비롯된다.

무당 은 一般的으로 盛行하였고, 山神 (山神)을 모신 祠堂 서낭堂 等이 있었으며 其他 鬼神도 많이 모셨다.

설·正月보름·韓食·商社(上巳: 陰曆 3月 3日)·端午·秋夕· 重陽節 (重陽節: 陰曆 9月 9日)·冬至· 八關會 (八關會)가 一般的인 名節이요, 이 밖에 人日(人日: 陰曆 1月 7日)·立春·2月 燃燈·3月 三짇날 · 四月初八日 · 乳頭 (陰曆 6月 15日)· 盂蘭盆會 (陰曆 7月 15日)· 帝釋 (際夕) 等이 있다.

설에는 茶禮를 지내고 官廳에서도 前後 7日의 休暇를 주었다. 보름에는 다리 밟기, 立春 에는 諜者 (帖子)를 써 붙였고, 韓食 에는 省墓 (省墓)와 그네, 三짇날에는 들놀이에 쑥떡을 먹었고, 四月初八日 에는 집집이 燃燈 (燃燈), 端午 에는 공치기 ·石戰· 그네 · 省墓 , 乳頭 에는 머리를 감아 厄을 씻었고, 盂蘭盆會 에는 절에 가서 供養했고, 秋夕과 重陽節 에도 省墓와 놀이, 同志 에는 팥粥 을 먹었다. 이 가운데서 國家的 慶祝日은 遠征 (元正), 卽 설날 을 비롯한 同志·팔관· 聖像節日 (聖上節日 : 임금의 生日)이었다.

놀이와 娛樂으로는 공치기 · 씨름 · 제기차기 ·石戰(石戰)· 바둑 · 長期 · · 鳶날리기 · 投壺 · 꼭두각시놀이 · 광대놀이 等이 있었다.

宗敎 [ 編輯 ]

佛敎 [ 編輯 ]

佛敎는 高麗의 國交였는데, 高麗는 國敎로서의 佛敎 以外의 道敎, 儒敎, 巫俗信仰 과 같은 宗敎를 禁止하지 않았으며 信仰의 自由 를 認定하였다.

太祖 以來 佛敎 를 國敎로 崇尙함으로써 首都 個性을 爲始하여 全國에 많은 寺刹이 있었다. 臣下뿐 아니라 王家에서도 出家하여 僧侶가 되는 일이 許多하였다.

高麗에서는 佛敎 가 至極히 崇尙됨에 따라 僧侶의 社會的 地位도 높아져 廣大한 寺院田 (寺院田)을 차지하고 世俗的인 人權도 대단하였다. 腺腫 敎宗 모두에서 體系的인 僧侶 制度가 있었고 王의 스승인 王師와 나라의 스승인 國史는 크게 尊重받았다. 이에 따라 偉大한 思想家 또는 스님도 많이 나타났는데 그 代表的인 人物이 大覺國師 義天   · 普照國師 知訥   · 太古 普愚 이다.

高麗의 佛敎는 八萬大藏經 의 板刻을 비롯한 社會的으로 많은 順機能을 하였으나 또한 逆機能을 하기도 하였다. 많은 經費를 들여 자주 절을 짓고 佛敎行事를 마련한 것은 高麗가 기울어지게 된 原因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道敎 [ 編輯 ]

高麗時代에는 道敎를 重視하는 宋나라(960-1279)의 風習이 조금씩 傳來하다가 睿宗(在位 1105-1122) 때에 宋나라 徽宗(在位 1100-1125)李 道士 두 名을 보내어 圖法을 傳하였고, 이에 高麗에서는 開城(開城)의 北쪽에 復元館(福源觀)이라는 導管(道觀)을 세워 三淸象(三淸像)을 모시고 道士(道士)를 두었다. 그러나 道敎는 國家 中心의 道敎 意識에 그치고 一般 民衆의 宗敎的 發展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고, 성신(星辰)에 對한 信仰, 符籍(符籍)의 使用, 更新(庚申)을 지키는 것 等이 大衆化되었다. 道敎에서 行하는 祭祀 및 祈禱 儀式을 再醮(齋醮)라고 하는데, 高麗에서는 淨事色(淨事色)이란 마을이 있어서 여기에서 再醮가 行해졌다.

