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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軍部-改革派 파워게임으로 본 ‘南北頂上會談 以後’|新東亞

北 軍部-改革派 파워게임으로 본 ‘南北頂上會談 以後’

‘돈줄’ 確保한 改革派, ‘核으로 國防力 完成’ 名分으로 軍縮 나설 듯

  • 이영화 日本 간사이(關西)大 敎授·經濟學

    入力 2007-11-10 15: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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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北頂上會談을 통해 다양한 經濟協力을 約束한 김정일 北韓 國防委員長은 只今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平壤은 果然 國際社會의 正常的인 一員으로 나서겠다는 ‘最終 結論’을 내린 것일까.북한의 向後 國家戰略을 展望하는 글을 紹介한다. 先軍政治가 公式化한 以來 數年 동안 北韓 政策決定 그룹 內部에서 國防力 强化를 主張하는 勢力과 經濟改革을 主張하는 勢力 間의 對立이 이어져왔다는 흥미로운 視角이다. 特히 지난해 核實驗을 통해 ‘國防力 强化’가 完成됐으므로 앞으로는 軍需工業에 投入하던 莫大한 豫算을 減縮해 生活經濟 分野에 投入할 것이라는 消息은 注目할 만하다. 筆者인 이영화 敎授는 在日僑胞 3歲로 朝總聯에서 오래 活動하다 1991年 平壤 留學中 北韓의 實相에 衝擊을 받고 轉向, 市民團體 ‘RENK(北韓民衆救出緊急行動네트워크)’를 結成했다. 以後 이 敎授는 RENK 活動을 통해 確保한 北韓 資料를 바탕으로 平壤 內部狀況 變動을 꾸준히 追跡해왔다.
     


    北 군부-개혁파 파워게임으로 본 ‘남북정상회담 이후’

    咸鏡北道 淸津에 所在한 北韓 最大의 製鐵所 金策聯合企業所. 南北이 頂上會談 開催에 合意한 直後인 8月6日, ‘朝鮮中央通信’은 김정일 國防委員長이 이 製鐵所를 現地指導했다고 報道했다.

    “노무현 大統領에게 대단히 感謝하고 있다. (이番 南北頂上會談에서) 그가 遂行한 功績이 크다.”

    김정일 國防委員長의 말도, 朝總聯 幹部의 發言도 아니다. 某(某) 國家의 情報機關 關係者가 이番 頂上會談에 關해서 吐露한 率直한 所懷다. 金 委員長의 健康李相卨이 여러 經路로 흘러나오는 狀況에서, 盧 大統領이 關聯國들을 代表해 7年 만에 平壤을 ‘文陣(問診) 訪問’한 것에 感謝한다는 뜻이었다. 金 委員長의 健康狀態는 TV 生中繼 映像을 통해 世界에 打電됐고, 各國 情報機關은 이를 細密하게 觀察할 수 있었다. 周邊國들이 金 委員長의 健康 問題에 얼마나 깊은 關心을 기울이고 있는지 보여주는 逸話다.

    當然한 일이다. 北韓은 只今 김정일 體制의 生存을 건 經濟再建과 全方位 外交의 推進, ‘善君(先軍)政治’에서 ‘선경(先經)政治’로의 轉換이라는 重大한 岐路에 서 있다. 바꿔 말하면 나비가 번데기에서 脫皮하는 瞬間처럼 留約하고 危險한 狀態에 놓여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體制의 核心인 金 委員長의 健康狀態나 判斷力에 물음標가 붙는다면 關係國 當局者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北韓 問題의 全體的인 軟着陸’이라는 시나리오는 瞬息間에 白紙로 돌아갈 수 있다.

    이番 頂上會談에서 金 委員長이 ‘改革開放’이라는 말에 强하게 反撥했다고 報道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單純히 表現上의 問題일 뿐, 이를 根據로 北韓이 經濟再建을 抛棄했다고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中國을 흉내 내어 ‘北韓式 社會主義’라고 부르건 或은 새로운 用語를 만들어내건, 長期的으로 北韓이 經濟改革과 對外開放을 課題로 設定하지 않는 한 體制의 生存은 이미 不可能해졌다.



