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東엽 (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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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東엽
申東曄
作家 情報
出生 1930年 8月 18日
日帝强占期 忠淸南道 扶餘郡
死亡 1969年 4月 7日 ( 1969-04-07 ) (38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國籍 大韓民國
言語 大韓民國
職業 是認
筆名 號(號)는 石淋(石林)
장르
受賞 銀冠文化勳章 (2003年)
父母 아버지 신연순, 어머니 김영희
配偶者 인병선
子女 아들 신좌섭, 신우섭
딸 신정섭
親知 丈人 인정식

新東엽 (申東曄, 1930年 8月 18日 ~ 1969年 4月 7日 )은 大韓民國 是認 이다.

忠淸南道 扶餘 出生으로 本貫은 평산 (平山)이고 號는 石淋(石林)이다. 1959年 朝鮮日報 新春文藝에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垈地》가 當選되면서 本格的인 作品活動을 始作하였다.

生涯 [ 編輯 ]

初期 生涯 [ 編輯 ]

申東曄은 1930年 8月 18日 忠淸南道 扶餘郡 부여읍 동남리에서 農事를 짓는 아버지 신연순과 어머니 김영희 사이 1男 4女 中 長男으로 태어났다. 1944年 扶餘 國民學校를 首席으로 卒業했고, 같은 해 國家에서 宿食과 學費를 支援해 주는 全州師範學校에 入學했다. 김응교 詩人이 쓴 民族詩人 新東엽(四季節)에 따르면 申東曄의 才能을 發見한 사람은 그의 父親 신연순이었다. 性格이 차분한 아들을 보면서 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6살때부터 글을 가르쳤으며, 없는 살림이었지만 을 마련하였다. 또한 師範學校 時節에 讀書에 힘씀으로써 아나키즘 이라는 自身의 생각을 만들어 갔다.

學窓 時節 [ 編輯 ]

그는 1948年 11月 李承晩 政權의 土地改革 未實施와 親日 未淸算에 抗議하는 同盟 休學으로 學校에서 退學되었다. 故鄕으로 내려가 있었던 申東曄은 1949年 扶餘 周邊에 있는 初等學校 敎師로 發令을 받았다. 師範學校에서 退學되었지만 敎員資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3日 만에 敎師職을 그만두고 檀國大 史學科에 入學했다. 當時 父親은 司法 敍事로 勞動 을 해서 버는 돈으로는 學費를 대지 못했기 때문에 밭을 내놓았다. 學問 을 하겠다는 아들의 뜻을 尊重한 것이었다.

韓國 戰爭 時期 [ 編輯 ]

1950年 6.25 戰爭 이 일어 故鄕으로 내려가야 하였다. 戰爭으로 民衆들이 죽어가는 모습은 서울에서는 목숨을 扶持할 수 없음을 말해주었다. 1950年 7月 15日 人民軍이 附與를 占領하였다. 人民軍은 土地改革과 組織事業으로써 共産主義를 實踐하고 있었다. 동엽은 政治에 關心이 없었지만,동엽의 知識을 組織事業에 活用하려는 人民軍의 要求로 그해 9月 末까지 扶餘 民主靑年同盟(民靑)宣傳部長으로 일하였다. 그런데 이는 그가 共産主義者 라서가 아니었다. 동엽은 世上을 바꿔가야 한다는 共産主義者들의 생각에 同意했지만, 동엽의 생각은 共産主義者가 아니라 無政府主義者 였다.

1950年 末 國民防衛軍 에 徵集됐다. 1951年 4月 30日 國民防衛軍이 解體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國民防衛軍 事件 參照), 집에 오다 굶주림 때문에 를 먹는 바람에 간 디스토마 에 感染되고 말았다.

作家 데뷔 [ 編輯 ]

헌冊房 [ 編輯 ]

1953年 檀國大 를 卒業한 뒤 第1次 空軍 學徒幹部 候補生에 支援, 合格을 했으나 發令은 받지 못했다. 그 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自炊房을 얻었다.

그리고 親舊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 거리에 헌冊房을 열었다. 申東曄은 이때 이화女高 3學年이던 夫人 인병선 [1] 을 만났다. 1957年 인병선과 結婚한 뒤 故鄕으로 落鄕했다.

