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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음이 가난을 삶의 目標로 두는 건 아니다”|신동아

“내려놓음이 가난을 삶의 目標로 두는 건 아니다”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하는 ‘삶이 묻는 것들에 答하다’] 베스트셀러 作家 이용규 宣敎師가 말하는 眞正한 自由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2-07-03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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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佛敎의 無所有와 다른 基督敎的 내려놓음

    • 마음 비우는 게 아니라 神의 사랑으로 채워

    • 靈的으로 배고픈 사람이 아니라면 堂堂해져

    • 男便이 바라는 尊重, 아내가 바라는 사랑

    • 眞正한 自由는 安定感에서 나온다

    신동아는 人文學財團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 ‘삶이 묻는 것들에 答하다’ 시리즈를 進行한다. 플라톤아카데미는 2010年 11月 設立된 國內 最初 人文學 支援 財團으로 人類의 오랜 知識과 智慧를 바탕으로 삶의 根源的 물음을 새롭게 傳한다는 趣旨로 硏究 支援, 大衆 講演, 온라인 포털 等 다양한 事業을 進行하고 있다. 시즌2로 선보이는 ‘삶이 묻는 것들에 答하다’는 코로나19 以後 많은 것이 바뀌고 있는 世上에서 새로운 價値를 摸索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進行한다. 이番號 主人公은 이용규 宣敎師다. <編輯者 週>

    이용규 선교사. [박해윤 기자]

    이용규 宣敎師. [박해윤 記者]

    이용규(55) 宣敎師는 서울대 東洋史學科 學部와 大學院을 나와 美國 하버드대에서 中東地域學 및 歷史學으로 博士學位를 받았다. 學位를 받자마자 敎授의 길이 아니라 宣敎師의 길을 自願해 7年間 몽골 使役의 길을 걸었다. 2012年부터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國際大學校를 設立해 運營하는 使役을 하고 있다.

    그는 基督敎界에서 베스트셀러 著者로 通한다. 2006年 처음 펴낸 冊 ‘내려놓음’(규장)은 無慮 389刷를 찍었다.

    ‘움켜쥐려 할수록 消滅되고 가지려 할수록 空虛해지는 삶’이라는 副題가 알려주듯 最高 學歷이 保障하는 世俗의 길 代身 險地 使役이라는 어려운 宗敎人의 길을 擇한 그에게 基督敎的 ‘내려놓음’이란 것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마침 그가 서울에 왔다는 消息을 듣고 만났다.

    ‘내려놓음’이라는 게 普通 佛敎에서 쓰는 말인데 크리스천으로서 내려놓음은 무엇을 말하나요.

    “實際로 많은 분이 佛敎 冊인 줄 아세요(웃음). 于先 韓國말 ‘내려놓는다’는 말을 다른 나라 言語로 해보려니까 的確한 單語가 안 나오더라고요. 宏壯히 獨特한 韓國말이란 거죠. 例를 들어 中國語로 飜譯하면 ‘팡샤’가 가장 가까운 말인데 宏壯히 네거티브한 意味가 있어요. 抛棄한다는 意味가 剛하죠. 英語로 飜譯할 때는 鉏렌더(surrender), 아니면 렛 잇 다운, 렛 잇 고 程度인데 이건 좀 無神經하게 내버려 둔다는 意味가 있죠. 韓國말 ‘내려놓음’은 抛棄보다는 宏壯히 積極的인 行爲거든요.”



    ‘비움과 채움’의 두 바퀴

    이용규 선교사가 쓴 베스트셀러 ‘내려놓음’. [규장]

    이용규 宣敎師가 쓴 베스트셀러 ‘내려놓음’. [圭璋]

    聖經에도 없지요?

    “네. ‘내려놓음’을 흔히 佛敎의 無所有, 空(空) 思想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佛敎哲學은 根本的으로 끊임없이 欲望을 없애는 것에 焦點을 맞추고 있다고 봅니다. 비우고 비우다 보면 언젠가는 제로(0) 狀態가 된다고 하는 信念 體系죠. 結局 비우는 것 自體가 目的이 되는데 基督敎에서는 基本的으로 사람의 努力으로 可能하지 않다고 보지요.