    이 글에서 說明할 內容은, 김정일 委員長이 그間의 優柔不斷과 迂餘曲折 끝에 드디어 本格的인 經濟改革에 키를 맞추기로 決心하게 되는 一連의 過程이다. 7年 만에 南北頂上會談이 實現된 것은 그 徵標 가운데 하나다. 이는 北韓의 向後 行步를 가늠하는 根據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盧 大統領을 마중 나간 金 委員長의 기울어진 姿勢가 象徵하는 것처럼, 改革開放을 向한 北韓의 발걸음 亦是 아직 不安定하기만 하다.

    ‘先軍政治’는 絶對的인가

    잘 알려진 것처럼 ‘先軍政治’는 全 分野에서 君을 最優先視하는 特異한 統治形態다. 公式的인 始作은 1999年 6月로, 이는 대포동 미사일 發射試驗의 다음해이자 未曾有의 大飢饉이 한창이던 무렵이었다. 形式的으로 先軍政治는 現在도 進行 中이지만, 筆者의 생각은 다르다. 先軍政治는 始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00年 2月頃부터 이미 흔들리기 始作했으며, 이 過程에서 이른바 ‘先軍派’와 ‘改革派’의 摩擦이 싹트게 됐다고 判斷한다.

    1人 獨裁體制 國家에서 深刻한 路線鬪爭이나 派閥對立은 存在할 수 없다고 보는 傾向이 있다. 勿論 이들 모두가 김정일 體制를 守護한다는 目標에 對해서는 굳건히 團結하고 있고, 自主國防이라는 國試(國是)에 理論(異論)을 提起하는 勢力은 없다. 그러나 같은 目標를 大前提로 하고 나서, 그 實際的인 經濟運營에 關해서는 김정일 體制下에서도 論爭이 發生할 餘地가 있다.

    先軍波와 改革派, 두 勢力은 經濟 運營方式을 爭點으로 對立했다. 對立의 局面은 國際政治的인 外部要因 때문에 잦은 攻守 交代가 繼續돼왔고, 金 委員長은 두 派閥의 激突 때문에 權力 中樞에 龜裂이 생기는 狀況을 避하려고 調整하는 일에 腐心해온 것으로 보인다.

    北韓 內部의 國家戰略·政策 決定構圖를 이와 같은 틀로 把握하는 것은 筆者뿐이 아니다. 美國 國務部에서 情報調査局(INR) 北韓分析管을 지낸 로버트 칼린과 北韓擔當官을 歷任한 조엘 위트는 지난해 ‘北韓의 改革(North Korean Reform)’이라는 共同著述을 내놓은 바 있다. 두 사람은 이 冊을 통해 筆者와는 다른 方法으로 같은 結論에 到達하고 있다. 筆者가 RENK 活動을 통해 確保한 北韓의 非公開 文書나 報告書 等을 基礎로 한다면, 칼린과 위트는 北韓 公開刊行 文獻의 行間을 읽어 김정일 政權이 着實하게 經濟改革에 키를 맞춰가고 있다고 確認한다.

    이와 함께, 지난 6月 筆者는 平壤에 代表部를 둔 한 EU 國家 北韓擔當 大使와 意見을 交換할 수 있는 機會를 얻었다. 特히 先軍波와 改革派 사이의 爭點이 主로 ‘經濟改革의 速度’ 問題에 있다고 보는 側面에서 그와 筆者의 생각이 一致했다. 두 派閥의 對立線이 各 國家組織을 가로지르면서 進行 中이고, 50臺를 境界로 하는 世代間 對立의 色彩도 짙다는 點도 마찬가지였다.

    以上의 內容을 綜合해보면, 迂餘曲折로 點綴된 先軍波와 改革派의 對立, 葛藤은 다음과 같은 展開過程을 걸어왔다.