이때 인병선은 가난을 克服하기 위해 扶餘 邑內에 洋裝店을 열었다. 이와 함께 新東엽 또한 忠南 保寧郡 珠算農業高等學校 敎師로 赴任하였다. 1958年 咯血을 同伴한 肺結核 을 앓게 되면서 學校를 그만두고, 서울 돈암동 妻家에 아내와 子女를 올려 보낸 뒤 故鄕 扶餘에서 療養하며 讀書와 글쓰기에 빠진다.

1959年 讀書와 文學 習作에 沒頭하다 長詩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垈地(大地)〉를 石淋(石林)이라는 筆名으로 朝鮮日報 新春文藝 에 當選되어 文壇에 나왔다.

白馬江 기슭에 있는 新東엽 是非
新東엽 是非(앞面 '山에 언덕에')
新東엽 是非(뒷面 略歷)

1960年 申東曄은 健康을 되찾아 서울에 있는 '교육평론사'에 就業한 뒤 성북구 동선동에 터를 잡았다. 그해 《學生革命詩集》을 執筆하며 4·19 革命 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申東曄을 가리켜 '4.19 是認'으로 評價하는 文人들이 많다.

그리고 後날 4·19 革命 의 記憶을 되살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와 '껍데기는 가라'라는 詩가 나올 수 있었다. 1961年 명성여고 夜間部 敎師로 安定된 職業을 얻게 되어 始作에 沒頭할 수 있는 機會를 얻게 되었다. 1964年 建國大 大學院 國文科를 卒業했다. 1963年 詩集 《아사녀》를 出刊하고 1967年 長篇敍事詩 《金剛》을 發表했다.

1969年 4月 7日 肝癌 이 惡化되어 40歲의 젊은 나이에 死亡했다.

證言 [ 編輯 ]

現在 짚풀生活史 博物館長으로 있는 夫人 인병선 은 “1959年에 市가 入選되고 난 後라 (申東曄 詩人이) 서울에 있었다. 그때 디스토마를 앓고 있었는데 病도 좀 낫고 해서 就職을 하려는 時點이었다. 그런데 그 날 아침에 나간 사람이 하루 終日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에 들어왔는데 얼굴은 上氣돼 있었고 눈은 淸明하게 빛나고 있었다”고 4.19 當時 申東曄 詩人의 하루를 紹介했다. “온 몸과 구두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걸로 봐서 하루 終日 돌아다닌 것 같았다”훗날 4.19 詩人으로 評價받는 申東曄 詩人 스스로가 바로 그날 歷史의 現場 한복판에서 民主主義의 喊聲을 온몸으로 느꼈다는 證言인 셈이다.

申東曄 詩人은 인정식 先生을 누구보다 尊敬하고 있었다. 印 氏는 “데이트를 始作한지 3日 되던 날, 申東曄 詩人이 아버지의 姓銜을 물어봤다. 내가 姓銜을 말하니까 갑자기 걸음을 멈추면서 깜짝 놀라더라. 自身이 宏壯히 尊敬하는 분이고 그 분의 冊도 다 읽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當時 우리 아버지에 對해 周圍 분들도 偏見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思想的 問題 때문에 나도 學校에서 宏壯히 외롭고 왕따를 當하는 立場이었는데 申東曄 詩人이 그렇게 말해줘서 내가 너무 感動받아 마음을 今方 준 것 같다”고 밝혔다. 急速度로 사라져가는 農村 文化를 되살리고자 줄기차게 硏究해온 ‘짚풀文化’가 이제 그의 男便이다. [2]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 하는가. // 네가 본 건, 먹구름 / 그걸 하늘로 알고 / 一生을 살아갔다. //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 쇠 缸아리, / 그걸 하늘로 알고 / 一生을 살아갔다. // 닦아라, 사람들아 / 네 마음속 구름 / 찢어라, 사람들아, / 네 머리 덮은 쇠缸아리 // 아침 저녁 /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 티없이 맑은 永遠의 하늘 / 볼 수 있는 사람은 / 畏敬을 / 알리라 // 아침 저녁 / 네 머리 위 쇠 港아릴 찢고 / 티 없이 맑은 舊怨(久遠)의 하늘 / 마실 수 있는 사람은 // 憐憫(憐憫)을 / 알리라 / 차마 삼가서 / 발걸음도 操心 / 마음 아모리며, // 서럽게 / 아, 嚴肅한 世上을 / 서럽게 / 눈물 흘려 // 살아가리라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全體, 初版 1979年, 改訂版 1989年에 내놓은 같은 이름의 詩集,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 收錄된 申東曄의 代表的인 參與 抵抗詩, 申東曄은 4.19 때만 잠깐 맑은 하늘이 빛났었다고 말한다)’