儒敎 [ 編輯 ]

太祖十訓要 의 끝部分에 보이는 바와 같이 高麗의 儒敎는 主로 統治理念으로서의 側面이 剛했다. 慶事(經史)를 널리 보고, 後代의 王들에게 어진 政治를 베풀 것을 遺言으로 남겼다. 書經 (西京)에 學校를 세운 것도 儒敎를 理念으로 人材를 敎育한 것이라 할 수 있다.

第6代 成宗 때에 이르러서는 國子監 (國子監)을 세우고 經學博士를 두었으며, 최승로 의 進言에 따라 國政을 刷新하였다. 第4代 光宗 때부터는 過去 를 施行함으로써 글을 崇尙하는 風習이 일어났으나, 社長媤父(詞章詩賦)에 關한 製述(製述, 詩나 글을 짓는 일)을 明鏡(明經, 經書의 대목을 외는 일)보다 置重함으로써 經學의 硏究는 微弱한 狀態였다. 그 後 11代 文宗 때에는 崔沖 의 九齋(九齋)를 비롯한 私立 學校가 盛行하여 이른바 十二徒(十二徒)가 일어나고, 警査(經史)를 中心으로 硏究하는 學風이 생겼다. 그러나 崔沖 以後 200餘 年間 儒敎는 不振한 狀態였고, 大部分이 詩部(詩賦)를 爲主로 한 文章學에만 置重하였다. 當時에는 油價(儒家)라 해도 純粹하게 留學만 硏究한 것이 아니라, 中國에 있어서 唐나라 時代의 傾向과 같이 有·佛道가 混合된 狀態였다. 그리하여 高麗末에 이르러, 建國 以來 겪어온 混亂과 文化的인 沈滯를 打開할 수 있는 새로운 改革이 要請되었고, 이에 副應하여 일어난 것이 곧 儒敎의 革新 運動이다. 1289年 ( 충렬왕 15) 때에 安珦 (安珦)李 忠烈王을 따라 臺도 에 들어가 《 주자전서 (朱子全書)》를 入手하고 돌아온 後 政府에 建議하여 國學을 세우게 하고 文廟(文廟)를 重修하게 하는 等 留學 復興에 큰 功績을 남겼다. [34] [35]

性理學 이란 中國에서 한·黨(漢唐)의 도불時代(道佛時代)를 거쳐 그것에 對抗하여 새롭게 組織·編成된 儒學의 理論 體系였다. 當時로서는 새롭고 合理的이며, 强한 自主精神을 가진 性理學 은 새로운 氣風을 일으키게 되었다. 安珦 (安珦)의 文廟個數(文廟改修)와 走者서(朱子書) 最初로 導入하였고 後進의 敎育이 發興하여 成均館 을 中心으로 백이정 · 禹倬 (禹倬)· 權府 (權簿)와 같은 儒學者를 내었는데, 백이정은 이 程朱學을 硏究하고, 禹倬은 이때 들어온 井州(程朱)의 逆轉(易傳)을 硏究하여 高麗에서 처음으로 驛吏(易理)의 學問을 傳播하였으며, 權府는 《주자전서》의 刊行을 建議하는 等 모두 程朱學 振興에 功勞가 컸다. 安享의 學問은 이제현 · 異色 에 이어 정몽주 · 정도전 ·倦勤(權近)과 같은 士類(士類)를 輩出하였다. 그 中 鄭夢周는 性理學에 精通할 뿐만 아니라 道德과 經綸에서도 一家를 이루어 高麗王朝의 마지막을 裝飾하는 忠臣으로 “東方 理學(理學)의 時調”라 불린다. 그러나 現在 《圃隱集(圃隱集)》에는 若干의 詩文(詩文)뿐 留學에 關한 記錄이 남아 있지 않다. 한便 李穡의 弟子인 이숭인 도 鄭夢周와 함께 태학 敎授로서 留學이 興하고 蕃盛하도록 힘을 기울였으나 그는 儒學者라기보다는 도리어 文學者 特히 詩人으로 有名했다.

