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瓘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尹瓘
尹瓘
永平縣 個國백
1910년 무렵 만들어진 윤관 초상
1910年 무렵 만들어진 尹瓘 肖像
이름
管(瓘)
同縣(同玄),
시호 聞慶(文敬), 門塾共(文肅公)
身上情報
出生日 1040年 7月 12日(陰曆 6月 1日)
出生地 高麗 楊廣道 파평縣 (坡平縣)
(現 大韓民國 京畿道 坡州市 )
死亡日 1111年 6月 15日 (陰曆 5月 8日)
死亡地 高麗 開京
國籍 高麗
性別 男性
學歷 文宗 때에 文科 에 及第
家門 坡平 尹氏
父母 檢校小部所感 윤집형 (簿)
軍事 經歷
服務 高麗軍
最終階級 동북면 行營都統, 平章事, 여진 征伐軍 怨讐
指揮 高麗 陸軍

尹瓘 (尹瓘, 1040年 7月 12日 ( 陰曆 6月 1日 ) ~ 1111年 6月 15日 ( 陰曆 5月 8日 [1] ))은 高麗 중기의 文身 · 軍人 이다. 肅宗 , 睿宗 女眞族 討伐에 出征하였다. 本貫은 坡平 , 字는 同縣(同玄) [2] , 諡號는 문숙(文肅)이다. 처음 諡號는 聞慶(文敬)이었으나 뒤에 문숙(文肅)으로 開始되었다. 坡平 尹氏 의 始祖 삼한功臣(三韓功臣) '윤신달'(尹莘達)의 4代孫으로, 아버지 윤집형(尹執衡)은 檢校小部所感(檢校少府少監)을 지냈다. 어머니에 對한 記錄은 없다. 女眞族 을 몰아내고 北進 政策 을 完遂한 공으로 영평(파평)百에 봉해져 後孫들이 本館을 파평으로 하였다.

肅宗 때 2次 女眞族 討伐 當時는 怨讐로 出廷하였으나 失敗, 講和會談을 하고 되돌아왔다. 以後 特殊 部隊 別武班 을 創設하여 오연총 과 함께 兵力을 訓鍊, 1107年 ( 睿宗 2年) 3次 討伐 때 大元帥 에 任命되어 別武班 을 이끌고 餘震 征伐軍의 怨讐(元帥)가 되어 副元帥 오연총 (吳延寵)과 척준경 , 왕자지 , 오연총 等과 함께 17萬 大軍을 거느리고 女眞族을 討伐한 뒤, 北方에 9城을 쌓고, 女眞族이 재침략하자 이를 鎭壓하고 1108年 (睿宗 3年) 改善하였다. 女眞族 을 北方으로 몰아내고 東北 9城을 攻略하였으며 北方을 防備하는데 寄與하였다.

그러나 女眞族 의 東北9星 返還 要請이 있자 그는 反對하였으나 高麗 調整은 和議論을 主張하여 9城을 되돌려주었고, 1109年 길走性에서의 敗戰을 理由로 한때 공信號를 박탈당하고 해임당하였으나 睿宗 의 特別 配慮로 復職하였다. 坡平 尹氏 의 中始祖이다. 아들은 윤언이 이고, 충혜왕 의 丈人 윤계종 은 윤관의 7代孫이었다. 南原 尹氏 咸安 尹氏 亦是 그의 後孫이었다. 廢妃 尹氏는 윤관의 11代孫이 된다. 文科 에 及第하여 官職은 受胎步 門下侍中 에 이르렀으며, 軍人으로 알려져 있으나 文科에 及第한 文身이었다.

生涯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윤관은 1040年 陰曆 6月 1日 京畿道 坡州郡 파평縣(坡平縣)에서 檢校小部所感(檢校少府少監) 윤집형의 아들로 出生하였다.

윤관의 아버지 윤집형은 삼한功臣(三韓功臣) 윤신달의 曾孫子로 벼슬은 檢校小部所感을 지냈다. [3] 그의 家計는 高麗 삼한功臣 윤신달의 後孫으로 윤신달 以前의 家計는 未詳이다. 그가 功臣이 되고 名將으로 이름을 날렸기에 그를 中心으로 高祖父까지만 記錄된 것으로 傳한다.