    [第1期] 先軍政治의 全盛期 (1998年 後半~2000年 初)

    1994年 제네바에서 1次 核 危機에 關한 北美間 合意가 이뤄진 直後 김일성 主席은 急死하고 大飢饉과 大量 脫北이 發生하기 始作했다. 이러한 國內 事情의 急變에 따라 김정일 委員長이 一種의 緊急 避難冊으로 始作하게 된 것이 바로 ‘先軍政治’다. 長距離 彈道미사일 대포동1號 發射를 信號로 人民軍은 勞動黨으로부터 核開發 主導權까지 强制로 빼앗았고, 이 무렵 郡守部門의 經濟的 比重은 急激히 높아지기 始作했다.

    그러나, 或은 바로 그랬기 때문에 國民經濟는 오히려 疲弊해질 수밖에 없었다. 特히 飢饉의 進行은 막을 수 없었고, 이러한 흐름이 도리어 軍需産業에까지 深刻한 惡影響을 끼치기에 이르렀다. 이 時期부터 이미 先軍政治의 限界가 나타나기 始作한 것이다.

    [第2期] 改革派의 誕生과 공세기 (2000年 初~2002年 年末)

    飢饉事態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緊急課題에 對處하기 위해 김정일 政權은 住民이 自然發生的으로 擴大시켜온 暗市場을 公認하는 方向으로 움직인다. 이것이 改革派가 跳躍하는 決定的인 契機가 됐다. 2000年 初 ‘政治强國, 軍事强國은 이미 達成’ ‘數年 內에 經濟强國을 目標로 한다’는 改革派의 政策目標가 登場한다(‘조선중앙통신’ 2月3日). 이러한 情勢認識에는 1994年 北美 合意가 招來한 韓半島 情勢의 大幅的인 緊張緩和가 밑받침하고 있었다.

    2000年 6月 南北頂上會談과 같은 해 10月 매들린 올브라이트 美 國務長官의 訪北을 사이에 두고, 김정일 委員長은 半 年 동안 두 番에 걸쳐 中國을 訪問했다(2000년 5月과 2001年 1月). 金 委員長 自身이 先軍政治下에서 經濟를 改革하기 위해 길을 닦는 것으로 解釋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이때를 즈음해 改革派는 氣勢를 올렸고 先軍파는 守勢로 돌아선다. 새로 들어선 부시 行政府의 2002年 2月 ‘惡의 軸’ 發言이 불러온 逆風 속에서도 改革派는 더욱 攻勢를 加한다.

    그 象徵的인 例가 市場經濟的 要素의 導入을 公式的으로 圖謀하는 2002年 7月의 ‘經濟管理改善措置’였다. 外部의 視角으로 보자면 이 措置는 賃金과 物價를 變更한 消極的인 改革에 不過하다. 그러나 先軍派가 優位를 占하던 當時의 北韓 狀況을 勘案하면 이는 매우 大膽한 挑戰이었다. 改革派에게 經濟管理改善措置는 다음 段階의 本格的 改革作業으로 履行하는 前哨戰이자 先軍派의 反應을 觀測하는 道具였다. 그리고 이를 爲해 外部環境을 갖추는 全方位 外交의 一環으로 그해 9月 고이즈미 日本 總理의 訪北이 成事됐다.

    바로 이 時點에서 先軍政治의 換骨奪胎가 始作된다. 主體思想 같은 看板은 決코 내리지 않았지만 그 變質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先軍政治와 經濟改革이 共存하는 不安定하고 微妙한 均衡狀態가 나타났다. 뒤에서 다시 說明하겠지만 제임스 켈리 美 國務部 次官補의 訪北으로 차디찬 바람이 불기 始作하는 渦中에도, ‘美國 以外에는 全世界가 (經濟改革을) 支持한다’ ‘經濟强國을 建設해야 한다’는 主張이 2002年 末까지 北韓 內部에서 繼續 이어진다. 그러나 그 울림은 이어진 國際情緖 惡化로 금세 虛無해지기에 이른다.

