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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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당
로고
象徵色 파랑
理念 保守主義 ( 大韓民國 ) [1]
國民保守主義 [2]
反共主義 [3]
新自由主義 [4]
社會保守主義 [5]
스펙트럼 中道右派 [6] ~ 右翼 [7]
黨職者
總裁 李會昌
歷史
創黨 1990年 1月 22日 [8]
解産 1997年 11月 21日 [8]
先行組織 民主正義黨
統一民主黨
新民主공화당
統合된 正當 한나라黨
移轉 黨名 民主自由黨
(1990年 1月 22日 ~ 1995年 12月 6日)
內部 組織
中央黨舍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永登浦區 汝矣島洞 17-7

신한국당 (新韓國黨, New Korea Party)은 1990年 1月 22日 부터 1997年 11月 21日 까지 [8] 存在했던 大韓民國 保守主義 正當 이다.

1990年 , 當時 執權 與黨인 民主正義黨 統一民主黨 , 新民主공화당 3黨 合黨 을 통해서 民主自由黨 (民主自由黨, 略稱 民自黨)李 創黨된 것으로 始作하였다가, 以後 1995年 신한국당으로 名稱이 바뀐 것을 거쳐, 1997年 民主黨 한나라黨 으로 合當하면서 傳統保守政黨의 系譜를 이었다.

歷史 [ 編輯 ]

創黨 背景 [ 編輯 ]

第5共和國 (第五共和國)의 執權 與黨이었던 民主正義黨 1987年 大韓民國 第13代 大統領 選擧 에서 盧泰愚 (盧泰愚)를 大統領으로 당선시켰으나, 民主化에 對한 熱望으로 因해 1988年 13代 總選 (十三代總選)에서는 過半數(150席)에 훨씬 못 미치는 125席 獲得에 그쳐 與小野大(與小野大)構圖에 몰리게 된다. 그들은 院內 1黨의 地位를 얻었음에도 不拘하고, 정기승 大法院長 任命 同意案이 國會에서 否決되는 等 難關에 부딪혔다. 또한 大規模 民主化 運動이었던 6月 抗爭 (六月抗爭)以後에 날로 高調된 國民들의 民主化와 軍事政權 淸算 要求는 第5共和國 後身勢力인 民主正義黨 勢力에게 威脅이 되고 있었다.

民主自由黨의 創黨 [ 編輯 ]

民主自由黨 時節의 로고

이러한 狀況에서 TK 옛 5共 出身者들을 布陣한 民政黨 勢力인 노태우 政府 가 與小野大 政局을 打開하기 위하여 이른바 "保守大聯合"李 祕密裏에 推進하고자 했다. 비슷한 時期 PK 상도동系 人士들이 布陣한 統一民主黨 金永三 (金泳三), 忠淸圈 옛 민주공화당 人士들이 布陣한 新民主공화당 金鍾泌 (金鍾泌) 亦是 困境에 處해 있었다. 選擧에서 2位를 記錄한 김영삼의 統一민주당은 民主化에 對한 熱望에도 不拘하고, 院內 3黨으로 밀려나게 된다. 平素 노태우를 멀리하던 김영삼은 "萬若에 이대로 있다가는 大統領을 할 수 없다"라는 생각에 與黨의 地位를 얻고자 했고, 얼마 뒤 自身의 側近인 서석재가 無所屬 候補를 買收하는 事件이 일어나자 合黨을 決心하게 된다. 한便 新民主공화당 亦是 交涉團體 確保에 成功했음에도 不拘하고 黨 內에서 김종필에 對한 不滿이 쏟아져 나온것은 勿論이요, 金鍾泌 自身조차도 政權을 잡기 위해 合黨을 決心한다.

그러나 여기서 問題가 發生한다. 民主 勢力이었던 김영삼이 合黨을 한다고 하자 統一민주당은 分裂을 일으키게 된다. 特히 當時 '聽聞會 스타'라고 불린 盧武鉉 은 김영삼에게 協調的이었으나, 合黨을 한다고 하자 김영삼에게 强하게 反撥하며 訣別을 宣言한다. 以後 이기택 , 金正吉 , 장석화 , 金相賢 , 朴燦鍾 , 홍사덕 , 이철 , 盧武鉉 等 8人이 3黨 合黨을 拒否하며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民主黨 (一名 꼬마민주당)을 結成하였다.

이로써 民主 陣營의 主要 人物인 金永三 , 金大中 (金大中)候補 單一化論이 挫折되었다. 1990年 1月 21日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한 자리에 모여 合黨에 合意하였고, [9] 이튿날 3黨 體制(勿論 이는 全黨 大會 前까지 行해졌다 [10] )를 바탕으로 하는 民主自由黨이 誕生하였다. [10]

强壓的 統治 [ 編輯 ]

그러나 新生 民主自由黨은 改憲線을 훨씬 超過한 218席을 차지하는 等 絶對 權力을 쥐게 되었으며, 날치기 通過 强行, 言論 强制 廢刊, 反對派 抑壓, 社會運動 彈壓 等의 獨裁政治를 펼치게 된다. 이에 自然히 民主 人士들의 反撥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1992年 總選에서는 議席을 많이 잃어 밀려났었다(물론 이는 정주영이 統一國民黨을 創黨하는 過程에서 與野의 落薦者들을 迎入한 結果도 있다).

노태우의 脫黨 [ 編輯 ]

노태우는 後繼者로 박철언 을 內定하고 있었으나, 민주系의 金永三 의 反撥로 取消하였다. 以後 民主自由黨의 黨權을 놓고 金永三 과 葛藤이 있었고 後繼者로는 박철언 等을 內定하기도 했다. 이에 김영삼은 그에게 抗議하며 集團脫黨과 反政府 鬪爭까지도 考慮하였다. 結局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大權과 黨權을 넘긴뒤, 1992年 8月 28日 노태우는 民自黨 總裁職을 辭退하였다. 같은 날 金永三 이 民主自由黨의 總裁로 就任하면서 노태우는 民自黨 名譽總裁에 選出되었으나, 9月 18日 政治的 中立性을 지켜야 된다는 理由로 모든 當直을 내놓고 민자당 脫黨 宣言을 하였다. [11]

1992年 10月 5日 노태우는 民主自由黨을 脫黨하고 擧國中立內閣 構成을 宣言, [11] 이에 따라 10月 9日 史上 첫 與黨이 없는 中立內閣이 出帆하였다. [12] 그러나 다른 한便으로는 大選 直前에 大統領이 脫黨하는 先例를 만들기도 했다.

再執權 [ 編輯 ]

1995年에 實施된 第1回 地方選擧를 맞아 使用된 民主自由黨 로고

1992年 12月 18日에 치러진 14代 大統領 選擧에서 김영삼이 當選되어, 政權을 延長하는 데 成功한다. 代身에 5·16 軍士政變 以後 첫 民間 政府를 出帆시켰다는 意義가 있다.

김영삼은 金融實名制 를 實施하여 政經癒着을 解消하고자 했다. 또한 過去事 淸算을 通해서 朝鮮總督府 를 撤去하는 等의 政策을 펼쳤다.