性理學 은 人間의 本性과 存在의 原理를 探究하는 深奧한 學問으로서, 從來의 佛敎思想이나 道家思想(道家思想)에서 追求하였던 形而上學 敵 要求를 代身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朱子學 (朱子學)은 外的으로 社會的 制度와 規範의 原理가 되는 것으로서 一種의 批判哲學이며, 歷史哲學의 구실을 하였다.

이슬람敎 [ 編輯 ]

高麗에서 이슬람敎는 主로 高麗人들보다는 外國人들이 많이 믿던 宗敎였다. 當代 高麗 記錄에 따르면 1024年 高麗 顯宗 15年 9月에 下山 라자를 包含한 100餘 名의 무슬림들이 韓半島에 到着했고, 다음 해에 또 다른 100餘 名의 무슬림 商人들이 왔다고 한다. [36] 이슬람 世界와 韓半島 사이의 貿易 關係는 15世紀까지 이어지는 高麗 王朝와 함께 持續되었다. 그 結果, 近洞과 中央아시아에서 온 많은 무슬림 商人들이 高麗에 定着하였다. 中國의 後異族 出身의 一部 무슬림들度 高麗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37]

元 干涉期에는 色目人 들이 高麗로 들어왔는데, 이 集團은 主로 中央아시아 出身의 무슬림들로 構成되었다. 몽골 社會 秩序에서 色目人은 몽골人들 바로 아래의 位置를 차지했고, 元나라 內에서 많은 影響力을 行使했다.

高麗 最初의 무슬림인 라마단 빈 알라웃딘 은 1349年에 死亡했다.

무슬림이 主를 이루는 사람들과의 小規模 接觸은 안팎에서 繼續되었다. 高麗 後期에는 首都인 開京에 모스크 가 있었는데, 이 寺院의 文學的 意味는 '禮弓'이었다.

高麗에 온 移民者들 中 한 名은 元來 高麗의 忠烈王과 結婚하기 위해 보내진 몽골 公主의 補佐官으로서 高麗에 왔다. 高麗 文書의 그의 元來 이름은 "삼가"였지만, 그가 高麗를 永遠한 故鄕으로 만들기로 決定한 後, 王은 그에게 장순룡 이라는 韓國 이름을 주었다. 장순룡은 高麗人과 結婚했고 덕수 張氏 의 始祖가 되었다. [38]

巫俗信仰 [ 編輯 ]

高句麗 를 繼承한 考慮가 存立하던 時代는 하늘 에 對한 祭祀가 다시 重視 된다. [39] 高麗의 國調 界 說話에 坪나산 (平那山) 山神 이 登場하는 것을 비롯하여, 山神이 대단히 重要視되었다. [40]

軍事 [ 編輯 ]

高麗의 軍事 制度는 新羅 의 軍事 體系를 발전시켜 中央軍과 地方軍의 利原 組織으로 나뉘었다. 中央軍은 2軍과 6位로, 地方軍은 兩界의 州鎭軍과 5度의 一般 郡縣에 駐屯하는 郡縣軍으로 이루어졌다.

無關制度로는 2軍과 6位를 두었는데, 2軍은 鷹揚軍 · 龍虎軍 , 6位는 左右衛 · 神虎衛 · 興威衛 · 金吾衛 · 千牛衛 · 監門衛 였다. 各 軍과 位(衛) 아래에는 영(領 : 部隊)李 所屬되었다. 寧殷 1千 名의 正規軍과 6百 名의 亡君정인(望軍丁人 : 豫備兵)으로 構成되었고 都合 45靈이 있었다. 또 軍과 위에는 各各 上將軍 (上將軍)· 大將軍 (大將軍) 1名씩 있었고, 指揮하는 靈의 數에 따라 領마다 將軍 1名, 中郞將 (中郞將) 2名이 있었고, 그 아래 郎將 (?將)·別莊(別將)·山園(散員)·魏(尉)·隊正(隊正) 等 軍官이 配置되었다. 2軍 6位의 上將軍 8名과 大將軍 8名으로 中枋 (重房)을 構成하였으며 重房은 最高級 將星들의 會議 機關이었다. 下級 將校들도 會議機關이 있었으니 이를 敎委房 (校尉房)이라 하였다. 全國의 모든 軍隊는 2軍 6位에 所屬케 하였다.

