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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協 代辯人 3個月 만에 辭退한 ‘시골醫師’ 박경철|新東亞

醫協 代辯人 3個月 만에 辭退한 ‘시골醫師’ 박경철

“極貧者 無料 診療 主張하니 ‘左派勢力 주구’라네요”

  • 장세진 自由寄稿家 sec1984@hanmail.net

    入力 2007-11-12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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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病院 팔아서라도 極貧者 治療해야…” 發言에 內部 反撥
    • “一部 病院, 製藥社 리베이트 받았다” 放送 口舌
    • 讀書狂 ‘鈍才 少年’, 證市에서 ‘블루오션’ 發見
    • 外換危機, 大活況, 暴落, 再上昇 時點 족집게 豫測
    • “2012年까지 株價指數 5000 간다”
    • 不動産 暴騰 地域 豫想 的中…“하지만 나는 土地公槪念 支持者”
    • “돈, 벌 만큼 벌었다…장학재단, 障礙人 再活施設 만드는 게 꿈”
    의협 대변인 3개월 만에 사퇴한 ‘시골의사’  박경철
    “제인생관 中 하나가 ‘甲(甲)으로 살자’입니다. 욕심내지 않고 性急하지 않게 천천히 目標點을 向해 가면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살 수 있어요. 主流가 아닌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것도 그걸 可能케 했죠. 그런데 醫師協會 代辯人 자리는 아웃사이더를 志向하던 내 삶의 方式에서 벗어나는 다른 일이었고, 徹底히 ‘을(乙)’로 살았습니다. 이제 짧은 代辯人 生活을 마치고 예전의 박경철로 돌아갑니다.”

    國內 最大의 利益團體인 대한의사협회(以下 醫協)의 ‘公式 입’으로 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 ‘시골醫師’ 박경철(朴慶哲·42)氏가 10月1日子로 醫協 代辯人 자리에서 물러났다. 不過 3個月의 짧은 期間이 “3年처럼 긴 時間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오랜 旅程을 마친 旅行者처럼 지친 모습이었다.

    組織에 들어간 反骨 醫師

    朴氏를 만난 곳은 그가 執筆室로 使用하는 서울 서대문구 忠正路驛 한 오피스텔이었다. 入住한 지 一週日도 되지 않아 什器라곤 소파와 冊床, 그리고 컴퓨터 한 臺가 고작이었다. 主人조차 낯선 空間. 出版社에서 그의 執筆 作業을 督勵(?)하기 위해 얻어준 오피스텔은 새로 꾸민 空間 特有의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인스턴트 커피를 한 盞씩 앞에 두고 始作한 인터뷰. 그는 짧은 代辯人 生活의 所懷로 말머리를 열었다.

    “처음부터 오래 할 생각은 없었어요. 代辯人과 公報理事 兼職 要請을 받았을 때 3個月에서 6個月만 代辯人을 맡겠다고 미리 말했습니다. 생각보다 그 時期가 좀 빨랐지만, 計劃대로 움직인 거지요.”



    朴氏는 다채로운 履歷을 가진 ‘흥미로운’ 사람이다. ‘시골醫師’라는 筆名으로 株式 사이트에 글을 올려 暴發的인 照會 數를 記錄한 株式 投資 專門家이고, 2005年에는 ‘시골醫師의 아름다운 同行(1, 2)’이라는 에세이集을 出刊해 베스트셀러 作家로 筆名을 날렸다.

    지난해에는 그가 펴낸 ‘시골醫師의 富者經濟學’李 그해 各種 言論媒體에서 經濟分野 推薦圖書로 꼽히며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또한 大學과 高等學校에서 特講要請이 殺到하는 自己啓發 專門家이기도 하다. 어느덧 한 달이면 50回의 講演을 하는 人氣講師가 됐다. 이 外에도 各種 印刷媒體에 連載하는 칼럼이 20個가 넘는 베테랑 칼럼니스트이자 라디오와 TV의 여러 프로그램에 패널로 出演하는 放送人이다.