    佛敎에서는 輪廻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苦痛의 根源이 되는 煩惱와 생각 自體를 스스로 끊어야 한다고 하는데 基督敎에서는 人間의 힘으로는 그게 어려운 이야기죠. 實은 안 돼요. 안 되는 게 맞아요.”

    그렇다면 基督敎에서는 그것이 可能해지는 唯一한 方法이?

    “믿음이죠. 하나님과의 關係로 들어가야 解決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힘이 밖으로부터 와야 한다는 게 基督敎의 基本 생각입니다. 따라서 聖經的인 意味에서의 내려놓음은 佛敎의 버림이나 비움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가장 좋은 것을 選擇하는 過程이라고 봅니다. 내려놓음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채움과 같이 가는 거죠. 여기서 채워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滿足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지는 過程이죠. 맛있는 飮食으로 배가 채워져 있으면 라면이나 맥도날드 햄버거가 더 는 먹고 싶지 않겠죠.”

    그가 微笑를 지으며 테이블에 놓인 컵을 가리키더니 말을 이었다.

    “여기 컵 속의 물을 欲望이라고 할 때 佛敎의 가르침은 繼續해서 그 물을 퍼내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해서 비워지면 좋은데 누군가가 와서 다시 채울 수도 있고, 비가 와서 채워질 수도 있어요. 基督敎的 方法은 다른 걸로 채우는 겁니다. 물을 퍼내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채우는 일도 함께 하는 거죠.

    제가 말하는 福音的 意味의 내려놓음은 ‘비움과 채움’ 두 바퀴가 같이 가는 겁니다. 나의 어떤 罪性(罪性)과 解決되지 않은 過去와 모든 複雜한 苦悶과 버거운 人生의 짐들을 解決하는 方式은 絶對者가 내 삶 가운데 介入하시고 찾아와 주셔서 내 삶이 滿足됐을 때 다른 部分들이 整理가 되는 過程. 그게 제가 이야기하는 내려놓음입니다.”

    그의 얼굴은 恰似 修道者처럼 맑고 端雅했다. 始終一貫 차분한 톤의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安定感과 信賴를 주었다. 그는 韓國에 올 때마다 여러 大型 敎會의 招請으로 講演을 다니느라 바쁜 時間을 보내고 있었다.

    흔히 내려놓는다고 하면 無所有나 가난을 志向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基督敎的 내려놓음은 淸貧 思想과는 다릅니다. 제가 ‘내려놓음’을 主題로 冊을 쓰니까 大衆이 저한테 그런 걸 期待한다고 느낀 적이 있어요.”

    무슨 말이죠.

    “가난 가운데 있지만 찌들지 않고 自足하면서 사는 걸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제가 東洋思想을 오래 工夫하다 보니까 저 亦是 瞬間的으로 헷갈린 적이 있어요. 하지만 只今은 버리거나 없이 사는 게 重要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가난 自體가 삶의 어떤 目標가 되면 안 되죠.

    그런 意味에서 無所有와 基督敎는 좀 궤가 다른 것 같아요. 제 삶도 마찬가지예요. 저라고 하는 사람은 제 안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어떤 생각들, 미움이라든지 남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認定欲求 같은 걸 스스로 解決할 수가 없어요. 解決한 척 鋪裝은 할 수 있겠지만 제 안에는 그런 힘이 없어요. 하지만 앞이 寞寞하고 希望이 안 보이는 絶望的인 狀況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에 對한 所望을 가질 때 제 삶이 如前히 感謝가 넘치고 幸福하고 더는 必要한 것이 없다는 것을 저는 삶 속에서 體驗했습니다.”

    이용규 선교사는 “복음적 의미의 내려놓음은 ‘비움과 채움’ 두 바퀴가 같이 가는 것”이라고 했다. [박해윤 기자]

    이용규 宣敎師는 “福音的 意味의 내려놓음은 ‘비움과 채움’ 두 바퀴가 같이 가는 것”이라고 했다. [박해윤 記者]

    죽음의 瞬間에 나타나는 差異

    實際로 그의 冊에는 留學 時節부터 몽골에 宣敎師로 가기까지 고비 고비마다 겪은 絶對者와의 交流가 쉽고 따뜻한 言語로 담겨 있다.

    絶對者와의 交流에는 特別한 靈的 體驗이 必要한가요.

