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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信條는 正말 ‘極右’였을까|신동아

아베 信條는 正말 ‘極右’였을까

[노정태의 뷰파인더] 자민당 主流의 親美 保守 노선일 뿐

  • 노정태 經濟社會硏究院 專門委員·哲學

    basil83@gmail.com

    入力 2022-07-1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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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 言論과 大衆이 아베 다뤄온 方式

    • ‘발톱 빠진 虎狼이’ 擇한 日 保守政治

    • 2期 아베 때 美 日本政策 基調 變化

    • 日 이기고 싶다면 잘 아는 게 먼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피습 직전인 7월 8일 오전 11시 30분경 나라의 야마토사이다이지역에서 길거리 유세를 하고 있다. 그는 연설 도중 두 발의 총을 맞고 병원으로 이송된 후 숨졌다. [아사히신문]

    아베 新潮 前 日本 總理가 被襲 直前인 7月 8日 午前 11時 30分頃 나라의 야마토사이다이地域에서 길거리 遊說를 하고 있다. 그는 演說 途中 두 발의 銃을 맞고 病院으로 移送된 後 숨졌다. [아사히신문]

    윤석열 대통령이 7월 12일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에 마련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분향소를 찾아 조문한 뒤 남긴 방명록. [대통령실]

    尹錫悅 大統領이 7月 12日 서울 鍾路區 駐韓日本大使館 公報文化院에 마련된 아베 新潮 前 日本 總理 焚香所를 찾아 弔問한 뒤 남긴 芳名錄. [大統領室]

    “아시아의 繁榮과 發展을 위해 獻身하신 高(故) 아베 新潮 前 總理님의 冥福을 祈願합니다. 遺族과 日本 國民들께도 깊은 慰勞를 표합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韓國과 日本이 앞으로 緊密히 協力해 나가길 바랍니다.”

    7月 12日 서울 鍾路區 駐韓日本大使館 公報文化院에 마련된 아베 新潮 前 日本 總理 焚香所에 尹錫悅 大統領이 남긴 芳名錄의 內容이다. 아베가 테러犯이 쏜 私製 銃에 맞아 목숨을 잃은 것은 7月 8日의 일. 第2次 世界大戰 以後 매우 보기 드물게 벌어진 政治人에 對한 銃擊 死亡 事件이다.

    世界 各地에서 追慕의 물결이 일어났다. 臺灣은 7月 11日 하루 동안 總統府에 弔旗를 揭揚했고, 같은 날 토니 블링컨 美國 國務部 長官은 直接 日本을 찾아와 아베의 遺家族을 慰勞했다. 유엔(UN) 安全保障理事會에서는 追慕 默念이 進行됐으며, 조 바이든 美國 大統領은 워싱턴에 있는 駐美 日本大使館을 訪問해 哀悼의 뜻을 표했다.

    一部 韓國人에게 이러한 雰圍氣는 當惑스럽게 여겨지는 듯하다. 最近 10餘 年間 韓國의 言論과 大衆이 아베를 다루어온 方式 때문이다. 只今껏 아베는 ‘日本 右傾化의 主犯’ ‘日本의 平和憲法을 改正해 軍國主義 時代를 부활시키려는 危險한 政治人’, 甚至於 ‘極右主義者’ 같은 式으로 取扱되기 일쑤였다. 當場 書店에서 ‘아베 新潮’라는 이름을 檢索해보면 그의 野慾을 暴露한다는 式의 冊 여러 卷이 어렵지 않게 確認된다.

    果然 아베는 ‘極右’인가. ‘그렇다, 日本은 아무튼 나쁜 놈들이다’라고 對答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實狀은 그리 簡單히 말할 수 있는 問題가 아니다. 아베가 保守 政治人이었다는 것, 特히 그가 2期 執權을 始作할 무렵 安保 問題를 强調하며 强勁한 이미지를 演出했다는 것은 分明한 事實이다. 하지만 어떤 角度에서 보더라도 아베를 ‘極右’라고 부를 수는 없다. 極右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普遍的 意味, 더 나아가 日本 社會에서의 脈絡과 全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日本의 極右는 따로 있다. 아베도, 아베의 外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度, 極右라고 말하기 어렵다.



