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랑산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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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랑산 戰鬪
날짜 205年 ~ 207年
場所
結果 曹操 의 勝利
交戰國
曹操 原狀
원희
烏桓族
公孫康
指揮官
曹操
하후돈
匠料
棲遑
허저
조홍
곽가
原狀
원희
公孫康
答돈
兵力
30萬 名 不明

백랑산 戰鬪 (白狼山戰鬪)는 曹操 河北 爭霸戰 에서 元氏 一家 討伐 한 後 搖動 으로 逃亡친 原狀 , 원희 를 討伐하기 위해 일으킨 征伐로 曹操는 北方 征伐 에서 原狀과 원희를 討伐하고 北方 全體를 平定했다. [1]

背景 [ 編輯 ]

當時 曹操는 202年 ~ 205年 까지 3年에 걸쳐 벌어진 河北 戰鬪 에서 元氏 一家를 討伐하고 寄主 , 幼主 , 倂奏 , 淸州 等 4株를 平定했다.

이때 죽은 元素 의 셋째 아들 原狀 과 둘째 아들 원희 가 元氏 一家와 友好的 關係를 맺고 있던 北方의 烏桓族 의 王 答돈 에게로 逃避하자 北方 征伐을 計劃한다.

이에 北方 征伐을 하는 사이에 劉備 와 그가 依託하는 荊州 自社 遊標 虛度 를 奇襲할 것이라며 조홍 等 많은 忠臣들이 反對하지만 唯獨 曹操가 아끼는 模寫 곽가 가 遊標의 性格을 헤아려 北方 征伐을 實行에 옮기게 한다.

北方 征伐 [ 編輯 ]

205年 曹操는 곽가 와 匠料 等 部下들과 함께 30萬 大軍을 이끌고 北方 征伐에 나선다. 그러나 沙漠 地帶를 지나야 하는 北方 征伐을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고 곽가 마저 病을 얻어 실려 가는 狀況이었다. 曹操는 回軍하려 하지만 郭哥는 끝까지 反對하였다.

曹操는 病에 걸린 곽가를 譯註 地方에 남겨두고 繼續 進軍하여 요서 백랑산 에서 原狀과 원희와 衝突하여 激烈한 戰鬪를 벌인다.

戰鬪 끝에 曹操는 原狀, 원희와 烏桓族 을 무찌르고 原狀과 원희는 搖動 태수 公孫康 에게로 달아나고 烏桓族 의 王 答돈 은 匠料에 依해 죽임을 當했다. [2]

北方 平定 [ 編輯 ]

그러나 譯註 地方으로 돌아온 曹操는 곽가 가 結局 病으로 죽었다는 消息을 듣는다.

그러다가 곽家가 죽기전에 남긴 便紙에 쓰여진 計策을 바탕으로 攻擊을 하지 않고 있으면 遼東에서 原狀, 원희와 公孫康 의 內部 分裂이 일어나 原狀과 원희가 죽을 것이라는 豫測을 한다.

곽가의 計策대로 原狀과 원희는 요동 太守 公孫康에게 죽임을 當하고 목은 曹操에게로 돌려보내진다. 그 뒤 曹操는 北方까지 平定했고 중원을 支配하게 되었다.

各州 [ 編輯 ]

  1. 윤여동설 - 우북평군 백랑현(白狼縣)에서 發源하는 百랑數와 夭壽 上流의 百랑數는 서로 다른 江이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013年 3月 31日
  2. 三國志 百科事典 2005年 3月 2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