‘껍데기는 가라. /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동학年(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聲만 살고 / 껍데기는 가라. // 그리하여, 다시 / 껍데기는 가라. /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 阿斯達 아사녀가 / 中立의 醮禮廳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 맞절할지니 // 껍데기는 가라. / 한라에서 白頭까지 /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全體, 1967年 1月 《52인 詩集》에 收錄된 申東曄의 代表的인 詩)’

인병선은 ‘參與詩人 申東曄의 아내’나 ‘짚풀文化 硏究가’로 불리지만, 좀더 잘 아는 이들에겐 日帝 强占期 때 思想家 ‘ 인정식 氏의 딸’로도 記憶된다. 그가 神 詩人을 처음 만난 것은 哲學徒를 꿈꾸던 이화여고 3學年 때인 1953年 詩人이 일하던 서울 돈암동 古書店에서였다. “온통 그에게만 心醉해 있었다”는 印氏의 告白처럼 以後 둘은 담백하면서도 뜨거운 사랑을 주고받았다. 1957年 印氏는 서울大學校 에 入學하였지만 中退를 敢行하면서 가난한 詩人과 結婚했다.

新東엽 生家
파란 기와로 丹粧한 扶餘 生家 大門

그러나 生活人으로서 對策이 없는 申 詩人은 1969年 人氏와 2男 1女를 남기고 肝癌으로 世上을 떠났다. 以後 印氏는 只今까지 혼자 子女들을 키워내며 짚풀文化를 硏究해 왔다. 出版社 等에 다니며 生活을 꾸려나가는 한便 申東曄 詩人의 肉筆 原稿를 모아 冊을 냈다. 申 詩人이 알려진 것은 穩全히 印氏의 努力에 힘입은 結果다. 70年代 民主化의 象徵詩 ‘껍데기는 가라’는 出版되자마자 곧바로 販賣 禁止되지만 絶唱은 숨겨질 수 없었다. [3]

學歷 [ 編輯 ]

經歷 [ 編輯 ]

作品 [ 編輯 ]

申東曄은 民主勢力에 스며든 機會主義 勢力을 批判하고 統一을 노래한 〈껍데기는 가라〉를 筆頭로 <三月>, <발>, <4月은 갈아엎는 달>, <주린 땅의 指導原理>, <우리가 본 하늘> 等 여러 詩를 發表하였다. 그밖에 長詩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垈地〉, 〈女子의 삶〉 等이 있으며, <詩人精神론>, <市와 思想性> 等 評論 10餘 篇을 썼다. 遺作으로 統一을 祈願하며 쓴 〈술을 마시고 盞 어젯밤은〉 이 있으며, 事後 1975年 에 《申東曄 全集》이 나왔다. 1989年 에는 詩 〈山에 언덕에〉가 中學校 3學年 敎科書에 收錄되었다.

  • 新東엽 (1963). 《아사녀》. 文學史.  
  • 新東엽 (1975). 《新東엽 全集(增補版)(창비신서 10)》. 창작과비평사. ISBN   8936410105 .  
  • 新東엽; 신경림 (1988). 《꽃같이 그대 쓰러진》. 실천문학사.  
  • 新東엽 (1989). 《누가하늘을보았다하는가: 新東엽詩選集》. 창작과비평사.  
  • 新東엽 (1989). 《錦江》. 창작과비평사. ISBN   8936428152 .  
  • 新東엽 (1989).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개정판)(창비시선 20)》. 창작과비평사. ISBN   8936420208 .  
  • 新東엽 (1989). 《錦江 創批前作詩》. 창작과비평사.  
  • 新東엽 (1991). 《껍데기는 가라: 新 동엽 視線》. 未來事.  