이 밖에 豫備 群團으로 光軍 (光軍)과 別武班 (別武班)이 있었다. 光軍은 定宗 때에 遼나라 에 對備하기 위해서 30萬을 뽑은 豫備 群團으로 이를 統轄하는 機關을 光軍司 (光軍司)라 하였다. 別武班 肅宗 尹瓘 (尹瓘)의 建議에 따라 餘震 (女眞)에 對備하기 위해서 騎兵을 中心으로 만든 豫備 軍團이다. 全國의 말을 가진 者는 모두 여기 편입시켜 神奇(神騎)라 했고, 20歲 以上의 男子로 過去를 보지 않은 者는 모두 信保(神步)로 編入하였으며, 僧侶들로 降魔軍 (降魔軍)을 組織하였다. 卽 別武班 은 神技와 新譜로 編成되고 傍系로 降魔軍이 여기 屬하였다. 別武班은 正規軍과 같이 4時를 통해서 訓鍊을 받았다. 戰時에 出征하는 軍隊는 오군(五軍 : 境遇에 따라 3軍이 되는 수도 있었다)으로 編成하였는데, 座·右·中·前·後軍(左·右·中·前·後軍)이 그것이다. 吳君이 出征할 때에는 行營都統使 (行營都統使, 또는 行營兵馬使, 國初에는 大番兵馬使)가 總指揮했는데 이들은 重臣(重臣) 가운데서 任命되었다.

王室 [ 編輯 ]

科學 [ 編輯 ]

高麗의 科學 技術은 統一新羅 의 科學 技術을 繼承하고 (宋)· (元)時代의 中國 科學 技術을 이어받아, 貴族文化 속에서 貴族들의 文化的 欲求를 만족시키는 가운데 發展하였다. 高麗의 技術的 發展을 代表하는 印刷術과 高麗靑瓷 는 그러한 貴族 文化의 所産이었다. 天文學 에 있어서는 天體 觀測이 特히 發達하였으며, 그 觀測 記錄은 獨自的이고 正確한 것으로 定評이 있다. 또한 高麗 末에는 火藥을 製造할 줄 알았으며, 朝鮮 技術(造船技術)은 特히 兵船(兵船)에서 뛰어났다. 高麗의 地理的 知識은 從來의 中國 中心에서 벗어나 東洋 中世의 佛敎的 世界觀을 바탕으로 印度 中央아시아 의 이른바 5천축국 (五天竺國)에 걸치는 것이었으며, 아라비아 와 中東地域의 地理的 知識도 가지고 있었다. 高麗의 醫學은 958年 에 始作된 科擧制 (科擧制)에 醫學 部門이 包含되고, 中國의 醫書(醫書)와 高麗人에 依한 < 鄕藥救急方 (鄕藥救急方)> 等의 醫書를 刊行하였다. 그러나 高麗 科學의 學問的인 面에서는 技術 分野에서처럼 特異한 點이 뚜렷하지 않다. 高麗人은 理論的인 새로운 發展은 없었지만, 經驗的이고 實際的인 分野에서는 꾸준히 業績을 쌓아 나갔다. [41]

對外 關係 [ 編輯 ]

吐蕃(吐蕃) [ 編輯 ]

1271年 元宗 12年 몽골에서 온 티베트 僧侶 4名은 高麗가 元나라와 講和條約을 締結한 直後여서 個性의 西쪽 性文人 線疑問 밖까지 나와 맞이하는 王의 歡待를 받는다. [42]

요(遼) [ 編輯 ]

