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수 三星醫療院場이자 ‘李健熙 主治醫’였던 이종철 前 院長이 慶南 昌原의 保健所長으로 자리를 옮긴 건 70歲이던 6年 前이었다. “故鄕에서 마지막 醫療活動을 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렇게 4年間의 昌原살이를 마치고 自由人으로 돌아갔던 그에게 올해 初 電話 한 通이 걸려왔다. 江南區保健所長職을 제안받고 ‘醫療人生 第3幕’이 열리는 瞬間이었다.지난달 中旬 새 業務를 始作했다는 이 所長의 事務室에 걸린 日程表 판은 벌써 빽빽했다. 記者와 만난 이 所長은 “臨床 醫師, 大型病院長과 地方 保健所長의 經驗 세 가지를 엮어 公共醫療 活性化를 試圖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 進行 中인 現實은 ‘醫大 增員 2000名’으로 불거진 醫療 跛行이다. 그는 “이대로 長期化하면 엄청난 醫療 退步가 일어날 것”이라며 “서로 한 발씩 讓步하는 솔로몬의 智慧가 必要하다”고 했다. 2時間의 인터뷰 中 相當 時間을 現行 醫療 시스템의 限界와 增員을 强行하는 政府 政策의 問題點 指摘에 쏟았다.》―대형병원장에서 地方 保健所로 옮긴 決定은 當時 醫療界의 話題였다. 창원시保健所張으로 보낸 4年은 어땠는가. “푸른 바다가 있는 내 故鄕에서 돌봄이 必要한 地域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退任 後 스페인 산티아고 巡禮길을 걸으며 ‘그동안 내가 받은 것들을 갚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昌原의 첫印象은 保健所 行政이 참 잘돼 있다는 것이었다. 좋은 터전에서 하고팠던 診療를 하면서 宏壯히 재미있게 살았다. 나를 보고 後輩 6名이 昌原으로 내려왔다.” ―地方으로 따라온 後輩들에게 責任感을 느끼진 않으셨나. “患者들이 서울에서 醫師가 왔다고 좋아해주니 보람을 느낀다면서 다들 즐겁게 일했다. 어떤 後輩는 今方 1年 以上 診療 豫約이 찼다. 다른 同僚들에게도 勸해야겠다고 하더라.” ―그래도 生活環境과 業務 變化 等으로 어려움 또한 적지 않았을 것 같다. “昌原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 中 하나가 ‘서울에 있는 病院 좀 보내주세요’였다. 保健所 意思를 救하기 위해 診療 手當을 100萬 원 더 올리자고 했는데 昌原市에서 거부당하기도 했다. 初盤에는 保健所 사람들이 ‘診療를 하시면 안 된다’고 뜯어말렸다. 保健所 業務 領域에 對한 保健福祉部의 規制가 理由였다. 코로나19街 터지고 保健所가 對應 前面에 서게 된 뒤에야 이게 바뀌었다.” ―退任 後 開業醫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 “내가 三星醫療院腸 할 때 副會長級인데도 三星 常務보다 月給이 적었다. 그래도 나는 醫師로서의 價値, 그걸 알아주는 사람들에 對한 고마움이 훨씬 커서 몇十 倍의 年俸이 眞짜 안 부러웠다. 우리 다 똑같이 세끼 먹지 않나. 요즘 出退勤도 地下鐵로 한다. 어디에, 무엇에 價値를 두느냐의 問題다.” ―餘生을 즐기는 代身 또다시 保健所 일을 始作한 理由가 있나. “일을 맡아 달라는 電話를 받았을 때 하나님의 啓示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平生 아프셨기 때문에 醫師 外에 다른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醫師라는 일은 나에게 運命이랄까. 召命이다. 周邊에서 江南 地域 國會議員 出馬를 勸誘했을 때도 손사래를 쳤다. 언젠가 病院에 와서 講演을 해주셨던 金壽煥 樞機卿이 ‘生命 살리는 일을 하는 醫師 여러분이 참 부럽다’고 한 말씀을 잊지 못한다.” ―젊은 MZ世代 醫師들 中에는 다르게 생각하는 이도 많은 것 같다. 安定的 高所得을 理由로 醫大를 選擇하는 이도 적잖다. “참 안타까운데, 只今 젊은 世代들의 생각을 바꾸기는 어려울 거다. 우리 世代와 다름을 認定해야 한다. ‘라떼는 말이야’ 式으로 말하자면 우리 때는 힘든 일을 그냥 하거나 오히려 좋아하기도 했는데, 요즘 世代는 合當한 補償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들에게 ‘나 같은 삶도 있다’고 보여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때로 죽음을 마주치기도 하면서 忠實히 일하다 보면 醫師들은 바뀌고, 成長하게 돼 있다. 이들을 惡魔化해서는 안 된다.” ―醫療 跛行 事態가 한 달을 넘어서면서 全國 醫大 敎授들이 辭職書 行列에 同參하고 있다. “狀況이 長期化하면 醫療界에 宏壯한 退步가 일어날 거다. 