否認 慶源 李氏 는 異性間(李成幹)의 딸로, 膝下에 윤언이(尹彦?)·윤언순(尹彦純)·윤언식(尹彦植)·윤언이(尹彦?)·윤언민(尹彦旼)을 두었으며, 이 中 두 사람은 僧侶가 되었다.

윤언이는 『高麗史(高麗史)』에 列傳이 收錄되었고, 윤언순은 睿宗(睿宗) 때 侍御史(侍御史)를 거쳐 南原府使(南原府使)에 이르렀으며, 윤언식은 타고난 資質이 高尙하고 優雅하여 賓客을 좋아하였는데, 벼슬은 수사공 左僕射(守司空 左僕射)에 이르렀다. 윤언민은 다른 사람보다 총명하고 書畫(書晝)를 잘하였으며, 仁宗(仁宗) 때에 常識奉御(尙食奉御)가 되었다. 이와 같이 그의 家門은 相當히 蕃盛하여, 以後 王室과 婚姻을 하는 等 當代의 名門으로 거듭났다.

初期 官職 生活 [ 編輯 ]

科擧 及第와 官僚生活 初盤 [ 編輯 ]

윤관은 文宗 때에 文科 에 及第하여 拾遺(拾遺)· 補闕(補闕) 等을 지냈고, 1087年(禪宗 4) 闔門至厚(閤門祗候)가 되었다. 그해 闔門至厚로서 出秋史(出推使)가 되어 光州(廣州), 忠州, 淸州를 視察하고 되돌아왔다.

1095年(肅宗 卽位) 左司郎中(佐司郞中)이 되었으며, 그해 肅宗 (肅宗)이 卽位하자 바로 兄夫豺狼 任意(任懿)와 함께 國信寺(國信使)로 遼나라에 使節로 派遣되어 肅宗의 卽位를 알렸다. 1098年(肅宗 3) 中書舍人(中書舍人)을 거쳐 東宮詩學사(東宮侍學士)가 되었으며, 東宮詩學사로 在職 中 條規(趙珪)와 함께 宋나라 에 다시 使節團으로 派遣되어 肅宗의 卽位를 알리고 歸國하였다.

1099年 右諫議大夫·翰林侍講學士(右諫議大夫翰林侍講學士)가 되었으나 當時 左諫議大夫(左諫議大夫) 任意 와 姻戚이어서 諫院(諫院)인 御史臺(御史臺)에 같이 있을 수 없다는 中書省(中書省)의 建議로 따라 스스로 물러났다. 1101年 樞密院知州事(樞密院知奏事)가 되었고, 9月에 南京開創圖鑑을 設置되자, 平章事(平章事) 최사추 (崔思諏)等과 洋酒에 派遣退어 宮闕터를 物色하는 等 南京建設事業을 活潑히 推進했다. 그리하여 1104年 5月 只今의 서울地域에 남勁弓(南京宮)을 建設되었다.

1102年 知貢擧(知貢擧)가 되어 이굉(李宏) 等과 함께 進士試驗(進士試驗)을 主管했고, 이어 御史大夫, 樞密院副使 等을 지냈다. 1103年 吏部尙書(吏部尙書) 兼 東知樞密院事(同知樞密院事)를 거쳐 知樞密院事 兼 翰林學士承旨(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에 올랐다.

改革 政策 [ 編輯 ]

肅宗 때에 여러 벼슬을 지내고 東宮侍講· 御史大夫 ·吏部尙書·翰林學士 承旨 等을 지냈다. [4]

肅宗 在位期間 中 그는 大覺國師 義天 과 함께 肅宗의 側近으로 活動하였다. 同時에 義天 과 함께 是正改革을 擔當하여 王權을 强化하기 위해 南京 建設, 金屬貨幣 流通責 實施와 神法(新法)을 制定, 實施했다. 또 旣存의 豪族들을 抑壓하고 過去 試驗과 推薦制로 新進 官僚들을 選拔하였다.