    한便으론 바이오業體의 經營에도 關與하면서 親舊와 共同 經營하는 慶北 安東 新世界聯合病院에서 一週日에 사흘은 診療와 手術을 하는 外科專門醫다. 醫協 代辯人을 맡은 後에는 日程이 바빠 診療를 暫時 쉬었지만, 一週日에 하루는 深夜 高速버스를 타고 내려가 이튿날 새벽부터 手術을 하고 午後에 서울로 돌아오는 强行軍을 하며 醫師로서의 所任을 챙겼다. 그러면서도 한 달에 數十 卷의 冊을 읽는 讀書狂이기도 하다.

    여러 分野에서 專門家 以上의 識見과 實力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在野의 숨은 固守’ 이미지가 剛하다. 醫師말고는 이 모든 재주를 ‘獨學’으로 길렀을 可能性이 크다. 自由奔放해 보이는 그가 가장 保守的인 利益團體 中 하나인 義俠의 감투를 쓴다는 事實은 뉴스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한때 그는 “醫療酬價를 높이려고 綜合病院들이 하지 않아도 될 手術까지 하고 있다”며 醫療界에 一鍼을 놓은 ‘反骨 醫師’였다.

    그런데 인터뷰를 要請한 時點과 인터뷰가 이루어진 一週日 사이에 그는 身分이 달라져 있었다. 더 以上 醫協 代辯人이 아니었던 것이다.

    代辯人이 되기까지

    의협 대변인 3개월 만에 사퇴한 ‘시골의사’  박경철

    多種多樣한 職業을 가진 박경철氏. 그의 달曆은 各種 日程 메모로 빡빡하다.

    一般人에게 醫協은 ‘밥그릇 싸움’을 일삼는 代表的 利益團體라는 이미지가 剛하다. 醫藥分業 事態가 빚어낸 것이지만, 이 社會 最高 旣得權層으로 分類되는 醫師 社會에 對한 國民의 反感이 작지 않다. 더욱이 지난 4月 末 前任 執行部의 政治權 로비 事實이 알려지면서 反感은 深化했다.

    以後 새로운 指導部가 構成되면서 朴氏는 代辯人으로 起用됐다. ‘電擊的’이라는 表現이 딱 어울렸다. 醫師 社會가 排出한 傑出한 스타를 代辯人으로 起用한 義俠의 判斷은 一旦 成功한 듯 보였다. 그가 代辯人을 맡기 前에는 義俠에 代辯人이라는 職銜이 있는지, 義俠이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도 別般 없었다. 그러나 박경철이라는 人物은 義俠을 눈에 확 띄는 團體로 만들어 놓았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의 變身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쉬울 것 없는 그가 왜 말 많고 頉 많은 義俠에 들어갔는지 의문스러워하는 이도 많았다.

    “醫師를 바라보는 社會의 視線은 冷酷했습니다. 意思가 政治人을 만나는 것 自體가 로비로 遁甲했고 그러다 보니 健康한 疏通路마저 막히고 말았지요. 言論이나 大衆에게 比較的 拒否感이 덜한 제가 代辯人을 맡아 ‘疏通의 光케이블’을 復舊해주길 바랐던 겁니다.

    저라고 왜 苦悶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醫師 社會에 빚을 진 사람입니다. 醫師였기에 여러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信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屬한 醫師 社會가 준 無形의 도움들이죠. 사람들은 醫師 한 사람 한 사람에겐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醫師 集團에는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깨는 데 제가 活用될 수 있다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죠.”

    새 指導部의 代辯人이 되면서 朴氏가 벌인 첫 番째 일은 政府가 推進하는 새 醫療給與制度에 反對 목소리를 낸 것이다. 特히 義俠과 對立角을 세우던 18個 市民團體와 共同으로 反對鬪爭을 벌인 것은 모두에게 意外였다. 貧困層에 對한 診療制限을 통해 國家財政의 漏水를 막겠다는 政府의 政策은 事實 市民團體가 막을 일이지 義俠이 나설 일은 아니었다. 新鮮한 反響이 일었다.