    [第3期] 先軍派의 反轉 공세기 (2003~2004年 여름)

    先軍派에게 大反擊의 契機를 提供한 것은 2002年 10月 켈리 次官補의 訪北이었다. 當時 켈리 次官補는 北韓이 1994年의 北美 合意를 違反하고 파키스탄에서 遠心分離器 試製品 20臺를 購入한 ‘事實’을 들이댔다. 이른바 ‘高濃縮 우라늄(HEU) 計劃’ 疑惑이 터져 나왔다.

    周知하다시피 이를 契機로 그間 形成된 平和 무드는 瞬息間에 끝이 났고, 이른바 ‘第2次 核 危機’가 불거졌다. 北美 對立 激化와 이라크戰爭 開戰으로 先軍派의 攻勢는 急激하게 水位를 높이기 始作했다. 核 危機 渦中에 日本人 拉致事件 協商이 膠着狀態에 빠지고 北日 國交正常化의 길이 完全히 멀어진 것 亦是 先軍派에게는 順風으로 作用했다.

    軍事費 支出 增大를 中止하고 重工業 部門을 民生經濟 分野로 徐徐히 轉換하고자 했던 改革派의 意圖는 이로써 挫折된다. ‘第2期’에서 두 派閥이 陰으로 陽으로 激烈하게 주고받던 神經戰, 卽 ‘重工業 軍需分野가 主導하는 經濟政策인가 消費財工業 민수分野가 主導하는 經濟政策인가’의 論爭은 先軍派의 勝利로 기운다. 恰似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에 가까운 社會主義 國家 特有의 오래된 ‘神學論爭’이었다.

    勿論 그렇다고 해서 김정일 委員長이 이제 막 署長을 연 ‘第2期’의 改革을 中途에 白紙化할 수는 없었다. 민수分野의 追加 縮小는 飢饉의 再發과 社會混亂을 招來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背景에서 誕生한 것이 ‘軍이 改革을 指導, 監督한다’는 一種의 妥協策이다. 軍部가 朴鳳柱를 內閣總理로 밀어올린 것(올해 失脚)은 그 象徵的 事件이었다.

    狀況이 이렇게 展開되자 改革派는 몸을 낮추고 再起할 機會를 엿보는 戰略을 擇할 수밖에 없었다. 先軍派가 願하는 만큼 軍需産業을 强化하기를, 卽 壁에 부딪힐 때까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기다리는 戰術’로 轉換했다. 그 具體的인 結果物이 新型 彈道미사일과 플루토늄型 核武器 開發 프로세스의 進行이었다. 여기에 高濃縮 우라늄이라는 ‘無理한 計劃’까지 덧붙여진다.

    [第4期] 改革派의 反擊機 (2004年 6月~2006年 10月)

    改革派가 豫測한 바대로, 民生部門을 희생시킨 郡守部門의 成長은 ‘第3期’에 이르러 深刻한 限界에 부딪힌다. ‘第2期’에 改革派가 實施한 暗市場의 公式化는 飢饉을 종식시켰다는 뚜렷한 效果가 있었다. 그러나 ‘第3期’가 提示한 經濟回復 基調는 ‘山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다’는 式의 겉치레뿐, 實際로는 飢饉 以前의 水準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水準이었다. 重工業 部門을 비롯해 工場과 企業所는 조금도 稼動되지 않았고, 從業員은 市場 露店商 等의 副業으로 어떻게든 生計를 維持해야 하는 狀態로 轉落했다. 工場과 企業所가 支給하는 給料는 從業員이 必要로 하는 最低生活費의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이른바 ‘布帳馬車 經濟’는 瞬息間에 成長의 限界에 到達했다. 全 國民이 露店商으로 살아가는 일이 可能할 理 萬無하다. 勝者와 敗者 사이의 隔差가 擴大될 뿐 아니라, 勝者 그룹에서 敗者 그룹으로 墜落하는 傾向도 顯著히 增加하기 始作했다. 經濟의 本格的인 改革開放 없이는 工業部門의 再生이 不可能하고, 國民生活의 維持·向上도 꾀할 수 없다는 反論이 꿈틀대기 始作했다. 工場과 企業所의 幹部를 包含한 大多數 國民이 ‘改革開放의 斷行’이라는 口號의 當爲性에 漸次 同意하기 始作했다.