高麗의 동북면과 連結된 曷懶甸(曷懶甸) 一帶에 居住하던 女眞 部族들은 高麗의 國境地帶를 往來하며 그들의 土産物을 不足한 生必品과 貿易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 部落의 酋長들 中 一部는 高麗 를 宗主國으로 삼고 立朝하였는데, 高麗는 그들 酋長들에게 武散階(武散階)나 鄕職(鄕職)을 주어 懷柔하기도 하고, 投降해오는 女眞族에게는 投化田(投化田)을 주어 定着時키祈禱 했다. 肅宗 卽位 初, 그는 女眞族 酋長들을 만나 王의 代理人으로서 女眞族 酋長들에게 官職을 하사하고 酋長들을 面談하였다. 그러나 女眞族 酋長들은 1106年 을 전후해 우야소 (烏雅束)를 中心으로 統一部落을 建設하면서 高麗 를 攻擊할 計劃을 세운다. [5]

1103年(肅宗 8)에 우야소의 勢力은 咸興附近까지 들어와 駐屯하게 되었다. 高麗軍과 우야소의 餘震軍은 衝突 直前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完顔部의 騎兵이 정주관(定州關) 밖에 쳐들어오게 되었다. 1103年 頃부터 女眞族 征伐 輿論이 나오면서 女眞族을 討伐해야 된다는 立場을 固守하였다. 肅宗代 後半에 提起되는 餘震征伐論에는 女眞族의 興起와 高麗 동북면 侵入이라는 客觀的 情勢 變化 外에 國內의 政治狀況도 한 要因으로 作用했다.

女眞族 征伐 [ 編輯 ]

別武班 組織과 3次 女眞族 討伐戰爭 [ 編輯 ]

副元帥 오연총 , 여러番 그의 副官으로 女眞族 討伐에 參與하였고, 査頓間이기도 했다.

1107年 ( 睿宗 2年)에 女眞族의 動態가 尋常하지 않다는 한 邊將(邊將)의 緊急報告를 接하자 女眞族 討伐을 奏請하였다. 이에 王命으로 여진 征伐軍의 怨讐(元帥)가 되어 別武班 이라는 特殊 部隊를 이끌고 副元帥에 任命된 知樞密院事 오연총 (吳延寵)과 17萬 大軍을 거느리고 女眞族 征伐에 出征하였다. 當時 女眞族은 우리 나라 東北部에서 滿洲에 걸쳐 살면서 北部 國境地帶인 咸興 地方을 威脅하자 高麗의 北進 政策에 逆行이 되었던 女眞族을 掃蕩하려고 出征하였으나 累次 失敗하고 心慮 끝에 그 原因이 女眞族의 騎兵임을 깨닫고 王命을 받아 윤관은 오연총과 特殊部隊 17萬을 거느리고 여진村落 135個를 쳐서 砲로 1030名, 射殺 4940名 等 큰 功을 세웠다.

1107年 12月 怨讐가 되어 오연총(吳延寵)과 17萬 名의 軍士를 中·左·右의 3軍으로 編成했으며 水軍(水軍)까지 動員해 餘震征伐에 나섰다. 高麗軍은 一擧에 쳐들어가 女眞族을 쫓아내고 9城을 쌓았다. 처음 女眞族 을 攻擊하는 척 하다가 後退한 뒤, 餘震酋長에게 使者를 보내 高麗가 앞서 잡아둔 女眞族 許政(許貞)·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내겠다고 거짓通報를 하자, 女眞族 酋長은 400餘名의 護送 兵力을 보내왔는데, 이때 윤관과 오연총 은 이들을 誘引하여 거의 殲滅시키고 사로잡았다. 이들을 미끼로 女眞族을 誘引하게 하고, 以後 윤관은 따로 5萬3,000名을 編成하여 거느리고 井州 에 到着한 뒤 中軍(中軍)은 김한충 (金漢忠), 左軍(左軍)은 文官(文冠), 友軍(右軍)은 김덕진(金德珍)으로 하여금 軍士를 指揮하게 하였으며, 水軍(水軍)은 腺病別監(船兵別監) 양유송(梁惟) 等이 2,600名으로 도린抛(都鱗浦)의 바다로부터 攻擊하였다.

尹官軍의 奇襲攻擊에 눌린 餘震이 退却하여 東音聲(冬音城)으로 숨자 精銳部隊를 編成하여 追擊, 女眞族이 再起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擊破하였으며, 다른 餘震軍이 숨은 石城(石城)은 척준경 (拓俊京)을 시켜 攻擊, 敗走하게 하여 殲滅하였다.