    “특별한 體驗이나 決斷의 能力이나 이런 게 必要한 게 아니라 그냥 不足하고 弱하다고 느끼는 그 자리에서 ‘도와주세요,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요’ 하는 그 작은 속삭임에서 始作되는 거죠. 어떤 劇的인 體驗으로 어느 날 갑자기 삶이 180度로 바뀌는 게 아니라 그렇게 祈禱하는 瞬間부터 以前과는 다른 旅程이 始作됩니다. 그때 當時에는 잘 모르지만 삶의 끝에 가서 돌이켜 보면 宏壯히 다른 志向의 삶으로 轉換이 그때 일어난 거였구나 認識하게 되죠.

    제가 韓國에 와서 病問安을 가거나 죽음을 눈앞에 둔 분들의 모습을 보면 確然히 다른 두 가지 모습이 있어요. 前者는 죽음을 무서워한 나머지 죽음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분들이 있어요. 아무리 거기다 대고 希望的인 이야기를 해주더라도 暫時뿐이죠. 그 사람을 이끄는 宏壯히 强한 內面의 힘은 두려움이에요.”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지요.

    “맞습니다. 敎會를 다니고 안 다니고를 떠나 죽음을 宏壯히 便安하게 받아들이면서 웃으며 監査하는 가운데 삶을 마감하는 분들이죠. 이건 엄청난 差異로 보여요. 왜냐하면 이분들을 끌어왔던 힘은 두려움이나 苦悶, 걱정이 아닌 다른 힘인데 살면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죽음의 瞬間에도 그 힘으로 便安하게 갈 수 있는 거죠.

    이건 努力을 통해 되는 것이 아니라 絶對者에게 도움을 要請하는 瞬間 始作되는 過程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를 바꿀 수 없지만 나를 만든 분은 나를 바꾸실 수 있다는 믿음, 그 바꾸시는 어떤 根本的인 通路가 되는 걸 福音이라고 聖經은 말하고 있는 거고요.”

    믿음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그냥 믿으면 되는 건데 어떤 사람들에겐 그게 참 어렵습니다. 믿음이라는 건 누가 주는 겁니까?

    “믿음은 膳物인 것 같아요. 하지만 自身이 救해야 얻는 것이지 强制로 억지로 주어지는 건 아니죠. ‘膳物을 주세요’까지는 사람의 몫이지만 주어지는 건 내가 내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絶對者로부터 주어지는 거라는 것을 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많이 느껴요. 제가 우리 셋째 아이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동생이 생기고 나서 짜증이나 떼를 많이 부려서 저를 힘들게 했어요. 하지만 이건 겉으로 드러난 感情이었고, 眞짜 問題는 아이의 內面에 있었던 不安이죠.”

    어떤 不安이었을까요.

    “동생이 태어남으로 인해 내 位置가 흔들리고 있고 내 世界가 무너지고 있다는 不安感이죠. 그런 아이에게 隨時로 ‘아빠는 널 사랑해’라고 말했지만 (두 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아~ 하고 귀를 막고 逃亡을 갔어요. 實은 自己가 第一 듣고 싶은 말인데 問題는 그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배고픈 사람 눈에는 먹잇감밖에 안 보여

    이 宣敎師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한다’는 絶對者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우리 自身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어느 瞬間 아이가 ‘아, 正말 엄마 아빠가 날 사랑하는 것 같다’고 느끼기 始作하면서부터 態度에 어떤 變化가 일어나기 始作하더라고요. 저는 아이에게 成長이 일어났구나 하는 게 느껴졌어요. 믿는 것만으로도 삶의 根源的인 變化가 일어나니까 나를 衝動하고 끌고 가던 어떤 두려움의 힘이 다른 힘으로 代替돼서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는 거죠. 그게 믿음인 것 같아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受容해야 하는데 그것 亦是 自己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긴 時間이 必要하고 어떤 사람은 그 卽時 되기도 하고.”

    그렇죠. 믿음을 받아들이는 瞬間도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요.

