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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寶塔과 釋迦塔의 또 다른 眞實|新東亞

名作의 祕密

多寶塔과 釋迦塔의 또 다른 眞實

왜 佛國寺 雙塔만 模樣이 다를까

  • 이광표 西原大 敎養大學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19-06-07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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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佛國寺는 慶北 慶州에 가는 사람들이 빠짐없이 찾는 곳 가운데 하나다. 거기 國寶 20號 多寶塔과 國寶 21號 釋迦塔이 있다. 사람들은 特히 多寶塔의 華麗하고 精巧한 디자인에 讚辭를 보낸다. 多寶塔 模樣은 다른 傳統 石塔과 確然히 다르다. 世界 어느 곳에서도 그 類例를 찾아볼 수 없다. 왜 저렇게 特異한 모습일까. 궁금症이 꼬리를 문다.
    [동아DB]

    [東亞DB]

    釋迦塔(釋迦塔)과 多寶塔(多寶塔)은 왜 模樣이 서로 다를까. 寺刹에서 雙塔은 普通 模樣이 똑같거나 아주 恰似하다. 그래서 이름도 ○○社 銅塔, ??使 西塔이라고 부르는 게 一般的이다. 그런데 왜 唯獨 佛國寺(佛國寺)에서만 두 塔 模樣이 다르고 이름도 다르단 말인가. 그리고 多寶塔은 果然 몇 層 塔일까. 이 궁금症에 多寶塔과 釋迦塔의 美學이 있다.


    法華經을 塔으로 具現하다

    경북 경주 불국사 경내에 있는 석가탑(왼쪽)과 다보탑. [동아DB]

    慶北 慶州 佛國寺 境內에 있는 釋迦塔(왼쪽)과 多寶塔. [東亞DB]

    多寶塔은 佛敎 經典 ‘法華經(法華經)’에서 由來한다. 法華經에는 多寶如來(多寶如來)와 釋迦如來(釋迦如來)가 登場한다. 多寶如來는 過去의 部處(過去불), 釋迦如來는 現在의 部處(現世佛)다. 法華經 가운데 ‘犬보탑品(見寶塔品)’에는 이런 內容이 나온다.

    多寶如來는 平素 “내가 부처가 된 뒤 누군가 法華經을 說法하는 者가 있으면 언제라도 그 앞에 塔 模樣으로 솟아나 그 內容이 眞實하다는 것을 證明하겠다”고 서원(誓願)했다. 多寶如來는 後날 釋迦牟尼가 ‘法華經’의 眞理를 說破하자 正말로 그 앞에 華麗한 塔으로 불쑥 솟아났다. 그 塔의 높이는 500柔順(由旬)이요 平面 넓이는 250由旬이다. 온갖 寶物과 5000個의 亂順(欄循·欄干), 1000萬 個의 龕室(龕室)로 裝飾돼 무척이나 華麗했다. 옆으로 旗발이 나부끼고 줄줄이 구슬이 늘어져 있고, 보배로운 방울들이 달려 있다. 또한 四方으로 아름다운 香이 풍겨 世界에 가득 찼다.

    法華經 犬보탑品 內容을 要約하면, 釋迦塔은 現在의 部處인 釋迦如來가 說法하는 內容을 表現한 塔이고, 多寶塔은 過去의 部處인 多寶如來가 佛法을 證明하는 것을 象徵하는 塔이다. 多寶塔은 따라서 多寶如來가 머무는 幻想的인 宮殿인 셈이다. 多寶如來는 釋迦如來와 한 雙을 이루기에 多寶塔은 釋迦塔과 한 雙이다. 

    佛國寺의 多寶塔과 釋迦塔은 法華經의 이 內容을 視覺的으로 具現한 것이다. 基壇部의 階段과 欄干(現在는 欄干 기둥만 남아 있다), 네 마리의 獅子賞, 4角과 8脚의 欄干 裝飾, 蓮꽃잎과 그걸 받치는 대나무줄기 模樣의 기둥, 뒤집힌 신발 模樣의 기둥 等 一般的인 石塔에서는 想像할 수 없을 程度로 다채로운 裝飾을 넣어 華麗하게 꾸민 것도 法華經 內容을 充實하게 表現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多寶塔은 마치 老鍊한 木造建築物을 보는 듯하다. 

    多寶塔 釋迦塔은 佛敎建築이고 佛敎美術이다. 佛敎美術, 基督敎美術 같은 宗敎美術은 東西古今을 莫論하고 格式과 틀이 重要하다. 作家의 創意性보다 宗敎 理念을 重視하고, 宗敎 理念과 敎理를 드러내기 위한 規則이 있다. 宗敎美術은 모두 그 規則을 따라야 한다. 지나치게 感覺的이어서는 안 되고, 지나치게 人間的이어서도 안 된다. 創意性보다 規則이 優先이다. 