그러나 內部的으로는 또다시 分裂을 일으키고 만다. 공화系와 민주系 間의 葛藤이 심해지자, 마침내 김종필을 軸으로 하는 공화系가 脫黨하였다. 이로 因해 1995年 6月 27日 에 實施된 第1回 地方選擧 에서 慘敗하였다. 그리고 當時 祕資金 問題 等으로 論難에 휩싸이던 盧泰愚 前 大統領이 搜査를 받게 되었고, 以後 光州虐殺 等의 嫌疑가 겹치면서 글을 비롯해 以後 全斗煥 等 여러 關聯者들이 收監되었다. 이 過程에서 민자당을 創黨하고 민자당의 軸이 되었던 民政 契는 危機를 맞이하게 된다. 特히나 總選擧를 1年 앞둔 狀態에서, 이 狀態로 갔다가는 總選에서 큰 敗北를 當할 것이라는 것을 豫測했다. 當時 大統領 김영삼은 黨을 改編하고자 한다.

신한국당으로의 變更 [ 編輯 ]

1995年 12月 6日 , 金永三 (金泳三)은 1996年 4月에 치러지는 總選을 앞두고 第5共和國 의 痕跡이 强한 民主自由黨이라는 黨名을 버리고 신한국당을 創黨하였다. 신한국당은 民主自由黨에서 民主正義黨 (民主正義黨)系· 新民主공화당 (新民主共和黨)系 等의 勢力을 몰아내었고, 李會昌 · 朴燦鍾 · 李在五 · 金文洙 · 李佑宰 · 洪準杓 · 맹형규 · 義意和 等을 迎入하였다. 金永三 政府 下에서 國務總理를 지낸 이회창은 國務總理 時節에 김영삼에 抗命한 戰績이 있는 人物이었고, 李在五·김문수·이우재 等은 민중당 (民衆黨)指導部 出身이었다. 이회창, 朴燦鍾, 李在五, 李佑宰, 洪準杓, 맹형규, 義意和 等은 各界의 스타級 人士들이었다. 신한국당은 이들 外에도 新人 人士들을 大擧 내세워 42%의 現役 交替率을 記錄하면서 大大的인 물갈이를 斷行했다. 以後 김영삼의 黨 掌握力은 强化됐다. [13] [14]

總選 敗北와 政治 工作 [ 編輯 ]

理念과 政派를 뛰어넘는 새로운 피 輸血을 통해 黨(黨)의 面貌를 一新하면서 신한국당은 1996年 4月에 치러진 第15代 總選 (第15代總選)에서 第1黨이 되었고 大韓民國 政黨 歷史上 처음으로 서울에서 與黨이 野黨을 제치고 過半數 議席을 차지하였다. 이 總選에서 신한국당은 第1黨이 되었지만 過半數에 못 미치는 139席을 차지했다. 이로써 김영삼의 國政 運營에 발목이 잡혔다.

그러자 김영삼은 無所屬 統合민주당 所屬 國會議員을 迎入하면서 國會 過半數 議席을 確保하는 데 成功하고 金永三 은 安定的인 國政 運營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5] [16] 하지만 이 때부터 신한국당의 支持率이 墜落하기 始作했다. 김영삼의 이러한 行爲는 選擧結果를 뒤엎는 政治 工作에 지나지 않았으며 故로 國民들이 願하던 것이 아니었다. 結局 國民들의 批判的 輿論이 거세지기 始作했고, 當時 大選을 1年 앞둔 狀況에서 次期 大統領 候補를 놓고 問題를 빚기 始作했다.

1997年 大統領 選擧 [ 編輯 ]

1997年 4月 6日 , 全斗煥 · 盧泰愚 의 四面에 " 李會昌 신한국당 代表가 國民 大和合이 必要하다는 側面에서 全斗煥 · 盧泰愚 의 四面에 對해 贊成立場을 밝힐 豫定"이라는 報道가 나오고 김윤환 신한국당 顧問도 " 金永三 大統領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赦免을 建議하였다"는 報道가 나옴으로써 執權黨인 신한국당 內部에서는 全斗煥 · 盧泰愚 의 刑 執行이 確定되기도 前에 전두환 노태우의 赦免論議가 오가기 始作했다. [17] [18]

1997年 4月 17日 全斗煥·노태우에 對한 刑 執行이 確定되자 執權黨인 신한국당 內部에서 本格的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四面에 對해 論議되기 始作했다. 當時 신한국당의 김윤환 顧問과 大邱慶北쪽 人士들을 비롯한 舊 與圈 出身 大選走者들은 從前부터 赦免에 贊成하는 쪽에 섰다. 김윤환 顧問은 "不正蓄財 한 거 還收하고, 여러 가지 한다면은 罪는 주지만은 罰은 안 주었으면 하는 그런 心情이다."라는 發言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處罰에 봐주기식 寬容을 베풀어야 한다는 發言으로 黨內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赦免 福券에 對해 贊成하는 方向으로 黨內 雰圍氣를 主導해나갔다. [19] 7月 22日에는 法務部가 전두환 노태우의 四面에 對해 實務檢討를 마쳤고 光復節 무렵에 赦免될수 있다는 뉴스까지 나오며 전두환 노태우의 四面에 對해 "언제든지 赦免시킬 수 있다"고 "準備되었다"는 法務部의 立場을 報道했는데, 結局 전두환 노태우의 赦免은 언제든지 大統領과 政府의 命令만 있으면 大選 以前에 準備가 完了되었던 셈이다. 法務部는 大統領 特別 赦免의 境遇 法的으로 論難의 素地가 있는 追徵金 問題를 集中 檢討했다. 노태우 氏의 境遇는 追徵金에 該當하는 財産을 大部分 保全 處分해 相關이 없지마는, 전두환 氏는 追徵金 2,295億원의 10% 程度만 確保되어 있고 全斗煥의 境遇 財産 追跡에 進展이 없어, 나머지 2千億 원에 對해서는 執行 不能 決定을 내리고 이를 赦免에 包含시킬 수 있는 것으로 結論을 내렸다. 法務部는 四面에 對한 肯定的인 輿論이 아직 成熟되지 않았다는 判斷에 따라 收監者의 健康이 나쁘거나 其他 重大한 事由가 있을 때 適用하는 刑執行 停止도 檢討했다. 그러나 兄 執行 停止는 名分이 弱하고 언제든지 再收監 될 수 있어 前, 盧氏 두 사람이 拒否할 可能性이 큰 것으로 法務部는 보고 있다. 假釋放은 刑期의 1/3分을 마쳤을 때만 可能해 當初不터檢討 對象에서 除外되었다. 結局 全,노 氏를 풀어주는 길은 特別 赦免밖에 없지만 全的으로 大統領의 意中에 달려 있는 問題이기 때문에 法務部는 매우 조심스런 立場을 取하고 있다"고 報道함으로써 이미 전두환 노태우에 對한 赦免 準備는 大選以前에 完了되었고 김영삼과 政府의 말 한마디면 곧바로 赦免될 수 있었던 形局이었다. [20]