    度祖 히데키와 기시 노부스케의 運命

    아베에 對해 우리 社會에서 흔히 알려진 論議의 脈絡을 먼저 짚어보자. 政治 名門家의 3代孫으로 自他公人 ‘도련님’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기시 노부스케 前 日本 總理의 外孫子. 기시의 사위이자 아베 信條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總理까지 오르지 못했으나 두 次例에 걸쳐 外務大臣 職을 歷任했다.

    사람들이 흔히 問題 삼는 點은 기시 노부스케와 아베 信條의 關係다. 1896年 태어난 기시는 도쿄대를 卒業한 後 公職에 뛰어들어 出世 街道를 밟았다. 中日戰爭을 벌이고 太平洋戰爭을 일으킨 度祖 히데키와 가까운 사이였던 기시는 賭租 內閣에서 上空代身 職을 歷任했다. 그 뒤 賭租 內閣 總辭退로 자리에서 물러난 後 敗戰을 맞이했고, 典範으로 起訴됐다.

    基市와 도조의 運命은 달랐다. 美軍政은 自殺하려던 度祖 히데키를 살려내 期於이 絞首刑에 處했지만, 기시 노부스케는 逮捕 다음날 不起訴 處分을 내렸다. 日本의 戰爭 遂行에서 行政 官僚로서 적지 않은 役割을 했음에도 不拘하고 매우 가볍게 處理된 셈이다. 이러한 決定이 내려진 理由는 아주 먼 後날인 1997年에서야 밝혀졌다. 기시는 CIA의 前身인 OSS와 接觸했고 美國 側에 包攝됐던 것이다.

    日本의 政治人들은 自身들이 戰爭을 벌였고 敗北했다는 事實을 뼛속 깊이 받아들였다. 1952年, 總理였던 요시다 시게루가 맺은 美日安全保障條約이 바로 그 産物이었다. 日本은 맥아더에 依해 만들어진 平和憲法으로 軍隊를 가질 수 없는 나라가 된 狀態였다. 不過 10餘 年 前만 해도 美國과 對等하게 戰爭을 벌인 나라의 自尊心이 完全히 무너진 셈이었다. 그럼에도 요시다는 徹底히 고개 숙이고 美國의 秩序에 編入되는 게 日本의 生存을 保障하는 길이라 믿었고, 美日安全保障條約을 貫徹시켰다.

    기시 노부스케 또한 그 路線을 따랐다. ‘戰爭하지 않는 나라’ ‘美國에 맞서지 않는 나라’를 만들고 美國 中心의 世界秩序에 군말 없이 服屬하고자 했다. 1957年 2月 25日부터 1960年 7月 19日까지 總 두 次例에 걸쳐 總理職을 連任한 그의 代表的 業績이 그것을 證明한다. 거의 나라가 痲痹될 程度로 熾烈하게 벌어진 反對 示威인 ‘安保鬪爭’을 뚫고, 旣存의 條約을 更新해 신미일安全保障條約을 맺음으로써 美日關係를 現在와 같은 形態로 安着시켰다.

    요시다에서 기시로 이어지는 日本의 對美政策, 더 나아가 對外政策의 큰 틀은 ‘極右’와 距離가 있다. 軍隊 保有를 抛棄하고 다른 나라에 國防을 一任하는 것은 그 어떤 基準에서 보더라도 極右의 政策일 수 없다. 戰爭 以後의 기시 노부스케를 極右라 부르는 건 語不成說이다. 기시의 外孫子라는 理由로 아베를 대뜸 極右라 하는 것 또한 論理가 缺如된 緣坐制的 發想에 지나지 않는다.

