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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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革命
4·19 革命에 參與한 示威隊의 모습.
날짜 1960年 4月 11日~4月 26日
地域 大韓民國(全國)
原因 3·15 不正選擧
目的 李承晩 大統領의 下野
種類 民主主義 革命
結果 大韓民國 第2共和國 의 出帆
示威 當事者
大韓民國 國民
民主黨
主要 人物
參與 人員
10萬 名 以上
死傷者
死亡者數 186名(市民) [2] [3]
負傷者數 6,026名(市民) [1]
1960年 3月 15日 者《東亞日報》에 揭載된 3.15 不正選擧 關聯 記事

4·19 革命 (四一九革命) 또는 4月 革命 (四月革命)은 1960年 4月 19日 大韓民國의 學生과 市民들이 李承晩 政府의 不淨腐敗에 對抗하여 일으킨 民主 抗爭이다. 3月 15日에 實施된 大統領과 副統領 選擧에서 自由黨 政權이 이기붕 副統領 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開票造作에 反撥해 不正選擧 無效와 再選擧를 主張하는 學生들이 示威를 始作했고 大規模의 市民들이 參與하며 全國的으로 擴大된 反獨裁 鬪爭이자 革命이었다. 不正 選擧 當時 李承晩 政府와 自由黨은 4割 事前 投票, 投票函 바꿔치기 等의 不正 選擧를 저질렀다.

3·15 馬山 義擧 에 參與한 金朱烈 이 失踪된 지 27日만인 4月 11日 아침, 馬山 中央埠頭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警察이 쏜 催淚彈이 박힌 채 屍身으로 떠오른 것이 釜山日報 의 許從 記者를 통해 報道되면서 示威가 全國的으로 퍼지며 激化되었다. [4] 4月 18日에는 高麗大 學生들이 示威 後 歸校 中 被襲을 當하기도 했다. 4月 19日 警察이 大統領 官邸인 景武臺 로 몰려드는 示威隊를 向해 發砲하여 多數의 犧牲者가 發生했고, 發砲 以後 示威隊는 武裝하여 警察과 銃擊戰을 벌이며 맞섰다.

全國民的 抵抗과 軍指揮部의 武力動員 拒否에 逢着한 大統領 李承晩 이 4月 26日 下野를 發表함으로써 李承晩 自由黨 政權은 沒落하였고, 이 革命의 結果로 過渡 政府 를 거쳐 6月 15日( 6·15 改憲 )에 第2共和國 이 出帆하였다.

改正된 憲法에 따라 國會는 參議員과 民議院으로 構成되었다. 國會에서 大統領으로 選出된 윤보선에 依해 指名된 場面이 國會의 同意를 얻어 國務總理에 就任하였다

名稱 [ 編輯 ]

4·19 民主革命 或은 4·19 學生運動 , 4·19 依據 , 4月 依據 , 4月 革命 , 未完의 革命 等으로도 일컫는다. 5·16 쿠데타 以後 軍事政權에서는 '義擧'(義擧)로 불리다가 文民政府 부터 革命 으로 昇格되었다. [5] [6]

槪要 [ 編輯 ]

背景 [ 編輯 ]

1960年 3月 17日 東亞日報 . 3.15 不正選擧 開票結果 李承晩 大統領 4線 當選, 이기붕 副統領 當選을 報道한 記事.

1960年 民主黨 大統領 候補였던 조병옥 이 갑자기 死亡하여 李承晩이 單獨 候補가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副統領 候補인 場面 은 健在하였고, 이에 自由黨은 副統領에 이기붕 을 당선시키기 위해 어느 選擧보다도 不正選擧活動에 熱을 올렸다. 政府로 하여금 公務員을 통한 選擧運動網을 組織하고, 全國 警察에 指示하여 이를 監視督察하도록 하는 等 選擧에 勝利하기 위해 온갖 方法을 動員하였다. [7]

2月 28日 大邱 에서 高等學生들이 “學院의 自由 保障하라”, “獨裁政治, 不淨腐敗를 물리치자”는 口號를 앞세우며 大邱 都心에서 示威를 벌였다.( 2·28 大邱 學生義擧 )

3月 15日 自由黨의 大大的인 3·15 不正選擧 가 導火線이 되어 馬山 에서 不正選擧에 對한 糾彈 示威가 벌어졌다. 當時 內務部長官 최인규 는 無慈悲하게 强勁鎭壓함으로써, 馬山 市民들의 憤怒는 極에 達했고 이는 4·19 革命의 導火線이 되었다. 結局 3月 18日 內務部長官 최인규와 治安局長 李加虐이 馬山事件의 責任을 지고 辭任하였고, 內務部長官이 홍진기 로 交替·任命되는 等 政局을 收拾하려는 努力이 있었다.

4月 18日의 서울의 高麗大學校 學生들이 正午에 總蹶起 宣言文을 發表한 後, 世宗路-태평로 一帶로 進出해 示威를 벌였다. 하지만, 유진오 고려대학교 總長 等의 挽留로 下午 4時쯤 데모를 中斷하고, 平和行進을 하면서 歸校하는 途中 신도환 의 大韓反共靑年團 鍾路區 團長 임화수 等 暴力輩들로부터 取材한 記者들 一部와 함께 學生들이 被襲된 4·18 高麗大學生 被襲 事件 이 일어났다. [8] (學生示威의 主役을 地方의 高校生으로부터 서울의 大學生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示威 目的도 不正選擧 糾彈에서 獨裁 打倒로 전환시켰다는 데 그 意義가 큰 事件 [9] ) 4月 19日 데모의 口號는 <3·15不正選擧 다시 하라> <1人獨裁 물러가라> <李承晩은 下野하라> 等 獨裁政權 退陣과 民主守護를 要求하는 革命的인 것이었다. 서울 市內가 完全히 無政府狀態에 빠지자 唐慌한 政府는 午後 3時를 期해 서울 一圓에 戒嚴令을 宣布한 데 이어 流血 事態가 벌어진 釜山 · 大邱 · 光州 · 大戰 에도 戒嚴令 을 宣布했다. 밤늦게까지 散發的으로 繼續되던 示威는 송요찬 戒嚴司令官을 筆頭로 戒嚴軍이 서울에 進駐하면서 一旦 가라앉았으나, 하루 동안의 示威로 서울에서만 1百餘 名, 釜山에서 19名, 光州에서 8名 等 全國的으로 186名의 死亡者와 6,026名의 負傷者라는 엄청난 犧牲者를 냈다. 그리고 4月 25日과 4月 26日의 데모로 이어졌다. [10]

3·15 依據結果 [ 編輯 ]

1960年 4月 11日 者 東亞日報. 3.15 馬山 義擧를 다룬 記事.
27日 동안 失踪되었다가 눈에 催淚彈 이 박힌 채 馬山 中央埠頭에서 發見된 金朱烈

3·15 依據 自由黨 政權의 不正選擧에 맞서 市民과 學生들이 抗拒한 事件으로, 以後 全 國民的 憤怒와 함께 4.19革命의 導火線이 돼 李承晩 政權을 무너뜨리게 된 契機를 마련했다. 3.15義擧는 지난 2001年 制定된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法을 통해 大韓民國 最初의 民主化 運動으로 規定됐으나, 4.19革命의 延長線上에 있다는 理由로 오랫동안 獨自的인 位相을 갖지 못했다가, 2010年 3月 9日 國務會議 議決을 통해 事實上 '國家記念日'로 確定됐다. [11]

또한 全羅南道 光州市 에서 投票所에서 부정표를 發見한 한 市民이 選菅委에 抗議하자 政治 깡牌가 無慈悲하게 暴行한 것이 發端이 돼 市民 1千餘 名이 낮 12時 45分부터 금남로 에 모여 不正選擧를 糾彈하는 데모를 벌였다. [12]

第2次 馬山 示威 [ 編輯 ]

全羅北道 南原 禁止中學校 를 卒業하여 慶尙南道 마산상업고등학교 에 入學한 지 얼마 안 되어 1960年 3·15 馬山 義擧 때 行方不明되었던 烈士 金朱烈 의 屍體가 約 한 달 뒤 즈음인 4月 11日 바다에서 發見되어 檢屍가 이루어졌는데, 檢屍 結果가 發表되지 않자 市民들이 病院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催淚彈 이 박혀 있는 것을 確認하였다. 이 金朱烈 屍體 引揚事件이 알려지면서 當時 國民들의 憤怒는 極에 達하게 되어, 不正選擧 是正을 要求하는 示威가 全國으로 擴散된 4·19 革命의 導火線이 되었다. 이날 示威隊는 馬山警察署 武器庫 門을 破壞하고 手榴彈 1~3個를 奪取했으며 警察署長室 앞뜰에 投擲 폭발시켰다. [13]

4·18 高麗大學生 被襲 事件 [ 編輯 ]

1960年 4月 18日 高麗大生 3千餘 名이 國會議事堂 앞에서 연좌데모를 한 後 歸校하다가 政治깡牌의 襲擊을 받아 한 名이 죽고 數十 名이 負傷當한 事件.

