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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判事를 그만두고 防衛事業廳으로 갔나|신동아

정재민의 리·걸·에·세·이

나는 왜 判事를 그만두고 防衛事業廳으로 갔나

  • 정재민 | 前 判事·小說家

    入力 2017-03-24 11: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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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月 法服을 벗었다. 11年 法官 生活을 마감했다. 法科大學, 司法硏修院, 法務官, 判事까지 20餘 年 法律家 生活도 一段落 지었다. 곧이어 防衛事業廳 팀長으로서 行政官僚 生活을 始作했기 때문이다.

    이 紙面에서 判事의 일을 紹介한 지 얼마 되지 않은 時點에 判事職을 떠나 讀者께 罪悚하다. 社稷을 機會로 이番에는 내가 왜 法服을 벗었는지를 말해보고자 한다. 平判事 하나 辭職하는 것이 무슨 대수겠는가. 그래도 굳이 말하는 것은 내 率直한 事緣이 이 글의 主題인 判事의 일을 理解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判事職이 싫어서 그만둔 것은 아니다. 내게는 分에 넘치는 職業이었다. 나이와 깜냥에 比해 過分한 待接을 받았다. 實際보다 더 반듯한 사람인 양 信賴받았다. 經歷이 같은 다른 公務員보다 더 많은 報酬를 받았다. 他人으로부터 괴롭힘도, 無視도 쉽게 當하지 않았다. 當事者 數萬 名으로부터 世界文學全集보다 더 생생한 삶의 祕密을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거짓말을 할 必要가 없다는 點이었다. 雙方의 거짓말이 亂舞하는 法廷에서도 判事만큼은 거짓말을 할 理由가 없었다. 判事들에게 個別的으로 處理할 事件들이 配當되므로 서로 自己 일과 責任을 남에게 떠넘기려고 同僚를 속일 必要도 없다. 그러니 職場 內에 蔓延하다는 內部政治의 權謀術數도 적었다. 윗사람과 關係가 안 좋아 나쁜 平靜을 받을지언정 잘릴 걱정을 해본 적은 없었다. 내 自身을 속일 必要도 없었다. 法과 良心에 따른 判斷이 憲法上 保障돼 있어서 判決文을 쓸 때에는 내가 實際로 믿는 그대로를 적을 수 있었다.

    하지만 判事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한 番 사는 人生에 오로지 判事만 해야 하는 것일까.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리나’의 첫 文章은 이렇게 始作한다. ‘幸福한 家族은 엇비슷한 理由로 幸福하지만 不幸한 家族은 제各其 다른 理由로 不幸하다.’ 비슷한 脈絡에서 내게 다음과 같은 點들이 힘겨웠다.



    大韓民國 判事는 激務에 시달린다.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 있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달려야 가까스로 現狀維持를 한다. 저녁이 없는 삶, 週末이 없는 삶이 原則이다. 내 補職이 比較的 더 바쁜 便이 아닌데도 昨年 한 해 동안 駐中 折半은 子正 넘어 집에 들어갔다.



    正義의 均衡點 찾기

    成就의 關門을 하나씩 通過할수록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自由가 많아져야 正常 아닌가. 오히려 反對로 選擇肢는 갈수록 좁아지고 心理的으로 쫓겼다. 世上이 나를 속이는 것 같았다. 學窓 時節에는 名門大만 가면 내가 願하는 대로 마음껏 살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熱心히 工夫해서 大學에 갔더니 이제는 司法試驗만 合格하면 내 뜻을 願 없이 펼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꾹 참고 工夫해서 司法試驗에 合格했더니 이제는 判事만 되면…. 그래서 判事가 됐더니 이제는 25年 동안 熱心히 일해서 高等法院 部長判事만 되면…. 아무래도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보람을 느낄 때도 적지 않았지만 그렇게 長時間 일하는 만큼 큰 보람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것은 일 自體보다는 個人의 限界 때문이다. 判事가 될 때 法律 問題를 잘 푸는지를 評價하는 試驗만 通過했을 뿐 定義의 均衡點을 제대로 찾는지에 對해서는 檢證받지 않았다. 判事로서 每日 숱하게 부딪히는 問題는 大槪 法律 問題보다 正義의 均衡點에 關한 것이다.

    假令 이런 問題들이다. 懲役 6月이 옳은가 10月이 옳은가. 離婚裁判에서 經濟力 없는 어머니와 育兒를 해본 적 없는 아버지 中에서 누구에게 子女 養育權을 주는 것이 옳은가. 罪를 自白하는 被告人에 비해 罪를 否認하는 被告人은 얼마나 더 높은 刑을 받아야 하는가. 이런 問題는 平均人의 常識을 基準으로 判斷해야 하지만 學歷, 社會的 地位, 經濟力, 職業群 等 여러 面에서 내가 平均人일까. 저마다 常識과 非常食을 너무 當然하다는 듯 區分한다지만 法廷에 나온 사람들의 常識은 서로 꽤나 다르다.