    그런데 多寶塔은 무척 獨特하다. 이런 模樣의 塔은 以前에도 없었고 以後에도 없다. 經典 內容을 塔으로 表現한 적도 없다. 게다가 査察에 雙塔을 配置하면서 이렇게 서로 다르게 造成한 것도 前無後無한 일이다. 査察 建築의 核心이 되는 塔을 造成함에 있어 새롭고 破格的인 形式을 보여줬다. 이렇게 새로운 形式이 어떻게 新羅 땅, 慶州에서 나타난 것일까.

    삶과 죽음이 共存하는 곳, 慶州

    천년고도 경주의 고분. [동아일보 양회성 기자]

    千年古都 慶州의 古墳. [동아일보 양회성 記者]

    答을 찾으려면 慶州 都心을 거닐어봐야 한다. 慶州 都心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大型 古墳이다. 都心 한복판 到處가 죽은 者의 무덤이다. 慶州 都心을 걸으면서 佛國寺에서와 같은 質問을 던져보자. 죽은 者의 무덤이 왜 이렇게 都心 한복판에 있는가. 新羅 사람들은 王宮 바로 옆에, 日常 空間 바로 옆에 왜 무덤을 만들었는가. 

    이탈리아 로마, 日本 교토(京都), 中國 시안(西安) 等 世界 어느 곳을 다녀도 都心 한복판에 이처럼 大型 무덤이 櫛比한 곳은 없다. 우리의 古都(古都) 亦是 마찬가지다. 設令 古墳이 있더라도 都心에서 若干 벗어난 近郊 쪽, 平地가 아닌 丘陵地帶에 造成돼 있다. 競走처럼 都心 한복판 平地에 무덤을 造成한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慶州 사람들은 21世紀 尖端 디지털 時代에도 무덤 사이로 出勤하고 退勤하고, 乳母車를 끌고 古墳 옆에서 休息을 取하고, 죽은 者를 바라보며 茶를 마신다. 大陵院(大陵苑) 무덤 옆에 ‘荒籬단길’이 생겨 이제는 젊은이들이 新羅人의 무덤 옆에서 浪漫을 論한다. 慶州에서 살고 競走를 즐기는 사람들은 예나 只今이나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 참으로 大膽하고 破格的이지 않은가. 妙한 魅力이다. 新羅 사람들은 이처럼 省察的이었고 慶州는 이미 哲學的인 空間이었다. 

    이番엔 바닷가로 나가보자. 慶州 감포 앞바다에 가면 大王巖이 있다. 三國을 統一한 新羅 文武王(在位 661~681年)의 水中陵(水中陵)이다. 아들 神文王이 아버지 遺言에 따라 東海 가운데 큰 바위에 葬事를 지낸 곳이다. 文武王은 죽고 나서도 龍이 돼 나라를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바다에 葬事 지내달라는 遺言을 남겼다. 그에 따라 東海 바위틈에 遺骨函을 埋葬한 것으로 推定된다. 우리 歷史에 水中陵은 없다. 그런데도 水中陵을 만들 생각을 했다니, 이 또한 破格的이고 挑發的이다. 

    慶州에서 蔚山 쪽으로 가다보면 큰길 옆으로 掛陵(掛陵)이 있다. 新羅 元聖王(在位 785~798年)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다. 陵 앞에는 左右 두 줄로 無人, 文人, 獅子를 形象化한 돌조각이 세워져 있다. 모두 무덤 主人公을 지켜주는 象徵的인 存在다.

    西域人과 新羅人이 擊毬를 즐기던 곳

    경주 괘릉을 지키는 무인석. 얼굴이나 옷차림으로 보아 이 무인은 서아시아 아랍계 사람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慶州 掛陵을 지키는 武人石. 얼굴이나 옷차림으로 보아 이 無人은 西아시아 아랍系 사람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武人石 한 雙의 모습이 獨特하다. 新羅人, 韓半島인 얼굴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外國人 얼굴이다. 눈은 깊숙하고 코는 우뚝 솟았다. 이른바 深目고비(深目高鼻)다. 귀밑에서 턱으로 내려간 鬚髥 亦是 우리 모습이 아니다. 곱슬머리를 동여맸고 아랍式의 둥근 터번까지 썼다. 헐렁한 上衣에 치마 같은 下衣를 걸쳤다. 全體的으로 西아시아 아랍系 사람의 얼굴이다. 當時 用語를 빌리자면 西域人(西域人)의 얼굴. 西域은 中國의 西쪽 地域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新羅王의 무덤을 新羅人이 아니라 西域人 武士가 지키고 있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무덤 앞 武人像을 西域人으로 表現한 걸 보면 무덤 主人公은 살아 있을 때 西域人과 特別한 關係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죽고 나서 그의 무덤 앞에 西域人 彫刻像을 세울 까닭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元聖王이 살아 있을 때, 원성왕을 警護하는 護衛武士가 西域人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西域人이 王의 警護室長을 맡았던 셈이니, 破格이 아닐 수 없다. 