이런 執權黨에서의 赦免 論議에 對해 1997年 8月 31日 , 97年 大選을 앞두고 當時 金大中 새정치국민회의 大統領 候補는 懇談會에서 " 金永三 大統領 任期中에 全斗煥 盧泰愚 를 赦免하여 東西和合의 길이 열리도록 하겠다"는 意見을 밝혔다. 그는 이어 "그들(전두환 노태우)李 잘못을 反省하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對應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21] [22] [23] 그리고 다음날인 9月 1日 SBS 大統領 候補와 함께라는 프로그램에서 김대중 總裁는 전두환 노태우에 對한 容恕論을 强調했다. [24] 이렇게 김대중 候補가 全斗煥 · 盧泰愚 赦免을 내세우자 京鄕新聞 은 "和解의 政治人'浮刻 嶺南 끌어 안기6共(공)세력들도 包容 色깔論 遮斷 效果까지 ‘容恕’光州輿論度 한몫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金大中))總裁가 政治權의「뜨거운 감자"라는 內容의 記事를 실었다. [25] 그리고 10月 23日 ,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副總裁는 國會 本會議 演說에서 " 金永三 大統領이 全斗煥 · 盧泰愚 를 赦免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金大中 候補가 當選되면 大大的인 赦免이 斷行될 것"이라고 밝혔다. [26] [27] 이날 金大中 候補를 代身해 代表 演說에 나선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副總裁는 集權 政治 報復을 絶對 하지 않겠다는 金大中 候補의 約束을 거듭 强調하고 아무런 前提 條件을 달지 않은 채 全斗煥·노태우 前 大統領에 對한 赦免을 促求했다. [28] 그에 對應하여 9月 1日 신한국당 大選候補인 李會昌 은 保守勢力의 聯合과 國民的인 支持를 얻고 金大中 候補의 전두환 노태우 赦免論을 無力化시키기 위해 김영삼 大統領에게 전두환 노태우 두 前職 大統領을 秋夕 前에 赦免해 줘야 된다고 要求한다. [29] [30] [31] 當時 김영삼 大統領은 이회창의 전두환 노태우 두 前職大統領 早期釋放에 對해 "國民的인 共感帶가 形成돼야 된다"며 이회창의 要求를 들어주지 않았다. [32] 當時 政治權이 競爭的으로 앞다투어 全斗煥·盧泰愚 赦免을 公約으로 내세우자 社會 各界에서도 慨歎의 雰圍氣가 쏱아졌다. [33] 當時 金永三 大統領은 9月 12日, 當初 全斗煥 四面에 對해 "國民的인 共感帶가 形成돼야 한다"며 이회창의 要求를 들어주지 않았으나 다시 말을 바꿔 大選 前에 赦免을 할 것이라며 立場을 旋回한다. [34] 이렇게 이회창이 全斗煥 赦免을 公約으로 내세우자 監獄에 있는 全斗煥 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政治的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 和答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35] [36] 그에 對해 이회창 候補도 全斗煥의 和答에 "苦生 많으시다. 秋夕때 나오시기를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全斗煥側에게 和答한 것으로 밝혀졌다. [37] 當時 한겨레 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代表가 "秋夕前 全斗煥 盧泰愚 두분의 釋放을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全斗煥 側近들에게 和答하였다고 報道했다. [38] 그리고 이회창은 9月 24日, cbs와 經實聯과의 懇談會에서 전두환 노태우 四面에 對해 "前職 大統領이 拘禁狀態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大統合 次元에서 釋放해 正常的인 生活을 營爲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전두환 노태우 赦免論에 積極的으로 贊成한다. [39] 이는 곧 競爭者인 金大中 의 전두환 노태우 赦免論을 無力化하기 위한 것이었다. 李會昌 金大中 이 전두환 노태우의 赦免 復權 公約을 내세운 것에 對해 李仁濟 도 競爭的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 復權한다는 公約을 내세웠다 [40] [41] [42] 結局 이렇게 1997年 大選에서 李會昌 金大中 李仁濟 3候補 모두가 全斗煥 盧泰愚 의 사면 復權을 競爭的으로 大選 公約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1997年 7月 21日 신한국당은 全黨大會를 열고 李會昌 을 大統領 候補로 選出하였다. [43] 1次 投票 當時 候補들間의 分裂이 甚했고, 大槪 10~20%로 落選하였다. 反面에 이회창은 1次 投票에서 1位를 記錄하였고, 2次 投票에서도 1位를 記錄하여 最終 候補로 選出되었다.

그러나 그 當時 惡化된 國內 經濟狀況과 洶洶한 民心, 기아자동차 不渡事態 等으로 신한국당의 支持度는 最惡으로 치닫고 與黨인 이회창의 支持率도 競爭者인 金大中 에게 크게 뒤지게 된다. [44] [45] 게다가 李仁濟 가 競選 敗北를 承服하지 못하고 讀者出馬를 强行하면서 [46] 신한국당은 어려운 局面을 打開할 選擧 戰略의 一環으로 金大中 候補의 670億 祕資金 事件을 暴露한다. [47] 신한국당 강삼재 事務總長은 "김대중 候補가 信仰告白을 하면서까지 노태우氏로부터 20億원 以外에는 받은 돈은 없다며 國民을 欺瞞했으나 이 모든것이 거짓임이 드러났다"며 金大中 候補를 攻擊했다. [48] 野黨인 국민회의 內部에서도 "김대중 候補가 信仰 干證까지 하면서 20億원 以上은 받은 事實이 없다고 했고, 20億원 以上 받은 事實이 없다고 斷言했기 때문에 光州 現地輿論度 撫摩시킬 수 있었다. 事實로 드러나면 큰일이다"라며 衝擊에 휩싸였고 [49] 다음날인 신한국당은 이것이 20+α 物證이고, 김대중 總裁가 20億 +α外 6億3千萬 원은 받은 적 없다며 우겨대자 [50] 신한국당은 20億+A의 入出金 計座와 手票의 一連番號를 公開했다. [51] 다음 날에는 김대중候補가 野黨總裁職을 利用해 134億 7千萬원을 챙긴 事實까지 暴露하여 政局은 큰 混亂에 빠진다. [52] 金大中 祕資金 攻防은 10月 14日 김대중 親姻戚 名義의 378億 祕資金 暴露로 極限 對峙로 치달았다. [53] [54] 10月 17日에는 신한국당이 金大中 을 租稅逋脫 및 賂物收受 嫌疑로 檢察에 告發함으로써 最惡의 狀況으로 치닫게 된다. [55] 當時 김대중 祕資金 暴露의 최先鋒將이었던 강삼재 議員은, "김대중이 大統領 當選되더라도 大統領 資格 없고 當選 되더라도 걸어내려와야 될 것" 이라며 攻擊했고 김대중 支持者들은 강삼재 氏 집에 24時間 넘게 殺害脅迫까지 하며 신한국당社를 폭파시키겠다는 脅迫電話까지 걸려왔다. [56] [57] 10月 17日에 열린 韓國日報 招請 討論會에서는 金大中 候補와 李會昌 候補의 祕資金 工房이 오고갔다. 이회창은 "野黨總裁(金大中)한테 뭐하러 企業들이 뼈빠지게 돈을 갖다주겠습니까?, 아무 條件 없고 받을 特惠가 없다면 뭐하러 돈을 갖다주겠습니까"라고 非難했는데 金大中 은 "條件있는 돈은 받은 일이 없고 받은 돈은 모두 公的으로 썼고 隱匿한 財産 없다"며 祕資金 疑惑을 全面 否認한다. [58] 李仁濟 候補는 " 金大中 氏가 當選되더라도 道德的인 힘이 나올수 있겠습니까"라며 김대중 候補를 非難했다. 結局 10月 20日, 金大中 候補의 祕資金 搜査가 始作되었으나 [59] 다음날이던 10月 21日, 檢察은 김대중의 祕資金 搜査를 大選 以後로 留保한다고 發表한다. [60]