勝戰과 東北9星 收縮 [ 編輯 ]

척頃입費도(拓境立碑圖)

女眞族 의 戰略的인 據點을 무찌른 곳은 135個處, 敵의 戰死者 4,940名, 砲로 130名을 生捕하였다. 以後 調整에 傳承의 報告를 올리고 奪還한 各地에 長壽를 보내 國土를 劃定하고 오연총 과 함께 9星의 築造를 監督하였다. 現在 9星의 確實한 位置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흔히 함주(咸州)·榮州(英州)·雄株(雄州)·吉州(吉州)·伏誅(福州)·공험진(公鎭)·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으로 比定되고 있다. 學者에 따라서는 진양진·숭녕진 代身 義州(宜州)·坪戎陣(平戎鎭)을 꼽기도 한다. 윤관은 南쪽地方의 民戶(民戶)를 이곳으로 옮겨 살게 했다. 〈高麗史〉 윤관전에 記錄되어 있는 榮州청壁機(英州廳壁記)에 依하면 當時 移住한 家口의 數는 함주·榮州·雄株·吉州·伏誅·공험진에 兵民(兵民) 6,466정호(丁戶)였다.

9城을 쌓은 뒤 睿宗 에게 建議하여 南쪽으로부터 百姓을 이주시켜 南道地方의 移住民들이 이곳을 開拓하여 살게 되었다. [6] 南道의 移住民으로 6城을 쌓은 뒤 別途의 軍隊를 編成하여 지키게 하였고, 이 6星 外에 1108年 初 숭녕(崇寧)·痛胎(通泰)·진양(眞陽)의 3星의 收縮을 命하여 監督, 9城을 設置하였다.

特히 咸興平野의 함주에 大都督府(大都督府)를 두어 이곳이 가장 要衝이 되었다. 9城을 完工한 뒤 再侵하는 餘震을 平定하고 1108年 (睿宗 3年) 出發, 回軍하였다. 오연총 과 함께 9個의 城壁을 쌓아 國境을 튼튼하게 하고 改善하자 睿宗 은 그와 오연총 에게 공信號를 내렸다. 女眞族 을 몰아내고 北進 政策 을 完遂한 공으로 영평(파평)百에 봉해져 後孫들이 本館을 파평으로 하였다. 그러나 高麗가 9城을 開拓하게 되자 그곳을 根據地로 雄據하던 完顔部의 우야소 는 反撥하여 1108年初에 軍士를 이끌고 咸鏡北道 地域을 재침략하여 正面對決을 하게 된다.

4次 女眞族 討伐 戰爭 [ 編輯 ]

그러나 女眞族은 다시 變更을 쳐들어왔고, 1108年 (高麗 睿宗 3年) 1月 오연총 , 척준경 , 왕자지 等과 함께 別武班을 이끌고 다시 出征하였다. 그러나 街閑村(加漢村) 戰鬪 中 險曲에서 윤관은 오연총 과 함께 女眞族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척준경 (拓後京)李 後發隊를 이끌고 急襲하여 救出되었다.

領主城 攻掠에서는 왕자지 가 이끄는 軍隊가 敗退하였으나 亦是 척준경 의 勇猛과 基地로써 왕자지 를 救出하고 餘震君을 겨우 물리치게 되었다. 그는 肅宗代 王權强化施策의 한 周易이었고, 睿宗 卽位 初期의 政策 遂行과 餘震征伐 推進에서도 中心勢力으로 活躍했다. 그러나 우야소 는 다시 餘震群 數萬名을 이끌고 쳐들어와 熊州城을 包圍하였다. 亦是 척준경 의 智略과 勇氣로써 敵을 敗走시켰다. 1108年 3月 30日 砲로 346名, 말 96匹, 소 300豆를 鹵獲하여 捕虜와 戰利品을 가지고 開京으로 改善하여 秋충좌리坪융 척地震局功臣(推忠佐理平戎 拓地鎭國功臣)에 책록되고, 門下侍中 (門下侍中) 兼 判尙書吏部事 지軍國中士(判尙書吏部事 知軍國重事)에 任命되었다. 이어 永平縣蓋國白(鈴平縣開國伯) 食邑(食邑) 2,000號, 式實封(食實封) 300號에 封해졌다.