新入生 歡迎會 날이었던 이날 午後 12時 50分 全校生은 「靑年學徒만이 眞正한 民主歷史 創造의 役軍이 될 수 있음을 銘心하고 總蹶起瑕疵」는 內容의 宣言文을 採擇하고 校門 밖으로 進出, 國會議事堂에까지 이르렀다. 議事堂 앞에서 △警察의 學院出入 禁止 △馬山事件 責任者 處斷 等을 要求하며 示威를 마친 後 歸校길에 올라 秩序整然하게 行進하던 中, 先頭가 鍾路 4街 천일劇場 附近에 이르렀을 무렵 쇠갈고리·쇠사슬·쇠망치 等으로 武裝한 50~60名의 怪漢들이 튀어나와 學生들을 無差別 亂打했다.(가해자 : 신도환 大韓反共靑年團 , 洞네깡牌 임화수 )

自由黨이 飼育한 이들 暴力輩와의 約 30分에 걸친 亂鬪劇 끝에 한상철이라는 學生이 죽고 50餘 名의 學生이 부상당했으며, 現場을 取材하던 寫眞記者 3名이 카메라를 빼앗기고 毆打당했다. 이 4·18高大生示威隊 被襲事件은 이튿날인 4月 19日 學生들이 一齊히 蹶起하게 만든 直接的인 契機가 되었고, 學生示威의 主役을 地方의 高校生으로부터 서울의 大學生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示威目的도 不正選擧糾彈에서 獨裁打倒로 전환시켰다는 데 그 意義가 크다.

證言 [ 編輯 ]

" 4月 11日 馬山에서 金朱烈 學生 屍身이 發見된 게 導火線이 됐죠. 서울 地域 總學生會 間에 물밑 論議를 통해 19日 午前 9時 一齊히 景武臺 中央廳 앞에 集結하는 것으로 行動 指針을 定했습니다. 景武臺 앞엔 大學生만 2萬餘 名을 헤아릴 만큼 엄청난 群衆이 몰렸습니다. 여기에 警察이 無差別 銃擊을 加하면서 많은 犧牲者가 났습니다(사망 21名, 負傷 172名). 過剩 鎭壓은 國民을 激怒시켰고, 結局 엿새 後 大學敎授들의 時局宣言과 大統領 下野로 이어졌습니다." [14]

민주당의 對應 [ 編輯 ]

民主黨 側 示威事態 眞相調査團長 윤보선

1960年 3月 15日 不正選擧 糾彈示威 民主黨 側에서는 윤보선 等이 負傷當한 學生을 慰問하였다. 4月 學生 示威의 眞相調査團이 各 政黨別로 꾸려질 때 그는 民主黨 側 不正選擧 糾彈事態 眞相調査團長이 되어 馬山 釜山 , 昌原 等을 巡訪하고 돌아왔다. 이어 政府의 不正選擧를 抗議하고 關聯者 索出 處罰을 要請하였다.

1960年 4月 11日 윤보선 民主黨 의 馬山示威 眞相調査團長에 任命되어 慶尙南道 馬山으로 派遣되었다. 當時 민주당에서는 最高委員會를 緊急 召集하여 對策을 熟議했다. 于先 現地에 내려가 事態의 眞相을 調査, 把握하고 自由黨 政權에 强力한 對應策을 要求하기로 決定했다. [15] 會議에서 그가 調査團長으로 決定되었다. 그는 急히 調査團을 構成, 野黨議員 세 사람을 同伴하고 馬山 現地로 내려갔다. [15] 馬山에 到着해 보니 온 市街地가 極히 混亂한 狀態였다. 그것은 데모가 아니라 完全히 革命이었다. 法에 依한 秩序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興奮한 群衆들에 依해 馬山은 支配되어 있었다. 到着한 卽時 金朱烈이 安置된 病院에 가 보니 눈에 催淚彈이 박힌 채 그대로 있었다. [15] 그를 團長으로 한 민주당 眞相調査團이 到着했다는 消息이 傳해지자 馬山 市民들은 데모를 中止하고 몰려와 事態를 빨리 解決해 市民들을 희생시킨 警察을 處罰해줄 것을 要求하며 卽席 演說을 請하기도 했다. [15]

윤보선 은 馬山市場과 慶南道知事, 馬山警察局長, 그리고 法院 사람들을 만나 會議를 열고 群衆에 對한 發砲禁止와 監禁된 市民들을 釋放할 것 等을 骨子로하는 몇 가지 條件을 提示했다. 그 過程에서 그는 困辱을 치르기도 했다. 會議場을 에워싸고 기다리던 市民들이 會議 結果가 빨리 發表되지 않자 無差別 投石을 加하고 電氣를 끊는가 하면 暴力을 휘두르는 等 亂暴한 行動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直接 被害를 當하지는 않았다. [15]

騷亂이 있은 後 밤에 某氏 집에서 잠을 자다가 멀리서 성난 波濤처럼 萬歲 소리가 퍼져 나오다가 一齊히 쏘는 銃소리에 끊어지고 다시 萬歲 소리가 일어나는 것을 들었다. [16]

이튿날 그를 비롯한 민주당 調査團은 다시 警察署長과 地方法院 關係者들을 만나 解決策을 協議했으나 뚜렷한 合意點을 찾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15] 當時 內務部次官은 馬山 市民의 1次 蜂起 背後에 共産黨 組織과 민주당이 介入돼 있다고 發表하였다. 그리고 2次 蜂起 亦是 共産黨 組織의 調整에 依한 것이라고 斷言했다. [15] 尹潽善은 그런 事實이 없다며 卽刻 反駁聲明을 냈다.

내가 調査한 바로는 共産黨 組織이 調整했다는 證據는 全혀 찾아볼 수 가 없었다. 그것은 自由黨 政權이 愛國的인 動機에서 不正選擧를 糾彈한 馬山 市民들을 不純한 勢力으로 몰아붙인 結果 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窮餘之策이라 하더라도 어찌 선량한 國民을 빨갱이 勢力으로 罵倒할 수 있단 말인가. 떳떳하지 못한 政權이 돌이킬 수 없는 큰 罪를 犯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7]

馬山 現地에서 調査를 마치고 國會發言을 통해 윤보선 은 馬山 市民 蜂起는 共産黨의 暴動이 아니라 愛國市民의 義擧라고 규정지었다. 그러자 自由黨은 윤보선에 對해 非難을 퍼부었다. [17]

4月 19日 [ 編輯 ]

市民들의 糾彈 集會
示威로 破壞된 자유당사 出入門

1960年 4月 19日 , 前날 高麗大學校 學生들이 發表한 總蹶起 宣言文과 같은 宣言을 發表한 不正選擧에 抗議하는 大學生들과 이에 鼓舞되어 刺戟을 받은 中高等學校 學生들이 大統領 官邸인 景武臺 와 '西大門 景武臺'로 불리던 이기붕 의 自宅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景武臺로 몰려가 李承晩 大統領과 面談을 要求하였고, 金朱烈 의 죽음에 對한 關聯者 處罰을 要求하였다.

한便 第1共和國 時節, 所謂 '不副統領' 이라 불리던 權力의 第3人者로 氣勢衝天하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當時 景武臺 警察署長, 곽영주 警務官(現 大統領 警護室長級)은 曲射砲를 動員하여 學生들을 鎭壓하여 막았으나, 曲射砲는 곧 무너졌다. 景武臺 正門을 부순 瞬間에 갑자기 軍人들이 덮쳐서, 여기서도 많은 學生들이 犧牲당했다.