    이 소리 없는 多數派의 輿論을 등에 업고, 改革派는 그 根據地인 內閣의 좁은 테두리를 넘어 黨과 軍에까지 勢力을 뻗치는 ‘組織을 가로지르는 勢力’으로 成長한다. 그 中心에 50代 以下 中堅 幹部들과 젊은 實務官僚들이 자리하고 있다.

    改革派는 餘勢를 몰아 김정일 委員長의 指示 아래 本格的인 經濟改革 計劃을 세우기 위해 움직였다. 2004年 6月 內閣에서 採擇됐으나 外部에는 公開되지 않은 ‘신경제發展方案’이 그 結果物이다(표 參照). 具體的인 內容을 들여다보면 一旦은 國防工業 優先論이나 穀物의 國家專賣制 等 旣存 北韓式 社會主義의 香辛料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는 先軍派의 反撥을 避하고자 하는 表面上의 讓步에 不過하고, 改革派의 主眼點은 産業과 貿易의 根本的인 構造改革에 맞춰져 있다. 從來 北韓이 推進해온 重工業 重視 路線을 事實上 抛棄하고, 勞動集約的 性格이 剛한 輕工業 部門에 積極的으로 外資를 導入하는 ‘輸出 志向型 經濟發展戰略’에 가깝다.

    이를 통해 드디어 그동안 大氣狀態에 머물러 있던 本格的인 改革作業이 ‘第1期’의 初步的 改革을 이어가는 手段으로 稼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改革案은 以後 3年이 넘도록 ‘소금에 절여진 狀態’로 잠들어 있었다. 改革派의 視角에서 보자면 이미 時期가 成熟했지만, 김정일 委員長의 視角에서는 아직 모자랐던 것이다.

    2005年 10月, 北韓 當局은 食糧配給制를 一部 부활시켜 北韓 專門家들을 놀라게 했다. 이 措置 하나만 보자면 無謀한 ‘隔世遺傳(隔世遺傳)’으로 解釋할 수밖에 없었고, 그 眞意를 疑心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그러나 筆者가 確保한 ‘신경제發展方案’ 文書를 보면 配給制 復活은 大規模 改革方案에서 極히 一部를 차지하는 한 項目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自給自足의 經濟土臺 構築’이나 ‘國防工業 于先’論과 마찬가지로 先軍派에 對한 一定 水準의 양보인 셈이다. 쉽게 말해 더 큰 利益을 노리고 일부러 내준 數라는 것이다.

    그리고 애初 豫想했던 대로, 復活한 配給制는 3個月도 되지 않아 徹底히 崩壞하고 만다. 全面的인 改革을 實施하지 않고서는 先軍派의 ‘復古主義的 趣味’도 만족시킬 수 없음을 實證的으로 보여주는 結果였다. 이를 통해 改革의 必要性을 깨닫게 하는 式이다.

    客觀的으로 보자면 先軍政治의 役割은 오래前에 壽命을 다했다. 그러나 北韓 內部의 主觀的 觀點에서 보자면 先軍派에게는 아직 이뤄야 할 使命이 남아 있었다. 先軍政治下에서 軍需産業이 成就한 結果를 誇示하는 事件이 바로 2006年 7月의 미사일 實驗과 10月의 核 實驗이다.

    核 實驗이 成功했느냐에 對해서는 評價가 엇갈리고 있지만, 軍部가 두 實驗을 敢行하지 않았다면 도리어 先軍政治의 幕을 내릴 수 없는 일이었다. 두 實驗을 통해 ‘自慰 國防力의 完成’이라는 結果를 公公然히 드러내야만 軍需産業에 投入돼온 莫大한 力量을 民需産業으로 돌릴 수 있는 名分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이영화 敎授가 入手한 北韓의 ‘신경제發展方案’(2004年 6月 內閣에서 採擇된 것으로 傳해짐)
    目標