當時 김대중의 祕資金 搜査를 留保한 背景에는 惡化된 經濟狀況 및 洶洶한 民心과 企業體들의 不渡事態等等 檢察 內部에서 祕資金 搜査를 開始한다면 湖南을 中心으로 한 國民的인 抵抗이 發生할 可能性이 높고 第2의 光州事態를 憂慮하여 搜査를 中止시켰던 것으로 밝혀졌다. [61] 또 當時 檢察總長인 김태정 檢察總長의 故鄕이 湖南出身인 것도 搜査를 中止시킨 變數가 됐다. [62] 檢察이 김대중 祕資金 搜査를 中止하자 이회창은 檢察의 再搜査를 要求했고, 김영삼 大統領의 잘못이 크다며 김영삼의 脫黨을 要求했다. [63] 結局 김영삼 大統領은 11月 7日, 政治權 虛僞事實 流布에 嚴히 對處한다며 談話文을 發表하고 신한국당을 脫黨한다. [64] 少數 野黨이던 민주당과의 合黨 및 候補 單一化를 推進한 끝에 마침내 11月 13日 總裁 趙淳, 大統領 候補 이회창이라는 合意를 導出해내 11月 21日 兩黨 合當合同會議를 통해 새로 出帆한 한나라당의 名譽總裁 및 第15代 大統領 選擧 候補로 推戴되었다. [65]

金永三 政府의 危機와 解體 [ 編輯 ]

金永三 政府 末期인 1997年 에 들어 김영삼의 親·姻戚 非理, 企業들의 倒産, 外換 危機 等을 겪으면서 김영삼의 支持率이 下落하였다. [66] 아들의 兵役 非理 疑惑 等으로 危機에 몰려있던 신한국당 大選 候補 이회창은 김영삼의 李仁濟 支援說 및 金大中 의 祕資金 疑惑에 對한 檢察의 搜査 留保 決定 等에 反撥하며 김영삼에게 脫黨을 要求했다. 이인제는 15代 大選 을 앞두고 치러진 신한국당 大統領 候補 競選에서 이회창에게 敗하자, 신한국당을 脫黨해 1997年 10月 10日 국민신당 을 創黨한 人物이었고, 김대중(金大中)은 새정치국민회의 大選 候補였다. [67]

15代 大選을 不過 한 달餘 앞둔 1997年 11月 7日 , 신한국당 總裁 이회창과 民主黨 總裁 趙淳 (趙淳)은 '3金 時代 淸算', 'DJP聯合'의 不當性 等을 主張하며 黨 對 黨 統合과 大統領 候補 單一化에 合意하였다. [68] 같은 날 김영삼은 신한국당을 脫黨했다. 1997年 11月 21日 , 신한국당과 民主黨 은 統合하면서 黨名을 한나라黨 으로 定했고, 이에 한나라당이 創黨하였고 신한국당은 解散하였다. [69] [70] [71] 1997年 12月 3日 , 金永三 政府는 IMF 救濟金融에 借入을 하는 條件으로 經濟主權을 IMF에 넘겼고 IMF 救濟 金融 諒解覺書를 締結하여 IMF體制의 公式化를 宣言하여 國家 經濟不渡火를 宣言했다. 이제 韓國의 經濟는 IMF의 命令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72] 이회창은 이런 惡材 속에서 김영삼의 脫黨要求 및 線긋기·조순과의 單一化·한나라당 創黨 等을 貫徹시켰지만 1997年 12月 18日 에 치러진 大選에서 金大中 에게 밀려 落選했고, 이에 따라 政權이 交替되면서 한나라당이 野黨으로 轉落한 것을 始作으로 保守 政治 勢力은 10年 동안 野圈에 있어야 했다. [73]

評價 [ 編輯 ]

6.25 戰爭에 對한 滿洲 爆擊 發言 [ 編輯 ]

1996年 6月 24日 前方部隊를 視察한 자리에서 김영삼 大統領은 北韓은 世界의 모든 나라에 도움을 要請하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도울 수 있는 나라는 同族인 우리뿐이라는 事實을 모르고 있다고 指摘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6.25 當時에 滿洲를 爆擊했으면 統一을 이룰 수 있었다"고 發言하여 與野間 極限 言爭이 오갔다. 當時 국민회의 鄭東泳 代辯人은 "國家利益을 顯著하게 해칠 憂慮가 있는 發言을 한 것은 大統領의 職務와 關聯해 彈劾訴追度 可能한 發言이라고 본다"는 論評을 냈고 執權黨인 신한국당의 金 철 代辯人은 "어느 쪽의 安保를 지키려는 政黨인지 疑心이 들 程度라는 點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회의는 北韓에 對해 그렇게 未安하고 조심스러운지 묻고 싶다"는 論評을 論評을 냈다. [74] 當時 攻防의 發端은 김영삼 大統領의 지난 24日 中部戰線 視察 當時 發言으로 김영삼大統領은 深刻한 北韓 狀況과 韓國戰爭의 慘狀을 回顧하고 當時 맥아더 將軍이 主張했던 滿洲爆擊이 可能했더라면 이미 統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면서 徹底한 安保態勢를 當付했다. 그러자 국민회의側은 어제와 오늘 잇따라 非難攻勢에 나섰고 신한국당側度 敏感하게 反應했다. 兩쪽 攻防은 김영삼 大統領의 發言이 果然 우리 國民의 安保意識에 어떤 影響을 줄 것인지에 焦點이 맞춰줬다. 국민회의 정동영代辯人은 滿洲北爆 支持發言은 國家安保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重大한 發言이라고 規定을 했다. 그러자 신한국당 김철 代辯人은 前方部隊를 訪問한 자리에서 過去의 統一의 機會를 아쉬워하면서 젊은세대들에게 安保의 重要性을 强調하는 意味에서 이같은 回想을 한 것은 매우 自然스럽게 어떻게 보면 當然하다는 論評으로 김영삼 大統領을 庇護했다. 또 이番 發言이 只今은 友好國(?)李 되었다는 된 中國과의 關係에 어떤 影響을 미칠 것인지도 論難이 됐다. 정동영代辯人은 韓中 友好에 惡影響을 招來하고 間接的으로 外換을 불러올 수도 있는 重大한 發言이라는 것이라고 論評했고 신한국당의 金철 代辯人은 半世紀前의 戰爭 狀況을 基準한 大統領의 發言이 어떻게 해서 現在의 韓中 韓러 關係에 影響을 준다는 얘기인지 理解할 수 없다는 論評을 냈다. 새정치국민회의 는 김영삼 大統領이 全國民한테 이 發言을 解明해야 한다고 促求했고 신한국당은 當時 共産黨을 除外한 大多數 國民이 맥아더의 主張을 支持했으며 只今도 大多數 國民들이 그대로 했다면 統一이 됐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國民회의가 6.25에 對한 基本的 理解도 缺如돼있을 뿐 아니라 어느쪽 安保를 지키려는 政黨인지 疑心이 들 程度라고 反駁했다. [75] [76] [77]