生涯 後半 [ 編輯 ]

女眞族과의 花煎과 東北9星 返還 [ 編輯 ]

尹瓘 將軍 影幀 ( 朝鮮 時代에 製作)

한便, 윤관이 睿宗에게 信任을 받는 것을 否定的으로 보던 官吏들이 윤관을 誹謗하였으나 王이 듣지 않았다. 高麗의 征伐과 9星 設置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女眞族은 完顔部를 中心으로 모여 武力抗爭을 繼續하였고, 使者를 보내 9城을 돌려주고 生業을 便安히 해주면 子孫 代代로 배반하지 않고 朝貢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9城을 되돌려달라고 哀乞하였다. 이에 一部 主和派들은 9城을 되돌려주자고 主張하였고, 윤관과 오연총은 9城을 지킬 것을 主張하였으나 當時 高麗는 女眞族의 攻勢 앞에 9城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形便이었다. 또 9星 사이의 距離가 너무 멀어 지키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無理한 軍事動員으로 百姓들의 怨望이 일어나서 朝廷에서도 火評論이 大勢를 이루게 되었다.

西쪽에 强力한 遼나라와 接境하고 있던 餘震은 高麗와 平和를 回復하는 것이 매우 必要하게 되었으나, 윤관의 9星 築造와 農業移住民으로 말미암아 農耕地를 빼앗긴 土着 女眞族으로서는 强力히 反撥할 수 밖에 없었다. [7]

드디어 餘震은 積極的인 强化交涉을 開始하였으며 7月 3日 睿宗 은 六腑를 召集, 會議를 열고 9城을 동여진 우야소 에 되돌여주는 것을 論議하기에 이르렀다. 平章事 최홍사(崔弘嗣) 等 28名은 贊成하고, 윤관과 오연총 , 禮部郎中(禮部?中) 한床(韓相)은 反對하였으나 當時 朝廷은 和平으로 기울어 있었고, 結局 9城을 女眞族에게 돌려주기로 決定하고 7月 18日부터 9星에서 撤收하기 始作했다.

뒤에 金나라 太祖 阿骨打 (阿骨打)가 金나라 를 세워 强大한 國家가 된 基盤에는 그들이 9城을 다시 되찾은 데 그 原因이 있었다 [7] [8] 고 보는 視角도 있다.

공信號 削奪과 生涯 末年 [ 編輯 ]

1109年 5月 길走性이 女眞族에게 陷落될 危機에 處하자 冬季病魔副元帥(東界兵馬副元帥) 오연총 과 함께 出征하였다. 그러나 길走性을 包圍한 女眞族을 다시 치려다가 공험진에서 奇襲攻擊을 當하고 攻掠에 失敗, 和親을 맺고 돌아왔다. 11月 女眞族 의 繼續된 侵犯을 막지 못한 責任으로 宰相 최홍사(崔弘嗣) 等의 彈劾을 받아 한때 官職과 功臣의 資格이 剝奪되고 罷免되었다. 名分 없는 戰爭으로 國力을 蕩盡했다 하여 處罰하자는 主張도 擡頭되었다. 回軍해서는 王을 만나지도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肅宗代를 이어 隸從대에도 王權强化를 위한 政策을 忠實히 遂行한 政治勢力이었으므로, 흔히 悖君한 장수가 永久히 官職을 삭탈당하는 것과는 달리 睿宗의 特別 配慮로 다시 復職하였다.

睿宗 5年( 1110年 ) 復官되었고, 오히려 睿宗은 윤관에게 門下侍郞 平章事를 주고 가까이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윤관은 나이가 많고,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곧 辭職했고, 그 뒤 讀書 에 沒入하던 中 그 해 受胎步 門下侍中 (守太保門下侍中) 兼 判兵部事 上柱國 監修國史(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任命되자 윤관은 表文을 올려 辭職을 請하였으나 睿宗은 許諾하지 않았다. 윤관이 다시 辭退하려 하였으나 睿宗 은 亦是 받아들이지 않았다. 1111年 享年 72歲로 世上을 떠났다고 한다.