高麗는 開國 以來 中國 (梁)· (唐)· (晋)· (漢)· (周)의 5代祖와 國交를 맺었는데, 그 뒤 中國을 統一한 宋나라 와도 外交關係를 맺고 있었다. 이것은 新羅 와 中國과의 關係를 繼承한 것으로, 高麗도 中國의 文物에 對해서는 慕華思想 (慕華思想)의 傾向이 많았다. 따라서 오랑캐 나라인 遼나라 ( 거란 )와는 單純한 國交조차 맺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遼나라의 成宗 (聖宗)은 鴨綠江 下流의 餘震 (女眞)을 征服, 또 985年 그 中流에 있던 渤海 (渤海)의 後身인 定安國 을 멸망시킨 後 여진과 宋나라와의 關係를 끊게 하고, 993年 에는 高麗와 宋나라의 關係도 끊기 위해 高麗의 領土 서북면(西北面)에 쳐들어왔다. 이에 高麗는 事大의 關係를 宋나라로부터 遼나라에 옮겨서 遼나라 皇帝의 精靈을 받는 代身 鴨綠江 東쪽의 餘震이 차지하고 있던 땅을 所有하게 되었다. 高麗와 兩國과의 政治的인 關係는 이로써 一大 轉換을 하게 된 것이다.

10餘 年 後에 高麗의 穆宗 이 被殺되고 顯宗이 卽位하자 遼나라 成宗은 大軍을 거느리고 高麗에 侵入하여 서울인 開京(開京)을 陷落시키는 한便 大廟·宮闕(大廟宮闕)을 불태워 버렸다. 쳐들어온 理由는 王을 마음대로 廢하고 세운 罪를 묻기 위한 것이었으나, 亂을 南쪽으로 避했던 현종이 約束을 履行하지 않자 成宗은 앞서 高麗에 주었던 江東6週 (江東六州)의 返還을 핑계로 삼아 1019年 ( 顯宗 10)에 이르기까지 前後 3次에 걸쳐 高麗에 侵入해 왔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고 軍士를 撤收하였다. 이리하여 두 나라 사이에는 그 뒤 平穩한 國交가 繼續되었다. 다만 第一 처음 싸움을 할 때 江東(江東)에 設置한 보주(保州 : 只今의 義州 )는 그 後도 長期間 遼나라의 所有가 되어 이로 인해 些少한 싸움이 끊임없이 繼續되었다.

金(金) [ 編輯 ]

高麗는 開國 初期부터 北邊에 女眞族 이라는 異民族과 接境하고 있었고 여진은 渤海時代의 말갈(靺鞨)로서, 渤海가 滅亡한 뒤는 西쪽의 遼나라에게 威脅과 牽制를 받으며 수많은 不足(部族)으로 나누어져서 滿洲 및 韓半島 北邊 一部에 살고 있었으나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統一도 없었다. 韓半島 北邊에서도 東海 海岸에서는 咸興平野가 가장 重要한 地域으로서 여기에는 大小의 많은 餘震部落이 흩어져 있었고, 그들 中에는 有力한 酋長들度 많았다.

高麗는 太祖 때부터 貨主에 變成(邊城)을 두었으며, 成宗 以後는 安邊都護府(安邊都護府)라 하고 變更 밖의 女眞을 宣撫하고 牽制하는 데 힘썼고, 特히 密接한 關係가 있었던 것은 함관령(咸關嶺) 안에 있던 餘震이었다. 그러므로 그 여러 酋長들은 어느 程度까지는 高麗에 服從하고 物質的인 利益을 얻고자 자주 朝貢(朝貢)하였으나 그와 同時에 外敵이 되어 때때로 變更에 侵犯하였다. 鴨綠江 下流에서 東海에 이르는 將星(長城)의 一部로서, 只今의 定評(定平)에다 堅固한 城을 쌓은 것도 그들을 防禦하기 위한 것이었다. 成宗에서 文宗 代에 걸쳐 海賊으로서 東海岸을 橫行하고 해마다 北쪽은 永興灣(永興灣)의 진명(鎭溟)에서 慶尙道 蔚山에 이르는 各 地方을 掠奪하는 한便 東海를 건너 멀리 日本까지 侵犯하였던 度移籍(刀伊賊)도 亦是 같은 地方의 餘震이었다. 如何間에 文宗·腺腫 代의 曷懶甸(曷懶甸)이라 불리던 이 地方의 餘震은 거의 高麗에 服從하고 있었다.

