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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베트남 松茂柏悅(松茂栢悅) 親舊 關係”|新東亞

“韓國-베트남 松茂柏悅(松茂栢悅) 親舊 關係”

[베트남 修交 30年 年中企劃 | 韓國 企業, 飛上하다] 修交 主役 김석우 前 統一部 次官

  • 최창근 에포크타임스코리아 國內뉴스 에디터

    caesare21@hanmail.net

    入力 2022-07-0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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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盧泰愚 北方政策 ‘마지막 點’ 韓國-베트남 修交

    • “世界 最高의 指導者 朴正熙”

    • 約束 지킨 韓, 信賴로 報答한 越

    • 國益 앞에 中과 堂堂히 맞서야

    5월 25일 서울 서대문구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실에서 ‘신동아’와 만난 김석우 전 통일부 차관은 “한국과 베트남은 소나무, 잣나무 사이와 같은 상생 관계”라고 강조했다. [지호영 기자]

    5月 25日 서울 西大門區 북한인권시민연합 事務室에서 ‘신동아’와 만난 김석우 前 統一部 次官은 “韓國과 베트남은 소나무, 잣나무 사이와 같은 相生 關係”라고 强調했다. [지호영 記者]

    김석우(77) 前 統一部 次官은 노태우 政府 北方政策(Nordpolitik)의 對美(大尾)로 꼽히는 1992年 韓國-中國, 韓國-베트남 修交의 主役이다. 極度의 保安을 維持하면서 修交 協商을 成功的으로 마무리했다.

    그는 서울대 行政學科 卒業 後 서울대 大學院에서 國際法 碩士學位를 取得했다. 1967年 第1回 外務高等考試 最年少 合格 後 陸軍士官學校 敎官으로 服務했다. 以後 駐美大使館 2等 書記官을 始作으로 駐日大使館 1等 書記官, 外務部 東北亞1과(일본담당) 誇張, 駐日大使館 政務參事官, 經濟企劃院(現 企劃財政部) 第2協力官, 外務部 情勢分析官을 歷任한 後 亞洲局長으로서 中國·베트남과 國交 正常化를 이끌었다. 金永三 政府 出帆 後 大統領祕書室 儀典首席祕書官을 거쳐 統一部 次官으로 일했고, 國會議長 祕書室長을 끝으로 公職에서 隱退했다. 公職 退任 後 21世紀 國家發展硏究院(NDI) 院長을 거쳐 지난해부턴 社團法人 북한인권시민연합 理事長으로 活動하고 있다.

    1990年 4月 뜻밖의 팩스 한 張

    김석우 전 차관은 “한·베 수교는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이 시행한 북방정책의 ‘마지막 점’”이라고 평가했다. 사진은 1995년 6월 노 전 대통령이 고려대 언론대학원에서 북방정책에 대해 특강하고 있는 모습. [동아 DB]

    김석우 前 次官은 “韓·베 修交는 고(故) 노태우 前 大統領이 施行한 北方政策의 ‘마지막 點’”이라고 評價했다. 寫眞은 1995年 6月 盧 前 大統領이 고려대 言論大學院에서 北方定策에 對해 特講하고 있는 모습. [東亞 DB]

    1992年 8月 韓中 修交가 노태우 政府 北方外交의 畫龍點睛이었다면 12月 베트남과의 修交는 終着點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評價합니까.

    “노태우 政府 北方政策의 ‘마지막 點’이라고 생각합니다. 韓國 政府와 베트남 政府의 國交 正常化를 위한 積極的 努力이 結實을 본 것이죠. 當時 베트남 政府는 ‘漢江의 奇跡’으로 불리는 韓國의 經濟開發 政策을 높게 評價했습니다. 修交에 積極的이었죠. 韓國 政府도 이 機會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判斷해 베트남의 提議에 積極的으로 和答했습니다. 30年이 지난 오늘날 보면 修交 交涉 當時 그렸던 스케치가 이제 그림으로 完成됐다고 判斷합니다.”

    김석우 前 次官은 “當時 地理的으로 中國에 隣接한 ‘中堅國’이라는 共通點을 지닌 韓國과 베트남이 友好 關係를 構築하면 서로 윈-윈 할 수 있을 것이라 判斷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낮은 文盲率로 代辯되는 베트남의 높은 敎育 水準, 베트남人의 勤勉性, 發展 可能性이 印象的이었다”고 回想했다.

    1975年 ‘사이공 陷落’ 後 斷絶된 外交關係가 正常化한 것입니다. 初期 修交 交涉 過程은 어땠나요.

