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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시데레우스’|新東亞

〈새連載〉 황승경의 極과 人間

뮤지컬 ‘시데레우스’

“갈릴레이, 별에서 眞實을 찾다”

  • 公演칼럼니스트·公演藝術學 博士

    lunapiena7@naver.com

    入力 2019-06-0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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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레디 머큐리가 외쳤던 ‘眞實의 아이콘’

    • 두 딸을 修女院에 보내야 했던 아버지

    • 木星 衛星을 ‘메디치의 별’ 命名… 宮廷 數學者의 길

    • 地動說 硏究로 9年間 家宅軟禁, 墓碑 없이 賣場

    ‘록 音樂의 傳說’ 퀸(Queen)의 代表曲 ‘보헤미안 랩소디’에는 殺人을 한 死刑囚의 後悔와 恐怖, 悔恨이 서려 있다. 그러나 이는 퀸의 리더 프레디 머큐리(1946~1991)가 自身 內面에 살고 있는 人物을 죽이고 새로운 自我를 찾아간다는 內容이라는 解釋도 있다. 흥미로운 點은 死刑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緊迫한 瞬間에 생뚱맞게 코러스는 和音을 넣어 16世紀 科學者 ‘갈릴레오’를 5番 부르짖는다. 아마도 프레디는 ‘地動說’이라는 科學的 眞實을 主張하다 宗敎裁判所 裁判을 받기 위해 監禁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그림)의 苦惱를 移入하기 위해 ‘갈릴레오’를 부르짖게 했을 것이다. 

    록 音樂의 皇帝조차 切迫한 瞬間에 聯想할 程度로 갈릴레이는 감추어진 眞實을 어두운 世上에 알리는 ‘아이콘’이다. 公演界에도 그와 關聯된 다채로운 公演이 舞臺에 올라 다양한 表現과 解釋으로 觀客을 만나고 있다. 

    뮤지컬 ‘시데레우스’(4月 17日~6月 30日/ 忠武아트센터)에는 갈릴레이와 同時代를 살았던 獨逸 數學者이자 天文學者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가 登場한다. 케플러는 實際 自身의 硏究 結果物인 ‘宇宙의 神祕’를 先輩 갈릴레이에게 보내 도움을 請했다. 勿論 갈릴레이는 一言之下에 拒絶하고 더는 交流가 없었지만, 케플러가 갈릴레이의 學說을 積極 支持했다는 記錄에 根據해 뮤지컬은 出發한다. 

    宇宙 속에 있는 듯 幻想을 심어주는 舞臺는 各其 다른 獨立된 空間을 만들기도 하고 公演場 全體가 하나의 宇宙를 表現하기도 한다. 舞臺 위 두 個의 映像 스크린은 갈릴레이와 케플러 두 個의 望遠鏡 렌즈로 바뀌어 公演場을 찾은 觀客들에게 望遠鏡 너머로 보이는 아름다운 宇宙 風景을 보여준다.

    ‘눈물의 딸’ 첼레스테

    [shutterstock]

    [shutterstock]

    幕이 오르면 舞臺 위에 갈릴레이의 딸 修女 마리아 첼레스테(兒名 비르지니아)가 宗敎裁判所의 法廷에 서게 된 아버지의 便紙를 받는 場面으로 이야기는 始作한다. 파도바 敎授 時節, 갈릴레이는 ‘마리나 감바’라는 아름다운 女人에게서 1男 2女를 얻었지만 身分 差異 때문에 正式으로 結婚하지는 못했다. 只今이야 손가락질 받을 私生活이기도 하지만 當時 風土로는 別問題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幸福도 暫時뿐, 큰딸이 10살 되던 해에 갈릴레이가 피렌체로 移職하며 두 사람의 사이도 금이 간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法. 한때 불같은 사랑을 하던 두 사람은 疏遠하게 되고 2年 뒤 마리나 감바는 世上을 등진다. 이미 두 딸을 보살피고 있는 老母에게 어린 아들까지 맡길 수가 없어 그는 두 딸을 피렌체 隣近의 修女院으로 보낸다. 私生兒로 戶籍이 없는 두 딸이 適當한 婚處를 얻지 못할 것을 걱정한 아버지의 心情으로 차라리 修女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큰딸 비르지니아는 修女院에 들어가면서 별에 關心이 많은 아버지를 記念하며 ‘淸明한 하늘’이라는 意味의 ‘첼레스테’로 이름을 짓는다. 비록 떨어져 있지만 婦女는 234通의 便紙를 주고받으며 父母子息 間의 敦篤한 情을 나눴다. 