그러나 肅宗 條에 이르러 萬株의 情勢는 一變하여 北滿洲 我執下(阿什河)를 本據地로 하는 生女眞(生女眞)의 완안氏(完顔氏)는 周圍의 여러 部族을 統一한 뒤 豆滿江 下流 流域으로 進出하여 그곳 餘震을 이끌고 또다시 南下, 曷懶甸의 餘震을 勢力圈 內에 넣었다. 그 다음에는 정평성 밖에서 高麗와 衝突하고 두 次例에 걸쳐 高麗의 軍士를 무찔렀다. 이에 高麗는 曷懶甸을 高麗의 領土로 하고자 睿宗 初期, 尹瓘(尹瓘)을 主張(主將)으로 한 有名한 9星 (九城)의 싸움을 일으켰다. 그러나 軍事를 보낸 지 1年 半이 지나도 완安氏의 軍士를 完全히 몰아내지 못하게 되어 완안氏와 交涉한 結果, 그들의 完全 服從을 條件으로 誠意 抛棄와 曷懶甸의 全 地域을 완안氏에게 돌려주고 돌아왔다.

그 後 곧 완安氏의 鴉鶻다(阿骨打)는 遼나라에 謀反하고 軍士를 일으켜 國號를 金(金) 이라 定한 뒤 1115 (睿宗 10)에는 考慮에 對하여 兄弟의 나라로 國交를 맺도록 하였다. 高麗는 처음에 遼나라 年號를 中止하고 그 뒤로는 形勢를 觀望하면서 宋나라와 친밀히 지냈다. 1126年 (人種 4) 金나라가 이미 遼나라를 멸망시키자 高麗에서는 金나라의 精靈을 받기로 하였으나 그 態度는 金나라의 要望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또한 高麗의 臣下들 사이에는 金나라를 섬겨야 된다는 一派와의 葛藤이 있는 한便 高麗를 援助하려는 宋나라의 熱望도 있었고, 當時의 國際關係도 대단히 複雜하였으나 高麗는 1131年 (人種 9) 結局 金나라에 服從하여 그 代價로 오랫동안 갈망하던 補註를 다시 찾아와서 이것을 義州라고 改稱하였다. 이와 같이하여 極히 必要한 事大關係는 金나라가 沒落할 때까지 繼續되는 한便, 政治性을 떠난 南宋(南宋)과의 交涉도 끊어지지 않았다.

원(元) [ 編輯 ]

13世紀 몽골 의 太祖 칭기즈칸 이 金나라 征伐의 싸움을 일으키자, 滿洲 特히 요동地方의 情勢는 混亂에 빠지고 그 影響은 곧 高麗에 미치게 되었다. 야율류가에 引率되어 재빨리 金나라에 謀反하였던 遼나라 사람들이 그 後 그들끼리의 紛爭으로 搖動地方에서 쫓겨나서 高麗에 侵入하여 前後 3年 동안 慶尙道·忠淸道·全羅道 地方을 除外한 北方 一帶를 蹂躪하였다.

日本 [ 編輯 ]

1367年인 공민왕 16年 考慮가 두名의 天皇이 存在하는 南北朝 時代 日本에 使臣을 보내 倭寇의 侵略의 禁止를 要求한다. [43] 북조 의 調整은 高麗가 日本의 臣下된 나라인데 無禮하다며 退字를 놓은 反面에, 교토 아시카가 幕府 海賊 들의 行動이며 禁止할 對策을 마련하겠다는 答書를 傳達한다. [43]

류큐國 [ 編輯 ]

1389年 공양왕 1年 8月 류큐國 은 倭寇에게 붙잡혔던 高麗人을 高麗로 돌려보낸다. [44]

대월국 [ 編輯 ]

王朝가 沒落後 쩐 王朝 대월국 리 王朝 를 거의 沒殺시켰다. [45] 리 太祖의 7代 王子 이용상 은 가까스로 도망쳐서 고려국에 오게 되었는데, [45] 高麗 高宗 은 王子에게 食邑을 내리고 火山群으로 봉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內容主 [ 編輯 ]

  1. 文魚
  2. 太史(太師)·太傅(太傅)·太保(太保)
  3. 太尉(太尉)·사도(司徒)·沙工(司空)
  4. 또는 2部
  5. 初期에는 內의(內議) 또는 內査(內史)
  6. 成宗 때는 尙書都省
  7. 처음에는 內議令 또는 內史令
  8. 後에 樞密院
  9. 後에 春秋館
  10. 國初에는 內書省
  11. 처음에는 崇文館
  12. 後에 典醫寺
  13. 後에 前옥시
  14. 後에 典客寺