再選擧와 李承晩 大統領의 下野를 要求하는 示威隊에 唐慌한 第1共和國 政府는 午後 3時 戒嚴令 을 宣布했다. 李起鵬은 이미 自宅을 빠져나와, 京畿道 楊州의 某 陸軍部隊로 避身하였다. 警察로부터 武器를 奪取하여 期童話된 武裝示威隊員들은 저녁무렵 鍾路와 을지로 一帶를 휩쓸었다. 午後 6時40分頃 消防車와 트럭等에 分乘한 示威隊員들이 鍾路3街를 지나다가 東大門 警察署 앞을 通過할 무렵 警察은 一齊射擊을 퍼부었다. 이곳에서 雙方間 最初의 射擊戰이 벌어졌다. 40餘臺의 車輛에 分乘, 밤거리를 疾走하며 示威하던 數百名의 示威隊는 숭인동 近處에서 警察의 沮止를 받고 暫時 주춤했으나 밤 8時頃부터는 東大門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年度의 派出所를 모조리 불태우면서 27자루의 카빈총마저 奪取, 倉洞쪽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이에 앞서 을지로 6街 서울運動場 앞에서 警察과 한때 銃擊戰을 벌이기도 했다. [18]

武裝示威隊의 一部는 20餘臺의 車輛에 分乘, 議政府武器庫를 찾아 倉洞까지 밀려갔다. 이들은 倉洞支署 警察들과 한때 銃擊戰을 벌이다가 子正무렵 急遽 出動한 戒嚴軍과 京畿道警이 挾攻할 氣勢를 보이자 다시 市內로 되돌아와 高麗大 뒷山쪽으로 몰렸다. [19] 안암동 近處 山에서는 20日 새벽까지 武裝示威隊院과 武裝警察 사이에서 射擊戰이 끝까지 벌어졌다. [20] 하지만 戒嚴司令官이었던 송요찬 은 戒嚴軍에 先制發捕를 禁하고 柔軟하게 對處하여 事態를 收拾했다. [21]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學生들의 示威 參與 [ 編輯 ]

象牙의 眞理塔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疾風과 같은 歷史의 潮流에 自身을 참여시킴으로써 理性과 眞理, 그리고 自由의 大學精神을 現實의 慘澹한 薄土에 뿌리려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自身들의 知性과 良心의 嚴肅한 命令으爐하여 邪惡과 殘虐의 現象을 糾彈, 匡正하려는 主體的 判斷과 使命感의 發露임을 떳떳이 鮮明하는 바이다. [中略] 良心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永遠한 民主主義 死守派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現實의 뒷골목에서 勇氣 없는 自虐을 되씹는 者까지 우리의 隊列을 따른다. 나가자! 自由의 祕密은 勇氣일 뿐이다. 우리의 隊列은 理性과 良心과 平和, 그리고 自由에의 熱烈한 사랑의 隊列이다. 모든 法은 우리를 保障한다.
 

1960年 4月 18日 高麗大學校 學生 데모가 있던 날 저녁 當時 서울대학교 總長 윤일선 自由黨 國會議員 최규남 으로부터 "서울대學生들度 데모에 나올 지도 모르니 操心하라"는 말을 들었다. 4月 19日 아침 8時에 서울대학교 總長 윤일선 은 各 單科大學 學長會議를 召集했다. 會議가 끝나기도 前에 서울對 文理大生들이 데모를 벌일 氣勢를 보여 學長들이 遑急히 달려나가 말렸으나 所用이 없었다. 以後 4.19 革命이 發生하자 그는 學生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努力하였다. 윤일선 은 警察廳과 法院에 電話를 걸어 學生들의 데모 參與를 挽留할테니 最大限 寬大한 處理를 要請하였다.

4月 19日 서울대학교 總長 윤일선 신태환 서울법대 學長 等 7,8名의 學長들과 함께 國會議事堂 (只今의 서울市議會 建物)까지 간 서울대 데모대를 찾아가 學校로 되돌아가라고 說得했다. [21] 學生들은 工夫가 學生들의 本分이며, 自己 分野에서 最善을 다하는 것이 眞正한 愛國이라는 것이었다.

1960年 4月 27日 市民의 眞情을 呼訴하는 學生 示威隊

그가 學生들의 歸校 條件으로 내세운 것은 "連行된 學生들의 釋放 [21] "이었다. 이어 學生들의 歸校 條件으로 내세운 連行된 學生들의 釋放 問題를 協議하기 위해 東大門警察署長 을 만나고 왔는데 서울大 生들은 建大, 중앙대 等의 데모대 隊列과 함께 中央廳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21] 示威가 激化되면서 그는 學生들 옆을 따라갔다. 東亞日報社 社屋 앞에서 서울大生度 아닌 不良차림의 靑年이 데모隊列에 끼어들어 煽動하는 것을 본 尹日善은 "너 學生이냐"라고 물었다. [21] 學生들 사이에 끼어들어 流言蜚語를 煽動하는 者들을 막기도 하면서 그는 示威 學生들과 同行하였다. 국민대학교 앞에 이르러 警察들이 發砲 射擊을 加하자 그는 學生들의 앞에서 이를 가로막고 中止를 呼訴하기도 했다.

그러나 國民大學 앞에서의 警察의 銃擊에 學生들이 쓰러지는 것을 目擊한 當時 서울대학교 總長 윤일선 은 事態를 돌이킬수 없다는 것을 直感할 수 있었다고 回想한다. [21] 이어 서울대학교 總長 윤일선 은 學生들의 學校 復歸를 促求하는 한便 警察에 찾아가 連行된 學生들의 釋放, 赦免을 呼訴하여 學生들의 釋放, 赦免을 위해 努力하였다. 이어 4月 26日 李承晩 大統領 이 下野하면서 데모대에 加擔했던 學生들도 自然 解散했고 그도 學校로 되돌아왔다.

이 過程에서 이정재 의 部下 깡牌인 新定式 은 4·19 革命에 參加하는 京城電氣工高 3學年 최기태 學生을 角木으로 毆打하여 死亡케 했다.

靑年學生의 힘- 年歲가 記錄한 1960 4月 革命

연세대학교에서 主導的으로 試圖를 했던 人物로 김달중, 안병준, 金炳哲 은 激變의 狀況을 記錄 資料로 남기고 2020年 연세대학교博物館에서 冊으로 出版하였다. 當時 김병철은 延世大學校 3學年 在學中 18日에 가회동 계광순 의 아들 契員名의 집에서 어머니께서 주신 廣木에 印刷所에서 프랑카드를 直接 만들었다. 19日에 채플時間에 總長인 백낙준 博士의 說敎가 끝난 다음에 舞臺에 올라가서 마이크를 잡고 오늘 하자고 말하면서 延世大學校 學生들을 이끌고 第一 先頭에서 신촌로타리로 進出하여 警察과 衝突하였다. 다시 西大門 로터리에서 衝突하여 많이 맞아서 齒牙도 부러지고 다리도 傷處를 입었다. 繼續 前進하여 서울驛을 거쳐 靑瓦臺로 갔는데 親舊인 김흥수는 銃까지 맞았다. 연세대학교 學生들을 代表하여 宣言文을 5페이지를 直接 써서 만들었던 것을 어머님이 아들을 걱정하여 찢어버렸다. [22] 그는 김달중과 안병준과 함께 연세대학교 學生들을 이끌고 主導的으로 4.19 革命에 參與하였다. 1960年 8月 13日 김병철은 政治外交學科 3學年으로서 연세대학교의 學生運動의 모든 過程에 對하여 記者會見을 하였고 歷史的으로 所重한 價値를 지닌 이 內容은 2020年 7月 中旬頃에 發掘되었다. [23]

연세대학교에서는 4.19 革命 60周年을 記念하여 特別展示展을 가졌으며 [24] 모든 記錄物들은 文化財로 登載될 豫定이다. [25] [26] 4.19革命이 끝나후에 1960年 11月 서울대학교의 經濟學科 寒極과 함께 1960年 11月에 第 1回 全國大學生謀議UN 總會를 創立하여 最初로 모임을 가졌다. 主로 寒極은 資本主義에 對한 講演을 했고 김병철은 民主主義에 對한 講演을 全國的으로 巡廻하면서 4.19의 精神을 擴張하였다.

1960年 11月 第 1回 全國大學生 謀議UN總會에서 民主主義에 對하여 講演하는 金炳哲 會長

4月 19日 以後 [ 編輯 ]

戒嚴令 에 주춤했던 示威 는 時間이 감에 따라 더 번져갔다. 4月 23日 , 場面 副統領이 辭任하고 民主化를 위해 努力할 것을 宣言하였다. 4月 25日 에 默默히 지켜보던 大學 敎授들까지 示威를 함으로써, 李承晩의 第1共和國 政府는 무너질 危機를 맞고 있었다. 學生을 中心으로 하여 社會 全 階層으로 擴散되어 示威가 擴散되자, 駐韓 美國大使였던 W. P. 매카나기가 李承晩 大統領을 찾아가서 下野할 것을 勸誘, 說得하였다.