    지난 5世紀 동안 갈릴레이를 主題로 한 作品에서 마리아 첼레스테는 恒常 登場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뮤지컬 ‘시데레우스’에서 첼레스테 修女는 ‘딸 바보’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딸이자 든든한 同僚로 그려진다. 갈릴레이가 宗敎裁判에서 有罪를 받은 다음 해 첼레스테는 34歲 한창 나이에 修女院에서 夭折한다. 하지만 家宅軟禁 中이던 갈릴레이는 딸의 葬禮式에 가보지도 못하고 눈물로 한스러운 밤을 지새웠다고 傳해진다. 뮤지컬에서는 갈릴레이가 너무 젊어 보여 實際 父女가 아니라 男妹로 보였다. 極에 對한 沒入度를 떨어지게 하는 玉의 티다. 

    劇 中 마리아 첼레스테 修女는 便紙에 일러둔 대로, 急히 갈릴레이의 硏究室에 들어가 便紙꾸러미를 찾아낸다. 幸여나 누가 볼까 싶어 서랍 구석에 꼭꼭 숨겨둔 便紙 發信人은 獨逸 數學者 케플러. 修女는 幸여나 아버지에게 새로운 罪名이 늘어날까 봐 勞心焦思한다. 새로운 世上에 눈을 뜨게 된 두 名의 科學者가 잘못된 常識을 克服하기 위해 時代的 偏見과 싸워가는 旅程을 읽어 내려간다. 케플러가 自身의 硏究 成果를 담은 ‘宇宙의 神祕’에 對한 甘遂와 助言을 해달라며 끊임없이 書信을 보내자 이에 지친 갈릴레이는 그의 假說이 틀린 理由를 條目條目 證明하려 한다. 그는 自身이 發明한 望遠鏡을 통해 作成된 天體 記錄으로 地動說을 完成한다. 두 사람은 1500年 만에 宗敎·哲學으로부터 分離된 科學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天動說을 깨는 사람들

    中世 歷史는 信仰의 歷史라고 할 만큼 基督敎的 世界觀과 價値觀으로 神의 世界에 接近하고 理解하려 했다. 中世 天文學者들은 ‘宇宙의 모든 行星이 地球를 中心으로 돈다’는 天動說을 굳게 믿었다. 그렇다고 神이 人間을 創造했으니 當然히 地球가 宇宙의 中心이 된다는 天動說을 盲目的으로 推仰한 것은 아니다. 天動說은 2000年 동안 世紀를 거듭하며 當代 最高 碩學들에 依해 補完되고 擴張된 絶對的 理論이었다. 

    紀元前 4世紀頃, 아리스토텔레스는 永遠히 變치 않는 完璧한 存在인 宇宙의 中心은 地區라고 여겼고, 法則과 理論으로 이를 證明했다. 앞서 紀元前 5世紀 피타고라스와 紀元前 3世紀 아리스타르코스가 地動說을 主張했지만 完璧하게 立證하지 못하면서 地動說은 假說에 머물렀다. 

