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헌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정몽헌
身上情報
出生 1948年 9月 14日 ( 1948-09-14 )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城北區 城北洞
死亡 2003年 8月 4日 ( 2003-08-04 ) (54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性別 男性
國籍 大韓民國
本館 河東
學歷 페어레이디킨슨대學校 經營大學院 DBA
前職 現代峨山 會長, 現代그룹 副會長, 共同會長, 會長
父母 아버지 鄭周永 , 어머니 변중석
配偶者 현정은
子女 1男 2女
親戚 7男 3女 中 4男

정몽헌 (鄭夢憲, 1948年 9月 14日 ~ 2003年 8月 4日 )은 大韓民國 企業人 으로, 現代그룹 副會長을 지냈다. 1975年 11月 현대중공업에 入社, 현대전자 代表理事 社長과 會長, 現代그룹 副會長, 현대건설 代表理事 會長 等을 歷任했다. 그는 현대전자(SK하이닉스의 前身) 의 設立者이기도 하다.

2002年 9月부터 對北 不法送金 事件 關聯 調査를 받던 途中 2003年 8月 4日 현대계동사옥 12層 會長室에서 갑자기 投身自殺 하였다. 그의 遺書 한 張이 사라진 點, 自殺 現場에 地文이 없는 點, 陳述 後 갑작스럽게 死亡한 點, 高層에서 投身했으나 屍身에 傷處가 別로 없는 點 等 疑惑이 存在하며, 一說에는 他殺說 疑惑이 있다. 本貫은 河東 .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정몽헌은 現代그룹 創業主인 鄭周永 의 넷째 아들로 서울 城北區 城北洞 에서 태어났다. 1962年~1965年 송파구의 寶城中學校 [1] [2] , 1965年~1968年 寶城高等學校 를 거쳐 延世大學校 國語國文科를 卒業했다. 美國 페어레이디킨스大學校 經營大學院에서 碩士 學位를 받았다.

그는 1975年 11月 현대중공업에 入社하여 현대그룹에서 活動했다. 1977年 2月 현대건설 理事가 되고, 1981年 2月부터 1988年 2月 現代商船 代表理事 社長, 1984年부터 1991年 현대전자산업 代表理事 社長, 1992年 1月부터 2000年 5月까지 현대전자산업 代表理事 會長이었다. 1996年 현대전자 代表理事 會長으로 現代그룹 副會長이 되었다. 같은 해 현대건설 代表理事 會長, 現代商船 代表理事 會長職을 겸했다.

현대그룹 總帥 [ 編輯 ]

1983年 현대전자 ( 하이닉스 의 前身)을 設立하였다. 그러나 經營權 葛藤 以後 현대그룹이 쪼개지면서 投資金을 堪當하지 못하고, 2001年 債權團에 賣却, 하이닉스 에 吸收된다.

1998年 現代그룹 副會長에서 共同會長으로 任命됐다가, 아버지 정주영이 名譽 會長이 되면서 現代그룹 會長에 就任하였다. 鄭周永 事後 金剛山 觀光 開發 事業을 主管하였다.

王子의 亂 [ 編輯 ]

2000年, 鄭周永 名譽會長의 長男인 鄭夢九 當時 現代그룹 共同 會長과 4男인 정몽헌 當時 現代그룹 共同 會長이 그룹의 霸權을 놓고 다투게 된다. 鄭夢九 會長은 정몽헌 會長이 海外 出張을 간 사이 3月 14日 밤 奇襲的으로 이익치 現代證券 會長을 고려산업개발 로 轉補시킨다. 이익치 會長은 鄭周永 名譽會長과 정몽헌 會長의 最側近이었다. [3]

이 일을 契機로 現代그룹 의 經營權 繼承을 둘러싸고 鄭周永 會長의 長男 鄭夢九 와 葛藤, 紛爭이 發生했다. 當時 大韓民國 言論에서는 朝鮮 時代 李芳遠 이방석 사이의 對立에 빗대 現代그룹 王子의 亂이라 불렀다.

2000年 3月 24日 歸國한 정몽헌 會長은 自身과 아버지의 側近인 이익치 現代證券 會長, 김윤규 現代建設 社長, 김재수 現代그룹 構造調整本部長 等을 모아 이익치 會長의 人事 發令을 無效化하고 鄭夢九 會長의 現代그룹 共同會長職을 剝奪한다. 鄭夢九 會長은 26日 아버지인 鄭周永 名譽會長을 만나 會長職 復歸 命令을 받아내지만 몇 時間 뒤 정몽헌 會長과 그의 側近들이 鄭周永 名譽會長을 만나 다시 그 命令을 無效化시킨다. [4]

2000年 3月 27日 鄭周永 名譽會長이 直接 현대經營者協議會에서 ‘정몽헌 單獨 會長 體制’를 公式 承認하면서 王子의 亂은 정몽헌의 勝利로 마무리되고 [4] 鄭夢九 會長은 8月 現代自動車 와 其他 自動車 關聯 系列社들을 가지고 現代그룹 으로부터 系列 分離를 實施해 현대자동차그룹 을 만든다.