In my younger days I certainly knew my people well and even now felt myself certainly one of them.
내가 더 젊었던 時節의 나는 우리 國民들을 잘 理解하고 있었소. 난 只今도 내가 그들의 冬至라고 생각했소.
 
— 李承晩의 對答

法務部長官 권승렬 , 外務部長官 許政 等도 李承晩의 下野를 要請했다.

이에 李承晩은 自由黨 黨職을 辭退하고 大統領 職에만 專念하겠다 하였다. 駐韓 美國大使였던 매카나기의 訪問을 받은 李承晩은 이 모든 事態가 場面과 敎會勢力의 指示라고 說明했지만 메카나기 大使는 3.15部情 選擧와 이를 저지르고도 숨긴 閣僚들 特히 警察의 탓이라고 이야기하였고, 卽刻的인 改革을 强力히 促求했다.



大學 敎授團 데모 [ 編輯 ]

3·15不正選擧를 糾彈하는 學生 데모가 4·19로 絶頂에 이른 뒤, 1960年 4月 25日 , 全國 大學敎授 代表들이 모여 時局收拾을 위한 宣言文을 發表하고 示威에 나선 事件. 이날 午後 3時 서울大學校 敎授會館에 모인 27個 大學敎授 258名은 「大統領을 爲始한 與野 國會議員들과 大法官 等은 3·15不正選擧와 4·19事態의 責任을 지고 물러나는 同時에 再選擧를 實施하라」는 要旨의 14個項의 時局宣言文을 發表했다. 이어 4百餘 敎授들은 <4·19義擧로 쓰러진 學生의 피에 步答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戒嚴下에서 平和的인 示威를 敢行, 서울市街를 行進했다. 이 4·25敎授團 데모 는 市民과 學生들의 絶對的 支持를 불러일으켜 그날밤부터 다시 市民·學生들이 蹶起했으며, 26日 또다시 大大的인 데모를 觸發시킴으로써 마침내 李承晩의 下野를 促進하는 決定的 契機가 되었다.

李承晩의 下野 [ 編輯 ]

이에 長時間 동안 여러 사람의 說得 끝에 李承晩 大統領은 下野를 決定했으며 4月 23日 示威鎭壓 警察의 發砲로 市民들의 死亡 消息을 傳達받고 病院을 찾아 負傷 學生들을 慰問한 뒤, 放送에 哀悼의 뜻을 公式的으로 發表했다. 4月 24日 流血事態에 對한 政治的 責任을 지고 自由黨 總裁職 辭任宣言을 했다. 4月 26日 午後 1時에 李承晩 라디오 演說을 통해, 大統領 자리에서 下野하겠다고 發表했는데, 演說內容은 다음과 같다.

李承晩 大統領 對國民 談話文

나는 解放 後 本國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愛國 愛族하는 同胞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世上을 떠나도 限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國民이 願하는 것만이 있다면 民意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願했던 것이다.

報告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靑少年 學徒들을 爲始해서 우리 愛國 愛族하는 同胞들이 내게 몇 가지 決心을 要求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付託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同胞들이 只今도 38線 以北에서 우리를 侵入코자 共産軍이 虎視眈眈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銘心하고, 그들에게 機會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國民이 願한다면 大統領職을 辭任하겠다.
  • 3·15 鄭副統領 選擧에 많은 不正이 있었다 하니 選擧를 다시 하도록 指示하였다.
  • 選擧로 引延한 모든 不美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議長에게 公職에서 完全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 내가 이미 合意를 준 것이지만 萬一 國民이 願한다면 內閣責任制 改憲을 하겠다.


短期 4293年 4月 26日
大韓民國 大統領 李承晩

1960年 5月 29日 . 하와이로 出國하는 李承晩 博士와 餞別하는 許政 大統領 權限代行

4月 26日 午後 2時, 國會는 이 大統領 卽時 하야, 鄭副統領 選擧 再開, 內閣責任制 改憲 等을 滿場一致로 決意하였고 4月 27日 午後 3時에는 國會에 提出된 이 大統領 辭任書가 修理되었다. 大韓民國 副統領 場面 도 그보다 먼저 辭退하였으므로 外務部長官 許政 李 首席國務委員 資格으로 大統領 權限代行이 되었고 李承晩 夫婦는 景武臺를 떠나 이화장으로 갔다.

이기붕 一家 變死 [ 編輯 ]

4月 26日 大統領 權限代行 으로 就任한 許政 은 聲明書를 發表하고 關聯者 處罰을 約束했다. 學生들과 敎授들은 이기붕 處罰을 要請했지만 그는 李起鵬의 處罰을 拒否했다.

4月 27日 景武臺 의 祕書官 박찬일이 大統領 權限代行 허정의 집을 訪問했다. [27] 박찬일은 이기붕 의 딱한 處地를 말하며 亡命의 길을 열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27] 허정은 이기붕 의 亡命을 決定하였다. 許政 自身의 表現에 依하면 그는 '朴 祕書官에게 確實한 言質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晩松('이기붕'의 號)을 海外로 내보내기로 作定했던 것이다. [27] '

그는 '晩松('이기붕'의 號)李 腐敗와 不正에 對한 責任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은 事實이었지만, 共産 國家에서처럼 實權(失權)=곧 죽음이라는 事態가 벌어진다면 民主國家로서의 大韓民國 의 體面에도 관계되는 일이었다.' [27] 고 했다. 그는 事態가 가라앉아 晩松에 對한 공정한 裁判이 可能할 때까지만 그를 海外로 安全하게 避身시킬 생각이었다. [28]

한便, 洋酒 로 避身했던 이기붕 4月 27日 에 몰래 景武臺 로 들어왔다. 當時 그의 長男(이자 李承晩의 兩者로써 當代 李承晩의 權力을 反證하는 假짜 이강석 事件 으로 잘 알려진) 이강석 小委는 李承晩의 養子로 들어가 있었는데, 4月 28日 아버지 이기붕 , 어머니 박마리아 , 男동생 이강욱을 銃으로 쏴 죽이고, 自身도 自殺했다. 李承晩은 1960年 5月 29日 하와이 로 夫人과 함께 떠났고 그곳에서 살다가, 1965年 7月 19日 91歲 때 死亡했다. 민중당 代辯人 金永三 은 '적잖은 政治的 過誤가 있으나 平生을 祖國의 獨立鬪爭에 몸바쳐왔으며, 初代 大統領 을 지냈다는 것을 勘案하여 全 國民과 더불어 깊은 哀悼의 뜻을 표한다'는 哀悼聲明書를 發表하였다. [29] 作家 崔仁昊 는 그의 連載小說 《家族》에서 李承晩의 죽음에 對해 '獨裁者다운 悲慘한 말로'라고 批評하였다.

場面의 副統領職 辭退 [ 編輯 ]

1960年 4月, 副統領 場面 은 殘餘任期를 4個月 남겨놓고 副統領職을 辭退했다. 當時 憲法은 大統領 闕位時 副統領이 大統領으로 就任하도록 돼있었음으로, 場面은 李承晩이 辭退하기를 기다렸으면 大統領이 될 수 있었는데 그걸 抛棄한 것이다.

場面 副統領 對國民 談話文

1. 本人은 오늘로서 副統領職을 辭退한다. 3·15 不正選擧로 인하여 3千萬 同胞의 鬱憤은 드디어 絶頂에 達하고, 마침내 民族의 淨化인 靑少年 男女들이 不法과 不義에 抗爭하다 銃彈에 쓰러져, 그 高貴한 피가 이 江山을 물들게 됨을 볼 때에 하루라도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悲痛한 心境에 다다른 것이다.
同時에 本人의 辭退로서 權力을 喝取하여 壓制와 暴政을 繼續하는 李承晩 政府에게 警鐘을 울리고, 나아가 自由·民主의 精神을 이 땅에 소생시켜, 國家 危機를 克服하는 데 一助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2. 本人이 國民 여러분의 支持로서 副統領에 當選된 以來, 憲法이 本人에게 附與한 職責을 遂行하려고 努力하였으나, 이를 遂行할 機關들은 李承晩 政府의 故意的인 妨害로 인하여 그 構成조차 보지 못하였으며, 그 外에도 독재화하여가는 政治, 破綻되어가는 國民經濟, 混亂 一路의 社會像, 孤立되어가는 外交 等을 是正하기 위하여 機會 있을 때마다 行政府에 對한 忠告를 하였고, 이 大統領과의 面談을 要求함도 數次이었으나, 그때마다 거부당하였으며, 不得已 書面으로 한 本人의 進言度 아무런 反響을 보지 못하였다.