    “어쨌든 믿음이 자리 잡으면 내 마음 안에 어떤 平安과 센스 오브 시큐리티(sense of security)라고 할까요? 安定感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오기 始作합니다. 그러면 내가 더 가지지 않아도 安全하구나, 社會的 地位나 포지션이 安全함을 주는 게 아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지요. 그런 安定感을 가지면 自信感이 생겨요. 그러면 밖에 나갈 때 굳이 좋은 옷으로 治粧하지 않아도 不安하지 않고 名銜에 뭘 많이 적지 않아도 마음이 便安하죠. 누구를 만나더라도 내가 靈的으로 배고픈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堂堂하게 對할 수 있죠.”

    相對方에게 뭔가 좋은 에너지를 나눠줄 수 있는 狀態가 되겠지요.

    “맞아요. 내가 靈的으로 富裕해지는 거거든요. 제가 有名한 演藝人이라든지 스포츠 스타라든지 財閥家의 누구라든지 이런 분들을 만날 때 때로는 그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불쌍하게 느껴져 어떤 式으로든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萬若 제가 靈的으로 배가 고프다면 이런 사람들이 내 배고픔을 달래줄 수 있겠다는 期待가 생길 수 있겠지만 하나님 사랑으로 充分하다는 安定感을 갖게 되면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잘 도와줄까 이런 마음이 들지요. 假飾的인 努力을 하지 않아도 內面의 풍요함으로 그게 되는 거예요.”

    于先은 가장 가까운 家族을 보는 態度나 생각이 달라지겠죠.

    “男便이나 아내를 對할 때에도 相對가 나의 不足이나 내 배고픔을 채워줘야 할 對象이 아니라 내가 相對의 배고픔을 채워줘야 할 存在라는 責任感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처음에는 내가 一方的으로 주는 關係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기빙(giving)’을 통해 채워지는 關係가 돼 豐盛함이 찾아옵니다. 關係에서 宏壯히 큰 變化가 일어나게 되지요. 스스로 나를 비우려 하지 않아도 關係를 통해 豐盛하게 채워짐이 이뤄지기 때문에 不安하지가 않은 거예요. 數千億 원臺 財産을 갖고 있는 사람보다 더 넉넉할 수 있고 眞心 어린 도움을 줄 수가 있는 거죠.”

    大部分의 사람들은 人間關係를 利益의 觀點에서 보지요.

    “배고픈 사람 눈에는 먹잇감밖에 안 보여요. 다 뜯어먹을 對象이죠. 내가 不足하다, 뭔가가 缺如돼 있다고 하는 생각이 오면서 不安感과 배고픔이 始作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靈的인 滿足은 絶對者와의 關係 속에서 그분 안에서 安全하다는 생각이 파운데이션(基盤)李 될 때 可能하다는 겁니다.

    다윗이 하나님은 나의 盤石이고 酸性이고 要塞高 이렇게 告白하는 그 수많은 이야기가 結局은 사람은 하나님을 통할 때 安全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王에게서 미움 받아 쫓기고 甚至於 王의 자리에 올라서도 끊임없이 不安하고 危險하다고 느끼면서 살 수 있는 要素들이 많았을 텐데 다윗이 健康하게 反應하면서 믿음 안에서 살 수 있었던 理由는 하나님 안에서 安全하다는 告白인데 詩篇에 나오는 그 수많은 告白은 結局은 그 安定感에 對한 이야기이지요.”

    작은 呻吟에서 始作하다

    冊에서 夫婦關係나 子息을 키우는 家族 안에서의 關係 맺음에 對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던데요.

    “사람에게 窮極的인 배고픔을 두 가지라고 봐요. 于先 사람은 ‘關係的인 存在’로 지음을 받았어요. 關係 안에서 채워지지 않으면 끝없는 배고픔을 만들어요. 夫婦關係에서는 男便과 아내가 좀 다른데 男便들이 아내한테 바라는 건 ‘尊重’이죠. 男子들이 뼈 빠지게 일하는 理由는 結局 尊重받기 爲해서거든요. 그게 지나칠 境遇에 名譽慾, 權力慾, 物慾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結局은 어떻든 ‘내가 當身 벌어먹이려고 뼈 빠지게 일하고 있다’고 하는 말의 그 깊은 意味는 ‘나 이렇게 熱心히 살고 있으니까 좀 尊重해 달라’는 거거든요. 反面에 아내들이 願하는 건 사랑인 것 같아요.”