參照週 [ 編輯 ]

  1.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000
  2. 몽골은 왜 高麗를 멸망시키지 않았나, 김운회, 2015
  3. “歷代 國史敎科書 > 4次 敎育課程 > 中學校 國史(上) > Ⅳ. 高麗 時代의 生活 > 2. 高麗 前期의 對外 關係” . 《우리歷史넷》.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2月 22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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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Laet, Sigfried J. de (1994). 《History of Humanity: From the seventh to the sixteenth century》 . UNESCO. 1133쪽. ISBN   978-92-3-102813-7 . 2016年 11月 8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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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네이버 知識百科] 朝鮮 性理學 [朝鮮性理學] (哲學辭典, 2009., 임석진 外 多數 共著 ) ......朱子學으로서의 性理學은 우리나라에 高麗 末 忠烈王(忠烈王) 때 元나라로부터 安珦(安珦)에 依해 傳來되었다. 안향은 1289年(忠烈王 15年)에 元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베끼고, 孔子ㆍ朱子의 賞(像)을 그려 가지고 왔다...(중략)....고려 末의 性理學은 成均館을 中心으로 安珦ㆍ백이정(白正)ㆍ權府(權溥)ㆍ異色(李穡)ㆍ정몽주(鄭夢周)ㆍ吉再(吉再) 等에 依해서 繼承되었다.
  35. [네이버 知識百科] 安珦(안자) [安珦(安子)]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 ......1289年 2月 征東行省(征東行省)의 員外郞(員外?)에 除授되었으며, 얼마 뒤 左右司郎中(左右司?中)李 되고, 또 高麗留學除去(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그 해 11月 王과 公主(元나라 公主로서 當時 高麗의 王后)를 扈從하여 元나라에 가서 走者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孔子와 朱子의 畫像(畵像)을 그려 가지고 이듬 해 돌아왔다.
  36. Haque, Dr Mozammel (2011年 2月 3日). “Islamic Monitor: Islam and Muslims in Korea” . 《islamicmonitor.blogspot.com》.  
  37. Keith Pratt, Richard Rutt, James Hoare (1999). 《Korea: A Historical and Cultural Dictionary》. Routledge . 189쪽. ISBN   0-7007-0464-7 .  
  38. Grayson, James Huntley (2002). 《Korea: A Religious History》. Routledge . 195쪽. ISBN   0-7007-1605-X .  
  39. 김도현 (2008年 11月). “太白山 天祭의 歷史와 祭儀 樣相” . 《告天文 워크숍 論文集》 (韓國天文硏究院 告天文硏究센터) 2 : 32?67.  
  40. “新編 韓國史 > 高麗 時代 > 16卷 高麗 前期의 宗敎와 思想 > Ⅲ. 道敎 및 風水地理·圖讖思想 > 3. 民俗宗敎 > 2) 民俗宗敎의 神 觀念” . 《우리歷史넷》. 國史編纂委員會 . 2023年 12月 19日에 確認함 .  
  41.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 〈高麗時代의 科學技術〉
  42. 김수연 (2017). “원 干涉期 高麗 王室의 티베트佛敎 受容과 密敎儀禮의 擴散” . 《이화사學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사學硏究所) 54 : 1?31. doi : 10.37091/ewhist.2017..54.001 .  
  43. “高麗-日, 오랫동안 끊긴 外交를 倭寇 탓에 再開” . 한겨레新聞. 2011年 12月 23日.  
  44. 《高麗史節要》 卷33 공양왕1 공양왕1年 8月 유구국에서 使者를 보내 問安하다
  45. “베트남 첫 王朝의 後孫이 韓國에 산다?…베트남 觀光大使 된 王손” . KBS. 2022年 11月 26日.  

外部 링크 [ 編輯 ]

韓國 의 歷史
以前 時代 고려 高麗
918年~1392年
다음 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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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百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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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一新羅
배론 朝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