今年의 選擧를 앞두고 李 博士의 4線을 實現하기 위하여 自由黨과 政府는 再昨年 12月에 神聖한 國會議事堂에서 野黨 議員을 暴力으로 逐出· 監禁한 後, 國家保安法 大韓民國 地方自治法 을 改惡했으며, 言論 機關과 野黨活動을 無慈悲하게 彈壓하였고, 平和的 集會 및 示威의 自由에 對한 不法 制限을 더욱 强化하는 等으로 不正選擧의 伏線을 갖추었고, 憲法精神에 配置되는 3月 早期選擧, 幽靈 有權者의 造作, 立候補 登錄의 暴力妨害, 官權 總動員에 依한 有權者 脅迫, 野黨人士의 殺傷, 投票權 强奪, 否定 무더기票 投入, 3人組 公開投票, 野黨 參觀人에 對한 各種 妨害, 不正開票 等으로 3·15 鄭副統領 選擧에서 97퍼센트 內外의 與黨 得票를 造作 發表함에 이르러서는 政權慾의 不法手段이 極限에 達하여 民主選擧制度는 完全히 破壞되고 말았다. [30]

3. 이러한 不正, 殺人選擧 等에 對하여 國民의 분함은 가슴에 사무쳤고, 眞理와 正義에 敏感한 靑少年 學徒들의 示威運動은 全國 各地를 휩쓸게 되었다. 執權者의 私兵化韓 警察은 平和的 示威 學徒들에게 銃彈을 퍼부었으며, 그도 不足하여 虐殺한 報復殺傷과 顧問을 無數히 敢行하여 國民을 驚愕케 하였고, 또다시 銃彈을 퍼붓는 等 無斷政策을 使用한 나머지, 드디어 法的 要件에 어긋나는 非常戒嚴令까지 宣布하는 수치스런 事態에 이르렀다. 이러한 重大危機에 즈음하여 이 大統領은 3·15 選擧의 不法과 無效를 率直히 是認하고, 또 12年間 累積된 秕政에 對한 責任을 지고 물러서야 할 것이다.

4. 本人은 비록 副統領의 職을 떠난다 할지라도 民主鬪爭 戰列에서 國民들과 더불어 最後 勝利의 날까지 奮鬪할 것을 盟誓한다.

5. 이番의 全國 學徒 總蹶起 運動은 우리 歷史上 새로운 時期를 劃하는 것으로서, 3·1 獨立運動에 比肩할 만한 金字塔이며, 이제부터 民族精氣와 自由精神은 온갖 壓制力을 물리치고, 光明의 天地를 開拓하여 祖國의 民主建設과 反共統一을 完遂하게 될 것으로 믿는 바이다. 끝으로 民主 守護를 위하여 生命을 바친 '民族의 꽃'들에 對하여 그 冥福을 빌며, 名譽의 負傷者 여러분의 快癒를 所願한다.

? 短期 4293年 4月 23日
大韓民國 副統領 場面 [31]

場面은 副統領 職 辭任 理由로 政權을 내놓더라도 場面이 大統領 職을 繼承하지 않는다는 保障을 하여 李承晩의 下野를 誘導하려는 것이었다 [32] :55 는 主張과, 두 番째로 副統領으로서의 道義的인 責任, 세 番째로 李承晩의 不幸을 利用해서 權力을 잡는다는 認識을 심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하였다. [32] :56 [33] [34]

場面의 副統領職 辭任에 對해 이영석은 李承晩이 下野하면 殘餘 任期가 4個月도 안 되지만 그동안은 場面이 大統領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어있는데 이것을 拒否한 것은 無責任한 主張이라고 批判하였다. [32] :55 [35]

1960年 5月 29日子 京鄕新聞 . 李承晩 大統領이 下野聲明 發表 後 하와이 亡命家는 모습을 報道했다.

민주당 舊派는 場面의 副統領職 辭退에 對해 政略的 辭任說을 主張, 그가 새 政府의 實權을 잡는데 보다 유리하리라는 政治的 打算에서 副統領職을 辭退했다고 批判했다. 獨裁 防止를 위해 內閣責任制가 必要하다는 認識이 퍼지면서 場面이 大統領이 되면 內閣制 改憲을 實現해야 되는데, 現職 大統領에 있으면서 次期 政府 國務總理職 競爭에 나서는 것은 輿論으로부터 歡迎받지 못할 것이고 그것을 내다본 것이라는 것이었다. [32] :56

민주당 舊派 人士였던 김도연 은 1968年에 펴낸 自身의 回顧錄에서 場面의 副統領職 辭退가 李承晩 下野를 促進했을 可能性은 認定하였으나, 當時 場面이 副統領職을 辭退하지 않고 大統領職을 維持한다면 事態를 收拾할 수 있었다는 評을 내리기도 했다. [32] :57 [36]

場面이 國會에 辭表를 傳達한 以後 若干의 論難이 일기도 했는데, 大統領이나 副統領의 任期 途中 辭退에 對한 規定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시영 初代 副統領과 金性洙 第2代 副統領이 辭任했을 때는 副統領 先任權이 國會에 있었음으로 辭表 亦是 國會에서 修理하였으나, 場面은 國民 直選으로 當選된 바 國民이 뽑은 副統領을 國會에서 물러나게 할 수는 없다는 點에서 같은 前例를 따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如前히 副統領의 當選 恐怖는 國會議長이 하도록 돼있었음으로 國會는 辭退 亦是 國會議長의 宣布로 效力이 생기는 것으로 하는 것이 合意되었다. 이재학 國會副議長이 場面의 辭表가 接受되었음과 場面이 辭任하였음을 發表함으로써 問題는 一段落되었고, 이는 얼마 後 李承晩 大統領의 辭表를 修理할 때도 똑같이 適用되어 李承晩 大統領의 辭任은 곽상훈 國會議長의 宣布로 公式化되었다. [37]

事態 收拾과 第2共和國 出帆 [ 編輯 ]

副統領 場面 4月 25日 에 미리 辭退하였으므로 闕位 中인 副統領 國務總理 를 代身하여 外務部 長官인 許政 (許政)李 首席 國務委員 資格으로 內閣首班 兼 大統領 權限代行에 就任하였다. 以後 6月 허정은 權限代行職을 一時 辭退하였으나 곽상훈 이 一週日만에 辭退하므로 다시 大統領 權限代行에 就任하였다.

허정의 李承晩 亡命 周旋 [ 編輯 ]

5月 29日 새벽 大統領 權限代行 兼 內閣首班 許政 은 이수영 外務部 次官에게 이화장 으로 가서 直接 李承晩 內外를 모시고 나오도록 指示하고, 그는 直接 金浦空港 으로 나갔다. [38]

이른 새벽이어서 空港 職員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아, 나는 그들을 깨우게 하고 이 博士의 出國 準備를 갖추었다. 이윽고 이 博士 內外를 태운 車가 새벽의 어둠 속에 到着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京鄕新聞 의 取材 지이프가 뒤를 따르고 있지 않은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博士 出國의 눈치를 채고 밤을 새워 이화장을 지켰다는 것이다. [38]

허정의 李承晩 出國 情報를 入手한 京鄕新聞 은 5月初 이화장 에 사람을 보내 李承晩 의 動態를 監視했다. [38]

金浦空港 에 미리 到着하여 李承晩 內外를 面談했다. 李承晩은 그의 손을 잡고 '바쁜데 왜 여기까지...'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38] 뒤따라온 新聞記者가 이 博士에게 所感을 묻자 옆에서 프란체스카 도너 가 代身 對答했다. [38] 허정은 '더 遲滯하는 것이 좋지 않을 듯 해서' 李 博士 內外를 飛行機 內로 案內했다.

CAT 傳貰機는 整備 關係로 約 한 時間 동안 遲滯하고 있었다. 넓은 飛行機 안에는 이 博士 內外와 내가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默默히 앉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李 博士나 나나 이 瞬間에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38]

當時 李承晩을 배웅한 許政 에 依하면 '나는 李承晩 의 아픈 心情을 直接 느끼는 듯해서 목이 메었다. [39] '고 回顧했다.

