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후돈
(
中國語
:
夏侯惇
,
병음
:
Xiahou D?n
샤허愚鈍
[
*
]
, ?~
220年
6月 13日
)은
中國
後漢
말
曹操
麾下의
將軍
兼
政治가
이다.
者
는 遠洋(
中國語
正體字
:
元讓
,
簡體字
:
元?
,
병음
:
Yuanrang
위안랑
[
*
]
)이며 曹操가 擧兵했을 때부터 도왔고 曹操와 같은 해에 死亡했다. 主로 後方에서 據點 防禦를 맡아 曹操가 安心하고 親庭할 수 있게 했다.
呂布
의 部下
造成
의 화살로 인해 한쪽
눈
을 잃은 것으로 有名하다.
한나라
의 開國功臣
下後榮
의 後孫이다.
生涯
[
編輯
]
曹操의 뒤에서 演奏를 지키다
[
編輯
]
敗局
초현
(?縣, 現在의
안후이省
보저우視
) 사람이다.
曹操
가 擧兵할 때부터 늘 옆에서 함께 하였다.
190年
(
草平
元年) 曹操가
反童濯 聯合軍
의 一員으로서 噴霧將軍(奮武將軍)을 稱하고 하후돈은
사마
로 삼았다. 曹操가 衡陽(滎陽)으로 進擊했다가
西營
에게 깨져 兵士가 不足해졌으므로 하후돈이
洋酒
(揚州)로 가서 募兵하였다. 以後 白馬(白馬)에 駐屯하며 折衷敎委(折衝校尉)와
東君
태수
를 겸하였다.
曹操가
道兼
의
西周
를 치러 가면서 하후돈은
복양
(?陽)을 지키게 했다.
194年
(
興坪
元年)
帳幕
이
呂布
를 불러들여 亂을 일으키고
連奏
를 掌握하였다. 曹操의
家族
이 있는
見性
(?城)에서
순욱
이 多急히 불러서 적은 兵士만을 데리고 달려가 濾胞와 싸웠다. 濾胞는 君을 물려 福羊을 占據하고 그 物資를 確保하였다. 하후돈은 見性으로 들어와 帳幕과 聯動하려던 者들을 處斷하였다.
[1]
그 過程에서 몇몇이
降伏
하는 척하다가 하후돈을 사로잡고 寶貨를 要求하였다. 하후돈의 部下
寒戶
가 動搖하는 軍을 진정시킨 後
人質
犯意
脅迫
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攻擊하여 하후돈을 救出하였다. 曹操가 序奏에서 돌아와 濾胞를
칠 때
幼時(流矢)에 맞아 왼쪽
눈
을 잃었다. 그래서 孟夏後(盲夏侯)란
別名
이 생겼다. 하후돈은 이를 싫어해서
거울
을 볼 때마다 火를 내며
땅
에 내던졌다.
[2]
曹操가 뒤를 맡기고 北伐에 나서다
[
編輯
]
진류
,
제음
태수와 件武裝軍(建武―)을 겸하고 考案向後(高安鄕侯)에 封해졌다. 큰
가뭄
과 蝗蟲(蝗蟲)李 덮쳤기에 태수수(太壽水)를 가로막아
물
을 모았으며 몸소
흙
을 지고 將兵들을 引率하여
벼
를 심는 데 힘써서
百姓
을 도왔다.
198年
(
建安
3年) 9月(
陰曆
)
牌性
(沛城)에 있던
劉備
가
고순
과
匠料
에게
[3]
攻擊받아 求하려했지만 敗하였다.
[4]
하남윤
으로 轉任되고 曹操가 河北으로 出陣할 때 後方을 지켰다.
202年
[5]
曹操가 여양(黎陽, 只今의
허난省
쉰 現
)에서
원담
·
原狀
兄弟
와 一進一退를 거듭할 동안
遊標
에게 依託하던 劉備가
섭縣
(葉縣)까지 치고 올라왔다. 이를 막으러 가니 劉備가 自己 陣地를
불
태우고 朴網(博望)으로
[6]
退却하였다.
移轉
의 挽留에도 不拘하고
于今
과 함께 쫓았다가
伏兵에 堂下
였다. 陣營에 남아있던 移轉이 求하러 달려온 德分에 劉備가 後退하였다.
[7]
204年
業
이 陷落되자 腹把將軍(伏波―)을 겸하고 便宜從事가 許諾됐다.
205年
曹操가 광평(?平) 方面에서
烏桓
을 相對하는 틈을 타
倂奏
自社
固諫
이
號館
(壺關)을 틀어막고
事例
로 南下하는 것을
事例敎委
鍾繇
와
[8]
함께 막았다.
[9]
207年
그동안의 功勞를 勘案하여
食邑
1,800號를 더해 모두 2,500號가 되었다.
백랑산 戰鬪
에서 가장 功이 컸던
全州
가 끝까지 封爵을 强하게 拒否하기에 平素의 親分을 바탕으로 說得해보았지만 하후돈도 어쩔 수 없었다.
[10]
曹操의 뒤를 바로 따라가다
[
編輯
]
215年
曹操가
長老
를
征伐할
때 그 동생
長位
가 數萬 名을 거느리고 양평관(陽平關)에서 抗戰하였다. 曹操가
산
위의 여러 陣地를 攻擊했지만 攻掠하지 못하고 死傷者만 늘어났다.