事後 [ 編輯 ]

諡號는 문숙(文肅)이다. 諡號는 當初에 聞慶(文敬)이었으나 人種 때 聞慶왕태후(文敬王太后)로 追尊 된 睿宗 비의 揮毫를 避하기 爲해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1130年 ( 人種 8年) 睿宗 의 卯正(廟廷)에 配享되었다. [9] 事後 巫俗 에서 神으로 崇拜되기도 했다. 墓는 京畿道 坡州郡 광탄면(現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윤관의 墓는 史跡 第323號로 指定되었다.

尹瓘 將軍 墓를 둘러싼 山訟 [ 編輯 ]

京畿道 坡州市 광탄면 분수리 산 4-1에 位置한 尹瓘 將軍 墓域(史跡 第323號)은 朝鮮時代 부터 400餘 年 동안 繼續된 山訟 으로도 有名하다.

1614年 領議政 을 지낸 심지원 이 尹瓘 將軍 墓를 파헤치고 父親 等 一家의 墓를 잇따라 造成하자, 이에 反撥한 坡平 尹氏가 1763年 에 심지원의 墓 一部를 파헤치고 靑松 沈氏에 對한 處罰을 要求하였다. 다툼이 發生한 高陽 地域의 郡守는 名門家의 다툼에 介入하기를 꺼려 이 問題를 調整에 넘겼다. 結局 當時 임금이었던 英祖 는 윤관의 墓와 심지원의 墓를 그대로 두고 兩 家門이 合意하도록 慫慂했다. [10] 坡平 尹氏와 靑松 沈氏가 朝鮮時代에 王妃를 各各 4名, 3名씩 輩出한 外戚 家門이었기 때문에 英祖도 섣불리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坡平 尹氏 家門에서 이에 不服하여 심지원의 墓를 移葬해야 한다고 主張하다가 오히려 棍杖 을 맞고 귀양 가다 兵士(病死)하는 等, 두 家門의 不和는 더욱 깊어졌다. [11]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 問題를 解決하기 위해 여러 努力이 있어 왔으나 番番이 失敗했다.

2006年 陰曆 4月 10日 , 坡平 尹氏 大宗會와 靑松 沈氏 大宗會는 坡平 尹氏 側이 里長에 必要한 敷地를 提供하고 靑松 沈氏 側이 尹瓘 將軍 墓域에 造成된 靑松 沈氏 祖上 墓 19基를 移葬하기로 合意하면서 朝鮮時代부터 392年 동안 이어진 墓地 다툼을 끝내기로 하였다. [12]

기타 [ 編輯 ]

肅宗代에 高位職으로 進級하고 出世한 데에는 며느리(윤언영尹彦榮 = 윤언식으로 推定됨)가 肅宗비인 名醫太后(明懿太后)의 동생이었던 事實이 作用했던 듯하다 [13] 는 視角도 있다.

戰勝 [ 編輯 ]

傳承에 따르면, 윤관이 咸興 善德陣 廣浦(廣浦)에서 거란 君에게 쫓길 때 잉어 가 도와서 江을 건넜다는 傳承이 있어서, 只今도 坡平 尹氏 家門에서는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金富軾과 윤언이 [ 編輯 ]

글씨를 잘 써서 여러 글과 墓碑銘, 作品 等을 남겼으나 相當數 失傳되었다. 그가 쓴 大覺國師 義天의 墓碣銘을 김부식 이 任意로 修正하고 內容을 바꾸어버리자 이를 不快하게 여긴 그의 아들 윤언이 김부식 과 怏宿이 되었다.

評價와 批判 [ 編輯 ]

女眞族 을 討伐하고 東北 9星 을 쌓아 北方의 防禦力을 높인 點을 높이 評價받는다. 또한 晩年에 공信號를 삭탈당하고 不遇한 最後를 맞이한 것에 對한 同情 輿論도 있다.

家族 關係 [ 編輯 ]

다섯 아들 中, 첫째 아들 綸言人의 後孫에서 南原尹氏와 咸安尹氏가 갈라졌고, 넷째 아들 윤언이 의 家計에서 喜悲 尹氏 , 정희왕후 , 정현왕후 , 장경왕후 , 文定王后 , 숙빈 尹氏 等을 輩出했다.