飛行機의 整備가 끝나고 出發을 알리자, 이 博士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李承晩: 나 하와이에서 暫時 쉬고 아이크가 오기 前에 돌아오겠소.

虛 情: 念慮 마시고 푹 쉬고 오십시오. [39]

이 말 以外에는 더 以上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이 博士와 내가 直接 나눈 마지막 말이 될 줄이야. [39]

以後 프란체스카 도너 오스트리아 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 直接 프란체스카 도너 의 便宜도 봐 주었고, 與圈도 發給해 주었다.

그는 甚至於 '閣僚들까지도 모르게' 祕密裏에 李承晩 의 出國을 推進 [40] 했다. 이는 허정이 單獨으로 祕密裏에 駐韓 美國 大使館 大使와 相議하여 李承晩 을 出國시켰던 것이다. [40]

李承晩 부처를 태운 飛行機가 日本을 거쳐 하와이로 건너갈 때쯤 허정은 바로 公報室 을 통해 李承晩 의 出國을 發表했고, 國會 言論 과 國民은 李承晩 의 出國 問題로 論難을 벌였다. [39] 李承晩 이 亡命하자 國會에서는 抗議가 빗발쳤다. 場面 은 그를 李承晩 의 心腹이라고 評價하였다. [41] 그러나 허정은 卽時 角의 (閣議)를 열고 平素 李承晩 과의 私的 關係라든가 其他 여러 가지 事理로 보아 할 수 없이 그와 같이 斷行하였다는 말을 하면서, 이에 對해서는 自己가 責任을 지겠노라고 하였다. [40]

5月 30日 國會 에서는 李承晩 亡命에 對한 責任追窮이 있었다. [42] 허정은 國會에 불려가서 李承晩 出國의 經緯를 說明했다. [39] 國會議員 들 中에는 李承晩의 出國 措置에 對한 그의 責任을 追窮하는 사람도 있었다. [39] 양일동 國會議員 은 그에게 李承晩 亡命의 責任을 追窮하였다. 양일동 議員 의 追窮에 허정은 어쩔 수 없었다고 答辯했다. [42]

李 博士는 健康이 나빠 하와이 로 療養次 旅行한 것이며 外交官 旅券을 周旋해 주었다고 말하고, 이 博士의 이恨(離韓)은 오히려 時局收拾에 도움이 될 것이며 必要하면 언제든지 召還할 수 있다. [42]

한便 場面 民主黨 代表는 過渡政府에 李承晩 의 脫出 經緯와 眞相을 밝히도록 要求하고 腐敗와 獨裁와 虐政에 引責·謝過하지 않고 亡命함은 無責任한 行動이라는 聲明을 發表하여 政府를 非難했다. [42] 그가 說明을 마치고 下端瑕疵 곽상훈 議長과 그 밖의 많은 幹部들은 '令監 잘 내보냈소.'라며 오히려 허정을 激勵해 주었다. [39] 그는 國會 에 나가서도 그러한 經緯 [43] 를 仔細히 說明하고 諒解를 求함으로써, 그 일을 無事히 매듭지었다. [40] 그러나 윤치영 李承晩 의 最側近들은 個人的으로 李承晩을 祕密裏에 出國 措置시킨 허정을 批判하였다.

한 두어 週日 後에는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淡淡한 表情으로 떠나간 李 博士는 이것이 永永 살아서 故國과의 離別이 되고 말았으니 그런 일을 꾸민 仔細한 陰謀가 이제는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意味에서나 個人으로는 當時의 政府를 책임지고 있었던 許政 過渡政府 首班과 하와이로의 一時 療養을 勸告한 매카나기 駐韓美國 臺詞와 그 旅行을 위해 심부름을 맡았던 이수영(李壽榮) 外務次官에게 그 經緯를 묻고 싶다. [44]

한便 李承晩의 側近 윤치영 , 장택상 李承晩 의 最側近들은 그가 매카나기 駐韓美國大使 및 이수영 外務部 次官 等과 陰謀를 꾸며 李承晩 을 海外로 몰아냈다고 聲討하였다.

第2共和國 出帆 [ 編輯 ]

1960年 5月 민,참의원 總選擧 候補 登錄이 있었고, 이때 自由黨 員들에 對한 集團的인 落選運動과 選擧妨害運動이 있었다. 그러나 第1共和國 의 高官이자 釜山政治波動의 主役으로 규탄받던 장택상 , 이범석 等은 學生들의 候補者 辭退 要求를 默殺하고 民議員 選擧에 出馬하여 當選되었다. 7月 29日로 豫定된 第5代 總選擧에 關心을 보인 美國은 親美性向이 强한 場面 을 選擇했다. 7月 11日 美國 大統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는 서울의 駐韓 美國大使에게 長文의 訓令을 보냈다. [32] :66 訓令에서 場面을 指導者로 選拔하는 것이 理想的인 選擇임을 주지시키고, 이 點을 許政 에게 말한 뒤, 張勉에게 指導者 자리를 受諾하도록 隱密히 要請하라고 注文하였다. [32] :66 [45]

6月 12日 內閣制 改憲案이 通過되면서 國務總理로 內閣首班이었던 許政 을 推戴하였다. 그리고 8月 12日 國會 選擧를 통해 大統領 윤보선 을 選出했다. 그러나 民主黨 舊派이자 한민당 出身이었던 윤보선 은 같은 舊派 出身의 김도연 을 總理로 指名하려 했고, 이 때문에 민주당 新派가 集團 反撥, 自由黨은 自由黨대로 민주당을 흔들기 위해 反對하여 落馬했다. 8月 18日 2次로 指名한 민주당 新派의 場面 李 總理로 當選됨으로써 第2共和國 이 出帆하였다.

하지만 제2공화국은 얼마 못 가 이듬해인 1961年에 朴正熙 가 主導한 5·16 軍士政變 에 依하여 幕을 내리게 되고 1979年 까지 持續될 朴正熙의 長期執權이 始作되었다.

4.19 發砲命令事件, 場面 副統領 狙擊 背後事件 等 6代 事件을 審理한 서울地方法院(裁判長 장준택, 최석봉, 김동정)은 被告人 48名에 對한 言渡 公判에서,

被告人 職責 罪名 處分
發砲 命令 事件
최인규 (1919年) 內務長官 殺人敎唆 死刑
조인구 治安局長 殺人敎唆 懲役3年
유충렬 서울市警 局長 殺人
選擧法違反
業務上 橫領
虛僞公文書作成과 行事
死刑
곽영주 景武臺 警護室荏子 殺人
權利行使妨害
租稅犯處罰法違反
死刑
백남규 서울市警 警備課長 殺人 無期懲役
場面 副統領 狙擊 背後 事件
임흥순 서울市長 殺人未遂
賂物收受
虛僞公文書 作成과 行事
選擧法違反
死刑
이익흥 內務長官 殺人未遂 死刑
김종원 治安局長 殺人未遂
僞證
死刑
장영복 治安局 特定課長 殺人未遂
僞證
死刑
박사일 治安局 中央分室長 殺人未遂
僞證
選擧法違反
死刑
오충환 서울市警 伺察課長 殺人未遂
僞證
死刑
政治깡牌 事件
신도환 反共靑年團腸 選擧法違反 等 懲役7年
임화수 反共藝術人團腸 懲役10年
유지광 懲役10年
임상억 懲役5年
강승일
이정식
문장주
차순환
신동호
주요한
김성종
김태련
潮熱勝
홍영철 懲役3年
최창수
李京洙
박호 懲役2年6個月
오윤석 懲役1年6個月
김복록
백청일,원민수,이수보,김재운,姜孝祥 短期3年 長期5年
서울市, 京畿道 選擧事犯 事件
최응복 서울市 副市長 選擧法違反 懲役2年6個月
김용진 서울市 內務局長 懲役3年
김남희 서울市警 伺察課長 選擧法違反
虛僞公文書 作成 等
業務上 橫領
懲役5年
최헌길 京畿道知事 選擧法違反
虛僞公文書 作成 等
懲役7年
이순구 京畿道 內務局長 選擧法違反 懲役3年
이상국 治安局 特定課長
고종엽 京畿道 伺察課長 選擧法違反
職權濫用
懲役5年
고상원 서울市警 保安課長 虛僞公文書 作成 等
業務上 橫領
懲役3年
民主黨 顚覆 陰謀事件
辛酸한 法務部 次官 無故 敎師 等 懲役2年
이태희 懲役4年
김시현 民議員 無故 懲役8個月
유시태
第3勢力 除去 陰謀事件
이정재 殺人敎唆 懲役10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反應 [ 編輯 ]