    “1990年 4月 泰國 방콕 駐在 韓國大使館에 뜻밖의 팩스 한 張이 들어왔습니다. 內容은 單 한 줄. ‘週(駐)泰國 베트남 大使가 週泰國 韓國 大使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죠. 1975年 越南(越南) 敗亡 後 韓國에 베트남은 ‘未修交 敵性國(敵性國·敵으로 看做될 수 있거나 戰爭 法規上 攻擊·破壞·捕獲 따위의 加해 行爲를 할 수 있는 範圍에 드는 國家)’으로 分類되는 國家였습니다. 베트남 大使가 韓國 大使를 만나고 싶다고 한 것은 意外의 일이었죠. 當時 外務部 情勢分析官이었는데, 베트남 藥師(略史)부터 現在 情勢까지 分析했습니다. 當時 베트남은 베트남판 改革·開放 政策이라고 할 수 있는 ‘도이머이(刷新) 政策’을 推進하고 있었죠. 情勢를 報告받은 최호중 外務部 長官은 整週年 泰國 駐在 韓國 大使에게 베트남 大使를 만나라는 訓令을 내렸습니다. ‘本國 訓令에 따른 修交 交涉 提議’를 明確하게 한 것이죠. 이에 1990年 10月 10日 整週年 臺詞가 베트남 大使를 面談했습니다.”



    當時 美國의 反應은 어땠나요.

    “美國은 베트남과의 外交關係에 ‘로드맵(Roal Map)’ 戰略으로 이름 붙인 4段階 戰略을 樹立해 둔 狀態였습니다. 1段階 美軍 戰爭捕虜·失踪者·戰死者 遺骸 發掘 및 美國에 協助한 베트남人 釋放 合意, 2段階 파리 平和條約 遵守, 3段階 캄보디아 駐屯 베트남軍 完全 撤收, 4段階 外交關係 正常化 交涉이었죠. 美國 政府는 이러한 戰略에 根據해 韓國에 ‘섣불리 外交關係 正常化에 나서지 말라’는 메시지를 傳해 왔습니다. 그런데 韓國과 베트남 大使가 公式 接觸했죠. 이 時期에 맞물려 유종하 外務部 次官이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g) 駐韓 美國 大使를 만났습니다. 美國 反應은 차가웠어요. ‘로드맵 4段階 中 1段階 問題가 매듭지어지지 않았다’는 거죠. 이 속에서 韓國 外務部는 駐泰國大使館에 ‘베트남과 修交 交涉 時期를 調整할 必要가 있다’는 訓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1991年 4月 서울에서 開催된 아시아·太平洋 經濟社會委員會(ESCAP) 總會에 不코안 베트남 外交部 次官이 參席했습니다. 李相玉 外務部 長官과의 面談에서 不코안 次官은 도이머이 政策을 說明하며 國交 正常化를 要求했습니다. 李相玉 長官이 美國과 步調를 맞추어야 하는 狀況을 說明하자 베트남 側이 ‘貿易代表部를 設置하자’고 했습니다. 政治·外交 問題를 벗어나 實利的으로 接近하자는 메시지였습니다.”

    無緣보다 惡緣이 더 낫습니다

    1969년 10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해 참전 장병을 격려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월남 파병은 한·베 사이 구원(舊怨)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베트남 측은 국익우선주의로 한국과의 수교를 택했다. 이에 대해 김석우 전 차관은 “베트남 고위 인사들은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과거에 연연해서 미래를 위한 발전을 게을리하는 건 현명하지 않다’는 태도였다”고 회상했다. [동아 DB]

    1969年 10月 當時 朴正熙 大統領이 베트남을 訪問해 參戰 將兵을 激勵하고 있다. 朴 大統領의 越南 派兵은 한·베 사이 舊怨(舊怨)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베트남 側은 國益優先主義로 韓國과의 修交를 擇했다. 이에 對해 김석우 前 次官은 “베트남 高位 人士들은 韓國의 베트남戰 參戰에 對해 ‘過去에 戀戀해서 未來를 위한 發展을 게을리하는 건 賢明하지 않다’는 態度였다”고 回想했다. [東亞 DB]

    베트남 情勢調査團長으로 베트남을 訪問했을 때 기억나는 逸話가 있습니까.

    “當時 首都 하노이는 낡은 建物이 가득했습니다. 落後됐다고 느꼈죠. 5日間 베트남 情·官界 人士들을 만났습니다. 마지막 날 캉 外交部 次官補와 食事했고요. 그때 저는 ‘베트남에는 豐富한 資源과 優秀한 人力이 있습니다. 韓國에는 廢墟 위에서 超高速 經濟成長을 이룬 經驗과 技術이 있습니다. 韓國과 베트남은 理想的인 남(南)-南(南) 協力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兩國 間 協力을 위해서는 無煙(無緣)보다 惡緣(惡緣)이 더 낫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金 前 次官은 漢字로 ‘松茂柏悅(松茂栢悅·소나무가 茂盛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 벗이 잘되면 기뻐함을 일컫는 말)’을 漢字로 써 캉 次官補에게 건네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고 回顧했다.