1997年 大選 當時 신한국당의 全斗煥 四面에 對한 論難 [ 編輯 ]

1997年 4月 6日 , 全斗煥 盧泰愚 의 四面에 " 李會昌 신한국당 總裁가 國民 大和合이 必要하다는 側面에서 全斗煥 盧泰愚 의 四面에 對해 贊成立場을 밝힐 豫定"이라는 報道가 나오고 김윤환 신한국당 顧問도 " 金永三 大統領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赦免을 建議하였다"는 報道가 나옴으로써 執權黨인 신한국당 의 內部에서는 全斗煥 盧泰愚 의 刑 執行이 確定되기도 前에 전두환 노태우의 赦免論議가 오가기 始作했다. [78] [79] 1997年 4月 17日 전두환 노태우에 對한 刑 執行이 確定되자 執權黨인 신한국당 의 內部에서 本格的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四面에 對해 論議되기 始作했다. 當時 신한국당 김윤환 顧問과 大邱慶北쪽 人士들을 비롯한 舊 與圈 出身 大選走者들은 從前부터 赦免에 贊成하는 쪽에 섰다. 김윤환 顧問은 "不正蓄財 한 거 還收하고, 여러 가지 한다면은 罪는 주지만은 罰은 안 주었으면 하는 그런 心情이다."라는 發言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處罰에 봐주기식 寬容을 베풀어야 한다는 發言으로 黨內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赦免 福券에 對해 贊成하는 方向으로 黨內 雰圍氣를 主導해나갔다. [80] 7月 22日에는 法務部가 전두환 노태우의 四面에 對해 實務檢討를 마쳤고 光復節 무렵에 赦免될 수 있다는 뉴스까지 나오며 전두환 노태우의 四面에 對해 "언제든지 赦免시킬 수 있다"고 "準備되었다"는 法務部의 立場을 報道했는데, 結局 전두환 노태우의 赦免은 언제든지 大統領과 政府의 命令만 있으면 大選 以前에 準備가 完了되었던 셈이다. 法務部는 大統領 特別 赦免의 境遇 法的으로 論難의 素地가 있는 追徵金 問題를 集中 檢討했다. 노태우 氏의 境遇는 追徵金에 該當하는 財産을 大部分 保全 處分해 相關이 없지마는, 전두환 氏는 追徵金 2,295億원의 10% 程度만 確保되어 있고 全斗煥의 境遇 財産 追跡에 進展이 없어, 나머지 2千億 원에 對해서는 執行 不能 決定을 내리고 이를 赦免에 包含시킬 수 있는 것으로 結論을 내렸다. 法務部는 四面에 對한 肯定的인 輿論이 아직 成熟되지 않았다는 判斷에 따라 收監者의 健康이 나쁘거나 其他 重大한 事由가 있을 때 適用하는 刑執行 停止도 檢討했다. 그러나 兄 執行 停止는 名分이 弱하고 언제든지 再收監 될 수 있어 前, 盧氏 두 사람이 拒否할 可能性이 큰 것으로 法務部는 보고 있다. 假釋放은 刑期의 1/3을 마쳤을 때만 可能해 當初부터 檢討 對象에서 除外되었다. 結局 全,노 氏를 풀어주는 길은 特別 赦免밖에 없지만 全的으로 大統領의 意中에 달려 있는 問題이기 때문에 法務部는 매우 조심스런 立場을 取하고 있다"고 報道함으로써 이미 전두환 노태우에 對한 赦免 準備는 大選以前에 完了되었고 김영삼과 政府의 말 한마디면 곧바로 赦免될 수 있었던 形局이었다. [81]

이런 執權黨에서의 赦免 論議에 對해 1997年 8月 31日 , 97年 大選을 앞두고 當時 金大中 새정치국민회의 大統領 候補는 懇談會에서 " 金永三 大統領 任期中에 全斗煥 盧泰愚 를 赦免하여 東西和合의 길이 열리도록 하겠다"는 意見을 밝혔다. 그는 이어 "그들(전두환 노태우)李 잘못을 反省하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對應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82] [83] [84] 그리고 다음날인 9月 1日 SBS 大統領 候補와 함께라는 프로그램에서 김대중 總裁는 전두환 노태우에 對한 容恕論을 强調했다. [85] 이렇게 김대중候補가 全斗煥 盧泰愚 赦免을 내세우자 京鄕新聞 은 "和解의 政治人'浮刻 嶺南 끌어 안기6共(공)세력들도 包容 色깔論 遮斷 效果까지 ‘容恕’光州輿論度 한몫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金大中))總裁가 政治權의「뜨거운 감자"라는 內容의 記事를 실었다. [86] 그리고 10月 23日 ,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副總裁는 國會 本會議 演說에서 " 金永三 大統領이 全斗煥 盧泰愚 를 赦免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金大中 候補가 當選되면 大大的인 赦免이 斷行될 것"이라고 밝혔다. [87] [88] 이날 金大中 候補를 代身해 代表 演說에 나선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副總裁는 集權 政治 報復을 絶對 하지 않겠다는 金大中 候補의 約束을 거듭 强調하고 아무런 前提 條件을 달지 않은 채 全斗煥·노태우 前 大統領에 對한 赦免을 促求했다. [89] 그에 對應하여 9月 1日 신한국당 의 大選候補인 李會昌 은 保守勢力의 聯合과 國民的인 支持를 얻고 金大中 候補의 전두환 노태우 赦免論을 無力化시키기 위해 김영삼大統領에게 전두환 노태우 두 前職 大統領을 秋夕 前에 赦免해 줘야 된다고 要求한다. [90] [91] [92] 當時 김영삼 大統領은 이회창의 전두환 노태우 두 前職大統領 早期釋放에 對해 "國民的인 共感帶가 形成돼야 된다"며 이회창의 要求를 들어주지 않았다. [93] 當時 政治權이 競爭的으로 앞다투어 전두환 노태우 赦免을 公約으로 내세우자 社會 各界에서도 慨歎의 雰圍氣가 쏱아졌다. [94] 當時 金永三 大統領은 9月 12日, 當初 全斗煥 四面에 對해 "國民的인 共感帶가 形成돼야 한다"며 이회창의 要求를 들어주지 않았으나 다시 말을 바꿔 大選 前에 赦免을 할 것이라며 立場을 旋回한다. [95] 이렇게 이회창이 全斗煥 赦免을 公約으로 내세우자 監獄에 있는 全斗煥 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政治的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 和答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96] [97] 그에 對해 이회창 候補도 全斗煥의 和答에 "苦生 많으시다. 秋夕때 나오시기를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全斗煥側에게 和答한 것으로 밝혀졌다. [98] 當時 한겨레 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代表가 "秋夕前 全斗煥 盧泰愚 두분의 釋放을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全斗煥 側近들에게 和答하였다고 報道했다. [99] 그리고 이회창은 9月 24日, cbs와 經實聯과의 懇談會에서 전두환 노태우 四面에 對해 "前職 大統領이 拘禁狀態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大統合 次元에서 釋放해 正常的인 生活을 營爲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전두환 노태우 赦免論에 積極的으로 贊成한다. [100] 이는 곧 競爭者인 金大中 의 전두환 노태우 赦免論을 無力化하기 위한 것이었다. 李會昌 金大中 이 전두환 노태우의 赦免 復權 公約을 내세운 것에 對해 李仁濟 도 競爭的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 復權한다는 公約을 내세웠다 [101] [102] [103] 結局 이렇게 1997年 大選에서 李會昌 金大中 李仁濟 3候補 모두가 全斗煥 盧泰愚 의 사면 復權을 競爭的으로 大選 公約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大選 以後 落選한 李會昌 候補 側近도 "李會昌쪽에서도 秋夕前 早期赦免을 要求한 만큼 金大中 當選者도 赦免을 主張했으니 黨年限措置"라고 評했고 落選한 李仁濟 候補쪽에서도 全斗煥 盧泰愚 四面에 對해 "이제는 國民大和合의 契機가 되어야 하고 매우 잘된 일"이라고 評價했다. [104] 12月 21日 , 金大中 當選者가 金永三 大統領과 協議에 依해 全斗煥 盧泰愚 를 赦免한 것에 對해 外國 言論들은 勇氣있는 決定이라며 評價했다. 當時 赦免에 對해 1997年 12月 22日 東亞日報 에서도 " 全斗煥 盧泰愚 의 赦免은 有力 大統領候補들이 모두 大和合을 名分으로 赦免을 公約으로 내세움으로써 大選 後 赦免은 旣定事實化되어 있었다"라고 報道했다. [105]