    [1] 自給自足的인 物質經濟 土臺 構築

    [2] 前 住民의 福利 增進
    戰略的 原則

    [1] 北朝鮮式 經濟建設

    [2] 國防工業 于先, 農業·輕工業의 平行 發展

    [3] 科學技術 重視
    細部 政策改善案

    1. 經濟管理 改善 및 經濟管理機構의 縮小 : 內閣에 經濟諮問機構 新設

    ※ 企業活動의 獨自性 擴大

    ※ 銀行機構 整備 : 産業銀行 開設

    ※ 南北經濟協力 活用

    2. 生活必需品 穀物의 國家 專賣制 및 供給 擴大

    ※ 市場機構 擴大 : 計劃對象과 市場對象을 區分

    ※ 需要와 供給에 依한 價格決定

    3. 産業 現代化와 外資誘致를 통해서 産業經濟力 增加

    ※ 勞動集約 産業育成

    ※ 先進技術 投入


    앞으로도 繼續 先軍政治에 따른 軍需工業 優先政策을 펴 나가면 結局은 經濟破綻을 避할 수 없으리라는 展望 속에서, 김정일 委員長은 이라크戰의 수렁에 빠진 美國의 處地를 곁눈질로 지켜보며 實驗 强行을 裁可했다. 다만 유엔 經濟制裁를 招來할 것이 분명했던 만큼 核 實驗의 時期를 가을 收穫을 마친 直後로 選擇한 것은 눈여겨볼 必要가 있다. 北韓의 食糧事情이 經濟制裁를 가장 길게 견뎌낼 수 있는 時期였기 때문이다.

    外部의 視角으로 보자면 2006年의 미사일 發射와 核 實驗 强行은 改革開放 路線에 逆行하는 現象이다. 그러나 國內的으로는 先軍政治의 終焉을 알리는 ‘불꽃놀이’를 의미하고, 特히 改革派에는 先軍政治가 다 타버리기 直前에 一瞬間의 빛을 發하는 것으로 비쳤다.

    [第5期] 改革開放 政策으로의 轉換期 (2006年 가을~現在)

    미사일 發射 이틀 後부터 ‘勞動新聞’ 等 北韓의 公式媒體에는 ‘强盛大國의 餘名’이라는 새로운 單語가 頻繁하게 等한다. 한 가지 注目할 事實은 이 ‘强盛大國’이라는 用語가 改革派의 誕生기와 공세기에 密接하게 關聯되어 있다는 點이다. 1999年 가을 ‘第2期’ 直前에 ‘勞動新聞’은 “우리나라는 이미 ‘政治强國’과 ‘軍事强國’을 達成한 것으로, 남은 ‘經濟强國’을 達成하면 참된 强盛大國이 될 수 있다”는 內容의 論評을 실은 적이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經濟强國의 達成을 向해서 邁進한다’는, ‘第2期’의 改革方針을 暗示하는 文章이 바로 이어진다. 先軍政治 公式宣布로부터 不過 3個月 後의 일이다.

    돌이켜 보면 이는 이제 막 태어난 先軍政治에 死亡宣告를 내린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實狀 先軍파는 ‘第3期’의 反擊과 攻勢로 그 壽命을 大幅 延長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强盛大國’李 2006年의 미사일 發射로 ‘여명’을 맞이했다고 ‘勞動新聞’은 말한다. 餘名이란 轉換點이며, 强盛大國 實現의 最終 段階인 經濟强國의 建設로 政策目標가 옮겨가게 됐음을 의미한다.