生涯 後半 [ 編輯 ]

現代價의 ‘王子의 亂’을 거치면서 兄弟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었는데, 以後 2002年 9月에 5億 달러 對北 不法送金 事件 이 터지면서 2003年에 檢察 調査를 받았고, 推進하던 對北事業 의 蹉跌과 현대그룹의 經營 惡材로 힘든 時期를 보냈다. 2003年 2月 5日, 出國禁止가 一時 解除되자 直接 金剛山 陸路觀光 踏査에 參與하였다.

2003年 8月 4日, 서울市 종로구 季冬 현대 社屋 12層 會長室에서 遺書를 남기고 投身自殺했으나 他殺 疑惑이 있다. [5] [6] 財界 人士들은 '父親의 宿願 事業이었던 對北 事業 等 家業을 제대로 잇지 못한 것이 自殺을 選擇하게 된 動機'로 推測했다. [7] 그밖에 그의 遺書는 5章인데 4張만 發見된 것 等에 對한 疑惑도 있다. 정몽헌의 死亡 後 配偶者 현정은 이 現代그룹 會長에 就任하였다. [8]

事後 [ 編輯 ]

屍身은 京畿道 河南市 창우동 검단산 鄭周永 의 墓所 100m 地點 아래에 安葬되었다. [9] 창우동 검단산 선영에는 그의 아버지 鄭周永 의 墓, 祖父母의 墓, 정인영 한라그룹 會長, 어머니 변중석 , 큰兄 鄭夢九 의 妻 이정화 等이 安葬되어 있다.

學歷 [ 編輯 ]

經歷 [ 編輯 ]

  • 1975年 11月~1977年 1月 현대重工業 次長
  • 1977年 2月~1981年 현대건설 理事
  • 1981年 2月~1988年 2月 現代商船 代表理事 社長
  • 1984年~1991年 현대전자산업 代表理事 社長
  • 1992年 1月~2000年 5月 현대전자산업 代表理事會長
  • 1996年 現代그룹 副會長, 현대건설 代表理事 會長, 現代商船 代表理事 會長
  • 1998年 現代그룹 共同 會長
  • 1998年~2000年 현대 經營者協議會 共同 議長 (그룹 會長)
  • 2000年 3月 현대 經營者協議會 議長
  • 2000年 6月 현대아산 理事會 會長
  • 2002年 3月 현대상선 非常任理事

受賞 經歷 [ 編輯 ]

  • 1986年 鐵塔産業勳章
  • 1995年 貿易의 날 金塔 産業 勳章, 新産業 經營院 올해의 情報通信引上
  • 1998年 韓國協商學會 第3回 韓國協商對象
  • 2004年 第2回 統一文化對象

論難과 疑惑 [ 編輯 ]

정몽헌 會長은 3000萬 달러 海外送金 陳述 열흘 後인 8月 4日 死亡했다. 鄭 會長의 죽음은 自殺로 알려졌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疑問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狀態다. [10]

他殺 論難 [ 編輯 ]

平素와 다를 바 없었던 鄭會長의 모습」과 對北 祕密送金 事件, 現代 祕資金 事件 等은 鄭會長의 죽음과 關聯 여러 가지 疑惑들을 낳았다. 或是 他殺된 것은 아니냐는 疑惑들이었다. 特히 12層 높이에서 떨어졌는 데도 屍身 發見 當時 外部로 드러난 傷處가 甚하지 않았다는 點도 疑惑의 對象이었다. [11]

事件 搜査를 맡았던 當時 鍾路警察署 곽영진 刑事係長(現 202警備隊 副大將)은 『事件에 對한 國民의 關心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搜査를 오픈하다시피 했던 事件이라면서 『鄭 會長이 他殺됐을 可能性은 제로라고 했다. [11]

現場의 指紋 不在 疑惑 [ 編輯 ]

現場에서 두 次例의 現場鑑識에 정몽헌의 指紋이 發見되지 않았다. 키 174cm에 70kg이 넘는 鄭 會長이 聖人이 通過하기 어려운 半 開閉式 窓門틀을 通過하면서 指紋을 남기지 않았다. 두 次例에 걸쳐 現場 指紋鑑識을 實施한 警察도 그의 指紋을 確保하지 못했다. 窓門틀에는 산 者의 指紋만 남았을 뿐, 죽은 者의 指紋은 없었다. [12] 鄭會長의 指紋이 사라진 것도 疑惑의 對象이 되고 있다. [12]