    ‘左派勢力의 走狗’

    “市民團體와의 協力은 無理라는 內部의 反對를 잠재우고 제 主張을 貫徹시켰습니다. 消費者인 市民團體와 供給者인 義俠이 한목소리를 냈다는 것은 象徵的 意味가 크지요. 처음 市民團體 代表들에게 共同 對應을 하자고 提議하자 그들은 ‘義俠이 왜 이러나?’ 하는 表情이었습니다. 多幸히 제 冊의 讀者인 그들이 好感을 갖고 對話에 臨하고 우리의 眞情性을 認定하면서 손을 잡게 됐죠. 結果的으론 失敗했지만 意味 있는 行動이었다고 自評합니다.”

    그런 進步的인 목소리가 醫協 全體의 歡迎을 받은 것은 아니다. “病院을 팔아서라도 極貧者에게선 診療費를 받지 말자”는 그의 ‘玉碎 主張’李 反感을 불러일으켰다. 一部 强勁派로부터 ‘트로이의 木馬’니 ‘左派勢力의 走狗’니 하는 非難이 쏟아졌다.

    “그 싸움에서 義俠이 變할 수 있다는 希望을 發見했습니다. 그 過程에서 박경철이라는 個人이 醫師協會의 象徵性을 지닌 것처럼 비쳐져 힘들었어요. 義俠의 意見을 물을 때면 모두 제게 몰려왔습니다. 全體의 決定을 傳達하는 代辯人임에도 言論의 포커스가 個人에게 맞춰지다 보니 代表性을 가진 것처럼 보인 거죠. 그게 제겐 ‘兩날의 칼’이었습니다. 組織 內部에 그런 저를 고깝게 보는 이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朴氏가 醫協 代辯人으로서 치른 두 番째 싸움은 成分名 處方 反對鬪爭. 이 亦是 別 成果 없이 그에게 劣敗感만 안겼다. 이 때는 오히려 市民團體와 論理의 櫃를 달리하며 反對便에서 입씨름을 해야 했다.

    “成分名 處方 反對는 組織의 論理가 아니라 제 所信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도 ‘박경철度 別수 없다. 組織에 들어가니 集團과 組織의 利益을 위해서만 싸운다’는 말이 들려왔어요. 저는 診療現場 經驗을 통해 카피 藥(複製 藥)은 믿을 수 없다는 結論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건 國民의 健康權과 直結된 問題죠.

    ‘意味 있는 實驗’

    의협 대변인 3개월 만에 사퇴한 ‘시골의사’  박경철

    株式投資는 더는 하지 않지만 그는 株式 投資 專門家로 旺盛한 活動을 하고 있다.

    그런데 政府는 이 制度를 내놓고는 한便에서 製藥會社와 病院 사이에 늘常 검은 去來가 있는 양 外郭을 때렸습니다. 醫療界가 自己 利益을 챙기기 위해 이에 反對하는 것으로 罵倒당한 거죠. (反對 鬪爭의) 動力이 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政府에 公開討論을 提議했지만 거절당했죠. 現實的으로 (政府의 論理를) 뒤집을 方法이 없었습니다.”

    成分名 處方 反對鬪爭 過程에서 口舌에 오르기도 했다. MBC 라디오 ‘손석희의 視線集中’에 出演했을 때였다. 成分名 處方 反對 論理를 펴던 그에게 司會者가 “리베이트 때문 아니냐?”고 묻자 “리베이트 慣行이 一部 있었음”을 認定한 대목이 問題가 됐다. 醫師協會가 이를 公式的으로 認定한 模樣새가 됐기 때문이다. 率直하게 恥部를 드러내고 公論化를 통해 改善點을 찾고자 했던 것이 오히려 葛藤의 불씨를 키운 셈이 됐다. 事實 義俠 執行部에서는 잘못된 慣行들에 對한 痛烈한 反省을 통해 먼저 變化를 꾀하자는 雰圍氣였지만, 組織論理를 앞세운 一部 批判勢力의 非難은 거셌다.