    醫師는 患者의 病을 고칠 自信이 없으면 더 큰 病院에 가보라고 할 수 있지만 判事는 自己 事件을 다른 判事에게 떠넘길 수가 없으니 이런 問題가 더 큰 負擔이 된다. 告白건대, 끝내 내 答에 確信을 가지지 못하고 試驗 終了時間에 쫓긴 受驗生처럼 答을 選擇해서 判決한 境遇도 不知其數다. 아는 誤判보다 모르는 誤判이 더 많았을 것이다. 正義라 錯覺한 稚氣 어린 感傷과 獨善으로 누군가의 가슴에 平生 가는 흉터를 남겼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判決을 할 때마다 자갈 하나씩 삼킨 것처럼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法服 속에 開城 감추기

    判事의 일을 재미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사람을 監獄에 보내고, 夫婦를 離婚시키고, 子息의 養育權을 어느 한쪽에만 주고, 財産을 빼앗거나 會社를 破産시키는 일들이 재미있겠는가. 재미는커녕 傷處만 쌓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지만 내 손에 피를 묻힐 때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는 無數한 欠집이 남는다.

    判事는 검은 法服 속에 自己 自身을 감춘 채 살아간다. 個性을 發現시키는 것이 制限된다. 생각도 平均人의 常識에 끼워 넣어야 한다. 當事者들이 어느 判事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다른 判決을 받는 것은 정의롭지 않기 때문이다. 定義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取扱하는 것이다. 수많은 判決例가 事實上 判事의 判斷을 制御하고 있고 그에 反하는 判決을 하면 抗訴審에서 矯正된다. 判事가 어떻게 말하고 措置해야 하는지에 對해서 빈틈이 없을 程度로 細細하게 매뉴얼이 確立돼 있다. 사람이 各自 ‘나’로서 이 世上에 태어나서 ‘나’를 이루어간다는 人生觀을 가진 사람에게 判事로만 사는 것은 갑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判事가 됐나. 出退勤할 때마다, 어려운 事件 앞에 答을 찾지 못할 때마다 無數히 내 自身에게 던진 質問이었다. 어떤 判事들은 뚜렷하고 近似한 對答을 품고 있다. 正義를 세우기 위해서. 抑鬱한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世上을 평화롭게 만들기 爲해서. 나는 그렇지 못했다. 실은 切實하게 判事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다.

    學窓 時節 내 꿈은 特派員이었다. 하지만 父母님이 判檢事가 돼야 한다면서 詰難하셨다. “사람이 어떻게 제 하고 싶은 대로만 사노.” 一理 있는 말이었다. 내가 뭐라고. 이 거친 世上에서 몸 하나밖에 없는 놈이 어찌 나 願하는 대로만 살 수 있겠는가. 가난한 집안 맏이로서 家計에 도움도 되어야 하겠지. 아픈 어머니 말씀이라 더욱 거역할 수 없었다. 나만의 길을 홀로 떠날 수 있을 程度로 내 心地가 여물지도 못하던 때였다. 父母님의 바람과 先生님의 말대로 法大를 갔다. 나 亦是 社會的 地位, 將來의 經濟力 等 實利的으로도 좋다는 計算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司法試驗을 보게 됐고 合格하고 나니 判事가 된 것이다. 마치 混雜한 地下鐵에서 내려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린 方向으로 無酌定 따라 나가는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便紙

    그러나 남들이 좋다는 삶도 소문난 잔치처럼 別것 없었다. 그저 그런 패키지旅行 같았다.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신나지도 않았다. 旅行 끝나고 남는 것은 感動 없는 觀光名所를 背景으로 한 寫眞들뿐. 내가 좋아하는 일과 戀愛結婚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좋다는 日課 仲媒結婚한 아쉬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틈틈이 小說과 論文도 몇 篇 쓰고, 異例的으로 國防部 政策室, 外交部 國際法律國, 유엔國際刑事裁判所에서 일하는 一種의 外道를 敢行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再昨年 國際刑事裁判所가 있는 헤이그에 머물 때 數十 番 고쳐 읽은 便紙 句節이 있다. 日本 近代小說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英國 留學을 마치고 歸國할 때 교토大 英文科 敎授職을 拒否하고 小說家가 되기로 決心하면서 親舊에게 쓴 便紙다. ‘留學에서 돌아오는 길에 決心했네. 다시는 只今까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내 스스로가 얼마나 偉大한지 試驗해볼 機會가 없었네. 스스로를 信賴한 적이 없었네. 이제는 내 혼자 힘으로 가는 데까지 가다가 막다른 골목을 만나면 거기서 쓰러지겠네.’ 이 中에서도 ‘스스로를 信賴한 적이 없었네’라는 句節이 正鵠을 찔렀다. 내가 그동안 大體로 남들이 좋다는 安全한 일만 좇은 것도 내가 스스로를 信賴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믿어주지 못한 내 自身에게 未安해졌다. 失敗를 겪더라도 내 自身을 믿어주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때 내 自身이 서럽게 울 것 같았다. 마침 나이 마흔을 맞이하면서 覺悟도 남달랐다. 그래서 決心했다. 歸國하면 다시는 以前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남은 折半의 人生은 오로지 ‘나’로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자면 먼저 ‘나’보다 肥大한 ‘判事’라는 꼬리票를 잘라내야 했다. ‘鄭 判事’가 아니라 ‘정재민’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번듯한 名銜에 기대지 않고 待接이 더 나쁘더라도 내 이름 석 者의 무게로 살기로 했다.