    “아시아라는 숲속에서 소나무와 잣나무에 該當하는 두 나라가 鬱蒼하게 자라는 모습이야말로 正말 흐뭇한 그림이라고 이야기하자 캉 次官補는 그윽한 눈으로 나를 보며 同意를 나타냈습니다. 그는 베트남 사람들은 漢字를 알기에 松茂柏悅의 意味를 理解한다고 和答했고요.”

    韓國의 베트남戰 派兵 問題 等 ‘求한(舊恨)’이 國交 正常化에 障礙가 되지는 않았나요.

    “캉 次官補를 비롯한 베트남 高位 人士들은 韓國의 베트남戰 參戰에 對해 하나같이 模範 答案을 이야기 하듯 淡淡히 ‘賢明한 사람은 過去에 戀戀해서 未來를 위한 發展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韓國 經濟發展 모델을 벤치마킹해 自國(自國) 經濟 發展에 應用하겠다는 意志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朴正熙 前 大統領은 베트남 派兵을 決定한 主人公입니다. 그에 對한 베트남의 評價는 어땠나요.

    “1996年 當時 김수한 國會議長이 베트남을 公式 巡訪했습니다. 當時 도 무오이 베트남共産黨 書記長을 만났죠. 金 議長이 ‘全 世界 指導者 中 누구를 높게 評價하느냐’고 묻자 도 무오이 書記長은 ‘朴正熙 前 大統領을 높게 評價한다’고 스스럼없이 對答했습니다. 金 議長이 베트남戰 參戰을 決定한 張本人임에도 尊敬하느냐고 다시 묻자 도 무오이 書記長은 ‘朴正熙 大統領이 밤잠 설쳐가며 베트남戰 派兵을 苦心했던 걸 알고 있다. 베트남戰 派兵과는 別個로 朴正熙 前 大統領이 開發道上國 國家指導者로서 遂行한 役割은 尊敬한다’고 答한 것으로 傳해집니다.”

    韓國의 成功的 經濟開發 모델이 國交 正常化의 契機가 된 것인가요.

    “제가 駐日大使館 參事官으로 도쿄(東京)에서 勤務하던 1988年의 일입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日本 駐在 第3國 外交官들을 招請한 歡迎會가 있었습니다. 週日 베트남大使館 書記官이 參席해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印象 깊었어요. 韓國의 經濟發展 成果에 對해서 물어보더군요. 當時 베트남 經濟 事情이 어려웠습니다. 歷史的 背景에 起因하죠. 프랑스 植民地였던 베트남은 太平洋戰爭 時期 日本에 强占당했는데 日本軍의 軍需物資 收奪로 인해 200萬 名이 餓死(餓死)했습니다. 日本이 떠난 後엔 프랑스, 美國, 中國과 連달아 戰爭을 벌였고요. 經濟 再建이 必要한 狀況이었습니다. 修交 前 베트남 經濟 官僚들이 韓國開發硏究院(KDI)을 訪問하기도 했습니다.”

    金 前 次官은 “韓國, 베트남 間 科學技術 分野 協力 成果도 注目할 만하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修交 20周年이던 2012年 한·베 頂上會談에서 當時 응우옌떤中 베트남 總理가 韓國科學技術硏究院(KIST)을 벤치마킹한 硏究所 設立을 要請했습니다. 이에 2014年 12月부터 2021年 12月까지 事業을 推進해 한·베 科學技術硏究院(VKIST)을 設立했습니다. 7年間 總 7000萬 달러 豫算이 投入된, 單一로는 最大 規模 科學技術 公共開發援助(ODA) 事業이었습니다.”

    韓의 努力으로 얻은 信賴

    修交 交涉 過程에서 經濟 支援 等 代價 要求는 없었습니까.

    “있었어요. 앞서 이야기했지만 當時 베트남의 經濟 狀況은 어려웠습니다. 韓國은 相對的으로 良好한 便이었고요. 整週年 泰國 大使와의 첫 修交 會談에서 베트남 政府 關係者는 베트남戰爭으로 莫甚한 被害를 본 베트남 中部 地域의 經濟 再建 問題를 꺼내며 經濟 支援을 要請했습니다. 다만 韓國 政府는 이를 受諾할 狀況이 아니었습니다.”

    金 前 次官은 當時 베트남의 補償 要求로 難航을 겪었다고 述懷하며 背景을 다음과 같이 說明했다.

    “베트남 黨·政 强勁派들이 國內의 不滿을 撫摩한다는 名分으로 經濟的 補償을 要求했습니다. 또 다른 要因은 北韓이었죠. 北韓 側이 ‘血盟關係’를 名分으로 韓國과 修交하지 말 것을 베트남 側에 强力히 要求했어요.”