事後 評論 [ 編輯 ]

  • 구중서 (1983). 《新東엽, 그의삶과문학》. 온누리.  
  • 김응교 (1994). 《錦江乙노래韓民族詩人申東曄》. 四季節. ISBN   8871965221 .  
  • 김완하 (1995). 《申東曄詩硏究》. 시와시학사.  
  • 김준오, 新東엽 (1997). 《新東엽: 60年代意味網乙위하여》. 건국대학교出版部. ISBN   8971071796 .  
  • 구중서, 강형철 (1999). 《民族 是認 申 동엽》. 疏明 出版社. ISBN   8988375106 .  
  • 新東엽 (2004). 《新東엽 (先生님과 함께 읽는)》. 실천문학사. ISBN   8939204921 .  
  • 김응교(인병선 監修) (2005). 《詩人 新東엽》. 현암사. ISBN   893231375X .  
  • 최성수 (2005). 《김수영 VS 新東엽》. 숨비소리. ISBN   8990431352 .  
  • 김응교(한병호 그림) (2005). 《新東엽(民族詩人) (四季節兒童文庫 25)》. 四季節. ISBN   8958281146 .  
  • 김응교 (2011). 《新東엽 (글누림 作家總署)》. 글누림. ISBN   8963271412 .  

未公開 時 發掘 [ 編輯 ]

1963年 7月 發行된 同人誌 '詩壇(詩壇)' 2집에서 申東曄 詩人의 詩 두 篇을 發見했다고 밝혔다.

收錄된 詩는 分斷의 民族的 아픔을 切切하게 노래한 '太陽(太陽) 빛나는 蠻地(만지)의 詩(詩)'와 12行으로 이뤄진 簡潔한 詩 '十二行詩(十二行詩)'이다. [4]

事後 記念 [ 編輯 ]

무덤 [ 編輯 ]

1969年 4月 9日 京畿道 坡州郡 금촌읍 月롱産 기슭에 安葬되었으며, 12月 14日 墓碑가 세워졌다. [5] 墓所는 1993年 11月 扶餘 로 옮겨와 능산리 古墳 의 건너便 山에 자리를 잡았다

是非 [ 編輯 ]

申東曄이 世上을 떠난 뒤 ‘新東엽 是非 建立委員會’(委員長 構想 )가 構成되었다. 文人, 同僚, 弟子 等 1百餘 名이 參與하였으며, 建立費는 26萬 3千 원이 들었고, 是非의 글씨는 박병규, 設計는 정건모, 彫刻은 최석구가 했다. 1970年 4月 18日 故鄕인 부여읍 동남리 백제교 옆 白馬江 기슭에 是非〈山에 언덕에〉가 세워졌다.

以後 申東曄의 是非는 檀國大學校 ( 1990年 ), 부여초등학교 ( 1999年 ), 全州敎育隊學校 ( 2001年 )에 세워졌다. 現在 新東엽 是非는 4군데에 세워져 있다. 단국대學의 新東엽 是非는 故 新東엽 24週期를 맞이하여, 1990年 4月, 時人을 欽慕하는 檀國大學校 敎授 在學生 同門 그리고 文段의 뜻을 모아, 그가 文學의 꿈을 키우던 단국대學(서울市 용산구 한남동) 校庭에 세워졌다가 2007年 단국대學의 竹田캠퍼스로의 移轉에 따라 現在는 檀國大學校 竹田캠퍼스 상경大學 1層 入口 앞에 세워져 있다. 부여초등학교(忠南 扶餘郡)에는 1999年 申東曄 30週期를 맞이하여 矯正에 新東엽 是非가 세워졌다. 높이 2미터 程度의 端雅한 新東엽 是非에는 〈金剛〉의 한 句節이 적혀 있다. 全州師範大學에는 2001年 5月 15日에 除幕式을 가졌다. 事犯과 3回 同期生들은 卒業 50周年 記念行事의 하나로 同期生이면서 韓國 詩壇을 빛낸 詩人의 業績을 기리기 위해 申東曄 詩人의 詩碑를 세웠다. 가로 2 미터, 세로 2.3 미터의 검은色 自然石으로 만들어진 이 是非에는 詩人의 代表作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껍데기는 가라〉일부가 새겨져 있다. [6]

申東曄 創作賞 [ 編輯 ]

1982年 그의 뜻을 기려 申東曄創作基金이 造成되어 每해 新東엽文學賞 을 授與한다. [7]

生家 復元 [ 編輯 ]

1985年 5月 遺族과 文人들이 부여읍 동남리 294番地의 新東엽 生家를 復元했으며, 2003年 2月 19日 申東曄의 아들 신우섭은 生家의 永久保存을 위해 生家를 扶餘郡 에 寄附했다. 生家 터는 274m 2 에 木造草家지붕 單層記念館 33.60m 2 , 附屬建物 木造草家지붕 單層 管理師 24.76m 2 로 되어있다. [8]

新東엽 文學觀 [ 編輯 ]

扶餘郡 에서는 生家 뒤便에 延面積 800 m 2 新東엽文學觀 을 2013年 5月 3日 開館하였다.