    天動說은 舊約聖經(여호수아 10章)에도 登場한다. 紀元前 1400年頃 神은 自身의 權能으로 地球를 도는 太陽을 暫時 멈춘 奇跡을 行한다. 以後 1500年 동안 天動說은 絶對的 眞理로 君臨했다. 天動說은 聖經에 對한 强力한 證據가 돼 信仰人을 더욱 宗敎에 沒入하게 만드는 原動力이었다. 天動說을 根據로 計算한 天文航法은 正確하지 않아 航海者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非一非再했다. 天動說의 限界를 지켜보며 그 堅固한 껍질을 깨려 試圖한 科學者들이 나타나기 始作했다. 

    처음 테이프를 끊은 사람은 폴란드 出身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 敎會와의 衝突을 念慮한 그는 死亡 1年 前인 1542年에야 著書 ‘天體의 回轉에 關하여’를 出刊해 큰 波長을 일으켰다. 그러나 왜 우리가 自傳速度를 느끼지 못하는지, 地球 反對便의 사람들이 왜 宇宙空間으로 떨어지지 않는지 等의 問題에 對해서는 論理的으로 立證하지 못했다. 그가 主張하는 地動說은 天動說보다 훨씬 複雜하고 模糊했다. 

    코페르니쿠스가 世上을 떠난 지 22年 뒤, 이탈리아 피사에서 한 男子아이가 7男妹의 長男으로 태어난다. 當時 長男에게는 性(姓)과 같은 이름을 주던 이탈리아 中部地方의 風習대로 性 ‘갈릴레이’를 따 이름을 ‘갈릴레오’로 지어줬다. 할아버지는 名望 있는 醫師였고, 아버지 빈첸初 갈릴레이는 피렌체 有力 家門의 宮廷 作曲家로 르네상스 時代에 손꼽히는 知識人이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갈릴레오는 피사大學 醫學部에 入學하지만 醫學보다는 數學에 더 集中한다. 그리고 1589年 피사대학 數學科 敎授로 任用되지만 生活은 如前히 窮乏했다. 1592年 파도바大學 數學科로 籍을 옮기면서 輸入은 좋아졌지만, 家長인 그는 軍事用 컴퍼스(製圖用 器具)를 發明하는 等 副收入源을 끊임없이 찾아다녀야 했다. 1609年 갈릴레이는 네덜란드에서 發明된 望遠鏡보다 8倍 倍率이 좋은 望遠鏡을 開發해 베네치아 總督에게 獻辭하고 終身敎授職을 保障받으려 努力했지만 成事되지 않았다. 그래서 20倍率의 望遠鏡을 開發해 直接 하늘을 觀察했다.

    敎會의 信念에 반한다는 것은…

    갈릴레이 눈에 비친 달은 알려진 것과 다르게 表面이 울퉁불퉁했다. 36歲의 젊은 數學科 敎授는 地球 中心 世界觀이 聖經에 違背된다는 認識보다는 安定된 일자리가 時急했다. 그는 木星에 4個의 衛星이 存在한다는 事實을 發見하고는 재빨리 이 衛星에 ‘메디치의 별’이라 명명하고 코지모 메디치 對共에게 後援을 要請한다. 달과 木星을 記錄한 冊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별이 傳하는 消息’이라는 뜻)와 望遠鏡을 메디치 對共에게 보낸다. 그는 所願대로 메디치 家門의 宮廷 數學者 兼 哲學者가 돼 安定된 家計를 꾸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居處를 옮기면서 다섯 家族이 뿔뿔이 흩어지는 契機가 되고 말았다. 

    뮤지컬의 題目이기도 한 그의 著書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는 550版까지 出刊됐고, 中國에까지 飜譯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名聲도 높아졌다. 그토록 念願했던 安定된 職場에서 富와 名譽를 모두 쥐게 됐다. 그러나 아무리 理性的인 思考로 學說을 證明했더라도 敎會의 信念에 反한다면 異端으로 내몰리는 現實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自身의 信念을 굽히지 않고 地動說을 主張했던 天文學者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는 고통스럽게 火刑臺에서 삶을 마감했기에 硏究를 持續하려면 그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1615年, 그도 宗敎裁判所의 부름을 받았다. 刺戟的인 元本 文句를 醇化시킨 僞造 文書까지 만들어가며 敎皇廳을 說得했고, 이에 聖書 內容과 矛盾되는 學說을 다시는 主張하지 않겠다는 誓約을 하고서야 裁判에 回附되지 않았다. 