    慶州에는 以外에도 西域人 彫刻像이 여럿 傳해온다. 헌덕왕陵 武人像(9世紀), 興德王陵 武人像(9世紀), 서악동 古墳(8, 9世紀)의 墓室 文 西域引上, 구정동 石室墳의 西域引上(9世紀) 等. 이 가운데 구정동 石室墳의 모서리 기둥에 彫刻된 西域引上이 特히 興味롭다. 現在 國立慶州博物館 野外에 展示돼 있는 이 돌기둥엔 방망이를 어깨에 걸친 武士 한 名이 彫刻돼 있다. 그런데 그 방망이를 잘 들여다보면 끝 部分이 폴로 或은 하키 스틱처럼 휘어 있다. 

    폴로는 統一新羅時代 人氣 스포츠의 하나였다. 우리式으로 말하면 擊毬(擊毬)다. 그럼 왜 西域人이 폴로 스틱을 쥐고 있는 것일까.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始作된 폴로가 실크로드와 中國을 거쳐 統一新羅 當時 韓半島에 上陸했고, 많은 新羅人이 外國의 新種 스포츠에 熱狂했음을 일러준다. 이 무덤 主人公은 生前에 擊毬를 무척 좋아했던 模樣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무덤에 이런 모습을 彫刻해 넣었을 理가 없다. 무덤 主人公은 이란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西域人과 함께 擊毬를 즐겼음에 틀림없다. 흥미로운 事實이다. 

    慶州 용강동 石室墳(8世紀)에서는 文官像 土俑(土俑)李 出土됐다. 笏(笏)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인데 긴 턱鬚髥과 얼굴 모습이 分明 西域人이다. 이 土俑의 모델, 卽 西域人은 8世紀 新羅의 文官 公務員으로 일했을 可能性이 濃厚하다. 

    한番 想像을 해본다. 8, 9世紀 西域人들은 慶州에 들어와 王의 護衛武士로 일했다. 公務員으로 일하는 이도 있었다. 退勤 後 그들은 慶州 사람들과 어울려 大型 古墳 옆에서 擊毬를 즐겼다. 그러곤 틈틈이 佛國寺 나들이도 했을 것이다. 그 大膽한 開放性과 破格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8, 9世紀 新羅 땅 慶州는 이런 곳이었다.

    8世紀 慶州의 餘裕와 破格

    신라의 문화 수준을 알려주는 석굴암, 성덕대왕신종, 다보탑 사자상(왼쪽부터). [사진 제공·경주시, 동아일보 이광표 기자, 동아일보 김병기 기자]

    新羅의 文化 水準을 알려주는 石窟庵, 聖德大王神鐘, 多寶塔 獅子賞(왼쪽부터). [寫眞 提供·경주시, 東亞日報 이광표 記者, 동아일보 金炳基 記者]

    統一新羅는 佛國土를 志向했다. 8世紀 中盤 조성한 佛國寺는 新羅人의 內面을 凝縮한 空間이다. 그렇기에 佛國寺는 大衆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이었다. 新羅의 組塔공(造塔工·石工)은 그곳에 塔 두 個를 세웠다. 

    新羅가 三國을 統一한 지 70餘 年이 지난 8世紀 中盤, 그 石工은 새로운 것에 對한 熱望을 느꼈을 것이다. 旣存 石塔 樣式을 果敢히 깨뜨리고 이제껏 보지도 經驗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形態를 試圖하고 싶었을 것이다. 經典에만 있는 것, 實際로 볼 수 없는 것, 마음에만 있던 것을 눈앞에 實物로 펼쳐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건 그 누구도 想像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果敢하고 創意的인 試圖였다. 

    佛敎美術의 틀을 벗어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자칫하면 波紋(破門)까지 當할 일이다. 하지만 8世紀 新羅 佛敎는 石工의 挑發에 가까운 創意性을 받아들였다. 大膽한 發想을 하는 것도, 그 大膽함을 받아들이는 것도 自信感이 없으면 不可能한 일이다. 이러한 새로운 試圖는 以前에도 없고 以後에도 없다. 多寶塔 釋迦塔은 그 破格의 絶頂이다. 