遺書 1張 失踪 疑惑 [ 編輯 ]

정몽헌의 側近은 警察이 申告를 받고 現場에 到着하기 前 鄭 會長 周邊 人物이 鄭 會長 事務室에 먼저 다녀갔다. 그 過程에서 遺書 1張이 없어졌다고 밝혔다. [12] 월간조선 의 記者가 取材 途中 記者는 匿名을 要求한 정몽헌 會長의 最側近으로부터 사라진 遺書에 對한 證言을 들을 수 있었다. 最初 鄭會長의 事務室에는 警察이 發表한 것과 달리 遺書 5張이 鄭 會長의 冊床 위에 놓여 있었다는 內容이다. 이 대목은 월간조선 2月號의 檢察關係者 證言과 一致하는 部分이다. [12]

鄭 會長의 最側近으로 일했던 한 人士는 애初 鄭 會長이 投身한 事務室의 冊床에는 월간조선 2月號에서 檢察關係者가 證言한 대로 遺書가 4張이 아니라 5張이 놓여 있었다며 遺書 1章은 鄭 會長 周邊 人物이 警察이 現場에 到着하기 前 없앤 걸로 안다고 했다. [12] 정몽헌의 遺書 中 1章은 누가 가져갔으며, 언제 어디에서 사라졌는지, 숨기고 있다면 누가 保管하고 있는지 與否가 確認된 것이 없다.

家族 [ 編輯 ]

  • 할아버지: 정봉식
  • 할머니: 한성실

기타 [ 編輯 ]

1999年 1月 金剛山 開發 關聯 專擔法人의 이름을 牙山으로 提案했다 한다. 현대는 當初 專擔法人의 이름을 '金剛山開發株式會社'로 推進했으나, 정몽헌 會長이 '牙山'을 提案한 것으로 알려졌다. [13] 牙山은 그의 아버지 鄭周永 의 故鄕 마을 이름이자 雅號였다.

정몽헌은 寶城高等學校 58期 卒業生이고, 그의 三寸 정세영 寶城高等學校 39期 卒業生이다.

各州 [ 編輯 ]

  1. "祝賀합니다! 서울市? 男女中學合格者名單", 京鄕新聞 1961年 12月 9日子 2面, 社會面
  2. "一九六二度 男女中學 合格者 名單", 朝鮮日報 1961年 12月 9日子 2面, 社會面
  3. 최석재 記者 (2015年 10月 15日). “[財閥 經營權 骨肉相爭]鄭夢九vs정몽헌 현대 '兄弟의난' 系列分離로” . 에너지經濟 . 2018年 3月 14日에 確認함 .  
  4. 문희수 記者 (2000年 3月 24日). “[鄭夢九 현대 會長이 물러나...정몽헌회장 體制로” . 韓國經濟 . 2018年 3月 14日에 確認함 .  
  5. “정몽헌 현대아산 會長 投身自殺” . YTN. 2003年 8月 4日.  
  6. 財閥總帥만 두 番째…有力人士 왜 自殺할까 :: 네이버 뉴스
  7. 三星家 아픈 歷史… ‘悲運의 皇太子’ 만들었나?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8. 현정은 會長 외아들 정영선氏, 현대그룹 系列社서 經營 授業 2017-06-28
  9. 검단산 아버지 곁에 잠든 정몽헌 會長 오마이뉴스 2003.08.05.
  10. ‘DJ 政權 實勢 金庫지기’ 金榮浣의 行路:정몽헌 죽음의 眞實 밝혀질까 월간조선 2012年 1月號
  11. 鄭夢憲 現代 會長의 죽음의 行路 - 檢察 關係者 衝擊 證言
  12. [精密追跡] 鄭夢憲 死亡 事件의 5大 미스터리 : 2003年 8月4日 새벽, 현대社屋 12層 鄭夢憲 會長 事務室. 警察이 到着하기 前에 누군가 들어와 遺書 한 張을 들고 나갔다. 窓門틀에는 쓸려 나간 痕跡과 玄貞恩 會長의 指紋만 發見됐다 월간조선 2006年 3月號
  13. [현대] 金剛山開發 專擔 (週) 牙山 이달末 設立 朝鮮日報 1999.01.18.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鄭夢九
第4代 現代그룹 會長
1998年 11月~2000年
後任
현정은
現代그룹 經營者協議會 議長
1998年~2000年
後任
현정은
現代峨山 理事會 議長
2000年 6月~2003年
後任
현정은 (그룹 會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