軍糧
마저 떨어져 退却을 決心하고 하후돈과
허저
로 하여금 山 위에 흩어져 있는 兵士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高調(高祚)가 指揮하던 最前線의 部隊가 미처 돌아오지 못하고
밤
에 그만 長位君의 陣營으로 잘못 들어갔다. 때마침
사슴
數千 마리가 突入하고 잘못 들어간 高調도
北
과
피리
를 울리니 長位가 크게 놀라 도망쳤다. 하후돈과 虛저는 같이 後軍에 있던
神秘
와
幼葉
이 이 事實을 말한 後에야 알아차렸다.
[11]
216年
有數區 戰鬪
에 從軍한 後 다음해
調印
, 匠料,
將牌
[12]
等 26軍을 거느리고 居所(居巢, 只今의
안후이省
차오후視
)에서
孫權
을 防備하였다. 曹操가 “胃腔(魏絳)은
융
과 和平한 공으로도
種
과 警(磬)을 받았는데 하물며 將軍은 어떠하랴!”라고 말하며 器樂名唱(伎樂名倡)을 주었다. 以後
前將軍
에 올라 少陵(召陵)에 駐屯하였다.
220年
(
軟鋼
元年) 曹操가 죽고
조비
가
位
王
에 올라 하후돈을
大將軍
에 임명했다. 4月 죽었다.
[13]
시호
는 忠厚(忠侯)라 하였다.
性品
[
編輯
]
매우 충성스러웠고
曹操
의 信任도 남달랐다. 曹操의
수레
에 同乘했으며 다른 장수들보다도 特히 重하게 待遇받아 그 寢室까지도 出入하였다. 末年에 다른 장수들이 모두
위나라
官職을 받을 때 혼자만 如前히
한나라
官職이었다. 이는 臣下의
예
에 어긋난다며 上疏했다. 曹操가 “듣건대 臣下란 스승 같은 者가 最善이요 벗 같은 自家 次線이라 했으니 무릇 그 德만 貴히 여기면 되오. 어찌 區區한 위나라 官職에 戀戀하시오?”라고 하건만 고집스레 請하여 前將軍에 任命됐다.
[14]
出征할 때도 스승을 모셔서 學問을 익혔다. 청렴하고 儉素하여 조금이라도 財物이 생기면 周圍에 나눠주었고 다른 經濟行爲는 하지 않아 官廳에서 타다 썼다. 14살 때 自身의 스승을 侮辱한 사람을 죽일 程度로 剛直한 性品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三國志演義
[
編輯
]
司書가 아닌
小說
《
三國志演義
》에서는 많은
戰鬪
에 參與해 最前線에서 活躍하는 盲腸으로 描寫가 되었다.
西營
,
變樣
,
交遊
等을 直接 벤다.
눈
을 잃는 場面은
고순
과 싸우다가
造成
이 쏜
화살
에 왼쪽 눈을 맞아 “
아버지
의
定期
와
어머니
의
피
로 된 것을 버릴 수는 없다”고 말하며 삼키고는 造成을 죽이는 것으로 그렸다.
예형
의
입
을 통해 완體將軍(完體―)이라고 嘲弄당하는 裝置로도 活用하였다.
五官참六場
을 벌인
關羽
와 싸우려는데
匠料
가 말린다.
朴網派 戰鬪
는
諸葛亮
에게 當해서 스스로를 捕縛해 죽기를 請하는데 曹操가 풀어준다.
京畿
(耿紀) 等이
일으킨 난
을 鎭壓한다. 죽을 때는 曹操처럼
複皇后
, 洞귀인(董貴人), 두 皇子,
복완
,
同乘
의
鬼神
을 보고 놀라
病
이 드는 것으로 處理하였다.
評價
[
編輯
]
倍잠
(裴潛)은 하후돈이 曹操의 一族이자 能力과 經驗에서 첫째가는 將帥로 童濯에게 濾胞가 있다면 曹操에게는 하후돈이 있었다고 評했다.
倍잠론(裴潛論)에서 하후돈은 西周 攻略戰에서 濾胞를 攻擊하다 한쪽 눈을 다쳐 大將軍으로 昇進하여 後方을 管理하였다고 한다.
家計
[
編輯
]
- 本人 : 하후돈
- 長男 : 下候蟲(夏侯充)
- 次男 :
下後無
- 아들 : 下後磁場
- 아들 : 하후自强
- 동생 : 下後斂(夏侯廉)
各州
[
編輯
]
- ↑
《三國志》10卷 魏書 第10 순욱
- ↑
《
偉略
》 ;
配送地
主席, 《三國志》9卷 魏書 第9 하후돈에서 引用
- ↑
王粲
, 《
英雄機
》 ; 配送地 主席, 《三國志》32卷 蜀黍 第2 船主 劉備에서 引用
- ↑
《三國志》7卷 魏書 第7 呂布
- ↑
《
資治通鑑
》64卷 寒氣 第56
獻帝
建安 7年
- ↑
《三國志》32卷 蜀黍 第2 船主 劉備
- ↑
《三國志》18卷 魏書 第18 移轉
- ↑
《三國志》13卷 魏書 第13 鍾繇
- ↑
《三國志》16卷 魏書 第16
두기
- ↑
《三國志》11卷 魏書 第11 全州
- ↑
《威名新株》(魏名臣奏)에 실린
同素
의 票(表), 《位塵世魚》(魏晉世語) ; 配送地 主席, 《三國志》8卷 魏書 第8 長老에서 引用
- ↑
《三國志》18卷 魏書 第18 將牌
- ↑
《三國志》2卷 魏書 第2 問題 조비
- ↑
《魏書》 ; 配送地 主席, 《三國志》9卷 魏書 第9 하후돈에서 引用
參考 文獻
[
編輯
]
- 《
三國志
》9卷 魏書 第9 하후돈
- 《三國志》1卷 魏書 第1 武帝 曹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