    그는 “애初부터 代辯人을 오래 할 생각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의 辭退 背景에는 分明 이런 內部 葛藤이 똬리를 틀고 있다. 代辯人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義俠 公報理事 職銜을 달고 있지만 이 또한 올해 末까지만 맡을 計劃이다.

    “‘내가 얻고 싶은 게 있으면 먼저 나를 사랑하게 하라’는 게 제 信條입니다. 自身을 사랑하게 하면 다 얻을 수 있습니다. 車線이 協商이지요. 協商은 잘 해야 折半을 얻을 수 있습니다. 最惡의 境遇가 싸움이지요. 醫藥分業 葛藤 以後 醫療界는 많은 것을 잃었고, 그로 인한 被害意識이 있습니다.

    政府 政策은 자꾸만 醫療界를 壓迫하고, 醫療界를 支持할 國民的 共感帶도 없는 狀況에서 醫師 社會가 먼저 變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醫師들이 作定하고 딱 1年만 診療現場에서 따뜻하고 親切하게 患者들을 만난다면 國民은 醫師의 便이 될 겁니다. 우리의 소리를 듣게 될 거고요. 社會的 弱者들이 우리를 支持하고 理解하게 行動하지 않았던 過去를 反省할 必要가 있다는 말입니다.”

    模樣새야 어떻든 朴氏의 ‘짧은 代辯人 生活’ 豫言은 맞아떨어졌다. 義俠에 들어갈 때 그가 憂慮했던 部分은 現實이 되어 그를 옥죄었다.

    “가시方席이었죠. 9月 初 自意半 他意半으로 辭退 宣言을 한 뒤 醫師 社會에서 留任 請願運動이 벌어졌습니다. 그만큼 제 眞情性을 알아주는 분이 많다는 거죠. 勿論 露骨的으로 辭退를 要求한 이들도 있고요. 結局 떠나는 것이 全體를 위해 좋겠다는 判斷을 했지만 只今도 後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義俠의 變化에 제가 작은 불씨가 된다면 그것으로 足합니다. 짧은 時間이지만 제 自身을 모두 던졌습니다. 여러모로 意味 있는 實驗이었죠.”

    株式판 떠나야 돈 번다

    朴氏의 또 다른 面貌는 ‘株式 投資 專門家’다. 그는 醫協 代辯人을 맡기 前 株式市場을 떠났다. 하지만 如前히 金融機關과 애널리스트, 證券投資 分析家들을 相對로 講演을 하고 그 分野에 對한 工夫도 繼續하고 있다. 다만 投資者의 位置에서만 벗어났을 뿐이다.

    “個人投資者 가운데 5%만 市場에서 살아남습니다. 最近 3年 동안은 개미 投資者도 證市 好況을 타고 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벌어야 얼마나 벌었을까요. 主食이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 돈을 벌어야 收益을 낸 것입니다. 賭博판의 生理와 같죠. 개미 投資者들은 收益을 내면 내는 대로, 잃으면 잃은 대로 株式市場을 못 떠납니다.

    그런 循環이 繼續되면 結局 돈을 버는 곳은 賣買를 仲介하고 手數料를 챙기는 證券社뿐이죠. 저는 1990年代 後半에 記錄的인, 아니 奇跡的인 收益率을 올렸습니다. 남이 想像도 못하는 收益率이었죠. 그리고 只今까지 每年 收益을 냈습니다. 적지 않은 돈을 벌었죠. 제가 計劃하는 어떤 일을 始作하는 데 必要한 돈을 마련한 거죠. 그러자 株式 投資에 興味가 사라졌고 自然스럽게 떠나게 됐습니다.”