1960年 當時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指導部는 4月 19日 '피의 火曜日'에 分明히 李承晩 의 辭退를 豫見하였다. [46] 4月 21日 金日成 李承晩 의 後繼者를 言及하며 反共聯盟 議長 장택상 을 그 後繼者로 指目하였다. [46] 그러나 장택상 에 對한 美國 의 信賴를 疑心했다. [46] 이어 김일성은 李承晩 의 後繼者들에 對해 展望하면서 美國 이 難處한 立場에 處해 있다고 말했다. 李承晩은 年齡上 到底히 안되는 狀態인 바, 特히 最近들어 權威를 엄청나게 毁損당하였다고 말했다. [46]

그를 交替해야 한다. 그러나 充分한 權威와 特色을 지닌 人物이 없다. 또 다시 副統領 利子 民主黨 最高委員인 가톨릭 信者 場面 도 適合하지 않다. 그나마 權威를 누리고 있었던 조봉암 進步黨 黨首는 平和的 祖國統一이라는 黨 綱領을 性急하게 公表하는 바람에 李承晩 의 命令으로 逮捕돼 지난해 處刑되고 말았다. 부르조아 민주당 最高委員인 조병옥 1960年 3月 15日 大選候補였으나 選擧를 며칠 앞두고 急死했다. 現在로서는 南朝鮮 政治指導者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人物은 反共聯盟 議長 장택상 이다. 그러나 그는 親日 性向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美國 은 그를 信賴할 수 있는지 망설이고 있다. [46]

한便 金日成 은 國際部長 박용국 을 시켜 駐韓美軍만 撤收되면 南韓의 平和的 接受도 可能할 것이라며 國際社會에 對한 說得을 注文하기도 했다.

1995年 國立墓地로 昇格된 以後 2007年 5月 19日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側에서 4.19 國立墓地에 訪問했다. 홍성옥 委員長은 芳名錄에 "4.19 勇士들의 不屈의 鬪爭 精神과 意志를 안고 日本의 過去 淸算을 위한 活動에서 朝鮮 民族의 大衆的 和合으로 鬪爭할 때 勝利를 達成할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北側 一行을 案內한 所長은 "이들이 4.19에 對한 깊은 背景 知識을 갖고 찾아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4.19라는 ‘革命’의 意味를 되새기면서 接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47]

評價 [ 編輯 ]

公州 老人會에서 세운 4·19 革命 記念碑

革命의 意義 [ 編輯 ]

김성식은 當時 《 思想界 》寄稿를 통해 4月革命의 意義를 7가지로 提示했다.

  1. 民主主義는 苛烈한 鬪爭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이것만이 價値있다는 것을 經驗한 點.
  2. 革命의 成功으로 外國으로 하여금 우리 民族을 높이 評價하게 하였다는 點.
  3. 革命은 不正選擧가 原因이나 根本精神은 20年間 累積된 腐敗政治와 社會惡에 對한 抗拒였다는 點.
  4. 革命으로 舊體制가 무너지고 새 民主體制가 成立했다는 點.
  5. 革命으로 反共 이데올로기가 크게 弱化되었다는 點.
  6. 革命으로 世界 民主運動史에 同參하게 되었다는 點.
  7. 革命으로 市民의 全體的인 改革이 始作되는 同時에 韓國 學生들의 政治, 道德的 更新과 成熟의 契機가 되었다는 點이다.

前 靑瓦臺 首席 김정남 은 4月革命의 精神은 "反獨裁 民主 , 反外勢 자주 , 反分裂 統一 , 反旣得權 民衆 注意"라고 斷言하고 이는 李承晩 政權에 對한 否定을 넘어서는 것으로 政權打倒뿐만 아니라 向後 未來의 共同體的 以上을 提示했다면서, 4月革命은 "우리 社會가 반드시 始作해야 할 시원, 故鄕이요, 반드시 이루어야 할 以上, 目標로서 繼續 進行되고 있다"고 했다. 4.19革命은 民族正氣이자 魂이요 生命이고 永遠히 타오르는 民族의 숨결이고 精神이라는 것이다.

歷史學者 서중석 은 4月革命을〈낡은 것, 썩은 것을 退治하고 4月의 봄같이 새 生命이 돋아나는 새 世上을 만들자는 運動이었다〉고 했다. 李承晩과 自由黨 幹部의 大多數를 차지한 親日派가 썩은 것으로 이를 몰아내고, 官尊民卑, 男尊女卑 等 온갖 人間差別的 낡은 封建因習을 打破하는 것이었다. 4月革命은 모든 退嬰的인 것, 沈鬱하고 抑壓된 것으로부터 解放되는 것이었다. 革命으로 韓國人은 一種의 '社會的 民主主義'라는 '精神革命'을 經驗했다고 評價했다. [48]

"不正選擧 다시 하라!"를 目標로 出發한 이 革命은 大韓民國 大統領 李承晩 의 退陣과 이기붕 에 對한 審判이라는 期待 以上의 成果를 얻었다는 評價가 있다.

否定的 評價 [ 編輯 ]

歷史學者 兼 言論人 한홍구 에 依하면 '學生들과 市民들이 흘린 피의 受惠者가 된 民主黨 政權 은 '革命의 繼承者'이기보다는 李承晩 政權 樹立 當時 權力의 配分에서 排除된, 어떤 意味에서 自由黨 政權보다 더 保守的인 集團이었다. [49] '는 評價를 내렸다. 이 때문에 第2共和國은 國民들의 民主化 要求 噴出을 受容하지 못하였고, 4.19革命은 未完의 革命 이라 불리게 되었다.

自由黨 支持勢力과 一部 右翼勢力 等 一角에서는 4.19를 革命으로 認定하지 않고 '事態'로 보기도 한다. 代表的으로 李承晩 의 側近 윤치영 , 許政 等은 '4.19 事態'라고 評價하였다.

李承晩 의 側近이었던 許政 은 4.19 事態 [50] 라고 評價하였다. 그에 依하면 4.19 事態는 革命으로 보고 싶지 않다 [50] 고 하였다. 許政 은 또 '4月의 獅子들의 民主回復을 위한 鬪爭은 義擧였고 決코 革命은 아니었다. [50] '는 것이다. 許政 에 依하면 '4.19 事態는 꺼져가는 民主主義 의 횃불을 지키려는 의로운 蹶起였을 뿐 政權에는 조금도 뜻이 없던 限없이 透明한 젊은 愛國心의 發露였다. 이러한 義擧는 革命과는 分明 區別되어야 한다. [50] '고 하였다. 그는 '4.19 義擧는 革命이 아니다' [51] 라고 評價하였다.

李承晩 의 다른 側近이었던 윤치영 은 4.19를 두고 김창룡 의 夭折을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윤치영 김창룡 이 오래 살았다면 4.19 事態와 같은 허술한 事態 處理로 李承晩 이 脈없이 下野하는 일은 決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52] 윤치영 은 4.19에 對해서도 否定的이었다. 그는 4.19를 '4.19 事態'라고 보았다. [52]

기타 [ 編輯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 하는가. // 네가 본 건, 먹구름 / 그걸 하늘로 알고 / 一生을 살아갔다. //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 쇠 缸아리, / 그걸 하늘로 알고 / 一生을 살아갔다. // 닦아라, 사람들아 / 네 마음속 구름 / 찢어라, 사람들아, / 네 머리 덮은 쇠缸아리 // 아침 저녁 /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 티없이 맑은 永遠의 하늘 / 볼 수 있는 사람은 / 畏敬을 / 알리라 // 아침 저녁 / 네 머리 위 쇠 港아릴 찢고 / 티 없이 맑은 舊怨(久遠)의 하늘 / 마실 수 있는 사람은 // 憐憫(憐憫)을 / 알리라 / 차마 삼가서 / 발걸음도 操心 / 마음 아모리며, // 서럽게 / 아, 嚴肅한 世上을 / 서럽게 / 눈물 흘려 // 살아가리라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全體, 初版 1979年, 改訂版 1989年에 내놓은 같은 이름의 詩集,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 收錄된 新東엽 의 代表的인 參與 抵抗詩, 4.19革命에 直接 參與하여 피를 흘렸던 詩人 新東엽 은 4.19 때는 잠깐 맑은 하늘이 빛났다고 읊었다)’- 1960年 新東엽 은 健康을 되찾아 서울에 있는 '교육평론사'에 就業한 뒤 城北區 동선동에 터를 잡았다. 그해 《學生革命詩集》을 執筆하며 4·19 革命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新東엽 을 가리켜 '4.19 是認'으로 評價하고 있다.