新東엽學會 [ 編輯 ]

2010年 9月 10日 申東曄을 사랑하는 文人들의 모임인 新東엽學會(會長 구중서 )가 서울 鍾路區 혜화동에 事務室을 열었다. 이민호 (서강대학교 敎授), 고명철 (文學評論家), 정우영 (常任理事) 等이 參與한 이 學會에서는 2010年 申東曄이 志向하던 “穩全한 人間”이라는 뜻의 전경인(全耕人)을 넣어서 《전경인 語文硏究》 創刊號를 냈다. [9]

追慕 行事 [ 編輯 ]

41周忌 追慕 行事가 2010年 4月 17日 4月 18日 兩日間 故鄕인 忠南 扶餘 에서 열렸다. 扶餘郡 , 부여문화원, 韓國作家會議 , 新東엽學會 等이 共同 開催하는 追慕行事였다. 이 行事는 부여읍 동남리 白馬江邊 新東엽 是非에서 追慕祭를 始作으로 附與靑少年修鍊院에서 이원규 詩人의 ‘늦봄의 美學, 百日紅과 新東엽’ 等 論文 發表와 함께 ‘新東엽 文學의 밤’을 가졌다. 구중서 文學評論家, 都鍾煥 詩人 等이 參席하고 맏아들 신좌섭 서울대 醫大 敎授도 參席해 아버지 申東曄을 回顧하였다.

또한 申東曄의 是非, 生家, 墓所와 錦江 等을 둘러보는 ‘新東엽 遺跡地 文學奇行’과 扶餘 정림사址 博物館에서 初·中·高生 400餘名이 詩와 散文을 겨루는 白日場이 열렸고, 4月 내내 道路邊 等에 ‘山에 언덕에’ ‘金剛’ 等 申東曄 詩人의 代表 時 額子걸기와 申東曄의 胸像 建立 모금 運動이 펼쳐졌다. [10]

受賞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 配偶者: 인병선 (1935年 6月 26日 ~ )
    • 長男: 신좌섭 (1959年 ~ 2024年 3月 30日)
      • 며느리: 정승혜
        • 孫女: 신정원
    • 次男: 신우섭
    • 長女: 신정섭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최재봉 (2006年 3月 2日). “‘詩人 新東엽’ 펴낸 否認 인병선氏” . 《한겨레》. 2013年 5月 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2月 26日에 確認함 .  
  2. 최영준 (2006年 4月 13日). “4.19 그날, 詩人 신동엽도 距離에 있었다” . 노컷뉴스. 2012年 7月 2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3月 30日에 確認함 .  
  3. 이중근; 이용욱 (2008年 3月 19日). “인병선 “欲望·陰害의 도가니더라…껍데기는 다 날렸다”” . 京鄕新聞. 2012年 7月 1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3月 31日에 確認함 .  
  4. 고미혜 (2009年 4月 7日). “40周忌 新東엽 未公開 詩 發掘” . 聯合뉴스. 2012年 7月 1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3月 31日에 確認함 .  
  5. 新, 동엽 (1985年). 《申東曄全集(修正增補版)》. (1975年 初版) 3板. 창작과비평사.  
  6. “韓國文學 巨木 輩出한 水準 높은 文學의 고장” . 2015年 10月 12日. 2017年 11月 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7. “[권은정의인터뷰무제한] 못다한 詩人과 사랑 짚풀로 엮고 엮었지” . 《한겨레》. 2006年 3月 16日. 2012年 8月 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8. 신명섭 (2003年 2月 28日). “新東엽 詩人 生家 永久保存” . 忠淸투데이. 2012年 7月 2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1月 30日에 確認함 .  
  9. 정철훈 (2011年 1月 21日). “新東엽 敍事詩 ‘金剛’에 映畫 ‘아바타’ 있다?” . 쿠키뉴스. 2012年 7月 1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1月 30日에 確認함 .  
  10. 이천열 (2010年 4月 17日). “‘껍데기는 가라’ 申東曄詩人 追慕行事” . 扶餘: 서울新聞. 2012年 9月 1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5月 20日에 確認함 .  
  11. 노형석 (2003年 10月 19日). “文化藝術界 有功者 發表” . 《한겨레》. 2012年 8月 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3月 9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