노태우, 김영삼 葛藤 [ 編輯 ]

민자당 大選候補였던 金永三 候補가 노태우大統領의 査頓인 SK그룹에 對한 移動通信事業 許可 問題, 한준수 當時 연기郡守가 暴露한 '官權選擧 疑惑事件'에 對한 中立 選擧管理內閣 構成을 위한 部分 改閣 要求로 노태우大統領과 衝突했고, 1992年 9月 18日 盧泰愚 大統領이 民自黨 을 脫黨했다.

地域感情 助長 論難 [ 編輯 ]

3黨合黨 으로 비춰진 '嶺南霸權主義 論難'이나 草原福집事件 과 公薦, 遊說等을 통해 地域感情 을 助長한다는 批判을 받았다. [106]

1996年 3月에 신한국당 選對委員長이었던 朴燦鍾은 統營 遊說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두 前職大統領을 處罰하지 않았다면 全羅道 데모대들이 國家를 危機로 빠트렸을 것"이라는 地域感情 助長 發言으로 큰 非難을 받았다. [107] [108] 波紋이 일자 朴燦鍾은 " 金永三 大統領이 全斗煥 , 盧泰愚 두 前 大統領을 봐줬다면 全羅道 데모대들과 정의로운 學生, 젊은이들이 全斗煥 盧泰愚 를 拘束하라며 示威를 벌여 不幸한 일이 생겼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전두환, 노태우 政權의 最大 被害者가 全羅道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表現이었을 뿐"이라고 解明했으나, [109] 그 當時 박찬종의 이 發言은 政治權에서 地域感情을 助長한 常識 以下의 發言으로 非難을 받았다. [110] 또한 1997年 大選 當時 選擧 遊說中에는 "김대중 候補는 74歲로 나이가 많아 大統領이 되면 危險하다."는 式의 發言으로 水位를 넘는 誹謗을 일삼았다. [111]

공화系 脫黨 [ 編輯 ]

內閣制 改憲 約束 違反과 地域感情 論難等으로 系派葛藤이 빚어져 金鍾泌 을 비롯한 공화系人士들이 脫黨하고 自由民主聯合 을 創黨하였다.

選擧結果에 對한 政治工作 [ 編輯 ]

신한국당은 大大的인 黨 改編에도 不拘하고 與小野大라는 狀況에 處하게 된다. 이에 政治工作을 펼쳐 野圈 議員들을 大規模로 迎入했는데, 이 때문에 國民들의 輿論이 크게 惡化되었다.

勞動法 날치기 事件 [ 編輯 ]

1996年 12月 26日에 일어난 勞動法 날치기 事件은 신한국당의 反民主性을 보여준다. 當時 신한국당 國會議員들 [112] 154名이 潛入했는데 國會議長이 없었다. 그러자 國會副議長 오세응이 開會를 宣言하고, 法案 11個를 짧은 時間 안에 날치기로 통과시킨다. [113] 그러자 代表 野黨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와 自由民主聯合의 議員 全員이 抗議籠城에 들어갔고, 검은 넥타이를 맨 뒤 與黨 議員들의 名牌에 검은 천을 씌웠다. [114] 무엇보다도 이 事件은 整理解雇를 法制化한 것이었으며, 事件 以後 勞動界는 全面 總罷業에 突入했다. [112] 結局 國民들의 輿論이 크게 惡化되었고, 이는 1年 뒤에 치러진 大統領 選擧에서 敗北하는 한 原因이 되었다.

歷代 指導部 [ 編輯 ]

總裁 [ 編輯 ]

民主自由黨 [ 編輯 ]

臺數 歷代 總裁 任期
1 盧泰愚 1990年 5月 9日 ~ 1992年 5月 18日
2 盧泰愚 1992年 5月 19日 ~ 1992年 8月 27日
3 金永三 1992年 8月 28日 ~ 1995年 2月 6日
4 金永三 1995年 2月 7日 ~ 1995年 12月 6日

신한국당 [ 編輯 ]

臺數 歷代 總裁 任期
1 金永三 1995年 12月 6日 ~ 1997年 9月 29日
2 李會昌 1997年 9月 30日 ~ 1997年 11月 21日

代表最高委員 [ 編輯 ]

民主自由黨 [ 編輯 ]

臺數 歷代 代表 任期
1 金永三 1990年 5月 9日 ~ 1992年 8月 27日
2 金鍾泌 1992年 8月 28日 ~ 1995年 1月 20日
3 이춘구 1995年 2月 7日 ~ 1995年 8月 20日
4 김윤환 1995年 8月 21日 ~ 1995年 12月 6日

신한국당 [ 編輯 ]

臺數 歷代 代表 職銜 任期
1 김윤환 代表委員 1995年 12月 6日 ~ 1996年 5月 6日
2 李洪九 代表委員 1996年 5月 7日 ~ 1997年 3月 12日
3 李會昌 代表委員 1997年 3月 13日 ~ 1997年 6月 30日
(臨時) 이만섭 代表權限代行 1997年 7月 1日 ~ 1997年 7月 20日
4 李會昌 代表委員 1997年 7月 21日 ~ 1997年 9月 29日
5 李漢東 代表委員 1997年 9月 30日 ~ 1997年 11月 21日

主要 選擧 結果 [ 編輯 ]

大統領 選擧 [ 編輯 ]

鳶島 選擧 候補者 得票 得票率 結果 當落
1992年 14代 金永三 9,977,332票
41.96%
1位

國會議員 選擧 [ 編輯 ]

鳶島 選擧 地域區 比例代表 庭園
當選 當選比率 當選 得票率 當選 當選比率
1992年 14代 116 / 237
48.95%
33 / 62
38.5%
149 / 299
49.83%
1996年 15代 121 / 253
47.83%
18 / 46
34.5%
139 / 299
46.49%

地方選擧 [ 編輯 ]