    2006年 말에는 같은 脈絡의 또 다른 論評이 揭載된다. 核 實驗의 强行과 그에 따른 유엔 安保理 經濟制裁 等 多事多難했던 1年을 回顧하면서, ‘2006年은 餘名의 해’이며 ‘불타는 餘名은 2007年과 함께 絢爛한 새벽이 된다’고 쓴 것이다(2006년 12月31日子). 以後 北韓 勞動黨의 ‘新年辭’는 ‘經濟近代化’를 ‘國防力 强化’보다 앞에 내걸고 ‘經濟强國의 建設’을 力說했다. 先軍政治의 終焉과 經濟再建의 始作을 內外에 宣言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經濟再建에는 靑寫眞이 必要하다. ‘第4期’에 ‘소금에 절여진 狀態’가 됐던 ‘신경제發展方案’은 다시 테이블에 올라오게 될 것이다. 이 方案이 海外資本의 誘致를 통한 産業育成을 國家目標로 하는 限, 거기에 적합한 國際環境을 만드는 作業이야말로 北韓의 必須 不可缺한 國家課題가 된다. 具體的으로는 北美關係의 緊張狀態를 大幅 緩和해 테러支援局 指定 等을 解除하고, 유엔 安保理의 經濟制裁 決意를 撤回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지렛대로 北日關係 正常化를 圖謀해 賠償金을 받아 改革의 種子돈으로 使用하는 것이 그 最終目標가 된다.

    以上이 北韓 權力中樞 內部에서 展開돼온 先軍波와 改革派의 競爭과 對立社(史)다. 두 派閥의 對立은 수많은 迂餘曲折을 겪으면서도 지난해 末 暫定的인 結論을 낸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時期에 조지 W 부시 美 大統領은 行政府 內部의 네오콘을 退場시켰고 김정일 委員長은 先軍파를 눌렀다. 强勁한 新舊(新舊) 保守派 때문에 두 사람은 똑같이 비싼 代價를 치렀지만, 以後 美國의 新保守派와 北韓의 守舊派가 서로 ‘敵對的으로 依存하는’ 奇妙하면서도 非生産的인 構圖는 사라졌다. 그 可視的인 徵標가 最近의 北美 關係의 急進展임은 두말할 必要가 없을 것이다.

    “軍事費 5% 削減해 人民經濟로 轉換”

    外部의 視線으로 보면 北韓 內部는 不分明하기 이를 데 없지만, RENK를 통해 入手된 內部 情報들은 興味로운 示唆點을 던져주곤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올해 1月 北美 베를린 會同과 2月의 5次 6者會談 사이에 일어난 두 事件이다.

    올해 1月 넷째 週, 조선노동당은 全國 規模로 職場集會를 開催했다. 이 자리에서 黨 幹部들은 參加者들에게 “核 保有 德澤으로 올해는 軍事費를 5% 削減할 수 있다. 그 몫을 人民生活에 돌려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니까 期待하라”는 內容을 講義한 것으로 傳해진다. 具體的인 數値까지 들어가면서 軍縮豫算을 豪言한다는 건 金 委員長의 裁可 없이는 不可能한 曲藝行爲다. 더욱이 幹部들은 “올해는 (北韓 最大의) 金策製鐵所를 始作으로 大規模 企業所를 順次的으로 再稼動할 것”이라고 公言하기도 했다.

    비슷한 時期인 1月20日부터 2週日 동안 金 委員長은 金策製鐵所가 있는 咸鏡北道에 現地指導를 나간다. 주욱 늘어선 도(道) 幹部와 金策製鐵所 經營幹部들 앞에서 金 委員長은 意味深長한 發言을 남긴 것으로 傳해진다. ‘年末에는 좋은 消息이 傳해질 것이기 때문에’ 各種 企業所의 再稼動을 準備하라고 督促한 것이다.

    이 發言이 北美間 對立에 突破口를 마련한 베를린 會同 直後에 나왔다는 事實은 特히 注目할 必要가 있다. 會同에서 合意된 結果가 金 委員長에게 向後 1年間의 狀況展開를 樂觀的으로 展望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最近 論議되는 北韓의 테러 支援國 解除와 南北間의 輕俠 合意가 ‘樂觀的 展望’ 속에 들어 있는 ‘年末의 좋은 消息’이라고 解釋한다면 果然 無理일까.