    왜 防衛事業廳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行政府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國防部, 外交部에서 일할 때 行政府 일의 스케일과 재미와 보람에 홀딱 반한 記憶 때문이었다. 國家 全般에 影響을 미치는 일인 만큼 보람이 크고 問題 解決 方式이 하나로 定해져 있는 것이 아니어서 創意的이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다. 微力하게나마 國益에 寄與한다는 自負心도 빼놓을 수 없었다.

    왜 何必 防衛事業廳이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많은 이가 말하는 防産非理 剔抉이 最優先 動機는 아니다. 防事廳長度 아닌 一介 팀長으로 가면서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것 自體가 主題 넘는다. 防衛産業專門 辯護士가 되려고 暫時 經歷을 쌓으려는 것도 아니다. 停年을 채우려고 職級을 낮춰 正規職 公務員이 됐다. 隱退하고 就業制限期間이 끝나면 아무래도 辯護士가 될 可能性이 높겠지만  나중에 내가 로버트 跆拳V를 만들지 말라는 法도 없지 않은가.

    職級이 낮아지는 것을 理解 못하는 분들도 있지만 政府中央部處의 베테랑 公務員 스물다섯 明과 일하는 팀長 자리가 내게 過分할지언정 決코 낮은 자리라 생각지 않는다. 退溪 李滉 先生도 情3品 以上의 벼슬을 하지 말라고 했다. 내 選擇이 勇敢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事實 대단한 冒險은 아니다. 요즘처럼 經濟的으로 不安定한 時期에 그저 停年 保障되는 公務員 된 것 아닌가.

    防衛事業廳에 간 데에는 무엇보다 防衛事業廳 自體의 魅力이 컸다. 防衛事業廳은 우리 軍이 必要한 武器나 裝備를 自體的으로 開發하거나 國內外에서 購入하는 機關이다. 國內業體가 만든 武器를 外國에 팔 수 있도록 活路를 開拓하는 일도 한다. 驅逐艦이나 헬기를 프라모델로 만들어도 뿌듯한데 世界를 다니면서 裝備와 部品을 求해서 實際로 디자인하고 組立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우리나라 武器를 들고 새로운 나라에 活路를 뚫는 일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政務的, 抽象的 談論만 다루는 部處와 달리 具體的인 成果가 武器나 裝備로 눈에 보인다는 것도 魅力的이다.

    外交, 安保, 科學技術, 法律, 國際, 經濟, 會計, 人文學 等 여러 分野가 얽혀 있는 領域이므로 내가 그동안 배우고 익힌 이런저런 知識과 經驗을 헛되지 않게 써먹을 수도 있다. 防衛事業廳 立場에서 내 履歷이 特異한 만큼 專門性과 公正性 側面에서 寄與할 수 있을 것이다. 契約과 같이 法律的인 일을 다루는 機關이므로 法律家가 팀長이 되면 일의 處理 速度와 合法性이 提高될 것이다.

    모난 돌이 돼 四方에서 情을 맞고 따돌림을 當하더라도 不法과 腐敗에 附逆하지 않을 것이다. 進級과 評判에 人質 잡히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옳은 일은 반드시 실현시키기 위해 最善을 다하며, 책임지는 것을 回避하지 않는 그런 良心的인 公職生活을 한番 試圖해보고 싶다. 내 自身을 믿어주고 ‘내 삶’을 熾烈하고 充實하게 살기 위해서.




    鄭 再 민
    ● 서울對 法大 卒業, 同 大學院 博士課程 修了, 司法硏修院 修了(32期)
    ● 前 判事, 舊유고유엔國際 刑事裁判所(ICTY) 裁判硏究官, 外交部 領土法律諮問官  
    ● 世界文學賞, 每日新聞 浦項國際東海文學賞 受賞
    ● 著書 : ‘보헤미안랩소디’  ‘國際法과 함께 읽는 獨島現代史' ‘小說 이사부’ ‘獨島 認 더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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