鳶島 選擧 廣域團體長 基礎團體長 廣域議員 基礎議員
當選 當選比率 當選 當選比率 當選 當選比率 當選 當選比率
1991年 - 564 / 866
65.13%
1995年 1回 5 / 15
33.33%
70 / 230
30.43%
333 / 970
34.33%

歷代 全黨大會 [ 編輯 ]

民主自由黨 [ 編輯 ]

民主自由黨 第1次 全黨大會 [ 編輯 ]

1990年 5月 9日 , 創黨 後 처음 열린 민자당 全黨大會는 最高委員會議를 中心으로 하는 單一性 集團指導體制 黨憲을 採擇하고 內閣制 推進 意思를 包含하는 綱領을 採擇한 뒤, 金永三 統一民主黨 總裁, 金鍾泌 新民主공화당 總裁, 박태준 民主正義黨 代表를 最高委員으로 互薦했다. 總裁에는 김영삼 最高委員의 提請에 따라 盧泰愚 大統領을 推戴했고, 노태우 總裁는 김영삼 最高委員을 代表最高委員으로 指名했다.

民主自由黨 第2次 全黨大會 [ 編輯 ]

1992年 8月 28日 民主自由黨 常務委員會 [ 編輯 ]

1992年 8月 28日, 민자당 常務委는 辭退한 노태우 總裁를 名譽 總裁로 推戴하고, 김영삼 代表를 總裁로 選出했다. 김영삼 總裁는 김종필 最高委員을 代表로 指名했다.

1993年 4月 9日 民主自由黨 常務委員會 [ 編輯 ]

1993年 4月 9日, 민자당 常務委는 最高委員制를 廢止하고 代表委員制를 新設하는 單一指導體制 黨憲改正案을 議決했다.

民主自由黨 第3次 全黨大會 [ 編輯 ]

1995年 2月 7日 , 민자당 全黨大會는 김영삼 大統領을 總裁로 再選出했고, 김영삼 總裁는 김종필 代表의 辭退로 空席이 된 代表最高委員에 이춘구 國會副議長을 指名했다.

1995年 12月 6日 民主自由黨 黨務會議 [ 編輯 ]

1995年 12月 6日, 민자당 黨務會議는 黨名을 신한국당으로 變更할 것을 議決했다.

신한국당 [ 編輯 ]

신한국당 第1次 全黨大會 [ 編輯 ]

1996年 2月 6日 , 신한국당 全黨大會는 신한국당으로의 黨名 變更 等을 담은 黨憲과 一流國家建設 意志를 담은 政綱政策을 採擇했다.

신한국당 第2次 全黨大會 [ 編輯 ]

신한국당 第3次 全黨大會 [ 編輯 ]

1997年 9月 30日 , 신한국당 全黨大會는 이회창 候補를 總裁로 選出한 뒤 김영삼 大統領을 名譽總裁로 推戴했다. 以後 이회창 總裁는 集團指導體制로 改編된 黨憲에 따라 이한동 顧問을 새 代表最高委員으로 指名하고 全黨大會는 이를 認准하였다.

신한국당 第4次 全黨大會 [ 編輯 ]

1997年 11月 21日 , 신한국당 全黨大會는 民主黨 한나라黨 으로 合當할 것을 決意했다.

같이 보기 [ 編輯 ]

歷代 政黨 黨員 [ 編輯 ]

各州 [ 編輯 ]