    投資는 技術이 아니라 脈絡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株式 投資에서 발을 뺀 後) 이제야 收益을 낸 것이다. 그가 株式 投資를 접은 것은 더는 株式 投資로 돈을 벌 수 없다는 判斷 때문 아닐까.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그는 株式市場의 未來를 밝게 본다. “앞으로 株價指數는 5000포인트를 記錄할 것이고, 2012年까지 그 氣勢는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란 確信을 갖고 있다. 只今 다시 投資에 뛰어든다 해도 많은 收益을 낼 自信이 있다. 그러나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것이 株式에서 勝利하는 길”이란 믿음에 果敢하게 빠져나왔다. 勿論 株式과 金融市場에 對한 關心은 如前하지만.

    都大體 그는 얼마를 벌었을까. 그는 밝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額數가 一般人이 想像하는 金額보다 크다는 건 分明하다. 그 돈은 누가 뭐래도 그 自身이 努力해서 번 것이다. 그리고 自身이 이루고자 하는 어떤 計劃을 위한 밀알이 될 것이다. 그는 왜 株式에 關心을 갖게 됐을까.

    “저는 鈍才입니다. 外科專門醫가 되기 위해 죽기 살기로 工夫했지요. 제가 한 努力은 正말 엄청났습니다. 醫大 時節 제 成跡은 잠 안 자가며 工夫해도 겨우 中間에 머물렀습니다. 最高의 外科醫師가 되기는 틀렸구나 생각했죠. 그래도 意味 있는 사람은 되고 싶었습니다. 本科 1學年 때 先進 醫學을 工夫하기 위해 ‘타임’과 ‘이코노미스트’의 醫學 코너를 讀解하는 ‘메디칼 잉글리시’ 科目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醫學 分野만 읽고 버리기 아까워 이것저것 훑어보니 金融과 株式 投資를 比重 있게 다루고 있더군요. 當時 美國이 證市 活況이었는데, 10~20年 後에는 우리나라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工夫를 始作했죠. 똑똑한 親舊가 너무 많은 醫學에 비하면 當時만 해도 눈여겨보는 이가 드문 이 分野를 工夫한다면 勝算이 있겠다 싶었어요. 그때부터 外國에 나가는 先輩나 親知들에게 付託해 冊을 求해 보며 工夫를 始作했습니다.”

    20年 前, 그는 그렇게 다른 길을 準備했다. 요즘 말로 블루오션을 찾아낸 것이다. 애널리스트니 펀드니 하는 用語조차 生疏하던 때였으니 어지간한 專門家보다 일찍 株式 工夫를 始作한 셈이다.

    “大學 卒業 後 인턴을 하면서 株式 投資를 始作했는데, 10年 동안 失敗의 쓴맛만 봤습니다. 10年을 깨지고 나서야 잘못을 알았죠. 透明하지 않은 韓國 企業에 投資하면서 美國式 投資論을 適用했으니 깨지지 않는 게 異常한 거죠. 1990年代 中盤부터 投資 方法을 바꾸면서 숨筒이 틔기 始作했습니다. 그 무렵 外換危機를 豫見하는 글을 썼고, 그 豫測이 맞아떨어지면서 有名稅를 타 各種 株式 사이트에 글을 올렸습니다. 1990年代 後半의 大活況, 2002年의 暴落, 그리고 2005年부터의 上昇 等 證市 흐름의 脈絡을 잡는 豫測들이 다 맞아떨어졌죠. 그 時節 正말 熱心히 글을 썼는데, 제가 마치 禿수리 5兄弟라도 된 氣分이었습니다. 市場에서 늘常 깨지기만 하는 개미 投資者들을 지켜야 한다는 正義感 같은 게 있었어요.”

    株式市場에서 개미 投資者는 外國人이나 機關投資家들과 맞붙어 收益을 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一般人 사이에 間接投資 商品이 人氣를 끄는 理由도 여기에 있다. 이젠 個人의 時代가 아니다.

    “一般 投資者들은 ‘現實의 缺乏’을 株式 投資에서 채우려 합니다. 그런데 株式市場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죠. 剩餘를 가지고 投資해야 餘裕가 생깁니다. 出發이 잘못되다 보니 躁急해지고 자꾸 허방을 밟는 거죠. 그래서 原則 없는 投資의 惡循環이 反復됩니다.”