  • 할아버지: 윤금강(尹金剛) - 相서 左僕射
  • 아버지: 윤집형(尹執衡)
  • 어머니: 어머니에 對한 記錄은 아직 確認되지 않고 있다.
  • 妻 : 仁川李氏(仁川李氏), 上將軍 異性間의 딸, [14] 이자연 의 堂姪女 - 5男 2女(李 中 두 사람은 僧侶가 되었다.)
    • 아들: 綸言人(尹彦仁)-闔門至厚
      • 孫子: 윤덕첨(尹德瞻)-殿中寺 內給事
    • 아들: 윤언순 (尹彦純) - 侍御史
      • 孫子 : 尹中籤(尹仲瞻)
    • 아들: 윤언식(尹彦植, ? - 1149年 5月 )-尙書左僕射
    • 며느리: 하원군群 류氏(河源郡君 柳氏 : 名醫太后 의 동생)
    • 아들: 윤언이 (尹彦?, ? - 1149)-政堂文學, 시호 門講
      • 孫子: 윤인첨 (尹鱗瞻)-受胎社 , 시호 문정文定
      • 孫子: 尹자고(尹子固)-國子監 博士
      • 孫子: 윤돈신(尹敦信)-吏部侍郞
      • 孫子: 윤자양(尹子讓)
      • 孫子: 倫敦의(尹敦義)
      • 孫子: 倫敦孝
      • 孫女: 4名 [15]
    • 아들: 윤언민(尹彦旼, 1095年 ~ 1154年 4月 23日 ( 陰曆 3月 9日 ), 字는 日葬(日章))-常識奉御
    • 딸 : 尹氏, 황원도에게 出家
    • 딸 : 尹氏, 임원후 에게 出家 (임충빈 墓誌銘 參照)

王后들과의 關係 [ 編輯 ]

그의 첫째 아들 綸言仁義 11代孫이 廢妃 尹氏 이고, 넷째 아들 윤언이의 血統에서 喜悲 尹氏 , 정희왕후 , 정현왕후 , 장경왕후 , 文定王后 , 숙빈 尹氏 等을 輩出했다.

윤언이(尹彦?)의 셋째 아들 윤돈신(尹惇信)-윤상계(尹商季)-윤복원(尹復元)-尹淳(尹純)-영평군(鈴平君) 輪寶(尹珤, ?∼ 1329年 (忠肅王 16年), 諡號는 文絃공(文顯公))로 이어지며 영평군 輪寶의 첫째 아들이 윤계종 (尹繼宗)으로 윤계종의 딸이 高麗 忠惠王의 後宮 喜悲 尹氏이며, 충정왕 의 外祖父가 된다.

다시 輪寶의 넷째 아들이자 윤계종의 동생이 양간공 윤안숙(尹安淑)이고, 윤안숙의 아들 輪尺(尹陟)에게서 判典儀寺事 尹勝휴, 윤승도, 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 윤승경, 判圖判書 윤승례(尹承禮) 兄弟가 태어나는데,

윤승순의 아들이 윤곤 (尹坤)이고, 윤곤의 아들 윤삼산(尹三山)-孫子 윤호 (尹壕)가 排出된다. 윤호는 정현왕후 의 親庭아버지이다. 윤곤의 아들이자 三山의 兄이 둘째아들 윤희제이고, 윤희제-尹은(尹垠)-윤사로는 다시 世宗의 딸 정현翁主와 結婚하여 駙馬가 된다. 윤사로는 다시 6村누이인 정현왕후와 媤大姑母夫-시종손部 關係가 된다. 윤필상 또한 윤곤의 曾孫이다(곤-희제-경-필상).

判圖判書(版圖判書) 윤승례 아들 訂正公(貞靖公) 輪番(尹?)은 世祖費 呈戱王后의 親庭아버지이다. 輪番의 아들이자 呈戱王后의 오라비인 윤사윤 , 윤사흔 , 윤사분 兄弟 中

次男 윤사윤(尹士?)-輪寶(尹甫)- 윤여필, 윤여해 兄弟가 나고, 윤여필이 中宗 繼妃 장경왕후 의 親庭아버지이자 尹任 의 아버지이다.

輪番의 셋째 아들 윤사흔(尹士昕)의 曾孫女가 文定王后 이고, 高孫女가 人種 의 後宮 숙빈尹氏이다.