    남부러울 것 없이 成功街道를 달리던 그는 1632年 ‘두 個의 主要 宇宙體系에 對한 對話’라는 冊을 執筆하는데, 이듬해 참다 못한 로마 敎皇廳이 그를 宗敎 裁判臺에 세웠다. 當時 敎皇 우르바노 8歲(在位 1623~1644)는 敎皇에 選出되기 前에는 갈릴레이를 辯護했던 人物로 竹馬故友처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敎理에 反對되는 冊을 執筆한 것에 對한 背信感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갈릴레이는 地動說 關聯 硏究를 하지 않겠다는 敎皇廳과의 誓約을 어겼기 때문에 加重 處罰을 받아야 했지만 多幸히 高齡과 健康狀態를 考慮해 家宅 年金이 내려졌다.

    새로운 熱望의 씨앗을 남긴 사람들

    뮤지컬 ‘시데레우스’의 한 장면. [충무아트센터 제공]

    뮤지컬 ‘시데레우스’의 한 場面. [忠武아트센터 提供]

    남은 9年의 人生을 집 안에서만 軟禁돼 生活했으나 그는 視力을 잃은 狀態에서도 죽는 瞬間까지 손에서 冊을 놓지 않을 程度로 흐트러짐 없이 硏究에 熱中했다고 한다. 그리고 死亡하기 1年 前 ‘새로운 두 科學에 對한 論議와 數學的 論證’이라는 또 다른 力作을 네덜란드의 出版社를 통해 世上에 내놓았다. 새로운 두 科學은 ‘固體의 强度에 對한 理論’ ‘物體의 落下 法則’이었다. 科學에 對한 熱情은 높았지만 이 때문에 그는 死亡 後에도 家族墓地에 묻히지 못하고 95年間 墓碑도 없이 쓸쓸히 있어야 했다. 

    死亡 以後 1世紀 동안 그의 業績은 再評價됐고, 드디어 强力한 時代的 要求에 依해 미켈란젤로가 잠들어 있는 피렌체의 산 크로체 聖堂에 永眠할 수 있었다. 里長(移葬) 當日에는 그의 追從者들이 몰려와 聖堂이 阿修羅場이 될 程度였고, 그의 오른쪽 손가락 3個와 脊椎와 齒牙 各 1個씩을 훔쳐가는 獵奇的인 事件도 發生했다. 고작 100餘 年이 지났을 뿐인데, 世上을 號令하던 權力者였던 敎皇, 베네치아 總督, 메디치 公爵은 歷史 속으로 사라지고 갈릴레이는 如前히 現在形으로 記憶되고 있었다. 

    4人組 라이브 밴드의 생생한 演奏가 돋보이는 뮤지컬 ‘시데레우스’에는 마지막까지 自身의 信念을 위해 싸웠고, 새로운 時代를 向한 熱望의 씨앗을 남기는 갈릴레이와 케플러의 秀麗한 노래가 가득하다. 비록 두 사람은 만난 적도 없고 뮤지컬에서처럼 많은 便紙를 주고받는 關係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을 함께 다루는 뮤지컬이 誕生했을까. 

    이들은 끝까지 信念을 굽히지 않아 끔찍하게 불 속에서 죽어나간 브루노와는 다르다. 갈릴레오와 케플러는 科學的 事實을 알려야 한다는 學者的 信念 뿐 아니라 오히려 理論을 바탕으로 溫度計와 脈搏計, 물을 끌어올리는 機械 같은 ‘先物’을 人類에 膳賜하며 새로운 時代를 向한 靑寫眞을 提示한 未來志向的 人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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