    그가 생각하는 投資의 原則은 무엇일까. 巨創하게 原論的인 株式 工夫를 하자는 것은 아니고, 只今 當場 市場에서 勝利하는 法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個人投資者들이 눈여겨볼 만한 種目이 무엇인지 물었다.

    土地는 投資 對象 아니다

    “投資는 技術이 아니라 脈絡입니다. 큰 흐름을 좇아야 해요. 1990年代 後半의 好況期는 꿈의 時代였습니다. 꿈과 벤처精神이 支配하던 코스닥에서 엄청난 收益이 發生했죠. 2003年부터는 低評價 바람이 불어닥쳤습니다. 그러자 價値株들이 注目을 받았어요. 조선주와 證券株처럼 低評價된 會社의 株式들이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2007年부터는 再評價의 時代가 왔습니다. 거품이 꺼지고 市場에서 꿈과 希望을 가진 種目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始作한 것이죠. 그리고 只今은 돈의 時代입니다. 生産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 돈을 벌어주는 時代가 됐습니다. 投資金融 쪽이 有望하다고 봐요. 이와 더불어 에너지, 바이오, 環境, 레저, 엔터테인먼트가 市場의 主導株가 될 것입니다. 攻擊的인 投資者라면 2008~2012年까지 市場을 主導할 바이오를 推薦하고, 保守的인 投資者라면 그동안 제대로 評價받지 못한 通信과 電力에 逆發想 投資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는 株式 投資를 접었지만 自身의 豫測과 市場 흐름이 맞아떨어지는지 確認할 마지막 포트폴리오는 維持하고 있다. 그가 남겨둔 最後의 種目은 LG生命科學, 韓國電力, KT, 현대중공업, 三星證券, SK케미칼 等이다. 현대중공업은 너무 올라서 얼마 前에 處分했는데, SK케미칼도 곧 處分할 計劃이다. 目標收益率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2012年까지 保有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가파르게 올랐다. 다른 種目들도 可能하면 오랫동안 가져갈 種目들이다. 한마디로 ‘10年 後에도 亡하지 않을 企業’들이다. 勿論 配當도 考慮했다.

    株式 外에 그가 保有한 資産은 額數를 밝힐 수 없는 現金, 親舊와 同業하는 病院, 安東에 있는 詩가 1億5000萬원짜리 221.5m2(67坪) 아파트, 꿈을 이루는 데 必要한 若干의 不動産(投資 目的이 絶對 아닌)이다. 投資의 鬼才인 그는 不動産에 投資해 收益을 낸 적이 없다. 韓國에서 가장 빨리 돈 버는 方法이 不動産이었다는 點에서 疑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不動産 景氣를 豫測하는 글도 썼습니다. 오히려 株式보다 더 正確하고 銳利한 境遇가 많았죠. 1990年代 後半 盤浦 再建築 아파트나 京畿 坡州 北部 地域의 價格 暴騰도 제가 가장 먼저 豫測했어요. 그런데 不動産은 合目的性이 없습니다. 個人的으로 땅은 公共財라는 생각이 剛하기 때문에 땅을 통해 富를 蓄積한다는 것에 拒否感이 있습니다. 땅은 누군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이고 다시 後孫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저는 市場原理主義者입니다. 그러나 땅만큼은 政府가 나서서 統制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土地公槪念을 支持합니다.”

    스무 살의 約束과 마흔의 꿈

    代辯人 자리를 떠난 朴氏는 홀가분해 보였다. 그의 人生에 豫期치 않게 끼어든 3個月. 그는 그 空白을 미뤄둔 講演計劃과 執筆 日程으로 채울 豫定이다. 患者들이 기다리는 安東의 診療室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겐 가장 幸福한 일이다. 代辯人의 마이크보다는 外科醫師의 메스가 그에겐 더 便安하다.