    勿論 反對되는 움직임도 있다. 經濟活動의 統制 强化나 脫北者에 對한 集中 團束 等이 그것이다. 特히 軍部의 動向을 注目할 必要가 있다. 7月13日 人民軍이 ‘北美 軍事會談’ 開催를 要求하고 나선 것이 그 한 徵候다. 이에 對해서는 두 가지로 解釋할 수 있다. 하나는 앞으로 展開될 平和體制 協議에서 北韓이 主導權을 쥐기 爲한 布石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北韓과 美國의 急速한 接近을 妨害하기 위한 先軍派의 策動이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 前者는 核心에서 벗어나 있다. 言論에서 指摘하는 것처럼 北美 協商이나 6者會談이 北韓 主導로 展開되고 있는 것은 事實이지만, 金 委員長이 經濟再建을 서두를 생각이라면 이는 나쁜 사인이 아니다. 오히려 核 問題의 進展이 빨라질 수 있다.

    問題는 後者의 境遇다. 改革을 妨害하기 위해 先軍派가 움직이기 始作했다면 核 問題 等의 進展은 늦어질 수밖에 없고, ‘第5期’에서 ‘第4期’로 後退하는 狀況이 올 수도 있다. 다만 筆者 個人的으로는, 軍部의 眞意는 ‘改革을 막는 것’이 아니라 ‘改革의 主導權을 獲得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쉽게 말해 改革派와 벌이는 利權다툼에 가깝다는 것이다. ‘先軍政治의 復活’이라는 非現實的인 夢想보다는 實力集團으로서 威力을 發揮해 北美 協商과 北日 協商 過程에 끼어들고, 軍服을 紳士服으로 갈아입어 改革의 利權과 開放의 열매를 차지하려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健康異常說의 아이러니

    또 한 가지 살펴봐야 할 爭點이 이른바 後繼者 問題다. 이 亦是 經濟改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事案이다. 外部 言論媒體들은 이 問題를 떠들썩하게 다루지만, 정작 北韓 內에서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 北韓側 人士들은 김정일 委員長이 “70歲가 될 때까지는 後繼者를 決定하지 않겠다”며 後繼論議를 向後 5年間 封鎖했다고 傳한다. 누가 後繼者가 되건, 以後의 權力體制가 어떻게 構成되건, 一旦 ‘經濟改革의 向方을 確認한 後에’ 決定하겠다는 게 金 委員長의 本心이 아닐까 한다.

    北 군부-개혁파 파워게임으로 본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영화

    1954年 日本 오사카 出生 (在日 僑胞 3歲)

    간사이대 經濟學部 卒業, 同 大學院 博士課程 修了(經濟學)

    1991年 北韓 朝鮮社會科學院 遊學

    1993年 RENK(北韓民衆救出 緊急行動네트워크) 結成

    現 간사이대 敎授, 北韓社會 經濟論 講義


    흔히 本格的인 經濟改革에는 强力한 指導者, 卽 이른바 ‘開發獨裁’가 必要하다고들 하지만, 그게 全部는 아니다. 金 委員長이 改革을 두고 달팽이 걸음을 걸으며 優柔不斷한 面貌를 보인 것은 基本的으로 그의 權力이 世襲政權이기 때문이다. 後繼 推戴는 必然的으로 論功行賞을 불러오고, 이는 權力 內部의 對立과 指導力 缺如를 招來하는 原因으로 作用하게 마련이다. 現在 局面에서 後繼 世襲이 進行될 境遇 改革派에게는 도리어 惡材가 될 可能性이 크다.

    앞으로도 經濟改革의 速度나 範圍를 둘러싸고 對立이 再演될 素地가 있고, 特히 이番 頂上會談에서 決定된 大規模 經濟協力事業은 派閥 사이에서 經濟的 利權을 둘러싼 對立의 불씨로 作用할 수 있다. 南北關係는 까다로운 課題다. 經濟協力 問題만 해도 單線的으로 進行되는 境遇는 없다. 이 까다로운 過程 속에서 先軍과 改革의 軋轢을 調整해 나갈 수 있는 것은 現在로서는 金 委員長뿐이다. ‘偉大한 獨裁者’의 健康以上이 北韓 內 改革派에게 分明 凶報(凶報)가 되리라는 事實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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