‘껍데기는 가라. /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동학年(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聲만 살고 / 껍데기는 가라. // 그리하여, 다시 / 껍데기는 가라. /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 阿斯達 아사녀가 / 中立의 醮禮廳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 맞절할지니 // 껍데기는 가라. / 한라에서 白頭까지 /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全體, 4.19를 떠오르게 하는 1967年 1月 《52인 詩集》에 收錄된 新東엽 의 代表的인 詩)’

한便 國會議長 을 지낸 이만섭 에 依하면 4.19의 直接的인 原因이 이기붕 이라는 見解를 내놓았다. 이기붕 을 無理하게 副統領으로 만들려던 것이 4.19의 原因이 되었다고 解釋했다. 野黨 大統領 候補가 죽었으니 李承晩 大統領 候補가 이미 當選된 거나 마찬가지이기에 副統領은 野黨은 場面이고 與黨은 이기붕인데, 그 前에도 張勉 博士가 副統領을 했고 굳이 李起鵬이 副統領이 될 必要는 없었지만 끝내 副統領에 당선시키려고 自由黨에서 애를 썼는데 無理數를 두다가 事端이 났다는 主張이다. [53]

論難 [ 編輯 ]

1960年 3月15日 李承晩 政權 의 不正選擧에 抗拒해 午後 3時30分 慶南 馬山 에서 1千餘 名의 市民, 學生이 民主主義 萬歲를 외치며 거리에 나섰다.

歷史에 記錄된 3.15 義擧는 이처럼 馬山에서 처음 始作된 것으로 記錄하고 있다.

하지만, 湖南 4·19 革命團體總聯合會는 光州 가 馬山보다 3時間 앞서 流血蜂起가 일어났다며 歷史 바로세우기에 나섰다.

湖南 4·19 革命團體總聯合會는 이날 光州 東區 충장로 에서 李承晩 不正選擧를 糾彈했던 '穀(哭) 民主主義 葬送' 데모를 再現했다.

投票所에서 不正 票를 發見한 한 市民이 選菅委에 抗議하자 政治 깡牌가 無慈悲하게 暴行한 것이 發端이 돼 市民 1千餘 名이 낮 12時45分부터 금남로에 모여 不正選擧를 糾彈하는 데모를 벌였다.

'民主主義 死亡을 哀悼한다'는 意味로 喪服을 입고 行進을 繼續하던 示威隊는 警察에 依해 無慈悲하게 鎭壓되고 만다.

李承晩 政權의 3·15 不正選擧에 抗議하는 첫 流血 示威로 記錄된 民主主義 葬送 데모로 수많은 負傷者가 續出했다.

全羅南道 光州 에 이어 午後 1時에는 慶尙南道 晋州 에서 民主黨 黨員들이 示威를 벌였고, 午後 3時30分 慶尙南道 馬山 에서 大規模 示威가 벌어져 金朱烈 烈士가 催淚彈에 맞아 숨졌다.

金 烈士의 屍身이 4月 11日 發見되고 結局 4.19 革命으로 이어졌지만, 光州에서 일어난 民主主義 葬送 데모가 事實上 導火線이 됐다는 것이 4·19團體의 主張이다.

김영용 湖南 4·19革命團體總聯合會 會長은 "光州에서 일어난 民主主義 葬送 데모가 馬山보다 3時間 앞섰는데도 歷史는 馬山에서 처음 始作된 것으로 記錄하고 있어 誤謬를 바로잡고자 行事를 열었다"며 "事實上 4.19 革命의 導火線이 된 것은 光州 3·15義擧"라고 말했다.

金 會長은 이어 "4·19革命의 精神은 民主와 統一인데, 統一精神은 5·16 軍士 쿠데타 로 容共으로 몰려 歷史에 묻혔다"며 "歷史를 바로잡고 그날의 첫 意志를 살려 統一로 가야한다"고 强調했다. [54]

參考 文獻 [ 編輯 ]

  • 年歲가 記錄한 1960年 4月 革命 靑年의 힘!: 正義의 旗발! 自由의 喊聲! 民主의 길!, 연세대학교 博物館 (서울: 연세대학교 博物館, 2020年)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1]
  2. 4.19 墓域 整備 幽宅 450坪 늘려
  3. [2]
  4. '催淚彈 박힌 金朱烈' 世界에 알렸던 許從 氏 別世 2008年 3月 23日 慶南道民一步
  5. <焦點(焦點)> 35周年 맞아 格이 달라지는 4.19 革命 , 《 聯合뉴스 》, 1995年 4月 17日
  6. 4.19 革命精神,永遠히 빛나리라 , 《더타임즈》, 2008年 4月 18日
  7. 中央選擧管理委員會 1981, 743
  8. 한대광 記者 (2008年 4月 17日). “自由黨 ‘3·15選擧’서 40% 造作投票 試圖” . 京鄕新聞 . 2010年 4月 14日에 確認함 .  
  9. [3] 韓國近現代史事前 2005. 9. 10.
  10. [4] 韓國近現代史事前 2005. 9. 10.
  11. 慶南CBS 최호영 記者 (2010年 3月 15日). “50年 前 오늘, 最初의 民主化 喊聲이 울려퍼졌다” . 노컷뉴스 . 2010年 3月 30日에 確認함 .  
  12. "3·15義擧 廣州서 始作"…民主主義 葬送 데모 再現
  13. 없어진 手榴彈은 1~3個, 2個 爆發
  14. 이훈성 記者 (2010年 1月 10日). " 4·19는 未完의 革命 아닌 韓國民主化의 母胎 " . 韓國日報. 2010年 3月 3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3月 30日에 確認함 .  
  15. 윤보선, 《외로운 選擇의 나날》 (동아일보사, 1990) 465페이지
  16. 윤보선, 《救國의 가시밭길》 (韓國政經社, 1967) 71페이지
  17. 윤보선, 《외로운 選擇의 나날》 (동아일보사, 1990) 466페이지
  18. 祕話 第1共和國 (532)
  19. 祕話 第1共和國 (533)
  20. 20日 새벽까지 射擊戰
  21. 4.19革命 Archived 2011年 11月 23日 - 웨이백 머신 各界 人士 證言錄 參照
  22. 靑年學生의 힘:正義의 旗발! 自由의 喊聲! 民主의길 !(서울: 연세대학교出版部, 2020), 88-89.
  23. 金炳哲 記者會見, 1960年 8月 13日, 연세대학교博物館, 2020年 7月 中旬 발구르, 記錄者 김희동
  24. 연세대학교 博物館, 4.19革命 60周年 記念 特別展, 年歲가 記錄한 1960年 4月革命 "靑年學生의 힘"
  25. 발로 뛰어 記錄한 '4月의 證言'…'國家 文化財' 된다.
  26. 10年 非公開” 約束하고 받은 ‘4.19 피의 證言’ 文化財 된다
  27. 許政, 《來日을 위한 證言》 (샘터사, 1979) 227페이지
  28. 許政, 《來日을 위한 證言》 (샘터사, 1979) 228페이지
  29. 弔辭/朴正熙가 李承晩에게 - 조갑제
  30. 이기택, 《韓國野黨史》 (백산서당, 1987) 122페이지
  31. 이기택, 《韓國野黨史》 (백산서당, 1987) 12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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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許政, 《來日을 위한 證言》 (샘터사, 1979) 231페이지
  39. 許政, 《來日을 위한 證言》 (샘터사, 1979) 232페이지
  40. 許政, 《來日을 위한 證言》 (샘터사, 1979) 30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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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李承晩 을 祕密裏에 出國시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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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한홍구 (2001年 2月 14日). “單 한番도 王의 목을 치지 못한…” . 《한겨레21》 (第346號) . 2007年 12月 22日에 確認함 .  
  50. 許政, 來日을 위한 證言:許政 回顧錄 (샘터사,1979) 243페이지
  51. 許政, 來日을 위한 證言:許政 回顧錄 (샘터사,1979) 24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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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492852
  54. [5] 聯合뉴스 2013. 3. 15.

外部 링크 [ 編輯 ]

  • 위키미디어 公用에 4·19 革命 關聯 미디어 分類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