    朴氏가 故鄕 安東의 ‘시골醫師’가 된 데는 또 다른 事緣이 있다. 故鄕에 터를 잡기 前 그는 大田 예수病院 外科課長을 지냈고, 大田에서 中央성심外科를 開業해 진료했다. 그 病院은 하루 500名의 患者를 볼 만큼 門前成市였다. 5年 동안 病院을 運營하면서 診療 回數에서 議員으로는 全國 8位, 醫師 個人으로는 3位를 記錄했다.

    “故鄕 親舊와의 約束 때문이었죠. 學校는 달랐지만 둘 다 醫大를 갔습니다. 醫大에 進學한 後 처음 만났을 때 스무 살의 靑春 둘이서 ‘우리 나중에 마흔이 되면 故鄕에서 함께 病院하면서 재미있게 살자’고 덜컥 約束을 해버렸습니다. 그때는 別생각 없이 한 말인데, 해를 거듭할수록 그 約束은 至上命令처럼 굳어져갔습니다. 그래서 計劃보다 빠른 서른여덟에 같이 安東에 病院을 냈습니다.”

    그렇게 安東에 터를 잡고 다섯 해가 지났다. 그 期間에 朴氏는 有名人이 됐다. 그러나 自身이 醫師라는 事實을 한時도 잊지 않는다.

    “제가 하는 여러 가지 일 中에 하나만 擇하라면 當然히 醫師를 擇할 겁니다. 저는 많은 죽음을 目睹했습니다. 그렇기에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感謝하고 幸福한지 압니다. 가끔 제가 살아 있다는 事實이 진저리 치도록 幸福할 때가 있습니다. 醫師가 아니었다면 깨달을 수 없는 眞理지요.”

    그가 얘기하는 죽음 中에는 마흔아홉 젊은 나이에 世上을 등진 아버지의 죽음도 包含돼 있다.

    “제겐 目標가 없습니다. 49歲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精神的 强迫이 밀려옵니다. 아무것도 準備해놓지 않은 채 어머니와 子息을 남겨놓고 떠나는 家長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남겨진 家族 걱정에 눈을 감는 것이 속 터지도록 답답했을 것입니다. 나도 아버지처럼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면 어떡하나…그래서 無條件 熱心히 살았습니다. 무슨 目標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準備를 해두고 싶었을 따름이지요.”

    目標가 없다고는 했지만 그에겐 ‘可能하면 이루고 싶은’ 計劃이 있다. 株式 投資로 적지 않은 돈을 모은 것도 이루고픈 두 가지 計劃 때문이었다.

    “‘개川에서 龍 만들기 프로젝트’라 이름 붙일 수 있는 奬學財團 事業이 첫 番째 꿈입니다. 저는 課外가 禁止된 時代에 태어났기에 개川에서 이무기라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時代엔 개川에서 龍이 나지 않습니다. 삶의 隔差가 곧 꿈의 隔差가 돼버렸다고 할까요. 家庭 形便 때문에 工夫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마음껏 工夫할 수 있는 與件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3年 前부터 全國의 學生들을 불러 2泊3日間 安東 宗家집에서 宿食시키며 講演과 講義 프로그램을 示範的으로 實施하고 있습니다.

    두 番째는 障礙人 再活施設을 만드는 것입니다. 重症 障礙人은 國家가 어느 程度 도움을 주고 있고, 輕症 障礙人은 他人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輕症과 重症 사이에 있는 사람들과 가벼운 精神遲滯障礙人들은 制度의 死角地帶에 있죠. 再活에 조금만 神經 써주면 이들도 社會의 一員으로 설 수 있어요. 언덕 위로 올려다주면 加速度가 붙어 달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위한 施設을 짓고 싶습니다.”

    ‘醫師 박경철’에게 診療가 빼놓을 수 없는 日常이듯 ‘作家 박경철’에게는 每日 글을 읽고 쓰는 일이 거를 수 없는 宿命이다. 그는 말 그대로 “冊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고, 글을 쓰지 않으면 마음에 平和가 오지 않는다”고 한다.