    맞아요. 얼마나 잘해 주느냐의 問題가 아니라 얼마나 配慮하는가?

    “그렇죠. 男子들은 잘해 주면 充分히 내 할 道理를 다 했다고 誤解(?)하는 境遇가 많은데 女性의 境遇에는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自愧感과 함께 다른 곳에서 그걸 채우려고 하는 內的인 몸부림이 생기는 것 같아요. 어떻든, 女性이든 男性이든 人間은 關係 속에서 채워져야지만 安定感을 느끼게 되지요.

    聖經的인 이야기는 그걸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거예요. ‘十字架 사랑’이라는 것은 結局, ‘내가 너를 貴히 여기고 사랑하니 너는 安全해, 男便한테 사랑받지 못해도 아내한테 尊重받지 못해도 괜찮아, 네 世界가 무너지는 게 아니야.’ 이런 말씀이거든요. 하나님이 나의 世界를 支撐하고 있고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男便과 아내를 尊重할 힘을 가질 수 있는 거지요.

    이렇게 우리가 外部的으로 들어오는 어떤 에너지를 통해서 내가 누군가를 품을 수 있을 때 그래서 뭔가를 供給받기 始作할 때 배고팠던 사람이 채워지고 自然스러운 리액션이 생기면서 關係가 바뀌게 되지요. 이건 저의 體驗的 結論입니다.

    제가 아내와 아이 넷이라는 家庭 共同體를 이루면서 또 어린이들부터 靑年들까지 敎育을 하면서 ‘아, 安定感이 주는 힘은 먼저 밖에서 들어와야 하는 거구나, 그래서 福音이 맞구나’ 라는 걸 經驗的으로 確認해 왔거든요.

    利己的이고 自己밖에 모르던 샌님 같았던 저 같은 사람의 內面에 생각지도 못했던 方式으로 變化가 일어나고 남을 위해 사는 삶으로 기뻐지는 삶을 經驗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힘이라고 저는 믿어요.”

    그 힘을 基督敎에서는 어떻게 받나요? 例를 들면 佛敎에서는 冥想을 해라, 參禪을 해라 그런 게 있는데.

    “무엇을 하는가의 問題라기보다는 結局은 믿음이에요. 그게 奇跡이거든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란 存在가 어느 날 믿어지고 實在하는 힘으로 現實 世界에서 經驗되고 體驗되는 過程,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一旦 믿음으로 始作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어떤 境遇는 그 믿음조차 내가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도와주세요’라고 하는 작은 呻吟에서 始作하는 거죠.”

    人生에 지고 가는 짐은 다 똑같다

    普通 基督敎를 苦難의 宗敎라고 하지요. 苦難이 돌이켜 보면 藥이고 膳物이었다는. 믿음은 그런 苦難과 苦痛 속에서만 자라나요?

    “믿음이 苦難 없이 자랄 수 있으면 참 좋은데 그런 點에서 저는 누가 옆에서 혼나는 거 보면 알아서 기는 아이들 있잖아요. 좀 그런 쪽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하지만 어느 누구든 苦難을 避할 수는 없어요. 人生에 지고 가는 짐은 다 똑같잖아요. 生老病死라는 게 누구에게나 다 주어지지 않습니까. 누구나 그런 過程을 겪으면서 내가 弱하구나, 헐벗었구나, 內面이 가난했구나, 배고팠구나를 알아차리게 되는데 내 힘으로 뭘 할 수 있다고 느끼고 컨트롤 하려고 할 때는 絶對者의 힘이 안 보이지요.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걸 받아들이고 놓는 瞬間에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에 依해서, 그 도움 안에서 다음 段階로 갈 수밖에 없음을 배우는 거죠.”

    그는 “眞正한 自由는 安定感에서 나온다”고 했다.

    “自由란 것이 ‘自己 마음대로 한다’는 게 아니라 完全한 믿음 속에서 내 삶을 컨트롤할 必要도 없고, 다른 사람의 삶을 無視하거나 부러워하거나 할 必要가 없는 狀態죠. 거듭 말하지만 그건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파운데이션이 必要합니다. 안 그러면 밑으로 떨어져요. 그 파운데이션이 되는 게 結局은 하나님의 사랑에 對한 認識과 그것이 믿어지는 삶의 過程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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