    美國이 日本 再武裝 許容한 까닭

    7월 8일(현지 시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분향소가 마련된 미국 워싱턴 일본대사관저를 찾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조화를 들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7月 8日(現地 時間) 아베 新潮 前 日本 總理의 焚香所가 마련된 美國 워싱턴 日本大使官邸를 찾은 조 바이든 大統領이 調和를 들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日本의 主流 政治, 保守 政治는 ‘발톱 빠진 虎狼이’가 되는 길을 스스로 擇했다. 그 理由는 簡單하다. 美國을 相對로 戰爭을 벌이고 悽慘한 敗北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두 발의 原子爆彈을 除外하더라도, 1945年 3月 9日과 10日 도쿄에 쏟아진 燒夷彈과 네이팜彈으로 因해 하룻밤 사이에 約 10萬 名이 죽었다. 한때 ‘神’으로 여겨졌던 天皇은 ‘人間 宣言’을 한 다음에야 가까스로 목숨을 扶持하고, 맥아더의 政治的 必要에 依해 그 身分을 維持할 수 있었다.

    1970年 11月, 小說家 미시마 유키오는 平和憲法 改正과 自衛隊 蹶起를 외치며 人質劇을 벌이다 割腹自殺했다. 이른바 ‘미시마 事件’이었다. 노벨文學賞 候補로 擧論될 만큼 有名한 小說家가 自衛隊를 向해 “只今 日本人이 일어나지 않으면, 自衛隊가 일어나지 않으면 憲法 改正은 없다. 諸君은 永遠히 美國 軍隊가 되고 만다”고 외쳐댔으나 呼應을 얻지 못했다. 極少數의 非主流로 밀려난 日本의 極右는 변변한 政治的 求心點도 活動의 土臺도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主流 政治 舞臺에서 選擧에 나서서 當選되는데 成功한 極右 政治人이라면 이시하라 신타로 前 도쿄道知事가 事實上 唯一하다. 그는 1956年 最年少로 아쿠타가와상을 受賞한 才能 있는 小說家이자 文化 아이콘이었다. 少時적 미시마 유키오와 親分이 두터웠던 탓인지, 日本에서 보기 드물게 ‘美國의 影響에서 벗어나야 堂堂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立場을 固守해 왔다. 그 外에는 少數의 院外 政黨이나 大衆的 信賴를 받지 못하는 過激한 團體 等이 極右로 分類되고 있다.

    자민당 主流의 嫡統 後繼者이자 貴公子人 아베 信條를 두고 ‘極右’를 이야기하는 것이 語不成說인 理由도 여기 있다. 日本의 保守는 親美가 主流다. 非主流인 反美는 事實上 現實的 立地를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無妨하다. 그런데 日本의 親美란, 앞서 말했듯 美國의 軍事力에 國防을 거의 全的으로 依存한다는 말과 同一했다. 본디 右派는 民族主義的, 國粹主義的 性向을 보이게 마련인데, 바로 그런 ‘野生性’을 去勢한 獨特한 保守 政治가 誕生한 것이다.

    하지만 아베는 執權 2期부터 平和憲法을 改正하고 日本을 ‘普通國家’로 만드는 것을 自身의 政治的 使命으로 삼아오지 않았던가. 外見上의 모습만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問題는 只今 우리가 1950年代나 1960年代가 아닌 2020年代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베는 2012年에 再執權에 成功했다. 2008年 經濟危機 以後 中國이 攻擊的 投資와 國防費 支出을 통해 東아시아를 넘어 印度洋까지 影響力을 擴大해 나가던 그 무렵이다. 反對로 美國은 金融危機로 큰 打擊을 입은 狀態였다. 第2次 世界大戰에서 西部戰線과 太平洋戰線 두 곳의 戰爭을 모두 勝利로 이끌었을 무렵과 달리 오직 自身들만의 힘으로 中國의 軍事的 膨脹을 억누르는데 負擔을 느끼고 있었다.