    少年, 圖書館 冊을 모두 읽다!

    “文學少女였던 어머니 德에 警察官 아버지의 薄俸에도 집에 冊이 많았습니다. 다른 어머니들은 工夫하라고 잔소리할 때 저희 어머니는 冊 읽는 雰圍氣를 만들어주셨죠. 初等學校 6學年 때 大邱로 轉學을 갔습니다. 그때는 시골에서 工夫 좀 한다는 애들은 다 그랬죠. 그런데 何必 轉學을 간 洞네가 大邱에서도 富者洞네로 손꼽던 곳이었습니다. 같은 班 親舊 집에 놀러갔는데, 우리 집과는 比較할 수도 없을 만큼 冊이 房안 가득했죠. 머리를 꽝 때리는 文化衝擊을 받았죠. 그 後 冊을 耽讀하기 始作했습니다. 中學校에 入學했는데, 高等學校와 같이 있는 學校였습니다. 圖書館에 冊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冊을 中學校 3年 동안 다 읽었습니다. 授業만 끝나면 圖書館에 달려가 밤 12時까지 冊을 읽었죠. 저의 指摘 放浪은 그때부터 始作됐습니다.”

    光跡이다 싶은 讀書 習慣은 只今도 如前해 손에서 冊을 놓을 줄 모른다. ‘TV 冊을 말하다’는 프로그램의 固定 패널로 出演하기도 했다.

    “나쁘게 말하면 趣向이 없고, 좋게 말하면 걸림이 없습니다.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저의 讀書遍歷을 ‘疾患’이라고까지 합니다. 그런 제게도 冊을 選定하는 基準은 있습니다. 時間 때우기로는 읽지 않는다는 겁니다. 재미로 冊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어요. 재미로 따지자면 冊 읽는 것보다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뭔가를 얻기 위한 讀書習慣이 必要합니다. 저의 境遇엔 마조히스트的(피加虐的)인 글 읽기를 하는 便입니다. 제가 보기에 좀 버거운 冊을 고르는 거죠. 그렇게 漸漸 難解한 冊을 읽다 보면 知的 欲求들이 解消되고 世上을 보는 눈도 커집니다.”

    無味乾燥한, 그러나 眞正 幸福한

    지치지 않는 知的 欲求(光跡인 讀書)는 그에게 또 다른 才能을 膳賜했다. 글 쓰는 재주다. 高等學校 2學年 때 全國 規模의 創作大會에서 小說 部門 壯元을 차지하기도 했다. 쓰고자 하는 欲望을 抑制할 수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每日 글을 쓴다. 이미 여러 卷의 冊이 世上에 나왔고, 베스트셀러가 됐다. 只今껏 그가 만나온 小市民들의 모습을 投影한 에세이도 곧 나온다. 또한 올해 안에 두세 卷의 經濟 에세이와 自己啓發書를 出版할 豫定이다. 平素에 써놓은 글들을 간추리고 다듬는 過程만 남았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에게 電話가 걸려왔다. 原稿 督促 電話에서 親舊 어머니가 危篤하다는 電話, 醫協 關聯 電話, 마흔에 얻은 늦둥이 딸의 電話까지 隨時로 벨이 울렸다. 세 살배기 딸의 電話를 받았을 때는 눈에 띄게 얼굴이 환해지며 ‘닭살 아빠’가 됐다. 大學 時節 醫大 同期同窓으로 만나 結婚한 아내도 家庭醫學科 專門醫로 安東에서 患者들을 본다.

    그는 무척 바쁘고 多才多能하다. 한 사람이 그 모든 일을 한다는 게 可能한지 疑問이 들 程度다. 그는 술, 담배, 女子, 賭博, 골프에 時間 빼앗길 일이 없어 無味乾燥한, 그러나 眞正으로 幸福한 사람이었다.

    “願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 일도 娛樂이 됩니다. 밥벌이가 아니라 眞正 내가 願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는 幸福합니다. 그래서 힘든 줄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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