當場 學會들이 멈춰 서니 거기에 써야 할 論文들이 다 中斷돼 버린다. 醫大 敎授들이 正말로 손을 놔버리면 오래 못 간다. 우리나라는 分明한 醫療傳達 體系를 갖고 있고, 3次 診療機關에서 봐야 하는 重症 患者들이 存在한다. 敎授들이 專攻醫를 데리고 해 온 이런 業務가 中斷되면 어떻게 되겠나. 中小病院들이 代身할 수 있다고 하는 건 턱도 없는 소리다.” 인터뷰 焦點이 醫療 跛行으로 넘어가자 仁慈하던 盧(老)醫師의 눈빛은 漸次 매서운 保健 行政 專門家로 變해갔다. “이대로면 正말 患者들이 죽어 나가게 될 수 있다”고 警告하는 그의 목소리 톤은 어느새 높아져 있었다. ―政府와 醫療界 모두 ‘2000名 增員’이라는 數字 앞에서 出口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病院 經營도 11年을 해보고 나서야 이제 좀 알겠다는 느낌이었다. 얼마가 適正한 增員 規模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마 없을 거다. 患者가 늘어나는 高齡化만큼 深刻한 게 人口 自體가 줄어드는 超低出産 問題 아닌가. TV에 나오는 政府 高位 當局者들 中에 醫師가 한 名이라도 있나. 醫大 增員의 落水效果만 期待하고 하루아침에 2000名을 늘리려고 하니까 이런 苦痛이 오는 게 아닌가. 이건 누가 이기고 지느냐 하는 게임이 아니다. 서로 한 발씩 讓步하는 솔로몬의 智慧가 必要하다.” ―그래도 醫大 增員을 支持하는 輿論이 높다. 醫師들에 對한 國民의 不信도 相當하다. “醫師들도 그동안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는지 反省해 봐야 한다. 一部가 ‘彼岸性’(皮膚科 眼科 成形外科)에 쏠리는 것도 잘못됐다. 다만 醫療는 兩面性을 갖고 있다. 가난한 患者들도 治療해야 하는 社會主義的 性格이 있지만, 한便으로 醫療 自體가 宏壯히 많은 돈을 創出해낸다. 어느 한쪽만 浮刻되면 結局 兩쪽 모두 힘들어진다.” ―서울 所在 醫大에 한 名도 配分하지 않았는데, 非首都圈에 몰아준 增員 措置가 地方 活性化에 寄與할 수 있다고 보나. “增員이 決定된 地域 醫大 相當數가 서울의 大型病院을 修鍊 病院으로 두고 있는 곳들이다. 합치면 1000名쯤 되던데, 結局 增員 規模의 折半이 다시 서울 및 首都圈으로 올라오게 될 것이다. 正말 地域 醫療를 살리고 싶으면 그 地域에 남아서 살 사람만 뽑고, 그에 맞는 待遇를 해줘야 한다. 日本에 硏修 갔을 때 보니 도쿄 癌센터보다 外郭 保健所에서 일할 때 保守가 더 많더라. 醫師들이 돌아가면서 거기로 일하러 가는 것을 보았다. 必須醫療 人力 確保도 解法이 다르지 않다.” ―結局 健康保險 財政이 늘어나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健康保險 財源만 갖고 解決하려니까 안 된다는 거다. 왜 國家 豫算은 안 쓰나. 醫療는 公共性이 있기 때문에 國家가 負擔해야 하는 部分이 있다. 診療만 해도 患者 머릿數로 收益이 計算되는 現在 民間 病院 시스템에서는 患者를 보는 時間이 1名當 3分 程度밖에 안 된다. 外國 病院에서 通商 初診이 15分, 再診이 10分인 것과 너무 다르다. 病院長으로 있을 때 ‘이러다가 誤診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늘 不安해하며 마음을 졸였다.” ―情報通信技術(ICT)을 活用한 醫療 시스템 强化 必要性을 强調해 오셨는데, 이런 試圖가 도움이 될까. “웨어러블 醫療機器와 尖端 裝備를 使用해 疾病을 早期 發見하고 治療하는 게 얼마든지 可能한 時代다. 人工知能(AI)을 利用해서 病棟 稼動率을 豫測한다거나 患者들의 데이터를 管理하는 式으로 效率性을 높일 수 있다. 그렇게 해야 患者들과 눈과 눈을 맞댈 時間이 생기지 않겠는가. 1分이라도 더 對話하고 웃기도 할 수 있지 않겠나.” ―公共醫療 投資와 發展은 어떤 式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보나. “우리나라는 醫療의 90%가 民間에 依存하는 構造다. 公共醫療가 20∼30%는 돼야 하는데 只今 10%밖에 안 되는 것이다. 專攻의 修鍊 費用만 해도 國家가 아닌 病院이 내고 있다. 專攻醫들에게 적은 給與로 더 많은 일을 시키게 되는 理由다. 應急室 뺑뺑이 問題의 境遇 美國의 ‘어전트 케어 센터(UCC)’처럼 上級綜合病院과 1次 病院의 中間段階 應急室 시스템을 檢討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이정은 副局長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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