    事情이 그렇다 보니 美國은 對日本政策의 基調를 徐徐히 바꿔나가기 始作했다. 日本의 再武裝을 許容하는 쪽으로 方向을 旋回한 것이다. 勿論 日本은 只今도 世界 3位의 GDP(國內總生産)를 자랑하는 經濟 大國이다. 美國에 威脅이 될 만한 潛在力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世界 2位의 經濟 大國이 된 中國은 티베트를 武力으로 倂合하고, 只今까지도 臺灣을 武力으로 侵攻할 수 있다며 威脅하는 나라다.

    最近 우크라이나를 侵略한 푸틴의 러시아가 잘 보여주고 있다시피, 國家 間 大規模 戰爭이 勃發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는 그 어떤 根據도 없다. 우크라이나에 義勇軍으로 參戰했던 이근 前 海軍 大尉가 歸國하며 現地의 同僚들과 ‘다음에는 臺灣에서 보자’는 弄談을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美國으로서는 아시아 戰略과 美國의 霸權을 維持하기 위해 日本의 再武裝을 願하지 않을 수 없다.

    ‘民族’ ‘겨레’ ‘핏줄’

    아베가 앞장섰던 日本의 平和憲法 改正 움직임은, 굳이 分類하자면 ‘反美’가 아니라 ‘親美’에 더 가깝다. 아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印度太平洋 비전’과 ‘쿼드’(Quad·美國, 濠洲, 印度, 日本 4個國 安保協議體) 亦是 日本이 第2次 世界大戰 以後 只今껏 追求해온 外交 安保 政策의 延長線上에 있다. 日帝 植民統治기를 겪은 우리로서는 歷史的 트라우마가 刺戟될 수 있는 일이나, ‘普通國家 日本’과 ‘帝國主義 日本’ 사이의 距離는 멀 수밖에 없다.

    아베 信條는 731이라는 數字가 쓰인 戰鬪機에 搭乘하며 記念寫眞을 찍은 바 있다. 韓國의 反撥을 무릅쓰고 야스쿠니 神社에 參拜하기도 했다. “日本이 國家的으로 女性을 性奴隸로 삼았다는 말도 안 되는 重傷(謀略)李 世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發言을 내뱉은 것 또한 事實이다. 그가 韓國에서 얻게 된 惡名에는 分明히 그의 責任이 있다는 소리다.

    우리의 憤怒를 자아내는 發言을 한 日本 政治人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極右’니 ‘侵略’이니 하는 딱紙를 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아베의 對外政策은 그의 外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아버지 아베 신타로로 이어지는 자민당 主流의 親美 保守 路線을 繼承하고 있을 따름이다.

    韓國의 現實은 어떨까. ‘民族’ ‘겨레’ ‘핏줄’ 等 右派的 主題에 執着하며 戰時作戰權 還收라는 名分下에 韓美同盟을 無力化 或은 終結시키고자 하는 이들이 主要 政黨에서 要職을 맡는 일도 드물지 않다. 韓國은 日本보다 ‘極右’의 政治的 목소리가 큰 나라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韓美同盟의 價値를 지키고 北韓과 中國, 러시아의 潛在的 危險을 警戒한다는 面에서 韓國의 對美政策과 安保 戰略은 日本의 그것과 櫃를 같이 하고 있다. 知彼知己면 百戰不敗라고 했다. 日本을 이기고 싶다면 日本을 잘 아는 게 먼저다.


    노정태
    ● 1983年 出生
    ● 高麗大 法學科 卒業, 서강대 大學院 哲學科 碩士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韓國語版 編輯長
    ● 著書 : ‘不良 政治’ ‘論客時代’ ‘탄탈로스의 神話’
    ● 曆書 : ‘밀레니얼 宣言’ ‘民主主義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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