윤사흔-윤계겸(尹繼謙)-윤욱(尹頊)으로 이어지며 윤욱의 아들이 윤지임(尹之任)이고, 윤지임은 다시 윤원개(尹元凱), 尹元良(尹元亮), 윤원필(尹元弼), 윤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衡) 5兄弟와 딸 文定王后 (中宗의 3비 [16] )가 태어난다. 人種의 後宮 숙빈 尹氏는 둘째 아들 尹元良 의 딸이다.

高麗 忠肅王費 喜悲는 윤관의 8代孫, 成宗妃 廢妃尹氏는 12代孫, 世祖費 呈戱王后는 11代孫, 成宗의 3비 正弦王后는 13代孫, 中宗의 繼妃 장경王后는 윤관의 14代孫, 中宗의 3비 文定王后는 15代孫, 人種의 後宮 숙빈 尹氏는 16代孫이 된다.

査頓의 由來 [ 編輯 ]

高麗 睿宗 餘震 을 함께 征伐한 都元帥 윤관과 副元帥 오연총 은 아들과 딸의 婚姻으로 맺어진 關係이기도 했다. 어느 봄날 술이 잘 빚어진 것을 본 尹瓘 은 下人에게 술동이를 지게하고 오연총의 집으로 向했다. 그런데 前日 밤에 내린 소낙비로 물이 불어나 개울을 건널 수가 없었다.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고 있는데 개울 건너便을 바라보니 오연총 도 술桶을 옆에 두고 발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暫時 後 두 사람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등걸나무 조각을 救해 걸터앉았다. 먼저 윤관이 술盞을 비운 뒤 개울 건너 오연총 에게 盞 勸하는 시늉을 했다. 오연총 도 머리를 숙여 술盞을 받는 例를 表示한 뒤 스스로 채운 술盞을 비웠다. 이렇게 둘은 등걸나무(査)에 걸터앉아 서로 머리를 숙이며 술盞을 주고받는 흉내를 내며 거나하게 마셨다. 이때부터 子息 사이의 婚姻을 提案할 때는 '査頓 하자'라는 말이 由來하게 되었다 한다. 査頓의 뜻은 등걸나무(査)에 머리를 숙이다는 뜻의 頓修(頓首)의 合成으로 등걸나무에 앉아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다.

더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高麗史』 卷13, 「世家」13, 睿宗 6年(1111) 5月 8日(技士)
  2.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시스템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 《尹瓘 將軍과 北伐(사르非我叢書 111)》 (임중빈 저, 범우사, 2007) 51페이지
  4. 國譯 《高麗名臣傳》(2004, 남공철 저, 金東周 驛, 城南 文化院 發行) 156쪽.
  5. 高麗가 처음으로 동여진을 大規模로 征伐하기 始作한 것은 1080年(文宗 34)으로 이때 餘震의 勢力을 크게 꺾은 바 있다. 그러나 새로 일어나는 동여진 完顔部族(完顔部族)은 더욱 成長하여 그 部族長 靈駕(盈歌)에 이어 우야소의 代에는 동여진 部落을 統一하였다.
  6. 새로 城을 構築한 곳은 함주(咸州)에 移住民 1,948家口, 榮州(英州)에 城郭 950칸과 移住民 1,238家口, 熊州(雄州)에 城郭 992칸과 移住民 1,436家口, 福州(福州)에 城郭 774칸과 移住民 680家口, 吉州(吉州)에 城郭 670칸, 移住民 680家口, 공험진(公鎭)에 移住民 532家口였다.
  7. 尹瓘:네이트 韓國學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8. 尹瓘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9. 國譯 《高麗名臣傳》(2004, 남공철 저, 金東周 驛, 城南 文化院 發行) 164쪽.
  10. 朝鮮王朝實錄 英祖 40年 6月 14日
  11. 朝鮮王朝實錄 英祖 41年 尹2月 23日
  12. 坡平 尹氏-靑松 沈氏 400年 墓地 다툼 終結 한겨레 2007年 12月 23日
  13. 尹瓘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4. 張인 異性間(李成幹)은 小成群個國백 이허겸의 孫子
  15. 윤언이의 딸 4女
  16. 文定王后는 尹元衡의 손윗 누이이다.

外部 링크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高麗의 對外政策"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