  1. Kim, Byung-kook (2008), “Defeat in victory, victory in defeat: the Korean conservatives in democratic consolidation”, 《Political Transitions in Dominant Party Systems: Learning to lose》 (Routledge), 170쪽  
  2. 《韓國言論 100年史》, 韓國 言論인 聯合會 (Federation of Korean Reporter) (until 1987), 2006, 176쪽  
  3. 道廳 테이프 274個 發見 波紋 擴散
  4. 經濟政策 比較
  5. 11個月 前 그때를 記憶하시나요?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6. 《The Political Reference Almanac》 , PoliSci Books, 2001  
  7. Sun-Chul Kim (2004). Protracted Transition and Popular Contention: South Korean Democratization from a Comparative Perspective . "... in the creation of a right-wing United Liberal Democrats and the New Korea Party, ..."
  8. 中央選擧管理委員會 사이버選擧歷史觀 - 政黨社 年表
  9. MBC뉴스데스크 (1990年 1月 21日). “民政,民主,共和黨의 保守 新黨 創黨 輪廓[구본홍]” . 2013年 4月 15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0. MBC뉴스데스크 (1990年 1月 22日). “民政, 민주, 공화당 合當 통한 新黨 創黨 公示[金性洙]” . 2013年 12月 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4月 15日에 確認함 .  
  11. MBC뉴스데스크 (1992年 9月 18日). “노태우大統領, 민자당 脫黨 및 選擧管理 內閣 決定[김용철]” . 2015年 6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3月 18日에 確認함 .  
  12. MBC뉴스데스크 (1992年 10月 9日). “改編된 中立 內閣 出帆[김용철]” . 2015年 6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3月 18日에 確認함 .  
  13. 신영호. 保守의 再構成 始作되나:정태근發 與議員 줄脫黨 可能性..新黨 推進 彈力받을 듯 Archived 2013年 12月 3日 - 웨이백 머신 . 투데이코리아. 2011年 12月 13日.
  14. 고성국. 新東亞 創刊 80周年 特輯 ‘國民이 願하는 國會議員’ 輿論調査의 함의 . 新東亞. 2011年 9月 26日.
  15. 리멤버 1996年 公薦革命 . 東亞日報. 2011年 6月 17日.
  16. 김형준. 벼랑 끝에 선 한나라黨 Archived 2012年 1月 9日 - 웨이백 머신 . 女性新聞. 2011年 12月 9日.
  17. 이회창 신한국당 代表 전두환 노태우의 四面에 對해 立場 밝힐 豫定 1997.4.8 京鄕新聞
  18. 李(李)代表全(前)|盧(盧)氏 赦免建議 檢討 金潤煥(김윤환)顧問"大法 刑(兄)確定後 實施 이미 建議" 1997.4.6 東亞日報
  19. 全斗煥.노태우 前職 大統領 最終 判決後 赦免 問題 提起 1997.4.17 mbc뉴스
  20. 全斗煥.노태우 前 大統領 八一五 赦免 實務 檢討 1997.7.22 mbc뉴스
  21. 全(前)|盧(盧)氏 赦免決定金(金)大統領 任期內" 金大中(金大中)總裁 국민회의 1997.8 .31 東亞日報
  22. 全(前)·盧(盧)氏 現政權서 赦免해야” 김대중總裁 밝혀 1997.8.31 京鄕新聞
  23. 김대중 總裁,金大統領 任期內 前職大統領 赦免 要請 1997.8.31 mbc 뉴스
  24. 국민회의와 자민련, 두 前職 大統領 赦免 時機 異見 1997.9.1 mbc뉴스
  25. '和解의 政治人'浮刻 嶺南 끌어 안기6共(공)세력들도 包容 色깔論 遮斷 效果까지 ‘容恕’光州輿論度 한몫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金大中))總裁가 政治權의「뜨거운 감자 1997.9.1 京鄕新聞
  26. "全(前)·盧(盧)氏 赦免 바람직" 1997.10.23 京鄕新聞
  27. 執權하면 大赦免 斷行” 국민회의 國會 代表演說 박정수 국민회의 副總裁 1997.10.23 한겨레
  28. 국민회의, 全斗煥.노태우氏 赦免 促求 1997.10.23 mbc뉴스
  29. 신한국당 이회창, 전두환.노태우 두 前職 大統領 秋夕前 早期 釋放 建議 1997.9.1 mbc
  30. 김영삼 大統領.이회창 代表,두 前職 大統領 特別 赦免 波紋 關聯 深夜 緊急 會同 1997.9.2 mbc
  31. 前盧氏 秋夕 以後로 赦免 1997.9.1 京鄕新聞
  32. "全(前)·盧(盧) 秋夕前 赦免 不可(不可)" 1997.9.3 每日經濟
  33. 한가위'政治汚染' 1997.9.11 한겨레新聞
  34. 全(前)·盧(盧)氏 大選前(前) 赦免 檢討 1997.9.18 京鄕新聞
  35. 獄中 全氏 赦免建議 고맙다, 이회창 代表에 口頭 메세지 1997. 9.24 京鄕新聞
  36. 李(李)代表-全(前)氏 祕密메시지 오갔다 赦免波動後 辯護士 通해 1997. 9. 24 東亞日報
  37. 李(李)代表-全(前)氏 祕密메시지 오갔다 赦免波動後 辯護士 通해 東亞日報 1997.9.24
  38. 赦免 努力해줘 고맙다” 全氏, 이회창代表에 人事말 1997.9.24 한겨레
  39. 李會昌, 代表人選 原點 再檢討 1997.9.24 한겨레
  40. 97大選 국민신당 이인제 候補, 慶南,釜山 遊說,執權後 政界 1997.12.15 mbc
  41. 李仁濟 pk다지기 1997.12.16 한겨레
  42. 빠른 時日 內에 前盧氏 赦免, 이인제 候補 記者會見서 밝혀 1997.12.16 京鄕新聞
  43. 與 大選候補 李會昌氏, 東亞日報, 1997年 7月 22日.
  44. 김대중 支持率 繼續 上昇 1997.10.3 한겨레
  45. 2位 混戰…當選可能性 이회창氏가 이인제氏 앞서 1997.10.6 京鄕新聞
  46. 이인제 京畿知事 9月初 京畿知事職 辭退 決定 1997.8.20 mbc
  47. 신한국당, DJ 祕資金 670億 造成했다 主張 1997.10.7 mbc
  48. 金大中 祕資金 670億 1997.10.8 京鄕新聞
  49. [1] 1997.10.8 東亞日報
  50. 김대중 總裁, 관훈 討論會에서 670億 祕資金은 事實無根 1997.10.8 mbc
  51. 신한국당, 金大中 祕資金 入出金 計座와 手票 一連番號 公開 1997.10.9 mbc
  52. 신한국당,국민회의 김대중 總裁 企業 돈 134億 받았다 主張 1997.10.10 mbc
  53. 祕資金 極限 對峙 1997.10.9 京鄕新聞
  54. 신한국당, DJ 親姻戚 378億 祕資金 1997.10.14 mbc
  55. 신한국 김대중總裁 告發 1997.10.17 京鄕新聞
  56. 祕資金 戰爭 與野 表情 1997.10.12 京鄕新聞
  57. 警察, 여야 지구당 警備 强化 1997.10.10 京鄕新聞
  58. 與野 大選 候補들, 祕資金 問題 正面 激突 1997.10.17 mbc
  59. 김대중 總裁 祕資金 疑惑 檢察 公式 搜査 選擧戰 終結 可能 1997.10.20 mbc
  60. 檢察, 김대중 국민회의 總裁 祕資金 搜査 留保 1997.10.21 mbc
  61. 閣下 第 2의 光州事態가 올 것입니다 1998.2.2 한겨레新聞
  62. 김태정 檢察總長 任命, 野圈 웬일이지 기우뚱 1997.8.8 京鄕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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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全(前)·盧(盧)氏 現政權서 赦免해야” 김대중總裁 밝혀 1997.8.31 京鄕新聞
  84. 김대중 總裁,金大統領 任期內 前職大統領 赦免 要請 1997.8.31 mbc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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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和解의 政治人'浮刻 嶺南 끌어 안기6共(공)세력들도 包容 色깔論 遮斷 效果까지 ‘容恕’光州輿論度 한몫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金大中))總裁가 政治權의「뜨거운 감자 1997.9.1 京鄕新聞
  87. "全(前)·盧(盧)氏 赦免 바람직" 1997.10.23 京鄕新聞
  88. 執權하면 大赦免 斷行” 국민회의 國會 代表演說 박정수 국민회의 副總裁 1997.10.23 한겨레
  89. 국민회의, 全斗煥.노태우氏 赦免 促求 1997.10.23 mbc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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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 김영삼 大統領.이회창 代表,두 前職 大統領 特別 赦免 波紋 關聯 深夜 緊急 會同 1997.9.2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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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 "全(前)·盧(盧) 秋夕前 赦免 不可(不可)" 1997.9.3 每日經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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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 李(李)代表-全(前)氏 祕密메시지 오갔다 赦免波動後 辯護士 通해 1997. 9. 24 東亞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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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 赦免 努力해줘 고맙다” 全氏, 이회창代表에 人事말 1997.9.24 한겨레
  100. 李會昌, 代表人選 原點 再檢討 1997.9.24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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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 李仁濟 pk다지기 1997.12.16 한겨레
  103. 빠른 時日 內에 前盧氏 赦免, 이인제 候補 記者會見서 밝혀 1997.12.16 京鄕新聞
  104. 전두환 노태우 두 前職大統領 赦免에 與野 모두肯定的 反應 1997.12.21 東亞日報
  105. 全(前)-盧(盧)氏 赦免 「12.12事態」서「12.22석방」까지 뒤바뀐 榮辱 1997.12.22 東亞日報
  106. “<大選(大選)現場> 유세장 地域感情 助長 頻發” . 聯合뉴스. 1997年 12月 12日. 2016年 3月 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4月 21日에 確認함 .  
  107. 박찬종氏'地域感情'發言 物議 1996.2.8 한겨레新聞
  108. 朴燦鍾(박찬종)氏 데모대發言 5.18團體 謝過 要求 1996.2.29 京鄕新聞
  109. 박찬종氏 데모대發言 解明 1996.2.29 한겨레新聞
  110. 政治人들 地域感情 助長 如前 1996.3.9 京鄕新聞
  111. 97 大選 국민신당 이인제 候補 嶺南 得票戰 1997.12.16 mbc
  112. 프레시안 (2013年 6月 19日). “힘들게 大企業 合格, 그런데 出勤은 하지 마라?” . 2013年 8月 18日에 確認함 .  
  113. MBC뉴스데스크 (1996年 12月 26日). “신한국당,勞動法 改正案과 安企部法 改正案 奇襲處理[김상수]” . 2013年 12月 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8月 18日에 確認함 .  
  114. MBC뉴스데스크 (1996年 12月 26日). “野黨, 신한국당의 法案 奇襲處理 關聯 無效鬪爭 決議[金世鏞]” . 2013年 12月 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8月 18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