    이처럼 자유로운 創意性은 自信感에서 왔다. 三國 가운데 後發 走者였음에도 三國을 統一하고 主導權을 잡은 8世紀 新羅의 그 당찬 自信感일 것이다. 名作은 이렇게 破格에서 온다. 그것은 個人의 力量, 宗敎의 包容性뿐 아니라 時代의 힘이 凝縮돼 이뤄진다. 多寶塔 釋迦塔은 이렇게 佛敎建築 宗敎美術의 劃一性을 보기 좋게 날려 보냈다. 그것이 8世紀 新羅와 競走였다. 

    이런 點에서 8世紀 前後는 남다른 時代가 아닐 수 없다. 佛國寺, 多寶塔과 釋迦塔, 石窟庵, 聖德大王神鐘(一名 에밀레鐘) 等이 誕生했다. 이들은 모두 該當 장르에서 우리 傳統美術의 典範이 됐고 韓國 最高의 文化遺産으로 자리 잡았다. 모두 8世紀 新羅의 文化的 宗敎的 自信感의 産物이다. 8世紀學(學)을 論해야 할 程度다. 

    多寶塔은 어느 時代, 어느 空間에서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건 8世紀 新羅 慶州만의 石塔이다. 佛國寺 大雄殿 앞의 두 塔이 모두 釋迦塔처럼 생겼다면 어땠을까. 只今처럼 生動感이 넘치지 않을 것이다. 只今처럼 興味津津한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名作은 이렇게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果敢하고 挑發的인 破格으로, 斬新한 眼目으로 새로운 美를 開拓한다.

    多寶塔은 몇 層 塔인가

    다시 한番 質問을 던진다. 그럼, 多寶塔은 몇 層인가. 2層塔, 3層塔, 4層塔 等 다양한 說이 있지만 아직 明快한 答은 없다. 一般的인 塔과 模樣이 너무 달라 層數를 헤아리기 쉽지 않다. 

    多寶塔 맨 아래쪽 階段이 있는 部分이 基壇部(받침 部分)라는 點에는 專門家들 意見이 一致한다. 그러나 그 윗部分을 놓고 意見이 엇갈린다. 基壇部 위쪽의 四角 기둥 있는 部分을 基壇으로 보는 見解가 있는가 하면, 이것을 하나의 層으로 보는 見解도 있다. 

    塔 中間의 欄干 部分에 對해서도 意見이 갈린다. 4角 欄干과 8角 欄干 部分을 各各 하나의 層으로 보는 見解가 있고, 이와 달리 4角 欄干과 8角 欄干 部分을 합쳐 하나의 層으로 보는 見解도 있다. 그리고 欄干 위부터 8角 屋蓋石(지붕돌) 아래 部分을 또 하나의 層으로 보는 專門家도 있다. 이렇게 보는 角度에 따라 多寶塔은 2層塔, 3層塔, 4層塔이 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無給(無級)의 塔, 卽 層이 없는 塔이라는 主張도 있다. 이 見解는 欄干 안쪽에 숨어 있는 8角 기둥에 注目한다. 이 8角 기둥이 多寶塔의 塔身(몸體)인데, 이것이 欄干에 依해 가려져 있다는 點에서 塔身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見解다. 卽 多寶塔의 塔身은 있으면서 없는 것이며, 塔身이 없다는 것은 層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無給塔, 무層塔이라는 말이 나온다. 

    多寶塔이 果然 몇 層인지, 永永 그 答을 찾아내지 못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에 多寶塔은 더 魅力的이다. 8世紀 中盤 多寶塔을 세운 新羅의 石工에게 몇 層 塔인지는 重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多寶塔을 통해 韓國 石塔 美術의 未來를 활짝 펼쳐 보였다. 모든 것이 새로운 挑戰이었다. 그런 石工에게 旣存 石塔의 層數 槪念은 別 意味가 없었다. 

    新羅 땅 慶州는 到處가 破格이다. 都心 한복판 大型 古墳이 그렇고, 西域人 조각과 土俑이 그렇고, 大王巖이 그렇고, 多寶塔 釋迦塔이 그렇다. 8世紀 慶州는 果敢하고 挑發的이었다. 多寶塔은 그 破格의 絶頂이다. 思惟와 省察과 欲望을 塔으로 視覺化하다니, 그것도 華麗하고 세련된 美術로 誕生시키다니. 多寶塔은 이 時代에 如前히 神祕와 미스터리를 남긴다. 名作은 미스터리를 낳고 그 미스터리는 名作의 價値를 더해준다. 이제, 佛國寺에 가면 多寶塔이 果然 몇 層 塔인지 헤아려볼 일이다.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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