    옛 蘇聯과 修交할 때엔 借款을 提供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次官 15億 달러를 提供한 건 맞습니다. 이 때문에 1992年 8月 韓中 修交 詩에도 言論에서 ‘中國과 國交 正常化 代價로 經濟援助 또는 借款을 提供한 것이 아닌가’ 하는 疑惑이 提起되기도 했죠. 事實이 아닙니다. 1991年 12月 1次 修交 交涉 時 中國에 代價를 提供한 건 事實이 아니라는 點을 베트남 側에 說明하며 諒解를 求했습니다. 代身 韓國이 始作하는 公共開發援助 첫 受惠國으로 베트남을 選定하겠다고 約束했어요. 베트남 政府 關係者들은 半信半疑하면서도 結局 韓國의 事情을 理解하고 받아들였습니다. 以後 베트남은 韓國의 첫 公的開發援助 對象國이 됐습니다. 約束을 지킨 거죠. 게다가 1人當 國民所得이 1000달러를 넘으면 公的開發援助에서 除外한다는 韓國 外交部 指針이 있었음에도 不拘하고 臺(對)베트남 支援을 强化했어요. 1992年부터 2016年까지 無償 4.2億 달러, 有償 12.1億 달러 等 總 16.4億 달러를 志願했습니다. 이러한 努力이 베트남에도 믿음을 줬죠. 베트남 中部 地域에 韓國의 資金으로 幼稚園, 學校를 비롯한 社會基盤施設을 擴充했습니다.”

    以後 修交 交涉은 어떠했나요. 北韓의 妨害 工作은 더 없었습니까.

    “눈에 띄는 妨害 工作은 없었어요. 1991年 1次 交涉 6個月 뒤인 1992年 3月 30日부터 하노이에서 2次 交涉이 再開됐습니다. 베트남 側은 戰爭 補償金이나 經濟援助에서 ‘韓國 側이 自律的으로 判斷해 달라’며 한결 누그러든 態度를 보였습니다. 不코안 베트남 外交部 次官은 ‘6個月의 空白은 時間 浪費였다’라고도 했고요. 이때 ‘相互 連絡代表部’ 設置를 合意했습니다. 代表部 機能과 役割을 正規 外交公館과 同一하게 하고 代表도 大使級 外交官으로 派遣하기로 했죠. 1992年 4月 2日 ‘相互 連絡代表部 設置 諒解 覺書’에 署名했고, 7月 11日에 하노이에 駐베트남 大韓民國 連絡代表部가 設置됐습니다. 初代 代表(大使)론 修交 交涉 過程에 次席代表로 參與했던 박노수 前 오사카 總領事가 任命됐죠. 그리고 12月 22日 마침내 兩國의 國交가 正常化돼 서울과 하노이에 相互 大使館이 設置됐습니다.”

    6월 8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한베 수교 30주년을 맞아 응우옌 푸 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과 화상 통화하고 있다. [뉴스1]

    6月 8日 서울 龍山區 大統領室에서 尹錫悅 大統領이 한베 修交 30周年을 맞아 응우옌 푸 쫑 베트남 共産黨 書記長과 畫像 通話하고 있다. [뉴스1]

    베트남 自强 意識 배워야

    中國의 隣接國으로서 獨立을 지켜온 베트남은 韓國과 類似한 點이 많다고 評價받습니다. 베트남이 韓國에 주는 示唆點은 무엇이라 봅니까.

    “베트남은 같은 社會主義 國家로서 中國으로부터 各種 支援을 받았음에도 ‘國益(國益)’李 侵害받을 境遇 戰爭도 不辭하지 않았습니다. 베트남은 基本的으로 自强(自强) 意識이 剛하고 不當한 일에 屈從하지 않습니다. 韓國이 배워야 할 部分이라 생각합니다.”

    2012年 韓國-베트남 修交 20周年을 記念한 東亞日報 寄稿(寄稿)에 ‘두 나라는 力動性 있는 中堅 오피니언 리더로서 地域의 安定과 繁榮을 위한 中心 役割을 하게 될 것’이라고 썼습니다. 修交 30周年을 맞이한 感懷가 어떻습니까.

    “韓國과 베트남이 國交를 正常化한 지 한 世代가 지났습니다. 當時 開發途上國의 先頭 走者였던 韓國은 先進國 隊列에 進入했고, 베트남은 東南아시아 地域 中堅 國家로 발돋움했습니다. 韓中 修交도, 한베 修交도 東西 冷戰體制가 解體돼 가는 過程에서 韓國이 能動的인 外交政策을 통해 만들어낸 結果物입니다. 個人的으론 제가 外交官으로서 힘써 일하던 時期에 이루어낸 成果라는 點에서 뿌듯합니다. 國家를 위해 뭔가를 해냈다는 생각에 기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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